메마른 바다 - 상 메마른 바다 By Hippocampus 보라색 구름 사이의 태양이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바다는 사방을 둘러봐도 똑같은 풍경.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붉게 물든 하늘과 바다의 경계마저 희미해진다. 위 아래의 구별도 없고 좌우 앞뒤의 풍경도 모두 똑같아 마치 사방을 둘러싼 수평선에 갇혀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다만 수평선에 반쯤 걸친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만이 이 혼란스러운 공간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바다. 너무나도 넓은 바다. 그 살아있는 대지 위에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섬도 아니요, 배도 아닌, 작은 바위 하나가 삐죽 솟아나와 있는 것이었다. 풀은 고사하고 이끼조차 끼어있지 않는 그 메마른 바위 위에 17~18세 가량의 한 소년이 한쪽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있었다. 대해 위에 소년이라니, 엄청난 이질감이 들었다. 그러나 소년은 주위와의 괴리감에 아랑곳없이 무릎에 한쪽 턱을 괴고 자신의 발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는 별로 높지도, 크지도 않아서 소년이 늘어뜨린 한쪽 발은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바다에 닿을 듯 가까웠다. 바다는 어디를 봐도 똑같은 풍경이었고 소년에게서 별 움직임은 없었다. 무엇을 그렇게 보는 것인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에 잠긴 우울한 표정의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 소년은 나였다. 나는 그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등을 구부린 채 하염없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그런데 이것은 바다가 맞는 걸까. 자세히 보면 아무리 석양에 물들었다지만 지나치게 붉다. 지나치게 선명한 다홍색, 아니, 붉은색? 진홍색? 아니다. 석양에 물들어서 붉게 보이는 게 아니라 바다 자체가 붉은 것이다. 성분 또한 물이 아니다. 물보다는 점액질의, 오히려 젤리에 가까운 점성을 띠는 이것은 엄밀히 말해 바다가 아니다. 수면은 투명한 다홍색으로 빛났고 더 깊어지면 심연 같은 진홍을 띠는 불가사의한 액체였다. 파도도 없다, 해류도 없다. 붉은빛 젤라틴 같은 그것은 단지 미약한 흐름만을 보이며 마치 바다인 양 수평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상한 바다다. 그렇다면 바위 위의 나는 이 진홍의 바다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저렇게 하염없이. 왜 저렇게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바다 속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시선을 따라 바위 아래 수면 속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단지 붉은 색의 바다였지만 가만히 바라보니 그 아래에서 어떤 영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면에 동심원이 그려지면서 익숙한 모습이 비춰진다. 그것은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진유현의 얼굴이었다. "콜라 두 캔이랑 크림빵 세 개만 사와" "껌도 같이 사오고" "아, 크림빵 세 개가 아니라 네 개. 김밥도 한 줄 사와야겠다." 윤승호는 작은 메모지에 뭔가 열심히 적더니 아이들이 내민 동전들을 받으러 손을 뻗었다. --땡그랑.땡.땡땡땡... 오백 원짜리와 백 원짜리가 섞인 동전은 넉 잡아 스무 개는 넘어 보였다. 교실바닥을 시끄럽게 울리며 굴러가는 동전들을 보고 당황한 승호는 허둥대며 떨어진 동전들을 주우러 다녔다. "아,씨발, 뭐야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받아? 쉬는 시간 안에 못 사오면 뒈질 줄 알아." 한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비웃음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는 동전을 흘린 것이 고의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다. 어떤 때는 십 원짜리를 던져주며 심부름을 시킬 때도 있었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한 승호는 열심히 동전만 줍고 있었다. 동전을 줍다가 문득 한 쌍의 다리가 시야를 막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경멸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는 반장 진유현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거지 같잖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내뱉고는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소리에 오세준과 그 패거리들이 일제히 웃는다. "맞아 맞아, 딱 거지네 거지." "기어 다니면서 돈 줍는 꼴이 꼭 병신 같다 야." 윤승호는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가슴이 시려오는 게 느껴졌다.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내 돈으로 사올게." 하고 황급히 교실을 나가려고 했으나 패거리 중 한 명이 못 가게 막는다. "새꺄 우리가 거진 줄 알아? 니 돈으로 산 거 안 먹어. 돈 줬으니까 그걸로 사오라구. 씨발 쉬는 시간 다 가잖아. 빨리 하지 못해?" 승호는 그 소리에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반 아이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유독 날카롭게 쳐다보는 건 김제하와 부반장. 그 둘이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창피해서 죽을 거 같은데 시간은 자꾸 가고 동전들은 흩어져서 어디로 굴러 갔는지도 모른다. 매일 창피를 당하고 시도 때도 없는 구박과 조롱에 자존심은 남아 나질 않았다. 더 이상 상처 받을 자존심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덜너덜해진 가슴은 아직도 아픔을 느낀다. 차라리 돈을 원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진유현이 교실 내에서의 폭력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윤승호를 장난감 삼으며 놀려먹는 재미로 오세준 패거리들은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얻어 맞는 일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수모는 구타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윤승호가 폭력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현은 교실 내에서의 폭력만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니까. 학교 밖으로 나가면 반장의 가식을 벗은 모습이 승호를 숨막히게 만들었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모를 허름한 아파트 건물 뒤편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승호의 몸은 발길질과 주먹세례를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 재건축을 앞두고 주민들이 모두 이주한 텅 빈 아파트는 곧 허물어져 새로운 건물로 지어져야 하거늘 중간에 무언가 트러블이 생겨 한동안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유령 아파트가 된 이곳을 찾는 이들은 길을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동네의 시시껄렁한 불량배들 정도가 다였다. 그리고 가끔 오세준과 진유현에 의해 끌려온 윤승호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는 곳이기도 했다. "이 새끼야! 심부름 하나 제대로 못해! 3교시가 시작되고 나서 사오면 어쩌란 말야!" "그래, 너네 집 부자라 이거냐? 바닥에 떨어진 백 원짜리는 돈도 아니야? 누가 니 돈으로 빵 먹고 싶댔어? 아 존나 재수없어! 이게 요즘 점점 기어오르려고 그러네." 2교시째 쉬는 시간, 차마 동전을 다 주울 수 없어서 황급히 매점으로 달려가 먹거리를 사 들고 교실로 왔지만 이미 수업은 시작한 상태였다. 3교시가 끝나서야 부들거리는 손으로 간식들을 오세준에게 건네 줄 때만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길래 승호는 안심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무사히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6교시가 끝나고 도살장 소 끌려가듯 억지로 이곳까지 왔을 때 나머지 수업을 빼먹은 변명을 담임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몸뚱어리의 상처는 곧 낫는다. 하지만 자신이 맞고 다닌다는 사실이 선생이나 부모님께 알려지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야야, 얼굴은 건드리지마. 유현이가 얼굴 건드리면 우리부터 조진댔어." "씹, 까대다 보면 건드릴 수도 있지. 어떻게 면상만 피해서 까대냐? 하여간, 반장이 머리 쓰는 건 알겠는데, 때리는 우리 입장 좀 생각해 주라구" 패거리들은 넝마조각이 되어 바닥을 뒹구는 승호를 내버려 두고 품에서 담배 한 가치씩 꺼내고 있었다. 아직 학교 수업이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진유현을 기다리는 것이다. 진유현이 올 때까지 멋대로 승호를 가지고 놀다가 유현이 오면 다시 승호를 괴롭히던가 그대로 저들끼리 어디론가 놀러 가거나 하기 일쑤였다. 바닥에 주저앉거나 화장실 폼으로 각자 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다섯 명의 꼬락서니는 길거리 양아치나 다를 바 없었다. 덩치도 크고 발육상태도 좋아 학생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는 아이도 있다. 오세준이 심심한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승호에게 다가 왔다. "야. 너도 피울래?"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몸은 죽은 듯이 미동도 않는다. 얼굴은 건드리지 않는 다고 해도 상처 한 둘씩은 나기 마련이다.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고 판단한 오세준은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승호를 자꾸 건드린다. "무시하냐? 내 말 안 들려?" 쳐다보기도 싫은 얼굴이 눈을 뜨자마자 능글스럽게 웃고 있었다. "...못...펴.." "헤에~ 그럼 이 기회에 펴봐." 오세준은 자신이 피우다만 담배를 승호의 터진 입가에 갖다 대며 눈을 휘었다. 승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주춤주춤 물러나 보았지만 등 뒤엔 아파트 건물에 막혀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이렇게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오세준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은 곤욕스러웠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땅을 바라보았다. 승호 입에 물려진 담배가 다 타들어가자 오세준은 새로운 담배를 꺼내어 승호에게 권한다. 승호가 고개를 젓자 오세준의 입가가 웃음으로 번진다. "직접 피우는 게 신상에 이로울텐데." 아까 맞은 상처는 아직도 욱신거렸다. 제대로 걸어서 집에 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몸 상태에 오세준의 으름장은 무서웠다. 아픔 때문인지 무서워서인지는 몰라도 담배를 받는 승호의 손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담배를 받아 들어도 승호는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오세준은 지겹다는 듯 그런 승호를 흘끗 쳐다보더니 손에서 담배를 낚아채어 필터를 자기 입에 갖다 댄다. 한숨처럼 담배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오세준의 작은 장난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승호는 고개를 돌리고 숨을 골랐다. 담배냄새는 기분이 나빴다. 아버지가 담배연기로 거실을 한 가득 메울 때는 언제나 집안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크게 싸운 뒤에도 집안에는 담배냄새가 가득했다. 기분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을 즈음 오세준의 손이 승호의 턱을 붙들고 약 45도 위로 치켜 올렸다. "......!" 입안 가득 담배연기가 번졌다. 커다랗게 뜬 승호의 눈에 오세준의 웃고 있는 눈이 보였다. 주변의 야유와 환호성이 멀리 꿈결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쿨럭! 쿨럭! 쿨럭!" "직접 피우는 게 이롭다고 했잖아."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며 오세준이 말했다. 승호는 오세준이 자신의 입에 담배연기를 불어 넣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막고 바라보기만 했다. "여어~ 나만 빼놓고 재밌게 놀기야?" 진유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세준은 고개를 돌리더니 싱긋 웃으며 "왔냐?" 하고 반겼다. 수업을 끝내고 과외가 있다며 일찍 학교를 빠져나온 진유현은 단정한 교복차림 그대로였다. 넥타이도 없고 지정된 와이셔츠가 아닌 각각의 티셔츠를 입은 오세준 패거리들하고는 대조된다. "오세준. 이 멍청이한테 친히 키스까지 베푸시는 거냐?" 기분이 나쁜지 미간을 찌푸리는 유현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비아냥거렸다. 비슷한 체급의 오세준이 껄렁거리며 다가가 담배 한 개피를 진유현에게 물려준다. 불까지 붙여주는 폼이 매우 익숙해보였다. "키스라니. 이 미련한 도련님이 담배 피우길 거절하시길래 몸소 담배연기를 넣어 준 것뿐이지." "하지만 저 도련님은 첫 키스 당한 중딩처럼 입 틀어 막고 우는 걸?" 진유현과 오세준이 울고 있는 승호를 놀리던 말던 어떤 다른 애들은 "울지마 재수없어 새꺄" 하며 승호의 뒤통수를 쳐대고 있었다. 두어 명은 유현과 세준의 대화 내용이 재밌는지 귀를 쫑긋거리기도 하고 마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새 담배를 찾기도 했다. "김제하는?" 오세준이 유현의 등 뒤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제하랑 같이 여기 올 리가 없잖아. 나 대신 담임 심부름 좀 시켰어." "그 눈치빠른 녀석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그 녀석은 니가 윤승호 밟는 거 싫어하잖아. 순순히 니 말을 듣든?" "뭐, 담임 앞에서 부탁한 일인데 어떻게 거절하겠어? 제하한텐 미안하지만 걔랑 있으면 잔소리가 많아서 말야." 싱글싱글 웃으며 유현이 구석에 웅크려 있는 승호에게 다가갔다. "어때? 내가 건드릴 자리는 남겨놨어?" "글쎄, 한번 확인해 봐." 오세준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었다. 진유현이 승호에게 다가가자 주변에서 승호를 면박 주던 패거리들이 쭈삣쭈삣 하며 아는 체를 한다. 진유현과 오세준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라고 하지만 오세준의 패거리들과도 그런 건 아니다. 생전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없다가 윤승호를 밟으면서 얽히게 된 인간관계였다.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패거리들을 향해 유현도 웃음으로 대꾸하며 손 인사를 하고 발 밑에 있는 승호를 바라보았다. 반에서 중간은 되는 키였지만 저렇게 몸을 말아 놓으니 정말 작아 보였다. 결 좋은 생머리는 어느새 부석부석해졌고 몸은 처음 입학했을 때보다 마른 것 같았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흙먼지 달라붙은 여름 교복은 조만간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야, 윤승호." 무릎 사이로 파묻은 얼굴을 머리카락을 잡아 억지로 들리게 했다. "청승은 혼자 다 떠는구나." 무표정으로 말하는 유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진유현이 괴롭히는 건 다른 애들의 몇 배나 고통스럽다. 때리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한마디 한마디가 승호의 가슴을 후벼 파 놓는다. "아...정말 재수없어." 쫙-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따귀를 맞았다. 그 한 방에 코피가 흘렀다. "얼굴은 건드리지 말라며. 맞은 티 나면 귀찮다고." 옆에서 세준이 참견한다. "아. 실수. 이 자식 얼굴 보니까 갑자기 화가 나서 말이지." 유현은 웃으며 구둣발로 승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으악"소리를 내며 몸을 둥글게 하려는 승호의 배를 기어코 짓누르며 아파서 신음하는 그 얼굴을 표정 없이 내려다 보았다. 승호는 무서웠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짓이기는 구둣발도 아팠지만 표정 없이 빤히 바라보는 유현의 얼굴이 더 무서웠다. 해부 당하는 개구리가 메스를 든 실험자를 올려다보는 것과 같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승호는 수없이 되뇌었다. 진유현은 왜 이렇게 나를 싫어할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째서 나는 진유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 승호는 지난 밤 꿈을 떠올렸다. 시뻘겋게 물든 바다에서 수면에 비친 잠든 모습의 유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꿈이었다.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그 꿈은 아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듯했다. 꿈을 꾸고 나면 늦잠에, 지각에 하루 전체가 무기력해지는 것은 자신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더해 오늘처럼 진유현과 오세준 패거리에게 걸리는 날은 최악의 하루가 된다. "너 귓불이 생각보다 두껍다?" "응? 귀, 귀?" 아직 봄의 향기가 완연한 5월의 어느 오후였다. 교실바닥에 떨어진 지우개를 줍던 승호에게 진유현이 뜬금없이 말했다. "어디 봐봐. 귀 자체는 별로 안 큰데... 뭐, 귓불이 두툼하면 복이 있는 거라니까 좋은 거야." 유현은 승호의 귀를 보더니 대뜸 그렇게 말했다. "아. 그래? 그럼 잘 된 거네." "그렇지. 덕분에 이런 유능한 짝을 만났잖아. 만져봐도 돼?" 승호는 피식 웃으며 "유능은 무슨..." 하고 장난으로 넘겼지만 귀를 만지는 유현의 손을 내치진 않았다. 아마도 4월이 다 끝날 때쯤. 진유현과 짝이 되었을 때만해도 승호는 그저 좋은 친구와 짝이 되었다고만 생각했었다. 조금은 부러워했고 조금은 멋진 녀석이라 생각하며 호감을 갖고 있던 반장이었다. 귀를 만지는 유현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져서 조금 머쓱해졌다. "야, 그만 만져. 닳겠다." 그러나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유현이 하도 진지하게 만지작거려서 승호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른 여름의 체육시간은 덥고 땀나고 괴로운 것이었지만 학생들은 공하나 던져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운동장을 종횡무진이다. 남학교라서 눈치 볼 것도 없는지 웃통도 벗은 채 다리 털이 숭숭 달린 사내 아이들이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열심히 뛰어 다녔다. 한참 뛰다가 지쳐버린 승호는 스탠드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승호와 자주 어울리던 다른 세 명의 친구들은 덥다며 수도가로 가더니 서로 물싸움하기에 여념이 없다. "여름체육복이 반소매여서 정말 다행이야." 승호의 옆에 수건을 목에 두른 진유현이 와서 앉았다. "여름 체육복은 당연히 반소매 아냐?" 양 손을 바닥에 짚고 어깨로 숨을 몰아 쉬던 승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리 형이 다녔던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데. 여름에도 윗도리만 반팔이고 바지는 남녀 모두 긴 체육복이었대." "더운 여름에 긴바지를 입고 뛰게 한단 말야?" 승호가 손으로 부채질 하며 유현을 바라보았다. 유현이 승호의 다리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가 되게 웃겨. 그 학교 선생님들 생각하기엔 남자애들 다리 털 때문에 여자애들 보기 민망해서 그렇대. 또 여자애들이 반바지를 안 입는 건 남자애들이 딴 맘 먹을까 봐 아예 긴바지 입혀놓은 거고." "에엑! 그 학교 선생님들 정말 이상하다. 아예 여자애들한텐 바지교복 입히라지." "그치? 웃기지?" 둘은 서로 키득대며 유현의 형이 다녔다는 학교를 맘껏 비웃어줬다. 더불어 운동장을 뛰어 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저 녀석은 그 학교 가면 반팔도 못 입겠다는 둥, 저 정도 다리면 여자애 들도 뻑 갈텐데 라는 둥, 시시한 농담을 하다가 서로 다리 털에 많네 어쩌네 하는 얘기까지 나왔다. "승호 넌 털이 별로 없다. 오올~ 이제 보니 다리선도 죽이는데~" "이게 정말, 너야 말로 키나 덩치에 비해 매끈하지않아? 생각보다 털도 적잖아. 은근히 너 발육 부족아냐?" 승호가 받아쳤다. 유현이 눈썹을 장난스럽게 꿈틀거리며 "어쭈~ 누구 다리가 발육부족인지 재볼래?" 하고 자신의 다리를 쭉 핀다. 운동보다는 공부파라고 생각했던 진유현이 체육에도 능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심술이 난 승호는 "오냐, 그 잘난 다리 털, 내가 다 뽑아 주마!"하고 털 몇 가닥을 뽑는데 성공하자 유현이 죽을 상을 짓는다. "어? 진짜 아파?" "니 다리 털도 그렇게 무식하게 뜯어 봐라 안 아픈가. 죽었어, 니 다리 이리 내!" "으하하, 장난이야 장난! 봐. 세 가닥 밖에 안 뽑혔잖아." "그래. 그 세 가닥, 내가 뽑아주지!" 승호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다리를 쫙 편다. 아까 유현이 어지간히도 아파 보였는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 보다. 승호는 "딱 세 가닥만이야." 라고 선심 쓰듯 얘기했다. 유현이 의아한 표정을 하다가 이내 씨익 웃는다. "조~오 았어! 아주 굵직한 놈으로 세 가닥 뽑아주마!" 하더니 승호의 다리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한다. 더듬거리는 유현의 손은 부드러웠다. 가끔 종아리에 느껴지는 숨소리가 승호를 조금은 낯간지럽게 만들었다. 승호보다 두 계단 아래에 앉아 유심히 다리 털을 고르는 모습은 마치 털 골라주는 원숭이 마냥 우스웠지만 진유현 본인은 진지하다. 승호는 웃으며 유현을 내려다보다가 햇빛이 쏴하게 비치는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친구가 생기면 학교 다니기도 즐거울 것 같았다. 체육시간이 끝나기까지 유현은 승호의 다리털 중 굵고, 뽑으면 아플 것 같은 것을 고른다며 부드러운 종아리를 심각하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기말고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야간 자율 학습시간, 가끔씩 치는 천둥번개 소리에 환호하던 남학생들은 학생주임이 몽둥이로 내려치는 소리에 입을 다물고 다시 문제집에 열중했다. 오늘의 자율학습 감독을 맡은 학생주임 덕분에 교실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과 미친 듯이 퍼붓는 창 밖의 빗소리가 어우러져 분위기는 묘했다. "내가 얼마 전에 사주카페를 가봤는데..." 아무리 무서운 선생님이 감독한다 한들 수십 명의 남학생이 바글바글한 교실의 고요함이 오래갈 리가 없었다. 그 웅성거림을 틈 타 유현이 승호에게 슬그머니 잡담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도 그런 델 가?" 승호가 눈을 빛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유현이 싱긋 웃자 승호는 키득대며 얘기해 보라고 했다. "내 전생이 고양이였대." 승호는 친구가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데 웃을 순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했다. "푸웃-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니가 고양이였으면 참도 귀여웠겠다. 차라리 곰이나 대머리 독수리가 낫지." "내가 곰이나 대머리 독수리 같단 말야?" 승호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며 유현을 달랬지만 유현은 어울리지 않게 삐친 것 같았다. 굳이 유현을 짐승에 비유한다면야 표범이나 맹금류가 떠오르는 승호였지만 가끔씩 보이는 유쾌한 모습엔 팬더나 너구리도 어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분명 평소의 유현은 이렇게 편한 분위기가 아니다. 가장 친한 김제하와 있을 때조차도 장난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가끔 오세준과 무언가 대화할 때면 분위기가 험악해서 반 아이들 모두 긴장한다. 물론 대화 내용이야 일상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보다. 어떤 애는 저런 평범한 대화 속에 서로의 기를 제압하려는 고수들의 눈빛싸움이 있는 거라고 말해서 주위 애들에게 빈축을 샀지만 일부의 아이들은 조금 공감하는 눈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승호는 유현과 자신이 굉장히 친한 사이 같아서 조금 머쓱하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그런데 말야..."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승호를 유현의 목소리가 깨웠다. "사람들은 전생에 한번쯤은 동물이었대. 그래서 불교에선 육식을 안 하잖아. 저 돼지가 전생의 아버지였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응. 그런가. 그럼 나도 전생에 무슨 동물이었겠네?" "그래서 말인데..." 유현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사람마다 어떤 행동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전생에서의 버릇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대." 주위의 소란은 점차 커져 갔고 창 밖에선 하늘을 찢을 듯이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현과 승호의 뒷자리 학생들은 아예 다른 분단으로 가서 떠들었고 바로 옆 분단 학생들은 시디를 듣거나 먹다 남은 빵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승호는 이 재밌는 이야기를 다른 애들도 같이 들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유현의 말에 집중했다. "그 점장이한테 몇 가지를 배워 왔는데 한번 실험해볼래?" 승호는 진지해진 유현의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긴장해버렸다. 승호의 바로 옆 자리는 창가. 울부짖는 바람소리와 천둥소리가 시끄러운 반 분위기와 어울려 이런 미스테리어스한 이야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해봐 해봐, 어떻게 하는 건데? 무슨 동물인지 어떻게 실험하는데?" "에이, 미리 얘기 하면 소용없지. 이건 무의식의 반응을 살피는 거니까 일단 내가 너한테 어떤 행동을 하면 네가 보이는 반응을 보고 알 수 있는 거라고." 승호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시작한다" 라고 말하곤 유현의 표정은 마치 오세준과 있을 때처럼 변해버렸다. 조금은 무섭다고 생각하면서 유현이 뭘 할지 가만히 기다렸지만 기껏해야.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정도였다. "이게 뭐야? 이게 끝이야?" "좀 기다려봐, 다 순서가 있어." 생머리라서 결은 좋지만 비죽비죽한 승호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 내렸다. 그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고 흐트러뜨리기도 하면서 머리카락에 장난을 치던 유현의 손은 얼굴선을 따라 승호의 턱으로 내려왔다. 승호의 턱밑을 고양이 구슬리듯 가만가만 어루만지던 유현의 표정이 심각해서 승호는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점점 턱선을 따라 귓가로 가는 손의 감촉이 미묘하게 기분 좋아서 조금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창 밖이 환하게 빛나면서 학교 전체가 정전되어 버렸다. "앗싸! 정전이다아!!!!!" 이 교실 저 교실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정전 때문에 집에 일찍 간다는 것이 좋았고 정전이라는 깜깜한 상황이 아이들에게 묘한 스릴감을 불러 일으켰다. "어? 정전이네."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승호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목덜미를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으와앗!!"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고막을 찢을 듯 떨어지는 우레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유, 유현아?" 까슬한 혓바닥이 목덜미를 훑었다. 등골부터 꼬리뼈까지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지만 유현이 어깨를 단단히 잡고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막는다. 딱딱한 이빨이 목의 여기저기를 훑고 가자 간지러움을 못 참은 승호가 화를 내며 몸을 빼려 했지만 화내는 소리조차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에 묻힌다. "이게 네 전생인가 봐." 부드럽게 귓바퀴를 씹던 유현이 조용히 말했다. "뭐?" 라고 물으며 몸부림을 멈추던 승호는 차분히 유현의 말을 기다렸다. 승호의 목에서 떨어진 유현은 어둠 속에서 진지하게 말했다. 어두웠지만 유현의 눈은 빛났고 이따금 치는 번갯불은 진지한 유현의 표정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어 주었다. 승호는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했다. "고양이인 나한테 목을 물려 반응했으니. 넌 쥐다." ".....뭐,뭐,뭐,뭐어어어?" 순간 불이 들어오고 생글생글 웃는 진유현의 얼굴이 눈에 잡혔다. 승호의 얼굴이 새빨개지고 약이 있는 대로 올라 폭발해버렸다. "진유현 너 주욱었어어어~~~!!!!!!" "거기 빵 먹는 놈! 창가쪽 서 있는 놈! 책상 위에 앉은 놈! 교탁 위에서 춤추는 놈! 다 나와!!!!" 언제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학생주임이 몽둥이로 철로 된 문을 땅땅 치면서 가장 눈에 띄는 학생들을 호명했고 호명된 학생들은 대단한 벌은 아니지만 복도에 꿇어 앉아 손 들고 있어야 했다. 승호는 [창가 쪽 서 있는 놈]이었다. 그 후 진유현은 미안하다며 싹싹 빌었지만 승호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선생님한테 혼난 게 문제가 아니였다. 기분 나쁜 장난에 홀려 매일 밤 진유현이 핥았던 목덜미를 부여 안고 끙끙대야 하는 자신이 화가 나는 것이다. 왜 화가 나고 목덜미가 자꾸 뜨거워지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말 미안. 장난이였어. 내가 그런 장난을 칠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겠어?" 미안한 듯 멋쩍게 웃으며 그렇게 말을 하는데 계속 화내기도 그렇고 해서 점심 한 끼에 용서해 주기로 했다. 더구나 천하의 진유현이 유치하게 장난질 칠 상대는 자신 뿐이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우쭐해지는 기분도 있었다. 승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찐한 장난에 놀란 것 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목덜미의 열기도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후 윤승호가 진유현의 행동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유현과 자신의 스킨쉽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러운 어깨동무도, 볼 살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괜히 허리께를 더듬는 것도 모두 진유현다운 일이 아니었다. 승호는 쑥스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런 사소한 행동들에 마음이 놓이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와 어머니가 해주지 않았던 따스한 접촉이었다. 그 따뜻함에 조금 기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승호는 종종 유현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곤 하는 것이다. 그 후 여름방학이 왔고, 방학 보충수업 기간이 끝나고 2주가 약간 넘는 진정한 여름방학이 끝났다. 겨우 2주 조금 넘게 못 본 사이에 진유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가끔 승호는 생각한다. 꽃가루 때문에 한참 재채기 하면서도 알록달록한 산등성이의 풍경이 예뻐서 찬 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던 시골 황톳길. 푸르게 자라난 이름 모를 잡초들이 바람에 풀 내음을 실어주던 여름 들판. 누렇게 익은 벼들이 석양에 물들어 황금빛을 이루는 외갓집의 널따란 가을 논. 얼어붙은 계곡의 고드름이 주렁주렁 벼랑에 매달린 채 하얀 눈과 함께 햇빛을 받아 오색으로 빛나던 겨울 계곡. 어렸을 때, 잠시 살았던 시골의 풍경은 승호의 기억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이가 좋았을 때였다. 어린 승호를 무등 태우며 놀아주던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힘 세 보일 때. 챙이 넓은 밀집모자를 쓰고 냇가에서 발을 담그며 함빡 웃으시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을 때. 형도 동생도 없지만 외롭다고 느껴본 적 없던 어린 승호는 여름날의 외갓집에서 많은 친척들에 둘러싸여 언제나 웃고 있었다. 돈이란 것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외갓집 식구들이 그랬고 어머니 아버지가 그랬다. 승호는 어두운 집안에 발을 들여 놓으며 그렇다면 대체 유현을 변하게 한 것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피냄새를 풍기며 행여나 들킬까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들어서지만 싸한 냉기가 스며드는 집안엔 평소처럼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곧 가을이라지만 이 집은 너무 추웠다. "세 식구가 살기엔 너무 커." 승호는 절룩거리며 이 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일단 상처를 무시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몸을 씻어내었다. 옷을 갈아 입은 후 약 상자를 찾아 익숙한 솜씨로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그렇게 맞고도 부러지거나 내장의 손상이 없다. 차라리 어딘가 살짝 잘못되서 병원신세를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지만 그 정도로 맞는 것은 무섭기도 했다. 승호는 마르지 않은 몸을 뉘어 그대로 잠을 청했다. 숙제는 많았고 아직 초저녁에 불과했지만 피곤하고 너무 아팠다. 감정 없는 눈으로 발길질 하던 진유현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걸 애써 떨쳐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 땅이 당신 거예요? 당신 거냐구요! 누구 맘대로 팔아요!!!" "아, 내 명의로 된 땅을 내가 파는데 누가 뭐라고 해! 다 내가 쓸데가 있어서 판 거 아니야!" "그럼 왜 얘기 안 했어요? 그 땅 판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내가 추궁하니까 어디서 큰소리예요 큰소리는?! 그 돈 어디다 썼길래 이제껏 아무 말 없었어요!" "지난번에 K사 주식 산다고 말했잖아!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내가 바빠서 잠시 잊을 수도 있는 거지! 그런걸 일일이 마누라한테 고해다 바쳐야 해?" "당신 미쳤어요? 그 땅이 당신 거예요? 어머니가 남겨주신 걸 당신 멋대로 왜 파냐구요!!! 게다가 K사 주식을 사요? 나이 들더니 머리가 돌았어요? 그 망해가는 회사 주식을 왜 사요!!" "당신이야말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젊은 사내 새끼들이랑 어울려 놀아나더니 남편이 남편으로 안 보여?!!" "뭐라구욧!!!" 머리가 웅웅 울린다. 제발 조용히 잤으면 하는 승호의 바람과는 달리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는 더욱 더 귓속을 파고 들기만 한다. 언뜻 보니 시계는 벌써 새벽 1시. 이웃집에서 신고가 들어와도 할 말 없는 시간이다. 자고 있던 승호가 부모님의 싸움소리에 깨는 것은 예전부터 종종 있어 왔던 일이었다. 승호는 서랍에 준비해둔 주황색 귀마개를 찾으러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그 사이에 부모님의 싸움은 돈 문제에서 어머니가 운영하는 화랑의 단골 손님들과의 관계를 들먹이더니 아버지가 승호 중학교 때 바람 피던 다방 레지얘기까지 나오며 원색적인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귀마개를 귓가로 가져가려던 찰나 승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승호가 내 새낀지 남의 새낀지 누가 알아!!" "여봇!!!!" 숨이 막혔다. 맙소사, 하는 한숨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 나올까 봐 얼른 이불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아내느라 공기가 기도로 역류할 뻔했다. 따가운 햇살에 빛나는 냇가. 아버지와 승호는 물장난을 치고 어머니는 소라를 잡으며 환히 웃으시던 여름날의 풍경. 그림 같은 세 식구의 모습이 쨍 하고 깨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환청이 들렸다. 다음날은 엄청난 고열에 시달렸다. 학교엔 미리 전화해서 담임에게 말했다. 담임은 어제의 무단 조퇴를 추궁하려고 했으나 승호의 목소리를 듣더니 알겠다며 오후라도 학교에 나올 수 있으면 나오라고 했다. 본디 학교 입학할 때도 좋은 성적으로 들어왔고 1학기 때도 별 문제 없이 성실하게 공부하던 승호였다. 반 분위기가 어떠한지 모르는 담임은 최근 지각과 무단 조퇴가 잦은 승호의 상태를 사춘기에 따른 방황 같은 걸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난번 교평 점수가 안 좋은 거 알고 있지? 이번에 중간고사도 시작하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하지 않으면 이제까지 좋은 성적 올린 거 다 깎아먹을 수도 있어. 신경 좀 써라 응? 오후 수업엔 들어올 수 있지?" "예, 그럴게요. 예. 예." 담임의 말에 대충 대답하면서 승호는 수화기를 놓았다. 머리가 멍멍하다. 이대로는 오후 수업에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프니까 모든 것이 서러워진다. 어젯밤만 해도 실컷 싸우시던 부모님은 언제 나가셨는지 집은 텅 비어 있고, 아파 죽을 거 같은데 오후에라도 학교 나오라는 담임이 야속했다. 이럴 때 부를 친구조차 없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민태, 형석, 진영같이 1학기 때 잘 놀았던 친구들은 진유현과 오세준 패거리의 서슬에 눌려 승호를 외면한지 오래다. 전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부모님이 아시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승호는 억지로 일어나 약상자에서 해열제를 찾았다. 그날 자습시간, 어지러운 몸으로 교무실을 찾았다. 담임은 요즘 해이해졌다며 승호를 꾸중했지만 아직도 열이 있는 몸 상태를 보고 크게 혼내진 않았다. 그러나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승호의 부탁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오늘 수업은 안 했으니 자율학습이라도 하고 가라는 것이다. 열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가 하면 손발이 차고 식은땀이 자꾸 흐른다. 자신의 걸음이 비척대고 있다는 걸 승호도 알고 있었지만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교실에서는 상황파악 못하는 오세준 패거리에게 둘러싸여 언제나 그렇듯 그들의 간식거리를 사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세준은 승호상태가 나쁘다는 걸 알았지만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일을 시키는 이들도 승호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편리한 심부름꾼을 아프다는 핑계로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어? 뭐야, 크림빵 사오랬지, 누가 슈크림빵 사오랬어? 너 슈크림이랑 크림의 차이도 몰라?" "이 새끼 봐라. 콜라도 두 개밖에 안 사왔네. 야, 너 이제 머리까지 나빠졌냐? 아까 열나게 받아 적더니만 왜 이따위로 사오고 지랄이야!" "잔돈도 틀리잖아! 내가 얼마짜릴 줬는데 이렇게 돈이 조금 남는다는 게 말이 돼? 씹새꺄 너 삥땅쳤지!" 웅웅거리는 승호의 머리 위로 고함이 메아리쳤다. 승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럴 리 없다고 잔돈을 계산해 봤지만 자신의 실수가 맞았다. 액수가 맞지 않다. 이젠 다른 의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만 해도 멍멍하던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있는 아이들의 험상궂은 얼굴은 살기등등했다. '오늘도 얻어터져서 뻗어버리면 끝장인데...' 어쨌든 교실에선 때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대로 끌려간다면 뒤의 상황은 뻔했다. "미. 미안, 내가 물어줄게. 잠시 실수해서..." 뒤로 물러나며 변명해봤지만 그들은 머리를 쥐어박거나 정강이를 툭툭 치면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끌고나갈 기세다. 승호는 모자란 잔돈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지금 맞으면 이번에야말로 병원 신세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유치하다. 그만해라." 난데없이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해서 고개를 든 건 문제집을 풀고 있던 진유현이었다. 교실 맨 뒤에서 벽에 몰려 식은땀을 흘리는 승호를 둘러싸고 세 명의 남학생들이 으름장을 놓는 고요한 교실이었다. 그 고요함을 깬 부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부반장. 가만히 있다가 웬 참견이야?" 말을 받아 친 것은 자리에 앉아서 자기 패거리들의 하는 짓을 구경하던 오세준이었다. "교실이 시끄러워서 자습을 할 수가 없잖아. 돈이 모자라면 나중에 교실 밖에서 받으면 되지. 여럿이서 한 명 가지고 트집잡는 것도 이제 그만둘 나이 아냐?" 윤승호의 머리를 툭툭 치던 강지원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박재석은 기가차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부반장은 그런 걸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승호를 에워싸고 있는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승호는 이제 보니 부반장이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른 체구에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잘 몰랐지만 교실 맨 뒤편을 차지하는 오세준 패거리와 같이 서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 키였다. "야, 넌 아프면 양호실에나 갈 것이지.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야?" 부반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인상을 썼다. 승호를 둘러싼 무리를 무시하고 승호의 팔을 잡아 끌었다. "누구 맘대로 얘 데려가냐? 우린 이 새끼한테 잔돈을 뜯겼다고." "어차피 나중에 받으면 될 거 아냐." "썅, 좋은 말할 때 비켜라. 너도 같이 죽고싶냐?" "비켜야 할 건 너네들이다. 난 이 녀석 데리고 양호실 갈 거다." 승호의 머리 위에서 부반장과 나머지 네 사람의 신경전이 팽팽했다. 가뜩이나 어지러운데 평소와 다른 상황에 부딪혀 승호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오세준 패거리의 입이 점점 사나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간간히 뜻 모를 욕도 섞여 있었고 까딱하다가는 한대 칠 기세이건만 부반장은 승호의 팔을 단단히 잡은 채 한마디도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화가 난 한명이 부반장의 머리를 갈겼다. "박재석!" 벌컥 소리 지른 것은 진유현이었다. 부반장은 머리만 돌아갔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비뚤어진 안경과 헝클어진 머리를 고쳐 잡을 뿐이었다. 박재석은 씨근덕거리며 반장과 부반장을 번갈아 보더니 마지막엔 오세준에게로 시선이 박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눈빛으로 사인을 보냈다. "양호실 보내줘야지. 얌전하던 부반장님께서 친히 모셔준다잖냐. 우리 친구 승호가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아까부터 싱글싱글 웃던 오세준의 말투에 박재석이 '우엑'하고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 친구 승호'는 이제껏 오세준이 승호를 호칭했던 도련님, 샌님, 아가씨, 약골, 범생 등등의 애교어린 명칭 중 가장 닭살스러운 호칭이었다. 다행히도 부반장과 다른 세 명 사이에 더 이상의 불화는 없었고 부반장은 환자를 부축하는 폼치곤 다소 거칠게 승호를 질질끌고 문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한껏 노려보던 진유현은 다시 문제집에 눈을 돌렸지만 표정은 보기 드물게 딱딱했다. 소란스러운 반의 분위기가 다시 수그러들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화가 풀리지 않은 오세준 패거리들은 저들끼리 욕을 했고 오세준은 뭐가 좋은지 혼자 빙글빙글이다. 잔뜩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는 진유현을 멀리서 김제하가 노려보고 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새로운 인물의 출현에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1학기 때, 윤승호와 친했던 일행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나름대로 번민하고 있는 늦은 여름의 교실이었다. 양호실엔 아무도 없었다. 해열제든 뭐든 약을 먹여야겠지만 부반장으로선 선반의 약들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안 계신 책상의 서랍을 여기저기 뒤질 수도 없어서 땀을 흘리는 승호를 일단 침대에 눕히고 보았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주고 양호실 창문을 닫아 소음을 차단해 주었다. 얇은 이불이나마 목까지 덮어 준 뒤 부반장은 말없이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저, 저기!!" 승호는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반장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단 고맙다는 인사정돈 예의라고 생각했다. "저기...고, 고마.." "고맙다는 인사할 거면 관둬." 부반장은 등을 돌린 채 승호가 있는 침대의 커튼을 쳐주며 말했다. 부드럽게 커튼을 치는가 싶더니 홱-하고 이쪽을 쳐다본다. "그렇게 꼴사납게 자습을 방해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참견한 것뿐이야. 바라는 게 있다면 네가 오늘 내내 여기서 보내든지 오세준들이랑 일찌감치 학교를 나가버리든지 하는 거다. 쉬는시간, 점심시간마다 너네들이 반 분위기 흐리는 것도 짜증나. 가뜩이나 그 애들 때문에 선생님들이 우리 반 안 좋아해서 수업내용도 별론데 자습시간까지 방해받고 싶지 않아." 말이 비수가 되어 승호의 가슴에 꽂혔다. 말을 돌린다거나 하는 배려는 전혀 없었다. 원래 말을 골라서 하는 성격도 아니고 승호가 상처받을 걸 걱정하는 부반장도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승호에게 확인차 충고를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근성 없는 녀석이 제일 싫어. 나쁜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녀석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따위 눈곱만치도 없다. 오늘은 내 참다못해 충동적으로 그랬지만 앞으로도 내 도움 따위 바랄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마." 그렇게 말하고 부반장은 나가버렸다. 말은 서리 발 내리듯 차가웠지만 양호실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은 환자를 고려하듯 매우 조용했다. 별로 승호를 생각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인 거다. 말투는 직설적이지만 선천적으로 예의가 배어있는 것뿐이다. 아마 자신이 승호의 신발까지 가지런히 놓아주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을 것이다. 혼자만 남은 적막한 침대 위에서 승호는 말없이 천정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반 애들 중 승호가 맞고 다닌다는 사실을 눈치 챈 애들은 꽤 된다. 비록 얼굴은 멀쩡하다 하나 여름이라 드러난 소매와 목덜미에 푸르고 붉은 멍 자국을 한 명이라도 봤다면 입 소문으로 금방 반에 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끔씩 승호와 오세준 패거리가 오후수업을 빼먹고 사라지는 것을 서로 사이 좋게 놀러 갔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둔한 애들 빼곤 절반 이상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담임에게 이르고 싶지 않은 게 학생들의 심정이었다. 솔직히 팔에 드러난 멍 자국만으로는 얼마나 심하게 당하는 지 알 수 없어서 그저 "버틸 수 있으니까 버티겠지 뭐."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진유현이 그 폭력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부반장이 알고 있는 정보도 다른 애들과 다를 바 없어서 미련하게 당하고 사는 것은 윤승호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원체 심하게 개인주의이고 자신에게 피해만 없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그러나 한 번 예외가 있었다. 예전에 승호가 심부름으로 빵을 한아름 사 들고 복도를 뛰어 가느라 부반장과 부딪힌 일이 있었다. 묵묵히 같이 빵을 주워준 부반장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려 했으나 싸늘하게 내려다 보는 그 표정에 말은 목구멍에서 나오지 못했다. 경멸조의 그 얼굴을 보고서야 부반장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승호는 알았다. 그 일을 떠올리자 메마른 눈가에 열이 올랐다. 아니, 얼굴 전체가 열로 뜨거웠지만 몸은 시리도록 추웠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부 다 자신을 싫어한다고 믿고 있다. 1학기 때 같이 놀았던 친구들도, 그리고 그렇게 살갑게 대했던 진유현도 이제는 다 자신을 싫어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예전만큼 다정하지 않다. 따뜻함이 신물 나도록 그리운 적도 하루이틀이 아니다. 눈물이 흐르려 하는 걸 애써 참아 본다. 승호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 하고 수 백번 생각했던 것들을 또 한 번 곱씹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유현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곱씹을 때마다 떠오르는 건 엉뚱하게도 김제하의 얼굴이었다. 그것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는 3월의 어느날이었다. 아직 반 아이들 얼굴조차 다 외우지 못할 때라서 김제하의 느닷없는 부름은 의아한 것이었다. 승호는 무언가 비장한 표정으로 옥상 위의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김제하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웬만하면 서로 익숙해지고 나서 너한테 이런 말 하려고 했는데" 키는 승호보다 반 뼘 정도 작은 얼굴에 안경을 껴서 더 동안으로 보이는 하얀 얼굴은 굉장히 진지했다. 진지하고 심각해서 조금은 적대적인 느낌마저 드는 김제하의 첫인상은 깐깐해보이지만 귀여운 느낌이었다. 문제는 대뜸 꺼낸 한마디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창조자]지?" 분위기로 보아 결투라도 신청하는 줄 알고 상당히 긴장해 있던 승호였다. 그러나 제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잠시 동안 에? 하는 표정으로 있어야 했다. "숨길 필요 없어. 난 [통찰자]야. 내 눈을 속일 생각 마." 이번에도 승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제하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으나 보충내용을 제하에게 들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무슨 소린지 몰랐다. 그 말을 들은 제하의 표정이 생긴 것답지 않게 하도 험상궂어져서 승호는 긴장했다. 이러다간 주먹이라도 날아올 기세였다. "모른다니...모른다고?" 눈을 부릅뜨며 승호를 쳐다보지만 승호로썬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리고 당황하는 승호의 표정에서 승호가 정말 제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자 제하는 조금 표정을 풀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 "뭐, 뭘?" "아직 아무것도 안 만들었냐구." 승호는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만들기 숙제가 있었나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엔 김제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그럼, 혹시 몽유병 같은 거 없어? 간질증은? 갑자기 발작하는 증상 같은 거 없어? 예전에 사고로 장시간 기절했던 경험은?" 승호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제하를 내려다 보았다. 사람을 병자 취급해도 유분수다. 어째 종류도 하나같이 기분 나쁜 병들로만 늘어 놓는지 승호는 맘이 상해버렸다. "내가 환자로 보이냐! 왜 갑자기 시빈데?" 인상을 구기는 승호 앞에서 김제하의 표정은 점점 난색을 표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그래, 모를 수도 있어"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병자는 눈앞의 이 녀석이 아닐까 하며 승호는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부담을 느꼈는지 김제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유현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승호는 김제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입만 벙긋 벙긋했다. 진유현이라면 담임이 임시 반장으로 뽑은 터라 반 아이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진유현이 그럭저럭 괜찮은 임시반장이라고 생각하던 승호에게 제하의 질문은 요점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뭔 소리야. 갑자기 반장은 왜?" 승호가 반장이랑 얘기해 본 것은 고작 해야 숙제나 학급비 걷을 때였다. 당황하는 승호를 앞에 두고 "아니, 아무것도 아냐."라고 말한 제하는 당사자인 승호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리고는 "불러내서 미안했다. 쓸데없는 얘기였으니 잊어줘."라고 말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승호는 그 후로 김제하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긴 했지만 별로 이상한 점은 발견 하지 못했다. 교우 관계도 좋았고 성적은 꽤 상위권에 운동도 곧 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기초부터 담임이 임시반장으로 골라 시선을 끌었던 진유현의 소꿉친구라는 메리트도 갖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김제하는 윤승호를 싫어했다. 이유를 몰라서 승호는 더 당황스러웠다. 나중에 진유현과 짝이 되고 친해졌을 때 제하가 승호를 노려보는 표정은 살벌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눈에 띄게 승호를 괴롭힌다거나 싸움을 걸어오진 않았지만 승호는 진유현이 자신때문에 제하와 종종 말다툼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돌변한 진유현의 행동에 김제하의 입김이 있나 싶었다. 아니, 처음 한동안은 정말 김제하가 진유현한테 자신에 대한 무슨 나쁜 말이라도 한 줄 알았다. 진유현의 행동은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더욱더 김제하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김제하는 유현이 자신을 괴롭히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야 했다. "그만둬! 이런 짓 너답지 않아!" "뭘 새삼스럽게 그래? 나 원래 이런 거 너도 잘 알잖아." 찌는 듯이 무덥던 어느 여름날 진유현이 오세준의 집에 윤승호를 끌고 갔던 오후였다. 바닥에는 상체가 벗겨진 채 찢긴 자국과 멍 투성이가 되어 늘어져 있는 윤승호가 있었고 그 위에서 진유현이 맥주를 쏟아 붓고 있었다. 피가 난 상처에 맥주가 부어지자 아픔을 느꼈는지 승호의 몸이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켰지만 끝내 정신을 온전히 차리진 못했다. 오세준과 그 패거리는 옆에서 화내는 김제하 때문에 기분 잡쳤다는 듯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고 실수로 김제하에게 이곳 위치를 알려준 임경철은 똥 씹은 표정으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오징어 다리를 뜯고 있었다. 사방수소문해서 진유현을 찾아낸 김제하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친했잖아!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실실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애한테 뭐 하는 짓이야! 이제야 정신 차린 줄 알았더니 그새 못된 버릇이 도진 거야?!!" 오세준 패거리들은 이제 아주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진유현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오세준 말고도 또 있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곧 김제하의 뽀송뽀송한 얼굴이 진유현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리라 예상했지만 진유현이 한숨을 쉬며 맥주를 붓던 팔을 내려놓자 오징어를 씹던 임경철은 사래가 들릴 뻔했다. 불알 친구란 위대한 거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세준이 키득댔다. "세준아. 오늘은 흥 떨어졌다. 애들 다 보내." 오세준은 좀 더 구경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쫓아냈다. 하지만 본인은 이 집 주인이기에 싱글거리며 도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아~아~ 맥주 흘린 자국 치우는 건 내 몫이라구. 남의 집에서 놀 땐 좀 더 집주인을 생각해주라 유현아~" 오세준이 입가에서 미소를 놓지 않으면서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팽팽하게 눈싸움을 하며 서로 노려보는 제하와 유현은 오세준의 말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런 이런, 둘 사이가 너무 뜨거워서 나만 외롭잖아. 할 수 없지. 나는 승호랑 놀 거야~" 그렇게 말하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승호의 상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쯧쯧 먹는 걸로 장난치면 안되는데" 라고 말하며 맥주가 흐른 승호의 배를 한 입 가득 빨아 넣는다. -쿵 "야! 이 자식!!" 좀처럼 욕이 나오지 않는 오세준의 입에서 곱지 않는 말이 튀어 나왔다. 유현에게 어깨를 발로 채여 방안을 한 바퀴 구른 오세준이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누워있는 승호를 미친 듯이 밟아대는 유현을 보곤 제하와 한 몸이 되어 말릴 수 밖에 없었다. "진유현! 너 정신 안 차릴래!! 그러다 얘 죽어!" "야 이 미친 놈아! 미칠려면 나가서 미쳐! 내 집에서 발광하지 말라구!" 승호의 멀어진 의식 사이로도 오세준과 김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현의 발길질은 제하가 승호의 위로 엎어져 감싸는 바람에 실수로 제하를 발로 찬 유현이 스스로 깜짝 놀라면서 진정이 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감싸준 적은 처음이어서 그때만해도 제하를 미워하던 승호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의식 저 너머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제하는 승호를 끌어 안고 유현에게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만둬! 얘한테 왜 이래! 너 요즘 이상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단 말야!!" 진유현은 차갑게 승호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유현의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조금은 진정 된 제하가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네 성격 원래 그런 거, 예전부터 봐온 내가 제일 잘 알아. 하지만 그런 거 숨길 줄 아는 녀석이었잖아! 윤승호 얘한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 자식한테 관여하지마. 너한테 도움되는 자식 절대 아니야. 예전처럼 가면 쓰고 착한 척 구는 게 차라리 나아. 이렇게 니 원래 성격 드러내고 이 자식 두들기다간 언젠가 너 후회할 거라구!" "뭐야, 그 말은 저 멍청이가 언젠가 나한테 물 먹일 거란 얘기야?" "나도 몰라.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넌 윤승호랑 관여 되어서 좋을 게 전혀 없어. 그렇게 이자식을 몰아붙이다간 너도 나도, 이 녀석에게 관련된 우리모두 후회하게 될 거야! 내 말 들어 진유현!" 논리적으로 뭔가 맞지 않다 싶었지만 김제하가 뿜어내는 기운은 그의 말에 엄청난 무게감을 실어다 주었다. 오세준도 얌전하기만 하던 김제하의 서슬 퍼런 모습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진유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김제하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험악하게 굳히더니 낮게 욕설을 뇌까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세준은 "어어?" 하면서 진유현을 뒤따라 나갔고 남은 건 넝마가 된 승호를 끌어안고 있는 김제하뿐이었다. 승호는 간간이 끊어지는 의식 때문에 상황 모두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확실한 거 하난 얻었다. 진유현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건 김제하와 상관없고 김제하가 자신을 감싸주긴 했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하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지만 마음속이 서럽도록 차가웠다. 아무도 자신을 진정으로 걱정해 주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승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의식을 흐르는 대로 내맡겼다. "[창조자]라는 게 겨우 이런 거였나." 까매져가는 의식 너머로 제하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했다. 붉었다. 사방이 붉었다. 아아, 드디어 나는 맞아 죽었구나. 진유현한테 맞아서 이건 다 내 피인 거야. 몽롱해진 의식사이로 찬 바람이 느껴졌다. 거센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차라리 그 강함에 모든 걸 맡겨버리고 싶었다. 숲, 대지, 마을. 대륙을 바람이 되어 여행하는 착각에 잠시, 아주 잠시 빠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정신차려보니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멍한 의식 속에서 내 피라고 생각했던 것은 수평선 끝까지 붉게 물든 거대한 바다였다. "뭐야 또 그 꿈?"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말소리가 메아리 되어 사방에 울렸다.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파랬다. 지난 번엔 석양 때더니 이번엔 한 낮 인가 보다. 꿈의 세계에도 시간개념이 있는 걸까? 괜히 웃음이 나왔다. 꿈에서 이렇게 의식이 확고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꿈이란 것을 알면서도 깨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이 비슷한 꿈을 꾼 건 중학교부터였다. 꿈이란 게 깨고 나면 그 내용을 잊어버리게 마련이라 정확하게 중학교 때부터라곤 할 수 없지만 내 기억은 중학교 때부터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바람 핀 것이 어머니에게 들킨 날이었다. 그날 밤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수 많은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악몽의 끝에서, 나를 삼켜 버릴 듯이 거대하고 붉은 바다 위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잠이 깼던 것이다. 그렇게 꿈이 반복되면서 익숙해지니 이렇게 느긋하게 꿈속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뭐 그런 것이다. 피식하고 실소를 흘리며 시원하게 펼쳐진 붉은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켜보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신기한 바다였다. 대체 무슨 물질로 만들어진 걸까. 나는 바위 아래에 몸을 숙이고 가만히 그 붉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젤리 같아서 손으로 만져보면 물컹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 어쩌면 바다 전체가 하나의 부드러운 판 같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저 위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기심에 살짝 오른손을 넣어보았다. "왓! 이게 뭐야." 젤리가 아니라 안개인가. 바다에 담가 본 손은 어떤 마찰도 받지 않고 수면 아래로 쑥 들어갔다 나왔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고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봤다. 역시 아무런 마찰도 없다. 어쩌면 이 붉은 바다는 액체가 아니라 기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끔씩 흔들리듯 보이는 저 잔잔한 파도는 파도가 아니라 기류인 걸까? 이것들은 구름 같은 걸까? 하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는 전혀 기체 같지 않다. 구름같이 포송포송한 느낌도 없고 안개처럼 희미한 경계선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봐도 액체나 부드러운 고체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순간 섬뜩했다. 바닷속으로 넣었던 손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분명 무언가를 움켜잡는 움직임을 했었는데 손끝에선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손목째로 사라진 느낌이다. "우와왓!!!" 당황해서 손을 뺐다. 다행히 손은 그대로 붙어 있었고 다섯 손가락 모두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겁에 질려 오른손을 움켜쥐고 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는데 그러다가 곧 한가지 사실을 알았다. 이 넓고 끝없는 바다 위에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굉장히 무서웠다. 나 혼자.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 공간. 나는, 꿈에서조차 혼자였다. 승호에게 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세준 패거리들의 타겟은 부반장에게 돌려졌다. 그들은 틈만 나면 부반장에게 시비를 걸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주먹다툼이라도 한 방 터졌으면 하는 게 지켜보는 아이들의 마음이었건만 그들은 감질나게 부반장을 집적대기만 하고 있었다. 공부 방해는 물론이거니와 욕설, 험담, 기분 나쁘게 툭툭치는 패거리들의 행동에 부반장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가끔 맞받아치는 부반장의 말투에 전혀 주눅이 든 기운이 없다. 오히려 부반장의 독설에 패거리쪽 얼굴이 시뻘개져서 주먹이 나가기 직전까지 상황은 진행되곤 했었다. 그러나 번번히 오세준과 반장 진유현의 제지로 주먹질은 불발이 되고 만다. 이러다 보니 속이 터지는 것은 오세준 패거리였다. 직접 손을 대지 않는 오세준은 자기 자리에서 남일 보듯 구경만 하고 있었고 진유현은 승호 때와 마찬가지로 무관심이었다. 반 아이들 몇 명이 "반장, 그래도 선생님한테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물을 때마다 "내가 보기엔 부반장 보다 저 녀석들이 더 골탕 먹는 거 같은데"라는 식으로 웃어 넘기곤 했다. 사실 반 아이들 눈에 부반장은 새로운 다크호스였다. 부반장이 저렇게 요지부동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걸 보면 뭔가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기왕이면 요즘 들어 날뛰는 오세준패거리가 잠잠해지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교실의 수런거림은 앞으로 부반장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걱정스러움과 부반장의 성격을 반 년 동안 지켜봐 온 아이들의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새로운 고수가 등장했다고 흥분하는 학생도 있었다. 친구가 없기는 부반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부반장 스스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숙제를 보여주고 물건을 빌려주는 사소한 대화상대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같이 놀러 다닌다 거나 고정적으로 잡담을 한다거나 하는 상대는 없었다. 윤승호와는 다른 의미로 이 반에서 붕 뜬 존재다. 그럼에도 존재감은 강력해서 진유현과 함께 이 학교의 양대 카리스마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그렇게 괴짜 부반장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에 대한 관심으로 교실은 술렁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기대는 오산이었다. 부반장은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정의감이 있지도 않았고 오세준들에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는 소란을 싫어한다. 처음엔 패거리들 역시 '이놈 혹시 굉장한 싸움꾼 아냐?'하며 겁먹고 있었다. 그래서 부반장을 손 봐주려고 날짜 잡을 땐 진유현과 오세준의 일정에 맞추기로 하며 소심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유령 아파트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부반장을 오세준이 쓰러뜨렸을 때, 그들은 비로소 부반장이 싸움에는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와하하! 이 자식 이제 보니 약해 빠졌잖아! 난 또 좀 하는 줄 알고 열라 쫄아 있었지." "병신, 또라이. 찍소리하나 못 내면서 교실에선 그렇게 잘난척했냐? 이 등신새끼!...어?" 신나게 발길질을 하던 한 명이 기우뚱-하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 피투성이의 부반장이 그 발을 잡아챈 것이다. 하지만 부반장의 남은 힘으론 그 정도가 한계였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주저앉으며 낮게, 그러나 다른 무리들이 들리게 확실히 말했다. "여럿이 몰려다니지 않으면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들. 고작 이깟 거에 의기양양하다니 너희들의 그릇은 그것밖에 안되는 거다." 안경은 깨져서 저만치 날라가 있었다. 얼굴은 피투성이에 교복 여기저기가 찢어져서 퍼렇게 멍들고 팔 하나는 접질렀는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승호라면 가능한 얼굴에 손대지 않았겠지만 진유현이 맘대로 밟으라고 허락한 이상 부반장의 편의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얼굴이 처참해서 상태는 심각해보였다. "새끼가 죽어도 입은 살아가지고!" 아까 넘어졌던 박재석이 부리나케 일어나 다시 덤벼들었다. 부반장은 그 발길질을 겨우 막아내고 "하압!"하는 소리와 함께 박재석의 허리께를 붙잡고 온몸으로 덮쳐 넘어뜨렸다.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자신의 체중을 싣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부반장의 마지막 공격방법이었다. 중심을 잃고 다시 넘어진 박재석은 뒤통수를 찧으며 괴로워했지만 재석과 함께 넘어진 부반장 역시 고통으로 숨을 헐떡거렸다. 주위의 무리들이 낄낄거린다. "야, 박재석. 넌 저렇게 얻어터진 놈 하나 처리 못하냐?" 박재석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늬들이 친구냐! 저 새끼가 반항할 거 같으면 빨랑빨랑 밟아야 할 거 아냐!" 하고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다른 아이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유만만이다. 피투성이의 부반장이 제아무리 발악을 한다 해도 박재석처럼 방심만 하지 않으면 문제없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옆에는 중학교 때 짱이었던 오세준과 그 실력을 본 적은 없어도 오세준 보다 위라는 진유현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릇이라..." 오세준이 빙글빙글 웃으며 헐떡이는 부반장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턱에는 방심한 탓에 맞은 멍 자국이 보였지만 그 외에 외상은 없어 보였다. 이 공터에서 네 명을 상대로 싸우는 부반장의 반항은 꽤 격렬한 것이었다.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나선 것이 오세준이었지만 이미 다른 애들한테 몇 대 맞은 부반장을 쓰러뜨리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부반장이 아무리 운동신경 좋고 힘이 세다고 한들 생전 주먹싸움 안 해 본 골수 도련님이었으니까. "그럼, 이런 녀석들에게 얻어 맞는 자신의 그릇은 얼마나 크길래?" 오세준이 쭈그려 앉으며 부반장을 내려다 보았다. 부반장은 시력이 나쁜지 눈을 찡그렸지만 코 앞까지 들이댄 오세준의 얼굴을 못 볼 리 없었다. 눈을 찡그린 이유는 오세준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불쾌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도 못 이겨 내다니 나도 별 큰 그릇은 못 되는 것 같군. 하지만 최소한 한 사람을 둘러싸고 여럿이서 주먹질 할 정도로 비겁하진 않지. 친구를 어느 한순간 손바닥 뒤집듯 배신하지도 않고, 남 앞에선 선한 척하지만 뒤로는 온갖 썩은 짓을 할 만큼 위선적이지도 않아." 뒷부분은 저 쪽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만 하는 진유현을 향한 말이었다. 오세준은 아직도 분노로 번뜩거리는 부반장의 눈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진유현은 눈썹을 꿈틀하는 가 싶더니 입가에 비웃음을 달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방금 그 말은 나한테 하는 말이냐?" "자기 얘기라는 걸 알고 있긴 하나보지? 네가 이들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 걸. 보아하니 윤승호의 상처들도 다 네 짓이겠군. 엄청난 가면이야 반장 나으리." 오세준이 "이런"하는 표정을 지으며 정말 겁도 없는 놈이라며 혀를 찬다. 진유현은 가만히 거만한 자세로 내려다 보지만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부반장은 호흡을 고르며 체력 회복을 꾀했지만 잠시 쉬는 걸로는 아무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세준과 진유현의 뒤에서 빨리 자기네들이 활약할 차례를 기다리는 무리를 보면서 부반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항상 궁금했었다." 입안에 피가 고여 그나마 멀쩡한 팔로 입가를 훔치며 부반장이 말했다. 입술을 훔친 팔에는 길게 핏자국이 이어졌다. "왜 갑자기 윤승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거냐." 겨우 일어나 앉은 부반장이 말했다. "네가 윤승호와 친했다는 걸 우리 반에서 모르는 학생은 없어. 친구사이가 갑자기 틀어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 들여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데엔 뭔가 굉장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말을 하자 뒤에 있는 애들도 고개를 끄덕끄덕거린다. "응,응. 사실 나도 궁금 했었어." "나도." "나도." 오세준이 빙글빙글 웃는다. 부반장은 어찌 어찌해서 주저앉긴 했지만 일어나는 것은 좀 더 쉰 다음 해도 된다고 생각하여 가만히 유현을 노려보았다. 그 바로 앞에 화장실 폼으로 쪼그려 앉아 빙글대는 오세준의 얼굴이 맘에 안 들었지만 지금 신경 쓰이는 것은 진유현의 대답이었다. 진유현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곧 사악한 비웃음을 띠운다. "귀여워하건 밟아 죽이건 네가 신경쓸 일이 아냐." 부반장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진유현의 말은 끊어지지 않았다. 씨익 웃으며 "한마디로..."라고 말을 잇던 그는 맥이 풀릴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내 맘이다." 말과 동시에 진유현의 발이 부반장의 복부에 꽂혔다. 몸의 회복을 꾀하며 반격 준비를 하고 있던 부반장으로서는 치명타였다. 앉아 있던 몸이 뒤로 밀려나 땅 위를 구를 정도로 힘이 실린 공격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꺽꺽 대면서 부반장은 배를 움켜쥐고 시멘트 바닥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해 두는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유현이 말한다. 오세준은 '얘가 왜이래?'하는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픈 정의감 때문에 승호 일에 상관하면 별로 좋진 않을 거야." 아픈 배를 부여잡고 쿨럭 거리면서 부반장의 눈은 여전히 앞을 노려다 보고 있었다. "윤승호가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면 나도 모르게 상관하는 수가 있지." 유현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교내폭력의 진상도 알았겠다, 내 몸으로 직접 확인까지 했으니 남은 건 교무실이나 경찰서 행이고." 전혀 기죽은 분위기가 아니다. 부반장은 승호의 일에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승호가 그동안 맞은 상처가 누구 때문인지 알게 되었으니 담임에게 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흥, 기세등등 하더니 기껏해야 생각한다는 게 고자질이냐? [선생님 제가 나 때렸어요]하고 말이지?" 진유현이 비웃었지만 부반장의 표정은 엄숙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오늘 이 일은 애들끼리 싸움질 한 것에 불과해. 굳이 어른들에게 알릴 필요도 없는 사소한 트러블이지. 하지만 승호의 경우는 청소년 범죄에 해당한다는 거 알아?" 싸움이 아니라 린치라고 생각하는 건 진유현과 오세준들 뿐인 듯 했다. 부반장은 진심으로 이 것이 동등한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깨달은 진유현의 얼굴이 굳었다. 분수도 모르고 지껄이는 부반장에게 제대로 화가 난 얼굴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주머니에서 손을 뺀 진유현이 성큼성큼 쓰러져 있는 부반장에게로 다가갔다. 일어나지 못한 채 바닥에서 배를 잡고 유현을 노려보는 부반장의 얼굴은 이제까지 유창하게 내뱉던 말들은 어떻게 했나 싶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자자, 오늘은 이쯤하자. 유현이 너 저녁에 과외 있다면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구." 진유현의 낌새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오세준이 앞을 막아 선다. "비켜." 유현이 인상을 쓰며 오세준을 노려보지만 능글능글 웃는 세준에게선 절대 비킬 수 없다는 의지가 보였다. "네가 나서면 되는 일이 없다. 유현아. 우리 둘 다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냐. 응? 좀 봐주라." "저런 놈은 기어오르지 못 하도록 확실히 밟아야 한다구." 부반장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자 유현은 괜스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부반장을 한껏 밟아 주고 나면 속이 시원해 질 것 같은데 진유현이 그랬다간 경찰까지 관계 될 거라는 게 오세준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오세준의 생각은 틀린 적이 없었다. 씩씩 거리며 부반장이 슬슬 일어섰다. 독기가 가시지 않은 눈을 보아하니 진유현 한테 내장이 터져나가도 고개 꼿꼿이 뜨고 바락바락 대들 성격이다. "어디 덤벼봐. 상대해주지." 부반장은 넝마가 된 꼴에 도발까지 한다. 오세준은 "어이구야~"하는 한숨을 내쉬며 화가 머리 꼭지까지 올라간 진유현을 막느라 진땀을 뺐다. 지켜보던 다른 애들도 흥이 빠져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세준의 고함에 덩달아 진유현을 말리느라 정신 없게 되었다. 이 우스운 상황을 어이없이 바라보며 부반장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윤승호가 꽤나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스스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는 도와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엔 변함이 없었다. 다음날 선생님들이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적하나 만큼은 확실해서 학교에서 원하는 대학입학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던 부반장의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덕분에 부반장에겐 아침 조회시간부터 담임의 호출이 이어졌고 매 교시마다 들어오는 선생님들은 꼭 한마디씩 물어 봤으며 점심시간을 비롯하여 쉬는 시간은 틈틈이 담임에게 불려가 교무실 선생님들의 입담을 하루 내내 들어야 했다. 쏟아지는 수 많은 질문을 당사자는 담담하게 '동네 깡패들과 싸웠다'는 말로 일관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에선 드디어 부반장이 오세준과 한 판 붙었다는 소문이 돌아 삽시간에 1학년 1반은 수다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다. 그런 소문이 담임에게 한 마디 정도는 들어 갈 법했지만 교실 뒤에서 기세등등 하게 버티는 패거리들이 무서워 소문은 아이들 사이에서만 퍼져 갔다. 엉망이 된 부반장의 얼굴에 비해 턱 끝에 스치듯 멍든 상처를 얻은 것에 불과한 오세준의 얼굴은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드디어 진정한 고수가 가려졌다, 이 반은 오세준이 평정했다는 둥 루머가 오갔다. 그에 반발해 우리반의 최고 고수는 반장이라고 우기는 애들도 있다. 그렇게 저들끼리 떠들며 노는 친구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상당수였지만 상황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한 술 더 떠 오세준이 이끌고 다니는 무리들은 아주 기고만장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부반장의 얼굴을 툭툭 치거나 머리를 쥐어 박거나 하며 으스대고 있었다. 그러나 부반장은 여전히 마이페이스였다. -탕! 부반장이 들고 있던 하드커버의 문제집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심심하면 자리에 가서 숙제라도 해. 괜히 방해하지 말고." 사-악하고 핏기 가시는 소리가 반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교실로 다음 수업을 위해 선생님 한 분이 타이밍 좋게 들어오셨다. "어? 박재석, 임경철. 너네 서서 뭐해?" 진유현의 강력한 눈 사인으로 인해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부반장에게서 물러 났지만 그들이 느꼈을 황당함은 곧 다음 쉬는 시간에 폭발했다. "한도훈! 너 이 새끼 죽었어! 나와 씹새꺄!!" 박재석과 임경철, 이어 나머지 두 명까지 살기 등등하다. 오랜만에 풀네임을 듣는다고 생각하면서 부반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난 다른 볼일이 있거든." 서두르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부반장을 보고 네 명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다. 완전히 자신들의 우위라고 생각했지만 반 아이들 앞에서 조롱 당하는 기분이 들자 울그락 붉그락 표정이 험상궂다. "이 새끼!" 박재석이 부반장을 향해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부반장은 그 허점 많은 공격을 한 팔로 막았다. 순간 박재석은 반격 당한다고 생각했지만 부반장은 말없이 쳐다볼 뿐이다. 교실에서의 폭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교실이야. 싸움질은 밖에서나 하자고." 차분한 부반장의 음성에 박재석은 그제야 진유현의 경고가 떠올랐다. 교실 밖에선 무슨 짓을 해도 좋지만 교실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각오하라고 해서 그들 패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우두머리 격인 오세준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네에~네에~ 하는데야 별 도리가 없다. 눈앞에서 조금의 두려움 없이 침착한 부반장의 태도가 심사를 뒤틀어지게 만들었지만 옆에서 눈치 주는 오세준의 표정도 잔뜩 굳어 있었고 등 뒤의 진유현의 시선이 따가웠다. "씨발..." 조용히 손을 내리는 박재석과 다른 무리들은 꼭지가 돌 지경이었다. 그렇게 뚫어져라 노려보는 눈들을 피해 부반장이 간 곳은 당황스럽게도 윤승현의 자리였다. "식당에서 저녁 먹을 거지? 나랑 같이 얘기 좀 하자." "나, 나?"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안절부절못하는 승호를 빤히 내려다보며 부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반 아이들은 지금이 저녁식사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식당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밥 먹으랴 떠들랴 정신 없는 아이들 틈에서 부반장과 승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다. 승호로선 매우 부담스러운 식사라 목구멍으로 음식물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우동 다 불겠다. 먹을 것을 남기는 것은 좋지 않아." 조금 있으면 잔뜩 화가 난 무리들이 식당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승호만 느끼고 있었다. 부반장은 방금 전 교실에서 있었던 소란을 잊은 듯 초연했다. 예전부터 부반장이 특이한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인물인 줄은 몰랐다. 승호는 대충 면만 걷어 먹고 뭐가 불안한지 연신 식당 입구쪽을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를 거의 끝낸 부반장 도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눈치 챘겠지만 내 몸의 상처는 너도 알고 있는 학생들이야." 주위의 소란스러움과 상반된 조용한 목소리였다. 소음에 묻힐 법도 하건만 주위에 장막이라도 쳐진 듯 부반장의 목소리는 또렷이 들려왔다. 꿀꺽-하고 승호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내가 직접 맞아보니 폭력이란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너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이제까지 가만히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들의 협박과 폭행은 혼자서 감당하기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부모님과 선생님께 알리지 않았나 쭉 궁금했는데 확실히 보복이 두려울 법도 하겠더라. 난 네가 당해오던 폭력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된장국의 마지막 국물을 떠먹으며 부반장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딱히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부반장에겐 그동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승호에겐 그게 지난번의 폭언에 대한 사과로 들렸다. 의외의 말에 당황한 것은 승호였다. 어물어물거리며 "그, 그래?" 하고 대꾸한 게 전부. 부반장이 숟가락을 놓고 한숨을 쉴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한 채 애꿎은 우동 그릇만 젓가락으로 쑤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이런 지겨운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 곤란하게도 이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아마 앞으로 한 동안은 너보다 나를 타겟으로 삼을 거다." 부반장이 순순히 행동하지 않는 한 진유현과 그 나머지 일당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교실에서의 분쟁은 피할 수 있지만 학교 밖에서의 사건까지는 진유현의 책임이 아니다. 보통 교실에서의 모든 소동을 반장이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담임은 유독 진유현에게 자신의 권한과 의무를 맡기며 골치 아픈 문제들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현이 즐기고 있다는 걸 도훈은 알고 있었다. "네가 선생님께 말씀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진유현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젓가락을 쥐고 있던 승호의 손이 흔들렸다. "유현이...아니, 반장이 그 자리에 있었어?" 어지간해선 남한테 자신의 본심을 내보이지 않는 진유현이었다. 오세준 패거리들이 욱하는 마음에 부반장을 팬 거라면 이해하지만 진유현이 있으면서 이렇게 동네방네 광고할 정도로 린치 했다는 사실이 승호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직접 당하지 않았다면 나도 믿지 못 했을 거야. 선생님이나 경찰한테 말한다고 해도 처벌 받는 건 기껏 오세준까지겠지. 반장이 남아 있는 한 넌 계속 고통에 시달릴 테고. 하지만 내가 증인이 될게. 네가 진유현을 고발한다 해도 그 고발을 무시하지 못할만한 증인이 되겠어. 이것은 너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긴급한 일이다." 국어책을 읽듯 또박또박 말하는 부반장의 표정은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만 빼면 평소와 다름 없었다. 늘 진지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진지해 보인다거나 심각해 보인다거나 하는 점은 없었지만 식탁 위에 꽉 쥔 주먹이 그가 꽤 화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승호의 얼굴은 백지장이다. "그러니까...선생님한테 이르라고?" "그래." "절대 안 돼!"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걸 느끼고 지레 놀란 승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러나 승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아이들이 훨씬 많아서 아무도 이쪽에 신경을 주지 않았다. "겁이 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래서는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돼. 언제까지 이렇게 학교생활을 지속할 거냐. 이제 겨우 일학년이야. 남은 2년 반을 놈들이 너한테 질릴 때까지 계속 당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이건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어제 내가 당한 사건 하나 가지고는 그다지 큰 벌을 내릴 수 없어. 네가 이제까지 당해왔던 일들을 알려야 놈들이 제대로 된 죄 값을 받을 수 있고 내 증언도 효력을 발해." "그래도...안 돼...할 수 없어." 두 손을 식탁 위에 맞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승호가 말했다.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그 태도에 부반장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차근차근 얘기를 계속해 나가려 했다. 승호가 느끼는 공포의 이유를 단순히 보복정도로만 생각한 까닭이다. "반장은...반장은...어떻게든 네 말을 부인할거야...선생님도 믿지 않을 거야.. 그리고...더 큰 보복이 있을 거야..." "믿도록 만들겠어. 큰 도움은 안되지만 우리 반 전체의 증언도 있다. 반장이 너를 싫어한다는 건 담임 외에 반 전체가 알고 있으니까. 정 선생님이 미덥지 못하면 역시 부모님께 먼저 말씀 드리는 편이....." "안 됏!" 고개를 가로 저으며 승호가 낮게 소리쳤다. 작지만 날카로운 비명에 도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부모님한텐 절대 안 돼......" 맞잡은 두 손이 아까 보다 심하게 떨린다. 부반장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설득을 멈추지 않는다. "부모님께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지만..." "싫어! 안 돼. 절대, 절대 부모님이 아시면 안 돼! 차라리 이대로 계속 맞고 다닌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대로 조용히 졸업만하면, 아니 어쩌면 2학년이 되어 반이 바뀐다면..." 승호의 몸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은 부릅뜬 채 식탁 위의 우동그릇만 바라보고 있었고 쉼 없이 입술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한심할 정도로 나약한 모습에 도훈은 저도 모르게 욱하고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었지만 평정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렇다고...계속 이렇게 살 거냐." 도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승호는 말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비록 하루가 다르게 부모님이 싸우고, 그 속에서 승호가 느끼는 불안감은 폭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해도 승호가 몸을 누이고 쉴 곳은 그 음침한 이층 주택집뿐이었다.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교실에서 당하는 정신적 수모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버리고 싶은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일이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더 이상 자신이 있을 곳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사이에선 요즘 부쩍 이혼 얘기가 잦아지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자신의 문제까지 거론되면 부모님의 이혼 후, 아니 어쩌면 이혼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은 버려지게 될 거라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반장의 제안은 거부할만한 하등의 여지도 없었지만 피폐한 정신 상태와 불안으로 잔뜩 위축 된 승호에겐 가망 없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더구나 진유현과 오세준에게 배경이 있다는 걸 부반장은 모른다. 증인이 아니라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있더라도, 설령 오세준 패거리 중 하나가 미쳐서 선생님한테 자백한다 하더라도 부모님께 알려지면 다 소용없다고 승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승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해보지 않고 처음부터 포기하는 거냐." 뚜둑. 부반장이 자신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서 소리가 났다. 승호는 관절이 꺾이는 그 소리가 혐오스러워서 작게 몸서리쳤다. "부모님께 알려지는 게 무서워서? 보복이 두려워서? 그렇다고 이렇게 장난감 취급을 당하면서 그저 반이 바뀌길 기다리기만 한다고?!" 부반장이 처음으로 노한 목소리를 냈다. 승호가 열기를 담은 부반장의 음성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부반장이 화내는 걸 보고 당황한 승호는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어떻게든 이유를 대야 한다면서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지만 말은 횡설수설이었다. "니,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많이 맞는 것도 아니고... 다, 다, 다른 깡패처럼 돈을 뜯는 것도 아, 아니니까....그.그... 뼈가 부, 부러지거나 어디가 잘못되도록 때, 때리지도 않고... 걔, 걔네들 빽도 있고...선생님도 오히려 화낼지 모르고..." "윤승호!!" 쾅-하고 부반장의 두 손이 식탁을 내리쳤다. 돗떼기 시장만큼이나 시끄럽던 식당이 한순간 정적을 이루었다. 곧 학생들은 "뭐야 뭐야"하고 신경질 내면서 자신들의 할 일을 하느라 식당은 수런수런 거리면서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놀라서 아직까지 굳어 있는 것은 승호가 유일했다. 부반장이 화내는 건 처음 봤다. "난 원래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눈 앞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도 싫어해. 하지만 제일 싫은 건 나약한 의지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나는. 널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나약한 건 그 나약함에서 벗어날 실마리나 기회가 없었다고, 어제 그들에게 맞으면서 생각했어. 그날, 충동적으로 널 양호실에 데려다 준 일로 나까지 연루되어 버려 매우 귀찮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기왕 연루된 거 네게 그 나약함을 벗어날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에 불과했던 거였나?!" 부반장의 말은 뭔가 어렵다. 그런데 가슴을 후벼판다. 승호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멍하니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부반장은 식탁을 두 손으로 딛고 일어서 승호의 정수리를 바로 위에서 노려보고 있었지만 끝내 승호와 눈을 마주치진 못했다. "뭐야, 뭐. 싸움이야?" "아니. 쟤 윤승호랑 1반의 부반장인데?" "뭐? 윤승호랑 한도훈?" 넓은 식당에서 몇몇 알아보는 무리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시선을 준다. 그 중 1반 학생들은 아까 교실에서의 소란을 기억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밥을 먹는 중이다. 당장 식당으로 달려 내려올 거라 생각했던 오세준 무리들이 안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와서 부반장과 윤승호에게 말 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호기심은 남아 있어서 저 둘이 무슨 얘길 하나 궁금해 하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부반장은 자리에 앉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서 이다. "말해봐 윤승호. 넌 이대로 무엇하나 변화시키지 못한 채 자신을 포기할 거냐." "니 말투는 이상해." 승호가 식탁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렇게 멋지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어. 선생님한테 고자질하나 못하고 바보 같이 얻어터지고 다닐 거냐는 거잖아." 오물거리며 말하는 탓에 발음은 불분명했다. 하지만 신경이 곤두서 있는 부반장에게 충분히 의미는 전달되었고 부반장은 승호의 자조 섞인 말투에 조금 굳어 있었다. "난...못해. 여기서 더 상황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 부반장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 눈에는 경멸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실망이다. 윤승호." 조용히 내뱉는 부반장의 말은 승호의 가슴을 후벼팠다.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오세준 패거리의 타겟은 완전히 부반장에게로 돌려져 교실에서는 승호를 부려먹고 교실 밖에서는 부반장을 밟는다는 이상한 사이클이 계속되고 있었다. 진유현은 부반장을 린치한 첫 날 이외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시험이 다가온 탓에 공부에 전념하는 듯 오세준과도 한동안 잘 어울리지 않고 있었다. 학교 뒷산이나 인근의 공터, 유령 아파트등 예전 승호가 맞고 다니던 장소는 부반장이 대신하고 있었다. 학교에선 흉흉한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진유현이 부반장은 마음껏 밟아도 좋다고 한 탓에 부반장의 얼굴은 성하지 못했다. 오세준의 취향상 담배빵은 없었지만 이빨은 몇 개가 나갔는지 모르고 안경은 벌써 네 개째 부러졌다. 그렇게 밟아 놔도 입을 꾹 다물고 언제든 반격할 기회를 노리는 부반장을 오세준 무리들은 질려하고 있었다. 세준은 감탄하기까지 했다. 맞는 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때리는 쪽도 스트레스가 쌓였고 그 스트레스를 주위 학교와의 패싸움으로 풀고 있었다. 아니, 스트레스는 핑계인지도 몰랐다. 오세준 일행들은 그동안 조용히 지내왔던 한을 풀려는 듯 예전 친구들까지 불러모아 날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인근 학교의 학생들이 교문 앞에 서 있다거나 여기저기에서 싸움 소식이 들려와 선생님들은 허둥지둥 현장으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시험이 코앞인데 심란하다고 투덜대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무서워서 학교 정문으로 못 다니겠다는 애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분위기 살벌한 반은 역시 1학년 1반이었다. 엉망이 된 부반장의 얼굴도 그렇고 크고 작은 생채기를 하나 둘씩 달고 다니는 오세준 패거리의 분위기도 심란했다. 진유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들에게 별반 다른 제지를 가하진 않았다. 담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부반장을 호출해 상담하더니 패싸움이 잦아지고서는 일거리가 늘어나 부반장을 부를 여유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틈만 나면 단체로 결석하는 오세준 일행들이 패싸움에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은 담임으로서 심각한 골치였다. 그 애들을 잡아다 족쳐봐도 시치미만 뗄 뿐이고 증거도 없다. 더구나 그들은 불량한 주제에 부모님의 재력은 그럴싸해서 공개적으로 처벌하기 매우 곤란한 학생이 오세준을 포함해 두어 명은 된다. 특히 그 오세준의 경우는 무단결석할 때마다 어디서 진단서를 끊어오는지 매번 아팠다고 거짓을 친다. 뻔한 거짓임을 알고 있지만, 진단서와 싸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얼굴을 보며 "너 어제 XX공고랑 패싸움했지!" 하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간고사 기간 내내 담임은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되었고 학교 근처에 경찰차가 몇 대 오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오세준 무리들은 싸움하는 와중에 부반장을 밟는 것도 잊지 않아서 부반장은 시험기간 중에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나 때문이야...' '그때 부반장이 나를 양호실에 데려다 주지만 않았어도... ...아니, 부반장이 말한 대로만 했어도...' '하지만...하지만 그랬다간 난 정말 집에서조차 버려지게 됐을 거야. 진유현이 더 무서운 복수를 했을지도 몰라.' '어떡해야 되지? 어떡해야 해?' 승호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어두운 아이가 아니었다. 집안의 불화는 있었지만 적어도 1학기 때는 평범하고, 잘 웃는 학생이었다. 그것이 진유현의 폭력을 거치면서 말수도 적어지고 소심함이 더해졌다. 더구나 부반장의 일이 커지면서 죄책감과 자학에 빠져 그 어느 때 보다도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죽을까?' 몇 번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중학교 때부터, 집안이 시끄러울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진유현과 친했던 1학기만해도 학교는 즐거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죽는 게 낫다고 생각 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최근 한 대도 맞지 않았다. 기껏해야 교실에서 오세준 무리들이 심부름 시키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도 그들이 학교에 잘 안 나오면서 확실히 숨통은 트여 있었다. 그럼에도 하루가 다르게 무시무시한 상처를 달고 나오는 부반장을 보면 이제까지 맞았던 상처들이 벌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중간고사가 끝난 후, 아직 붕대도 풀지 못한 부반장이 학교에 찾아오면서 1학년 1반은 한바탕 뒤집혔다. "부반장이 일쳤다!" "지금 담임이랑 다른 선생님들이랑 난리 났어! 반장도 교무실에 불려갔고 오세준네들 등교하면 학생부실로 오라고 그랬대!" 며칠 만에 나타난 부반장은 한쪽 팔에 기부스를 하고 얼굴은 멍과 반창고투성이였다. 보이지 않는 곳은 붕대로 여기저기 싸매여 있어서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었다.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병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교까지 온 이유는 담임이 듣기에 어이없는 것이었다. "유현이가 그랬다고?" "예." "그러니까....오세준이랑 임경철이랑 박재석, 김한수, 강지원. 걔네들이 주로 너를 폭행했고 반장도 포함된다고?" "예." 담임은 교무실, 그것도 아침부터 대뜸 찾아 온 부반장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요란한 얼굴과 기부스로 교무실 입장부터 눈을 끈 부반장의 말에 주위의 선생님들 대부분은 영문 몰라 하고 있었다. 수업종이 치는 바람에 궁금증을 품은 채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데에 모두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담임의 옆에서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진유현의 마음은 겉과 달리 불 같이 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래, 오세준이나 다른 녀석들이야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반장이야? 반장이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않잖아." "저도 얼마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겪고 보니 역시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더군요." 피해자가 신고를 하는데 가해자를 바로 앞에 세워 놓다니 담임이 하는 짓 중 가장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반장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진유현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가증스럽게 담임을 바라봤다. 당사자들보다 더 골치 아파진 담임은 부반장을 타이르며 "네가 뭘 잘못 알았겠지..." 하고 말을 하였으나 부반장의 태도는 확고했다. "도훈아, 그래도 왜 하필 반장이니? 유현이 성격은 부반장인 네가 잘 알 거 아냐." "하지만 도훈이가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 유현이가 무의식 중에 한 행동이 오해를 살 수도 있어." 남아 있는 선생님들이 한 마디씩 참견한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진유현도 "그래, 도훈아.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할게."라고 응수한다. 그 모습에 치를 떤 부반장은 더 이상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이 뭔가 구경이라도 난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피해학생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구경하다니 상식 이하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부반장은 생각했다. 품 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워크맨이었다. 외장형 스피커가 달려 있어서 외부로도 소리가 나갈 수 있는 제품이었다. 부반장이 그 스위치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모두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치지직...직.. 다른 녀석들까지 끌어 들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일은 뭔가 굉장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부반장의 목소리가 지지직 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조그맣게 [응, 사실 나도 궁금 했었어], [나도] 라고 말하는 박재석과 강지원의 목소리도 들렸으나 감이 멀어서 선생님들은 그 목소리가 누구 인지는 식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다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소음 속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반장의 음성이었다. [지...지직...귀여워하건 밟아 죽이건...지직...] [한마디로..지지직...] [내맘이다]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음질은 더욱 악화 되었다. 삐-비익- 하고 듣기 싫은 기계음과 그 속에 묻힌 말소리가 한데 섞여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을 정도로 한동안 소음이 계속됐다. [치이익...말해두는데...어설픈 정의감...상관하면 좋지 않....삐이---익] 처음부터 좋은 음질은 아니었지만 그날, 진유현이 부반장의 배를 걷어찬 이후의 음질은 식별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문맥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 되었다가 소음에 묻히고 다시 명확해지는가 하면 갑자기 기계음을 내며 사라져갔다. [...삐빅...지이익...기세등등하더니 기껏해야 생각한다는 게 고자질이냐?] [....지익..지익...잘못알고 있는 것 같은데..지이익...애들끼리 싸움질 한 것에 불과...지직......사소한 트러블....지직...]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삑...지익.. 오늘은 이쯤하자. 유현이 너 저녁에 과외있다면서....지익..시간이 이렇게 됐다구.] 오세준의 목소리였다.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에 선생님들 모두 신경을 놓지 않고 있었다. 진유현은 굳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지지직..네가 나서면 되는 일이 없다. 유현아.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냐. 응? 좀 봐주라...ㅈ지직...] [치익...직..저런 놈은...지지직... 확실히 밟아야 한다구.] [지직..어디 덤벼봐 상대해 주지] 이후의 상태는 도저히 들을 만한 음질이 못되었다. 소음 너머로 들리는 오세준 패거리들과 진유현의 고함소리, 뭐라고 소리치는 오세준의 목소리. 단어의 뜻은 명확히 식별되지 않았지만 그날 부반장을 향해 날뛰던 진유현을 막기 위해 오세준 패거리와 진유현이 벌이는 소란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언뜻 진유현과 오세준들이 싸우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말소리는 끊겨서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했다. -찰칵. 소음이 사라진 교무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담임은 어이없어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기계인형의 목이 돌아가듯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진유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 된 진유현은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해명하겠습니다." 반장의 주장은 이러했다. 녹음테이프의 내용은 사실이며 부반장을 린치한 현장에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친구 오세준을 말리기 위한 행동이며 실제로 그 장소에 자신이 있었던 것도 더 이상 부반장이 다쳐서 등교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마 도훈인 제가 세준이의 친구면서 끝내 말리지 못했던 게 서운했나 봅니다." 유현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감정을 내색하지 않던 부반장 조차 어이없어서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하는 지 모르겠군. 네가 오세준들과 함께 나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는 건 이 테이프가 증명해 주고 있어." 진유현은 '하아-'하고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부반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처음에 그 테이프 듣고 깜짝 놀랐어. 하지만 그날 일을 되새기며 생각해보니 뭔가가 이상하더라구. 그래 도훈아, 내가 세준이의 친구였단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그날 난 세준이를 말리러 간 거 였잖아. 그 대화들을 이렇게 편집해서 가지고 올 정도로 내가 미웠던 거야?" 부반장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날 뻔했다.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담임을 쳐다보는 유현의 얼굴은 가증스러웠다. "편집이라니? 그게 정말이냐. 도훈아?" 깜짝 놀란 담임이 의심의 눈초리로 되물었다. "말도 안됩니다. 편집되지 않았어요. 그날 진유현이 오세준을 말리러 왔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녹음 된 내용을 잘 들어보세요. 테이프의 마지막 부분에 저와 세준이랑 강지원, 김한수...걔네들이랑 저랑 뭔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잖아요. 말하기 부끄럽지만 도훈이를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세준이랑 싸움이 나버렸거든요. 여기에 녹음된 제 목소리도 굉장히 공격적으로 들리지만 그건 세준이한테 하는 경고였어요. 그게 편집되서 마치 제가 도훈이한테 말하는 것처럼 들린 거라구요!" "거짓말입니다. 진유현이 저에게 폭력을 가하려고 하는 것을 오세준이 말리려다 보니 생긴 트러블이었습니다." "말도 안 돼. 너를 린치한 세준이가 왜 나를 말렸겠어? 말에 앞 뒤가 안 맞잖아 도훈아." "처음부터 오세준은 적당히 끝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일을 크게 벌릴까봐 말린 거지. 테이프에도 나와 있잖아.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편집되면 얼마든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야. 내가 이 일을 선생님께 말하겠다고 했더니 세준이가 그렇게 말한 거잖아. 도훈아, 내가 미처 세준이를 학생부에 신고하진 못했지만 네가 계속 당하는 건 지켜보는 나로서도 많이 괴로웠다구. 그렇다고 이렇게 누명을 씌우는 건 너답지 않아." 담임은 이 두 학생의 말에 뭐라고 대꾸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서서 중재해야 할 담임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니 주위에서 보고 있던 선생들도 답답해 했다. 진유현은 끝까지 테이프가 편집된 내용이라고 우겼다. "선생님, 요즘 컴퓨터 기술이 많이 좋아졌어요. 저렇게 소음이 많은 테이프 정돈 간단히 편집해서 조작할 수 있다구요. 도훈이가 저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나오다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전 반장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나봐요." 유현이 자책하는 투로 말하자 담임이 당황했다. 주위가 모두 영문 몰라 어리둥절한 상황에 도훈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유현이만 느낄 수 있는, 노여움이 배어있는 목소리였다. "경찰에 증거물로 제시하죠." 진유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진유현을 경찰에 고소하겠습니다. 이제까지 당한 육체적, 정신적 보상을 받겠어요. 물론 오세준들까지 포함해서 입니다. 이 테이프가 편집된 거라면, 경찰에서 밝혀주겠죠." 담임이 펄쩍 뛰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뭐?" "안 돼! 경찰이라니!"하고 소리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확고한 표정의 도훈을 보며 담임은 절대 안된다고 말렸다. 경찰이 개입하면 사건이 커진다. 학교의 명예도 명예지만 담임에게 지워지는 부담도 큰 문제고 무엇보다 진유현의 부모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진유현과 한도훈의 대립은 팽팽했다. 경찰에 고소까지 얘기가 나온 마당에 두 사람은 절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당사자는 물론 지켜보는 사람까지 골치 아팠다. 담임은 일단 보류를 한 후 유현은 교실로, 도훈은 병원으로 돌려보냈다. 소문은 금새 퍼졌다. 더구나 1반의 진유현이라면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였고, 행사 때나 선생님들이 필요할 때나 이래저래 얼굴을 디밀고 다니는 통에 학교 일에 관심 갖고 있는 애들이라면 그를 알고 있었다. 성적 좋고 얼굴 좋고 집안 빵빵한 놈이 성격까지 좋다며 농담하듯 질투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모범생 반장이 폭행사건에 가담했다는 루머가 나돌고 있으니 다른 반 일에 관심 없던 아이들까지 귀를 세우고 소문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폭풍의 한가운데인 1반은 등 뒤에서 무서운 기운을 내뿜는 오세준 패거리 때문에 살기 넘치는 분위기로 변해버렸고 폭풍의 핵인 진유현은 계속 저기압이었다. 교무회의가 소집되고 반장은 수도 없이 불려갔다. 예정보다 일찍 퇴원한 부반장 역시 몸을 추스리기도 전에 교무실로 가야 했다. 한도훈이 입원해 있던 것은 불과 며칠. 두 달은 통원치료를 해야 했고 야간 자습은 금지였다. 그 와중에 진단서를 끊고 피해보상을 청구하려는 한도훈은 법적 소송까지 결심한 차였다. 오세준 패거리들은 이미 잔뜩 얻어터졌고 각각 부모님들이 다녀간 상태였다. 진유현의 문제만이 남아 주위 사람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았던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끝을 맺었다. --공고 1학년 1반 강지원 1학년 1반 김한수 1학년 1반 박재석 1학년 1반 오세준 1학년 1반 임경철 위 학생들을 2주간의 정학에 처함을 공고한다. "말도 안 돼!" "진유현 얘기는 왜 없냐? 걘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건 모르겠는데 1반 부반장이랑 서로 합의 봤다나 봐." "응? 난 1반 부반장이 오세준네한테 사주 받고 거짓말한 거라고 들었는데?" "아냐, 아냐, 오세준이랑 1반 반장이랑 원래 친했는데 그걸 안 1반 부반장이 오해하고 그런 거래." "무슨 소리야! 내가 알기론....."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삽시간에 퍼졌다. 그 파장은 컸으며 아이들의 학교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테이프에 관한 건은 현장에 있던 선생님들이 입 조심하기로 합의를 보아 모두 쉬쉬 하고 있었다. 그날 한도훈이 증거로 제시했던 테이프는 담임의 손에 들어가 그 후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오세준 패거리에게 맞아서 정신을 잃기 직전의 한도훈에게 진유현의 모습이 비쳤다. 이미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 했던 도훈에게 세준과 허물없이 이야기 하는 진유현의 모습이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도훈을 구하러 온 진유현이 오세준과 말다툼하는 험악한 모습을 보고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도훈은 착각했다...는 것. 이렇게 테이프의 진상은 가려지지 않은 채 사건은 한도훈의 오해로 마무리 되었다. 이것에는 명예를 훼손당하고 싶지 않는 학교측과 유능한 학생의 학생부에 오점을 남겨서 대학진학에 문제를 주지 말자는 일부 선생들과 진유현의 부모가 뒷작업을 벌인 탓에 이루어진 결과였다. 한도훈은 강하게 항의했다. 담임에게 테이프를 돌려 달라고 했으나 담임은 곤란해 하며 어물쩡 넘어가려 했다. 게다가 테이프를 같이 들었던 선생님들마저 도훈의 처지를 외면하고 있었다. 언제 입을 맞췄는지 오세준과 그 패거리들도 진유현이 일러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도훈은 스스로 경찰에 찾아갈 생각까지 했으나 진유현은 미성년자라 고소가 제대로 이루어질 지도 알 수 없는 판국에 증거물도 없으니 자칫하면 자신만 곤란한 입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분함을 누르고 학교측에 항의하는 것이 도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담임은 짐짓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 일은 그냥 덮어두자고 했다. "설령 니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하지만 너를 실제로 때린 애들은 처벌 받았잖아. 게다가 진유현은 한 번 밖에 안 나타났다며.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테니까 그만하자. 응? 이번 중간고사도 제대로 못 봤는데 계속 이 일에 신경 쓰느라 다음 시험에도 성적 떨어지면 너만 손해 보는 거 아니냐? 유현이도 그동안 맘 고생 심했는지 반장일 하면서도 평소 3~5등은 유지하던 놈이었는데 7등으로 떨어졌어. 너희 둘 다 그러는 바람에 우리 반 평균도 많이 떨어져서 이번 중간고사에서 3반한테 졌단 말이다." 담임은 끝까지 진유현을 믿었다. 평소 냉철하고 사리판단 정확한 부반장이라 해도 사람이 그렇게까지 폭력에 당하면 사고력이 흐려질 수 있는 거라고 담임은 애써 생각했다. 그 테이프의 진상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이미 담임 스스로의 손으로 버렸으니 확인할 방도도 없다. 그렇게 사건을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이 학교 쪽에선 최선이었다. 가증스러운 건 진유현 측이었다. 눈 앞의 폭력을 방지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라며 병원비 전부를 대주겠다고 유현의 아버지 비서라는 사람이 찾아 왔었다. 도훈은 완강히 거절했으나 이미 두 달치 치료비는 물론 이후의 약값, 검사비 등등이 병원에 납부 된 상태였다. 위로금 명목으로 돈봉투를 내미는 비서가 도훈의 표정을 보고 알아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도훈은 혼자서라도 진유현네 집에 쳐들어 갔을 것이다. 부모님은 현재 해외 근무 중이라 도훈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얼마 없는 친척들은 지방에 있거나 서울에 있어도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손주 뒷바라지 하는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릴 생각 또한 추호도 없었다. 평소 어른이라고 특별할 거 없다고 생각해온 도훈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도움이 될 어른이 없다는 게 분하다고 이를 갈며 생각했다. "야, 야, 반장이 오세준이랑 원래 친했대." "뭐야, 난 오세준이 반장한테 쫄아서 조용한 건 줄 알았는데. 괜히 김빠지네. 반장이 오세준 보다 센 줄 알았잖아." "아냐, 모르는 일이야. 깡패들 세계에도 서열이란 게 있어서 아무리 친해도 힘의 우열이란게 있대. 끼리끼리 논다고... 소문의 부반장 린치사건엔 역시 반장도 개입되어 있는 걸까?" "반장이 뭣하러 부반장한테 그러겠냐?" "그래도 명색이 반장인데 부반장이 공부는 제일 잘하잖아. 그리고 저번에 윤승호 양호실 데려다 줄 때 말야. 그때 반장 표정 봤냐? 장난 아니었어."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수학여행 일정이 잡혔어도 반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반장에 대한 신뢰도는 예전 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고 기부스를 하고 수업 듣는 부반장의 모습은 참담했다. 담임은 툭하면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냈고 몽둥이 드는 일도 잦아졌다. 정학 중이라 오세준네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교실 맨 뒷줄의 텅 빈 자리들은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아, 씨...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수학여행이냐 젠장." 이렇게 몇몇 아이들이 불만을 토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수학여행이 분위기 전환이 될 수도 있다며 기대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이 수학여행을 통해 뭔가 바꿔 보자고, 큰 맘먹고 결심한 아이도 있었다. "저기...승호야...수학여행, 우리랑 같은 조 하지 않을래?" 1학기 때 같이 어울리던 정민태였다. 뜻밖의 제안에 승호는 놀라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지만 조금 어색해 하면서 미소 짓는 민태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그래..." 계절은 가을이 무르익어 단풍이 지고 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시원했으며 노랗게 익은 은행나무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청소하는 수위아저씨의 모습마저 한가로워 보였다. 윤승호는 왠지 가슴이 뛰었다. 교실의 공기는 무거웠지만 자신에게만은 뭔가 새로운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예감했다. 오세준들도 없고 진유현도 요즘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민태와 같이 수학여행 가는 버스에 앉기로 약속하면서 정민태, 김형석, 안진영과도 조금씩 말을 하게 되었다. 모두 예전에 같이 놀던 친구들이었다. 변화가 생길 거라 예측하자 승호는 누구보다도 이 여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꼭 부반장과 얘기를 해 보자고, 우울하지만 굳은 마음으로 결심했다. 시원한 가을의 공기. 누렇게 익은 벼들의 황금물결. 분홍색 코스모스가 시골길 가장자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면 벌들은 분주히 그 위를 오간다. 고추 잠자리들이 파란 하늘을 날고 석양 무렵이 되면 허공에 성가시게 날아다니는 하루살이 무리를 피하느라 당황하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다 보면 길 끝에서 보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아버지 손에 자전거를 맡기고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아 집까지 오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누렁이와 검둥이였다. 마루 위에 말려놓은 새빨간 고추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면 그것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교정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 승호는 가끔 어릴 적 일들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곤했다. "승호야 뭐해! 빨리 와!" "응, 알았어." 승호는 서둘러 앞서가는 민태의 뒤를 따라갔다. 요 며칠 새 완전히 예전의 관계를 다시 되찾은 네 명의 소년들은 수학여행에 대한 화제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오랜만에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승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으아아아악--!!!" 비틀려 올라간 한쪽 팔에서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이 들렸다. 이어지는 발길질에 소년은 토하고 또 토했다. 등위로 쏟아지는 구둣발의 압력은 잊고 있던 고통들을 되살아나게 했다. "그만둬 무슨 짓이야!!!" 허름한 지하창고에서 벌거벗은 소년이 한 팔엔 기부스를 하고 등 뒤에서 교복 입은 두 학생들에게 짓눌린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악!!" 다른 한 소년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른 소년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나 먼지와 구둣발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웅크린 몸에 발길질을 하는 건 같은 교복을 입은 진유현이었다. "유현아, 눈에 띄는 상처는 내지 않는다며. 담임이 눈치채면 너야 괜찮겠지만 제일 먼저 우릴 의심한다구." 어두운 지하창고를 희미한 형광등 빛 하나에 의지한 채 서너 명의 소년들이 담배를 피우며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맞고 있는 소년은 윤승호였고 벌거벗은 소년은 한도훈이었다. 속옷바람으로 박재석과 김한수에게 자유로운 팔이 붙들려 꿇어 앉혀진 도훈은 죽일 듯 진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유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옷차림은 단정해서 넥타이도 깔끔히 매여 있었지만 표정이 이상했다. 눈빛에 광기가 어려 있었다. 친구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오세준은 유현을 말렸다. 세준은 유현을 힐끔 보더니 한숨을 쉰다. "뭐, 내 친구들은 저기 있는 부반장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데... 저 녀석은 어떻게 할거야?" 오세준 뒤로 살기어린 눈을 번뜩이며 임경철, 강지원이 목재 위에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한도훈을 누르고 있는 녀석들은 당장이라도 도훈을 밟고 싶었으나 진유현의 허락이 없는 통에 이빨만 갈면서 욕지거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한도훈은 포기해. 저 자식이라면 불구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너희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거야. 안타깝지만 직접적인 린치는 너희들 정학이 풀리고 한동안 조용해진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유현의 싸늘한 말투에 담배 피던 두명은 "어우-썅" 등의 욕설을 하며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고만 있었다. "잘 아는군. 반장. 그런데 지금 또 이런 일 벌이는 건 뭐냐. 이번에도 너희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동원하여 빠져나갈 생각인가?" 도훈이 분을 참고 애써 차분히 말하려고 노력했다. 진유현은 바닥에서 겨우 숨을 고르는 승호를 바라보다가 도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쪽 입술만 틀어 올려 웃으며 유현은 비아냥댔다. "왜? 이번에도 녹음하게?" 도훈의 몸이 꿈틀거렸다. 화를 참지 못해 이빨을 악 다문 도훈을 뒤쪽의 녀석들이 힘으로 짓누른다. 꽤 서늘한 계절임에도 팬티 한 장 차림의 한도훈은 분노로 몸이 추운 것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부반장 옷을 벗기라고 한 거야? 또 소형녹음기라도 갖고 있을까 봐?" 오세준이 으쓱하며 참견한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마 저 녀석이 그런 걸 갖고 있을 줄 몰랐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진땀 뺐는지. 다행히 잘 마무리 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저 녀석이 기어오르는 바람에 반 분위기가 아주 개떡같이 되서 말이야." "큭큭...그래 얘기는 들었다. 유현이 너 애들한테 신임을 잃었다며?" "쯧...신임을 잃다니, 그저 너랑 나랑 친구라는 게 밝혀지면서 몇몇 놈들이 멋대로 실망한 것 뿐이야." 오세준의 표현이 맘에 안 들었는지 진유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요즈음의 분위기는 확실히 유현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비록 자신은 무고하게 끝났다 하나 불명예스런 문제로 학교에 아버지 비서가 다녀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테이프를 들은 선생님 중엔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황을 잘 모르는 아이들마저 슬슬 유현을 피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예전보다 더 따르는 멍청한 녀석들도 있다. 그리고 제하의 잔소리는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리고 가장 짜증나고 화가 치밀어 올랐던 건 발 아래의 윤승호였다. "어때? 친구놀이는 재밌었어?" 유현이 구두 끝으로 승호의 턱을 툭툭 쳐댔다. 승호는 아까 비틀린 팔을 잡고 벽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요령 좋게 비틀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은 팔에 이상은 없었지만 아직도 저릿저릿한 느낌이 남아 승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흐음...수학여행을 그 놈들이랑 조 짜기로 했다며?" 유현이 이죽거린다. 승호는 아무 말없이 무릎을 모으며 웅크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도훈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오세준 외 네 명의 학생들은 눈을 부라리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불만표시의 전부였다. 진유현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허락 없이 도훈을 건드렸다간 오세준이 가만 안있을 거다. 그들의 불만을 코끝으로 비웃던 진유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재밌는 거 보여줄까?" 진유현이 눈을 빛내며 승호의 목덜미를 잡아챈다. "악-"하는 소리를 내며 질질 끌려 나온 승호의 눈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유현의 눈이 기분 나쁘게 번들거린다. "세준이한테 얘기 듣기로...너네 이런 거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스트레스정돈 풀릴 거야." 오세준은 "호오-?" 하는 소리를 내더니 금새 기대하는 표정이 되었고 다른 아이들도 "뭔데?뭔데?"하는 얼굴이다. 한도훈은 움틀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고 했으나 뒤에서 누르는 힘이 녹록치 않다. 덩치 두 명의 힘을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무력하게 눈만 부릅뜬 채 노려보던 도훈은 잠시 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윤승호의 머리채를 뽑을 듯이 잡아챈 진유현이 그 입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고 있었다. "휘이~" 누군가의 입에서 휘파람이 나왔다. 다분히 야유조의 휘파람이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유현은 승호의 입술과 혀를 잡아뜯을 듯 짓씹었고 승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그마저도 유현의 입에 삼켜지고 말았다. "아...아프....아팟!...앞...." 비릿한 피가 목구멍을 타고 전해졌다. 진유현이 입을 떼었을 때 승호의 입은 붓고 갈라지고 터져서 피가 송글송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한도훈은 머리가 멍해서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승호는 유현을 마주보기가 무서웠다. 입이 따가웠다. 그리고 유현이 잡고 있는 팔이 너무 아팠다. "악-!" 와이셔츠의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진유현이 부드러운 살점을 물어 뜯는다. 비명을 지르며 유현의 머리와 어깨를 쥐어 뜯는 승호의 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양 팔로 승호를 감싸듯 결박한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유현의 품에서 지하실 전체로 울려 퍼진다. 승호의 바지가 벗겨지고 맨살이 드러났다. 허벅지를 쥐어뜯는 유현의 손은 에로틱하지 못하다. 여기저기 유현이 이빨로 물어 뜯는 통에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흐르는 승호는 고통과 분노와 억울함으로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손에 집히는 건 닥치는 대로 잡아 뜯었다. 진유현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뜯어내고 교복 와이셔츠를 잡아 뜯고 뭐든 가까이 있는 건 이빨로 물어버렸지만 그에 못지않게 진유현의 난폭함은 원시적이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앗---!!!!!" 상처를 물어뜯고 피가 나면 있는 힘껏 빨아먹었다. 이미 승호의 상체엔 대 여섯 개의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아직도 피가 흘러내렸다. 귓불에서도 이빨자국과 함께 송글송글 핏방울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면 진유현은 혀를 내어 길게 핥았다. 그리고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을 때까지 이빨로 자근댄다. "야, 저거 진짜 잡아먹는 건 아니겠지?" "설마....그런데 저래서는 죽어버리는 거 아냐?" "빙신아, 저 정도로 죽냐." 바짝 긴장한 무리들이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도 잃은 채 침을 삼키며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은 승호의 저항이 성가시다 싶으면 배에 주먹을 찔러 넣기도 하고 세차게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넥타이를 풀어 제치고 승호가 잡아 뜯어 단추 서너 개가 나간 와이셔츠에 산발이 된 진유현은 눈만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거의 미친 사람 같았다. 오세준이 드물게 진지한 눈이 되어 지켜보고 있었다. 한도훈은 있는 힘껏 소리치며 그만두라고 외쳤지만 새겨 듣는 이는 없었다. "제기랄....어째서 너 따위가..." 승호의 남은 옷들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벗겨내며 유현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 따위가 왜..." 승호만이 그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유현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 의미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피가 엉겨 붙은 손으로 자신을 밀쳐내려는 승호를 힘으로 짓눌렀다. "젠장, 너 따위가 왜 이렇게 거슬리는데..." 손으로 더듬어 승호의 항문의 위치를 찾아냈다. 유현이 중지 손가락을 대충 넣다 뺐지만 어깨를 물어 뜯기는 통에 승호는 알지 못했다. 우악스럽게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가고 무언가 낯선 물체가 항문을 찢으며 들어 올 때 승호는 머리 회전이 정지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담배피던 소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사람의 처절한 비명이라는 게 이렇게 소름 끼치는 것이리라곤 생각도 못한 도훈은 반사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도훈은 유현이 앞섶만 푼 채 승호의 하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잊었다. 그러나 승호의 몸이 미친 듯이 부들거리고 그 다리를 타고 진득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나서야 상황파악이 된 도훈은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탈력감을 맞보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승호의 비명도, 지켜보던 아이들의 감탄인지 불만인지 모를 낮은 욕설도. 마치 귀가 잘못되기라도 한 듯 지잉-하는 이명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반장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곧 승호는 죽을 거라는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한도훈의 얼굴에서 공포가 어린 것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었다. "그만둬어어어어-------!!!!!!!!" 뒤에서 짓누르고 있던 두 사람은 의외의 힘으로 밀치는 도훈에게 깜짝 놀라 순간 방심했다. 기부스한 팔의 석고가 부서져 나가는 것도 잊고 도훈은 그들에게서 빠져 나오는 대로 진유현에게 달려들었다. 진유현은 신음 소리만 꺽꺽 내며 반쯤 기절해 있는 승호의 몸을 붙들고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드는 도훈을 제지한 것은 오세준이었다. 세준은 등 뒤에서 도훈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재빨리 감아 올렸다. 도훈의 뒷덜미로 감아올린 자신의 손을 마주잡고 세준은 힘을 주어 그 양 어깨를 꺾었다. "윽"하는 소리와 함께 도훈이 인상을 썼지만 발버둥치는 몸은 어깨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진유현을 막고 말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놔! 너희들 제정신이 아냐, 놔!" "여기서 네가 더 난리쳐 봤자 상황은 나아질게 없어. 쯧쯧...네가 윤승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아니. 그냥 유현이 한테 눈 딱 감고 한 번만 고개를 숙였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을..." 도훈이 눈을 부릅뜨고 세준을 노려보려고 했으나 그가 자신의 등 뒤에 있어서 쉽지 않았다. 대신 눈을 부릅뜬 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승호의 몸에 달라붙어 추악한 행위에 열중하는 진유현을 죽일 듯 바라보며 어금니를 깨물고 말했다. "이게, 내 탓이라는 거냐? 나에게 책임을 돌리는 거냐? 잘못된 건 너희들인데, 부조리한 건 너희들인데! 어째서 내가 너희들한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거냐!" "세상은 부조리해 부반장.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어." 부반장이 고개를 힘껏 젖혀 오세준의 코를 들이 받으려 했다. 오세준은 "이크크"하며 겨우 피했지만 스치듯 턱에 맞아 혀를 깨물 뻔 했다. "모두가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 없어! 원래 그런 거라고 체념하며 지내면 평생 그렇게 체념하고 사는 수 밖에 없는 거다! 너희들의 죄 값은 반드시 받게 하고 말 거야. 오늘 이 일은 절대 잊지 않을 거다--!!!" 서늘했던 지하실은 긴장과 흥분으로 달아 올라 있었지만 그 공기만큼은 칼날같이 날카로웠다. 진유현이 윤승호를 뜯어 먹듯 안는 것도, 부반장과 오세준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도, 다른 무리에게는 초조하고 땀을 쥐게 하는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허공에서 스파크가 일듯한 날카로운 분위기는 지켜보는 입장이라고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하체에 피가 잔뜩 엉켜 눈이 풀린 채 늘어져 있는 윤승호는 이미 시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유현은 피로 범벅 된 자신의 것을 바지 속에 다시 넣었지만 아직도 승호의 몸에 남아 흐르는 피를 핥느라 도훈과 세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의 끄트머리에 피가 엉겨 붙고 입가도 시뻘건 진유현의 모습은 미친 사람마냥 무시무시해서 그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부반장을 보면 종종 느끼는 거지만 말야. 말투도 국어책 같고 굉장히 교과서적이란 말야. 너 사실 윤승호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 왜 그렇게 쟤를 감싸는 건데?" "싫어하는 것과 이것은 별개의 일이야.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강도를 당하면 신고 정도는 해주는 게 기본이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눈앞에서 당하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잖아!!" 부반장이 몸부림쳤다. "허어~"하고 혀를 차던 오세준이 뒤에서 도훈을 붙들어 맨 그 자세로 도훈의 목덜미를 혀로 핥았다. "너도 승호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야?" 능글맞게 중얼거리는 세준의 말에 도훈은 분노로 간신히 유지하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죽여버린다--!!!!" 싸움의 요령만 모를 뿐 도훈은 키나 완력이나 세준에게 뒤지지 않는다. 제대로 이성을 상실한 부반장이 발악하자 오세준은 "아차"하며 버거워 했고 그제서야 다른 네 명이 당황하며 달려들었다. 넷이 달라붙어 도훈을 바닥에 꿇게 만들었다. 기부스한 석고는 절반이 깨져서 바닥에 석회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도훈의 일곱 번째 안경이 박살이 나서 저만치 굴러가 있었다. 거친 숨을 쉬며 충혈된 눈으로 오세준을 올려다보는 도훈의 얼굴은 악귀의 형상이었다. "난 다 끝났는데 너희들 쪽은?" 세준의 등 뒤에서 유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발하던 머리는 다시 정돈되어 있었다. 교복은 이미 더러워져서 피와 먼지가 여기저기 엉겨 있었지만 유현의 표정은 예전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런 평온함이 입가와 턱 전체에 퍼진 혈흔과 대비를 이루어 지독히도 부조화스러웠다. "어때, 너희들 중 생각 있는 놈은 가서 해도 좋아. 시체 같은 승호자식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팔팔하게 살아 있는 한도훈도 괜찮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유현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도훈을 향해 웃어 주었다. "도훈이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매우 궁금해지는데?" 한도훈의 입가가 비틀리며 증오를 담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디 해보시지. 네 놈들의 정액 채로 고스란히 가져다가 경찰서로 달려갈 테니까. 이번에야 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겠군." 다시 이성을 회복한 도훈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전혀 주눅들지 않은 도훈의 모습에 보고 있던 다른 네 명은 기가 질렸지만 유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기 있는 승호에게 관심 있는 사람 없어? 내가 너무 격하게 놀았는지 너덜너덜해 졌지만... 그래도 생각 있으면 한번 해 보라구." 오세준 무리는 유현에게도 질려버렸다. 가벼운 스트레스 풀기로 정욕을 해소하기엔 승호의 몸은 만지고 싶은 기분조차 들지 않게 생겼다. 전염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보이는 울긋불긋한 흉한 상처가 가슴을 붉게 물들였고 무릎에는 교복바지가 반쯤 걸린 채 하체는 피에 절어 있었다.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혀 기절한 그 모습은 아무리 상대가 여자였다 해도 행위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빼기야? 너네들 아직 그 쪽으론 처음? 그럼 경험 있는 세준이가 시범을 보이는 건 어떨까. 세준이도 꽤 거친 거 좋아하지?" 이죽거리는 유현을 발끈하면서 쳐다보지만 세준이가 경험 있다는 말에 휘둥그레져서 다른 세 명은 세준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시체랑 하는 취미는 없다구. 유현이 네가 살 다 발라먹고 우리한텐 뼈만 주기야? 저런 거랑 무슨 재미로 하냐?" 진유현이 김샜다는 듯 쳇-하고 혀를 찬다. 옆에서 "주, 죽은 걸까?" "모,몰라..." 박재석과 강지원이 수군거린다. "안 죽었어. 내가 그 정도도 조절 못할까 봐." 진유현이 방긋 웃었지만 강지원은 '조절 못하잖아!'하고 속으로만 외쳤다. "이런 짓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음험한 소리에 유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언가 십 년 묵은 체증을 확 풀어 버린듯한 상쾌한 표정의 유현은 아까만 해도 눈에 가시 같던 도훈이 이제는 그렇게 거슬리지도 않았다. 살기를 담으며 노려보는 얼굴도 오히려 기분 좋을 정도다. "왜. 경찰에 신고하게? 승호가 그걸 바랄까?" 도훈의 어금니를 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선생한테 말하려고? 쟤네 부모한테 상의해보려고? 승호가 자기네 부모를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그런 짓 했다가는 저 녀석, 진짜 자살이라도 할 걸." "이미 자살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야! 차라리 주위에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편이 승호를 보호하는 길이라구! 그런 식으로 협박한다 한들 나한테 통할 거 같아?!!" 진유현이 묘한 표정으로 도훈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유현이 조용히 그러나 왠지 부드럽게 말했다. "너 진짜, 윤승호에 대해선 모르는구나. 꽤 친할 줄 알았는데." "뭐?" "윤승호는 자살 안 해. 왜 인줄 알아? 자기가 자살하면 부모님들에게 폐가 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어찌 될지는 또 모르는 일이지." 진유현의 말에 대꾸할 말을 잃은 도훈은 딱딱하게 몸이 굳어졌다.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증오도 차갑게 가라앉아 다시 예전의 이성이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윤승호가 부모님을 무서워하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지난번 식당에서 했던 대화를 떠올려 보면 진유현의 말이 허튼 소리는 아닌 듯했다. 따지고 보면 도훈은 승호를 위해 무언가 할 생각이 없었다. 승호를 설득할 생각도 없었고 도와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원치 않게 연관되어 버린 이상 최소한의 할 일은 하자고 생각한 것뿐이다. 자습이 방해 되는 게 싫어서 승호를 양호실에 넣어 버렸고 오세준 일행과 대립한 것도 승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식당에서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하자고 한 것도 그게 옳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었고 중간고사 기간 내내 맞고 있으면서 바로 담임한테 이르지 않은 건 시험기간에 문제 일으키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덕분에 일은 악화 되어 전치 12주의 부상을 당했고 성적도 떨어졌다. 기껏 담임한테 얘기 했어도 결과는 참패였다. 옳은 것, 합리적인 것, 바른 선택을 했다고 믿었으나 지나치게 고지식했고 정직했다. "뒤처리 부탁한다고 부반장~!" 오세준과 그 무리들은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승호를 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 멍하니 앉아 있는 도훈을 향해 침을 뱉으며 저들끼리 욕설을 주고 받는다. 오세준은 손까지 흔들며 도훈의 옷을 던져 주었고 진유현은 도훈을 향해 비웃음을 보내며 느릿느릿 지하창고를 빠져 나가고 있었다. 승호는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코 끝에서 미약한숨이 겨우 느껴지는 걸 알고서야 한숨 놓았다. 멍하니 상처투성이의 승호를 바라보며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거만했던 거야." 죽은 듯 새하얀 승호의 얼굴은 피와 먼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네 입장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건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거였지. 도와 줄 마음이 없으면서 형식적인 행동만 했어. 상황을 얕보고 너를 깔봤다. 책에 쓰여진 해답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 거라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도훈은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 입고 승호의 몸을 일으켰다. 신음조차 없이 꿈틀거리며 경련하는 몸은 고통을 느끼되 의식은 아직 없었다. 피가 말라붙은 다리에 바지를 입히고 찢어진 승호의 와이셔츠대신 자신의 것을 입혔다. 승호를 들쳐 업고 두 명 분의 가방을 챙겨 지하창고를 나서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바람은 쌀쌀했다. 무작정 큰 길로 나가 겨우 택시를 잡은 도훈은 병원을 가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자신의 집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택시기사가 여러 가지로 참견하는 바람에 도훈은 대충 둘러대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이틀째 고열을 앓고 있는 승호는 도훈의 할머니가 간호하고 있었다. 부반장이라 승호네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던 도훈은 우선 승호의 집에 전화를 하려 했으나 사흘 내내 아무도 안 받는 통에 승호의 부모님과는 통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승호대신 도훈이 결석계를 내주었고 담임은 "이번엔 윤승호냐."하고 짜증냈지만 순순히 승호의 결석을 병결로 처리해 주었다. 진유현은 한동안 시치미를 떼고 있었고 오세준 패거리도 아직 정학 기간이었다. 승호의 친구들이 부반장에게 찾아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도 독감에 걸렸다고 둘러댈 뿐이었다. 문병 오겠다고 떼쓰는 정민태를 말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 "썩을 놈들! 어린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천벌을 받을 것들......" 승호가 불량배들에게 당했다고 알고 있는 도훈의 할머니는 혀를 차며 보이지 않는 깡패들을 향해 폭언을 했다. 남자아이가 강간을 당한 통에 늙은 할머니는 심장이 내려 앉을 뻔했으나 오랜 경험과 숙련된 솜씨로 치료해 주었다. 덕분에 병원보다 집을 선택한 도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병원으로 가면 아무래도 부모님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단 승호의 의견을 물은 뒤 신고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도훈은 할머니에게 승호의 몸에서 나온 정액을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남사스러운 것을 왜 보관하냐며 펄쩍 뛰신 할머니였지만 경찰에 증거물로 제출할 거라고 말하자 꺼림칙해 하면서도 할머니는 알았노라고 대답했다. 승호가 깨어난 건 하루가 더 지난 뒤였다. 승호는 자신이 한도훈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으나 할머니의 따뜻한 간호에 마음을 놓았다. 한도훈의 할머니는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배가 아플 때 괴상한 노래를 부르며 배를 쓰다듬어주던 그 주름 잡힌 따스한 손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졌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돈 때문에, 서로의 사업 때문에 악다구니를 쓰지 않던 그때가 가슴 저리도록 생각이 났다. 그제서야 서러워져서 승호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도훈의 할머니 몰래 한 참을 울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마음 속 한 곳에선 도훈에게 떠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도훈도 피해자다. 그리고 그 1차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원망만 할 수도 없다. 결국 진유현이 밉고 증오스러운 것이다. 시원하게 진유현을 원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왔었다. 그렇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예전의 관계를 못 잊어 질질 끌어 왔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유현에게 물어 뜯기던 지하실에서의 일로 그 질긴 미련을 끊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맘껏 미워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불 속에서 오열하며 승호는 자신이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집에 전화했는데 계속 안받으셨어. 부모님 핸드폰 번호 알지?" 도훈이 머뭇거리며 무선전화기를 내밀었다. 승호는 아무 말없이 전화를 받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한 참 울렸지만 어머니는 받지 않으셨다. 몇 차례 전화 후 통화가 안되자 아버지 번호를 눌렀다. 서너 번 신호가 간 후 금새 전화 연결이 됐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순간 울컥하고 울음이 솟아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러 참고 승호는 겨우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 저 승호인데요..." "승호냐? 그런데 핸드폰에 찍힌 번호는 누구냐? 친구네 집이야?" "얘, 제가 며칠간 친구네 집에 신세지게 됐는데요...저...." "쯧. 벌써부터 그렇게 외박하는 거 좋아하면 못쓴다. 적당히 놀다가 집에 들어가. 지 엄마 닮아서 쏘다니는 거 좋아하기는..." 승호의 아버지는 승호가 사흘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전혀 모르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저...집에 계속 전화했는데 아무도 안 받으시던데..." "뭐?! 그 여자 또 집에 안 들어갔어? 이런 망할... 아무튼 아빤 여기 부산이야. 한동안 집에 못 들어가는 줄 알고 있어. 그럼 바빠서 끊는다." 뚜-하는 신호음이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왠지 허탈해지는 것을 느끼며 승호는 전화기를 도훈에게 건네주었다. "뭐래? 걱정 많이 하셨지? 화 많이 내시던?" 도훈의 말에 잠시 어이가 없어져서 "하하"하고 작게 웃었다. "두 분다 요 며칠간 집에 안 계셨나 봐. 잘 된 일이지. 어차피 이런 거 알려져 봤자 좋지 않으니까." 승호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도훈은 그런 승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진유현의 정액. 할머니가 보관해 뒀어. 네 피랑 같이 엉켜 있으니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거야. 네가 생각만 있다면 학교가 아니라 직접 경찰에..." "그만!!" 승호가 귀를 틀어 막으며 몸서리 쳤다. 자신이 너무 직접적으로 말했다며 도훈은 후회했다. "미안..." 승호는 무릎을 세워 그 틈에 얼굴을 넣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떨리는 몸은 진유현이 무서워서 인지 그날 일이 떠올라서 인지 아니면, 부모님께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인지 본인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마..." "......" "절대, 절대 아무한테도, 경찰도 선생도 우리 부모님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난 죽어버릴 거야. 알았어? 절대 말하지마!" 승호가 눈을 부릅뜨며 도훈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맺힌 눈엔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했다. "말 안 할게. 약속해." "그, 그... 진유현의 그...게 묻어있는 것도 버려. 내 피랑 같이 있다며. 그딴 거 버려, 아니 태워! 증거 따위 남기지마!" "알았어. 그렇게 할게." 도훈은 순순히 대답했다. 왠지 평소의 한도훈 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승호는 도훈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너는 괜찮아?" 승호가 표정을 알 수 없는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난 기절해서 잘 모르겠는데...너는 맞지 않았어? 혹시 너도 당한 건..." 자신이 말해놓고 승호 스스로 몸서리쳤다. 도훈에겐 그날 기부스가 깨져서 상처가 덧난 것 외에 새로 생긴 외상은 없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일주일을 더 석고덩어리를 팔에 차고 있어야 했지만 승호에 비하면 약과라고 도훈은 생각했다. "아니, 난 멀쩡해 지나칠 정도로" 도훈은 자조의 웃음을 띠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차라리 내가 당했다면 경찰에 신고하기도 쉬웠을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 역시 오만에 불과하다며 스스로를 책했다. 당한 사람의 고통은 당한 자 밖에 모른다. 그것을 '나라면...'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이미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그래...다행이다..." 승호는 한숨을 쉬며 웅크렸던 몸을 폈다. 드러난 상체는 반창고투성이 어서 보기 흉했지만 기운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 숨을 돌리고 나니 승호는 자신이 그다지 부반장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따지고 보면 부반장도 나로 인한 피해자야.'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좀 더 자고 싶어." "그래. 쉬어." 승호는 이불 속으로 몸을 누이며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만두라고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부반장의 고함을. 문을 열고 나가려는 도훈의 등을 향해 승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승호는 벌써 의식이 반쯤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방금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훈은 문 앞에서 굳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심한 자괴감에 빠져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도훈은 유난히 멍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옆에서 말 걸어도 딴 생각하기 일쑤였고 쉬는 시간마다 하던 복습도 잘 안하고 있었다. 수학여행 날짜가 다가와서 학급임원의 일이 쌓였지만 뭔가 나사 하나 풀린 것 같았다. 확실히 일 처리는 제대로 하고 있었지만 보는 사람이 불안했다. 반장인 진유현과는 싫어도 마주치게 되어 있었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승호가 다시 등교했다. 꼭 수학여행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수학여행에 불참할거라는 예상과 달리 승호는 수학여행 참가자 명단에 올라와 있었다. 도훈은 가능한 말리고 싶었지만 승호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진유현과 결판을 낼 거야. 아니, 결판이 나지 않아도 좋아. 이번 여행에서 녀석에게 기 죽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해. 더 이상 그 자식한테 미련 없어. 그 자식 뜻대로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왜 한 번 밖에 없는 수학여행을 그 자식 때문에 포기 해야 돼? 이제 겨우 민태랑 형석이랑 진영이랑 다시 친해졌는데 왜 나만 빠져야 되냐구. 그 자식이 뭔데, 내가 왜 그 새끼 때문에...내가 왜..." 동공이 풀린 눈으로 승호는 허공에 읊조리듯 말을 토해냈다. 그 사건 이후로 승호는 더욱 주눅이 들 거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발악하는 모습이 도훈에겐 더 불안했다. 이러다가 승호의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학교에 등교한 후로도 승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때때로 굉장히 추운 듯 양 팔을 감싸 안고 부들부들 떨거나 초점 없는 눈으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러다 사람 하나 망가질 거라고 도훈은 머리를 감싸 쥐며 답답해 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되었지?' 하지만 이미 연관되어 버렸다. 여기서 손을 끊는 것은 그야말로 비겁한 짓이라고 도훈의 가슴이 끊임없이 질책한다. 평소처럼 관망하는 자세로 되돌아가는 건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다며 도훈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자신의 방법대로 해결하려 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갇혀 도훈은 무력한 자신을 비웃었다. 수학여행 날짜가 다가왔다. 1학년 1반 아이들은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 오세준 일행이 예전보다 조금 빨리 정학에 풀려 이번 여행에 참가한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반 분위기는 먹구름 속으로 침체되어 들어갔다. "씨발, 저 새끼들은 정학 풀리자 마자 수학여행이래?" "그냥 지들끼리 놀지 일정 빡빡한 수학여행엔 뭐 볼 거 있다고 따라온다냐?" "아우~~이거 어디 제대로 놀겠냐 젠장." "그래도 1학기 소풍 땐 이 정돈 아니였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분위기가 같냐? 저 새끼들, 완전 본색을 드러냈는데 그 앞에서 관광버스 춤추며 놀자고?" 여기저기서 상스러운 욕이 흘러 나오지만 당사자들은 여유만만이다. 버스의 가장 뒷자리를 차지하고선 서로 키득대는 오세준 패거리들은 아직도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필시 정학 중에도 끊이지 않던 어디어디 남고와의 싸움 탓에 입은 상처라고 아이들은 생각했다. 그런 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담임만이 "짜식들, 오늘따라 말도 잘 듣고 조용하네." 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승호는 민태랑 앉아 오늘 가져 온 간식거리를 뜯어놓고 있었다. 아직 버스는 출발하기 전이라 서로의 간식을 교환하거나 킥킥대며 수다떨기에 전혀 불편함은 없었다. 도훈은 아픈 몸으로 담임의 잔심부름을 유현과 같이 하면서 틈나는 대로 승호를 흘끔거렸지만 정민태, 김형석, 안진영들과 활짝 웃으며 떠드는 모습에선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도 윤승호한테 관심 있냐?" 반장 진유현이 간식 담긴 박스를 나르며 비웃었다. 멀쩡한 다른 팔로 비교적 가벼운 상자를 들고 가던 도훈은 움찔했지만 그 사건이 있던 날 이후 반장과는 학급일 이외에 한 마디도 사적인 얘기를 나누지 않았었다. 요 며칠 그래왔듯 도훈은 반장의 비웃음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너 요즘 계속 윤승호 훔쳐봤지? 하긴, 그때 그런 걸 봤으니 좀 달라 보이기도 할거야. 왜, 이제 와서 새삼스레 꼴려?" -툭 상자를 떨어뜨린 도훈이 주먹을 쥐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유현을 노려봤다. 멀찌감치 걸어가던 3반 반장이 "으악! 먹을 게 담긴 상자란 말야!" 하고 호들갑 떠는 게 보인다. 도훈은 딱딱한 얼굴 그대로 진유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상자를 마저 운반했다. "큭큭큭 한도훈. 의외란 말야. 네 녀석이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하는 거 나 처음 봤다고. 그렇게 윤승호가 좋아?" "조용히 해라. 다른 아이들이 들으며 이제껏 힘들게 쌓아 올린 이미지가 무너질 테니."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고 도훈은 빠른 걸음으로 반장에게서 떨어져 갔다. 한시도 같이 있기 싫은 거다. 그러나 도훈의 그런 반응을 즐기듯 유현은 입술 끝으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대충 담임이 시킨 잡일을 끝내고 버스로 돌아 오니 김제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화낼 거냐." 진유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윤승호한테 무슨 짓 했는지 아직 가르쳐주지 않았어." 제하는 유현에겐 시선도 주지 않으며 말했디. "그냥, 평소보다 좀 심하게 손봐준 것뿐이야. 물론 네가 그런 거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이건 내 문제야." 유현역시 제하를 보지 않은 채 정면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를 보지 않은 채 이뤄지고 있었다. "그저 때린 정도로 저렇게 맛이 가지 않아. 지금 윤승호의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흐음. 나도 수학여행 안 간다고 버틸 줄 알았는데 스스로 가겠다고 하니 의외야. 하지만 뭐가 어쨌다는 거지? 윤승호는 지금 친구놀이에 빠져 그 어느 때 보다 즐거워하고 있다구." "날 속일 생각 마. 윤승호에게 무슨 짓 했어. 오세준에게 물어 볼 수도 있었지만 네 입으로 듣고 싶다. 진유현." 이를 가는 듯 짓씹는 소리로 제하가 뇌까렸다. 겨우 화를 억제하며 말하는 제하의 음성엔 노여움이 어려 있었다. 유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릴 때부터 봐 왔고 그랬기에 더욱 속일 수 없는, 이 눈치 빠른 친구의 얼굴을 비로소 바라보았다. 며칠간 제하의 잔소리에 시달려 왔다. 드물게 화난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분노를 담아 윤승호에게 한 짓을 추궁했다. 윤승호를 그렇게 한 뒤 줄곧 제하와의 진지한 대화를 피해왔지만 이렇게 여행가는 버스에서 한 자리에 앉게 된 이상 회피할 방도는 없었다. 제하는 작고 귀여운 얼굴이지만 상황을 꿰뚫어 보는 훌륭한 통찰력이 있다는 걸 유현은 안다. 특히 자신에게 관한 일이라면 더욱 속일 수 없다. 유현은 제하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진유현 너..." 제하가 유현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정면으로 들여다본 제하의 눈은 유난히 까맣게 느껴졌다. 노여움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에 '설마'하는 의혹의 빛이 어린다. 유현은 제하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제하의 얼굴에 경악과 의심의 빛이 스친다. "설마 강간한 건..." 진유현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고개를 돌렸다. 보통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지만 제하라면 다르다. 지나치게 눈치 빠른 녀석을 친구로 두는 것도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진유현은 인상을 썼다. "너 이 자식!" 느닷없이 제하가 유현의 멱살을 잡아 올리던 통에 수런거리던 버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윤승호와 그 친구들은 물론, 한도훈부터 오세준 패거리, 기타 등등 반의 모든 아이들이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온 맨 앞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유현의 멱살을 잡고 있는 제하의 얼굴은 이제껏 아이들이 한 번도 보지못한 무시무시한 표정이었다. 멱살을 잡힌 진유현의 표정은 의자에 가려 아이들 눈에 들어 오지 않았지만 그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너...네가...네가....결국..."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앳된 제하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지난 며칠간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하의 감은 한가지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했지만 저 빌어먹게 제멋대로인 소꿉친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육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이 이렇게 현실로 드러나자 이제까지의 자제력을 상실하고 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유현의 멱살을 틀어 올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김제하, 진유현! 너네가 왜 싸움질이야 엉?!!" 분위기 파악 못하는 담임이 운전사와 함께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잖아도 담임의 심사는 요즘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그가 최근 받은 스트레스는 아무리 진유현과 그 집안이 대단하다고 해도 더 이상의 트러블마저 웃으면서 넘어갈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제하는 부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고 잠시 놀랐던 진유현의 표정도 곧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요즘 안 좋은 일이 자꾸 쌓이다 보니까 사소한 말다툼 때문에 서로 민감해져서 그래요." 담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래, 네가 제일 힘들겠지. 하지만 더 이상은 말썽 없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며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쌓인 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1반이라 제일 먼저 출발한다는 기대나 흥분감이 있을 법도 하지만 한 번 찬물이 끼얹어진 관광버스 안은 수군대는 속삭임과 불안한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야야, 김제하까지 왜 저러냐?" "쟤네 둘 싸웠나 봐? 평소 얌전하던 제하가 저러는 걸 보면 역시 반장한테 뭔가 있는 거 아냐?" "아 씨발 분위기 왜 이래. 이게 수학여행이냐? 극기훈련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겠다." 아이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진유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한도훈이 진유현 보다 세 줄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고 승호는 아무 말없이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다. 옆에서 민태가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규칙적인 속도로 과자를 하나씩 하나씩 집어먹는 얼굴에 표정은 없었다. 맨 뒷줄 창가자리의 오세준만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빙글거리고 있었고 다른 패거리들은 자기들끼리 떠들며 천박하게 낄낄대고 있었다. 버스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수십 명의 아이들을 태우고 시내 외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난 네가 두렵다. 유현아." 두 번째 휴게소를 지나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버스 안은 차츰 수학여행 특유의 소란함을 되찾고 있었다. 맨 뒤에서 오세준들이 폼을 잡던 말던 사회자를 자청한 아이가 마이크를 잡았고 한 명, 두 명 분위기에 편승해 장기자랑이나 개그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세준 패거리라고 해서 마냥 폼만 잡는 건 아니라서 반의 분위기 메이커로서 활약하는 임경철 같은 녀석은 다른 애들하고 곧 잘 어울리곤 했다. 어느 정도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꺼낸 제하의 말은 유현 외엔 아무도 듣지 못했다. 줄곧 한마디도 안 하던 제하가 차창을 바라보며 꺼낸 말에 눈을 감고 있던 유현이 그제야 제하를 바라본다. 제하는 유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슬픈 눈으로 창 밖만 보고 있다. "하지만 윤승호는 더 두려워." 승호는 환하게 웃으며 사회자의 무림 개그쇼를 보고 있었다.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그 천진한 표정은 1학기 때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서 유현의 가슴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찌푸린 인상을 피면서 진유현은 쓰게 웃었다. "나도 저 녀석에 관한 거라면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렇게 태연한 갈 보니 확실히 무서운 놈이긴 하군." 자조 섞인 진유현의 미소를 흘끗 보던 제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과 핼쑥한 얼굴이 10년은 더 늙어보인다. "너는....왜 그렇게 밖에 못하는 거냐.... 너는...사실 쟤를..." "쟤를...그 다음엔?" 말을 가로막듯 유현이 웃으며 반문해 온다. 한 꺼풀 가면이라도 쓴 것 같이 웃는 얼굴에 제하는 처연한 표정을 띤다. "너, 크게 벌 받을 거야." "나도 이제까지 내가 멀쩡한 것이 신기하긴 해." 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려는 듯 다시 눈을 감고 팔짱을 끼는 유현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윤승호를 무서워하는 건 저 녀석의 알 수 없는 붉은 에너지 때문이야." 제하는 작게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버스가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경사가 가파르게 변하는 도로를 달리며 운전자는 아이들에게 안전띠를 맬 것을 당부했다. 처음 분위기는 나빴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 가는 수학여행이었다. 아이들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창 밖을 바라보거나 농담을 주고 받았으며 그 중에는 안전띠를 풀고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담임의 호통을 듣고 쥐죽은 듯 자리에 앉아버린 학생도 있었다. 승호는 예감이 나빴다. 버스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위에 지어진 2차선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차체가 다소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한 채 아이들은 버스의 움직임에 균형이 흔들리면서도 아슬아슬하게 팔걸이에 걸터앉아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경사가 급하고 커브가 많은 고갯길의 도로라서 담임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제지 하느라 피곤이 쌓여갔다. 창 밖으로 [속도를 줄이시오]나 [사고 다발지역]이라고 표기된 팻말들이 뒤로 빠르게 사라져 갔다. 운전기사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15분 남짓. 아찔하던 절벽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면서 목적지가 가까워 지고 있었다. 승호는 괜히 나빠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주위를 연신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한도훈은 이어폰을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오세준 패거리들은 얌전히 자신들의 자리에서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가장 신경 쓰이는 진유현과 김제하는 대판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없다. 김제하는 창 밖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진유현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까까지 들떠 있던 기분이 거짓말 같다. 무언가에 홀린 듯 굉장히 불안했다. 이 여행, 처음부터 오는 게 아니었다. 기세 좋게 진유현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다고 장담하긴 했지만 약자 혼자만의 원맨쇼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엔 이 불안감이 진유현과 2박3일을 보내야 한다는 것에서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다. 이건 좀 더 원초적인 공포였다. '싫다.' '싫어.' 승호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민태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 승호야 어디 안 좋아? 멀미할 거 같애?" 양 어깨를 끌어 안으며 달달 떠는 승호를 보고 민태가 얼른 검은 비닐 봉지를 꺼낸다. 승호의 동공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확대되었다. '안 돼.' '더 이상 앞으로 가선 안 돼!!' ---빠앙 급하게 휘어진 도로의 반대편에서 거대한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운전기사 아저씨의 다급한 비명과 함께 버스가 급회전했고 2차선 도로의 바깥쪽을 달리고 있던 버스는 그대로 가드레일을 들이 받고 튀어나가 야트막한 낭떠러지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세상이 회전했다. 순간 승호는 온 세상이 새빨간 핏빛으로 변하는 환각을 보았다. 그것으로 기억은 끝이었다. 또 그 꿈이다. 붉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그런 꿈. 그리고 나는 그 바다 위를 한 없이 날고 있었다. 직접 하늘을 나는 생소한 느낌이 왠지 기분 좋아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목적도 없이 비행을 계속했다. 한참을 날다가 조금 피곤하다는 느낌이 들 때쯤 저 멀리에 자그마한 바위가 비죽이 수면위로 튀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아, 그 바위다. 언제나 내가 앉아있던 그 바위야... 왠지 반가움을 느끼며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까워 질 수록 바위는 점점 커졌고 내가 바위라고 생각 했던 것이 하나의 거대한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 섬은 아무리 열심히 날아가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피곤하다... 빨리 쉬고 싶은데...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셔왔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벼운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은 것 같지만 다행히 어디 크게 부러지거나 출혈이 심한 게 아닌걸 보면 큰 상처는 없나 보다. 그동안 잠을 설쳤더니 이 기회에 아주 푹 잔 것 같다. 그런 자신이 조금 어이없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다소 불쾌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나는 소름 끼치는 느낌을 받으며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습한 안개만이 자욱할 뿐 버스도 반 아이들도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버스에서 나만 튕겨 나온 걸까. 하지만 그랬다면 내게 상처가 없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위를 뛰어다니며 잘 보이지 않는 시야를 헤치고 미친 듯이 다른 아이들을 찾아 보았다. 아무리 안개가 짙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님에도 내 눈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사고 난 파편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혹시 내가 너무 많이 자버린 걸까. 이런! 대체 얼마나 퍼잔 거야! 황급히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시계는 금이 간 채 사고 난 당시의 시간에서 멈춰 있었다. "설마...다들 나를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설마... 아니야,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진유현이 무슨 조치를 취했다면? 오싹하는 한기가 허리에서부터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에이...아무리 진유현이라도 그런 상황에서..." 하지만 어쩌면... 진유현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갈 인간일지도 모른다. 유능한 반장의 모습과 오세준 패거리들을 조종하는 이중적 모습을 가진 녀석이 정말로 맘을 먹고 나를 버리고 갈 생각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른들과 구급대원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와주는 척하면서.... 아니야 아니야.... 아무리 녀석이 대단하다 해도 그 큰 사고에 상처하나 입지 않을 리 없다. 자기 몸 챙기기 바쁠 상황에 무슨.... 그러나 나는 곧 소름 끼치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큰 사고가 있었지만 진유현이 별 상처를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은 같이 사고를 당한 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에 전신이 떨려왔다. 나는...정말로 버려진 건가? 숲속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뛰어 다녔다. 숲의 나뭇가지에 긁혀 생채기가 나고 넘어져 무릎이 까졌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여유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숲속의 적막감이 나를 미칠듯한 기분으로 몰아넣었다. "아무도 없어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선생님!!! 1학년 1반!!! 아무도 내 소리 안 들려!!!!!" "정민태! 김형석! 안진영!!!"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내가 알고 있는 반 애들 이름을 외치며 끝에는 오세준 패거리와 진유현에 대한 욕설로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진유현 이 나쁜 자식아!! 야 이자식아!! 어딨어!! 진유현!!! 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 어딘가에서 진유현이 비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녀석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숲은 고요했다. 미치도록 고요하고 음습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울부짖으며 숲을 헤치던 나는 전신이 상처와 흙먼지투성이었다. 바지와 셔츠에는 풀물이 들었고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했다. 무섭다. 너무 무섭다. "어머니.....아버지......" 어머니의 차분하고 고운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세련되면서도 인자한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해본 부모님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보고 싶은 건 두 분의 얼굴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한참을 뛰고 울고 소리지르던 터에 체력도 떨어지면서 더 이상 패닉에 빠질 기력도 없었던 탓이리라. 습한 이끼에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안개 낀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걸까. 여기는 어디쯤일까. 아무리 진유현이 나를 숲속에 버려뒀다 하더라도 그 수라장에서 그리 멀리 오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실종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갔을테고... 지금쯤 구조대원들이 날 찾아 산을 뒤집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어디서도 사람을 찾는 외침은 들리지 않고 오싹하리만치 고요한 안개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해.... "우웨엑! 웨엑! 으웩!!" 굶주림에 못 이겨 풀 더미에 매달린 열매 비슷한 것을 먹고 15분도 안되서였다. 엄청 시고 떫어서 먹기 괴로웠던 열매였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몇 알 따먹었더니 점점 속이 쓰려 오기 시작했고 결국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끼며 냇가에 고개를 처박은 채 누런 신물만 토해냈다. 악취를 풍기는 위액을 토해내다가 한참을 헛구역질로 눈물콧물을 쏟아낸 뒤에도 고통은 가시지 않아 그대로 배를 감싸 안고 냇가를 뒹굴었다. 창자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명치끝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흐으으윽...흐으윽...." 끅끅대며 눈물을 흘려보냈다. 숲을 헤맨 지 사흘째. 풀 뿌리든 나무 등껍질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느 것이 먹을 수 있는 풀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아무거나 먹었다가 속이 뒤틀리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이번 열매는 새빨갛고 구슬처럼 투명한 게 너무 예쁘게 생겨서 먹어도 될 줄 알았는데 이제까지 덥석 입에 넣었던 다른 풀들보다 더 고약하고 더 끔찍한 복통이 뒤따랐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먹어도 되는 풀을 찾기도 전에 장이 꼬여서 죽어버릴 거다. 눈물콧물에 이어 반쯤 벌린 입에선 침이 질질 흘러내렸지만 발작이라도 하는 듯 경련을 일으키는 몸은 땅에 달라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고요한 숲속에 한가로운 새소리가 들려온다. 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곤충의 날개가 맞닿아 비벼지는 소리, 풀 내음, 흙 내음, 쾌청한 숲의 공기.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주위의 미세한 소리나 냄새, 바람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의아스럽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 대신 정신만은 또렷해서 나를 둘러싼 숲을 느끼며 한가로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래... 언젠가 사촌 형들과 함께 놀러 갔던 계곡의 숲도 이런 내음을 가지고 있었다. 도시락으로 준비해간 멋대가리 없는 주먹밥이 그때는 어떤 별미보다도 맛있었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를 타 넘거나 나무 가지에 매달리며 놀면서 어떠한 두려움도 가져보지 않았다. 어린 나에게 숲이란 것은 다이나믹한 놀이터에 불과했다. 이게 주마등이란 건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옛일이 생각난다는데.... 하지만 주마등치곤 너무 단순하잖아. 기껏해야 어릴 때 산에 놀러 갔던 추억이라니. 좀 더 그럴듯한 추억들도 많은데 말이다. 가령 오세준 놈들에게 화려하게 얻어맞고 다니던 일이라던가..... 진유현이 지하창고에서 한 짓이라던가.... 그 정도 추억은 떠올라야 나중에 죽어서 원혼이라도 될 텐데 말이지. "흐흐흐....으흐흐흐....."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솔직히 전부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생각나는 것은 미칠 듯이 고통스러웠던 몸의 기억과 광인의 얼굴을 하고 있던 진유현의 눈.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내 목소리와 후끈하게 끼쳐오는 혈향. 그리고 한도훈의 비명소리. 아....생각해보니 좀 더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닥은 차가웠고 시멘트 바닥에 쓸리는 등도 무척 아팠던 것 같다. 진유현은 나를 산 채로 잡아먹고 있었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쥐어뜯고 할퀴고 주먹으로 치던 내 손은 까지고 갈라져 피투성이였다. 기절했던 것은 몸의 고통 때문이었는지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하건대 내가 깨어났을 때 외할머니를 닮은 한도훈의 할머니가 옆에 없었다면 정말로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이제 나 죽으면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건가. 멍하니 풀밭에 누워 울창하게 드리워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다 보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래서 시야를 가리는 저 나뭇가지들을 다 치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어느새 고통도 가라 앉았다. 정신도 점점 맑아진다. 제길... 아직 살아있구나. 사고가 나고 정신을 차렸던 첫날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모르겠고 내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딘지도 몰라 가만히 앉아 구조대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습하고 희뿌연 안개 속에서 멍하니 있자니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결국 못 견디고 비명을 지르며 숲을 내달렸다. 그 땐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울부짖다가 넘어지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다가 다시 일어나 전력으로 산속을 헤집고 다녔었다. 막연한 공포가 엄습해오고 한번 공포스럽다고 느낀 몸은 무엇에 대해 두려워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무섭고 무서워서, 그럼에도 뭘 어찌할 줄 몰라 몸서리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줄기를 하나 발견하고 그 안에 머리를 처박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느다란 시냇물은 생명줄이었다. 일단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면 산속에서 같은 길을 빙빙 돌진 않을 테고 운 좋으면 인가를 찾을 수도 있을 터였다. 인가를 못 찾아도 어쨌든 산 아래로는 내려갈 수 있을 테니 마을이나 하다못해 찻길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배가 고프면 물을 마셨다. 하지만 물만으로는 공복감을 채울 수 없어서 아무거나 그럴듯해 보이는 걸 주워다가 입에 넣고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그나마도 열매로 보이는 걸 잘못 먹었다 탈이 난 뒤로는 함부로 집어먹지 못하게 되었다. 나흘째인지 닷새째인지 모르겠다. 머리는 어지럽고 눈은 빙빙 돈다. 사람이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도 이렇게 멀쩡히 움직일 수 있었나 의아했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움직이고 있었고 비어버린 속은 배고픔을 너머 이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따금 참을 수 없으리만치 쑤시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냇물을 마시면 그런대로 진정이 되곤 했다. 시냇물을 따라가면 뭔가 나아질 줄 알았다. 아니, 확실히 이 물줄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바라던 인가는커녕 하다못해 오두막집 한 채 보이지 않는다. 가도가도 울창한 산림뿐이고 배를 채울만한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있어도 뭐를 먹어야 되는지 알 수도 없을 것이다. 때때로 미치도록 허기가 지다가도 어느새 미약한 속쓰림 외엔 아무렇지도 않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극도록 피폐해진 신체와 정신 상태는 나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나를 산 속에 버려둔 게 정말로 진유현일까 끊임없이 되물었다. 물론 이런 짓을 할 녀석은 그 자식밖에 없지만 나는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못된 일을 하지 않았다. 하긴, 지하실에서의 일도 있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내 무엇이 녀석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답답해서 속이라도 갈라 바람을 쐬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리 사람이 미워도 보통 이렇게까지 하냐.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꼴 보기 싫었냐. 그렇게 웃고, 그렇게 장난치고... 초 여름의 뙤약볕아래서 물싸움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소한 일상의 투닥거림조차 즐거움으로 남았다고 생각한 건 나뿐이었냐구. 너를 친구라고... 어쩌면 조금은 친구 이상으로 좋아했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좋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흐느낌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점차 오열로 변해가고 있었다. 미치도록 서럽고 슬프고 원망스러워서 머리가 띵해지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도 아랑곳 없이 얼굴을 틀어쥐며 온 몸의 수분을 짜낼 듯 울었다. 울고, 원망하고, 저주하며. 그럼에도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끊어버리려 노력하며...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까맣게 의식을 놓았다. 정신 차렸을 땐 한밤중이었다. 뼈에 사무치는 추위를 느끼며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보름달이 중천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동물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부엉이 소리, 뻐꾸기소리...밤의 숲은 많은 소리를 품고 있었다. 벌렁 누워서 바라본 밤하늘에 나무 가지사이로 무수한 별들이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상황이 달랐다면 낭만적인 풍경에 도취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풀벌레가 살갗을 기어오르고 있고 모기가 달려들고 있었다. 날파리가 목과 얼굴 근처를 간지럽혔고 귓가의 애앵~하는 소리는 소름 끼쳤다. 밤 기온은 뚜욱 떨어져 있었고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풀 숲 저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머리를 풀어헤친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 같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이제는 제법 작은 강이라고 해도 될 만큼 넓어진 물줄기는 밤이 되니 물속에서 뭔가 스윽-하고 올라올 것 같아서 바라보기가 겁났다. 더구나 그냥 있어도 벌레들이 득시글한 산 속인데 물가에 있으니 모기들이 잔뜩 달려들었다. 쉴새 없이 팔이나 얼굴 등을 때리며 달라붙는 모기를 떨쳐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힘이 들어 가지않아 더 이상 팔을 움직이는 것도 버거웠다. 몸을 일으켜 조금 걸어보았다. 밤이라 어두웠지만 달빛에 의지하여 계속 걸었다. 무서웠다. 벌써 몇 번째 맞는 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어둠에 대한 공포는 숲 저편에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촉진시켜 나 스스로 공포스런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만다. 들짐승이 있을까...아니면 귀신일까.... 아니,아니,그냥 이 어둠자체가 무서운 거다. 추위에 오그라드는 건지 무서워서 떨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밤이 싫다. 금방이라도 신경줄이 끊어질 거 같다. 미쳐버릴 거야... 이러다간 죽기 전에 정말로 미쳐버릴 거라구!!! "엄마....."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렀을 때가... 진유현을 향한 증오도 어둠 속의 공포도 어느새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보고 싶다. 사업이 다시 활기를 찾은 이후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던 아빠도, 바쁜 일 탓인지 좀 처럼 나를 웃으며 반겨주지 않던 엄마도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최근 몇 년간 차가운 얼굴만 보아온 어머니지만 어렸을 때 배가 아프면 문질러주던, 외할머니를 닮은 그 따뜻한 손의 엄마를 난 기억한다. "엄마..." 그리운 얼굴이 지나간다. 애써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민태의 얼굴과 어색한 웃음으로 장난치던 형석이와 진영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딱딱한 표정의 한도훈도 지금은 너무 보고 싶다. 다들 무사한 걸까. 그 사고에서 모두 큰 상처 없이 무사한 걸까. 내가 없어져서 모두들 놀라지는 않을지, 부모님은 또 얼마나 걱정해주실지... 아니야... 과연 걱정해 주실까.... 만약 없어져서 잘 됐다고 생각하시면 어떡하지? 일주일째 되던 날. 아니, 일주일이 지났는지 어쩐지 사실 모르겠다. 어쩌면 8일이 지났을 수도 있고 9일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며칠 지났느냐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비가 오고 있었다. 새벽에 한두 방울 쏟아지던 비는 점점 거세어져 어느새 폭우로 변해 있었다. 작은 강이 된 냇물은 비가 쏟아 지면서 순식간에 물이 불어나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며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힘겹게 옮겨보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굶어죽는 줄 알았는데 물에 빠져 죽겠구나. 몸을 피할 만한 동굴을 찾는 것도 나무 밑에 숨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의욕도 없었고 그런 것을 찾다가 이 물줄기 마저 잃어버리면 빗속에서 길을 잃게 되고 만다. 솔직히 강물을 따라간다고 해서 인가가 나타나리란 바람은 예전에 버린 지 오래였다. 이 빌어먹을 산은 깊고 울창해서 겨우 평지가 나타났나 싶으면 다시 계곡이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 몇 번이고 실망에 실망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숲속 생활에 대한 사전 지식을 배운 적도 없기 때문에 이 물줄기에 의존해서 걷는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대책을 생각할 정도로 제 정신도 아니었다. 그래서 비가 와도 강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먹지 못해 쇠약해진 몸은 비에 체온을 뺏겨 점점 차가워졌고 발목까지 물속에 잠긴 다리는 무거웠다. 찰박찰박거리며 넘쳐 흐르는 강물을 따라 걸었다. 몸에서 열이 난다. 생각해 보면 며칠 전부터 열이 나고 몸에 오한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몽롱한 의식에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호흡이 곤란해졌다. 머리 속으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떠오르는 건 약간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던 진유현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웃지 말아줘. 죽는 순간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말아줘. 저주할 거니까. 아니, 저주하고 싶으니까. 너를 증오할 거니까... 멀어져 가는 의식을 잡으려는 노력도 없이 나는 그대로 물위에 쓰러졌다. 타닥-타닥- 불에 타는 장작더미 소리가 아늑하게 들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움직여 눈을 떴을 때 낯선 오두막집 천정이 보였고 창 밖의 비바람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이따금씩 치는 천둥 번개는 무섭다기 보다 따뜻한 오두막집의 분위기를 더 아늑하게 해주는 연출 같았다. 눈을 뜨고도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었다. 창 밖과 대조되는 이질적인 오두막 안의 정경이 그림 같다. 빗줄기는 기세 좋게 오두막집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고 유리창과 맞부딪치는 빗줄기의 파열음은 리드미컬하다. 주황색, 혹은 붉은색으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의 불꽃은 어두운 실내를 은은하게 비춰준다. "끙..." 어지러운 머리를 겨우 추스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마음과는 달리 핑-하는 현기증이 들어서 이마에 손을 짚고 잠시 행동을 멈춰야 했다. 호흡도 힘들었고 매우 피곤했다. 침대는 딱딱했고 이불은 다 낡아 좀먹어 있었지만 저 장작불 때문인지 춥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구수한 냄새도 나는 것이 장작 위에 걸어 놓은 작은 솥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는 듯했다. 굉장히 조잡한 오두막이었다. 넓이는 우리집 거실만 했지만 그 안에 침대, 벽난로, 의자, 테이블 등이 갖춰져 있었고 구석엔 여러 가지 물건들과 용도 모를 짚 더미들이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원룸처럼 이 방 하나가 오두막집의 전체 공간인 듯싶었다. 바닥엔 마른 나뭇가지며 흙 모래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어서 신발 없인 걸어 다니기 곤란할거 같았고 몇 안되는 가구 역시 낡고 조악한 것들이었다. 등산객들이 가볍게 쉬고 가는 작은 산장인가...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옷이 갈아 입혀져 있었다. 잔뜩 젖어버린 내 옷은 어느새 말려져서 침대 머리맡에 차곡차곡 개어져 있었고 나는 환자복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이 거의 쥐색으로 바랜 옷은 군데군데 헐어 있었지만 착용감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 몸에 열이 있고 어지러웠지만 그럭저럭 살 만 하다. 팔다리에 힘이 쉽게 들어가지 않아서 침대 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 별다른 움직임은 하지 못했지만 의식만은 점차 또렷해져서 그제야 지금의 상황을 현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그래.... 살았구나.... "흐흐...흐...." 입가에서 신음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살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인지 죽지 못해 아직도 살아있는 자신의 끈질긴 생명에 대한 비웃음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았다는 것이다. "으흐흐흐흐흐...." 이유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뜨거운 액체가 볼을 타고 흘렀다. 창 밖의 하늘에 새하얀 나뭇가지를 새기며 번개가 달렸다. 이윽고 세상을 진동시키는 천둥소리가 번개를 따라 이어졌고 그 와중에도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타닥-타닥-.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은 없었다. 진유현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 달려든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살았으니까. 살았으니까. ......그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작은 오두막집이 주는 포근함에 넋을 놓고 가만히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가에서 찰박찰박하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고 세찬 기운으로 오두막집의 낡은 문이 열어 젖혀졌다. "앗 차거라- 어휴. 비 한번 지독하게도 내리네." 짚단을 얼기설기 엮어 뒤집어쓴 작은 체구의 사람이 들어왔다. 어깨쯤에 짚단을 하나 둘러쓰고 머리에도 모자처럼 하나 뒤집어 쓴 그 차림은 옛날 사람들이 하고 다니던 도롱이 같았다. 그 사람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수선을 떨더니 침대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목소리가 밝아 진다. "우와앗! 깨어 나셨군요!! 어디 편찮으신 덴 없으세요?" 이 사람이 나를 구해주었나 보다. 나는 덜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고마움에 겨워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고마워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예.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그리고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은인이 몸에 둘러쓴 짚단들을 치워버리자 만면에 웃음을 띠고 드러난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민태였다. "정민태?" "?" 민태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짧은 침묵을 참을 수 없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살아있었구나!!!!!" 비틀거리는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나 스스로도 놀랐다. 있는 힘껏 민태를 끌어안자 주책없이 눈물이 나왔다. "살아있었구나...살아 있었어..." 가슴에서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생각도 않고 쏟아내었다. 단지 일주일 넘게 못 봤을 뿐인데 몇 년 만에 만난 것만 같았다. 생사가 불분명한 친구의 모습을 확인했다는 안도감과, 그 친구가 자신을 구했다는 사실이 못 견디도록 감격스럽고 격양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민태야! 다른 애들은? 선생님은?!! 구급대원들은 아직 안 온 거야?!!" 나는 정신없이 민태의 어깨를 붙잡고 녀석의 몸을 흔들어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필사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러자 민태는 흔들리는 몸으로 "으아아 놔줘요~"라고 비명을 질렀다. "아직 깨어난 지 얼마 안되서 혼란스러우신 거 같은데...그, 그만 흔들어요. 난 민태란 사람이 아니에요!!" 작은 키에 동글동글한 얼굴, 역시 동글동글한 눈동자, 성격 좋게 생긴 그 얼굴은 정민태임이 분명했다. 단순히 닮은 사람, 혹은 형제로 치기엔 너무도 똑같은 얼굴이다. 혹시 지금 장난치는 건가? "우선 진정해요. 당신 나흘간 기절해 있었다구요. 엄청 굶은 거 같은데 지금 죽 끓이고 있으니까 그걸로 우선 요기라도 하구요." 낯선 사람 대하 듯이 말하는 민태를 보자 몸에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망연히 서 있었다. 민태랑 똑같이 생겼으면서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는 비에 젖은 신발을 털어내고 가지고 있던 짐들을 한쪽 구석에 놓더니 끓고 있는 솥 앞으로 다가갔다. 말도 안된다. 어떻게 저 얼굴을 하고서 민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지? "정민태, 너 무슨 장난하는 거야? 네가 민태가 아니면 대체 누구라는 거야?" 민태는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잘못 아셨네요. 제가 그 사람과 그렇게 닮았나요? 저는 당신을 처음 봤다구요." 나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민태를 쳐다보았다. 순간 민태가 진유현의 사주를 받고 저런 연기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으음~ 냄새 좋군요. 굶은 환자에게 고기는 무리라서 대충 곡류를 긁어 모아 끓여봤어요. 몸이 회복되려면 한동안 여기서 요양해야 될 거에요. 나원 참.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강물에 사람이 둥둥 떠내려 오는데 처음엔 깜박 시체인줄 알았다구요." 솥에 담긴 것을 나무 그릇에 퍼 담으며 그는 쉬지 않고 말했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거예요? 아니면 도망자? 아, 걱정 말아요 고발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 산장은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이 가끔 들르는 곳이예요. 며칠 전 장마가 시작되는 것 같길래 미리 설치해둔 덫을 살펴보러 왔다가 강에 떠내려온 당신을 발견한 거죠. 운이 좋았어요. 까닥 잘못하면 죽었을 테니까." 죽을 떠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나에게 와서 앉으라고 권했다. 조금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으니 누리끼리한 정체불명의 죽이 하얀 김을 모락모락 내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식욕이 도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의 빛을 지우지 않은 채 탐색하듯 민태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도, 얼굴도, 체격도, 영락없는 정민태다. 다만 민태가 나에게 존대말 쓰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말투가 다소 낯설다는 것을 제외하면 민태가 맞다. 민태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그동안 엄청난 고열에 시달렸었어요. 제가 아는 분이랑 닮아 보이는 것도 그 탓인지 몰라요. 차츰 시간을 두고 회복해 가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머리에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었다. 정신이 이상해 진 건 너 아니냐고 묻고 싶은 건 오히려 나다. 점점 진유현이 민태를 사주한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제기랄 미치겠다. 이만큼 고생해놓고 또 진유현? "대체 산속을 얼마나 헤맨 거예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되요?" 정체불명의 고기를 짓씹으며 민태가 물었다. 나는 하도 끓여서 거의 녹아 버린 곡식 알갱이를 천천히 떠 먹으며 민태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걸쭉한 액체를 목구멍에 흘려 넣고 있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사고가 나서...한 일주일쯤..." 대충 말을 흐리며 민태를 관찰했다. 민태는 딱딱한 빵조각이랑 말린 고기, 포도주로 보이는 붉은 액체를 병째 마시고 있었는데 꽤나 터프한 스타일의 식사에 조금 놀랐다. 그러고 보니 평소 비디오게임을 좋아하고 운동에 소질 없는 민태의 복장으로 보기엔 옷차림도 꽤나 야성적이다. 낡아보이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어깨엔 무언가 동물의 가죽을 걸치고 있었고 상당히 실용적으로 보이는 혁대엔 수통과 작은 칼, 그리고 나로선 알 수 없는 휴대용 도구들이 달려 있었다. 게다가 신발은 처음 보는 재질인데 기성제품이 아니라 가죽재질에 직접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장화였다. 어딜 보나 정민태가 맞지만 매우 이질적인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우와 일주일씩이나? 용케 산짐승한테 걸리지 않고 살았네요. 독충도 많았을 텐데 물리지는 않은 것 같고...정말 운 좋았군요." 독충...맞아 그런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생각해 보면 뱀도 있었을 테고...뭐야, 그럼 나 정말 운 좋은 거야? 사고 난 관광버스에서 혼자 산속에 버려져 꼬박 일주일 넘게 굶으며 산속을 헤매고 강물에 빠져 둥둥 떠내려 오다가 구해진 거... ...그런 것도 운이 좋은 거냐구! 순간 화가 났다. 그래, 내가 운 좋게 살아날까 봐 진유현은 민태마저 끌어들여 나를 괴롭히는 거야?!! -탕. 무의식 중에 행동이 거칠어졌다. 아까만 해도 무기력했던 온 몸의 세포가 분노로 하나하나 솟구쳐 오르는 것 같다. 거칠게 숟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식탁 위 한 곳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열기가 얼굴로 몰려든다. "정민태...." "민태야...." 분노는 물기를 머금고 내 눈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민태는 당황하더니 "이, 이것 참.."하고 중얼거린다. "이러지 말아...민태야..." 어깨가 들썩인다. 서러움에 복받쳐 굵직굵직한 눈물방울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민태는 머뭇머뭇 다가오더니 곤란한 듯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살며시 어깨를 감싸고 나를 끌어 안아주었다. 그 온기에 괜히 슬퍼져서 민태의 허리를 부여잡고 끅끅거리며 울었다. "나는 민태가 아니예요." 멈칫-하고 온 몸이 근육이 정지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태에게서 떨어져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민태라는 사람하고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민태란 사람인척 연기해도 좋겠지만... 그게 오히려 당신에게 안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 표정에 어떤 꾸밈이나 거짓은 없어보였다. 사실 민태는 거짓말이나 연기가 서투르다. 아니, 그러고 보면 진유현이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내 이름은요...." 민태가 작게 미소 지었다. "라노, 라노 그라데쥬예요. 흔한 이름이죠." 나는 아마도 굉장히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내 표정을 보던 민태가 당황할 정도로. 라노 그라데쥬라는 국적불명의 이름을 댄 생명의 은인은 내가 침울해 있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얘기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다. "처음 봤을 때는 뭔가 지체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옷의 재질이 완전히 다르던데. 저렇게 질 좋은 옷감은 오랜만이야. 물론 비단 같은 고급 소재는 아니지만 평민들의 옷과는 옷감도 다르고 바느질부터가 틀리더라구. 게다가 굳은 살 하나 없는 손이라니, 이거 완전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지." 윤승호라는 이름을 대었을 때부터 그는 내 이름이 특이하다며 어디 외국에서 왔냐고 물어봤었다. 하도 어이없어서 말을 않고 있었더니 그걸 혼자 오해하고선 뭔가 사연이 있는 귀족가의 도련님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 귀족 어쩌구 하는 오해를 풀기 위해 진땀을 뺐지만 어느 부잣집의 막내아들 내지는 외국상인의 자제정도로 생각하는 것까지 해명하진 못했다. 세상에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귀족이라니. 처음엔 저 애를 민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토끼의 가죽을 벗겨 요리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 자가 민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태는 싱크대 위의 토막 난 날 생선 보고도 기겁하는 녀석이다. 게다가 태어났을 때부터 도시에서만 자란 녀석이 약초를 달여 약을 만들거나 나무토막을 능숙하게 깎아 다람쥐를 만든다거나 하는 일은 녀석이 민태가 아니라는 사실만큼 믿기 힘든 일이었다. 상당히 수다스러운 그가 늘어놓는 산속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책에서 읽었거나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하기엔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리얼했다. 그리고 엉뚱한 곳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는데.... ...어이없게도 라노는 근육질이었다. 내가 민태의 벗은 상체를 본 건 지난 여름방학 때 같이 풀장으로 놀러 갔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몇 달의 시간차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약간 통통하고 희멀겋던 민태가 어느날 갑자기 근육질이 될 리는 없잖은가. 라노가 젖은 옷을 갈아 입을 때 언뜻 본 상체는 보디빌더들도 울고 갈 근육질에 자잘한 상처도 많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나를 향해 멋쩍게 웃던 라노는 "이건 재작년에 오소리한테 긁힌 상처인데..."라고 대뜸 흉터자랑을 했던 것이다. 미치겠다. 정말 환장하겠다. 그럼 저 아이는 정말 민태가 아니란 말야? 지겨운 비는 끝없이 내리고 있었다. 라노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일주일은 더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이 점은 산에서 오래 살았다는 라노의 말을 믿어도 될 것이다. 음식 조달하는 솜씨도 능숙했고 하루 한 번 약초를 달여 준 쓴 약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비록 머리가 약간 이상하긴 했지만 산속 생활에 관한 부분은 학교공부밖에 모르는 나보다 훨씬 유능했다. 라노는 나와 동갑이었다. 같은 나이라는 것을 알고 말을 트며 편하게 지냈지만 머리 속은 라노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느라 쥐가 나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얼굴은 정민태와 연관이 없어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어렸을 때 잃어버린 민태의 쌍둥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고 지금은 그 황당한 생각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끝없는 빗소리를 들으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는 나날이었다. 라노는 빗발이 약해지면 가끔 오두막집을 나가 주변을 살펴보고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은 나무조각에 힘쓰거나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보낸다. 내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고 이제 말랑말랑한 빵이나 과일정도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들은 라노가 붙여준 약초가 효과가 있었는지 연고를 발랐을 때보다 더 빨리 아물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진유현이 물어 뜯어 놓아 앞으로 몇 달간은 대중 목욕탕 가긴 글렀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아 있었던 거다. 약초의 효과가 어찌나 좋은지 솔직히 놀랐다. 이미 내가 기절한 상태에서 다 치료 된 듯 흉터하나 보이지 않았으니 보통 솜씨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하루하루를 지루할 만치 평온하게 보내고 있었다. 차곡차곡 개어 놓은 교복보다 이 색 바랜 검은 원피스가 왠지 편해서 안에 팬티만 하나 입고 뒹굴뒹굴 대었다. 좁은 침대가 삐거덕 삐거덕 소리를 낸다. "오늘 빗발이 많이 가늘어졌어. 내일이나 모레에는 비가 그칠 거 같아. 식량도 다 떨어져 가니까 한 번쯤 마을에 내려가야 할 거 같아." 여우 조각을 막 끝낸 라노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오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산을 내려 간다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내려가는 거야?" 몸을 돌려 누우며 라노에게 물었다. 라노는 약해진 빗소리를 들으며 좁은 침대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장작불로만 어둠을 밝히는 좁은 오두막 안에서 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라노가 작게 미소 짓는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그동안 내가 개인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노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라노였고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말이 많다는 점은 민태와 똑같지만 저렇게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마치 형이 동생에게 하는 듯한 태도는 삼남매 중 막내인 민태에게선 보기 힘든 행동이었다. "우선..." 나는 뭐라고 말할까 고민했다. 라노의 정신세계는 뭔가 서양의 중세분위기가 난다. 어느 물레 방아간 집 아들이 집을 나가 하루 만에 눈 속에서 얼어 죽을 뻔한 걸 구조한 일, 5월의 아가씨로 뽑힌 마을의 퀸카와 절름발이 목수청년이 결혼 한 일, 모 귀족이 타고 가던 마차바퀴가 웅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마을이 난리가 낫던 일...등등등 그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라노가 자신이 본 일을 얘기하는 건지 옛날 책에서 본 일을 얘기하는 건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산속에서 혼자 살면서 동화책이나 보다 보니 저렇게 된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봤다. 하지만 종종 마을에서 사는 친구들 얘기를 하는 걸 보면 타인과의 교류가 아주 없는 것 같지도 않다. 저 산 아래의 마을 사람들은 민태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걸 알고 그냥 저대로 착각하도록 놔두는 걸까? 대체 어떻게 되 먹은 사람들이야 마을 사람들이란 작자들은. 아직 미성년에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소년이 산속에서 혼자 사는데 경찰에 신고도 안하고....정말이지 몰지각한 사람들이다. "우선...경찰서에 가야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행여 경찰이란 말에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이며 어쩌나 고민했는데 라노는 눈을 똘망똘망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경찰서?" 맙소사, 설마 경찰서도 모르는 거야? 나는 한숨을 쉬고 이 정신 나간 생명의 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동정했다. 이대로 산을 내려 간다면 당장 라노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의 가족을 찾아주자고 결심한 차이다. 아, 물론 부모님께 먼저 연락해서 내 한 몸 보전하는 게 먼저이지만 이 불쌍한 친구를 산속에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곳이야. 도둑도 잡고."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라노는 "아하-"하고 입을 연다. "경찰서라는 건 무슨 은어인가보지? 산 아랫마을의 치안이라면 영주인 귀보르냑에서 하고 있어. 너 그 쪽의 수비대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야? 귀보르냑 가문하고 친분이 있었던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어 왔다. 나는 뭘 더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라노의 머리 속은 철저히 중세민화나 소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나 보다.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의사가 할 일이지.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그렇다고 해두자." 그 애매한 대답에 라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귀보르냑이란 말이지..." 뭐 씹은듯한 라노의 표정에 조금 놀라서 "왜?" 하고 물었다. 그러자 라노는 한숨을 쉬며 그럴듯하게 몇 마디 했다. "귀보르냑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란 작자가 말도 못할 망나니거든. 귀족들 사이에선 유명한 얘긴데... 아, 귀족이 아니랬지. 그런데 어떻게 그 가문과 알고 지내는 사이야?" 어휴,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구. "아는 사이가 아니라...그냥...그러니까 좀 도움을 받으려고..." 말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리자 등뒤에서 라노가 침묵한다. 라노가 내 말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나는 문득 라노의 표정이 궁금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자신의 한쪽 팔로 팔베개를 한 채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은 장작불이 새기는 독특한 음영에 의해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비가 그치는 대로 같이 산을 내려가자. 뭔가 방법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아직도 나를 '외국 상인의 아들'쯤으로 생각하는 라노는 "귀보르냑이라...싫은데..."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뭐 과정이야 어쨌든 빠르면 내일 중으로 산을 내려간다는 소리다. 나에겐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고마워." 비록 혼자 산속에서 지낸 탓에 정신은 온전하지 못한 아이지만 그동안 나를 돌봐주고 치료해준 은인이다. 민태랑 똑같이 생긴 얼굴덕분에 친근감마저 드는 소중한 친구였다. "에? 아니 뭘..." 라노는 눈을 감은 채 피식-하고 웃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라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을 청하는 그 얼굴은 순진해보였고 민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 순하고 착해빠진 얼굴을 한 소년이 몇 년인지도 모를 세월을 산속에서 지내왔다고 생각하니 안쓰럽기만 하다.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나이에 발견된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불쌍한 라노. 하지만 이제 곧이다. 너도, 나도 곧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갈 수 있을 거야. 아...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부어놓고 몸을 담그고 싶다. 치킨도 먹고 싶고 피자도 라면도 떡볶이도 그립다. 푹신한 내 방 침대에서 맘놓고 푹 자자. 조금만 참으면 그 꿈같이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될 거야. 그날 나는 아마도 입가에 웃음을 걸고 잠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 나는 처음으로 라노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새소리가 들렸다. 지난 며칠간 추적추적 내리던 가는 빗줄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라노가 깰까 봐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다. 나무로 만든 문이 작은 마찰음을 내며 부드럽게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적셨다. 안개 낀 산의 습한 공기가 몸을 감싸왔지만 지난 번처럼 불쾌한 안개가 아니었다. 매우 청쾌하고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새벽안개다. 새벽 공기를 폐 한가득 받아들이며 지겨운 산장생활의 끝을 알리는 새소리에 웃음이 났다. 끝났다. 그 지겨운 장마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느새 잠에서 깬 라노가 웃고 있는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까르르 웃으며, 뭐, 내가 생각해도 좀 방정맞게 웃으며 깡총깡총 뛰었다. 얼른 출발하자고 라노에게 성화를 부렸고 라노도 새벽부터 난리치는 나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하고 짐을 꾸렸다. 산길은 매우 험했다. 등산로처럼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면 생기는 흔적 따위 전혀 찾을 수 없었고 매우 가파르며 또 울퉁불퉁했다. 게다가 비에 적어 미끄럽기 까지 했으니 라노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몇 번이고 진창에 빠졌을 것이다. 라노의 옷을 빌려 입은 내 차림은 매우 엉성했다. 바지는 라노의 다리에 딱 맞는 길이라 내겐 좀 짧았다. 팔도 짧았고 옷은 전체적으로 헐렁했다. 신발은 컸고 자켓도 조금 컸다. 옷 자체는 원래 헐렁하게 입는 옷인 듯했지만 문제는 디자인과 색깔이었다. 웃옷은 잿빛으로 색이 바랜 후드티였는데 후드부분은 끈으로 여미고 어깨와 가슴엔 짧은 망토 같은 천조각을 늘어뜨리는 옷이었다. 더구나 웃옷자체가 길게 만들어졌는지 허리띠를 하지 않으면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와 아빠 옷을 입은 어린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바지는 팔부 바지인양 발목 위에서 달랑달랑거렸고 바지통은 어찌나 넓은지 도복 바지처럼 생겼다. 하지만 압권은 신발이었다. 부드럽고 잘 휘어지는 질긴 재질의 나무...아니, 나무인지 정체 모를 식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식물성 재질을 얼기설기 엮어 안에 가죽 천을 덧댄 것이었는데 분명 라노가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사실 나는 이런 옷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주로 영화나 유럽쪽 전래동화의 삽화에서 말이다. 이런 걸 입고 마을에 나타났다간 더 큰 집중을 받게 될게 뻔하다. 경찰서에서 나까지 정신병자로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이런 차림으로 부모님을 봐야 한다니 무지무지 쪽 팔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입고 있던 교복은 눈에 띈다며 라노가 한사코 이런 차림을 권하길래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쪽 팔린 기분은 점점 사라져 리드미컬하게 변하는 바위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금방 마을이 보일 거야. 지름길이 있긴 한데 그 길은 험해서 네가 걷기엔 불편하거든. 편한 길로 오다 보니 좀 빙 돌아서 가느라 오래 걸리는 거야. 조금만 참아." 맙소사 이 길이 편한 길이라고? 배려해 주는 라노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 울퉁불퉁한 산길도 충분히 험하다! 완전 극기훈련 온 기분이네. 숨을 고르느라 대답도 못하는 나를 보며 라노가 웃어보였다. 비웃는 것 같진 않았지만 왠지 얕보였다는 생각에 조금 분해졌다. "너 귀엽다. 식식대면서도 용케 불평한마디 없이 따라오네." 발 아래가 휘청거려서 중심을 잃었다. 다행히 라노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저 비탈길 아래로 몇 바퀴는 굴렀을 거다. 아무래도 라노는 나를 동생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것저것 먹여주고 재워주고...쳇,생각해 보니 애가 따로 없잖아? 나는 숨도 차고 딱히 대꾸할 말도 없어서 그냥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눈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걸었을 때였다. "다 왔어. 금방 마을이 보일 거야." 벌써 몇 번이나 들었을지 모르는 "다 왔어."이다. 몸 상태만 보아선 중간에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그게 또, 한 시라도 빨리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쉬자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언제쯤 마을이 보일까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라노의 발걸음을 쫓았다. 그리고 이번엔 라노의 "다 왔어"가 허튼 소리가 아닌 듯 정말로 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서 있는 마을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 건 산행이 힘들어서 인지 아니면 곧 집에 간다는 흥분감에서 비롯되는지 모르겠다. 온 몸의 세포가 두근거리면서 환희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따뜻한 욕조가, 푹신한 침대가, 맛있는 먹을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자한 미소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에 선명하다. 많이 걱정하셨을까?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인데 걱정하셨을 거야. 앗, 설마 우시지는 않겠지? 비관적인 생각은 터럭만큼도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산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돌아온 행방불명 된 소년이다. 머리 속에선 영화에서 보았던, 부모와 감격의 재회를 하는 주인공들이 떠올랐고 그 모습은 나와 우리 부모님의 모습으로 대체 되어갔다. 라노가 옆에서 뭐라고 말해 주었지만 한마디도 제대로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그저 홀린 듯 마을로 걸어...아니 뛰다시피 들어갔다. 흥분된 마음과 기쁨으로 나 스스로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귀까지 입이 걸린 내 얼굴은 마을로 들어서면서 점차 묘하게 이그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마을의 모습을 눈에 담고 그것을 뇌로 보내는 작업까지 걸리는 시간이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주변을 인식하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일이 무언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저잣거리는 시끄러웠고 산만했다. 작은 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고 아직 장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바닥은 진창이었다. 천막과 나무 상자로 간이 장사판을 만든 상인은 과일이며 곡식을 팔았지만 라노는 장마 이후라 값도 비싸고 문을 연 가게도 얼마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옷감이나 장신구, 철제기구를 파는 상인도 보였다. 분주하게 오가는 아낙의 모습도 보인다. 꼬마들이 개구리를 꼬챙이에 꾀어 들고 다니는 모습들도 보인다. 소란스러웠지만 평화로운 그곳에서 나는 전율이 몸에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의 형태는 내가 알고 있는 시골의 모습과 달랐다. 사람들의 차림이나 생김새 또한 한국의 시골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얼굴의 골격구조나 피부색은 동양인이었지만 갈색머리나 붉은 머리, 금발을 쉽지 않게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으며 그 머리가 염색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전문가가 아닌 내 눈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중년에 배 나온 아저씨가 머리를 붉은 색으로 염색하고 수염까지 물들일 리는 없잖은가. 눈 색깔도 다양해서. 파랑 초록, 갈색... 차림새는 대부분 오래된 느낌의 옷들이었는데 스타일이나 재질자체가 현대의 실용복과는 확실히 틀렸고 건물의 형태도 매우 낯선 것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 이 풍경은 영화나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중세풍의 시골 마을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바지에 어깨가 넓게 파진 옷을 입은 청년은 가죽을 발에 동여맨듯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금발머리를 곱게 땋아 내린 주근깨 소녀는 회색 원피스를 입고 나무신을 신은 채 어딘 가로 폴짝폴짝 뛰어 갔다.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는 머리에 소쿠리를 이고 있었고 활과 화살 통을 맨 덩치 큰 아저씨는 짐승의 가죽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혁대엔 죽은 토끼 몇 마리를 주렁주렁 매단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내 차림역시 그닥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라노가 짊어지고 있는 저 주머니 속의 내 교복을 입었더라면 그게 오히려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어때? 시장은 처음이야? 꽤 두리번거리네." 웃음을 흘리면서 라노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리 봐도 영화 셋트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저런 머리 색의 사람이, 저런 옷차림에 저런 건축구조를 가진 집들이 촬영세트가 아닌 실제 생활 공간이라니 전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더불어 심장도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뭔가... 뭔가가 잘못되었다. "그럼 친구가 하는 여관으로 갈까? 여관과 주점을 겸하고 있으니까 그동안 산에서 먹었던 지겨운 요리는 탈피해 보자고!" 내 속마음도 모른 채 라노가 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렇게 걷고 있는 순간에도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여기는 한국이 맞는 걸까. 차라리 한국의 옛스런 분위기였다면 청학동 같은 마을이겠거니...하겠다. 이건, 무언가 이해 할 수 없는 종류의 기분이다. 뻔히 눈앞에 두고도 믿지 못할 현실. 정신이 아득해 질 것 같다. "자 여기야. 이 마을의 몇 안되는 여관 중에 하나지만 맛은 최고라고 보장하지." 경쾌하게 앞서며 안으로 들어서는 라노를 따라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여러 개의 둥그런 나무테이블과 의자들이 적당한 공간을 갖고 배치 되어 있었고 아직 해가 지기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술을 즐기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테이블은 한가했고 대부분 식사를......아니 그러고 보니 저 구석에서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보인다. "여어! 라노 늦었잖아! 하도 안 오길래 우리끼리 먼저 한잔하고 있었다구."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던 사람들이 라노를 불렀다. 라노는 "미안미안" 하고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더니 내 손을 잡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라노가 자신의 친구들과 무슨 얘기를 하건 상관없었다. 그저 낯선 주점의 인테리어를 보면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내가 태어난 나라가 맞나 하는 의구심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라노가 나를 자신들의 친구에게로 데려가 소개 할 때도 나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멀거니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파웰, 이쪽은 티안. 만나서 반가워요." 햇빛에 탄 거친 손이 불쑥 눈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악수를 하자는 건가 보다. 이대로 멍하니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얼른 정신차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들고 손을 맞잡으며 "아, 반가워요."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래, 첫인상이란 중요한 거니까 지금 내가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일단은 웃고 봐야 했다. 그래야 했다. "아..." 순간 몸이 굳어버린 나를 느끼고 라노가 나를 돌아봤다. "김형석? 안진영?" 내 입에서 나간 나지막한 발음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을 응시했다. 턱이 덜덜덜 떨리자 이빨이 맞부딪히며 소리가 난다. 멀대 같이 키만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형석이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내려다 본다. 아직 의자에 앉아 있는 작은 체구의 비쩍 마른 소년은 의심할 여지도 없는 진영이다. 옷차림과 분위기 때문에 몰라 볼 뻔 했지만 그 얼굴, 체격, 목소리마저도 1학년 1반의 내 친구들이 확실하다. "이런...세상에..." 낮게 뇌까리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 이변을 이상하다고 눈치챈 라노가 "윤승호?" 하고 말을 물어 봤지만 라노 역시 정민태와 붕어빵인 얼굴. 아니 정민태 그 자체. 같은 반 녀석들의 얼굴을 하고 나를 마치 처음 본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너희들은 대체 누구야? 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익숙한 세 개의 얼굴. 정말 일말의 사심도 없이 순수하게 의문만을 나타내는 표정. 너희들...나를 모르는 거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냐? 나...너네 친구 윤승호라구. 그렇게 모르는 척 할거냐? 아냐... 저 녀석들이 정말 1학년 1반 학생들이 아니라면 대체 저 똑같은 얼굴은 뭐지? 이 낯선 마을의 풍경은 뭐야?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으아아아아아아------!!!!!" 패닉이다! 공포가 머릿속을 치달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그대로 주점을 박차고 뛰어나가 거리를 달렸다. 미친 듯이 달리면서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무서워. 무서워. 여긴 어디야? 아무리 달려도 마을의 풍경은 변함이 없다. 이국의 낯선 풍경은 끝날 줄 모르고 길가는 사람만이 울며 뛰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낯설다. 모든 것이 낯설다. 저런 건축 양식을 난 본적이 없고 저런 차림으로 활보하는 사람역시 텔레비젼에서 밖에 본 일이 없다. 넓은 광장을 가로로 달려 분수대를 지나칠 때도 그 분수대의 조각조차 낯설다. 달리다가 어깨를 부딪친 사람들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줄 여유가 없다. 이 마을의 작은 타일조각 하나마저도 내가 있어야 할 세계의 것은 하나도 없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이나 푸드덕 거리며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들에게서도 내가 속해야 할 공간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무시무시한 괴리감을 느낀다. 무언가에 쫓기듯... 마치 이 마을이 나를 쫓아내려고 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뛰었다. 달려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 폐가 찢어지도록 달려서... 목구멍에서 피맛이 느껴지도록 달리다가 다리가 휘청거려 바닥에 쓰러져 넘어질 때까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있었다. -집에 가면 우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 내 소박한 소망이 참담하게 바스라져 그 파편의 조각이 폐에 들어 차 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흉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흐어억! 흐윽! 으허어억...!!" 울음소리를 내는 것 조차 괴로웠다. 병자처럼 기괴한 신음성을 내고 좁은 주택가의 골목에 대자로 누워 있던 나는 꺽꺽 대면서 울었다. 온 몸의 수분을 짤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차라리 폐가 찢어져 버렸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랬다.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헤어날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사고 난 버스 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한 채 지독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으흐흐흑....끄으으윽....." 신음과 비명이 목구멍으로 삼켜져 듣기 거북한 괴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지저분한 골목에 누워 간질 발작이라도 하듯 눈물을 쥐어짰다. 근육이 놀라 온 몸을 쑤셔댄다. 하지만 그보다 정신적 충격이 훨씬 고통스러웠다. "하악...하악...하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울고, 한참을 딸꾹질하고 그렇게 멍하니 누워 있자니 육체는 스스로를 치유시켜 호흡도 맥박도 차분해 진다. 눈물이 말라붙은 눈으로 바라본 지붕사이의 좁은 틈에는 하늘이 걸쳐져 있었다. 한 뼘밖에 안되는 하늘은 참으로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그 하늘위로 몇 마리의 흰 새가 마치 그림인양 후드덕 날고 있었다. 마을의 소란스러움이 멀게만 느껴졌다. 두부장사의 방울소리 같은 것도 들리고 꼬마들의 장난질 소리도 들렸다. 아줌마들의 후덕한 입담과 까르르거리는 어린 여자애들의 웃음소리가 일상의 평온함을 담고 아늑하게 들려왔다.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와 음침한 골목을 훈훈히 쓰다듬고 갔고 벌써 밥이라도 짓는지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침침한 골목에서 바라본 거리는 새하얀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 대신에 청각과 후각, 시각과 촉각이 판단하고 있었다. 뜨겁게 맥박 치는 심장과 아직도 거친 호흡. 온 몸이 결리는 근육의 아우성이 쓸모없는 뇌보다 더 현명한 해답을 내려주었다. 난 살아있다. 어쨌든 살아 있는 거야. "끄응-" 작은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계속 산장에서 늘어져 있던 몸이 갑작스런 달리기로 인해 무리가 왔는지 근육들이 파들거리며 떨려왔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일으킬 수 있었다. 라노에게 돌아가야 했다. "헤에...다 운 거야?" 깜짝 놀라 몸이 튀어 올랐다. 골목의 안쪽, 더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 본건가? 화끈-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우는 건 또 처음 봤네. 난 또 어디 한군데 찔려서 죽기 전에 발악하는 건 줄 알았지. ...어라? 이제 보니 꽤 샌님 같은 녀석이잖아?" 쪽팔림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핏기가 가시는 걸 짧은 시간 번갈아 가며 느꼈다. 설마...하고 의혹을 품었지만 내가 이 목소리를 다른 사람과 착각할 리가 없다. 분명 내가 익히 알고 있고 죽어서도 절대 편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어둠 속에서 빙글빙글 웃는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오세준이었다. 이제 더 이상 놀랄 것이 있을까? 난 지금 당장 오세준의 뒤에서 진유현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눈물콧물이 말라붙은 얼굴을 소매로 대충 닦고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어이,어이,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라고. 하긴 남자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였으니 창피하기도 하겠지만 말야. 애초에 내가 지나가던 골목에서 죽을 듯이 운 건 너였다구." 역시 이 녀석도 나를 알아보지 못 하나...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양 대하고 있다. 이 녀석이 정말로 오세준인지 아니면 그냥 닮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쪽이든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리고 후드를 덮어썼다. 가능한 모른척하고 싶기에 입도 벙긋 하지 않았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자 어느새 녀석이 옆으로 다가와 빙글빙글 웃으며 아무 말없이 따라온다. 녀석은 어디 귀한 집 자제라도 되는 듯 화려해 보이는 옷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한쪽 옆구리엔 칼을 차고 있었는데 그게 폼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그저 옆에서 깐죽거리는 저 얼굴이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틀거리며 골목을 걸어 나가자 눈부신 빛이 눈동자를 쏘았다.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멍하니 있던 나는 옆에서 흥미롭다는 눈으로 지켜보는 녀석을 무시하고 밝은 빛이 내리쬐는 거리로 나와 힘겹게 걷고 있었다. "부축해 줄까?" 옆에서 걷던 녀석이 얄미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필요 없어." 낮게 내뱉고 걸어나갔다. 옆에서 야유하듯이 높은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휘유~ 꽤 건방진데? 설마 나를 모르지는 않을 텐데 뒷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건가?"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전신을 휘감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내가 오세준을 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런 내 행동이 재밌는지 오세준은 기대하는 얼굴이 되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알고 있는 거야?" 나는 필사적인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겨우 억누르려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울음소리가 섞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오세준이라 해도 말이다. "너, 넌 오세준 맞지? 나를 알고 있는 거지?!! 다들 어떻게 됐어? 버스사고는? 반 아이들은? 이 빌어먹을 마을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녀석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 대었다. 필사적인 표정으로 달려들듯이 질문을 쏟아 내었지만 녀석은 "오~ 좋은데~" 따위로 느물거릴 뿐이었다. 나는 녀석의 그러한 여유조차 믿음직스러워져서 무언가 희망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더 필사적으로 되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녀석의 멱살을 잡고 있는 날 기겁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했다. "여긴 대체 어디야? 여기 이상해! 정민태랑 똑같은 사람이 있고 형석이, 진영이랑 똑같은 애들도 있어. 그런데 다 나를 못 알아 봐!! 너는 나를 알아봤지? 그렇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사고 이후 어떻게 된 거냐고!!!!" 마지막 말은 거의 발악이었다. 평소라면 오세준의 멱살을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다급해진 나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오세준 역시 그런 나를 말리지 않으며 그저 가만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사람 약올리 듯 빙글거리는 얼굴로 바라보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웃고 있었다. "승, 승호야아아아~~~!!!!" 멀리서 라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승, 승호야, 왜..왜..왜 그래 너!!" 라노는 번개같이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오세준의 멱살을 잡고 있던 내 손을 풀어내었다. "죄..죄..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사고를 당해서 정신상태가 좀 안 좋거든요." 라노는 내 두 팔을 등뒤에서 끌어안아 못 움직이게 한 채 오세준에게 굽신댔다. 나는 그런 라노의 행동이 못마땅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놔! 저 녀석한테 할말이 있다고!!" 라노는 그런 나를 못미덥다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동그랗던 눈이 화등잔만큼 커져서 나와 오세준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오세준! 뭐라고 말 좀 해봐. 야!" 구겨진 앞섶을 정리하고 먼지를 털듯 툭툭 털어낸 녀석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비딱하게 서서 말했다. "내 이름은 소르 아디움 귀보르냑. 귀족에게 반말하는 평민도 처음인데 내가 누군지 모르는 녀석이 이 마을에 있을 줄은 몰랐는걸." 뭐, 뭐라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착각이 들었다.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녀석이 지껄였다.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자세나 표정은 변함없이 나를 훑듯이 바라본다. 등뒤로 나를 저지하느라 끌어안은 라노의 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 역시 전신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장난하는 거지?" 희망을 담아 녀석에게 물었다. "...장난하는 거잖아...그렇지 오세준? 맨날 그러듯이 또 나를 약올리면서 장난치려는 거지?" 억지로 웃고 있는 입가가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의 표정은 느물거렸다. 그리고 웃고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면식도 없는 평민주제에. 반말에, 함부로 멱살까지. 이건 그냥 넘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말하고 난 후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신호탄이었다. 잠시 뒤 나와 라노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병사들에 의해 포위되었고 그 한 가운데 있던 녀석은 예의 그 느끼한 웃음을 되찾으며 강하게 명령했다. "저 자들을 잡아 감옥에 넣어라." 순식간에 철창 안으로 처넣어졌다. 나는 넋이 나간 것 마냥 멍하니 구석에 앉아 차가운 돌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세준이 아니었다. 내가 오세준이라고 오해했던 녀석의 말은 그저 귀족의 특권을 가진 자가 내뱉은 오만함에 불과했다. 옆에선 라노가 차가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녀석이 귀보르냑가문의 망나니 막내야. 이 근처에서도 녀석의 망나니짓은 유명한데 도련님답게 성안에 얌전히 처 박혀 있을 것이지 꼭 마을까지 내려와서 행패라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녀석의 얼굴을 알고 있어. 아니, 모르더라도 소문은 다들 듣고 있지. 벌건 대낮에 화려한 옷을 입고 나다니는 젊은 청년을 못 알아 볼 사람이 이 마을엔 없을 거야." 아까부터 머리는 사고하는 것을 그만두고 있었다. "마을에 내려와서 행패부리는 것도 문제지만 사람들이 고약하게 생각하는 건 녀석이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마구 손대는 바람에 귀족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아." 침묵이 못 내 답답한지 라노는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라노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귀보르냑 가문에 도움을 청한다고 했을 땐 깜짝 놀랐어. 귀보르냑 가문 자체는 별볼일 없지만 그래 봬도 왕실과 사돈이거든. 전대 왕의 하나뿐인 누나가 여기로 시집왔는데 그 아들이 저 녀석이야. 지금은 그 왕녀도 죽고 왕실과 연결된 핏줄이라곤 그 망나니뿐이지. 귀보르냑의 노망난 할아범이 애지중지 하는 것도 당연해." 한마디로 신원하난 확실한 오리지날 귀족 도련님이라는 소리다. 그런 녀석의 멱살을 붙잡고 오세준이 아니냐고 추궁했으니 경을 쳐도 골백번 치를 일이다. "승호야..." 라노가 발에 채워진 족쇄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이제 그만 너에 대해 말해줘도 되지 않겠어?" 눈물 나도록 따뜻한 말투였다. 나 때문에 같이 감옥에 갇혔는데 어떤 비난의 눈치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아는 민태는 정이 많은 놈이긴 했지만 내가 진유현한테 찍히고 오세준패거리한테 밟히면서 점점 친구사이가 소원해진 겁 많은 녀석이기도 하다. 물론 수학여행을 계기로 다시 친해지긴 했지만 이렇게 같이 감옥에 갇혀서까지 친절하게 대해 줄 수 있는 녀석이라고는 솔직히 장담 못한다. 나는 허공을 응시한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진짜...나 아무것도 아니야.... 귀족 같은 것도 아니고 외국인도, 갑부집 아들도 아니야..." 눈물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라버린 눈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정말 정신이 이상해졌나 봐..." 라노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 눈을 보며 진짜 넋이 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나....진짜 미친 건가 봐....." 생각해보면 나는 그 산속에서 이미 미쳤을지도 모른다. 라노가 민태로 보이고 라노의 친구들이 내 친구들로 보이고 마을 풍경은 완전 딴 세계로 보인다. 정신이 이상한 것은 라노가 아니라 나였다. "걱정 마...금방 나아질 거야." 라노가 머리를 끌어 안았다. 그 어깨에 고개를 묻고 눈을 감자 머리를 쓸어준다. 머리와 목,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진정을 시켜주는 라노의 손은 등 한가운데에 멈춰 서더니 토닥토닥 두들긴다. 그 규칙적인 움직임에 마음이 편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어 즐거워 보이는데." 오세준을 닮은, 그 혀 꼬이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놈은 여전히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새 옷을 갈아 입었는지 아까 마을에서 본 옷이 빨간색 계열이라면 이번 옷은 하늘색 계열이었다. 싱긋 웃어보이던 놈은 간수에게 손짓을 하여 나만 끌어내도록 명령했다. 라노의 걱정스런 표정을 뒤로 한 채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었다. 나를 끌고 병사들이 도착한 곳은 다른 건물의 지하였다. 구석에 있는 족쇄와 철창만 아니라면 어딘가의 창고 같은 느낌이 드는 10평 안팎의 공간이었다. 한쪽엔 짚단이 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엔 쓰지 않는 화덕이 보였다. 딱딱해 보이지만 얼추 침대 같은 것도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나무로 된 탁자 위에 희미한 작은 등잔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기분 나쁜 스산함이 생리적인 혐오감을 불러 일으켜 몸서리가 쳐졌다. 녀석은 안쪽으로 들어 가더니 손짓으로 나머지 병사들을 나가게 했다. 병사들은 거수경례를 한 번 하고 질서있게 지하를 빠져 나가 마찰음 나는 철문을 닫았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서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양 손목과 발목에 사슬이 채워진 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녀석이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의자에 앉는 것이 보였다. 탁자에는 한쪽 팔을 얹어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얹어 놓으며 나를 스윽 훑어 보았다. "말만 잘 들으면 더 좋은 방으로 옮겨줄 수 있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웃는다. 오세준도 자주 저렇게 웃었다. 말투도 행동거지도 똑같지만 저 화려한 의상 때문에 좀 더 느끼해 보이기도 한다. "나를 모르는 것을 보니 이 마을 사람이 아니군. 어디서 왔지?" 탐색하는 시선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말문이 막힌 나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움에 말이 막힌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정강이에 불 같은 통증이 일었고 놈이 내 다리를 걷어 찼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작은 신음성을 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어디서 왔지?" 다시 의자에 다릴 꼬고 앉은 그는 거만한 어조로 물었다. "......계속... ...산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허튼 소릴했다간 내 정강이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거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실도 아닌 말로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거짓말." 움찔하고 눈에 띄게 몸이 경련했다. 내 행동을 보며 녀석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토끼 한 마리 못 잡을 만한 손으로 산에서 살았다고? 그 비리비리한 몸으로 산생활을 해왔다고는 믿지 못하겠는데." 이런 젠장. 평소에 운동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 "친구의 도움으로 생활했습니다." "친구라 아까 그 놈?"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 들였는지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뭐 그건 됐고. 좋아. 이름은?" "윤승호입니다." "이상한 이름이군. 가문의 이름은?" "어, 없는데요..." 내가 라노에게 이름을 댔을 때도 라노는 같은 질문을 했다. 여기 사람들의 이름 구조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틀려서 자기 이름 뒤에 가문이름이 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라노의 가문은 그라데쥬 가문인 셈이다. 그 얘기를 오두막집에서 들었을 때만해도 꽤나 상상력이 치밀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타인의 앞에서 가문이름을 들먹이게 될 줄은 몰랐다. 굳이 따지자면 내 '성'인 '윤'씨가 가문이름이 아닐까 했다. 그래서 라노에게 말했더니 "맙소사 '성'을 가지는 건 귀족과 왕족뿐이예요!!"라며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때 라노의 오해를 푸는데 한참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났다. "흐음... 노예인가?" 눈빛이 변하는 걸 느끼고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식은땀이 흘렀다. 뭐야, 여기선 가문이 없으면 노예인 거야? 아니, 그보다 노예라는 제도가 있긴 있단 말야? "그럼 이방인? 고아출신?" "고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놈은 내 말을 믿는지 안 믿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괴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그건 그렇고..."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내 주위를 뒷짐을 지고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아까 나에게 뭐라고 했지?" 뒷짐을 지고 내 주위를 돌던 그가 허리를 숙여 내 귀에 입을 가까이 하고 조용히 물었다. 미지근한숨결이 귓가에 닿아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다. 나는 이제야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눈 딱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어요." 머리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날아온 발길질에 머리를 세차게 얻어 맞았고 귀가 멍멍하니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뜨끈한 코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아까의 그 기세는 어딜 가고 갑자기 존칭어를 쓰냐? 그리고 뭐? 용서? 이렇게 쉽게 바닥을 길 거면 처음부터 그런 배짱은 부리지 말았어야지. 어디 한 번 더해봐. 한 번 더 용서해 달라고 해봐." "용서해 주..." 다시 발길질이 찾아 들었다. 이번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공차듯 머리를 후려 찬 다음 등과 허리를 꾸욱꾸욱 밟아댔다. "어디...다시 말해봐." "용서..." 세찬 충격에 정신을 가눌 수 없었다. 쏟아지는 발길질에 몸이 흔들렸고 그에 따라 절그럭절그럭 하는 쇠사슬 소리가 음산한 지하감옥에 울려퍼졌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난다. 뭐 그렇게 오랜 옛날도 아니지만 얼마 전만해도 허구한날 이렇게 맞고 다녔었지. ...이런 곳에서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추억이나 곱씹고 싶지는 않은데... "후우...후우..." 숨이 찼는지 때리던 발길질을 멈춘다. 녀석은 내 주위를 천천히 왔다갔다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그 틈에 나 역시 조금 쉴 수 있었다. "하아...뭐야..." 씩씩 숨을 고르면서 뭐가 불만인지 심통 난 음성으로 투덜거린다. "뭐야 제길. 조금은 성깔 있는 놈 인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물러터졌잖아?!" 발로 의자를 걷어차더니 다시 정신 없이 왔다갔다한다. 나는 터진 입술과 부어 오른 얼굴을 부여잡고 비참한 신음성을 내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놈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똥싸는 폼으로 주저앉아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상한 말을 하던데." "......" 생긋 웃어보이며 잡고 있는 내 머리채에 힘을 주었다. 목에서 으드득하는 관절소리가 나자 저절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코 앞의 느물거리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반응이 즐거운지 눈을 빛내며 빤히 들여다본다. 비틀려 올라간 입술 끝이 가까워진다 싶을 때 이마에 물컹한 것이 와 닿았다. -할짝 소름에 감전된 듯 몸이 꿈틀거렸다. 입가에 핏덩이를 묻히고 있는 놈은 짭짭대며 맛을 보더니 입맛을 다신다. "땀이랑 섞여서 좀 많이 짜네." 미, 미쳤다! 질렸다는 표정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놈은 잠시 쓰러진 내 몸을 훑어보더니 여기저기 툭툭 찔러본다. 무슨 가축 감정하듯 이곳 저곳 주물러보고 찔러보고 두드려보고 쓰다듬어 본다. 마지막으로 사슬에 묶여 부어 오른팔목을 잡아 끌더니 손바닥을 빤히 살핀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나직하게 물었다. "평민이 아니군?"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놈은 뚫어져라 쳐다보며 응시하고 있다. "침묵한다는 건 긍정한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오해 할까 봐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놈이 갸웃하더니 내 머리를 집게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다. "이상하단 말야. 네 놈이 존칭어를 쓰니까 매우 어색한데? 넌 반말이 어울려." 여전히 똥싼 포즈로 쭈그리고 앉아 한쪽 무릎에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은 땅에 떨어진 신기한 장난감을 쿡쿡 찔러보는 어린애의 모습 같았다. "귀족이 아니라니. 굳은 살 하나 없는 손바닥과 딱딱할 뿐인 몸으로 어떻게 먹고 살아왔단 말이지? 설마 아까 그 친구가 네 뒤치다꺼리를 다 해줬을 리는 없잖아?" 나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을 얘기 할 순 없었다. 아니...차라리 사실대로 얘기해서 미치광이 취급 받는 것이 더 나으려나? 그런 생각들을 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놈이 내 신발을 벗겨내었다. 에? "흐음. 산에서 살았다는 놈의 발이 아닌데 이건." 난 누워 있던 몸을 절반쯤 일으켜 놈을 노려 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놈은 맨 발이 된 내 발을 한 손으로 꽉 쥐었다. "말해. 너 진짜 뭐야?" 단단하게 틀어쥔 발이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 챈 나는 다급하게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 그만. 난 귀족도 뭣도 아냐!" "그렇다면? 거상의 자제인가? 왕족이라면 내가 못 알아 볼 리 없을 테고. 타국의 인간인가?" "아냐! 난 그냥 평범한 신분이야. 그냥 일반인이라구!"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놈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단지 들어올린 발을 강한 힘으로 쥐고 비트는 것을 멈추지 않을 뿐이었다. "그, 그만! 그만!" --삐거걱. "으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지하를 메웠다. 나는 폐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상상하기도 힘든 종류의 오싹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 불에 덴 듯 뜨거운 오른쪽 발목만이 살아있는 심장인양 맥박 쳤다. 놈은 힘을 잃은 다리에 흥미 없다는 듯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바닥에 부딪힌 발목에서 통증이 번개처럼 타고 올라왔고 그 충격에 또 한번 전신이 경련했다. 놈이 가만히 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자...잠깐..." 발목이 꺾인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녀석이 손목까지 손대는 걸 보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육체는 방금 전의 까무러칠듯한 고통을 되새기며 반사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곧 손목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은 정신을 공황상태로 몰아갔다. 놈은 손목을 역방향으로 뒤틀며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그만! 난 정말 아무것도!!!" 어떻게든 손을 빼내보려 바둥댔지만 꽉 틀어쥔 놈의 손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아픈 발목 때문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슬에 묶인 손목이 듣기 싫은 파열음을 내며 꺾이는 데에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 비명이 되지 못한 소리는 목구멍에서 삼켜져 호흡마저 곤란하게 했다. 눈알이 커질 대로 커져 눈가가 팽창한다. 비틀린 왼손과 오른 발에 달궈진 꼬챙이가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아픔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귓가에 놈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놈은 인상을 찌푸리고 찰싹찰싹 내 뺨을 때렸다. "어이 정신차려. 벌써 기절하면 곤란해." 그렇게 말하더니 내 볼품없는 옷...아니, 라노에게 빌린 소중한 옷을 훌렁 벗기기 시작했다. "흥. 봐라. 네 몸에선 노동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다." 노출된 상체를 바라보며 놈이 날카롭게 물었다. "평민의 자식들이라면 아무리 비쩍 말라도 잔 근육이 있어. 넌 마르긴 했지만 못 먹어서 마른 몸은 아니야. 잘 먹고 잘 자란 놈의 몸이지. 더구나 산에서만 살았다는 놈이 짐승에게 얻은 흉터 하나 없다는 건 이상하잖아?" 고통으로 전신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는 나에게 놈은 다그쳤다. 정신이 없어서 없는 얘기를 지어내기도 힘들다.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고 미친놈 취급 받을란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열어 폐를 쥐어짜내었다. "지, 진짜....난 평범한 일반인이라구......" "호오?" 움칠움칠 반사적으로 떠는 몸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난 거의 제정신이 아닌 채로 읊었다.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거칠어져 쉰소리가 났다. "...집안은 꽤 잘 사는 편이었지만..... 하,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다가....사고가 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산속에 혼자 버려져 있었고... 날 구해준 것이 아까 그 애..... 난 집에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어..."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진짜 이름은?" "거, 거짓말 아냐...윤승호...그게 다...." 믿든 말든 그것은 녀석의 자유다. "사고가 났다고 했는데....대체 무슨 일이었지?" 호흡을 골랐다. 식은땀이 온몸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녀석은 천천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안간힘을 쓰며 대답했다. "버스사고.... 버스, 버스를 타고 가다가...산에서 사고가나서....." 버스가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솔직히 난 지금 녀석이 웃고 있는지 아니면 화내고 있는지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담담하게 질문하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사실, 대답하는 것도 힘들다. 거칠게 호흡을 몰아 쉬며 가능한 담담하게 말을 이었지만 너무 괴롭다. "아까, 나를 오세준라는 녀석과 착각했지?" "......" "그는 누구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녀석의 목소리로 녀석에 대해 질문하다니 우습지도 않는 노릇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그러나 조금 가라 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반 학생." "친구였나?" "아니."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슬쩍 눈을 떠서 놈의 얼굴을 보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수없게 빤히 바라보느니 차라리 느물거리는 표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힘없이 늘어져있는 나는 쿡쿡 쑤셔대는 통증에 정신을 놓을 수 없어 연신 식은땀은 흘린 채 긴장해야 했다. 설마 부러진 건 아니겠지. 아니 이대로 죽이는 건... 얕은 숨을 반복하고 있는데 전신에 미세한 경련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으로 신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육체의 아픔에 신경 쓰느라 놈에게 전혀 눈을 줄 여유가 없었다. "이상하군." 놈이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기껏 내뱉는 소리가 그거였다. "난 많은 놈들이 괴로워하는 걸 보아왔지만... 네 놈이 아파하는 걸 보니 유난히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단 말야." 잠시 이 세계에도 카타르시스란 단어가 있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욱신거리는 통증 탓에 생각할만한 여유도 없었다. 녀석이 가만히 내 얼굴선을 따라 손바닥으로 쓸어 내려간다. 입에 걸린 미소가 능글맞아 보이는 건 오세준과 닮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작자 자체가 능글맞은 거다. 꺾인 곳이 아파서 정신이 없다. 눈 앞이 자꾸 아득해지려 하고 있고 숨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 와중이니 이 자가 얼굴을 쓰다듬든 벗겨진 상체를 어루만지든 그저 빨리 용건을 마치고 가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놈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더니 "많이 아픈가?" 하고 묻는다. 뭐 저따위 재수없는 자식이 다 있냐.... 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더니 놈이 내 몸을 부드럽게 안아 든다. "이렇게 하는 쪽이 더 편할 거야." 그러고 나서 명치끝에 주먹이 박혔다. 가물가물하는 시야너머로 오세준의 얼굴이 빙글대며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래, 차라리 기절하는 쪽이 편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예 의식을 놓아버렸다. 눈을 떴을 때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것은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의 천정이었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몸에서 격통이 일었다. 온 몸이 삐걱거리며 뼈란 뼈는 모두 마찰하는 것 같았다. 진유현...죽여버릴 거야... 멍하니 누워 내게 일어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래. 진유현이 나를 뜯어 먹고 있었고 한도훈이 벌거벗겨진 채 악을 쓰고 있었다. 강지원과 임경철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세준은 잡아 먹히는 나를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오세준? "으윽-!" 무리를 해서 일어나는 바람에 목구멍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착각했다. 여긴 그 지하창고가 아니다. 귀족과 평민의 계급이 나뉘고 노랑머리 파란머리의 사람들이 달구지를 끌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시대착오적인 중세 어느 마을 귀족 저택의 지하 감옥인 것이다. 감옥이라기 보다 창고에 가까운 모습에 잠시 지난 일과 혼동했나 보다. 꼼꼼히 얻어 맞은 탓에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멍투성이의 몸은 허름한 바지와 낡은 모포하나로 감싸여 있었다. 팔과 다리에 채워진 족쇄가 사라지고 대신 부목과 붕대가 덧대어져 있었다. 아직도 시큰거리는 온몸의 상처에 무언가 약이 발라져 있는 흔적이 있다. 약한 한약냄새가 나는 게 나름대로 치료라는 것을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도 붕대가 감겨 있다. "하아..." 끄응-하고 기합을 넣어 바닥에 걸레처럼 굴러다니는 윗옷을 한쪽 팔을 이용해 어찌어찌 꿰어 입었다. 왼발과 왼손은 움직이는 게 불가능 했다. 힘이 실리지도 않을 뿐더러 자칫 바닥에 잘못 닿아 무게가 실리면 욱신거리면서 통증을 호소한다. "빌어먹을..." 바닥을 기어 겨우 감옥의 문까지 갈 수 있었다. 벽을 의지하여 모포를 어깨까지 휘감고 문을 열어 보았다. 철로 된 육중한 문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의외로 간단히 열렸다. 어두컴컴한 복도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망칠 거라곤 생각 못했나? 보초병은커녕 지나가는 간수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절룩거리면서 감옥을 빠져 나왔다. 행여나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조심조심 벽에 붙어 이동했다. 어차피 이런 몸 상태론 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한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뭔가 이상하다. 도란도란거리는 얘기소리가 아니다. 무언가 다급하고, 정신 없는... ...그래, 뭔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마치 볼륨을 줄인 텔레비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내 귓가에 닿았다. 비명, 고함소리, 말발굽소리와 육중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 음산하고 고요한 지하복도를 걷는 내겐 마치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점차 내가 서 있는 지하복도가 현실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아비규환의 소음이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하다. 숨도 가빠온다.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지? "불이야-------!!!!!!!" 정신이 확 깼다. 어느새 복도가 희미한 연기로 자욱하다. 깜짝 놀라 모포로 코를 틀어 막았다. 고약한 구린내가 났지만 그런 거에 연연한 여유는 없었다. 절뚝거리며 겨우 당도한 복도의 끝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함께 불긋불긋한 불꽃의 그림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금 내 기분을 표현할 만한 적당한 어휘가 없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하하하. 운도 지지리도 없지. 죽을 둥 살 둥 그 고생을 해 놓고... ....이젠 불에 타죽게 생겼다. "쿨룩쿨룩쿨룩-!!" 반대편 복도로 다시 걸어갔다. 아니, 기어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두 다리로 걷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빠르니까. 모포를 뒤집어쓰고 아까만 해도 갇혀있던 감옥 문을 지나, 비교적 연기가 덜 들어오는 계단까지 무릎이 닳도록 기었다. 하지만 이곳도 불꽃만 보이지 않다 뿐이지 점점 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차고 있었다. "쿨룩쿨룩쿨룩... 제길..." 위로 향하는 계단을 기어 가면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기껏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더니 이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세상, 정말 별 꼴을 다 당한다. 내가 뭘, 뭘 그리 잘못했나? 바닥을 긁으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눈이 따갑고 연기가 맵다. 옆에서 후끈하는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꽤나 가까이에 불꽃이 있는 것 같지만 눈이 매워 뜰 수가 없다. 무조건 올라갔다. 무조건 앞으로 기었다. 나중에는 내가 계단을 기는 건지, 바닥을 기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그저 덜 뜨거운 곳을 찾아 감에 의존하여 모포를 부여 잡으며 기었다. 누가 죽을까 보냐. 누가 이런데서 죽을까 보냐!! 굶어 죽을 뻔했었고, 물에 빠져 죽을 뻔했었다. 손 발도 부러졌다구.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불에 타 죽어? 질식해 죽는다고? 웃기지마-----!!! 이건 오기다! 아니, 발악이다!! 절대 죽지 않아!!! 내가 왜 죽어야 하는데-!! 아...... 눈물이 흐르는 건 연기가 맵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맵다. 차가운 물이 입안에 들어왔다. 지독한 갈증을 느끼며 정신없이 받아 삼켰다. 이어서 누군가 뺨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승호야! 승호야!! 정신차려!! 윤승호!!!!"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동그랗고 붙임성 좋아 보이는 그 얼굴은 절박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정민태...뺨이 떨어질 거 같이 아프다. 그만 때려... "승호야! 정신이 들어? 나 알아보겠어?!!" "으응....괜찮아. 민태야..."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마른 기침을 했다. 민태는 바닥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나를 부축하며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 이런, 아디움자식! 대체 애를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람!! 승호야 나 못 알아 보겠어? 라노야. 라노 그라데쥬!" 그제야 내가 잠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태가 낯선 가죽옷을 걸치고 등뒤로 화살이 가득 담긴 활통을 매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저 눈앞의 소년은 라노가 분명하다. "라노?"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라노? 살아있었던 거야? 그 감옥에서 어떻게! 무사한 거야?!!!"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라노의 신변을 살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저택은 불에 타고 있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화살이 빗발치고 이따금 단말마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대체..." "하...다행이다." 내가 무사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라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택을 습격하고 불을 지른 건 내 친구들이야. 갇혀있던 나와 너를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네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찾느라 애먹었어. 발을 동동구르면서 본채의 지붕에 올라가 상황을 살피는데 용케 서쪽별관 1층의 쪽문을 열고 네가 반 기절상태로 나오더라구. 정말,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조금만 늦었더라도 연기에 질식사했을 거야." 계단을 기어올라가다가 거의 무의식 중에 보인 나무문을 향해 움직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문을 열고 나왔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또, 구해줬구나." 벌써 두 번째다. 생명의 은인이란 표현으로는 성에 안 찬다. 라노에게 진 신세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정말 아득하기만 하다. "아직 고마워하긴 일러. 우선 이곳을 나가는 게 문제니까." 코밑을 스윽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라노는 활짝 웃고 있었다. 저렇게 사심 없이 웃는 건 정말 정민태과 똑같다고 생각하며 라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 손목과 발목에서 통증이 사라졌다. 사라졌다기 보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왼쪽 다리를 딛고 일어서 봤지만 고통은 없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다리로 되돌아 온 것은 아니고 마취주사를 놓은 것 마냥 둔하다. "너무 무리하지마. 좀 독한 진통제를 놓아서 한동안은 감각을 느낄 수 없을 거야." 무슨 진통제인지는 몰라도 정말 강력하다. 제대로 걷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절뚝거리면서 걷는데 고통이 전혀 없다. 뭐랄까 감각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고나할까. "자, 이쪽으로! 머리 숙이고 다리 조심해!" 라노가 앞장서서 저만치 달려갔다. 어어어? 하는 사이에 머리위로 뭔가가 날아들고 있었다. 이제 막 정신이든 탓에 모르고 있었지만... 앞에선 거대한 저택이 불에 타고 있고 그 앞을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괴성을 지르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뒤에선... 한 무리의 군대가 비오듯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저택의 경비대가 쏘는 화살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있을 뿐 거의 위협용이었다. 그에 반해 허름한 옷차림의 청년들은 경비대의 실력보다 위였고 그래서 세 번 쏘면 한 번 정도는 맞추는 명중률을 보였다. 경비대는 저택을 포위하듯 둘러싸 방패로 앞을 막는 진을 치고 있었다. 비록 화살의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도망 나갈 구멍도 없어 보였다. 속속들이 병사들이 추가 되는 것이 멀리 있는 내 눈에도 보일 정도이니 실제 상황은 더 암담할지도 몰랐다. 병사들은 저택주위를 둘러싼 방패부대와 칼 들고 뛰어다니는 무리들, 그리고 저택에 난 불을 끄느라 정신 없는 무리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저택하나를 지키는 병사치고는 그 수가 지나치게 많은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건 내가 생각한 게 아니고 라노가 옆에서 알려준 것이다. "귀보르냑가의 노망난 늙은이가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도움을 줄지는 몰랐는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의 집이 홀랑 타고 있는데 가만히 있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이 정도의 병사들이라면 카이 쪽이 좀 더 수월해 지겠군." "에?" 불타는 저택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후원에 숨어서 라노의 중얼거림을 듣던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그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라노를 쳐다보았다. 라노는 말할까 말까 잠깐 고민하더니 씨익 웃어보이고는 목소리 톤을 낮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말하자면, 양동작전이라는 거야." "엥?" 무언가 대단한 얘기를 한다는 듯 조용히 말해놓고는 "우왓! 더 이상은 말 못해!" 하고 수선을 떠는 모습에 더 질문할 기운도 떨어졌다. 설령 라노가 자세히 말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자신이 없다. 그보다 당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후로 대체 몇 시간이나 지난 거야?" 지하실에서 기절한 후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정신 차렸을 때도 그 지하실 안이었으니, 시간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 반나절은 지났을 거야." 우리가 산에서 내려오고 감옥에 끌려온 게 어제 오후니까. 지금은 이미 하루 해가 지나고 몇 시간 뒤면 새벽이지." 나는 좀 멍해져서 라노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괴, 굉장한데... 그럼 그 짧은 시간동안 친구들을 모으고 저택을 습격해서 불을 지른 거야?" 내 감탄을 듣고 라노가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 이 저택은 말이 저택이지 이 영지에서 귀보르냑 성 다음으로 큰 건축물에 경비수준도 군대급인걸. 반나절 만에 습격이 가능할 리 없잖아?" "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자 라노는 "쉿"하고 조용히 시켰다. 인적이 드문 후원이었지만 병사들이 계속 수색하고 있어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게 좀처럼 쉽지 않은 듯했다. 정원을 나가도 저택의 뒷문과 담, 빠져나갈 만한 곳은 전부 감시 당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불에 타고 있는 아수라장의 저택보다는 나았지만 삼엄한 경계에 둘러싸인 이곳도 그닥 좋은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이따금 후두둑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 저택의 층 하나가 불똥을 튀기며 무너져내리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옛말에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제일 재밌다지만 내 목숨이 일각이다 보니 여유로운 기분이 될 수 없었다. 운이 나쁘면 화살에 꽂히는 사람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병사들의 고함 소리 하나하나에 몸을 떠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단시간에 세운 계획이 아니야." 라노의 몸이 조그맣게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진지하고 심각한, 혹은 분노한 것 같기도 한 라노의 얼굴이었다. 라노 스스로도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인 것에 놀랬는지 등을 돌렸지만 얼굴 가득 우울한 빛을 띠는 걸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라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세를 더 낮췄다. 어딘가에서 젊은 남성의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라노의 몸이 왠지 불안하게만 느껴져서 쪼그리고 앉은 다리가 아프다고 생각지도 못한 채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라노! 이쪽이야!!" 목소리를 잔뜩 누르며 누군가 소리쳤다. 어둠을 틈 타 두 명의 소년이 날쌔게 뛰어왔다. 형석이랑 안진영.....아니아니...라노의 친구들이었다. "티안! 파웰! 무사했구나!!!" 라노도 목소리를 억눌러 소리쳤지만 기쁨의 환호는 감추지 못했다. 세 사람은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더니 금새 얼굴표정이 변화해서는 심각하게 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정원의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금방이라도 발각될 것 같아 두렵기만 했다. "카이 쪽은 어때? 잘 되고 있어?" "아직 까진 우리 예상대로야. 귀보르냑 가주가 성안의 경비병들을 죄다 성 입구쪽에 배치해 놓은 덕분에 잠입한 녀석들이 활동하기는 한결 수월한가 봐. 생각보다 더 성의 경비는 엉망이야." "이제 도개교만 열리면 돼. 성밖에서 수천의 병사가 대기 중이라구. 의욕도 없는 귀보르냑의 경비대따위 보다야 훨씬 낫지." 세 사람은 눈을 빛내며 들 떠 있었다. 나야 뭐가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흘러가는 상황으로 보아 무언가 혁명이나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얼핏 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쿠데타라니 이제 별 사건에 다 연루되는 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어느 것 하나 원하지 않는 사건들만 연속으로 터지는 내 불행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바라건대 전쟁에까지 끌려가지 않기를. "우리 쪽 피해가 만만치 않아. 일단 저택을 습격하는 덴 성공했지만 놈들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이렇게 빨리 병사들이 추가 될 줄은 몰랐어." "어차피 우린 미끼니까. 피해는 감수한다 치지만 가능하면 전부 살아서 갔으면 좋겠는데." 말 끝에 어두운 여운을 남기며 라노의 친구들은 다시 제 할 일을 찾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라노도 그들을 못내 아쉬워 하며 부디 무사하라고 몇 번이고 입안으로 되뇌는 것을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여기에 있다가 포위될 것 같다." 라노가 내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고 있었다. 절뚝거리면서 바라본 저택은 이미 화재를 진압하기엔 늦어 보인다. 타오르는 저택을 배경으로 무장한 병사와 간소한 차림의 청년들이 칼부림을 하고 있었고 한쪽에선 불을 끄는 하인들과 병사들이 보였다. 쏟아지는 화살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지만 이번엔 무장한 병사들이 침입자들을 잡기 위해 우우-하고 몰려든다. 청년들은 도망치면서 화살을 쏘거나 맞서서 검을 뽑지만 몇 명은 병사를 죽이고 몇 명은 병사의 손에 죽는다. "빨리!" 넋을 놓고 제대로 뛰지 않는 나를 재촉하듯 라노가 낮게 소리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라노를 따라 절뚝거리며 뛰었다. 내가 방금 본 풍경이 현실인지 아닌지...그저 몽롱한 꿈 같기만 하다. 우리는 정원을 빠져나가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올라가는 길목에도 몇몇 병사들이 혈안이 되어 침입자들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와 라노는 나무 뒤에 숨으며 조심스럽게 산을 올라 갔지만 나무 하나에 둘이 숨기는 너무 좁았다. 관목이 무성하여 자세를 낮춘다면 숨기에는 썩 나쁘지 않지만 이 상태론 기어가는 거나 다름 없었다. 움찔. 하고 라노가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철제갑옷 같은 거창한 방어구는 하지 않았지만 단단한 가죽으로 상체를 감싸고 가죽 투구와 방패, 검으로 무장한 병사였다. 라노는 조심스럽게 활에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나는 그 동작에서 당연히 이어질 다음 행동이 내게 줄 충격을 예측하지 못했다. 라노가 부시럭 대자 그 소리에 병사가 이 쪽을 돌아 보았다. -퍽. 순식간에 라노의 화살이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헉"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은 병사대신 내 목구멍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 나왔다. 라노가 조용하라고 주의를 주자 떨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영화나 게임에서 많이 봐온 장면이었지만 실제로 죽는 건 당연히 처음 보는 거다. 아까만 해도 저택에서 칼부림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랑 현장감이 다르다. 공포. 자신도 언제 저렇게 죽을지 모른다는 생생한 공포. 오랜 시간 나를 지배해온 도덕관념에 의한 살인에의 거부감. 머리가 어지럽다. 밤이었지만 달은 밝았다. 숨기엔 부적절하다고 투덜대면서 라노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히 앞길을 가로막는 병사들의 목을 하나씩 꿰뚫고 있었다. 그들이 고꾸라져 죽어갈 때마다 내 심장이 하나씩 떨어지는 기분이다. 알 수 없는 찝찝함과 양심의 가책. 내가 죽인 게 아닌데, 라노는 우리가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건데.... 그래도 살인은 싫다. 망설임 없이 활을 쏘는 라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최소한 정민태로 오해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거다. 그렇게 대낮같이 환한 저택을 뒤로 하고 옮기는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뒤에서 누군가 목을 잡아챌 것 같이 불안했다. "저쪽이다!!" 어디선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쯧-하고 혀를 찬 라노는 내 손을 끌고 더욱 빠르게 뛰어갔지만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몸을 낮추고 뛰는 산행은 매우 고달픈 것이어서 하루종일 혹사당한 내 몸은 맘껏 움직여 주질 않았다. 가중되는 두려움은 더욱 나를 짐 덩어리로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다리도 절고 있다. "잡아라!!" 두세 명의 병사들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그들에게 활은 없어 보였으나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검이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던 우리는 앞을 막아선 병사들 때문에 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반대편에서도 병사 하나가 오고 있다. 그렇게 라노가 활을 겨눌 틈도 없이 앞뒤로 길이 막혔다. "쳇-" 라노가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활은 발 아래로 던져두고 나를 등뒤로 보호하며 이리저리 병사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섣불리 다가 오지 못하고 동정만 살피던 병사들이 하나 둘 검을 겨누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승호야, 피해있어!" 하지만 포위된 내가 도망갈 구멍은 없었다. 아까 라노가 호신용으로 단검을 하나 허리에 채워주긴 했지만 나는 칼이라곤 컷터칼이랑 식칼밖에 잡아 본 일이 없다.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염 난 아저씨들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우릴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그렇다고 라노의 옷자락을 잡자니 방해 될 것 같고 칼 든 사람을 상대로 싸울 줄도 모른다. 정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현대에서나 여기서나 나는 쓸모없는 사내아이다. 당장 살해당할지도 모르는데.... 살인은 싫어....따위의 한심한 생각이나 하다니!!! "도적놈들, 죽어라!" 눈치를 보던 병사들 중 하나가 덤벼들자 뒤이어 나머지도 덤벼든다. 라노는 우선 앞에서 달려오는 병사의 검을 받아 치면서 나를 밀쳤다. "승호야! 도망가!!" "누구 맘대로!" 밀쳐진 내게 공격을 가하려는 수염투성이 병사를 라노가 가까스로 발로 찼다. 틈을 놓치지 않고 덤벼드는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곡예 하듯 허리를 돌려 칼을 올려 차는 라노는 이미 한 명에게 부상을 입힌 상태였다. "어서 도망가! 빨리!" 라노가 위급했다. 무장한 병사가 넷이나 된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무리다. 거의 재주넘기 하는 몸놀림으로 넷을 상대하는 솜씨는 놀라웠지만 이길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라노의 팔에서 피가 튀는 것이 보인다. 다리가 휘청거려 날아드는 검에 맞을 뻔한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도망가지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그런 나를 만만했다고 판단한 병사 하나가 라노에게의 공격을 멈추고 내게로 달려온다. "안 돼!" 날카롭게 소리지르며 라노가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아 정확히 병사의 뒤통수에 맞추었다. "주타!!" 병사하나가 죽은 동료의 이름을 외치며 절규했다. 그 사이 다른 병사가 라노의 어깨를 베었고 이번 상처는 타격이 컸는지 라노의 동작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피가 많이 흘렀다. 오싹하고 한기가 흐른다. 이어지는 병사의 분노에 찬 발길질에 라노가 넘어지기 직전이다. 가까스로 검을 휘둘러 위기를 모면해보지만...맙소사, 저러다간 죽겠어!!! 병사들은 동료의 한을 풀듯 발로 차고 칼등으로 내려친다. 병사가 검을 휘둘러 죽이려 하는 것을 라노는 간신히 막았지만 배에 꽂히는 주먹까진 막지 못한다. 안된다...나 때문에 죽는 거야...이러다간 라노도 나도 죽어.... 바닥에 라노의 피가 흩뿌려진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몸에 쌓여간다. 안 돼...안 돼... 절대 그렇겐 안 돼!!!! 전신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들어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움직였다. 내가 지금 일어서고 있는 건지. 걷고 있는 건지 뛰고 있는 건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 "으아아아아아!!!!" 냅다 손을 뻗었다. 긴장으로 인해 필요이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깊이 찔러넣었다. 손 끝을 타고 전해지는 물컹한 감촉은 등골이 쭈뼛해질 정도로 소름 끼쳤다.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고 칼이 박혀 있던 몸이 힘없이 옆으로 스러졌다. 검을 꾸욱 쥐고 있던 탓에 그대로 박혀있던 몸만 빠져나간다. 다른 두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보이고 라노가 두 사람의 목을 긋는다. 너무 빨리 행동한 라노의 몸놀림은 부상자의 것 같지가 않았다. "잘했어 승호아! 덕분에 살았어!!!" 피투성이에 귀신 같은 형상을 하고 라노가 기뻐하며 다가왔다. 아직도 단검을 들고 찌른 그 자세로 굳어버린 나는 검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살인을 했다. 사람을 죽였어. "승호야, 괜찮아? 응? 적들은 다 죽었어. 네 덕분이야. 그러니 안심해." 다 죽었어? 내가 죽였어? "괜찮아. 잘했어 승호야. 얼른 여기를 벗어나자." 라노가 어깨를 다독이며 딱딱하게 경직된 손가락을 펴고 단검을 빼내었다. 피를 털고 조심스레 검을 검집에 집어 넣은 라노는 아직도 칼을 찌른 그 자세에서 경직된 내 등을 쓸어 내리며 토닥거렸다. "괜찮아...괜찮아 승호야. 울지마 응? 울지 말고...천천히 숨쉬어...천천히 숨을 내뱉는 거야. 알았지? 하나, 두울..." 후욱-후-- 그제야 공기를 토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내가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망연히 라노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피투성이가 된 라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괴이했다. 짙은 피냄새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울고 싶고 소리지르고 싶기도 한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원래 이런 세계인 거다. 사람이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을 감옥에 가둬두고 고문해도 어쩔 수 없는... 형식적으로나마 인권이 보장되는 내가 알던 나라가 아니다. 사람을 찔렀을 때 손에 전해지던 그 감촉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라노! 무사했구나!!!" 저만치서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아마도 파웰, 티안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파웰! 티안! 너희들도 무사했구나!!" 형석이, 진영이와 닮은 라노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라노가 피투성이가 된 걸 보더니 깔깔대며 웃는다. "천하의 라노가 부상을 당하다니!" "왜, 17:1로 싸우기라도 했냐?" 전혀 친구답지 않은 농을 지껄이며 상처에 무언가를 처덕처덕 발라주고 붕대도 잔뜩 휘감아 주고 있었다 "응? 그런데 얘는 괜찮은 거야? 피가 묻었는데..." 김형석, 그러니까 파웰이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달빛에 비친 내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옷과 얼굴에도 새빨간 혈흔이 튀어 있었다.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 "얘 피가 아니야. 이 녀석 덕분에 오늘 목숨을 건졌다구." 웃으며 이야기 하는 와중에도 우리들 넷은 산을 타고 계속 올라갔다. 목소리를 죽이고 발걸음을 조심하긴 했지만 더 이상 추격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저택의 불은 점점 수그러들고 있어. 아마 삼분의 이는 홀랑 탔을 거야." "카이 쪽은 아직 연락이 안 오지만 성공하면 푸른 신호탄, 실패하면 붉은 신호탄을 쏘아올린다고 했어. 뭐 새벽까지 신호가 없다면 그것도 실패로 봐야겠지." "우리쪽 피해는 예상보다 두 배는 커. 아마 절반은 당했을 거야. 성공한다 해도 카이 입장에선 굴러들어온 떡이겠지만 우리 쪽은 오히려 손해야. 이래서야 길드가 제대로 운영이나 될 수 있을지...." 이야기가 어둡게 흘러가자 말이 많고 웃음기가 넘치던 라노의 표정도 우울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들은 말없이 산을 올랐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나는 멀리서 아직도 비명소리와 칼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산을 오르는 데에만 힘을 다 쏟은 나는 정신적 충격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팔다리 때문에 라노와 티안의 부축을 받고도 매우 지쳐 있었다. 어두운 산길을 헤치며 숨소리도 죽이고 산을 올라가던 그때였다. "여어, 쥐새끼들이 여기 다 모였군." 조금 트인 공간이 나왔다 싶었을 때 나무그늘 뒤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맨 앞에서 비웃음을 띠고 있는 것은 오세준과 똑같은 그 귀족녀석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달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네 명의 소년, 아니 소년이라고 보기엔 덩치가 있어보이는 네 명이 나타났다. 달은 환했다. 아무리 저 녀석들이 이상한 옷차림에 평소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노란 머리, 갈색머리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저 네 명의 얼굴을 잘못 봤을 리가 없다. 박재석, 김한수, 강지원, 김경철. 여기모인 우리들 아홉 명만 보면 1학년 1반 동창회를 해도 되겠다. 헛 참....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건지 나는 아직도 판단이 서질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저 놈들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이젠 놀랍지도 않다. 진짜, 저 어둠 속에서 진유현이 튀어나온대도 안 놀랄 거니까... "소르 아디움 귀보르냑." 라노가 이빨을 짓씹으며 내뱉는 어조는 매우 낯설고 살기가 배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저택에 도둑이 자주 찾아든다 했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래?" 오세준을 닮은 녀석이 실실 웃으며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흥, 저택이 거의 불 타 가는 상황에서도 여유만만이구나. 어디 그 여유가 어디까지 가나 볼까?" 파웰이 호기 좋게 외치며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하고 섬뜩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은 달빛을 받아 스산하게 반짝였다. 파웰의 동작을 신호로 티안과 라노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게 말야. 게다가 저택도 잃게 생겼으니 이제 어쩐다? 하지만 장난감 하나만 주면 집하나 불탄 것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는데." 소르...어쩌고 하는 놈이 그렇게 말하자 뒤에서 껄렁껄렁하게 웃던 놈들이 눈을 빛낸다. "하지만 저런 삼류 도적집단에게 아딘이 만족할만한 장난감이 있을까?" "보아하니 저 중에 쓸만한 얼굴들은 없는 거 같은데." "동글동글한 놈 하나, 멀대 같이 키만 크고 시커먼 놈 하나, 비쩍 마르고 쬐끄만 놈 하나, 새파랗게 질려서 얼굴이 시체 같은 놈 하나....자아, 어느쪽이 아디움님의 취향이신지?" 와하하하하고 다섯 명이 한꺼번에 웃는다. 멀대 같다고 놀림 받은 파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는 것을 라노가 손으로 막았다. "자자 쓸데없은 얘기는 이쯤하고 용건만 말하지. 우리에게 그 녀석을 넘겨라. 그러면 너희들이 저택을 태웠든, 성을 함락했든 상관 안하겠다." 소르....아니, 아디움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 녀석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라노와 그의 친구들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서 이들의 반응을 본 나는 영문을 몰라 불안해졌다. "알고 있었나? 아니, 혹시 지금 성에서 오는 건가?" 라노가 긴장하며 말했다. 아디움이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건들거렸다. "그럴 리가. 다만 성에 있다가 달려온 내 친구들 덕분에 알게 되었지" 뒤에 있는 녀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주제 넘는 생각을 했더군. 내 저택을 공격해서 성안의 병사들을 이쪽으로 유도한 뒤 진짜 군대로 성을 점령한다? 그것도 일부러 도둑길드에서 아디움의 저택을 노린다는 정보를 흘려 할아버지의 신경을 이쪽에 곤두서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말이지." "그래, 손주새끼 끔찍이 위하는 노망난 늙은이더군. 병력배치도 어떻게 할 지 모르고 말야. 저택 하나 지키는데 저 만큼의 병사라니 그것만 봐도 알 수 있겠어." 아디움은 자조적으로 웃어보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늙은이 딴에는 이 기회에 도둑들을 싹 청소해 버리려고 큰마음 먹은 거라구. 하찮은 도적놈들이 자기 성을 공격할 배짱과 병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보수적인 노친네니까. 게다가 그 도적놈들이 설마 다른 귀족과 결탁할 주변머리가 있는지도, 또 도둑과 결탁할 귀족이 있다는 것도 그 늙은이로서는 상상 불가능한 얘기니까 말이지." "꽤 상세히 아는군. 마치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옆에서 티안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 심각한 물음에 아디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혀를 찼다. 마치 서양영화의 양키들이 과장스런 몸짓으로 너스레를 떠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오세준를 떠올리게 한다. 저런 식의 느끼한 몸짓을 자연스럽게 하는 인간도 흔하지 않은데 말이다. "미리 알았다면 이 모양이 되진 않았을 테지. 난 다만 내 친구들이 알려준 얘기를 듣고 짐작해봤을 뿐인데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것 같군. 귀보르냑 성밖에서 펄럭이는 깃발의 문양이 십 년도 전에 망한 귀족 에드바라하 가문의 것이라는 것을 내 친구들이 알고 있었거든." 싱긋 웃어 보이는 여유로움이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기분 나쁜 느낌에 조심스레 라노가 물어봤지만 "글쎄,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이 녀석들은 잽싸게 튀었다는데." 이라고 말하며 지들끼리 왁자하게 웃어 젖힌다. 하지만 녀석들 사이에서 금새 웃음꽃이 사라졌다. 녀석들의 우두머리인 아디움이 정색을 하고 라노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기 때문이다. "성이 어찌되든 상관없어. 설령 너희들의 계획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후 내가 군대를 끌고 온다면 이런 작은 영지쯤 하루 안에 끝이라는 건 잘 알 텐데." "그렇다면 그 전에 너를 없애면 되겠군." 라노와 아디움 사이에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지금 우리의 형세를 보자면 마치 패싸움하기 직전의 분위기였다. 아디움 패거리들이 껄렁하게 다리를 떨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보다 두어 발자국 앞으로 나온 아디움이 라노와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라노의 바로 뒤에서는 내가 멀거니 서 있었고 그 좌우로 라노의 친구들이 몸을 잔뜩 긴장한 채 녀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왕족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이 나라에서 '소르' 성을 지녔다면 왕족이겠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니니 안심해." 라노가 거침없이 검을 빼어 들었다. 이마와 어깨를 대충 붕대로 동여맨 모습에 아직까지 옷자락에 피가 밴 모습이 불안해 보였지만 라노 당사자나 그 친구들은 별로 걱정하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이 기회에 저 망나니 녀석을 없애버리자고 은근히 재촉하는 라노의 친구들이었다. "흐음...굳이 서로간에 피 볼 필요 없이 저 녀석만 넘겨주면 되는 것을. 아까 듣자 하니 저 녀석은 너희들하고 알게 된지도 얼마 안된 거 같은데 굳이 감싸고 도는 이유를 모르겠는걸?" "흥, 친구가 되는 데에 시간은 그리 오래 필요 없지." 조금 감동했다. 내가 감격에 겨운 눈으로 라노를 바라봤지만 표정이 심상치 않다. 파웰과 티안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무섭게...그래, 내가 형석이와 진영이한테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로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분위기가 살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껄렁한 태도를 집어치운 놈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녀석들, 아까와는 다른 박력이다. 하나, 둘, 장식용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화려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드는 폼이 예사롭지가 않다. 단순한 귀족도련님이라고 무시해 버리기엔 묘한 느낌이다. 이건... 현대에서도 가끔 느꼈던 기분이다. 오세준은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놈으로 진유현이나 다른 녀석들이 나를 멍석말이하듯 패는데 맛을 들인다면 녀석은 갖고 놀거나 장난치는데서 재미를 느끼는 놈이다. 그런 만큼 한 번 화내면 무섭다. 아디움 저 놈도 꼭 그러리란 보장은 없지만 하는 행동의 패턴이 같은 걸로 보아 사고칠 가능성은 크다. 아디움이 스르릉-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매우 천천히, 그러나 여유를 두지 않고 나를 잔뜩 째려보며 칼끝도 나를 향했다. 수는 5대 4로 얼추 머릿수는 맞지만 나는 전력에 하등 보탬이 안된다고 봐야 하고 라노는 부상자다. 반면 저쪽엔 살기등등한 놈들이 어둠 속에서 커다란 개마냥 눈을 빛내고 있었다. 라노와 그 친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디움과 그 패거리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진검승부인 이상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반드시 다칠 것이다. 시체라면 오늘 지겹게 봤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꼴 보고 싶지 않아. 라노가 다친다면? 여기 형석이나 진영이랑 똑같이 생긴 녀석들이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면? 싫다, 그런 건 싫어! 공기를 바짝 말라버리게 할 듯한 긴장감.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고 등뒤에서 비 오듯 땀이 흘렀다. 꼭 부여잡은 두 손이 떨린다. 어차피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는 나는 주춤주춤 물러서서 그들의 상황을 가슴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제, 젠장. 아디움이란 놈, 왜 나만 뚫어지게 보는건데! 천천히 녀석의 왼발이 움직였을 때였다. -삐요오오오오~~~ 응? 갑자기 산통이 깨지는 느낌이? -펑!! 놈들의 뒷쪽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삐요오오오오~~~ -펑! 반대편 하늘을 물들이는 파란색의 불꽃이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불꽃은 한 두개로 끝내지 않고 '삐요오오~~'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이내 '펑'하고 시원하게 터지는 수십개의 불꽃으로 점점 그 수를 늘려나가고 있었다. 온통 파란색의, 보기만해도 시원스럽게 터지는 불꽃이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채 불꽃이 그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해냈다..." 옆에서 티안의 중얼거림이 나즉하게 들려왔다. "해냈다! 해냈어! 카이녀석들이 성공했어!!!!!" 잔뜩 잡아 당긴 고무줄이 끊어지듯 폭죽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긴장의 실이 끊어졌다. 라노와 라노의 친구들은 방금전의 상황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서로 얼싸안고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나는 이 틈에 놈들이 공격해 오는거 아닌가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했지만 놈들 역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볼 뿐 손에 들린 무기는 땅으로 쳐진채 아까의 살기는 온데 간데 없었다. "아딘, 아무래도 일이 성가시게 됐네." "아무리 네가 생포하라고 했지만...이거 왠지 열받는 걸." 어쩔까? 저 놈들 여기서 확 목을 따버릴까?" 녀석들의 투덜대는 말투에 라노 일행도 그제야 다시 태세를 정비한다. 정말, 빨리도 눈치 채는군. 아까 얼싸안고 있을때 놈들이 덤볐으면 우린 다 죽었다구. 어쨌든 저 파란 불꽃이 성공의 표시라니 정말 다행이다. 일단 뒷꽁지가 가려운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문제는 눈앞의 저 놈들이다. 아디움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더니 흥이 빠진 표정으로 칼을 검집에 넣는다. "에걔걔. 그만두는거야?" "너무하잖아 아딘. 우리 잔뜩 기대했다고. 우리도 몸 좀 풀어보자." "귀보르냑성 같은 거 별로 상관 안하면서 뭘 그렇게 의기소침한 흉내를 내는거냐?" 우우~하고 동료들의 야유가 들려오자 오세준 클론은 "시끄럽다 이것들아." 하고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그말에 신기하게도 녀석들의 야유가 그친다. 하지만 불만 가득 삐져나온 입은 여전히 툴툴거리고 있다. "윤승호라고 했나?" 아디움이 진지해진 얼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라노들은 아직 검을 들고 있었다. 겁없이 이쪽으로 왔다가 베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놈은 검도 들지 않은채 천천히 다가왔다. 살기등등한 라노의 표정을 힐끗 보더니 아디움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고 내게 뜻밖의 얘길 꺼냈다. "재밌는 얘길 하나 해 주지" 나는 뚱딴지 같은 말을 꺼내는 놈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라노와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놈들의 무리들까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와 아디움을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나를 보고 [오세준]라고 했지?" 그랬지. 덕분에 그 지하감옥에서 된통 당하고 말이야. ...소름이 돋았다. 괜히 떠올렸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 "너랑 똑같은 말을 하던 녀석이 있었거든." ...... .....응? "십 년 넘게 알고 왔던 녀석이지. 어느 날 녀석이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찾아가봤더니 [야 오세준! 너도 여깄었냐!!] 라고 대뜸 소리지르더군." 어.... 어.... 어.... 몸이 굳었다. 혓바닥도 굳었는지 말이 안 나온다. 나와 같은, 그러니까 저 아디움을 오세준이라고 부르는 다른 녀석이 있다?! 잠시 굳어 있던 머리는 다시 회전을 시작하면서 입이 저절로 열렸다. 생각 같아선 저 놈의 멱살을 잡고 누구냐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그 녀석...이름은?" 금방이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려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자세히 나를 살펴본다면 다리랑 주먹쥔 손이 덜덜덜 떨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이름은 소르 헤시안 바르테스가." 아디움은 잠시 말을 끊더니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그...원래 이름이 뭐라더라..."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누구야, 대체 누구야...민원호? 유진철? 혹시 재수없게 진유현? "아, 그래! 김제하라고 했던 것 같아." 엇. 잠시 빗겨간 예상에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새로운 인물의 이름에 간이 철렁 내려 앉는 느낌이 들었다. 김제하. 그녀석이? 그럼 그때 사고나던 당시 이 엉뚱한 세계로 온 건 김제하와 나? 그렇지만 뭔가 앞뒤가 안 맞다. 난 이 세계에 뚝 떨어져서 아무런 연고도 없다. 여기가 어딘지는 물론 어느 시대인지도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김제하는 저 왕족의 도련님과 친분까지 있고 무려 소르....어쩌고라는 본명까지 있다지 않은가!! "김제하가 너랑 십년지기 친구라고?" 아디움의 얼굴에 점점 웃음기가 번진다. "흐음...그 이름, 꽤나 익숙하게 부르는데? 물론 그 녀석은 나랑 친구는 아냐. 본의 아니게 같은 성씨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것 뿐이지. 그러던 녀석이 어느 날 자신은 헤시안이 아니라며 길이길이 날 뛰더군. 참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지." 녀석이 빙글빙글 웃는다. 기분이 나빠진다. "지금은 어느 정도 나아지긴 했지만 말야.... 그 녀석이 가끔 혼자 있을 때 중얼거리거나 허공에 대고 외치는 소리가 있단 말야. [윤승호 이 자식, 만나면 가만 안 둬.] 하고 말이지." 섬찟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었다. 어째서 김제하가 내 이름을? "어디야! 그 자식 지금 어디에 있어!!" 나도 모르게 몸이 뛰쳐 나가려는 걸 당황한 라노가 가로 막았다. 하지만 지금. 지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져서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 상황에서 이건 한줄기 빛이란 말이야!! 그래, 김제하 그 자식은 원래 그랬어. 마치 모든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아니꼽게 쳐다봤지. 생각해 보면 녀석이 가끔 내뱉던 뜻 모를 소리들도 뭔가 커다란 비밀이 있는 양 혼자만 알고 나한테는 해명도 하지 않았지. 이번에도...이번에도 그런 거야? 김제하는 뭔가 알고 있는 거야?!!!! "글쎄, 나와 함께 가면 녀석에게 데려다 줄 수도 있는데." 아디움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만둬!" 라노가 고함을 쳤다. 그것은 아디움을 향한 것뿐만 아니라 흥분해 있는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순간 뇌 속에 얼음물이 부어지는 차가움을 느꼈다. -삐요오오오~~ -펑 불꽃의 빛이 아디움의 후광처럼 보인다. "나는 이제 본가인 왕궁으로 갈 거다. 나를 따라오면 헤시안과 만나게 해주지. 아니, 김제하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 녀석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나와 함께 가자." 매력적인 미끼를 던져놓으며 녀석은 웃음지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등진 놈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빛이 얼굴에 만들어 내는 괴기한 음영 때문에 어찌 보면 찡그리는 것 같기도, 화내는 것 같기도 했다. 옆에서 라노가 설마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녀석의 제안은 모든 것이 낯설고 엉망진창인 이 세계에서 한가지 희망이었다. 너무도 가느다래서 과연 희망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빛의 조각.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깜박거리는 작은 빛의 조각은 새까만 어둠 속에선 유난히 환히 빛나는 빛이었다. 만일 저 녀석을 따라가면... 따라가면... "웃기시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녀석을 향해 겨눴다. 뭐, 다들 장검인데 나만 칼이 짧아서 폼은 안 나지만 그럭저럭 나의 의사를 밝힐 정도는 되었다. 갑작스런 나의 태도에 녀석은 물론 옆에 있는 라노의 표정도 놀라움으로 얼어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 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데려가서 대체 어쩌려는 거지? 내가 뭘 믿고 널 따라가야 해?" 생각보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더 이상 저 자식의 맘대로 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두려움보다 앞섰다. 비록 쓸 줄 모르는 검이지만 똑바로 앞을 겨누고 아디움의 가슴을 향했다. 녀석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뒤로 주춤 한발자국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래! 네가 뭐라고 말해도 승호는 너를 따라가지 않아!" 그제야 침묵하고 있던 라노가 기쁜 듯이 외치며 의기양양하게 내 옆에 섰다. 라노의 친구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청히 서 있었지만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으려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호라! 그래, 해보자는 거냐!" "좋아, 아딘! 저 녀석들 쓸어버리자고!" "삼류 도둑놈들 따위 정면으로 싸우면 정식으로 훈련 받은 우리에게 이길 수 없어!" "죽여! 죽여버리자!!" 놈들 사이에서 격렬한 함성이 튀어 나왔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 같았다. 그러나 아디움은 뭔가 예상 밖의 결과에 놀란 듯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무서웠다. 호기 좋게 단검을 빼 들었지만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고 손도 알콜중독에 걸린 사람마냥 부들거리고 있었다. 김제하에 관해선 정말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내가 저 녀석을 따라간다 해도 나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위험한 미끼를 덥석 물기에 난 겁쟁이였고 약했다. 멍하니 나를 보던 아디움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흠칫하고 놀랬지만 녀석은 미간을 한 번 찌푸리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다. "입 닥쳐! 오늘은 흥이 깨졌으니 그냥 돌아가자." 너무나도 순순히 물러나는 통해 오히려 우리 쪽이 당황했다. "뭐야? 말도 안 돼! 이대로 물러난다고?" "아딘! 언제 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된 거야?!!" 동료들의 항의를 무시하고 녀석은 큰 소리쳤다. "시끄러!!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말 안 듣는 놈들은 버리고 간다." 그렇게 말하고는 저 혼자 숲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아딘!!! 아디인!!!" "에이 씨, 젠장!" "너희들 운 좋은 줄 알아! 아씨, 아딘! 같이 가!!" 기세 등등하던 녀석들은 온갖 욕을 퍼부으면서도 쫄레쫄레 녀석이 사라진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놈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라노의 친구들은 그 모습을 죽일 듯 노려보고만 있었다. "놈...눈치 하난 빠르군." 무리들이 사라지자 라노와 그 친구들이 혀를 차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몰라 갸우뚱하고 있었을 때 나무 위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장! 무사하십니까?!!" 전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슨 닌자 같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우르르르 사람들이 달려들어 오는 기세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검을 고쳐 쥐었지만 파웰이나 티안에게 가볍게 목례하는 것을 보니 적은 아닌 것 같았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그들을 보며 얼떨떨해 하고 있는데 옆에서 라노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눈치 채지 못했지? 이 근처가 접선장소라서 저 녀석들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거든. 만일 싸움이 시작되면 왕족이고 뭐고 아디움 녀석을 끝장내 버리려고 했는데... 아디움녀석, 아무래도 아까 폭죽 터질 때 눈치챈 것 같아." 자못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라노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없애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멍하니 라노를 바라보고 있던 사이 주위의 검은 옷들이 라노의 곁으로도 몰려왔다. 폭죽은 아직도 터지고 있었고 검은 옷의 사람들은 기쁨과 흥분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얼싸안고 만세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푸른 불꽃입니다." 검은 옷 중 가장 덩치가 커 보이는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 성공이다." 라노가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 있던 파웰, 티안도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검은 옷의 덩치 큰 사내의 등을 팡팡 때린다. "뭘 그렇게 굳어 있는 거야? 성공이라구! 우리가 이겼다구! 좀 더 소리 내서 기뻐해도 좋단 말야!!!" 검은 옷이 부들부들 떠는 것이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감격에 겨운 떨림이었다. "이겼다!!" "성공이다! 성공했어!!!" "와하하하하하!!!!!" -삐요오오오~~~ -펑 하늘을 수놓는 불꽃은 온통 푸른 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이 명멸하며 생겨났다 사라지고 다시 생겨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승리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다. 나는 멍하니 그 아름다운 불꽃에 시선을 주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말로 아무것도 머리 속에 담고 싶지 않았다. 라노가 이끄는 도둑길드는 용병길드를 겸하고 있었다. 두 길드가 어떻게 하나로 존재 할 수 있었는지 라노가 해준 설명을 나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용병길드는 카이라는 녀석이 대표였고 그 뒤에서 도둑길드를 운영하는 것이 라노. 하지만 그 최종 권한은 라노한테 있다는 구조였다. 그 카이라는 녀석의 풀 네임이란 것이 '뮤디오 카이 에드바라하' 라는 혀 꼬이는 이름으로 십여 년 전에 망한 에드바라하 가문의 적자라나... 원래부터 에드바라하 가문은 상당히 커서 왕실 세력과 자주 비유되곤 했댄다. 그 탓에 화를 입어 직접 왕의 군대에 짓밟힌 에드바라하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여튼 놈은 십여 년 동안 와신상담하며 용병소굴에서 칼을 갈았다는 얘기다. 어찌어찌 하여 뜻이 맞은 라노와 의기투합한 것이 삼 년 전. 당시 길드의 장이 된지 얼마 안된 라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병길드의 대표자리에 카이를 앉혔다고 한다. 그 후 에드바라하 가문의 후원자와 잔존 세력을 찾아 그럭저럭 군대 비스므리한 것을 갖추고 정보를 모았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 불과 반년 전. ......에라, 아예 소설을 써라. 이 시점에서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카이와 라노가 어떻게 만났나, 에드바라하 가문의 잔존세력은 어떤 자들인가, 앞으로 이 귀보르냑 영지를 어떻게 하는가....따위가 아니었다. 라노는 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삼년 전에 이미 도둑 길드의 두령이었다고? 것도 용병길드의 숨은 권력자로써? 지난 번에 분명 나랑 동갑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 말 진짜? "길드에 들어온 건 5년 전이고 길드를 맡게 된건 3년전. 카이랑 만나기 몇 달 전이었지. 와아~ 당시엔 정말 힘들었다구. 다들 꼬마라고 무시하는데...그땐 파웰녀석까지 나한테 도전장을 낼 정도였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열서너 살짜리가 칼을 들고 휘둘렀다는 것은 내 상식에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쟁쟁한 3~40대의 우람한 어른들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조직의 우두머리를 고작 중학생 정도의 소년이 맡았다는 것은 소설이나 허무맹랑한 위인전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입을 쩌억 벌리며 놀라는 나에게 라노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7살 때 에드바라하 가문 정벌에 참전했고 14살 때 태자인 형을 죽이고 왕이 됐으며 16살 때부터 미친 듯이 전쟁만 하는 우리의 임금님도 있는 걸 뭐." ...이 세계는 정상이 아니야. 5세에 천자문을 떼고 7세에 사서삼경을 떼는 어쩌구...하던 위인전의 상투적 문구를 보고 '에에...거짓말...'하고 믿지 못하던 나였다. 아무리 세계가 다르다고 해도 어린애는 어린애일 뿐이라는 내 고정관념은 라노의 몇 마디로 쉽게 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귀보르냑가문 멸망의 날.....이라고 라노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아무튼 그날 덩치큰 사내들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들까지 라노에게 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라노의 말을 반도 믿지 않았을 거다. 턱이 빠진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보고 라노가 쿡쿡 웃었다. 녀석의 상반신에 칭칭 매어진 붕대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태연하기만 하다. "두목! 회의가 있어. 건넛방으로 와!" 밖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라노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난 환자란 말이야" 라고 중얼거리더니 주섬주섬 상의를 챙겨 입는다. 하품을 하고 방을 나서는 폼이 아무래도 믿음직한 도둑들의 수령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는 일명 도둑의 소굴이라는 곳이다. 장터에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허름한 건물 중 하나로 1층은 상점이었고 2층은 상점의 주인가족이 살고 3층만을 쓰는 거였다. 창문바깥에는 한낮의 햇살이 찌인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시장 터는 여전히 북적북적했다. 며칠 전에 그런 큰 사건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변한 게 없고 다만 거리 곳곳에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유난히 많았다. 병사들의 가슴에는 에드바라하가의 문장이라는 황금 독수리 그림이 찍혀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꿈 같았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하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아직도 붕대가 감긴 손목과 발목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부러졌다고 생각한 뼈는 금 간 것에 불과하다고 라노가 안심시켰지만 아무리 그래도 회복속도가 놀랍도록 빨랐다. 앞으로 일주일 뒤면 완치가 되어 검술도 배울 수 있을 정도라니 라노가 지어 준 약은 민간요법의 수준을 넘어 선 것 같다. 하지만 다 나으면 무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라노는 고맙게도 나를 길드에 넣어 준다고 하지만 내가 할 줄 아는 일도 없다. 청소나 하고 잔심부름이라도 하다 보면 뭔가 배우게 될까? 도둑질은 성격에 안 맞고 일단 양심에도 꺼려진다. 라노 말로는 평민집은 안 턴다면서 제법 의적흉내를 내지만 경비가 삼엄한 귀족들의 저택을 턴다는 건 내게 더더욱 무리다. 바깥은 저리도 평화로운데 이 음침한 건물의 3층에선 앞으로의 마을의 운명을 논하는 중요한 회의가 있고 그 반대편의 조그마한 방에선 무능력한 소년이 앞날의 생활을 한탄하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 안들지만. 집에 돌아갈 방법과는 더욱더 멀어졌지만. 그래도 지금 나를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은... 살았다. 아...그래...난 살아있어. 그 와중에서도 살았다구. 정말 수도 없이 죽을 뻔했지. 이건 쉬운 일이 아니야. 암, 그렇고 말구.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감사하게 여기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온기 없는 커다란 2층짜리 주택의 내방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컷터칼을 드르륵거리면서 손목을 바라보던 하루하루였다. 굶어 죽을 일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일도 없던 그때에 내가 왜 자살 같은 걸 생각했었을까. 하긴... 커다랗고 음습한 집과 감옥 같은 학교를 오가는 게 전부였던 나는 이미 살아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죽음을 그리워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때의 난 이미 죽어 있는 거나 다름 없었으니까.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지금이 훨씬 사람답다. 훨씬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 자신이 눈물 나도록 대견했다. 무슨 꼴을 당했든, 어쨌든 살았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거다. 중요한 건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 세계의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라노의 친구들은 어이없어 하며 나를 바보 취급했다. 어떻게 왕의 이름도 모르냐고 핀잔을 주더니 나라이름도 모르고 심지어는 장작 패는 일마저 해본 적이 없다고 하자 나를 멍청이 취급하며 놀리던 녀석들은 딱딱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결론은 내가 산속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심각한 기억장애를 입은 것으로 났다. 버스사고 이야기를 했다간 아예 환자 취급 당할 거 같아 그런 부분에 대해선 꾹 입다물고 있었다. 가뜩이나 폐를 끼치는 마당이니 입 조심을 해야 했다. 그 오두막집에서 나는 라노의 사회생활을 생각하며 얼마나 걱정되고 안쓰러운 눈으로 라노를 바라봤던가. 나를 바라보는 라노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내가 라노를 걱정하던 때가 떠올라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쟤네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뻔히 보이니 말이다. 결국 사회부적응자는 나였고 어쩌다가 이지경이 됐는지 내 신세에 한탄할 여유도 없이 바쁜 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몸을 추스른 다음엔 간단한 국내외 사정부터 시작해서 글쓰기, 장작패기, 마을의 지리 익히기, 심부름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를 배우는 걸로 시작했다. 라노와 그의 친구들은 일거리가 잔뜩 쌓인 탓에 나를 돌보아 주는 것은 상점식구들이었다. 상점식구들은 조부와 젊은 부부, 13살의 사내아이와 10살의 여자아이로 이뤄진 5인 가족이었는데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것은 주로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성이 앞에 붙는 자들은 귀족이나 왕족인데 그들은 성 다음에 자기 이름, 그 다음에 가문의 이름이 오지. 응? 가문의 이름하고 성하고 다르냐고? 그럼 전혀 다르단다. 만일 어느 귀족가문의 아가씨가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갈 경우 그 아가씨의 이름에서 가문은 남편의 것을 따르지만 성은 친정의 것을 유지하게 되는데 이처럼 성은 가문보다는 좀 더 범위가 넓지. 보통 성은 아버지의 것을 따르지만 왕족은 예외야. 왕족의 아가씨들은 아무리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도 자식의 성만은 자신의 것을 잇게 되어 있거든. 예를 들자면 저 유명한 귀보르냑가의 망나니 소르 아디움 귀보르냑이 있지. 어머니가 왕녀이니까 그 외동아들인 놈은 아버지의 성씨 '구드'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된 거란다. 에잉~ 그 망나니녀석은 어린 시절을 왕궁에서 자라는 바람에 영 버릇이 없단 말이야. 성이 공격 당했는데 그 자식은 도망갔다면서? 귀보르냑공도 손주 농사를 잘못 지었어. 츳츳. 그러게 가문의 유일한 왕손이라고 오냐오냐 받아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으윽...또 삼천포다. 할아버지는 잘나가다가 꼭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빠져나가곤 했다. 덕분에 아디움이 어린 시절 마차 사고로 두 부모를 잃었다는 둥 귀보르냑성이 함락당하기 전 이미 많은 수의 첩자들을 심어놔서 승리하는 데 쉬웠다는 둥 에드바라하 가문의 카이는 다른 귀족과는 다르다는 둥 시답잖은 얘기들을 줄줄이 이어나갔다. 게다가 저런 귀족이니 왕족이니 하는 상식들은 살아가면서 하등 도움되지도 않을 건데 뭐하러 가르쳐주냐고 항의하면 내가 길드원이 되기 위해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호통치시는 것이다. 그렇다. 얼핏 철물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점의 가족들도 전부 도둑길드의 멤버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작업에 착수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정보가 오고 가는 곳이라며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던 것이다. 정보로 먹고 사는 것치고 할아버지의 입이 너무 싼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그냥 머릿속에 접어두고 묵묵히 지루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소르'성의 황족들은 조부 때부터 성격 파탄자들만 왕위를 잇는 것 같구나. 14대 왕 게비도는 왕권 계승과 관련해서 자기 혈육들을 모두 죽여버렸어. 덕분에 게비도 왕의 삼촌 안에 드는 혈육은 열명도 채 안되게 되었지. 자식도 단 셋. 후궁도 거의 두지 않았고 군대를 보강하고 귀족들의 권리를 줄여 자신의 힘을 늘리는 데에 거의 일생을 쏟아 부은 왕이었단다. 반면 15대 왕 레이헨은 혈족들을 끔찍이 아끼기로 유명했지. 왕족들이 귀족들에게 멋대로 오만을 부리게 된 것도 15대 왕 때부터야. 에드바라하 가문이 망하게 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시발점이 된 것은 에드바라하 영지에서 왕의 당숙이 시신으로 발견된 것 때문이었지. 에드바라하가문 멸망 후 귀족들의 사기는 완전 꺾여버렸단다. 그런데 삼 년 전에 등극한 16대왕 유디스는 더욱 가관이야. 아직 어린 주제에 힘만 앞세워서 이 나라 저 나라 전쟁하러 다니느라 왕좌를 넉 달째 비워 놨다가 얼마 전에 겨우 돌아왔다는구나." 조...졸려.... 세계사 수업도 이보다는 덜 지루하겠다. 안간힘을 써서 감기려는 눈꺼풀을 막아보려 했지만 어느새 졸고 말았는지 피오르 할아버지의 주먹이 이마에 박혔다. 눈에서 불이 번쩍한다. 허리고 굽고 주름도 굉장히 많아서 꼬부랑 할아버지라는 표현이 딱 맞는 그 생김새에 어디서 저런 매운 주먹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근엄하게 말하는 모습은 매우 진지했지만 나는 졸려 죽을 맛이었다. "어깨에 힘 빼! 위에서 봤을 때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검을 쥐고... 에잇! 손목을 너무 꺾었잖아! 검을 뻗을 땐 오른손보다는 왼손에 힘을 실어! 허리를 펴고! 손발이 안 맞아! 다시!" "상대가 주먹을 뻗어 돌진하면 자세를 숙이고 상대의 품으로 파고 드는 거에요. 파고 들면서 한 손으로 상대가 뻗은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붙잡은 팔의 어깨를 휘감는 거죠. 그리고 놈의 품 안에서 숙였던 몸을 일으키면 아무리 힘이 약해도 적은 자기 힘에 못 이겨 나가 떨어질 거에요." 오후가 되어 배우는 검술과 호신술에 나는 매일 저녁 파김치 상태였다. 검술선생은 말은 험악했지만 친절하게 자세 교정을 해줬고 우락부락한 생김새와는 달리 매우 끈기 있는 수업방식을 진행했다. 벌써 일주일째 같은 동작만 시키고 있을 정도로. 반면 호신술 선생은 생긴 것도 인상도 말하는 것도 상냥했지만 의외로 과격해서 선생의 꺾기에 한번 당하면 제대로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호신술은 무조건 실전이라며 그날 배운 기술은 그날 끝장을 보려 했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요즘이 이 세계에 와서 가장 맘이 편한 시기였다. 라노의 산장에서 이제나저제나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하며 초조해 하던 때보다 지금처럼 땀을 흘리고 뭔가 배우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훈련이 끝난 후 마당에서 시원하게 등목을 하면 그렇게 마음이 상쾌해질 수 없는 것이다. 저녁에 호신술 선생이 마사지라도 해주면 몸은 아프지만 마사지 끝나고 난 후 몸이 나른해지는 탈력감은 가히 극락이라 할 수 있겠다. 철물점을 운영하는 주인 식구들과 같이 저녁밥을 먹는 것도 작은 즐거움의 하나였다. 우리가족은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나로서는 5식구가 떠들썩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13살짜리와 10살짜리 남매는 밥을 먹으면서 쉬지 않고 입을 조잘거렸고 식사 중에 박장대소를 하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우리 집이었다면 식사 중에 떠든다고 혼났을 텐데. 라노한테 듣기로는 이들은 진짜 가족이 아니랬다.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와 뚱뚱한 아줌마는 둘 다 길드원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은퇴한 왕년의 도둑이었다. 아이들은 고아였고 몇 년 전 길거리에서 굶어 죽을 뻔한 아이들을 주워다 기른 것이었다. 서로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도 이렇게나 다정한데......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목이 약간 메인다. 그 집에서 내가 바랬던 것은 별것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약간의 관심, 그리고 격려. 다정한 한마디. "식사가 입에 안 맞아요? 이런 스튜를 너무 짜게 했나..." 라이사 아줌마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너무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우울한 기분을 애써 감췄다. 그래... 내가 바랬던 것은 그저 단란한 저녁식탁. ...그것뿐이었는데...... 내가 안정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라노 쪽은 더욱 더 사정이 나빠진 것 같았다. 처음 며칠간은 승리에 도취되어 바쁜 와중에도 밝은 분위기였지만 갈수록 회의하는 방 쪽에선 큰 목소리로 다투는 경우가 잦아졌고 급기야 방문을 박차고 몇 명인가가 화내며 나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회의는 밤에 열리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나는 건너편 방에서 곤죽이 되어 잠을 자고 있는데 가끔 싸우는 소리에 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얼추 들리는 소리로 감을 잡아 봤을 때 카이한테 붙었던 옛 에드바라하 가문의 귀족들이 이제 와서 라노들과의 일을 입 싹 닦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귀족체면에 어찌 도둑과..."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게다가 카이 쪽, 그러니까 에드바라하 가문에서 제시한 보상금 액수와 라노들이 제시한 액수도 맞지 않는 것 같고 귀보르냑가의 보복이 두려운 마을 사람들의 비협조성도 문제인 것 같다. 그 밖에도 귀보르냑가의 포로문제, 도망친 귀보르냑 가주에 대한 문제, 병사들을 유지하느라 드는 돈 문제, 주변 영지를 지배하는 귀족들과의 관계 문제, 행정적으로나 법적으로 에드바라하의 체제를 적용하기 위해 드는 돈, 시간, 힘...... ......우와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만... 무엇보다 라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왕의 보복전쟁이었다. 왕의 깃발아래 망했던 에드바라하 가문이 다시 일어섰다는 소문이 왕의 귀에 들어 간다면 그 호전적인 왕이 가만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일단 귀보르냑가의 막내 손주 소르 아디움 귀보르냑이 도망친 상태이고 녀석은 분명 왕궁을 향하고 있을 터. 언제 왕의 군대가 쳐들어 올지, 쳐들어 온다면 막아낼 수 있을지, 주변 귀족의 반응은 어떠한지...라노들, 아니 에드바라하 가문에선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는 것이다. 전쟁이라. 마을 사람들이 이 쿠데타에 소극적인 것도 이해는 갔다. 다들 에드바라하 가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말은 못했지만 여차하면 마을이 전쟁터가 될 상황이라 은근히 불만스러운 분위기였다. 에드바라하 쪽에선 귀보르냑 보다 낮은 세금과 더 나은 복지혜택, 강제적인 법규의 수정을 약속하며 민심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일부에선 이미 집을 떠난 자들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 마을의 외견은 평화로웠으며 평소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지만 일주일에 한 두집씩 야반도주하는 식구가 생기는 걸 보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내가 이 사실들을 다 추리해낸 건 아니다. 가끔 라노가 내 방에 들어와 신세한탄을 하고 가기 때문에 아는 것이지 내가 무슨 수로 그러한 속사정을 알겠는가. 그런 이유로...... 라노는 지금도 내 앞에서 베개를 팡팡 두들기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멍청한 귀족들이 뭐라는 줄 알아? 글쎄, 왕에게 귀금속 상자와 곡물 수십 수레, 말 백여 필과 소 이백 마리, 비단 수백 필, 기타 등등을 바치고 신하로서의 충성을 약속하자는 거야. 에드바라하 가문을 독자적인 귀족가문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왕가의 권속으로써 들어가게 해달라는 얘기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이 영지도 왕에게 반납하게 되고 귀족 중에서도 최하위의 위치에 머물게 되며 가문의 장자를 제외한 모든 아들들은 왕실 기사단에 강제입대야!! 그 얼빠진 놈들, 그럴 바엔 뭣 하러 이 고생을 해?!! 그딴 조건으로 바닥을 길 거였으면 십 년 전에 했으면 되잖아!! 십 년 전에 레이헨 왕이 요구했던 조건을 이제와 지켜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으악!!! 소대가리 같은 귀족새끼들!! 아냐 아냐,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그래, 지들이 뭘 하건 말건 상관없은 데 지들이 왕에게 바칠 공물을 왜 우리들에게 주기로 한 보상금에서 빼냐고!!!!!" 나는 멍하니 라노의 화통 삶은 것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오세준...아니, 아디움녀석을 그냥 보내준 거야?" 내심 아디움자식을 왜 그때 아작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조금 아쉬움을 담아 라노에게 물었다. 그러자 라노의 이마에 터질듯한 힘줄이 돋더니 아주 분한 목소리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래....저택을 침입하면 제일 먼저 그 새끼부터 없애려고 했는데...빌어먹을 에드바라하의 늙은 귀족 놈들, 절대 죽이면 안된다고 펄펄 뛰잖아. 카이도 얼마나 놈을 족치고 싶어 했는데. 에드바라하 놈들은 처음부터 왕에게 저자세로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아디움 새끼만은 죽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거야. 왕의 소꿉친구를 건드리면 공물이고 뭐고 없으니까. 전에 에드바라하가 망한 것도 영지 내에서 왕의 친척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레이헨 왕이 그걸 꼬투리 잡고 쳐들어 온 거였거든."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귀보르냑가는 아디움의 친가잖아. 공격할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다른 영지를 공격할 것이지 왜 하필 왕족이 있는 귀보르냑가를 공격했어? 이렇게 골치 아파 할거면서." 라노는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한숨을 쉰다. "그렇지..넌 기억에 장애가 있지. 어차피 이곳 사람도 아니고." 윽...나를 병자 취급하다니. 왠지 화가났지만 어쩔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아니 우리 길드가 원했던것은 귀보르냑가문을 뒤집어 엎는 거였거든. 길드에는 이 곳 영지 사람들이 많고 이 곳 사람치고 귀보르냑가의 횡포에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까. 특히 저 귀보르냑가의 가주 취미가 매우 더러워서 영지의 처녀들을 건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이 있는 여자들까지 자기 첩으로 했지. 그 점은 손주인 아디움이 꼭 물려받았다고 하더군. 아디움자식은 첩은 두지 않았지만 이 여자, 저 남자 건드리고 다녔으니까. 여튼 귀보르냑가는 할아버지대부터 손주까지 삼대가 마을의 원수야. 첩이 많으니 자식들도 많겠지. 아디움의 삼촌만해도 스무 명이 넘고 고모가 열일곱명이야. 그 많은 자식들이 영지내에서 으스댄다고 생각해봐. 정말 지랄같은 일이라구. 그래서 우리 길드의 바램이 에드바라하 가문의 이해관계와 맞물리게 된거야. 우리는 귀보르냑을 없애고 싶어했고 에드바라하 가문은 영지가 필요했고. 물론 카이가 우리 영지까지 흘러들어 온 것은 우연이었지만 말야. 가문의 혈통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레이헨 왕으로서는 나라의 구석탱이에 있는 귀보르냑의 영지따위 처음엔 관심 밖이었어. 하나뿐인 누이가 귀보르냑가의 남자와 눈이 맞기 전까지는. 너도 아디움자식 봐서 알겠지만 귀보르냑가는 성질이 더러워도 인물은 좋거든. 게다가 왕의 누이랑 눈맞은 남자가 의외로 일편단심파여서 둘의 사랑은 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대나 어쨌다나. 레이헨 왕이 길이길이 날뛰긴 했지. 소중한 누나가 귀보르냑이라는, 땅만크고 실속없는 가문의 남자와 결혼 한다니까 말야. 게다가 그 남자는 귀보르냑 가주의 12번째 첩실의 셋째아들이었으니까. 가문의 혈통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난잡하게 새끼치는 것도 싫어했던 레이헨 왕은 누이가 그딴 가문에 시집을 갔으니 오히려 귀보르냑가를 맘에 안들어 했던 것 같애. 귀보르냑가주는 멋도 모르고 왕하고 사돈 맺었으니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지만. 레이헨 왕이 얼마나 귀보르냑가를 맘에 안들어했냐면 누이와 그 남편이 사고로 죽자마자 3살 난 아디움을 곧바로 왕실에 데려 왔다는군. 마침 왕의 둘째 아들하고 나이도 동갑이었으니 아디움은 왕실에서 거의 왕자처럼 자라며 왕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지금의 왕 유디스와 함께 형제처럼 자랐지. 놈이 귀보르냑 영지에 온 것은 불과 일년도 안된 일이야. 그 사이 정말 더러운짓도 많이 하고 몹쓸 짓도 많이 한 것을 보면 왕실에서 자랐긴 해도 놈은 할아버지의 피를 고대로 물려받은 모양이야. 그런데 귀보르냑 가주에게 있어서의 불행은....어? 어어어? 어이, 이봐... ...이봐, 윤승호!!" 핫. 퍼뜩 깼다. 분명히 이야기는 제대로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잔 거지? 쓰읍...침을 닦고 라노를 바라보니 표정이 그다지 좋지않다. "하...하하하핫...미안미안, 좀 피곤해서..." 라노...부탁인데 제발 간단히 말해주라. 네가 말이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네 동료들에게 지시 내릴 때처럼 나한테도 짧고 간결하게 말해 주라 응? 나는 거의 죽어가는 표정으로 헤헤 웃었다. "으음...뭐 좋아. 결국 요점만 말하자면 아디움은 귀보르냑가에 별로 애착이 없다는 거야. 어차피 귀보르냑가와는 성씨도 다르고 자라기를 왕궁에서 자랐으니 말야. 게다가 아마도 전대 왕 레이헨의 영향으로 자기 할아버지를 별로 맘에 안 들어 하는 것 같기도 해. 그게 귀보르냑 가주 최대의 불행이지." "음 그래서 너희는 왕에게만 잘 보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단 말야?" 아, 말을 하니까 좀 잠이 깬다. "너희라고 하지 말아줘. 그건 에드바라하 가문의 돌대가리 귀족들의 생각이지." "암튼 그렇다 치고, 그래도 왕이나 아디움 입장에선 기분 나쁘지 않을까? 자기들 체면문제도 있고." 아아...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곳 생활 삼십일이면 이런 질문도 가능한 거구나. 참, 아직 한 달은 안됐나? "우리, 아니 에드바라하 가문에서 걱정하는 것도 그거야.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거지." "그럴 바엔 뭣 하러 여기 영지를 뺏은 거야? 차라리 처음부터 뇌물 싸 들고 가서 왕한테 바치고 부하로 삼아달라, 뭐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냐?" 라노의 표정이 정말 심각하게 변했다. "난 네가 이 근처 사람이 아닌 줄로만 알았는데....너 진짜 다른 나라 사람 아냐?" 나의 무지함에 질렸다는 듯 아니, 아예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라노가 바라본다. "...기억장애가 큰가 보다. 혹시 다른 일에는 지장 없어?" 제길,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좀 억울하긴 했지만 참았다. 지난 번 산장에서 라노와 둘이 있었을 때 내가 라노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걱정하던 기분을 떠올리니 라노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내가 라노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꼬.', '정말 큰일이야.' 하고 걱정했던 그대로를 라노도 생각한다는 거잖아! 라노...네가 생각하는 게 너무 훤히 보여서 민망할 지경이야. 우물쭈물 대는 나를 보며 라노는 한숨을 푸욱 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나라의 귀족은 두 부류야. 왕에게 인정을 받아 땅을 하사 받고 귀족이 되는 부류, 영지를 차지한 후 왕에게 허락 받고 귀족이 되어 그 권한을 행사하는 부류. 타국의 영주라 해도 우리나라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걸 왕이 인정한다면 우리나라의 귀족이 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알다시피...아니, 모른다고 했지. 암튼 귀족의 기준은 땅이야. 땅이 없으면 아무리 아버지가 귀족이었다고 해도 그 자는 더 이상 귀족이 아니지. 실제로 백여 년 전만 해도 귀족끼리의 땅 싸움이 장난 아니었어. 그 땅 싸움에서 유난히 많이 이겼던 것이 에드바라하 가문이었고. 땅을 뺏겨 더 이상 귀족이 아니게 된 가문은 외국으로 가거나 평민 틈에 섞여 살아갔지. 하지만 재기를 꿈꾸고 부활한 자들도 적지 않아. 그런데 이 제도를 싹 바꾼 게 14대 왕인 게비도야. 게비도는 귀족의 땅 싸움을 금지하고 망했던 귀족 중 몇몇 가문을 골라 새로운 지위를 주었어. 그게, 귀족은 귀족인데 왕가의 권속에 해당하는 귀족이야. 그들은 본인들 소유의 땅은 없지만 대신 왕가의 땅을 관리하고 다른 귀족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지. 좋은 말로 '왕가의 권속'이지만 귀족들끼린 왕실의 끄나풀이라고 부르더군. 그렇게 왕족도 아니고 귀족으로써 자신의 영지를 가지지도 못하는 왕가의 권속은 하급으로 취급당하곤 해." 라노....제발 간략히...간략히... 졸려 죽어가는 나를 보고 라노는 진지하게 말했다. "잘 들어. 이건 아주 기본적인 역사적 상식이야. 물론 네가 일반적인 평민으로써 살아간다면 이딴 지식 필요도 없지. 하지만 넌 앞으로 우리의 길드원이 될 것이고 나는 네가 우리들의 든든한 동료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제야 눈앞이 확-하고 밝아지는 게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잠이 달아났다. 나는 한번도 길드원이 되겠다고 한 적은 없지만 라노에게 되기 싫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직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당장 길드원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미적거리는 사이 라노는 벌써 앞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미루고 있던 나의 앞날과 나의 거처를, 라노는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민태에게서 볼 수 없는 추진력이다. 조금은 자기혐오를 느끼며 라노의 말을 경청했다. "레이헨 왕에 이르러서 왕의 손에 망한 가문은 에드바라하 단 한 곳이야. 전대 왕이었던 게비도가 워낙에 청소를 해 놓아서 뭐 손댈 데가 있어야지. 대신 레이헨 왕은 게비도가 이룩한 강대하지만 위태위태한 왕권을 확고히 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데 주력을 기울였지. 에드바라하는 그 희생양이었을 거야. 레이헨은 에드바라하를 공격하기 전 자진해서 왕가의 권속이 될 것을 요구했어. 물론 당시의 에드바라하의 가주는 거절했고 왕의 군대와 싸웠으나 결국 패했지. 이제 와서 에드바라하 가문이 왕가의 권속이 된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야. 그런데도 저 늙은 귀족들이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은 이제 그것 밖에 가문을 이을 방법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지. 그건 전대 왕 레이헨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말?" "그래, 레이헨이 헛소리를 했거든. [가문을 이어나가고 싶으면 다른 귀족들의 땅이라도 뺏어서 바쳐라] 라고.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에드바라하의 가주를 사형시키면서 던진 말이었고 다분히 비웃음 담긴 그 말에 귀족들 사기가 잔뜩 꺾인 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때 레이헨이 했던 말은 아예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문서에 남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땅가져 오면 봐 주지' 라는 거군. 땅 싸움은 금지했으면서 에드바라하 가문만은 예외라는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왕한테 바칠 생각으로 그 난리를 피웠단 말야? 게다가 레이헨 왕은 예전에 죽었다며." 졸음이 싹 가시니 어느 정도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라노의 얘기는 상당히 맥 빠지는 얘기였기 때문에 잠도 안 왔다. "문제는... 저 늙은 영감탱이들이 그 한마디를 구원줄로 여겨 부여잡으려고 하는 거야. 왕은 죽었지만 문서가 남았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지" 라노 역시 맥 빠진 얼굴이다. 아까 귀족들을 욕하면서 펄펄 뛰던 기세는 어느 정도 수그러들고 있었다. "최소한 카이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었어." 라노는 아까만해도 주먹질을 해대서 베갯속이 다 삐져나온 베개를 끌어 안고 침울하게 말했다. 카이라는 사람이라면 분명 현재 에드바라하 가문의 가주 이름이다. 예전부터 라노와 뜻이 맞아 용병길드를 운영하고 있다는, 피오르 할아버지 말로는 다른 귀족하고는 좀 틀리다는 녀석. 얘기를 들어보면 나이는 대략 라노랑 비슷하거나 연상일거 같은데 귀족치고 상당히 평민스러운 귀족 같았다. 문제는 이번 귀보르냑성을 함락하는데 있어서 끌어들인 옛 에드바라하 가문의 귀족들이 그들 특유의 보수성으로 라노와 카이의 발목을 잡는 듯했다. 아무리 카이가 가주라 해도 그들은 가문의 어르신이니 아무래도 대하기 껄끄러운 상대라는 시츄에이션이겠지. 혹시 그 녀석도 내가 아는 녀석이랑 같은 얼굴일까? 이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나도 여기 생활에 많이 익숙해 졌나 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베개 끌어 안고 팡팡 치던 라노도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라노?" 내가 의아한 듯 묻자 라노는 가만히 베개를 안은 손에 힘을 풀었다. "만일 왕하고 붙는다면 승산이 있을까?" 라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신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이 곳의 땅은 넓지만 험악한 지형이지. 지형을 이용해서 게릴라 전을 편다면 왕의 군대가 성에 당도할 때까지 시간은 어느 정도 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 후엔? 우리를 원조해줄 귀족도 뚜렷이 없어.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면 미안해서 그 죄값은 어떻게 갚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라노의 의기소침한 모습은 이곳에 와서 처음 본다. 겉으로 표는 안 냈지만 나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 라노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한다. "뭐, 어차피 우린 처음에 약속한 금액만 에드바라하 가문에서 받으면 돼. 암 그렇고 말고, 뒷일은 에드바라하 가문의 문제라고. 놈들이 왕 밑으로 들어가든 말든 우린 돈만 받으면 되니까. 카이녀석이 왕 밑으로 들어가는 건 달갑지 않지만 죽는 건 더 싫어. 그보다 저 망할 놈의 노친네들이 우리한테 줄 보상금에 손이나 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야." 나는 의문 가득한 눈으로 라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노는 활짝 웃으며 한다는 소리가... "으아~~~ 몰라몰라몰라!!!! 에드바라하 가문의 일은 녀석들이 알아서 하라 그래! 우린 이번 일로 동료들을 많이 잃었다고. 난 그 일 수습하는 데만 해도 정신 없어~~" 그렇게 말하고 자기 침대에 벌렁 누운 라노는 "꺄하~~ 정말 모르겠다아~~" 하고 여자 애처럼 깔깔거리더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음...많이 힘든 가 보다. 나도 피곤한 몸을 뉘이며 이불을 덮었다. 순식간에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리고 몇 주가 흘렀다. [왕의 군대가 쳐들어 온다] 소문은 어느새 영지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거처를 옮겼고 라노는 길드를 제정비하여 도둑길드를 용병길드로 통합시켜버렸다. 하는 일은 어차피 같지만 에드바라하 가문의 귀족들이 이제 와서 도둑길드와 손을 잡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랬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귀보르냑성, 아니 이제는 에드바라하 성이 됐지. 암튼 그 성 근처의 작은 집에서 철물점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3층짜리 철물점 건물은 용병길드가 이사해 와서 정식 길드 건물로 변했고 가짜 철물점 주인이었던 아저씨는 졸지에 길드 행정원으로 업종을 변경하여 지금 나와 살고 있는 집에서 매일 아침 출퇴근을 하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용병길드라는 건 도둑길드와는 달리 드러내 놓고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용병이란 건 돈 주고 사는 군인 이랬는데 워낙에 사람들이 험악하게 생겨서 군인이라기 보다 부랑아나 폭력배들로 보였다. 그건 그렇고 덕분에 나의 하루 일과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오전 중에는 에드바라하성을 들락 거리며 이것 저것 잡다한 심부름을 하고 오후에는 여전히 글 연습과 검술, 호신술을 연습한다. 말이 통하는 것에 비해 글자가 달라서 자음과 모음부터 배워야 했던 나는 학교에서 지겹게 공부한 영어며 한문이 다 소용없다는 걸 알고 괜히 억울해졌다. 라노들은 용병길드의 건물...그러니까 예전 철물점 건물...과 에드바라하 성, 그리고 마을회관을 오가며 이런저런 녀석들과 회의다 협상이다 대책이다 따위를 세우고 있었다. 덕분에 라노와는 같은 방을 쓰지만 하루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경우는 요 며칠 없었다. 그리고 유언비어까지 도는 마당에 라노는 물론이고 검술과 호신술 선생조차도 시간이 없어서 혼자 연습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형, 정말로 전쟁이 나는 거야?" 13살짜리 제루가 쪼그리고 앉아 내가 검을 내리치는 것을 구경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제루 옆에는 10살짜리 여자애 로비에느가 바닥의 돌멩이로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둘 다 심심한지 아까부터 내 옆에 있다. "누가 그런 소릴 해?" 나는 연습하던 손을 멈추고 제루를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다 그러던걸. 에드바라하랑 용병길드랑 손을 잡고 왕이랑 싸운다고." 최소한 내가 알기로 라노들의 계획에 왕과의 전투는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에드바라하 가문은 이미 왕에게 왕가의 권속이 되겠다는 충성의 문서와 예정에는 못 미치지만 그럭저럭 긁어 모은 뇌물들을 몇 백 수레 가득 실어 왕성으로 보냈으니까. "헛소문이야. 내가 성에서 심부름 하는 거 알지? 전쟁이 일어난단 소리는 없으니까 걱정 마." 나는 제루를 안심시키면서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적어도 반년간은 목검으로 연습해야 된다고 검술선생은 험상궂은 얼굴에 인상을 쓰며 부득부득 반대를 했지만 당장 진검의 무게에 익숙해지는 게 급하다며 라노가 어디서 칼 한 자루를 가져다 주었다. 덕분에 검술선생의 가르침은 더 끈질기고 더 지루하고 더 독해졌지만 진짜 검을 쥐게 된 긴장감 탓인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이래 봬도 나는 성실한 인간이다. 비록 하루 천 번이라는 무시무시한 연습량을 다 채우지는 못하지만 매일 아침저녁으로 검을 드는 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석양에 반사되는 검날은 눈부셨다.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는 제루의 표정은 내 대답이 뭔가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고 동생과 같이 공기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꼬마들의 자그마한 뒤통수가 귀엽다. 몸은 피곤하고 땀이 계속 흐르지만 곧 우물가로 가서 시원하게 씻어 내릴 거니까 괜찮다. 그렇게 해가 지면서 나의 하루 일과도 끝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동화 같았다. 현대에서 한번도 해보지 못한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신기한 체험이었고 판타지였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성을 들락날락하는 것 자체가 신기했으므로 성에서 감자 깎기를 하든 청소를 하든 심부름을 하든, 일 자체가 즐거웠다. 그리고 난 아직 길드원은 아니지만 내가 라노의 친구라는 걸 대부분 알고 있어서 다들 잘 대해준다. 성의 부엌을 들락거리면 가끔 갓 구운 쿠키를 얻어 먹을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말도 타볼 수 있었다. 지금 에드바라하 성은 일손이 모자란 상태였다. 일단 에드바라하 가문에서 데려온 종자들과 마을에서 픽업한 몇몇 사람들로 성의 살림을 꾸려 가고 있긴 한데 워낙 사람수가 모자라다 보니 쥐뿔도 모르는 내가 다 보탬이 될 지경이다. 덕분에 매일 바쁘게 흘러가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땀 흘리고 얻는 대가의 소중함을 사무치도록 느끼는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밤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은 많고 달은 가까웠다. 요란한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은하수를 바라보다 보면 시간여행이라던가 차원여행을 하고 있는 여행자가 된 착각마저 들었다. 솔직히 하나하나 따지자면 현대보다 훨씬 불편한 생활임에 틀림없다. 화장실도 불편했고 이동수단은 튼튼한 두 다리뿐이었다. 아침마다 힘들게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도 일이었고 따뜻한 물에서 목욕하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난 의외로 전원 주택형인가 보다. 어렸을 때 잠시 시골에서 살았던 경험은 도시의 편리함에 묻혀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늘 이런 풍경을 꿈꿔오기도 했었다. 내게 있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은 저렇게 푸른 들판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몸이 힘든 만큼 정신은 맑아지고 예전에 없던 자신감도 생겼다. 매일매일 교실의 음침한 불빛아래에서 영어단어와 씨름하고 수학문제에 끙끙대는 것보다 말들에게 여물을 주는 일이 더 나았다. 락스 냄새 나는 화장실에서 발에 채이는 일도, 아무도 없는 이층 짜리 양옥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 일도, 복도에서 아이들이 은근슬쩍 손가락질하는 일도...... ......이곳엔 없다. 오히려 나를 필요로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엌의 메를린 아줌마는 내가 감자를 깎는 사이 잠시 허리를 펴고 쉴 수 있었다. 마구간지기 티그씨는 말들이 나를 잘 따라서 내가 옆에 있으면 일하기가 훨씬 편하다고 좋아한다. 길드원들이 회의하는 방에 간식을 갖고 가면 금방이라도 졸 것 같았던 사람들의 눈에 화색이 도는 것이 보인다. 제루도 형이 하나 생겼다며 로비에느를 돌보는 걸 나한테 떠넘기고 자기는 놀러 가기 일쑤였다. 가끔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나에겐 책임감과 보람을 주었다. 마치 이곳이 진짜 내가 있을 곳이라는 느낌. ......진짜 내가 있을 곳?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윤승호!!! 윤승호!!!" 멀리서 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은 나와 마찬가지로 성에서 이것저것 심부름 하는 녀석인데 나보다 두 살 위로 비쩍 마르고 주근깨에 금발인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저렇게 헐레벌떡 뛰어오다니, 성에서 무슨 급한 심부름거리라도 생겼나? "왜 그래? 나 오늘 할 일은 다 끝내고 왔는데?" 해도 지고 달과 별이 총총 떠 있는 밤이었다. 잠시 마당에 나와서 멍하니 하늘을 보던 참이었는데 초롱불을 들고 급하게 뒤어오는 팽의 얼굴엔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성에서 널 데리고 오래." "나?" "응. 이유는 모르겠는데....급하다던 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뭐 빠뜨린 일이라도 있었나... "혹시 라노가 불러?" "라노? 그게 누구야?" 아 참, 팽은 길드원이 아니라 라노를 모른다. 일단 성에서 부른다니 가봐야지. 성안은 조용했고 팽은 뭔가 초조해 보였다. "윤승호...." 녀석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앞에서 안내하던 녀석의 등이 유난히 움츠러든다 싶더니 대뜸 그런 말을 내던졌다. 그렇잖아도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성에서도 꽤나 상층부였다. 성의 위쪽엔 볼일 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건 나로서도 처음이어서 왠지 주눅드는 기분이 들었다. "나, 지나가면서 들었는데...왕의 군대가 크루녹 영지까지 와 있대." 나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성안의 사람들은 쉬쉬 하고 있지만 왕의 군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은 확실한 거 같아. 크루녹이라면 말로 달려서 여기까지 나흘 정도 걸려. 어쩌면 피난을 가야 할지도 몰라." 녀석의 등이 자꾸 움츠러든다. 겁먹은 게 분명한 팽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미안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본다. "저쪽 복도 끝 방이야. 미안, 난 이만 가볼게." 불안함과 미안함을 가득 담은 녀석의 눈과 마주치고 한동안을 가만히 있었다. 알 것 같다. 녀석은 오늘 밤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것이다. 요 며칠간 성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수는 이로써 내가 아는 것만 네 명. "괜찮아. 피곤할 텐데 먼저 가서 쉬어." 녀석도 내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매우 미안해 했지만 우리는 서로가 뻔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마치 아무일 없다는 듯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 그럼 나 먼저 갈게. 내일 봐." "그래 내일 봐." 내일쯤이면 팽은 늙은 할머니와 어린 두 동생, 그리고 몸이 불편한 부모님을 모시고 이 영지를 떠나 있겠지. 갈 데는 있는 걸까. 내가 편안한 하루를 보내는 것과는 반대로 마을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불안해했다. 나는 이렇게 생활이 즐거운데...... 한숨을 쉬고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다가갔다. 성안엔 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높게 뻗은 창에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보름달도 아닌 탓에 횃불조차 켜져 있지 않은 복도는 어두웠다. 성안에서 돈 될 만한 것은 전부 내다 팔았다고 들었다. 크지만 어둡고 삭막한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그건 절대 안됩니다!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녀석이 말하는 걸 믿는 겁니까?" "하지만 라노경. 아디움공이 원하는 건 그 애 하나뿐이라지 않습니까. 그 애만 넘기면 물러나 주겠다는 데 어째서 그렇게 감싸고 도는 건지요."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은 녀석이 '카이만 넘기면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넘길 겁니까?" "말이 지나치시군요. 어찌 카이님과 그런 아이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나한테는 똑같습니다! 당신들이 카이를 넘길 수 없듯이 나는 승호를 놈들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아니, 애당초 놈이 하는 말따위 믿지 않아요!" "그러면 어쩌실 겁니까. 크루녹 영지에 모인 군대들을 게릴라전 만으로 상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진심으로 왕과 싸우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왕이 약속했습니다. 아디움공이 원하는 아이를 준다면 에드바하라를 왕의 권속으로 인정하겠다고. 우리가 쥐어짜낸 공물을 받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왕이 아디움공의 말대로만 하면 우리를 인정해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안된다는 겁니까!! 어차피 알게 된지도 얼마 안된, 신분도 분명치 않은 아이라면서요!!!" 아무래도 내 얘기 같군. 더 이상 듣고 있어봤자 엿듣는 꼴 밖에 안될 거 같아 이미 열어버린 문이지만 가볍게 두드려서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문가의 나를 본 라노의 안색이 변했고 라노 주위에서 설전을 벌이던 할아버지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기로 모아졌다. "승호야!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어? 아니..팽이 데려다 줬는데..." 라노가 부른 거 아니였어? "저 아이군요. 제가 성의 하인에게 시켜서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였다. 다른 할아버지들에 비해 장신구를 덜 착용한, 꽤나 검소해 보이는 차림에 인상도 제일 좋아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누구 맘대로 저 애를 여기에 데려 온 겁니까!!! 승호야, 빨리 나가!!" 화가 난 라노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가라고 등을 떠다밀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반쯤 문밖으로 떠밀려 나가는데 아까 그 할아버지가 천천히 다가 오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라노경. 소개시켜주지 않겠습니까?" 음...상당히 침착해 보이는데...그에 비해 라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어찌어찌 하여 이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았는데 솔직히 좀 얼떨떨하다. 원탁형 탁자를 빙 둘러싸듯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니 거의 대부분이 서 있었지만, 암튼 대부분이 아저씨나 할아버지였고 옷에는 에드바라하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천을 두르고 있었다. 옷차림은 상당히 실용성 없어 보이는 긴 치마자락 같은 걸 끌고 있었는데 반딱반딱한 재질은 조금만 못에 걸려도 북 찢어질 듯 하늘하늘했다. 그런 옷을 몇 겹이나 두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냥 두툼한 옷자락에 금실 은실 수놓은 옷을 입은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라노가 소개하기를 십여 년을 음지에서 은둔하며 가문의 재건을 은밀히 준비해온 에드바라하 가문의 옛 가신들이라 했다. 음지에서 은둔한 거 치고 혈색이 좋아 보였지만 뭐,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지 않은가. 그런 할아버지들과는 대조적으로 껄렁한 무리들이 보였는데 몇 명은 원탁의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하고 창가에 앉아 있기도 하고 벽에 서 기대어 있기도 했다. 중년의 아저씨도 있지만 대부분이 젊은이들로 그 중에는 파웰과 티안이라는 라노의 친구들, 그러니까 김형석, 안진영이랑 똑같은 그 녀석들도 있었다. 젊은이들의 옷차림은 제각각 이었지만 공통점은 매우 실용적이고 수수한 옷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수수한 옷차림 쪽이 길드의 주요멤버였다. "이쪽은 윤승호라고 하고 제 친구입니다. 현재 기억에 장애가 있어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 같은 개인의 일들은 기억하지만 사회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니 상당히 거북하기 그지 없었다. 조금 민망해져서 살짝 웃어 보였는데 역효과.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아저씨도 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방안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내가 아무리 이 세계에서의 일들을 모른다지만 내게 직면한 문제가 뭔지 모를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았다. 왕따 인생 살면서 느는 건 눈치밥이었다구. 그러니까, 아까의 이야기를 듣고 종합해 보건 데...... ......그 빌어먹을 아디움이 날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거지? "라노경.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소." 아까의 그 백발 할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이 할아버지는 그나마 덜 요란한 차림이었는데 나를 아디움에게 넘기자는 건 저기 화려한 할아버지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를 넘기느냐 안 넘기느냐 하는 문제에서 넘기면 안된다고 길이길이 뛰는 쪽은 라노뿐인 듯, 길드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 말없이 조용했다. 라노는 절대 안된다며, 어떻게 친구를 팔 수 있냐고 했고 에드바라하의 할아버지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다. 듣고 보니... 아디움이란 녀석이 나만 넘겨주면 나의 목숨은 물론 보장하고 에드바라하도 왕가의 권속으로 인정, 왕실의 군대는 철수. 뭐 이런 얘기였다. "카이!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너도 이 녀석을 아디움 새끼에게 보내길 바라냐? 뭐? 목숨을 보장해? 그 자식이 하는 말을 믿어?" 핫! 여기에 카이라는 녀석도 있었나? 하긴 에드바라하의 주요 가신들이 모인 이 회의에 녀석이 없을 리 없다. 나는 카이라는 녀석이 어떤 놈인지 매우 궁금했기에 라노의 말에 귀를 쫑긋하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에드바라하의 인간 중에는 카이로 보일만한 인물이 없다. 다 아저씨에 할아버지...... 그런데 목소리는 의외의 곳에서 났다. "글쎄..." 벽에 기대어 있는 머리카락이 긴 길드원이었다. 차림이야 간소했지만 허리춤에 주머니가 몇 개 주렁주렁 달렸고 검도 소지하고 있다. 팔짱을 끼고 있어서 좀 건방져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평민이었다. 에...뭐 눈매가 좀 째진 게 한 성깔 할 거 같이 생기긴 했지만서두... 어라... 저 녀석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 세계에서 우리 반 애들하고 똑같은 사람을 하도 많이 봐서 착각한 건가? "그런 어중간한 대답 말고! 네 생각을 말해봐!" 라노는 화가 나서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카이라고 불리는 그 청년...아니, 아무리 성깔 있어 보여도 저건 내 또래다...그러니 소년. 아무튼 그 소년은 천천히 팔짱을 풀더니 원탁으로 가까이 와서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 진짜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 "나는 우선 이 녀석의 생각을 듣고 싶다." 목소리... 많이 낯이 익은...... "윤승호라고 했지. 네 일은 네가 정해. 목숨이 걸린 만큼 우린 네게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어. 네가 싫다면 가지 않아도 좋아." 이럴 수가...... "카이님!!!" 할아버지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진심이십니까! 왕의 군대가 바로 코 앞이에요! 우린 전멸할 겁니다!!!" "귀보르냑 성을 함락하느라 든 돈, 시간, 군대...우리에겐 아직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충전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자금을 대주었던 부호들도 왕을 적으로 돌린다면 내일이라도 적이 될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하다구요!!!" " 왕의 성격상 마을을 가만 놔둘 거라고 생각합니까?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우리가 십 년 동안 이끌어 온 일도 허사가 된다구요!!!" ......방금 카이가 누구와 닮았는지 떠오름과 동시에 할아버지들이 내뱉는 말 때문에 잠시 정신이 어벙벙해졌다. 에드바하라는 꽤나...아니, 아주 매우 상황이 안 좋았나 보다. 성을 함락하고 마냥 좋아라 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제까지는 내 일이 아니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 아직도 와 닿지 않는다. 그저 내가 실감하는 건 지하실에서 비틀린 내 손과 발의 고통. 마찰음을 내며 어긋나는 뼈와 관절의 기분 나쁜 파열음. 지독히도 똑같이 생긴 오세준의 얼굴. 그래서 절대 아디움에게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들의 절규는 이 문제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 시켜주고 있었다. 전쟁. 마을 사람들이 죽는다? 이제까지 돌봐준 라이사 아줌마, 베너 아저씨, 피오르 할아버지, 아직 어린 제루, 로비에느...... 맘씨 좋은 티그 아저씨도 쿠키를 잘 굽는 메릴린 아줌마도 밤마다 시끄럽게 우는 옆집의 넉 달 된 아기도, 아기 때문에 미안하다며 가끔 빵을 들고 오는 주근깨 색시 키미아도, 과일가게 터그형도, 대장간의 비크테린씨도.... 검술선생 테이그, 호신술선생 루센도... 죽는 걸까? 아니, 적어도 큰 피해를 입겠지. 그래, 라노도. 어쩌면 나도? 나는 불안한 눈을 들어 라노를 바라보았다. 라노는 입을 꾹 다물고 약간 충혈된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인 거다. 저쪽에서 침을 튀기면 말하는 할아버지들의 말은 분하지만 사실인 거다. 아...나는 또 얼마나 어리석었던 걸까. 아직 나는 무엇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의 앞날도, 마을의 위기도, 라노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도. 그저 눈앞에 보이는 내 몸의 편안함에 안도하며 혼자만 행복해하고 혼자만 즐거워했다. "그만둬. 결정은 윤승호가 해." 카이는 반대의견을 토하는 할아버지들의 말을 막고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렇게 보니 내가 왜 녀석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알 거 같다. 새카만 머리는 허리까지 길어가지고 맨날 쓰던 안경도 없지, 옷차림까지 이상하니 못 알아 볼만하지. 얼굴도 수척하니 눈도 퀭하구만. 덕분에 라노나 오세준 패거리들을 단박에 알아본 데에 비해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저 쿨한 성격은 여전하네. 자신의 일은 알아서 해라. 부반장. 여기 너랑 닮은 또 다른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너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멍하니 카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언제나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부반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녀석은 나를 답답해 했다. 왜 스스로 벗어나려 하지 않냐며 한심해 했다. 새삼 예전 생각난다. 빤히 바라보자니 주변의 할아버지들이 헛기침을 한다. 그 중에는 "저 눔이 카이님께 무례하게!" 따위의 의미 모를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카이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봐왔다. 그래, 너는 그렇게 얻어 맞으면서도 당당했지. 나는 그런 너를 흉내 낼 수도 없었어.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언젠가 나에게 스스로 벗어날 실마리를 주겠다며 나서던 부반장. 그때 부반장의 제의를 받아 들였다면 부반장이 진유현을 일렀을 때 좀 더 효과가 있었을까? 내가 지하창고에서 진유현한테 당한 뒤 남아있던 내 피와 정액을 증거로 내밀었으면 부반장과 나는 좀 더 편한 학교생활을 보낼 수 있었을까? 수 많은 생각을 담은 눈으로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부반장, 그러니까 한도훈과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목소리로 명쾌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네가 아디움에게로 갔으면 좋겠다." "카이!! 아디움의 말을 믿는 거냐! 녀석은 승호를 보내도 분명 그대로 공격해 올 거야!!"" 라노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카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잘 생각해봐. 생각 외로 왕은 이 건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서에 왕과 아디움의 인장을 둘 다 찍어서 보내왔으니 실제 이것은 귀보르냑가와 에드바하라가와의 약속이 아니라 왕가와 에드바라하가의 약속인 셈이야. 이것은 현 왕 유디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레이헨에 이은 문제다.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겠지만 지난 몇 주간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다면 상상이 가나? 전대 왕 레이헨이 멸망시켰던 가문 에드바라하가 다시 일어섰다. 이것을 현 왕 유디스가 어떻게 대응할지 각 귀족은 물론 외국에서까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어. 레이헨이 문서로 남겼으니 유디스는 우리 에드바라하를 인정해야 해. 만일 인정하지 않으면 전대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고 이것은 전통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어긋나는 행동이지. 그런데 이미 한 번은 우리의 요청을 거절한 상태다. 우리가 보낸 공물은 다 태워버렸고 딸려 보낸 가신들은 매질을 당하고 겨우 돌아왔지." 섬뜩한 한기가 흘렀다. 다 태웠다고? 그 많은 밀과 보리, 성의 창고에 잔뜩 쌓아두었던 보석과 비단들을 끌고 갔는데 그걸 전부? 몰랐다. 그런 얘기, 라노한테는 듣지 못했어!! "그런데 그 왕이 군대까지 끌고 와서 한 약속이다. 문서 남기는 걸 싫어하기로 유명한 그 왕이 직접 각서까지 쓰고 말이지. 만일 처음부터 공격할 맘이 있다면 굳이 이런 장난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우리에게 도망갈 시간을 주는 것 밖에 안 돼." 모두가 조용했다. 라노는 카이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참는 듯이 보였다. 카이는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손가락을 눈가로 가져 갔다가 눈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다시 팔짱을 낀다. 그런데 그 손짓이 굉장히 익숙하다. 저 손짓은...안경쓰는 사람들 특유의 버릇아닌가? 하지만 안경도 없는데 저런 손짓이라니 내가 잘못 봤나... "왕의 속뜻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어. 아무리 전대 왕이 문서로 남긴 약속이라지만 그건 레이헨이 거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기에 남긴 약속이었지. 하지만 에드바라하는 성공했다. 여기서 순순히 에드바라하를 인정하면 왕권에 흠이 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우리가 보낸 공물을 태우고 군대를 보내는 건 하나의 제스츄어이고, 에드바라하의 핏줄을 인질로 받는다는 것이 진짜배기인 셈이지." 아...짐깐,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뭐가 진짜배기라는 거야? "윤승호라고 했지. 너 왕이 보낸 각서에 뭐라고 써있었는지 아는가?" 카이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멍하니 고개를 젓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카이는 말했다. "무려 에드바라하의 두 번째 적자 '뮤디오 윤승호 에드바라하' 라고 써 있더군. 그러니가 넌 내 동생이 되는 셈이지." 에에에엑??!!!!! "왕으로서는 공물 따위보다 에드바라하의 혈통을 조건으로 받는 것이 더 가치 있고 권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거다. 아무리 왕가의 권속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어쨌든 밖에서 보면 에드바라하 가문의 부활로 보일 터, 이런 식의 쇼를 통해 에드바라하의 확실한 충성의 맹세를 받았다고 주변의 나라나 귀족들에게 과시하려는 거지. 왕의 군대에 겁먹고 에드바라하가 적자를 내주었다...고 생각하도록 말야." 여기까지 카이가 설명을 마치자 주변의 할아버지들이 겨우 호흡을 이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할아버지들도 나처럼 놀라는 걸 보면 카이한테서 이런 설명을 못 들은 것 같다. 이런 일에 무지한 나로선 의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내가 왕한테 가도 일단은 에드바라하가문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거니까 별 문제는 없다는 걸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역시 내 통밥으로는 계산이 안 나온다. "그, 그럼...내가 가도 별로 문제가 없다는 거잖아. 라노가 반대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더듬거리며 카이에게 다시 물었다. 카이는 흘깃 라노를 쳐다보았고 라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렇다는 거다." 카이는 팔짱을 끼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라노에게 듣기로는 네가 아디움과 그닥 좋지 않은 상황에 얽혔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에드바라하가문의 자격으로 간다한들 문서상일뿐이고 네가 평민이란 것은 왕도 아디움도 다 아는 사실이야. 그곳에서 귀족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해." 아...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얘기한 건 가설에 지나지 않아. 지금의 상황을 그럴듯하게 해명하기 위해 이것저것 끼워 맞췄지만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 알다시피 왕은 제정신이 아니지. 어쩌면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 나는 그대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다. 카이는 내게 두 가지 선택의 길을 주고 그 길이 가지는 특성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해줬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서. 하지만 설명을 듣고서도 나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가지 확신이 드는 것이 있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적어도 아디움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다. [나와 함께 가자]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승호야. 쓸데없은 생각은 하지 말아. 가설은 가설일 뿐이야." 어느새 곁에 다가온 라노가 강하게 손을 잡으며 말했다. 카이는 다시 몸을 돌려 아까 기대던 벽에 가서 다시 기대었다. 얼굴이 좀 더 초췌해 보였다. 옆에서 할아버지들이 무언의 압박을 해왔다. 다른 길드원들도 은근히 내가 갔으면 하는 눈치지만 파웰과 티안만은 그동안 정이 붙은 탓인지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이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 라노는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나의 선택에 모두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나의 선택에... 나의...... 찌르르 하고 등골에 한기가 흘렀다. 이제껏 살면서 나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거웠던 적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을, 아니 영지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다니! 이런 거, 이런 거...맙소사, 정말 나한테 모든 게 걸려 있는 거야? 언제나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주위에선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내가 무언가 한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은 없었다. 나는 세상의 제 삼자였다. 하다못해 내 인생에서 조차 나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발로 채이고 멸시 당하고 비웃음 사고 차가운 눈길을 받으며 나는 안으로 안으로 곱아 들어갔다.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고 나중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게 되었다. 아아...그런데...이다지도...... 이것은 시험인가? 아니면 기회인가? 수 천명의 목숨이 나에게 달린 일이라고 착각해도 좋은 거지? 나도 중요한 역할을 맡을 가치가 있는 인간인 거지?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다, 나를 필요로 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거다. 이 일은 나 밖에 할 수 없는 거다! 아아아... 영웅주의에 빠졌다고 해도 좋아. 영지 사람들에 대한 어설픈 동정심이라고 해도 좋아. 자신이 뭔가 특별한 인간인 줄 착각한다고 비웃어도 좋아.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말했다. "가겠습니다."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평원에는 서릿발이 부는듯한 한기가 흘렀다. 저 멀리 빼곡히 들어선 점들은 분명 왕의 군사들. 중간중간 비죽비죽 튀어나온 깃발만이 펄럭이고 있을 뿐 군대는 미동도 안 했다. 나는 숨을 꼴딱 삼키며 긴장으로 떨리는 몸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옆에서 호신술선생 루센이 심호흡을 가르쳐 주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에드바라하가의 늙은이들이 빈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없는 살림 탈탈 털어 준비해낸 각종 보물과 비단들이 가득 담긴 수레에 둘러싸여, 금딱지 은딱지를 잔뜩 붙여 치장한 백마를 타고 때 빼고 광낸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며 앉아 있었다. 말도 주인이 긴장하는 걸 눈치챘는지 연방 투레질을 하며 땅바닥을 발굽으로 긁어댄다. 으으으...말아 그렇게 움직이지 말라고...나 떨어질 것 같단 말야... 내가 왕에게로 가겠다고 말한 이후 당장 거처를 성으로 옮기면서 지난 며칠간 엄청난 특훈을 받아야 했다. 아직 다 못 깨우친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했으며 하등 쓸모없이 번거롭기만한 궁중예법과 왕에게 대하는 예법, 인사말, 충성을 맹세하는 절차, 에드바라하의 대표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 등을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에드바라하의 할아버지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동안 배운 예법들을 싹 까먹은 상태다. 단시간에 하도 많은 걸 머리속에 넣다보니 뒤죽박죽 엉켜서 뭐가뭔지 헷갈려 버린거다. 그나마 말을 타는 법을 배운 게 가장 쓸만한 공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맹렬히 반대하던 라노는 일단 내가 가기로 결정하자 이것저것 신경써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이제와서 안 간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늘 아침만해도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몸을 씻고 처음 입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걸쳐야 했으며 장신구에 향수까지 뿌리느라 정신 없었다. 특히 지금은 여름인데 무슨 옷을 여섯 겹이나 껴입어야 하는지, 지금도 땀이 나서 더워 죽겠다. 제길 이 옷 벗는 법 모르는데 나중에 어떻게 한담. 아무튼 아침부터 난리를 치고 카이와 할아버지들이 며칠 동안 작성한 문서를 들고 각종 뇌물이 실린 수레를 바라보자니 내 입장이 참...무슨 혼수감 준비해가는 신부도 아니고 인질도 아니고...이게 뭐냐...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그동안 신세를 진 철물점 식구....아, 이제 철물점은 하지 않지만...아무튼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제루와 로비에느는 사정도 모른 채 부러워했지만 라이사 아줌마와 베너 아저씨, 첸첸 할아버지는 안색이 어두웠다. 라이사 아줌마는 기어코 눈물을 보였는데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는 줄 알았다. 왕이 우리에게 허락한 호위 하인은 다섯 명이었다. 즉, 나를 돌보기 위해 같이 왕에게 갈 수 있는 인원이 달랑 다섯 명. 에드바라하의 이름에 비추어 볼때 상당히 초라하기 그지 없는 숫자라 할아버지들은 엄청난 불만을 표시 했지만 왕이 그렇게 하라는데 어쩌겠는가. 어차피 우리는 여기서 화려하게 왕 앞에 나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에드바라하의 입장이 초라하면 초라할 수록 왕의 권위가 커진다나 어쩐다나... 그렇게 까지 왕한테 기어야 한다니 새삼 에드바라하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라노가 부득부득 나와 함께 가겠다고 우겼지만 아디움이 라노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견은 묵살당했다. 결국 나와 같이 가는 건 호신술 선생인 루센과 검술 선생인 테이그. 그리고 나머지는 길드원이 아닌 에드바라하의 엄선된 하인들로 결정되었다. 왕이 약속한 시간인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잘 기억하고 있죠? 왕한테는 배복을 해야 하고 절대 허락없이 고개를 들어선 안되요. 먼저 왕을 찬양하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거예요. 알겠죠?" 옆에서 루센이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혹시나 내가 실수할 까봐 루센 선생도 초조한가 보다. 나는 루센이 호신술만 하는 게 아니라 왕가의 예법에도 능하다는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외웠던 걸 또 외우고 외워야 했다. 등 뒤에 에드바라하의 군사들이 무장해제 상태로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에드바라하의 할아버지들이 서 있었다. 라노와 카이, 그리고 다른 길드원들은 아마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에드바라하의 대표인 카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이상했지만 어차피 이 거리에선 보면 누가 누군지 모를 것이고 지금 에드바라하의 대표는 나였다. 아,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되네. "갑시다." 루센이 내가 타고 있는 말 고삐를 잡아 당겼다. 나는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딱딱한 자세로 말을 움직였다. 아으...이노무 말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안장위에서 허리를 펴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이 집중되었다. 몸에 지나치게 힘을 준 탓에 말의 배를 너무 심하게 조였는지 놈이 '푸르르' 하고 불만을 표시한다. 나와 루센이 출발하자 뒤따라서 테이그와 하인들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말들이 수레를 끌기 시작했고 마을에서 닥닥 긁어 모은 소 10마리가 음머...하며 따라온다. 에드바라하의 할아버지들은 변두리의 작은 귀족들도 이것보다는 더 많은 공물을 바친다며 한탄했다. 처음에 왕에게 보낸 그 물건들만 있었어도 좀 더 성대하게 보냈을텐데...라고 하며 매우 창피해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십 년이나 걸려서 준비한 계획이 고작 이런 식으로 끝난다는 게 더 창피할 거 같은데 말이다. 카이 녀석도 안됐다. 뭘 하나 하려 해도 저 늙은이들이 발목을 잡는다. 이건 체통이 서지 않습니다, 그것은 명분에 위배됩니다, 수다쟁이 라노가 분통을 터트리면서 그 할아버지들의 흉내를 내는 걸 몇 번이고 봤기 때문인지 내눈에도 에드바라하의 할아버지들이 아니꼽게 보인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때야? 까맣게 늘어서 있는 점들이 점점 확대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다. 갑옷이 햇빛을 받아 번쩍번쩍...들고 있는 창과 방패도 번쩍번쩍...다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무섭다. 엄청난 위압감을 느낀다. "떨지 말아요. 지금 당신은 에드바라하의 대표예요." 으아악 루센! 그런 얘기 하지 말아요! 더 긴장되잖아요--!! 왕의 병사들이 가까워질수록 뒷걸음질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내가 타고 있는 이 말은 루센의 손에 이끌려 터벅터벅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말을 탄 병사들이 일렬로 늘어선 가운데 하얀 말을 타고 있는 병사가 몇 미터 앞으로 튀어 나와 있었고 그 바로 뒤에 새까만 말을 탄 병사가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하얀 말을 탄 병사가 왕 같지? 갑옷도 전쟁터에서 표적이 되기 딱 좋게 혼자만 황금색이다. 덥다. 엄청 더워. 땀이 너무 많이 흐르는 거 아냐?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애... "승호." 옆에서 루센이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왕의 바로 몇 미터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건방지게 왕 앞에 말을 타고 다가가면 안된다고 했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말의 등을 짚고 등자에 힘을 실어 끙차-하고 말 위에서 내려 오려는데, 그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굴러 떨어져 버렸다. 다행히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에서 핏기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말에서 내려온 루센이 부축해 주었지만 이미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나는 패닉상태. 머릿속은 깜깜. 아무것도 생각 안나!! 뭐, 뭐랬더라? 그래, 왕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땅바닥에 대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이, 이땅의 주인이신...소, 소르 유디스 바르테스가 전하를 뵈옵습니다." 하, 한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다. 소리가 너무 작으면 안된다고 루센에게 몇 번이고 주위를 들었지만 나는 말하는 것도 겨우라구! "미, 미천한 소인...뮤디오 윤승호 에드..." 뭐, 뭐였지? 에드바하라? 에드하라바? 으아악! 왜 이런 중요한순간에 그런 게 생각나지 않는 거야!!! "에드바라하..." 보다 못한 루센이 옆에서 작게 말해 주었다. 아아 이거 미치겠다. "뮤디오 윤승호 에드바라하...저, 전하를 뵈어 무궁한 영광으로 삼고 어리석은 저의 가문 에드바라하는 시,시, 십 년의 세월을 너머......" 그 다음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뭐라고 계속 웅얼거렸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숙이고 있는 얼굴에선 땀이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졌고 정신은 몽롱했다. 더 이상 머릿속에서 끄집어 낼 말이 없자 나는 그저 땅에 몸을 파묻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주 잠깐이 었을지도 모르고 몇 분이나 흘렀을지도 모를 침묵이 감돌았다. "일어나서 얼굴을 보여라." 무언가가 말을 했다. 아니, 그 무언가는 분명 왕의 목소리일터였다. 목소리가 소리로 안 들리고 말하는 의미만 뇌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저 번쩍번쩍한 왕이 무슨 초능력을 쓴다는 건 아니고....그러니까 내가 정신이 없어서 왕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화난 음성인지, 짜증내는 음성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저 [일어나서 얼굴을 보여라]는 언어적 의미만 이해되었다는 소리다. 분명 일어나라는 허락이 떨어졌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보다 못한 루센이 부축해주어서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다리에...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라노...카이 미안... 내가 아주 너희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 창피한과 두려움이 몸을 잠식해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제길. 역광이잖아. "아딘. 네가 말한 아이가 이 자인가?" 왕의 얼굴은 투구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햇빛마저 등지고 있어서 눈이 부셨다. 게다가 이 번쩍번쩍한 황금갑옷은 대체 뭐냐구. 왕의 목소리가 꿈결에 들리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정신은 몽롱하고 긴장한 몸에선 엄청나게 땀이 쏟아지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황금갑옷 때문에 착시현상이 일어날 지경이다. 눈알을 굴려 시선을 다른데로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황금갑옷에 반사된 빛의 잔향에 눈에 남아 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루센이 옆에서 강하게 주의를 주는 바람에 눈이 부셔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답지 않게 진지한 존칭의 말투가 아디움의 입에서 오세준의 목소리로 흘러 나왔다. 아무래도 왕 옆에 있는 저 새까만 말을 탄 사람이 아디움인 것 같은데 녀석도 얼굴에 투구를 쓰고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왕이라는 작자와 대면해 있는 판국이라 솔직히 아디움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기서 당장 모가지가 날라가면 어떡하나, 내 뒤에 있는 에드바라하의 병사들은 무장해제 상태인데 이대로 공격에 들어가면 어떡하나...하는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소르 유디스 바르테스가는 뮤디오 카이 에드바라하에게 고한다. 뮤디오 윤승호 에드바라하와 그대들이 바치는 공물을 나에 대한 충성의 증거로 받아들여 에드바라하의 존속을 인정한다. 에드바라하가 왕가의 권속이 되는 의식은 한 달 뒤 왕성의 본궁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입회인과 참관자 명단은 보름 뒤 통보하겠다." 됐다! 왕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부하 하나가 뒤에 있는 에드바라하의 군사들에게로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옆에서 루센과 테이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유난히 크게 들리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왕의 군대가 철수한다. 뜨거운 뙤약볕의 벌판에서 몸이 녹아들어 갈 것 같은 더위 속. 무서워서 바짝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녹아들면서 눈 앞이 노래져 갔다. 철수해 가는 왕의 군대를 쫄레쫄레 따라가면서 옆에서 루센과 테이그가 계속 말을 걸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언제 말을 다시 탔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나 제대로 한 거 맞지? 이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거지? 제길 너무 더워....숨이 막힐 거 같아. 말아, 좀 천천히 걸어라, 너무 흔들리잖아! 앞에서 아디움으로 보이는 새까만 갑옷의 녀석이 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입가가 웃고 있는 것 같긴 한데....저 투구 때문에 표정이 잘 안 보인다. 땀이 시야를 방해한다. 더워...어지러워...숨 쉬기 힘들어...... 그 후. 일주일 동안 왕성으로 향하는 행군은 나에게 있어 극기훈련보다 지독한 것이었다. 이제 겨우 말을 타고 걷는 연습을 하는 실력에 병사들과 같은 속도로 움직여야 했고 그것은 엄청난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야영은 처음. 여행하면서 먹는 음식도 처음. 살기등등한 병사들에 둘러싸여 사로잡힌 노루처럼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루센에게 지적당한 것도 수 차례. 배탈과 근육통, 마지막엔 몸살까지 겹쳐서 왕이고 병사들이고, 하다못해 따라온 에드바라하의 하인들에게까지 온갖 추한 꼴을 다 보였다. 왕성에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성에 도착하고 방을 배정받고 나서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레 비슷한 것에 실려 들어왔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일사병으로 누워 있었고 옆에서 루센이 물수건을 갈아주고 있었다. 몸이 너무 허약한 거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묻는 루센의 물음에 가만히 고개를 돌렸지만....내가 허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비록 얻어맞고 다니는 얼간이이긴 했어도 체육점수도 좋은 편이고 운동신경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요즘은 검술이나 호신술 훈련에 갖은 심부름으로 나도 꽤나 체력이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애당초 나 같은 평범한 소년을 저런 정규군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거다. 하지만 검술선생과 호신술 선생은 원래 무도가니까 그렇다 쳐도 에드바라하의 엄선된 시종들까지 무리 없이 병사들의 행진을 쫓아가는 걸 보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내 경우는 체력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아마도 정신적인 스트레스 탓이 더 강했을 거라고 루센이 약초를 달여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방은 내가 이제까지 본 중 제일 화려한 방이었다. 현대에 있을 때에도 이렇게 고전틱하고 우아한 방이란 텔레비전에서만 보았을 뿐이다. 넓이도 내 방 다섯 개는 합쳐 놓음직한 큰 침실이었는데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는 줄곧 나무침대에 낡은 모포만 애용해온 내게 굉장히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에드바라하의 둘째 아들인데 이런 대접이라니..." 옆에서 루센이 한숨을 쉰다. 난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이렇게 넓고 깨끗하고 침대도 고급에 내 취향은 아니지만 레이스도 가득한 방이 뭐가 어때서? 저 널찍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얼마나 따사로우며 벽에 걸린 테페스트리는 얼마나 클래시컬하며 저 바닥에 깔린 초록빛 양탄자는 얼마나 부드러워 보이는가! "넓고 좋기만 한데, 뭐가 문제인가요?" 하고 루센에게 물었다. "방 자체는 고급스럽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창문은 북향인데다가 전망은 어찌나 형편없는지 창을 열면 바로 딱딱한 성벽이 보일 거에요. 게다가 승호는 계속 누워있어서 모르겠지만 이 방은 복도 제일 끝 막다른 방이라 사람들의 왕래도 없는 만큼 경비도 소홀하죠. 그 만큼 시종들을 불러도 재빨리 달려오기 어려운 위치구요. 지금은 문밖에 경비를 세워 두긴했지만 애당초 이런 방은 에드바라하의 도련님이 쓸 곳이 아니라구요." 고운 얼굴이 살짝 찡그려진다. 문득 루센과 테이그, 그 밖의 사람들의 거처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내가 있는 곳과는 다른 건물에 있다고 한다. 오고 가는 데만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린 댔으니 루센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루센은 에드바라하가문 사람이 아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라노의 길드원들 중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그는 무지막지한 호신술교사이기도 했다. 길드원치곤 귀족가에 대한 지식도 빠삭하고 격식만 따지는 예의법에도 능숙해서 나와 함께 왕궁에 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길드원 중 면식이 있는 루센과 테이그가 같이 오게 되어서 나는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말이야 에드바라하 가문이 충성을 약속하는 증표로 둘째 아들을 바치네 어쩌네 했지만 왕도 그렇고 에드바라하도 그렇고 내가 진짜 귀족이 아니란 것은 쌍방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디움이 무슨 꿍꿍이로 왕을 부추겼는지는 몰라도 왜 하필 나를 지목했는지 이유를 모르는 나로선 불안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래 놓고 가짜 귀족이라고 죽여버린다거나 하지는 않을지... 어줍잖은 영웅심리로 호기 좋게 [왕에게 가겠다]고 얘기 했지만 워낙 간이 콩알만한 나로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의식이 삼 주도 안 남았어요. 그때까지 승호는 할 일이 많으니 얼른 기운 차리고 튼튼해져야 해요." 루센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까만 긴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은 것도 자태가 곱다. 머리 길이로만 보자면 카이 보다 더 길고 더 새까만 것 같다. "무슨 의식이요?" 루센이 과일 깎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차근차근 얘기를 들려주는데 그제야 내가 여기에 놀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에드바라하 가문이 왕가의 권속으로 들어가는 의식이에요. 각 영지의 사절단들과 원로들이 참관한 가운데 에드바라하의 수장이 충성을 서약하는 의식이지요. 그 의식을 치르면 귀보르냑 영지의 자치권을 에드바라하에게 일임하게 되지만 영지의 소유권은 왕의 것이죠. 승호가 할 일은 아직 몸에 익히지 못한 예법과 지식을 배우고, 글도 마저 배우는 것이에요. 의식 때는 승호도 에드바라하의 일원으로 참관해야 하니까 식의 순서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구요. 그리고 의식이 끝나면 아마 왕성에서 일하게 될 테니 근무하게 될 분야를 정하는 데만해도 시간이 꽤 걸릴 거에요." "일이요?" 글도 다 모른다. 말도 잘 못 탄다. 그런데 난데없이 일이라니? "왕가의 권속이 되면 가문의 장자를 제외한 아들은 왕실 기사단에 강제입대예요." "에...에엑?!!!" 그러고 보니 라노한테 그 비슷한 말을 얼핏 들은 것 같다. 하지만 기사단? 난 아직 머리치기 연습 중인데? "걱정 말아요. 기사단이라고 해서 전부 기사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 중엔 행정업무나 회계, 외교 쪽으로 일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름은 기사단 명부에 오르겠지만 하는 일은 나중에 자신의 적성을 봐서 고르면 되니까 그 점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승호?" 빳빳이 굳은 나를 보고 루센이 걱정스레 물어온다. 나, 나는 그럼 여기서 회계 같은 걸 보게 되는 건가? 주, 주판이라도 배워야 해? 길드원으로써 라노와 파웰, 티안 옆에서 하나하나 쉬운 것부터 배워나가는 것 아니었어? 잠시 앞날이 아득해진 나를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더니 루센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얼어버리면 안돼요. 의식이 있는 그날, 승호는 기사단에 입대하는 의식도 같이 치르게 될 거니까..." 맙소사. 루센이 떠나고 그날 밤은 잠을 자지 못했다. 아직 미약한 열이 남아 있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루센이 말한 대로였다. 창 바로 밑엔 꽤 울창한 숲이 있었고 약 10미터 떨어진 곳에 두툼하고 차가운 성벽이 달빛을 받아 스산한 위용을 보이고 있었다. 차가운 달이 군청색의 밤하늘에서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재질의 얇은 잠옷은 발목까지 흘러내리는 원피스 스타일이었다. 아랫도리가 허전하긴 했지만 이 곳에선 이런 옷을 입는 데에 남녀의 구별이 없는 것 같다. 창문에서 물러나 멍하니 침대에 앉아 보았다. 푹신하다. 뭐랄까... 지금이 실감나지 않는다고나할까. 그렇게 한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똑똑 방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 밖에는 경비가 두 명씩 교대를 하며 지키고 있었는데 불편한 게 있으면 그들에게 말하라고 했다. 아직까진 별로 시킬 일도 없고 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거 보니 나에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여~ 오랜만이군." 문을 열고 들어 온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경비병들은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했고 아디움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문이나 잘 지키라고 말하며 손짓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한 남자가 아디움을 따라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내 방 다섯 배의 공간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디움은 검은 바지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오세준과 닮은 얼굴엔 그 이상하게 하늘거리는 옷차림도 잘 어울렸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아디움보다는 키가 컸지만 체격은 비슷했다. 다만 그 얼굴에 붉은 색 셔츠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었다. 저 인간이 눈 앞에 나타나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진유현. 아니, 진유현과 똑같이 생긴 이 세계의 사람. 네 얼굴을 보아도 나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구. 하지만... "훅-!"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꼿꼿이 굳어 동상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절대 동요하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어째서 저 눈이 이다지도 무서운 걸까? 저 자는 진유현이 아닌데. 진유현의 얼굴이 하얀 편이라면 저 사람은 햇빛에 그을려있다. 진유현은 언제나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였는데 저 사람은 그보다 약간 긴 머리에 조금 삐쳐 있다. 진유현보다 좀 더 얼굴이 말랐고 눈빛은 날카로웠으며 키는 더 컸다. 진유현보다...... "어이, 뭘 그리 놀래?" 아디움이 입꼬리를 올리며 느릿느릿 걸어온다. 아디움이 걸어오면서 그도 같이 다가온다. 무의식이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친 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무서운 걸까? 단지 닮았을 뿐인 얼굴인데.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아니, 눈이 갑자기 반짝한다. 흥미를 가진 표정으로 내 전신을 훑는다. 기분이 나빴다. "아~ 너무 겁먹지 말라고 에드바라하의 둘째 도련님. 그저 뭣 좀 물어 볼 게 있어서 말이야." 느물거리며 아디움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정신 차리자. 지금 나는 이래 봬도 귀족으로 와 있는 거니까 적어도 주눅들 필요는 없는 거야. 마음속으로 수 없이 다짐했지만 생리적인 공포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아디움도 무서웠지만 진유현과 똑같은 저 얼굴에 더 위압감을 느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주의하면서 시선을 맞추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다행히 목소리가 제대로 나갔다. "아니 뭐...몸이 안 좋다고 들어서 말야. 문병도 할 겸 겸사겸사..." "더,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 괜찮아요." 아디움은 침대 끝에 다리를 꼬고 앉아 같이 온 남자를 올려다 본다. 그는 아디움과 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는 대놓고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흐음...사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말야..."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나가줬으면 좋겠다. 사실 네 녀석 얼굴도 보기 싫다. 보면 볼 수록 그 지하감방의 일이 생각나. 저 진유현과 똑같은 저 얼굴을 봐도 지하창고의 일이 생각나. 빌어먹을.... 이 자식도 저 자식도 다 무섭고 밉고 화가 난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해? 소르 헤시안 바르테스가." 아디움은 잠시 말을 끊더니 마치 무슨 비밀이라도 읊듯 입을 연다. "김제하라고 했지?" 고개를 들었다. 진유현을 닮은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말을 잇는 건 아디움이 아니라 그 남자였다. "네가 아딘을 이상한 이름으로 불렀다고 들었다. 헤시안도 그랬지.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더니 글도 못 읽고 검술은커녕 말 한 마리 타는 데도 애를 먹고 있어. 나와 아딘 말고는 자신의 가족 얼굴도 기억 못해. 의사들은 단순한 기억상실증으로 보고 있지 않아. 스트레스로 인한 일종의 정신장애라고 하더군. 그런데 어떻게 일개 평민인 네가 헤시안이 했던 이야기와 똑같은 얘길 하는 거지?" 정신장애라.... 그 '헤시안'이란 사람이 김제하가 맞다면 말 따위, 검술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하지. 솔직히 물어 보고 싶은 말은 내 쪽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제하...아니, 헤시안은 당신을 보고 뭐라고 했는데요?" 흥분되는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진유현과 닮은 그 얼굴이 나를 빤히 바라봤지만 그저 닮은 얼굴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그날의 일을 회상하듯 잠시 말을 않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부루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유현, 이 멍청한 자식아.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잖아.] 라고 말하면서 울더군." 정적이 흘렀다. 살짝 열어 놓은 창 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 오고 있었다. 한여름 밤의 시원한 바람이어야 하거늘 내 팔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나도 처음에 라노보고 민태라고 부르며 엉엉 울었다. 아무리 제하라도 눈뜨고 나니 이런 엉뚱한 곳. 친구랑 똑같은 사람이 이상한 옷을 입고 눈앞에 서 있으면 당황스러웠겠지. 게다가 제하는 주위 사람들이 헤시안이라는 둥 이상한 이름으로 불러댔을 테니 녀석의 패닉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어느 정도 머릿속을 정리하고 진유현과 똑같이 생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디움은 침대 구석에 앉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너도 내가 진유현인가 뭔가 하는 놈으로 보이나? 아딘을 이상한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지? 아딘에게 얘기 들었어. 버스사고? 수학여행? 그런 거 전문 용어나 은어인지는 모르겠지만 헤시안이 발병하던 그날 뭐라고 소리치던 단어 중에 그런 말이 있었지. 분명히..." 조금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그는 내 대답을 재촉했다. 어지간히도 제하가 걱정되나 보다. 하지만 내가 무슨 답을 내놓을 수 있단말인가. 나는 내 일로도 머리가 복잡해 죽겠다. "이름이 윤승호랬나?" 그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니까 대번에 인상이 구겨지면서 나를 노려본다. 어라? 뭐가 잘못됐나? "큭큭큭..." 옆에서 아디움이 기분 나쁜 목소리로 웃었다. 진유현을 닮은 그 사람이 아디움을 째려보자 녀석은 방실방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헤시안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어. 느닷없이 유디스의 멱살을 잡아 올리더니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더군. 그걸 지켜보던 신하들이 얼마나 혼비백산했는지 진짜 웃겼다구. 그 애늙은이 같던 녀석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한나라의 왕을 향해 호통을 치는데 아주 가관이었지. 그리고 몇 번이고 '윤승호'라는 이름을 불렀다. 너무 처절하게 불러서 난 헤어진 연인 이름을 부르는 줄 알았어." 또다시 키득거리며 아디움이 어깨로 웃는다. 나는 이 놀라운 얘기 속에서 뭔가 위화감을 찾아내고 시선을 돌려 눈 앞의, 진유현을 닮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나라의 왕? 유디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진지하게, 눈 앞의 소년.....이라고 부르기엔 좀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 사람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저쪽에서 "푸하학!"하고 아디움이 폭소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난번 평원에서 보지 않았나? 소르 유디스 바르테스가다. 꼭 정장을 하고 신하들을 줄줄 끌고 들어와야 알아 보겠는가?" 젠장, 망할, 빌어먹을! 왕이다. 진짜 왕이야!! 다리에 힘이 들어 가지 않아 살그머니 침대 귀퉁이에 앉아 왕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왕의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다. 왕과 첫 대면했을 때 나는 그 땡볕에 옷을 여섯 겹이나 껴입은 상태에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왕성까지 오는 내내 복통과 고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왕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 편안한 차림으로 불쑥 찾아왔으니 그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점점 기분 나빠졌다. 내 친구를 닮은 라노나 파웰, 티안은 평민인데 왜 아디움이나 제하는 왕족이냐? 게다가 진유현을 닮은 인간은 왕? "어이, 너무 무서워 하지 말라구. 유디스. 네가 그렇게 노려보니까 저자식이 겁먹었잖아. 귀족가의 도련님에겐 부드~럽게~ 모르냐?" 다분히 비웃음조가 역력한 말투로 아디움이 약올린다. 그제야 나는 내가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흉한 모습이라니. 몇 번이고 당당해지자고 마음 먹었지만 막상 저 얼굴을 보니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왕이 표정을 풀려고 노력하면서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말이 없는 왕 대신에 아디움이 진지한 어조로 다음 말을 이어 갔다. "헤시안은 나와 함께 유디스의 두 명뿐인 사촌이고 이 나라의 재무관이지. 아무리 기억상실증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리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는 건지 의사들도 고개를 젓고 있어. 일명 '재무관병'이라고 불리는 그 기억상실증은 헤시안이 산더미 같은 일거리에 치여서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걸린 거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해. 왕이 정치는 안하고 맨날 나가서 싸우니까 사촌인 헤시안이 그 일거리를 고스란히 떠맡았거든." 말을 하다 말고 아디움이 중간에 키득대며 왕을 바라보자 왕이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다. 아디움의 능글스러움은 왕이라고 예외는 아닌가 보다. "아~아~ 어쨌거나 유능한 재무관이 하루 아침에 자기 이름도 모르는 멍청이로 변해버렸으니 왕궁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내 멱살을 잡고서 "오세준! 나 김제하야! 제하라니까!"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너무 어이없어서 조금 겁도 나더라구. 그때 광장에서 네가 똑같이 멱살잡고 비슷한 얘기를 했을 때는 이거 재밌는 물건 하나 찾았다고 생각했지."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헤시안과 너를 만나게 하는 방법이겠지만 공교롭게도 녀석은 지금 여행 중이다. 한 달 동안 말 타는 연습만 하더니 여행을 하겠다며 어디론가 가버렸지. 가족들과 모든 장관들이 말렸지만 녀석의 고집은 나도 못 꺾어. 정기적으로 연락은 오고 있는데 지금쯤이면 퀘도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을 거다." 아디움의 말을 왕이 이어 받았다. 나는 헤시안이... 아니, 아니, 제하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에 굉장히 실망하고 말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여행을 선택한 제하의 생각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쩌면 왕족이었기에, 나와는 다른 입장으로 이 세계에 떨어졌기에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기분이 착잡해진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느낌이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왕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네 얘기를 듣고 싶다." 유현이랑 같은 목소리가 낮게 울리며 대답을 재촉한다. 입술을 깨물며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설픈 거짓말은 저 두 사람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제하와 나는 다른 세계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 당장에 주리를 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안절부절...... 진유현을 닮은 왕과 오세준을 닮은 왕족의 앞에서 나는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괜찮아.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 주겠다." 왕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진지한 그 얼굴을 보니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 진유현에게서도 보지 못한 얼굴이다. 저 왕은 진심으로 제하를 걱정하는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제하가 헤시안이 아니라고 해도...정말 괜찮은 거야? "헤시안이란 사람에 대해선 몰라요." 나는 진지한 왕의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깨 위의 손에 힘이 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키고 목소리가 떨지 않기 위해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김제하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어요. 얼굴이 하얗고 어려 보이는 얼굴이지만 외모와 다르게 매우 어른스러운 아이죠." 팔짱을 끼고 있던 아디움의 팔이 풀어지고 그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제하에겐 소꿉친구가 있는데 그 애의 이름이 진유현이예요. 그리고 진유현에게는 오세준이라는 이름의 친구도 있는데 제하와 오세준은 별로 친하진 않아요." "왜?" 왕이 중간에 끼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오세준은 좀 난폭한 편이라서 얌전했던 제하와는 맞지 않은 것 같아요." "헤에~ 딱 나랑 헤시안의 관계네." 아디움이 한마디 참견한다. 그러나 빈정거리는 그 말투에 웃음기는 없었다. "그럼 너는? 너는 헤시안...아니, 제하라는 아이와 친구였나?" 왕의 물음에 잠시 말을 끊어야 했다. "같은 학교...같은 반이에요. 친하진 않아요." "오세준은? 오세준하곤 무슨 사이인데?" 이번엔 아디움이 끼어든다. 하긴, 이렇게라도 물어보지 않으면 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버벅대고 있었을 것이다. "같은 반일뿐 친하진 않아요." "진유현은?"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저 왕의 입에서 저 목소리로 진유현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역시 같은 반인데...예전에는 친했지만 지금은 안 친해요." "싸웠나?" "......" 말하기가 껄끄럽다. 명치에서 무언가 응어리진 것이 올라 올 것 같다.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황급히 말을 쏟아 내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도중에 버스사고가 났어요. 그러니까, 수학여행은 학교에서 가는 단합대회 같은 거고 버스는 커다란 마차라고 생각하면 돼요. 산 위에서 사고가 났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땐 산속이었죠. 그리고 구출 되었지만 산 아래에 내려와서 본 마을의 풍경은 제가 알고 있던 곳과는 달랐어요. 나는 아마 이 나라 사람이 아닐 거에요. 아니,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심호흡을 했다. 그리 긴 얘기는 아니었지만 저들이 내 얘기를 제대로 이해했을 지가 걱정되었다. 시선을 돌려 조심스럽게 아디움과 왕의 안색을 살폈다. 아디움이 왕과 눈을 마주치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헤시안의 얘기와 똑같지?" "그래. 눈 떠 보니 왕궁이었다는 부분만 빼면." 최소한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왕은 좀 떨어진 곳에 서서 나를 내려다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아디움도 빤히 바라보는 통에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침대 위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너도 내가 진유현으로 보이나?" 덜컹- 심장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그런 질문을 듣게 되다니. 너무나도 똑같아서 진유현이 아니라고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아닌 걸. 저 자는 진유현이 아니다. "굉장히 닮았지만......약간 틀려요." 왕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차마 마주보고 있지 못했다.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왕은 발걸음을 돌려 아디움에게 다가갔다. "우선은 헤시안이 돌아와야 되겠군." "연락은 해놨어. 퀘도까지 전령이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래도 에드바라하의 의식 날까지는 돌아올 수 있겠지."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몇 마디 주고 받더니 내 쪽을 흘끗 바라본다. 아디움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수고 했어. 다음에 또 올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왕이란 사람도 그냥 가려나 보다. 더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은 듯 굉장히 아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더 이상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이렇게 무사히 왕과 아디움과 얘기 할 수 있다니 손이 다 떨린다. 그래서 두 사람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나는 인사도 못하고 간단한 말한 마디 못한 채 그렇게 부들부들 경련하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맞잡은 두 손에서 식은땀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잘했다. 그래, 진유현과 닮은 얼굴이 나와도 놀라지 않겠다는 다짐은 무너졌지만 최소한 라노와 카이들에게 피해가 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왕이 나를 지목하여 왕성에 데리고 온 이유가 제하 때문이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내가 하는 소리를 헛소리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최소한 내가 제하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 같다. 이제 제하만 돌아오면 된다. ......동병상련이랄까...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하도 이 세계에 와서 굉장히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나도 굉장히 무서웠지만 그래도 녀석은 왕족이었으니 고생은 덜 했겠지. 조금 질투랄까...왜 나는 그렇게 고생했는데 녀석은 왕족이냐...라는 기분도 들었지만 내 운이 지독히도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제하가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자. 일상은 순탄했다. 기운을 차리는 대로 운동을 하고 틈틈이 말을 타거나 글을 배우거나 예법을 익혔다. 글을 배우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았다. 이 곳의 글이라는 것이 글자 모양만 새로운 형태일뿐 문법이나 어휘면에선 우리말과 완전 일치했다. 다만 그걸 다 외우고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것이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 영어나 한문에 고통스러워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이제껏 호신술을 가르치던 루센이 왕궁에 오면서 바빠진 탓에 체력단련은 검술로만 하고 있다. 그렇다고 루센과 자주 못 만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루의 절반은 루센과 같이 있는 편이었지만 주로 공부를 배우거나 루센이 일거리를 내방에 가져와서 처리하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말 타는 것도, 검술도 다 재밌었지만 저 에드바라하 가문에서 온 깐깐한 시종 세 명의 예절교육은 그야말로 미치도록 졸려서 가끔 땡땡이를 치기도 했다. 땡땡이라니...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나중엔 은근히 재미를 붙이는 바람에 결국 루센이게 혼나기도 했다. 라노에게 듣기로 내 입장은 거의 인질이나 다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침대는 푹신했고 먹을 것은 라노와 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름지고 질 좋은 것들이었다. 사실, 현대에서도 좀처럼 먹기 힘든 희귀한 음식이 매일 세 번씩 눈앞에 놓여지니 이게 웬 떡이냐고 속으로 기뻐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따뜻한 욕조 목욕은 마음만 먹으면 매일매일 할 수 있었고 행동에 별다른 제약이 없어 경치 좋은 정원도 언제든 산책할 수 있었다. 예절교육 담당의 잔소리는 양념으로, 루센의 글공부는 기본 소양으로, 승마와 검술은 생활의 활력소쯤 되었다. 날이 갈수록 혈색도 좋아지고 살도 찐 거 같다. 매일 하는 운동덕분에 근육도 그럭저럭 생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거 너무 편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시리 민망해지기도 했다. 라노와 카이들은 분명 비장한 각오로 나를 보냈을 텐데 말이다. 가끔씩 화려한 옷차림의 아저씨 아줌마들, 그러니까 귀족이나 왕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지나가곤 했지만 그런 것마저 없었으면 오히려 더 불안했을 것이다. 생활은 너무 편했다. 루센한테 이렇게 편해도 좋냐고 물었다가 한바탕 웃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편하고, 안락하고.... 다만 왕이 종종 들른다는 것이 조금 긴장 될 뿐이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왕은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간이 콩알만해 지는 것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실례를 범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몸을 사렸다. 제하에 관한 이야기는 화제에 그리 자주 오르지 않았다. 본인이 없는 곳에서 얘기해봐야 별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왕도 헤시안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은 가끔 내 부모님이나 일상생활 같은 것을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답하면 왕은 인상을 쓰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해서 나는 등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때문에 점점 내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우리의 대화는 정말 영양가 없고 시시한 것들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와서 하는 일이라곤 간단한 다과를 즐긴다거나 오늘은 날씨가 좋다는 둥 말 타는 연습은 잘 하고 있냐는 둥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는 것이 전부였다. 왕이 진유현과 닮긴 했지만... 아니, 똑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녀석이 내뿜던 독기나 칼날 같던 긴장감이 사라진 얼굴엔 느긋하고 부드러운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아 그래...예전의 진유현처럼. "귓불이 보기보다 두껍군." "예?" 의식을 일주일 앞 둔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정원에서 어린이용 책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왕은 이제 내 일과는 다 꿰었는지 이렇게 한가할 때면 가벼운 차림으로 나타나 말을 걸곤 했다. 얇은 블라우스에 편한 바지, 장화. 그 간단한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장검이 허리에 채워져 있었지만 한 번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지나치게 평범한 차림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던 병사들이 혼비백산해서 인사를 하는 일도 허다했다. 날씨는 더웠다.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였지만 흐르는 땀을 막을 수 없어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던 나는 느닷없는 왕의 출현에 인사하는 것도 있고 상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만져봐도 되나?"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예라고 거창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별 것 아니었다. 대충 풀어헤친 옷을 여미고 신발도 제대로 신고 머리를 손질한 다음 90도 각도로 꾸벅 인사했다는 거다. 원래는 바닥에 무릎 꿇고 머리를 숙여야 하지만 왕이 귀찮다고 하지 말랬다. 왕이 불쑥불쑥 찾아 온 것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놀라곤 한다. 그래서 방금 내가 무슨 소릴 들었는지 까먹기 일쑤다. 그러니까....뭘 만져봐도 되냐고? "귀 자체는 별로 크지 않은데 귓불은 두툼한 편이군. 뭐 보기 흉하다는 건 아니니 크게 신경 쓸 건 없어."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뻗어 내 귀를 만진다. 왠지 기분 나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이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운 것 같기도 하면서 기분 나쁘지는 않은...... ---뭐, 귓불이 두툼하면 복이 있는 거라니까 좋은 거야. 머릿속에서 진유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타악 그건 무의식이었다. 감히 왕의 손을 쳐내버린 것은 등줄기를 달리는 혐오감에 의해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왕의, 아니 유현의 얼굴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너무도 순하게, 더 없이 천진하게.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턱을 긁는다. 시선을 화단으로 돌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조금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는다. "이거 실례했군. 기분 나빴다면 말하지 그랬나." 뭐지. 왜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 거야? 저 자는 진유현이 아니다. 얼굴은 똑같지만 키도 더 크고 피부색도 그을려 있다. 머리모양도 다르다. 말투도 달라. 부모도 가족도, 자라온 환경도 진유현이 아니야. 저 자는 소르 유디스 바르테스가. 말을 타고 전장을 지휘하는 한 나라의 왕인 것이다. 그래... 그 자식이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왕 앞에 흉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세를 바로 했다. 왕은 괜찮다며 이제까지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앉으라고 권하기에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무릎을 꿇고 옆에 앉았다. "편하게 앉게"라고 말하더니 불쑥 무언가를 내놓는다. "지난번 출전으로 얻은 건데 드루키아 지방의 특산물이지. 이렇게 생긴 과일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 십 년에 한 번 재배하는 열매라고 하더군. 맛도 그만이지만 상처나 질병의 치료에 엄청난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먹어보지 않겠어?" 왕의 손에는 새빨간 열매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열매가 서너 줄기 정도 들려 있었다. 그렇다고 포도처럼 줄기 하나에 포도알이 자글자글 달린 형태는 아니고 하나의 줄기에 예닐곱 개가 쪼로록 배열 되어 있는 것이 버드나무 줄기에 새빨간 알갱이가 차례대로 매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색깔도 붉고 투명해서 구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예뻤다. 그런데 나는 저 열매를 본 일이 있다. 바로 산 속에서 헤매던 때에 잘 모르고 먹었다가 엄청난 복통을 일으킨 그 열매 말이다. 그 땐 저렇게 줄기가 아니었고 덤불에 열매가 하나씩 달린 형태의 열매였지만 알갱이의 색이나 모양은 그 먹다 죽을 뻔한 열매와 똑같이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귀보르냑 영지를 둘러싼 크릴산맥에는 이 열매와 비슷한 독초가 있다고 들었네. 그쪽 산에서 생활했다고 했으니 어쩌면 잘 알지도 모르겠군." 비, 비슷한 독초...라는 거냐...... 잠시 그때의 끔찍한 복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지만 눈 앞의 이 열매는 먹어도 되는 거겠지. 왕의 손에서 한 줄기 넘겨 받고 한 알갱이를 줄기에서 떼어내 보았다. 방울토마토보다 약간 큰 알갱이를 한 입에 넣고 씹어보자 달고 새콤한 즙이 톡 하고 입안에서 터졌다. 이, 이것이 독초와 과일의 차이란 말인가아아!!! "어때? 맛있지?" 기대도 못했던 달콤함에 잠시 굳어있는 나를 보고 왕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그때 먹었던 독초를 생각하고 먹기를 껄끄러워하던 마음이 미안해질 정도로 열매는 훌륭한 맛이었다. 내가 현대에서 먹어봤던 다른 과일들과 비슷한 맛 같으면서도 닮은 맛의 과일을 떠올릴 수 없었다. 식감은 포도와 비슷했지만 포도 껍데기보다 더 쫄깃쫄깃했고 알맹이는 수박보다 부드러웠다. 씨가 없는지 열매를 우적우적 씹어 삼킬 때까지 아무런 딱딱한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달콤한 알갱이를 입안에 굴리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자니 기분이 나른해진다. 바람이 서늘했다. 나무그늘 밖으로 내리쬐는 땡볕에 지나가는 병사들이 땀을 닦으면서 투덜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쪽을 보더니, 한가하게 앉아 있는 왕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몸에 각을 잡고 거수경례를 한다. 우후후...뻣뻣하게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라니......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병사들의 연무장이 나온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가면 사시사철 꽃을 피운다는 사계정원이 있고 정원 한가운데의 분수대에선 늘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정원이 가까이 있는 탓에 꽃향기가 바람 속에 희미하게 묻어났고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으면 저 멀리에 있을 분수대의 물소리도 들려오는 것이다. 처음 먹어보는 달디 단 열매와 기분 좋은 바람에 나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옆에 왕이 있는 것도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았다. 다리를 쭉 펴고 나무에 기대어 한 없이 느긋한 기분으로 열매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멀리서 루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왕과 나란히 앉아 십 년에 한 번 열린다는 과일을 나 혼자 다 먹어 치웠을 것이다. "이, 이것 참 황송하옵께도...왕께서 친히 이렇게 방문하여 주시고..." 루센은 아직도 왕을 대하는 것이 적응이 안되는지 허둥대고 있었다. 왕은 빙글빙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페고열매가 맘에 든 것 같은데 나머지는 가져가서 먹도록 해."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얼른 열매를 받아 드는 내 태도가 못마땅한지 루센이 눈으로 주의를 준다. 난 또 뭘 잘못했는지 몰라 흠칫 몸을 떨었지만 왕이 저렇게 웃는 얼굴로 주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왕이 떠난 후 루센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승호! 제발 놀래 키지 좀 말아요! 전하와 함께 나란히 앉아 페고열매를 따먹고 있을 입장이에요?!!" 아직 두 줄기나 남은 열매를 들고 방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아무리 전하가 허물없이 다가와도 우리는 그걸 편하게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란 말이에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목이 달아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에드바라하 전체에 피해가 올 수도 있어요!" 루센은 결코 큰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충분히 단호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길이길이 화를 내니, 왕이 내 귓불 만지는 게 싫어서 손을 쳐냈다고 했다간 저녁에 있을 호신술 수업에 무슨 소릴 들을 지 모를 일이다. 말하지 말자. "왕과 친하게 지내는 건 좋아요. 암, 좋구말구요. 하지만 본분을 지켜요. 아무리 승호가 왕과 동갑이라고 해도, 왕이 저렇게 평범한 차림으로 나다닌다 해도, 그는 왕이에요. 저렇게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면서 에드바라하가 혹여 딴 꿍꿍이라도 품지 않을까, 승호에게서 무언가 트집잡을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왕이라구요!" 마지막 부분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정말 그런 생각으로 왕이 나에게 접근한 거라면 틀렸다. 난 에드바라하에 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으니까. 그래도 루센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금 섭섭한데... "정말...왕은 그런 목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놀러 오는 걸까?" 테이블 위의 접시에 페고인지 뭔지 하는 열매를 올려 놓으며 루센에게 물었다. 내 표정이 좀 안쓰러웠던지 그제야 루센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말해주었다. 그래, 저렇게 차분할 때가 가장 루센답다. "뭐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왕은 교활하고 뻔뻔하며 야비하니까." 저기...조심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루센같다구.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문 쪽을 흘끗거렸지만 굳게 닫힌 문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아, 저 문 뒤에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긴 하겠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하지만 왕에 대한 루센의 평가는 좀 심했다. 왕은 좀 뻔뻔한 구석은 있어도 교활하고 야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진유현이라면 몰라도.... ....제길, 이럴 때 왜 그 자식이 떠오르는 거냐. 그래,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라고 머리에서 되뇌어도 저렇게까지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으면 생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다. 젠장, 아예 생각을 말자 생각을... "확실히 왕이 승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긴 해요."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루센이 말한다. 그리고 나를 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더니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준다. 나보다 7살이 많은 루센은 어떨 땐 큰 형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선생님 같기도 하다. "전쟁을 하는 왕, 정치를 하는 왕,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유디스는 확실히 비열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이죠. 그런데 선대 왕 레이헨처럼 유디스는 아버지를 닮아 혈족에 굉장히 집착을 했어요. 다만 그 집착이 동갑내기 사촌인 아디움과 헤시안에게만 나타나고 다른 친척들한테는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점이 레이헨 왕과 다른 점이죠. 이건 어디까지나 세간에서 도는 추측인데, 유디스는 이른 나이에 왕이 되어 제대로 소년시절을 즐기지 못한 것을 헤시안과 아디움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어요. 전쟁터라면 동갑이든 어린애든 코웃음도 안치고 동강내버릴 그 왕이 말이죠." 전쟁터에서의 왕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간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왕은 동갑내기인 승호에게 또래의식을 느끼는 건지도 몰라요. 현재 헤시안은 여행 중이고 아디움은 또래의식을 느끼기엔 너무... ....너무 타락했죠. 뭐 그건 그거대로 둘이 잘도 쿵짝이 맞는 것 같지만." 또래의식이라니 좀 거창하다. 그리고 아무리 왕이 널럴하게 보인다고 해도 나한테 그런 동갑내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좀 무리라고 본다. 생각 같아선 "헤시안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제하, 그러니까 헤시안이 그런 상태라는 걸 아는 사람은 왕궁에서도 얼마 없다고 한다. 왕이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으니 루센에겐 미안하지만 말 해 줄 수 없다. 더구나 그 얘기를 하면 내 얘기도 해야 하는데, 나를 산에서 기억 잃은 불쌍한 소년쯤으로 아는 루센에게 정신병자 취급까지 당하기는 싫었다. 루센한테 숨긴다는 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긴했지만. "아무튼 좋은 현상이에요. 지금까진 잘 하고 있어요. 이 귀한 페고열매를 나눠줄 정도니....아니, 왕에겐 별로 귀한게 아닐지 모르지만 아무튼 직접 왕이 줬다는 게 중요한 거에요. 다른 귀족 같았으면 벌써 문서로 기록했을 만한 일이라구요. 이건." 루센이 구슬같이 반짝이는 열매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승호. 너무 왕 앞에서 본분을 잊지 말아줘요. 일차적인 원인은 그렇게 만든 왕에게 있지만 우리 입장이란 것도 있으니까요." 음 그렇다. 루센의 말에도 일 리가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 무신경한 태도가 뭔지 나는 잘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 왕이라는 작자, 너무 나를 만만하게 보는 통에 나도 같이 해이해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같이 서 있으면 형제나 친구로 봐도 무방할 나이와 옷차림을 어떻게 커버해야 한단 말이냐구. 내일부터 저 귀족들이 입는 거추장스러운 옷이라도 입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페고알갱이를 따서 입안에 넣었다. 와우, 이 몸서리치게 맛있는 새콤함이라니. 루센에게도 권하자 빙긋 웃으며 한 알 입안에 넣는다. ...먹는 모습도 어찌 저렇게 이쁘게 먹을까. 나는 우적우적 소리내면서 먹다가 즙을 흘릴 뻔했는데... "왕이 격식이나 귀찮은 절차를 싫어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열매를 먹던 입이 작게 열리더니 조용하고 듣기 좋은 음성으로 말했다. 열매 때문에 입술과 혀가 새빨갛다. 이런, 내 입안도 지금쯤 새빨갛겠군. "솔직히 아무리 왕궁이라 해도 언제 자객이 들이닥칠지, 언제 같은 왕족이 배신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렇게 바지 하나, 셔츠 한 장 달랑 입고 돌아다닌다니 무신경한 건지 배짱 좋은 건지 정말 대책 없는 왕이에요. 그 포악한 게비도조차 잘 때에도 갑주를 걸치고 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인데 말이죠. 왕이 한 번 움직이는 데는 또 얼마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데요. 적어도 수행인원 수십 명은 줄줄이 꼬리에 매달고 다녀야 하는데 유디스는 공식적인 일만 아니면 여느 평민 아이처럼 여기저기 혼자 쏘다니는 걸 좋아하죠. 승호의 일만 해도 그래요. 인사절차 생략하고, 방문절차 잘라먹고 이래 봬도 에드바라하의 대표로 와 있는 건데 이건 무슨 동네친구 취급이잖아요? 너무 자유스러워서, 제가 알고 있던 왕의 이미지와 많이 틀려서 좀 놀랐다구요." 자유스러운 왕이라. 진유현이었다면 여기서도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을 테지. 그 녀석은 나랑 친했을 때나 안 친했을 때나 언제나 단정하고 구김살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체육복도 매일 빠는지 늘 향내가 났고 학생치고 드물게 깨끗한 실내화를 신고 다녔다. 적어도 유현이라면 저 왕처럼 머리를 비죽비죽 길러서 멋대로 내버려두고 다니진 않았을 거다. 루센의 얘기를 들으며 녀석의 일을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져서 다시 열매를 입안에 넣었다. ......아차, 이러다가 진짜 나 혼자 다 먹겠다. "루센 이거, 가는 길에 테이그한테 좀 줘요. 여기 놔뒀다간 내가 다 먹어버릴지도 몰라. 에드바라하에서 온 그 세 명한테도 좀 주고...음...그런데 얼마 없네...." 두 줄기 중 절반을 먹어 치웠으니 이제 저 페고 알맹이는 한 줄기 하고 반. 알갱이 개수는 열 개 정도다. "이거...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어쩌죠? 두세 알씩 먹으면 끝나겠다." 내가 입맛을 쩝쩝다시며 열매를 바라보고 있자니 루센이 싱긋 웃는다.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요. 알갱이 하나에 금화 한 자루가 왔다갔다하는 페고 열매를 한 알이라도 먹었다는 데에 충분히 고마워할 테니까." "켁-!!" 그, 금화 한 자루?!! 잠시 내가 아까까지 먹어 치웠던 열 몇 개의 페고 열매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왕도 서너 개 먹은 개 전부인데 나 혼자 그걸 다 먹었었다. 미련스럽게! 그러니까 루센이 무신경하다는 둥, 좀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둥 잔소리를 하는 거다!! 아아 자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난 그렇게 비싼 건 줄 몰랐다구. 무식하면 용감하구나.... "나도 이건 구경만 했지 먹어보지 못한 건데 승호덕분에 먹게 될 줄은 몰랐어요. 왕한테 꼭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 잊으면 안돼요." 루센은 열매를 들고 가면서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너무 맛있어 하는 것 같다며 알갱이 두 알을 접시 위에 놓아 두고 갔는데 저게 한 알에 금화 한 자루라니 갑자기 아까 먹은 게 너무너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싼 건 줄 알았으면 좀 더 아껴 먹는 건데..... 의식이 연기되었다. 헤시안의 귀환이 불투명하다는 것을 이유로 왕은 에드바라하의 왕가권속 의식을 보름 뒤로 미루어 버린 것이다. 왕가에 대대로 충성을 바치겠다는 이 의식에는 그것을 증명하는 문서가 필요하다. 에드바라하를 권속으로 인정하는 그 문서에는 왕의 친가, 외가 각각 육촌 이내의 왕족들이 허가를 한다는 사인이 필요하다는 거다. 뭐, 허락이야 어차피 왕이 하는 거지만 그래도 전통이라는 게 쉽게 무시할 만한 성질이 못 된다고 그랬다. 게비도 이후 왕족의 수는 급격히 줄어 들었으며 그 얼마 안되는 왕족들 중 왕의 사촌에 해당하는 재무관 헤시안의 부재는 의식을 연기할 만큼 큰 문제였나 보다. 하지만 어차피 사인이란 것은 형식에 불과 하다. 그러니 일단 의식을 치르고 이후 헤시안이 돌아오면 문서의 비어 있는 공간에 서명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루센은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잖아도 그 문제 때문에 왕하고 몇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보다. 내가 비록 명분상 에드바라하의 대표이지만 아는 것이 없으니 대부분의 공적인 대화는 왕과 루센이 한다. 이번 문제로 루센은 굉장히 기분 나빠 하는 것 같았지만 왕은 헤시안의 서명이 없는 서약 문서는 소용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루센이 스트레스를 받는 탓에 수업은 중단 된지 며칠 됐다. 뭐 나야 편하긴 하지만 초조한 얼굴의 루센을 보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의식이 연기 되어서 섭섭한가?" 중단된 수업대신 혼자 느긋하게 간식타임을 가지던 나는 갑작스런 왕의 방문에 마시고 있던 차를 내뿜을 뻔했다. 정말이지, 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버릇 좀 고쳤으면 좋겠다. 얼른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하는데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병사들이 당황하는 얼굴이 보인다. 나도 이렇게 놀랬으니 병사들이야 오죽할까? 왕은 언제나 그랬듯 수행인원 하나 없이 허리에 장검 하나 차고 간편한 차림으로 혼자 왔다.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문을 닫고는 테이블 맞은 편 의자에 털썩-소리가 나게 앉는 것이다. "아- 오늘도 늙은이들 잔소리 듣느라 피곤한 하루였지. 더구나 네 예쁜 보호자가 쫑알쫑알대는 탓에 두통이 도지는 것 같다구. 대체 몇 번을 얘기해야 하는 걸까. 난 헤시안이 오지 않으면 의식을 할 생각도 없는데 말야." 루센의 이야기다. 이런...루센, 그렇게 나한테 주의하라고 하더니 왕한테 무슨 소릴 한 거야?! 새삼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루센이 의식을 연기하지 말아달라고 매일같이 찾아가는 게 기분 나빠서 나한테 따지러 온 건가? 아니, 나한테 따져봤자 아무 소용없을 텐데...그럼 왜 온 거지? 화풀이 인가? 뻣뻣해지는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여 미소 지으면서 왕에게 차를 권했다. 유리병에서 쿠키와 말린 과일을 몇 개 집어 먹기 좋게 그릇 위에 올려 놓았다. 나도 맞은 편에 앉으며 방긋거리고 있긴 했지만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른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너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네가 비록 평민의 아이라 하나 에드바라하의 대표는 자네이니까 내 의견을 확실히 알려두고 싶은 것뿐이야."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얼굴로 차를 마신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인가. 루센에게 듣기로 왕이 거처하는 곳에서 여기까지는 걸어서 오는 데만 한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뭐 말을 타면 금방이겠지만 그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들리는 말로는 대부분의 정치를 재무관 헤시안이 하고 왕은 땅 따먹기만 하러 다닌다는 우스개도 있다고 한다. 정말 왕은 전쟁밖에 할 일이 없는 걸까....하고 루센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것이 떠올랐다. 으음.... 내가 머릿속으로 무슨 고민을 하건 말건 이 왕이란 작자는 여유롭게 말린 바나나를 씹으면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엔 높은 성벽과 석양에 물든 붉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아 그닥 볼 만한 건 없었다. "헤시안에 관한 건데......" 문득 생각난 것처럼 왕이 입을 열었다. "사실, 연락이 되질 않아..." 드물게 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무슨 소린가 해서 왕의 얼굴을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받은 연락이 퀘도의 국경선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부야. 퀘도 너머의 지역은 아직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아 우리로선 헤시안이 어디로 갔는지 알 방도가 없어. 이미 정찰대를 보내긴 했지만 퀘도와의 국교문제도 있고 잘 모르는 땅을 간다는 사실이 불안할 뿐이지." 아니 대체, 제하는 왜 이런 낯선 곳에서 여행이란 걸 생각한 거냐. 단순히 머리 식히러 간 것 치고는 좀 이상하다. 무언가 생각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과 연락이 안될 정도로 멀리까지 나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정찰대는 유능한 인재로 구성되어 있고 헤시안에게는 열 명 남짓한 수행원들도 딸려 있다. 모두 사막에서도 한 달을 버틸 놈들이지. 헤시안 스스로 퀘도를 넘은 것이니 녀석에게도 뭔가 생각이 있어서일 거야. 영리한 놈이니 알아서 돌아오겠지. 하지만...역시 의식이 연기된 건 섭섭하려나?" 왕은 웃으며 말린 바나나를 오도독오도독 씹어먹었다. 나로선 "아, 아뇨. 괜찮습니다."라고 땀을 빼며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낮에는 제법 햇살이 들어오는 편이지만 해가 약할 때에는 금새 어두워지는 방이었다. 아마 창밖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성벽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약해진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주황의 빛줄기가 녹색 양탄자위로 쏟아진다 싶더니 어느새 하늘은 군청색의 어두운 빛깔로 돌아가 밤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의 등잔에 불을 붙였다. 왕은 가만히 앉아서 간식만 축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이미 어두워진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말이 많다 싶다가도 어떤 때는 지루할 정도로 말이 없는 왕이었다. 처음엔 그 침묵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익숙해지니까 차라리 편했다. 빨리 제하가 돌아와야 할 텐데.... 노랗게, 붉게, 오렌지 색으로 빛나는 등잔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쿠키를 입에 넣고 와삭대고 있었다. 쿠키 한 병이 바닥나고 있을 즈음 왕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젤리를 입안에서 굴리다가 꿀떡 삼켜버렸다. 아, 아까워라... "예전에 나와 만난적 없나?" 왕이 턱을 괴고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진유현과 똑같은 저 얼굴에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제 와서 뭘, 그 얼굴은 지겹게 봐 왔는 걸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럴리가요." 하지만 왕은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내 얼굴의 윤곽을 만졌다. 무의식 중에 쳐내려다가 지난번에 그랬던 일이 생각나 가만히 있었다. 남이 내 얼굴을 만지는 건 꽤나 간지러운 일이라서 목을 움츠리는 것까진 참지 못했지만 왕은 그게 재밌는지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흠... 이상하단 말이야. 왜 이렇게 낯익지. 윤승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줄 알았다. 진정, 진정하자. 왕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뭐 그리 이상하다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왕이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진유현의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듣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렇게 놀랐던 걸까. 남의 턱을 자기 것마냥 쓰다듬던 왕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쉰다. 그리고 뭐가 불만인지 조금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묻는다. "기억력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어째서 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걸까. 분명히 익숙한 얼굴인데 말야." "그냥....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얼굴이지 않습니까. 지나가던 평민 소년들과 잠시 헷갈리셨을지도 모르지요." 처음에 긴장되던 것도 한동안 이렇게 같이 있으면 익숙해지고, 또 왕이 불쑥 찾아오면 긴장하다가도 같이 있다 보면 익숙해지고...그러다가 몇 마디 주고받다 보면 그날의 쉬는 시간은 끝. 최근 왕과의 영양가 없는 만남은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곤 했다. 그래도 오늘은 비교적 떨지 않고 얘기하는 편이다. "그럴까?" 왕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또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런데 그거 아나?" "예?" "뮤디오 윤승호 에드바라하...라는 이름 지독히도 안 어울려."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 나갔다. 황급히 사과를 했지만 왕은 됐다며 같이 웃어 보였다. 솔직히 윤승호란 이름도, 뮤디오나 에드바라하라는 성과 가문의 이름도 나쁘진 않았지만 두 개를 합쳐놓으니 엄청 이상한 어감이라는 것은 나도 항상 느끼고 있었다. '가명을 쓸 걸 그랬나'하고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으니까. "웃으니까 훨씬 낫군. 맨날 혈액순환 안되는 노인네 마냥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건강에 안 좋아." 저거 농담인 거겠지? 머쓱한 얼굴로 "예에"하고 대답했다. 유리병 안의 쿠키도 다 바닥나고 차도 다 떨어졌다. 먹거리가 떨어졌지만 왕은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않는다. "아, 그리고...." 왕은 고개를 까닥거리더니 허공 한 번 보고 내 얼굴 한 번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식적인 자리만 아니라면 말을 놓아도 좋아. 간단히 '유디스'라고 부르면 돼." 파격적인 대우다. 왕에게 반말이라니 허락 받지 않으면 같은 왕족의 손 윗사람들도 함부로 반말을 쓰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왕과 말을 트는 아디움의 위치는 굉장한 위세를 지닌다고 루센이 말해 준 것이다. 일개 귀족가의 아들에게, 그것도 평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반말을 허용한다니 정말로 왕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다. 왕과 잘 지내면 나도 좋고 에드바라하에도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기엔 왠지 눈치도 보이고 껄끄럽기도 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상해. 네가 나한테 존칭어를 쓰는 게 왠지 어색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왕이 그렇게 말하고 찻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그러다가 잔이 빈 것을 알고 다시 주전자를 따라보지만 그 안도 텅 비어 있었다. "이런."하고 혀를 찬 왕이 "하인을 부를까?" 하고 묻길래 "괘,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그래, 너는 뭔가 약칭 같은 거 없나? 내가 아디움을 아딘이라고 부르듯이 친구 사이에서 부르는 약칭이나 애칭 말야. 자네의 보호자들은 윤승호라고 안 부르고 더 짧게 부르던데..." "승호...라고만 부릅니다..." "아, 그래. 나도 그렇게 불러도 되겠지?" 왕은 눈을 반짝 빛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 라노나 루센들이 하도 윤승호, 윤승호하고 딱딱하게 부르길래 승호라고 부르라고 말했던 것이 여기서는 약칭으로 받아들여졌나 보다. 그런데, 설마 왕은 그것을 부러워했던 걸까? 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들었다. "예. 영광입니다." 나도 입 발린 말이 참 많이 늘었다. "말 놓으라니까. 자네가 말을 놓으면 난 더 편하게 말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 거기서 뭘 더 편하게 말한다는 건지. 조금 우스워지는 기분으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왕은 기분이 좋은지 방긋 웃는다. 저리 웃는 걸 보면 딱 내 또래의 녀석인데 어디서 그런 무시무시한 면이 나오는지 나로선 도통 모르겠다. 몇 마디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 받다가 왕이 모레쯤 같이 산책 나가자고 제의해 왔다. "말을 놓아요? 게다가 산책이라고요오오?!!!" 루센의 반응은 폭발적인 것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는데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다. 어제 왕이 루센에 대해 불만스럽게 얘기하더라...라고 말했을 때만해도 얼굴이 핼쑥해 보였는데 지금은 놀람을 넘어서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만면에 홍조를 띠며 엄청 기뻐하는 표정을 보여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단해요. 승호! 언제 그렇게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던 거에요? 아아, 잘됐어요. 의식이 연기되어서 불안했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루센이 너무 기뻐하며 칭찬을 하자 괜시리 쑥스러워진 나는 멋쩍게 웃으며 콧잔등을 긁었다. 그러나 옆에서 조용히 얘기를 듣던 테이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런데 왕을 믿을 수 있을까? 왕의 산책이라면 수행원이 최소 수 십에서 수백 명은 따라가야 정상이야. 그런데 그 왕이 그렇게 줄줄이 하인들을 데리고 돌아다닐 것 같진 않고. 최악의 경우 산책을 핑계로 승호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도 무시하진 못해." 정말로 오랜만에 테이그가 입을 열었다. 테이그는 그 덩치와 우락부락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감색 옷감에 은실로 수가 놓여 있는, 매우 부드러워 보이는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 자체는 좋아 보이지만 이 무더위와는 상극인 차림이었다. 그 증거로 테이그는 연신 땀을 훔치고 있었고 덕분에 인상도 더 험악해 보였다. "왕이 에드바라하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승호에게만은 매우 호의적이에요. 그러니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승호를 산책에 초대했다기엔 무리가 아닐까요. 그냥 말 그대로 산책하러 간다고 보는 게 제일 무방해요." 테이그가 루센의 말에 동의하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팔짱을 낀다. 무표정한 얼굴에 험악함이 다소 누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더워 보였다. 좀 편히 입어도 될 것을 테이그는 귀족들에게 얕보일 수 없다며 굳이 그 불편한 옷을 꼭꼭 챙겨입는 것이다. 천상 산 사나이로 보이는 테이그에게 목까지 오는 셔츠에 꽉 끼는 장화, 두세 겹의 수트는 그야말로 쥐약. 입고 있는 사람도 괴롭겠지만 보는 입장도 편하진 않다. 팔목까지 오는 흰 블라우스를 잔뜩 걷어 부치고도 더워서 헥헥 대는 나에 비해 묵묵히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테이그는 진정 사나이답게 보였다. 루센과 테이그는 무언가 심각한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정치적인 것이라 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창 밖을 보며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마침 활짝 열린 창문에선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열기 오른 얼굴을 잠시나마 식혀주었다. 해는 중천에 걸려 있었고 창 밖의 전망을 가로막는 성벽 위에선 병사들의 투구가 번쩍번쩍 빛난다. 그러고 보니 교대할 시간인지 병사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 그렇다면 정오가 훨씬 지났다는 건데 그 에드바라하의 잔소리꾼 삼인방이 오질 않네? 일주일에 네 번 정도는 그 깐깐한 시종들한테서 재미없고 까다로운 예절수업을 받는 게 내 일과 중 하나였다. 그 사람들, 최근 바쁜 건지 아니면 내가 하도 지겨워 하니까 포기한 건지 요즘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루센의 수업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지금처럼 시간 날 때면 나한테 찾아와 이것저것 놀아주긴 했지만 의식도 연기 된 마당에 뭐가 그리 바쁜지 최근 들어 뜸하게 찾아 오는 건 사실이다. 이 커다란 성에서 루센과 테이그가 나랑 놀아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혼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규칙적으로 아침 저녁 머리치기를 하고 있지만...아, 요즘은 연속 동작까지 진도가 나갔지....아무튼 아무튼... 어린이용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간식을 축내는 거 말고는 별다른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다. 루센은 내가 할 일이 굉장히 많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가르쳐 줄 사람이 안 오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날씨는 덥고 할 일은 없었다. 정말 너무나도 평화스러운 하루하루가 꿈같이 지나가는 것 같다. 이쯤 되니 슬슬 집이나 학교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 오르지만 이대로 이 편한 상황에 몸을 맡기고 싶은 기분도 든다. 집에 돌아가 봤자 나 혼자뿐이고 학교에 가봐야 맨날 얻어맞기만 하고 그 지겨운 교실에서 사는데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책들을 공부해야 한다. 차라리 여기서 평생...... ......미쳤어.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땀이 흐르는 등위로 한기가 흘러간다. 점점 이 괴상한 세계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록 해답은 떠오르질 않고 머릿속이 복잡해 진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비우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확실히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 이 정도는 편해져도 되겠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루센과 테이그를 뒤로 하고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혼자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난 밤색의 말은 푸르르 거리며 아는 체를 했다. 지난번 평원에서 왕과 만날 때 타고 갔던 그 말이다. 그 후로도 종종 마구간에 찾아와 이 녀석을 타면서 놀곤 했는데 최근 빈둥대느라 일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왕은 예전의 그 백마를 끌고 서 있었다. 백마라니, 완전 개 폼이다! 하고 괜히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왕을 따라 나섰다. 마구간지기가 얼굴이 새하얗게 되어서 연신 굽신거리는 게 보인다. 나와 루센이 말 좀 타려고 마구간에 오면 화려한 옷차림에 딱딱한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말을 내주던 그였다. 지금 옷차림의 요란스러움만 보면 왕보다도 더 화려한 마구간 지기였지만 저렇게 겁에 질린 표정을 보니 좀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왕과 마주칠 때의 사병들이나 하인들은 늘 저런 표정이었다. 차라리 수행원들을 줄줄 끌고 다니며 "왕이 납시오~"라고 광고라도 했으면 피하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피하던지, 아니면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왕을 맞을 테니 좀 더 편할 텐데, 이렇게 무턱대고 아무 때나 드나드니 아랫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냐구. 제법 익숙한 폼으로 말 위에 올라타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앞에 가던 왕이 자기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한 손에 바구니 같은 게 들려 있고 그 안에서 예쁜 무늬의 천이 비죽이 나와있는데 저거 설마 도시락? "성 밖으로 나갈 거야. 네 수행원에게 얘기는 했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왕을 바라봤다. 간편한 차림에 장검 하나를 허리에 찬 왕은 소풍 나가는 어린애마냥 볼에 홍조까지 띠고 있다. 그러고 보니 호위하는 병사가 하나도 없다. 성밖으로 왕이라는 사람이 혼자서, 물론 나도 있지만 나는 호위에 도움이 안되니 빼고...아무튼 이렇게 단출한 차림으로 나다녀도 되는 거야? 궁성을 가로 질러 남문 쪽으로 가는 우리들을 향해 불안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사병은 물론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는다. 점심시간이 지난 왕궁은 한가했다. 말 위에서 바라보니 시야가 탁 트이고 바람도 한결 다르게 느껴진다. 가끔 지나가는 병사들이 당황하여 거수경례를 하기도 하고 하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허겁지겁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저 멀리 사계 정원이 보였다. 한가운데에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가 보고 있기만 해도 시원스럽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널찍한 연무장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무성한 풀숲 너머 커다랗고 오래된 건물이 멀찌감치 있는 것이 보인다. 그게 왕이 거주하는 본성이다. 이렇게 보니 꽤 멀다. 그렇다면 왕은 거의 매일 이 거리를 말을 타고 달려온다는 거다. 뭐 하긴 산책코스로 하기에 나쁘지 않은 라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떨어져서 걸으면 내 목소리가 안 들리잖아. 왜 점점 멀어지는 거야?" 왕이 저 만치서 퉁명스레 말했다. "아 네네!" 하고 황급히 왕의 곁으로 말을 몰아갔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혼자 말을 타는 것엔 익숙해 졌지만 남과 함께 나란히 말을 모는 것에는 익숙지 않다. 말과 말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는 게 의외로 힘들어서 왕의 말과 내 말의 배끼리 부딪힐 까봐 노심초사 했다. "존댓말 쓰지 말랬지.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내가 쑥스러워진다구." 이래서야 원, 친구와 말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 말투가 편해지니 인상도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게다가 예전의 진유현을 생각나게 해서 조금 그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웃으며 왕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갔다. 따가운 햇볕아래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쾌청하게 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을 말 위에서 있었지만 나는 내 처소근처에서 보지 못한 다양한 정경, 그러니까 작은 연못이라든지 거대한 동상 같은 것들을 보느라 힘든 줄도 몰랐다. 늦여름의 태양에 반사되는 성 내부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남문 입구 앞에 도달하자 왕이 병사들에게 지시하는 게 보인다. 병사들은 이미 익숙한 일이라는 듯 군말없이 성의 문을 열어 주었다. "호위병이 없어도 괜찮나요?" 무심결에 걱정스런 마음이 툭 튀어 나왔다. 남문이 열리며 해자 위로 다리가 내려졌다. 그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왕은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얼굴로 웃어 보였다. "존댓말. 앞으로 존댓말 한마디 할 때마다 이마에 알밤 한대다." "에...그....." 당황해서 다리에 힘을 주니 말이 푸륵 댄다. 옆구리를 조이지 말라는 무언의 항의 같다. 나는 괜히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주면서 우물쭈물 댔는데 왕은 앞을 바라보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내가 지금 혼자라고 생각해? 보이지 않는 저 풀숲너머, 성벽 위. 나무 위, 어쩌면 저 강둑 아래에도.... 나를 지키는 걸로 가문의 존속을 보장 받는 녀석들이 포진해 있으니 안심해도 돼. 어쩌면 너의 그 충실한 수행원들도 그 틈에 끼여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고 왕은 쿡쿡 웃었다. "성을 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성 안에 있는 것과 다름 없어. 몇 개의 마을에 해당하는 영토가 더 큰 성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지. 이 근처는 내 사냥터이고 산책지에 불과해. 물론 나를 노리는 머저리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은 저 덤불 속의 누군가가 알아서 해줄 일이라구." 경쾌하게 웃으며 왕이 말의 속도를 높인다. 나도 허겁지겁 따라 갔지만 근처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소리에 괜히 기분이 찝찝해졌다. 왕은 루센이나 테이그가 이 근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했지만...루센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혀를 차며 왕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산속 한가운데에 호수라니 기묘한 느낌이었다. 성의 남문과 이어진 산길을 따라 달려서 도착한 이곳은 산짐승도 많았고 풍경도 굉장히 좋았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뭇가지 덕분에 햇빛이 약하다. 조금은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숲에서 바라본 호수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서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마냥 착각에 빠졌다. 참, 여기 다른 세계가 맞지. 말에서 내려 호수의 물을 거침없이 마시는 왕을 보고 나도 따라 물을 마셨다. 끈적거리는 땀이 단번에 날아갈 듯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었다. "우아 시원하다." 나도 모르게 내뱉는 감탄의 말에 왕이 빙그레 웃어 보인다. 완전히 경계심을 상실한 나는 왕과 둘이 호수에 발을 담그고 앉아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바구니엔 역시나 샌드위치며, 호밀빵, 말린 감자, 크림치즈 같은 먹거리가 잔뜩 담겨 있었다. 토마토와 복숭아도 마치 장식처럼 예쁘게 놓여 있었다. "주방장한테 간단히 요리하라고 했는데 상이 휘어지도록 만들었더라구. 먹기 편한 걸로 다시 만들라고 했더니 울상을 짓더군." 마치 악동처럼 킥킥거리며 웃는다. 나는 묘한 이질감에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편해 보이는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부치고 물장구를 치는 저 모습이 어딜 봐서 정신나간 왕이라는 걸까. 가만히 있으면 좀 날카롭긴 하고 살짝 무서운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장난치는 모습은 완전 내 또래의 소년이다. 나도 참. 엊그제만 해도 그렇게 불편해 했으면서 어느새 긴장감을 늦추다니... 하지만 말을 트고 이렇게 놀다 보니 정말 왕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루센은 거듭 주의하라고 당부했지만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닌가. 왕은 이렇게 어린애 같은데. 저렇게 진유현과 같은 표정으로 웃는데... 순식간에 기분이 우울해졌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래도 아주 약간 유현이랑 차이점을 찾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키라든가 피부색 같은 거. 단정하던 그 녀석에 비해 조금 흐트러지고 무방비한 모습 같은 거. 그런 조그마한 차이점마저 없었다면 정말 괴로웠겠지. 쓰게 웃으며 시선을 호수로 돌렸다.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더니 더위가 싹 달아났다. 오히려 으슬으슬 추워지는 기분이 들어 발을 빼고 도시락 바구니에 있던 예쁜 천으로 물기를 닦았다. 옆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니 천국이 따로 없다. 그 상태에서 잠깐 졸았던 것 같다. "승호야 윤승호.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유현아 졸려 죽겠어 조금만 더 잘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말이 되지 못하고 입안에서만 달싹거렸다. 그러나 곧 유현이가 나한테 저렇게 말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눈을 번쩍 떴다. 유디스왕이 눈 앞에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 당황해서 허겁지겁 일어나다가 뒤통수를 기대고 있던 나무에 찧었다. 그 바보 같은 모습에 왕이 킥킥대더니 "얼른 세수하고 와."라고 말한다. 깜짝 놀랬다. 승호야....라니, 언제 그렇게 내 이름을 부르는 데에 익숙해진 거지? 날 승호라고 부르는 건 하루 밖에 되지 않았는데. 덕분에 깜박 유현과 헷갈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라노도 "승호야"라고 불렀다. 하지만 루센은 아직도 "승호"라고만 부른다. 접미사로 '~야'가 붙는 것은 이쪽 세계에서도 흔한 일인가? 윽...그러고 보니 글공부 안 한지가 한참 돼서 모르겠다. 차가운 호수의 물에 얼굴을 담갔다. "푸하-"하는 소리를 내며 물속에서 얼굴을 꺼내니 이제야 정신이 개운해지는 것 같다. 저만치서 왕이 말 위에 올라 타서는 "빨리 와! 늦었어!"라고 말한다. 한숨이 새어 나온다. 멍청하게 왕을 옆에 두고 쿨쿨 자다니. 왕의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다. 한숨 잤더니 기분이 개운해졌다. 개운한 기분으로 말을 타고 달리니 칠칠 맞게 졸았던 일 따윈 깨끗이 잊고 있었다. 왕은 어디론가 자꾸 높은 곳으로 말을 몰았고 나는 저물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적당한 속도로 말을 몰았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갈 수 없지." 활짝 웃는 얼굴이 개구쟁이 같다. 산의 지형은 점점 험해져서 말의 속도를 천천히 늦추는 수 밖에 없었다. "아까 뭔가 늦었다고 하지 않았어?" 은근슬쩍 반발도 자연스럽게 나갔다. 설마 유치하게 진짜 알밤을 먹이진 않겠지만 왕이 반말하라니 얼른 익숙해져야겠다. "해가 져버리면 못 보게 되거든. 이맘때가 딱 좋은 시기지." 험하지만 가파른 산길은 아니었다. 토각토각 말발굽소리가 조용한 숲을 울렸다. 숲 안에 있으니 나무가 햇볕을 막은 탓에 마치 해가 다 져버린 것처럼 어둡다. 산길을 말없이 올라가는 왕의 등은 왠지 흥분되어 보였다. 뭔가 재밌는 거라도 보여주려는 걸까. -토각 토각 토각 숲이 열리고 있었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이었지만 마치 숲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눈 앞의 광경은 굉장히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숲을 빠져 나와 몇 발자국 안 가서 나와 왕이 서 있는 곳은 까마득하게 높은 낭떠러지였던 것이다. 낭떠러지 밑의 풍경이 너무 멀어서 아득하게 느껴진 탓에 숲이 열린다는 착각을 한 것이다. 이 산이 이렇게 높은 산이었나?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 멀리, 너무나도 멀리 구름에 산허리가 감싸인 산맥이 아련히 보인다. 그리고 그 넓은 대지에 펼쳐진 것은 금색으로 출렁거리는 황금의 바다였다. "우와..." 석양에 반짝거리는 벌판은 온통 황금색이었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마치 물결마냥 느껴진다. 눈부셔서 미간을 찡그렸지만 일그러진 시야에 들어 오는 것은 황금으로 된 대지가 출렁이는 진기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것은 황금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벼다. 사실 벼인지 밀인지 잘 모르겠지만 금색의 식물은 곡식임에 틀림없었다. 누런 이삭이 주황색의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지고 있는 햇빛이 정면으로 눈을 치고 들어와 눈이 착각을 일으키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착각이든 환시든 상관없었다. 단순한 곡식의 알갱이를 이토록 아름답게 느끼는 건 언제나 머릿속에서 추억하던 할머니네 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할머니네 논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더 넓고 더 아름답고 더 생생했다. "예쁘지?" 그제야 옆에서 왕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렸다. 역시 정면으로 석양빛을 받은 왕의 옆얼굴은 오렌지빛으로 상기되어있었다. 왕은 낭떠러지 저 멀리에 시선을 준 채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에 봐도 멋진 광경이지만 역시 이렇게 석양을 받아 반짝이는 걸 이 각도에서 바라보는 게 제일 예뻐. 비 온 뒤에 보는 것도 굉장하지. 벼이삭이 물방울을 머금어서 반짝반짝하거든." 저 멀리 옹기종기 마을의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집집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말 할 수 없는 아늑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름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낮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노을이 지는 절벽 위에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처음에 여기를 발견했을 땐 깜짝 놀랐지. 보물섬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나는 혼자 여기를 [황금의 대지]라고 이름 붙였어. 아디움이나 헤시안이 알면 유치하다고 놀릴 것 같아 말 안했지만 누군가에게는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 이게 내 땅이다. 내가 다스리는 아름다운 영토다...라고 말하고 싶었어." 왕의 옆모습은 자랑스러움과 당당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것도 석양의 착시현상인 걸까. 저렇게 행복해 보이고 쑥스러워하는 표정은 유현이의 얼굴이 아니다. 유디스의 표정인 것이다. 왕이야. 그래 이 사람은 왕이야. 아무리 어려도, 유현이랑 닮아 보여도, 아이처럼 웃어도....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왕이, 유디스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전쟁터에 나가면 내가 변하는 게 느껴져." 잠시 나를 바라보던 왕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적의 공급원을 끊는다고 마을을 폐허로 만들고 우물에 독을 풀지. 수확 때가 되어서 무거운 벼이삭을 잔뜩 매달은 논에 불을 질러. 어린애와 노인을 죽이는 경우도 다반사야."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높낮이는 없었다. "싸우고 있을 때는 적도 아군도 보이지 않아. 폐허가 된 땅에서 용케 피어 있는 새싹을 발견하면 바로 짓이기고 싶어지지. 타인의 피를 보아야 내가 승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거야. 그런 주제에 이렇게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지. 엄청 모순 되지 않아?" 절벽 위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유디스 왕은 슬퍼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그냥 덤덤하게 얘기 할 뿐 후회나 슬픔 같은 건 잘 모르겠다. 그저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러더군. 뻔뻔스러운 왕. 잔혹하고 전쟁에 미친 왕. 제멋대로에 피를 좋아하는 악귀 같은 왕. 난 정말 그런 왕일지도 몰라." 무슨 표정인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쓴웃음을 짓는 것 같기도 하고...어찌 보면 괴이하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해는 져서 유디스의 얼굴엔 음영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 얼굴이 나를 향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들이 이따금 꼬리를 흔들며 몸에 달라붙는 벌레를 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왕의 얼굴에서 비로소 진유현의 그림자가 걷힌다는 기분이 들었다. "전쟁은......"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쟁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들었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곡물을 황금에 비유할 수 있는 왕이라면 분명 좋은 왕일 거에요." 시선을 피하고 태양이 모습을 숨긴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하려니 조금 쑥스러웠다. 괜히 뒤통수를 긁적이며 유디스의 안색을 살피는데 그 표정은 무얼 생각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유디스가 손을 뻗어 왔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이 턱뼈를 간질인다. 그 손이 얼굴선을 타고 올라가 이마에 닿는가 싶었다. -따악! "아야!" 이마에 정통으로 알밤 한대를 얻어 맞았다. 어찌나 맵게 때렸는지 자그맣게 혹이 나 있다. 나는 이 유치한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왕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 한다. "존댓말." 그러고는 말머리를 돌려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른 가자. 벌써 해가 졌다구." 나는 결국 내 말에 왕이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는 데에만 안심을 하고 혹이 난 이마를 부여잡으며 하얀 말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 산을 내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참, 유현아 너 그거 아냐? 가을 논은 되게 예쁘다? -그래? 너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다고 했지. -어, 그냥 봤을 땐 잘 몰랐는데... 어렸을 때 산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서둘러서 집에 들어간 적 있었거든. 산에서 내려오다가 해가 지는 논을 본 적이 있는데 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게 되게 예뻐. -헤에. 그래? -응. 그래서 나는 [금색의 땅]이라고 혼자 이름도 붙여줬는 걸. -우왓! 그거 뭐야 엄청 유치해. 우하하하!!! -뭐야! 남은 기껏 얘기 해줬더니! 죽을래! 웃지마! "헉--!!" 꿈이었다. 봄 소풍 가던 버스에서 차창밖에 비치는 모내기 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웃고 떠들며 장난치고 있었다.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꿈을 통해 느껴졌다. 뭐야. 왜 갑자기 그런 일이 떠오르는 거냐. 이제 와서 왜 그런 좋았던 시절의 꿈 따위가......기껏 유디스의 얼굴에서 진유현의 그림자를 떼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꿈을...... 유디스랑 같이 산책을 하고 예쁜 논을 보았다. 저녁에 유디스랑 같이 식사를 하고 루센을 만나서 몇 마디 얘기를 하고... 피곤해서 바로 곯아 떨어져 잤지만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다고. 정신이 반쯤 깨어 있었지만 눈은 뜨질 못하고 있었다. 온몸이 물먹은 솜마냥 늘어졌다. 기분 좋은 하루를 이상한 꿈으로 망친 것이 기분 나빴지만 너무 졸립고 피곤해서 다시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비명소리 같은 것이 잠결에 아련히 들린다. 나는 숲 속 어느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의 바로 아래에 있는 숲이다. 한 번도 와 본적은 없지만 창문 위에서 바라봤던 것 보다 꽤 울창했다. 하늘엔 달도 없이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곳엔 세 명의 남자가 죽어 있었다. 셋 다 검은 옷에 복면을 하고 있었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남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네 번째 남자를 향해 다가가는 두 개의 인영이 있었다. 루센과 테이그였다. "너는 어느 가문의 사주를 받고 왔지? 아오네르? 루탄? 자이카나?" 저렇게 음산한 목소리의 루센은 처음 본다. 표정도 섬뜩하리만큼 차가웠다. 테이그는 언제나와 같이 험악한 인상이어서 위화감을 못 느꼈지만 루센의 다른 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흥, 내가 그걸 말할 성 싶으냐?" 그렇게 말하더니 남자는 이빨을 악 다물었다. "이런!" 테이그의 목소리와 함께 네 번째 남자는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죽었다. 루센은 혀를 차며 죽은 남자의 몸을 뒤진다. 그러나 남자의 몸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루센이 한숨을 쉰다. 옷자락에 시커먼 피가 묻어 있다. "벌써 아홉 번째로군." "왕한테 경비를 늘려달라고 한지 일주일도 안되어서 이런 꼴이라... 아무래도 내부사정을 잘 아는 가문이 보낸 것 같아." "그렇다면 역시 자이카나 일까? 증거가 없으니 뭐라고 하기도 쉽지 않군. 승호도 참 큰일이야. 앞으론 식사 체크도 좀 더 신경 써야겠어." 나? 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루센과 테이그는 피 묻은 옷을 털어내더니 성의 경비원을 불러 시체를 처리했다. 경비원들이 놀라지도 않은 걸 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왜 루센들이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눈 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살해현장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게 느껴진다. 저렇게 차가운 얼굴의 루센이라니 정말 이상하다. 피곤하다. 엄청 피곤하다. 뭔지 몰라도 기분 나쁘다. 간밤의 꿈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현이 나온 건 그렇다 쳐도 왜 멀쩡한 루센과 테이그를 살인자로 만드냐고. 오늘 아침에도 함박웃음을 띠며 같이 식사하자고 달려온 루센의 모습을 보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센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이것저것 마구 집어 먹었는데 그런 모습마저 씩씩해 보여서 나는 저절로 배가 불러지는 것 같았다. "루센 요즘 잠 못 자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일거리가 밀려 있어서 그래요. 빨리 에드바라하가 정식으로 인정 받고 나면 왕궁에 다른 에드바라하 사람들도 들어오고 일 분담도 돼서 더 편할 텐데 말예요."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요?" 성안의 수백 명의 왕족과 귀족들한테 문서를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장관들과 정치적인 얘기를 한다거나 카이들과 연락을 취하는 등의 일은 전부 루센과 테이그, 그리고 에드바라하 삼인방이 맡고 있었다. 왜 그런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현대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새로 들어올 에드바라하에게서 편지 한 장 못 받으면 그것에 대해 앙심을 품는 다는 거다. 아직 어린애 수준의 읽고 쓰는 실력이지만 편지를 베끼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뭐 도와줄 게 없을까 하고 물어 봤지만 닭다리를 뜯는 루센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책상 앞에서 펜을 들고 씨름해야 할 일은 이제 얼마 없어요. 이대로 무사히 의식만 끝나면 카이님한테서 보수도 잔뜩 뜯어낼 거니까 그렇게 미안해 할 거 없어요." 웃으며 반쯤 농담으로 말하지만 눈 밑이 시커먼 것이 안쓰럽다. "우웩-!" 후식으로 나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루센이 갑자기 입을 틀어 쥐며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에그 참, 천천히 먹을 일이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작게 중얼거리며 루센은 새파란 얼굴로 내 방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몇 마디 하더니 다시 "우욱!"하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 가로 달려 갔다. 이상하다. 화장실이라면 여기도 있는데? 등이라도 두드려 주려고 쫓아가는데 병사들이 막는다. 어라? 하면서 왜 막냐고 따지니까 젊어 보이는 한 병사가 사무적인 얼굴로 말했다. "루센님께서 금방 돌아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식사는 전부 버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엑? 버려? 저 아까운걸? "잠깐! 나 아직 덜 먹었다고! 이봐 이봐, 물이라도 마시자 좀!" 두 병사는 음식은 물론 마실 물까지 전부 버렸다. 병사들의 갑작스런 난폭한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무슨 일이지?" 유디스였다. 결국 그날 아침식사에 나온 후식은 상한 걸로 판명되어 요리사는 추방당하고 음식을 내온 하녀들은 잘렸다. 나는 고작 음식 잘못한 정도로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더니 루센은 오히려 감옥에 안간 게 다행이라고 하는 거다. 아침의 그 소란스러움을 본 유디스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고 파리한 안색의 루센과 진지하게 몇 마디 나누더니 대뜸 이제부터 식사는 자신과 같이 하자는 거였다. 난 좀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지만 왕과 한 상을 쓴다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에드바라하 입장에선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밥 먹을 때마다 불편해서 소화나 제대로 될까 하는 걱정도 든다. "네가 먹을 필요까지 있었나?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봐도 됐을 텐데." "이미 확인이 끝난 음식물이었습니다. 단지 예감이 이상해서 먹어봤을 뿐인데 승호님에게 별 일 없어서 다행입니다." 지금 저렇게 시선을 숙이고 공손히 얘기하는 루센과 테이그는 사실 귀족의 자격으로 이 성에 들어와 있는 거다. 내 보호자 겸 수행원이랄까. 왕은 루센과 테이그가 길드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평민인 내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에드바라하에서 보낸 진짜 귀족이라고 생각하게끔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했으니까. 그런데 유디스와 루센의 대화를 듣자니 상한음식 가지고 너무 유별을 떠는 거 아닌가 싶다. 뭐 에드바라하의 둘째 아들이 배탈이라도 나면 큰일이긴 하겠지만... ...우와 이런 과보호, 진짜 익숙하지 않다. 루센이 뭔가 더 얘기를 하려다가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문다. 잔뜩 토악질을 하고 난 그 얼굴은 초췌해서 무진장 미안했다. 원래대로라면 그 상한 음료는 내가 마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이래저래 루센에게는 폐만 끼치게 된다. 유디스는 루센을 묘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이만 가보라고 손짓한다. 루센과 테이그는 왕에게 다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루센이 슬쩍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나를 향해 웃는 것을. 그래...왕과 함께 식사라니 루센이 좋아하니까 소화불량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거 같다. "아직 아침 덜 먹었지? 나랑 먹자." 생긋 웃으며 유디스가 손목을 잡아 끈다. 결국 이제껏 내 방에서만 식사를 해오던 나는 달리기를 해도 될 만한 긴 식탁에서 매일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되었다. 밥 한 번 먹으려면 본 궁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게 큰일이었지만. 서서히 가을이 다가 오는지 아침 저녁으로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무더위 때문에 고생스러워도 하늘이 점점 청명해지는 것이 계절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해주었다. 본 궁 입구에 서 있는 거대한 동상은 크기는 했지만 정말 멋대가리 없는 디자인이었다. 유디스의 할아버지인 게비도의 동상이랬는데 유디스와 닮은 곳은 하나도 없는 얼굴에 콧수염과 사자갈기 같은 머리 모양이 묘한 언밸런스를 이루고 있었다. 미술엔 문외한인 나였지만 솔직히 이 동상은 센스 빵점이다. 하지만 한가지 실용적인 면에서는 큰 점수를 주고 싶은데 한낮의 뙤약볕에서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그 앞에 앉아서 탁 트인 본 궁 앞 광장을 바라보면 시원한 분수대가 무지개를 만들며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게비도 왕의 동상을 그늘용도로 취급하다니 크게 경을 칠 일이지만 자세히 보면 본 궁으로 들락날락 거리는 귀족이나 하인들도 땀을 훔치면서 은근슬쩍 그늘 안으로 들어와서 햇빛을 피해 걷는다. 중간에 잠깐 서서 대화할 땐 꼭 동상의 그늘 아래에서 대화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이라는 작자가 떡 하니 동상아래 버티고 있기라도 하면 그늘이고 뭐고 사람들은 저 뜨거운 햇빛 아래를 헉헉대며 걸어가야 했다. 멀찌감치서 왕을 발견하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절하거나 하인의 경우 무릎까지 꿇으면서 인사를 하는데 그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동상을 대놓고 그늘용도로 사용하는 건 나와 유디스 둘뿐이었다. "파티 안 갈래?" 자신 때문에 저 많은 사람들이 길을 돌아간다는 것을 유디스는 알고나 있는 걸까. 나는 땡볕아래의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무슨 파티?"하고 되물었다. "네가 여기에 온지도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었잖아. 의식을 치르기 전에 왕족이나 귀족들이랑 얼굴을 익혀놓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좀처럼 헤시안과 연락이 안된 탓에 처음에 보름으로 연기되던 의식은 어느새 한 달로 또 밀려 있었다. 루센은 자꾸 연기 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예전처럼 안달하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왕이랑 친하게 지내니까 은근히 안심하는 것 같다. "그런 자린 좀 불편한데..." 가끔 지나가면서 힐끗 거리는 귀족 아저씨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운 판에 파티에서 소개라니, 긴장 때문에 분명 실수할 거다. "너를 주인공으로 하는 자리라고. 왕이 주최하는 파티이니까 에드바라하에도 좋은 일이지. 그런데 싫어?" "에엑, 내가 주인공? 그건 더 싫어. 시선집중이라니 익숙하지 않아. 애당초 파티 같은 데에 나가 본 적도 없는 걸." 그런 자리에서 흠집 잡히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게다. 게다가 그런 쪽 교육 담당인 에드바라하 삼인방은 모습이 보이지 않은지 한참 됐다. 루센 말로는 잠깐 어디 나갔다고 하는데 그래도 너무 오래 못 만나고 있다. "내가 가르쳐 줄게. 나 이래 봬도 잘 추니까 다른 녀석들에게 흉보이지 않을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어." "추, 춤도 춰?" 귀족들의 파티가 무슨 나이트클럽 같은 곳 일리도 없고....그렇다면 역시 영화처럼 왈츠 같은 걸 추는 걸까? 우왓, 생각할 수록 적성에 안 맞는다. "춤 춰본 적 없어? 정 그러면 구석에서 와인이나 홀짝거려도 상관없겠지만... 에이, 그럼 무슨 재미로 파티하냐?" 유디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너를 주인공으로 하지는 않고 그냥 내 이름으로 열 테니까 넌 그냥 와서 놀기만 하라구. 춤도 가르쳐주고 옷이랑 장신구도 보내줄게. 맛있는 것도 잔뜩 준비될 거야." 내가 애냐. 먹을 거랑 옷으로 넘어가게. 조금 한심스러운 기분이 되어 동상의 발치에 등을 기대었다. 그늘진 동상의 받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서늘하다. 옆에서 유디스는 자꾸만 파티에 가자고 조른다. 저거 왕 맞아? 루센이 말해준 왕의 이미지랑 내가 보는 왕의 이미지가 너무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아. 왕인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한다면 넌 귀족도 아니다." 뭐야, 내가 귀족이 아닌 걸 너도 알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정말이지, 문득 저 녀석이 왕이라는 사실을 잊고 내 맘대로 말이 튀어나가려고 한다. 부루퉁한 표정의 유디스는 예전의 유현이 보다 더 어린애 같다. "네에 네에. 분부대로 합지요." 할 수 없이 승낙했지만 말투가 퉁명스럽게 되는 것은 반사적이었다. 뭐 이 정도로 유디스가 화내지는 않으니 상관없지만 파티라니, 아욱 벌써부터 걱정된다. 눈 앞에서 유디스가 방실거리며 웃는다. "그럼, 당장 준비하라고 할까?" 유디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뭐라고 지시한다. 나이 지긋한 그 아저씨는 갑작스런 왕의 등장에 놀라 허둥대었지만 유디스의 지시를 받고 어딘가로 황급히 달려갔다. "일주일 안으로 준비할 거니까, 그때까지 특훈이다!" 뭐어? 당황하는 내 손을 잡고 본 궁으로 들어가는 유디스는 "우하하"하고 웃어서 다시 한 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센스 없이 크기만 한 게비도 왕의 동상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앗! 발이 틀렸어요! 어깨에 힘 빼고, 팔을 부드럽게! 그래요. 그렇게 천천히...여기서 고개를 비스듬히!" 뜬금 없는 왕의 파티 선언에 바빠진 건 루센이었다. 소식을 듣자 마자 달려와서는 이렇게 하루 종일 나한테 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유디스가 가르쳐 준다고는 했지만 유디스는 나름대로 왕의 업무로 바쁘다. 루센도 분명 바쁠 텐데 에드바라하 삼인방은 여전히 코빼기도 안보이니 일거리를 테이그한테 잔뜩 미뤄두고 내 춤 상대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왕한테 개인교습을 받는다고 얘기했을 때 루센의 표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실수로 발이라도 밟으면 안된다며 예전에 호신술 가르쳐줄 때 못지않은 엄격함으로 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으아, 루센은 대체 못하는 게 뭐야? "여기서 레이디들이 살짝 인사를 하면 승호도 답례로 이렇게..." 루센이 여자 역할을 맡으면서 팔이나 다리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루센이 나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커서 모양이 영 살지 않는다. 어깨도 아프고 느린 박자에 맞춰 반복되는 동작을 하려니 쥐가 날 지경이다. "루센. 허리 생각보다 가느네요." "그런 식으로 레이디의 허리를 잡았다가는 무뢰한 취급 당하기 딱 입니다."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농담을 했지만 단칼에 잘렸다. 그리고 곧 점심시간도 다가 오니까 슬슬 본 궁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아침을 먹으면서 유디스가 점심시간 끝나고 연습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거기까지 가야 하나,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 하지만 주인의 의지와는 반대로 뱃속에선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나오니 춤이라는 게 의외로 에너지 소비가 심하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멀리서 정오를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데 내 귀에는 그게 밥 먹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로 들린다. 루센이 내 어깨에 놓인 손을 내려 놓더니 후우-하고 심호흡을 한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아무리 그래도 왕께서 직접 지도를 해주신다니 이거 긴장돼서 참을 수가 없어요." 몸에 긴장이 풀리니 발끝이 저리는 것 같다. 어째 나보다 더 긴장한 루센은 눈에 굳은 결의를 보이며 춤 강의 특훈 첫날을 잘 보내고 오라고 손수건까지 흔들어 주며 배웅해주었다. 잔소리쟁이 루센이긴 하지만 내가 왕이랑 친해져서 상당히 기뻐하는 것 같다. 그런데....유디스한테 가면 이 지루한 동작을 또 해야 한단 말야? ...한숨만 나온다. "잠깐, 자세가 반대 아냐? 네가 그렇게 하면 나는 손을 어디에 둬야 돼?" 점심식사를 끝내고 유디스의 방으로 온 나는 방실거리며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대뜸 허리부터 잡아당기는 유디스의 태도에 당황했다. "너 춤 춰본 적 없다면서 자세가 다른 건 어떻게 알았어?" 유디스는 내가 이의를 제기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히려 반문한다. 여전히 허리와 어깨에 놓인 손은 그대로다. 루센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렇게 레이디의 허리를 잡는 건 무뢰한 취급 당하기 딱 이라고 했다. "네가 느닷없이 파티선언을 하니까 아침부터 루센에게 특강을 받아야 했다고. 게다가 바로 다음 주라니 그렇게 갑자기 파티를 열어도 괜찮은 거야?" 사치를 좋아하는 왕이라면 매일 파티를 여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유디스는 제위 이후로 연회를 거의 열지 않아서 다른 귀족이나 왕족들도 언제쯤 성대하게 연회를 열까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위한지 아직 2년도 채 안됐지만 궁정에 있는 날짜 수 보다 전쟁터에서 돌아다니는 날짜가 더 많았다고 하니 오죽했으랴. 게다가 요즘 유디스의 얌전한 행동에 늙은 원로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마침 연회까지 연다니 온 궁정이 떠들썩할 법도 하다. 덕분에 일주일 만에 성대하게 파티준비를 해야 하는 하인들만 죽을 맛이라고 루센이 넌지시 얘기해 주었던 것이다. "그 작자는 너한테 그런 것까지 가르치나? 분명히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다고 얘기 했을 텐데. 이거 기분 나쁜 걸.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이런 이런 삐쳤나 보다. 어째서 인지 유디스는 루센의 과보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평민인 나를 우습게 봐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루센이 워낙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 그렇다며 달래기는 했지만 여전히 유디스는 불만이 많은 듯했다. "내가 실수해서 네 발이라도 밟을 까봐 그렇지. 알았어. 루센한테 앞으로 가르쳐줄 필요 없다고 말할 게." 유디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글쎄, 그렇게 잡으면 레이디한테 무뢰한 취급 당한다니깐. "자, 아무튼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거 자세가 반대 아니냐고." "뭐야, 그럼 나보고 레이디역을 하란 말이냐!" 발끈하고 화를 내는 유디스를 보며 혀를 찼다. "그렇다고 내가 레이디의 춤을 배울 수는 없잖아." "바~아보. 대칭이다. 대칭. 내가 하는 동작에서 좌우방향만 바꿔서 배우면 되잖아." 죽어도 레이디역은 싫은지 입을 내밀면서 야유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네. 하지만 좌우 방향을 바꿔서 배워야 하다니 루센처럼 한쪽이 레이디가 되어서 연습하는 게 훨씬 배우기 쉽다고. "알았어. 알았어. 해봐. 하나 둘. 하나 둘." 유디스의 방은 교실 두 세 개는 터 놓음직한 크기로 엄청나게 넓었다. 넓은 크기만큼 가구들도 크고 높은 것들만 있었는데 그래도 남은 공간은 하도 널찍해서 축구를 해도 될 정도다. 공간이 넓으니 동작도 커진다. 서서히 박자도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얌전히 서로의 어깨와 허리에 있어야 할 손은 서로 맞잡고 크게 휘두르면서 발만은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에 맞추어 부드러운 카펫 위를 뛰어다녔다. "스토옵-!" 재밌기는 하지만 이래가지고는 연습이 안된다. 보아하니 유디스도 반은 장난으로 하는 것 같은데...연회에서 망신당하는 것은 나라구. "이렇게 하다가는 끝도 없겠다. 제대로 하는 거 맞아?" 헥헥 대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점심 먹은 게 다 소화 되려고 한다. "아니, 나를 의심하는 거야? 춤은 즐거워야 되는 거라구." 유디스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장난스럽게 웃는다. 한숨을 쉬면서 볼멘소리로 불평했다. "그렇게 뛰는 여자는 없을 것 같은데. 즐거운 것도 좋지만 나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가르쳐줘." "흐응...레이디한테 관심 있어?" 맞은 편에 털퍼덕 주저앉으며 유디스가 묘한 표정으로 묻는다. 마치 약 올리려는 듯한 개구쟁이의 표정이다. "관심이 아니라....춤은 여자하고 추는 거 아냐? 아, 나는 인기 없어서 아무도 상대 안 해주려나. ....에? 그럴 거면 뭣 하러 춤 연습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 은근히 기대했나 보다. 영화에서처럼 예쁜 아가씨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춤추는 것을.....우와 창피해. 괜히 볼이 화끈거려진다. 유디스를 보기가 무안해서 볼을 긁적이는데 또 뭐가 불만인지 녀석은 삐져 있다. "나도 레이디랑 안 추는데 네가 추겠다고?" 팔짱을 끼고 책상다리를 한 자세로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몰라 "어?"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연회에서 내 파트너는 너라구. 내가 여자랑 춤추면 시끄러워져. 한번이라도 춤추면 그 여자와 그 집안 사람들은 내가 마치 그 여자랑 결혼할 것처럼 온 나라에 떠들고 다닐 걸. 그리고 춤을 추다 보면 여러 명의 여자들과 추게 될 텐데 그 많은 여자들과 집안들이 설치고 다닐 걸 생각해봐. 끔찍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소문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닌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다. 그렇다면 춤을 안 추면 그만이지 굳이 나랑 춰야 할 필요는 없잖아. "남자끼리 추면 더 이상하잖아. 차라리 구석에서 맛있는 거나 먹는 게..." "무슨 소리! 연회의 꽃은 댄스라니깐! 걱정 마. 이제까지 내 파트너는 헤시안 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다른 남자랑 춘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거야." "뭐어?" 순간적으로 진유현과 김제하가 댄스를 추는 장면이 떠올라 버렸다. 그림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아니지 그게 아니라! "제하...아니, 헤시안이라는 사람이 그걸 허락해?" "기분은 나빠 보였지만....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부탁하면 뭐든 들어줬으니까." 유디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왠지 제하....아니, 그 헤시안이라는 사람에게 동정이 간다. "나 관둘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진 않아." 교실 뒤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을 때 힐끔힐끔 곁눈질 하던 그 시선들을 아직도 난 잊을 수 없다. 비웃음과 동정이 섞인, 어쩌면 경멸일 수도 있는 그 시선은 혼자 있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시선 받는 건 질색이다. "왕과 같이 추는데 그게 왜 웃음거리야?" 내가 드물게 정색을 하자 유디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얼굴을 들여다 본다. 날씨는 덥고 방금 전까지 팔짝팔짝 뛰고 있어서 온몸에 끈적끈적한 땀이 흘러 기분이 나쁘다. 내가 유디스의 말에 답도 안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유디스가 당연하다는 말투로 말을 잇는다. "누가 감히 왕의 파트너를 비웃겠어? 그들이 바라보는 건 다 부러워서 그런 거야. 연회장에서 재주넘기를 하든 노래를 부르든 왕인 나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저 대단한 자신감은 역시 왕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걸 부러워 할 리 없잖아. "이제 와서 안 한다는 소린 접수 못해. 에잇! 어쨌든 연습이다! 자 일어나! 파티는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고!" 결국 유디스가 강하게 팔을 잡아 당기는 통에 억지로 일어난 나는 또다시 양 팔을 붙들려 그 넒은 실내를 폴짝폴짝 뛰어다녀야 했다. -퐁당 흐르는 땀을 씻어내기 위해 유디스와 함께 간 목욕탕은 엄청 컸다. 욕조라기보다 작은 수영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넓은 탕에는 부글부글하고 아래에서 따뜻한 물이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어디선가 꽃향기 같은 것도 은은하게 새어 나온다. 한쪽 벽면엔 벽 전체가 인공절벽으로 꾸며져 있어 폭포가 쏟아져 내렸고 그 위엔 천정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햇볕이 들어와 무지개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쪽엔 내 머리 다섯 개 만한 사자동상의 입에서 향기 좋고 따뜻한 물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고...어...또 저 쪽엔 인어로 보이는 동상이 물동이에서 물을 쏟고...또, 또, 저쪽엔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는데 바위 여기저기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보석이 숨겨져 있는 동굴을 발견한 듯한 착각을....!!! "뭘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야? 정신 없다." 유디스의 목소리가 넓은 목욕탕에 울려 퍼졌다. 솔직히 쪽팔린 일이지만 난 마치 목욕탕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여기저기 둘러보고 만지느라 제대로 탕에 들어갈 새도 없었다. 당연하잖아! 내 생전 이렇게 신기한 목욕탕은 처음 본다니깐!!! "우왓! 이거 쥬스잖아! 마셔도 되는 거야?" 어디를 통해 음료가 흘러 나오는 지는 몰라도 투명한 유리관에 흐르고 있는 색색의 액체는 쥬스가 맞다. 유리관의 대롱 끝에서 쪼로록 하고 액체가 흘러 나오면 그 밑에 대리석으로 된 절구통 같은 곳에 음료가 고이게 되는데 그걸 옆의 조그마한 바가지로 떠 먹는, 마치 우리나라 약수터 같은 구조였다. 종류도 다양해서 보라색, 오렌지색, 무색, 노란색, 갈색........ .....우와! 술도 있잖아? 신기해서 종류별로 음료수를 다 마셔본 나는 아까까지 뻘뻘 흘리던 땀이 답답해서 목욕하러 온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발가벗은 채 허리에 타월 하나 두르고 이곳 저곳 만져대고 먹어대니 유디스가 조금 짜증이 났나 보다. "그만하고 얼른 씻어. 밖에 나가면 더 맛있는 것도 잔뜩 있는데 뭘 이런 걸로 배 채우고 있어?" 물 밖으로 나온 유디스가 팔을 잡아 채어 탕 안으로 데려간다. 조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탕 안으로 들어갔더니... 우하하 저건 뭐야 장미 꽃잎이잖아!!!! 사치의 극을 달리는 목욕탕의 인테리어에 놀람을 넘어서 이제는 웃음까지 튀어 나온다. 텀벙텀벙 거리면서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꽃잎을 흐트러뜨리니 냄새가 더 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재밌냐?" 유디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더니 욕조 안에 의자처럼 튀어 나와 있는 부분에 걸터앉았다. "알았어, 알았어" 하고 말하며 괜히 무안해진 나는 유디스의 맞은 편에 앉아 목까지 물에 담그고 머리를 욕조에 기대었다. 하아- 좋긴 좋다. 아무 말없이 조용히 있었더니 퐁당-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만치서 쏟아져 내리는 간이 폭포의 물줄기 소리도 아련하게 욕탕 안에 울려 퍼져 시끄럽지는 않고 오히려 아늑해진다. 기분이 좋아져서 머리를 물 속 깊이 담갔다가 꺼냈다. "푸하-"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비비니 손가락 사이로 유디스가 욕조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허리 아래로만 물 속에 잠겨 있어서 드러나게 된 상체는 생각보다 덩치가 있었다. 배에 무려 왕(王)자까지 새겨져 있는 걸 보니 나랑 동갑이라는 게 왠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래 그래, 저렇게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왕처럼 보이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유현이의 몸도 저렇게 좋았던가? 진유현은 운동은 잘했지만 전체적으로 도련님 스타일이다. 피부도 하얀 편이고 깔끔하고 똑 떨어지는 인상이 녀석의 장점이었다. 그 얼굴 뒤에 예상외의 야비한 면이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 장점에 홀린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뭘 봐?" 어느새 눈을 뜬 유디스가 가까이 와 있다. 녀석은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얼굴을 문지르더니 내 옆에 주저앉았다. "아니 그냥. 역시 유현이랑은 다르구나 해서." 내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도 두 손으로 쓸어 넘겨주던 유디스는 "유현이? 아, 진유현이었던가?" 하고 말하며 눈을 빛낸다. ....아,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이 튀어 나와버렸다. 젠장, 이래서 난 방심하면 안된다니까. 어느 샌가 나의 일, 나의 가족, 제하나 오세준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게 된지 오래였다. 왕이 이해를 못하는 부분도 많아 짜증내기 일쑤였고 나도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어서 일부러 피하던 화제였다. "흐흥.....어떤 녀석이었는데? 사이가 나빠지긴 했지만 너랑은 친구였다며." 따뜻하고 장미향기가 나는 물을 자신의 얼굴에 끼얹으며 유디스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하긴, 이제 와서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다재 다능한 친구였지.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인간관계 좋고..." 인생 다 산 노인네마냥 지난 일을 추억하듯 먼 눈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사이가 좋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나를 싫어하더라구. 좋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포악해서 엄청 맞았어. 아하하,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지." 이렇게 느긋하게 진유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랬다. 그것도 웃으면서, 진유현과 똑같은 얼굴에 대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말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정말 올 줄은. "때렸어? 너를?" "응. 엄청 아팠어. 그런데 사람의 정이란 게 쉽게 떨어지는 게 아닌가 봐. 그렇게 맞아도 미련이 남더라. 난 내가 뭐 굉장한 실수라도 한 줄 알았지." 하지만 역시 강간당한 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경멸을 당할까 겁나기도 했고 가뜩이나 험악하게 일그러진 유디스의 얼굴이 무섭기도 해서였다. "왜 그런 얼굴을 해?" "나를 봐도 괜찮아?" "뭘?" "내가 그 자식이랑 똑같다며. 싫지 않아?" 이런 점이 귀엽다니까. 그리고 이런 점이 진유현과 닮았지. 예전에 친하게 지낼 때도 은근히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나를 당혹스럽게 했으니까. "에이,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넌 진유현이 아니잖아. 자꾸 보니 안 닮은 구석도 있고..." "어디가 안 닮았는데?" "음......"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보면...어...뭐라고 말해야 하나... "네가 키가 더 커. 한 뼘쯤?" "얼굴은?" "응?" "누가 더 잘생겼는데? 물론 내가 더 잘생겼겠지만." 그래 봐야 똑같은 얼굴이다. 나는 쿡쿡거리는 웃음을 참으며 부루퉁한 유디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디스가 좀 더 애 같다. 더 솔직하고 더 거침없다. 하지만 그런 걸 말했다간 분명 또 삐지겠지. 저 얼굴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이다. 애써 떨쳐버리려고 노력해도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아무리 옷차림이 다르고 머리모양이 달라도 같은 얼굴, 같은 표정, 같은 목소리다. 의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다. 그런데 익숙해져 간다. 저 얼굴이 유디스라고 인식하고 진유현과 별개의 인간이라는 것에 적응이 된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를 대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진유현에 대한 공포도, 증오도 다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퐁당 -쏴아아아 유디스는 아직도 삐진 것이 풀리지 않았는지 입을 다물고 정면의 사자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말을 걸만한 타이밍도 아닌 것 같아서 내버려뒀지만 저렇게 삐지는 것도 좀 귀엽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왕의 목욕탕을 이용하다니 오늘도 루센한테 자랑할 일이 생겼다. 세끼 식사를 본 궁에서 하고 또 춤 연습을 핑계로 유디스랑 놀다 보니 내 처소에 있는 시간보다 본 궁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렇지만 생각 외로 유디스는 꽤 바빠서 나 혼자 성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 다니며 탐험하는 기분을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개구멍을 발견하기도 하고 뒤뜰에 열리는 야생의 열매가 의외로 달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렇게 한가롭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헤에~ 심심해 보이는 걸~" 아디움이 나를 발견하고는 빙글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렇게 뭐 밟은 표정 짓지 말라고. 유디스랑은 잘 지내면서 나한테는 너무 차가운 거 아냐?" 연두색의 헐렁한 셔츠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바지 속으로 단정하게 넣어 입는 옷인데 아디움은 뭘 입어도 너덜너덜하게 입는다. 저것 봐라, 단추도 제대로 안 채우고 있잖아. "아, 안녕." 본 궁을 드나들면서 아디움과 마주친 적은 가끔 있었다. 아디움도 이 성 어딘가에서 머물고 있다니 당연하겠지. 하지만 녀석과 마주칠 것 같으면 내가 얼른 자리를 피하거나 옆에 유디스가 있었다. 오늘처럼 혼자 있을 때 정면으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유디스의 권유와 아디움 본인의 요구로 나도 그에게 편한 말투를 쓰고 있지만 역시 저 사람은 불편하다. "유디스가 안 보이네? 아~아 지금쯤 영감들한테 붙들려서 서류의 산속에서 고생 좀 하고 있겠구만. 그래서 혼자 놀고 있었던 거로군?" 햇빛이 내리쬐는 뒤뜰엔 인적이 드물었다. 이따금 순찰 도는 병사들이 자나갔는데 아디움을 보고 거수 경례를 하는 병사들도 있다. 그런 병사들을 무시하며 아디움은 내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지 계속 서성이며 떠나갈 생각을 않는다. 나는 "이만, 가볼게..." 하고 말하며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헤시안에게선 아직 아무 연락도 없지?" 공통의 화제를 끄집어낸 아디움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걸어가는 나를 쫓아 오고 있었다. "응...일단 몸이 무사하다는 소식은 들었어." "흐응....퀘도에서 부디칸으로 이동했다는 얘긴 들었는데.... 헤시안 녀석, 뭐가 그리 바쁜 걸까?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통보만 할 뿐 이쪽의 연락은 기다리지도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나 봐." 그...어디더라? 퀘도라는 곳을 넘어 지도에도 없는 지역을 돌아다니던 헤시안, 아니 제하는 약 열흘 만에 다시 퀘도로 돌아와 연락두절로 걱정하고 있을 왕에게 자신이 무사하다는 전령을 보낸 후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자신의 수행원을 전령으로 보내다 보니 열명 남짓하던 수행원들이 대여섯 명으로 줄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제하가 무엇을 얻으려는 건지 나도 아디움도, 물론 유디스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제하의 귀환이 늦어짐에 따라 에드바라하의 의식은 연기 되고 내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아, 이제 곧 저녁식사 시간이야. 그럼 이만..." 사람이 많이 오가는 본 궁 앞으로 빠르게 걸어 가면서 아디움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아디움이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리는 없겠지만 왠지 모를 껄끄러움은 어쩔 수 없다. 귀보르냑 성 지하에서 있었던 일도 있고..... 무엇보다 아디움은 오세준과 너무나도 차이점이 없다. "이봐, 그렇게 싫은 티 낼 건 없잖아." 기분이 상했는지 얼굴에 표정을 지우고 말한다. 화를 돋군 걸까....하고 걱정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니, 아니....진짜로 가봐야 돼서...." "아직도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그땐 너와 나의 신분이 달랐잖아. 보라고. 넌 이제 나와 동등한 입장이야. 유디스가 그렇게 아끼는데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나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디움이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아 쥐었다. 생각 외로 상냥한 태도라 그만 손에 힘을 주는 것도 잊고 뭘 하나 빤히 보고만 있었다. "이 손목이었나. 그때 내가 건드린 곳이?" 흠칫 떠는 손목을 강하게 잡아 끌더니 자기 입가로 가져간다. 입 끝을 말아 올려 미소 짓던 아디움은 혀를 내밀어 손목의 안쪽을 스윽-하고 핥았다. 내가 엉망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움츠리자 아디움이 시선을 마주쳐 온다. 나는 씨근덕거리면서 조그맣게 말을 내뱉었다. "이, 이러니까 네가 부, 불편한 거야." "긴장할 거 없어. 애정 표현이라구. 애정표현." 혀의 꿈틀거리는 감각이 남아 있는 손목을 옷에 문지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아디움은 "아~아~ 농담이 통하지 않는 녀석일세~" 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댄다. 그러고는 다소 깔보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걱정 마. 겁쟁이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유디스랑 잘 놀길래 그 사이 간덩이가 부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구만. 너 그런 새가슴을 하고서 어떻게 그 녀석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거냐?" 혀를 쯧쯧 차더니 아디움은 정말로 흥이 식었다는 표정을 하고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아디움의 등을 노려봤지만 그러다 혹시 아디움이 맘이 바뀌어 나한테 집적거릴까 봐 얼른 자리를 피했다. "승호! 늦었어요! 뭐하고 있는 거에요?" 다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방에 쳐들어 온 루센은 바지만 입고 나머지 옷을 든 채 쩔쩔매는 반라의 나를 보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오늘이 연회의 날이다. 어제 유디스는 나에게는 물론 루센과 테이그에게도 옷을 보내주었다. 루센은 입이 함지박 해져서는 굉장히 기뻐했고 나는 유디스가 루센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문제는 나였다. 이 하얀색의 너덜너덜한 옷이 멋지다는 것은 알겠는데.... ...당최 어떻게 입는 거야? 이곳에 와서 나의 옷차림이란 바지에 셔츠 하나를 입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날씨도 더웠고 무엇보다 이곳 귀족들의 옷은 너무 복잡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연회복이라니......바지 입는 법은 알겠지만 이 셔츠와 자켓은 어떻게 걸치며 또 무슨 단추는 왜 이리 많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줄은 어디를 어떻게 걸어야 되는 거냐고!!! "이런, 진작에 저를 부르지 그랬어요!" 루센이 혀를 차며 얼른 다가와 옷을 하나하나 입혀주었다. 내가 입으려고 낑낑댔을 때는 단추가 안 맞거나 장식이 늘어지거나 어딘가가 비뚤어진 모양새의 옷이었던 것이 하나하나 자세를 잡아 나간다. 조금 창피함을 느끼며 루센의 손에 맞기니 처음부터 루센에게 도움을 청할 걸 괜히 혼자 해보겠다고 오기부리던 게 후회가 된다. 먹을 것이 아닌, 유디스한테 정식으로 선물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던 거였는데 결국 루센의 손을 빌리게 됐다. 마지막으로 바지에도 뭔가 너덜너덜하게 장식이 붙어 있던 것을 고정하고 나니 얼추 준비가 끝났다. "아직 머리는 안 한 거에요? 장갑은요? 손수건은?" 에에에? 그런 것도 필요해? 루센은 바쁜 손놀림으로 옷을 포장했던 종이뭉치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찾아낸다. 어라...저런 곳에 장갑이 있었네.... 그러고 보니 루센의 머리는 깔끔하게 올백으로 뒤로 넘겨져 하나로 묶고 있었다. 헤어 젤이라도 바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반짝거리면서 환한 앞이마가 시원스럽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루센의 하늘색 정장은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있는 이 어정쩡한 날씨에 입기 딱 좋은 옷으로, 적당히 통풍이 되고 적당히 보온도 되는 약간 하늘하늘한 느낌의 옷이었다. 평소의 고운 아가씨 같은 느낌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귀공자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내가 루센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루센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자신의 손에 미끌미끌한 걸 쏟더니 내 머리에 잔뜩 바른다. "앗, 뭐, 뭐예요? 끈적거려서 기분 나빠..." "그 부시시한 머리로 나갈 참이에요? 가발까지는 안 쓰더라도 이 정도는 꾸며 줘야죠." 루센처럼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거울을 보니 이거 영 어색해서 적응이 안된다. 요즘 동네 양아치도 이런 머리스타일은 안 한다고...... 아무튼 그렇게 손수건과 신발을 챙기고 향수를 뿌리니 대충 준비가 끝나 있었다. 루센은 늦었다며 내 손을 잡아 끌고 방문 밖을 빠른 걸음으로 나섰는데 언제나 방문을 딱딱한 얼굴로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헤헤헤 당신들도 루센의 미모에 놀랐구만! 내가 머물고 있던 별궁의 밖으로 나오니 마차라는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가 열리는 곳까지는 말로 달리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굳이 마차를 이용하는 것은 그게 다 예의라나....루센의 설명을 들으며 마차에 올라타니 테이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아있다. "우와 테이그! 굉장히 잘 어울려요!" 새까만 옷은 언뜻 군복 같았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의 테이그가 저런 차림을 하고 있으니 더 험악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목까지 오는 블라우스에 어울리지 않은 브로치, 레이스에 금색으로 꽃무늬가 수놓아진 센스 극악의 옷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각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여태까지의 옷들에 비하면 저 옷은 테이그를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유디스도 그게 보기 괴로웠나 보다. 아, 조금 두근거린다. 이렇게 잘 차려 입고 파티라는 장소에 가는 것은 이곳에서나 내가 살던 곳에서나 한 번도 없었다. 파티래야 기껏 생일파티가 전부. 그것도 중학교 이후론 하지 않게 되었으니 나는 마치 유원지에 처음 가는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 들뜬 내 분위기를 대변하듯 왕성 내부는 밤인데도 여기저기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각지에서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손님들의 마차들로 북적북적했다. 그 넓던 왕성이 좁아 보일 정도로 수많은 마차가 오가고 있었고 어디선가 음악소리도 들려왔다. "아무래도 연회 중간에 들어가게 될 것 같네요. 뭐, 일찍 가봐야 지루한 식전행사가 있을 뿐이지만." 루센은 지나가는 말투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눈을 빛내며 "그게 뭔데요?" 하고 물었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왕이 나와서 오늘 연회는 이러이러한 이유로 열었으니 모두 잘 놀고 잘 먹고 가시오. 라고 말하는 정도?" "흠..그래도 지금쯤이면 광대들의 재주넘기나 무희들의 공연까지 끝나 있겠는걸." 쭉 말이 없던 테이그가 웬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테이그를 바라보았는데 테이그는 언제 무슨 말을 했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내 귀에 접수 되었다구. 그런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단 말야?!! "우왓! 그런 것도 있어요? 으아아~~~ 보고싶다~~~" 치신머리없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온몸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광대요? 피에로 같은 거에요? 무희라니, 나 그런 거 한 번도 본 적 없다구요! 아 어떡해 좀 더 일찍 나올 걸!!" 하고 방정을 떨었다. 얼마나 보기 흉했으면 루센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승호. 굉장히 기분이 좋나 봐요. 나 그렇게 들 떠 있는 승호는 처음 봐요. 여기 와서 줄곧 겁에 질린 표정이었잖아요. 요즘 들어 좀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오늘 처럼 진짜 즐거워하는 건 페고 열매 이후 처음이죠?" '목욕탕도 있는데....'라고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유디스랑 같이 때를 밀어줄 정도로 친해졌다는 것은 루센도 알고 있지만 목욕탕 안에서 그 추태를 보였다는 것은 창피해서라도 말 못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입을 다물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것은 루센이 어딘가 모르게 씁쓸히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노가 많이 걱정했어요. 성안에서 무서워 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왕이나 아디움이 해코지라도 하는 건 아닐지. 연락을 취할 때마다 승호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물었죠." 전서구를 이용한 서신으로 주고 받는 라노와의 접촉은 루센과 테이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에드바라하 측인 카이와 용병대의 대장인 라노와의 연락을 통해 왕의 뜻을 보고하기도 하고 우리들의 안부도 알리는 것이다. 계속 연기 되는 에드바라하의 의식문제도 전령보다는 새가 훨씬 빠르다며 쭉 전서구를 통해 연락을 보냈었다. 그리고 라노 쪽에서 연락이 올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나에 대한 걱정이다. "솔직히 라노한테 너무 미안한 걸요. 난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괜히 걱정만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 봐요. 얼마나 잘 먹고 잘 지냈으면 요즘 살도 찌고 알통도 생겼어요." 약간 과장 된 몸짓으로 너스레를 떨며 알통에 힘을 줘 보였다. 그래봐야 긴소매 정장이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루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호가 편하다고 느낀다니 우리가 그만큼 일을 잘했다고 봐도 되겠죠. 테이그?"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며 루센이 테이그를 바라보자 테이그가 드물게 입가에 미소를 띤다. 그리고는 살짝,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데 나로서는 둘이 무슨 텔레파시라도 주고받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기에 그냥 그러려나 보다 하고 넘겼다. 뭔지는 몰라도 잘했다지 않은가. 나는 테이그 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어찌됐든 지금 내 최대의 관심사는 저 휘황찬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연회장인 것이다. "아, 얘기하는 사이에 벌써 다 왔네요." 루센이 싱긋 웃으며 흥분으로 상기 된 내 얼굴은 본다. 귀에 입이 걸려 있을 내 얼굴을 보며 쿡쿡 대며 웃지만 그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확실히 들 떠 있었다. 입구에서 초대장을 보여 주고 하인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연회장은 엄청나게 넓었으며 수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샹들리에는 번쩍번쩍하게 빛이 나서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천정은 높고 어른 세 명이 둥글게 끌어 안아도 될 만한 대리석 기둥이 화려한 문양으로 조각 되어 여기저기 우뚝 서 있다. 사람들은 그 기둥에 기대어 대화를 나누거나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주로 간단한 음료나 과자들을 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음식을 먹으려면 홀의 한쪽에 세팅되어 있는 길다란 식탁에서 마음껏 집어 먹으면 된다. 달리기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만큼 하얗고 긴 식탁 위엔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로 하인들과 하녀들이 분주히 음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홀 전체에 둥그런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서 마음껏 음식을 고르고 자리에 앉아 먹으면 된다. 요컨대 뷔페식이라는 거다. 홀의 좌우에는 수십 명의 악사들이 계단을 몇 개 올라간 약간 높은 위치에서 무언가 클래시컬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테이블이 없는 연회장 앞쪽의 널찍한 공간에선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이래야 남녀가 허리와 어깨를 살짝 붙들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다가 고개나 어깨를 까딱하던지 허리를 튼다거나 하는 매우 지루한 춤에 불과 하지만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에 정장을 입고 부드럽게 스텝을 밟으니 굉장히 그럴싸하게 보였다. 그리고 홀의 가장 앞쪽. 이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층도 아닌 높은 위치. 새빨간 융단이 계단 위까지 깔려 있는 그 곳에는 화려한 문양으로 치장된 테페스트리와 그 장식물을 배경으로 거인이나 앉을 법한 의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그 의자의 가운데에 유디스가 너무나도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팔을 턱에 괴고 파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그 표정이 심드렁한지 유디스의 주위만 음악도, 파티의 흥겨운 분위기도 차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디스가 앉아 있는 거대한 의자근처에 사람이라고는 유디스 혼자뿐이고 그 널찍한 공간에 아무도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심심해 보였다. "원래 가운데 의자는 왕의 의자, 그리고 양 옆엔 왕비와 왕위를 이을 왕자의 자리이지만 현재 유디스는 왕비도 자식도 없으니 저렇게 혼자 앉아 있는 거죠." 루센에게 물어보니 작은 목소리로 알려준다. 저렇게 멀뚱히 혼자 앉아 있는 유디스를 보니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얼른 저 심심한 자리에서 불러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가는데....아 씨...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어머, 전하예요...." "전 처음 뵈어요. 도통 파티를 열지도 않으시고 아무리 초대를 해도 참석을 안 하시니 어디 얼굴 뵐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요." "지난 번에 드루키아 족을 정벌하신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건 처음이시죠?" "정말...왕께선 그렇게 무턱대고 전쟁하시고는 대체 어떻게 수습하시려는 걸까요." "항간의 소문엔 우리 이덴을 제국으로 선포할 거란 얘기도 있어요." "어머나....황제라도 되시려는 걸까..." "이번에 에드바라하 얘기 들으셨습니까? 귀족의 자존심이었던 그 가문마저 결국 왕 앞에 무릎을 꿇는군요." "차라리 십년 전 그대로 멸망한 채 사라졌다면 명예라도 있었을 것을..." "이 왕궁 어딘가에 그 수치스러운 혈육이 기생하고 있다고 하오. 허, 참. 뻔뻔스럽기도 하지. 그렇게까지 해서 가문을 유지하고 싶을까." "명예보다는 실리라는 거겠지요." "헤시안님 얘기는 들으셨나요? 여행중이시라는데....실은 그게 헤시안님께서 몹쓸 병에 걸려 요양을 보낸 거라는 얘기가 있답니다!" "제가 듣기로는 왕께서 헤시안님의 총명함을 시기한 나머지 비밀리에 추방하신 거라고 합니다만......" "꺄아! 그럴 리가요! 두 분이 얼마나 우애가 깊으셨는데요!" 우아한 귀부인의 조심스러운 말투부터 시작하여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의 목소리, 패기 넘치고 도전적인 젊은이들의 대화, 젊은 여인들의 수군거림까지.....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누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게 온갖 소문들이 홍수처럼 귀에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에....진정한 수다의 향연이 여기에 있었구나. 덕분에 유디스에게로 가려던 내 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흥분과 긴장감으로 고조 되어 있던 기분이 착 가라 앉아버리고 말았다. 두 귀는 어느새 주변의 이야기를 캐취하는데에 바싹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이 자리에 왜 왔나...하는 자괴감이 든다. 화제의 중심은 역시 유디스였다. 왕이고 오늘 파티를 연 주역이니 입방아의 대상이 된 건 그렇다 치자. 문제는 나이 지긋한 중년부인이나 노년의 신사들의 대화에서 심심찮게 에드바라하에 대한 화제가 오르내리고 있다는 거다. 그것도 불온한 기미를 담은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 아무래도 에드바라하는 이 곳의 귀족들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것 같다. 심지어는 "에드바라하에서 온 그 분, 아직도 살아있대요?" 라는 말까지 들어버렸다.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남의 험담하는 걸 낙으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어느새 루센이 곁으로 다가와 살그머니 내 어깨를 감싸 쥐고 음식이 있는 식탁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이미 들을 만큼 들어버린 나로서는 좀처럼 진정이 안된다. 이제까진 몰랐지만, 나라는 존재가 궁 안에서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나? "대체...왜 그렇게 에드바라하를 싫어하는 거죠? 나는 왕이 좋다고 하면 다 좋은 줄 알았어요..."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루센이 이것 저것 집어 쟁반 위에 음식을 담더니 조용히 구석자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차가운 대리석기둥에 등을 기대니 열이 올라 땀이 나는 몸뚱이가 조금씩 식어갔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거에요." 약간 떨어진 곳에서 테이그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루센이 조금 한숨을 쉬더니 쥬스를 한 모금 마시며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알다시피 에드바라하는 왕권과 비교 될 만큼 강력했고 유서도 깊어서 귀족들 사이에선 나름대로 명망 있는 가문이었죠. 비록 망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에드바라하가 보여줬던 귀족의 강력함을 그리워하는 노인들이 두 눈 멀쩡히 살아 있어요. 십년 전의 사건을 오히려 명예롭게 저항하다 장렬히 사라진 귀족가문의 일화로 우상화하는 멍청한 부류도 있으니까요. 귀족들이 왕의 편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해요. 어느 정도 상부상조하는 면은 있지만 귀족들은 역시 왕에 대한 충성보다는 자신들 가문의 안위와 이익이 최우선이고 왕권이 강해져서 정치적으로 왕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꺼려 한다고 보는 쪽이 맞죠. 그러니 에드바라하가 그런 왕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선 수치스러운 일이고 또 왕의 권위가 커지는 것이 싫은 거에요." 나는 정말 귀찮은 일에 얽히게 되었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골치가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흥겨운 홀 안의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된다. "그래도...명예가 어쨌다느니 떠드는 쪽은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에요. 기껏해야 남을 흉보는 게 그들의 고상한 화제의 대부분이고, 마침 에드바라하가 걸렸을 뿐이니까요. 다른 가문을 깔보는 걸로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귀족의 말따위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어요. 문제는 같은 왕가의 권속에 해당하는 귀족들이에요." 게비도 이후 귀족들의 영지 쟁탈전이 사라졌으니 레이헨 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왕의 밑에 들어온 가문은 몇 안된다고 들었다. 그리고 유디스 대에 들어온 가문은 에드바라하가 처음. 그 얘기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면서 루센이 어두운 목소리로 좀 더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왕실기사단에 있는 젊은 귀족들, 궁성의 행정을 관리하는 귀족들, 왕의 각 직할지에 파견되어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게비도 때부터 적게는 2대, 많게는 5대까지 왕가에 충성해온 가문들이란 말이죠. 한마디로 텃세가 장난 아닐 거란 말이에요. 그들이 에드바라하의 등장을 좋아할 리가 있겠어요? 자기네들이 왕에게 받을 빵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테이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홀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센은 말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그제야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상황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화가 난다. 그러니까 자기들 먹을 떡이 좀 줄어든다고 해서, 그리고 에드바라하의 꼴이 좀 우습다고 해서, 자기들 멋대로 흉보고 깔보고....에드바라하의 수장, 그러니까 카이보고 꼴사납다고 표현했겠다?! 라노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얻은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안고 왔는지도 모르면서 지들 멋대로 떠들다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찮아요?" 가늘게 떨리고 있는 내가 공포에 질렸다고 생각했는지 루센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안아 온다. 억울하다. 카이가, 라노가 그런 험담을 들을 이유는 없는데. 여기저기서 주워 듣기로는 카이가 도둑떼와 결탁했다고도 하고 그 도둑들이 야만족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물론 라노일행을 지칭하는 말이다. 도망친 귀보르냑의 가주와 그 일족들에 대한 얘기도 있었는데 듣기로는 아디움의 후원으로 어느 귀족의 영지에서 잘 지내는 것 같다. 에드바라하 사건만 해결된다면 새로운 땅을 귀보르냑 영지로 하사한다니 얼마나 어이없은 일인가. 카이가 정말로 에드바라하의 핏줄이 맞냐는 둥 도적들과 결탁한 귀족이 귀족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둥 소리를 지껄이면서 정작 영지 사람들을 괴롭히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주한 귀보르냑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이 없다. 물론 험담이야 하겠지만 왕족인 아디움의 귀에 들어 갈까 봐 은근히 조심하는 것 같다고 루센이 넌지시 일러준다. 그리고 아무리 아디움이 친가에 애착이 없다지만 명색이 왕족과 사돈인 귀보르냑이니 아마 가문이 없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도 말했다. 기분이 나쁘다. "승호.....오늘만은 즐겁게 보내길 바랬는데..." 루센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수심이 가득한 그 얼굴을 보니 풀죽어 있는 내 모습이 왠지 루센에게 미안하다. 아까 그렇게 신나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모습이라니...아마 루센은 마음속으로 괜한 얘기를 했다며 수 십번도 더 자책하고 있을 거다. "아니에요. 어차피 저 귀족들하고 놀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닌 걸요. 맛있는 음식도 많고, 음악도 좋고. 좋은 옷도 입었잖아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루센이 쟁반에 담아온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오오! 이거 맛있잖아? 내가 억지로 과장하는 몸짓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루센의 표정이 어둡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고 같이 음식을 먹으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이런 데에서 딱딱하게 얼굴 굳혀 봐야 우리만 손해다. 맛있는 거나 실컷 먹어 두자! 어느새 우리는 유디스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 아가씨 어때요? 머리를 틀어 올린 게 청순해 보이면서도 요염하지 않아요?" "으음...하지만 좀 깐깐해 보이지 않아요? 난 저쪽 긴 머리 여자애가 귀여운데." "하지만 그 분은 유부녀인 걸요." "에엑? 저 얼굴이?" 홀 안을 오가는 수 많은 레이디들을 보며 나와 루센은 다소 음흉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내가 루센과 여자에 대해 농담을 나눌 날이 올 줄이야.... 처음엔 "그동안 전하께 배운 춤 솜씨 한 번 보고 싶은 데요?"라고 루센이 말해서 물을 마시다가 사래가 들릴 뻔했다. 차마 내 파트너는 유디스라고 말은 못하고 있는데 루센은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보며 "저 분은 어때요?" 라며 다소 장난기 짙은 농담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레이디 품평회를 하면서 우리는 옆에서 테이그가 혀를 찰 정도로 신나있었다. "저렇게 레이스가 잔뜩 달려서 큐빅이 여기저기 박혀 있으면 무겁지 않을까요?" "저래 봬도 저 디자인이 요즘 최신 유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으음...화려한 스타일이 루센의 취향?" "제 취향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니까요. 전 좀 더 청순한쪽이 좋은 걸요." 본인이 더 청순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좀 무섭다! 하지만 이런 대화에 맛을 들인 나는 내친김에 테이그에게도 어떤 스타일의 아가씨가 좋냐고 물어 봤다. 솔직히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 본 건 아니지만 테이그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다. "화려하고 도도한 스타일." "에에? 의외네?" 눈을 크게 뜨며 테이그를 바라보자 테이그는 그 무뚝뚝한 얼굴로 "아무리 남자가 화려하게 꾸며도 여성의 화려함을 따라 갈 수는 없지." 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보니까 옆의 루센도 입을 틀어막고 끅끅대고 있었다. 역시 파티라는 장소가 주는 흥겨움이 나한테까지 전달 되는 것 같다. 아까는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데 어느새 마음이 들 떠 있었다. 간혹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면 "왕궁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알아서 왕가의 권속인 귀족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뭐 왕궁사람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니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하면 대부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거나 애매하게 웃으며 "그럼 다음 기회에"라는 애매한 말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이다. 왕가의 권속은 귀족들 중 하류로 취급 받는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루센과 테이그는 이 홀 안의 그 어떤 신사들보다 멋있었고 우리 나름대로 파티를 즐기고 있었기에 상관 안 한다. 그리고 루센은 은근히 인기가 많아 레이디들이 심심찮게 접근해 오는데 그 것이 괜히 뿌듯해서 '봐라 요것 들아'하고 혼자 즐거워 하고 있었다. 그런데...뭔가 허전한데? "아 참! 유디스를 잊고 있었어!" "쉿!" 얼떨결에 왕의 본명을 존칭 없이 불러버린 나에게 루센과 테이그가 기겁을 하며 주의를 주었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이번에 진짜 십 년 감수한 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고 조그맣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아무튼.....저 봐요. 아직도 저기서 혼자 앉아 있잖아요. 으악. 설마 조는 건 아니겠지!" 이젠 아예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앉아 있는 유디스는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왕이 저렇게 체통 없이 있어도 되나 걱정스러웠고 또 그것에 대해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험담이 들렸다. 이제 험담이라면 신물이 난다. 어서 빨리 유디스를 저 지루한 곳에서 데려와야겠다. "앗, 승호, 잠깐...그렇게 무턱대고 가면.....!"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가는 나에게 루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어? 왜요?"하고 뒤 돌아 봤지만 루센의 모습은 이미 저만치. 할 수 없이 혼자 유디스를 향해 가는 나는 원래 연회라는 곳이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몸이 부딪혀서 얼굴 붉힐 정도로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영화 같은 데서 보던 것보단 조금 느낌이 달랐다. 연회의 규모나 화려함에선 영화를 앞섰지만 사람 수도 영화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가니 춤을 추는 공간이 나왔다. 아마 홀의 삼분의 일은 차지하는 공간일 것이다. 무도회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이 널찍한 곳에서 수십 쌍의 남녀가 느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다 지치면 테이블로 돌아가거나 이층으로 올라가 쉬기도 한다. 음악이 한 곡 끝날 때마다 파트너가 바뀌고 춤을 신청하는 쪽은 주로 남자지만 간혹 여자가 먼저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춤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런대로 볼거리는 되길래 잠시 한 눈을 팔고 있을 때였다. "......" 음악이 뚝 끊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춤을 추던 남녀들이 일제히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 봤더니....뭐야, 별거 아니다. 유디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난 것 뿐이다. 살짝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했다. 유디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왕께서 춤을 추시려나 봐요!" "하지만 늘 함께 추셨던 헤시안님도 지금은 안 계시잖습니까." "혹시 이 중에 마음에 드는 레이디라도 발견하신 걸까요?" 주변에서 크게 동요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디스는 곧바로 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들도 얼마나 놀라겠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발걸음이 뒤로 물러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왔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디스가 내 코 앞에 섰을 때 나를 둘러 싼 사람들의 잔뜩 실망한 표정이 한 몸에 느껴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 미안 옷 입는 법을 몰라서 좀 헤맸......" 그제서야 나는 유디스의 옷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실망의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놀라움의 표정을 짓거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해석 불가능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쪽팔려 죽겠다. 이게 무슨 커플룩이냐.... "잘 어울리는데." 장난스레 웃는 유디스의 얼굴이 오늘따라 얄미워 보인다. "이, 일부러 그랬지. 차, 차, 창피하게...." "어울리면 됐지 뭘." 이 녀석은 늘 이런 식이다. 왕이 맞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즉흥적이기도 하고 꽤나 재미를 추구하는 편이기도 하다. 오늘은 욕먹는 날인가 보다. 벌써 저만치서 불온한 눈으로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나던지 주눅이 들던지 했겠지만 마침 유디스도 눈 앞에 있겠다, 가뜩이나 카이와 라노의 욕을 듣고 기분도 상했겠다...... ......간덩이가 조금 부었는지 자그마한 심술이 발동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그럴듯하게 손을 내밀고 살짝 허리를 구부리면서 보통의 신사들이 보통의 숙녀에게 댄스신청을 하듯 유디스에게도 그렇게 했다. 후후후 주변에서 경악하는 소리가 들린다. 경멸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기이하게 일그러진 얼굴들이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경멸이나 비웃음은 많이 당해봤지만 두렵다는 얼굴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건 또 처음이다. 역시 상대가 왕이라서 그런가? 살짝 고개를 들어 유디스의 안색을 살피니, 역시, 저 녀석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잖아. "물론이지요. 잘 부탁합니다." 살짝 내민 손끝을 유디스가 받아 쥔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유디스가 손을 쥐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하고 숨을 쉰 후 잔뜩 힘이 들어간 몸에 긴장을 풀고 천천히, 지난 일주일간 특훈을 받았던 지루하고 재미없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악사들이 연주를 안 한다. 스텝을 다섯 박자나 밟을 때 까지 음악이 안 나와서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도 엄청나게 허둥대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악기들이 바뀌고 악사가 몇 명 교체 되면서 좀 전보다는 좀 더 흥겨운 분위기의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홀의 삼분의 일이나 해당하는 무도회장....이 표현이 맞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여기서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는 사람은 나와 유디스 둘뿐이었다. 아무도 같이 안 춘다. 우리 둘만 따돌리는 것 같다. 사람들이 쳐다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구경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멀찌감치서 음식을 축내던 사람들까지 무슨 신기한 광경을 보듯 기웃거리며 구경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지 말란 말야! "감히 나를 레이디 취급 했겠다?" 딱딱해진 다리때문에 스텝이 엉키는 것을 겨우 면한 나는 머리 위에서 들린 낮은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유디스는 싱글거리고 있어서 위화감이 없었지만 허리에 얹어진 그 손에 힘이 들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내가 뭐 잘못한 건가... 나는 왕궁의 예법 같은 건 몰라서....너도 네 파트너는 나라고 해서...... 저기...절반은 장난으로 그런 건데...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 뭔가 실수한 거야?" 불안한 눈빛을 숨기기 위해 시선을 떨구고 작게 말했다. 우리들이 무슨 대화를 하나 들으려는 듯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어쩌면 들렸을까? 에이 설마, 음악소리에 묻혀 안 들렸을 거야.... "호기 좋게 춤을 신청하더니 벌써 항복이야? 저런 바보들의 시선에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 않을 텐데." 흥겹지만 다소 느린 박자의 곡을 따라 몸을 움직이면서 유디스가 악사들을 향에 손 끝으로 지시를 했다. 처음에 유디스의 신호를 못 알아 들은 악사들는 머뭇거리다가 지휘자와 짧게 눈 신호를 주고 받은 뒤 빠른 박자로 음악을 연주해갔다. 전보다 두 배는 빨라진 템포에 놀라 발이 꼬이지 않게 하느라 정신 없었다. 유디스는 킥킥거리며 경쾌하게 리듬을 탔다. "나를 레이디 취급한 벌이다!" "고약해! 이런 식으로 복수 하는 거냐!"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된다.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둘만 춤을 춘다는 게 무진장 창피하고 쪽팔려 죽겠다. 게다가 우아한 신사숙녀의 춤을 졸지에 경망스럽게 변형시켜버리고 홀 안을 또가닥 또가닥 거리는 구두굽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고 있으니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뇌가 폭발 할 것 같기만 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더 꼴사나워 질 테니 이 음악이 끝날 때까지는 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어야 했다. 유디스의 방에서 연습할 때처럼 폴짝폴짝 뛴다거나 팔을 좌우로 흔드는 작태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멋드러지게 옷을 차려 입고 방정맞게 뛰는 것 자체가 충분히 시각공해다! 게다가 우리들은 똑같은 옷.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어도 할말이 없다. 음악이 끝나자 우리들의 광대짓도 끝났다. 다시 느린 곡이 연주되기 시작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완전히 녹초가 된 나는 숨을 몰아 쉬면서 춤추는 사람들 틈을 빠져 나가고 있는데 여전히 따라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옆에서 빙글거리는 유디스가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녀석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꺼려진다. 제 페이스를 찾은 연회장은 활기롭고 흥겨웠지만 방금 전보다는 좀 더 웅성거리고 나를 쳐다보며 수근거리는 무리들이 많아졌다. 저만치서 루센과 테이그가 기둥을 붙잡고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것도 보인다. 루센은 그렇다 쳐도 테이그까지 입을 틀어 막고 어쩔 줄 몰라한다. 괜한 짓을 했다. 이제 앞으론 창피해서 내 방 밖으로 못 다닐 거 같다. "보통은 왕이 먼저 춤을 신청하지 않으면 같은 왕족이 아닌 한 함부로 먼저 접근하지 못해."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구나! 또 루센한테 잔소리 듣게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드바라하 삼인방이 떽떽거리면서 궁중예절을 가르칠 때 좀 자세히 배워둘 걸. 그나저나....젠장, 그럼 나는 유디스한테 실례를 한 거잖아! "미안. 내가 폐를 끼친 것 같네. 나 때문에 너까지..." 왕의 권위가 추락한 거 아닐까 걱정하는데 유디스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연회에서 그런 식으로 춤을 추면 사교계에서 추방당하지.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건 내가 왕이기 때문이야. 왕궁의 규정이 뭐든, 예법이 어떻든 내가 된다면 되는 거고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너는 그런 작은 일에 신경 쓸 거 없어." 옆에서 키득거리며 유디스가 말한다. 즐거워하는 그 모습을 보자니 어이없어서 대꾸할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디스는 일부러 예법이란 걸 어기고 그 우스운 짓을 한 건가? "그리고 사교장이란 온갖 억측들이 사실인양 난무하는 곳이라 네가 무슨 말을 들었을 지 안 봐도 대충 상상이 간다. 에드바라하 얘긴 신경 쓰지마. 자기네끼리 아무리 떠들어도 내 허락 없인 손 하나 까딱 못하는 무능력자들 뿐이니까." 다정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의외라 코끝이 찡해졌다. 갑자기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고 기운이 나기도 한다. 커플룩이 쪽팔리면 어떤가. 왕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라잖아. 기분이 풀어진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조금 쑥스러운 방법이었지만 유디스한테는 신세 진 기분이다. "고마워."라고 말하고는 루센과 테이그에게 가기 위해 유디스의 손을 잡아 끌었다. 녀석도 빙긋 웃으며 순순히 따라오는 걸 보니 오늘은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저, 전하....드릴 말씀이..." 어디서 중년의 아저씨가 땀을 흘리며 튀어 나왔다. 손에 양피지 두루마리를 들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무언가 큰일이라도 난 것 같은데 정작 유디스는 인상을 구기며 "또야?"라고 말한다. "아직 알현하지 못한 자들이 성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멀리 드루키아는 물론, 자온, 이베라스, 타르만, 푸디그...모두들 한달 이상 걸려서 여기까지 온 자들입니다. 파티를 한다고 그들을 외면하셔서는 제대로 통치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유디스는 굉장히 화가 난 표정으로 아저씨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 아저씨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긴장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물러날 생각을 안 한다. 나는 그 아저씨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미안, 금방 갖다 올게. 조금만 기다려." 불쾌한 기운을 한껏 드러내며 유디스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아저씨는 눈이 등잔만해져서 나를 쳐다보더니 유디스가 성큼성큼 어딘가로 가버리자 그 뒤를 쫓아 가기에 바빴다. 음.... 왕은 왕이구나. 조금 아쉽지만 듬직한 친구를 둔 것 같아 뿌듯해졌다. 현대에 있었을 때완 달리 이 곳에서는 좋은 친구들만 사귀는 것 같다. 아니, 뭐 민태나 진영이, 형석이가 나쁜 친구라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난 현대에서 빈 말로라도 교우관계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 친구가 많다는 것이 분에 넘치는 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친구들이다. 라노도 유디스도. 루센은 친구라기 보다는 형 같은 느낌이다. 외동아들인 내가 평소에 바라던 이상적인 형의 모습과 누나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루센이다. 그리고 만약 큰 형이 있다면 무뚝뚝해도 자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어릴 적에 가끔 상상하던 큰 형의 이미지는 테이그와 닮아 있었다. 헤에...여기에 자상한 어머니와 아버지만 갖춰지면 완벽한 가정인데. 그러고 보니 지금쯤 어머니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문득 두 분이 보고 싶어졌다. "승호! 여기에요!" 우울한 상념에 잠겨있던 나를 정신차리게 해준 건 루센의 목소리였다. 어째 사람이 더 많아진 느낌의 연회장이었는데 유난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아까 멋졌어요! 전하와 비밀 특훈을 한 이유가 그거였군요! 사교계 댄스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거에요. 아하하하!"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루센이 큰 소리로 웃는다. 테이그도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훌륭한 솜씨였어. 특히 그 빠른 스텝은 묘기에 가까웠지." 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서 더욱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만 좀 해요."하고 울상을 지었지만 루센과 테이그는 좀처럼 웃음기를 지우려 하지 않는다. 특히 테이그가 저렇게 활짝 웃는 것은 처음 봤는데 그게 의외로 순박한 표정이어서 인상이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유디스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일이 바쁜지 어디로 가버렸어요. 조금 있다가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여기서 기다려봐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유디스의 얘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한참 바쁠 때이니까요." "그래요?" 루센이 쿡쿡하고 웃으며 음료를 마신다. 말을 잇는 것은 의외로 테이그였다. "제위이후 무턱대고 전쟁을 벌여 정복하게 된 수십 개의 부족들과 수 많은 소규모 국가들을 통치하는 일만해도 골치인데 전쟁에 들어간 군사비로 인한 재정문제, 귀족들의 반발, 전방에서 대치하고 있는 휴전 상태인 나라들의 문제까지 있다. 더구나 넉달 동안 왕좌를 비워두어 밀린 일거리는 잔뜩 쌓였을 테니 한가할 틈이 있으면 곤란하지." "재무관 헤시안이 왕 때문에 일더미에 파묻히다가 머리가 미쳐버려 요양하러 갔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라니까요. 지금쯤 왕은 알현실에 앉아 그동안 정복한 국가와 부족의 대표들이 가지고 온 공물과 인사를 받느라 엉덩이에 쥐가 날 걸요." 지난 일주일간 본궁에서 지내면서 별로 유디스가 바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녀석은 적당히 일하고 하루의 절반은 나랑 놀고 있었다. 그것도 어디선가 늙은 할아버지가 씩씩거리면서 "전하! 보고해 드릴 문서가 산더미 같습니다!"라고 절규를 해야 마지못해 일하러 가는 거다. 하긴, 그런 점이 진유현과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전하는 곧 돌아 온다고 승호에게 말했지만 아마 오늘 밤은 더 이상 파티를 즐기지 못하실 거에요. 며칠 전부터 성밖에 늘어서 있는 마차의 행렬을 봤나요? 그게 다 정복국에서 보내온 물건들이라니 이만하면 제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구요."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까 중년의 아저씨가 말한 대로 [한달 이상을 걸려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을 무시할 순 없을 테지. "그럼 할 수 없네요. 우리끼리 놀죠 뭐. 그런데.... 덥네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에요? 전국의 귀족들이 다 모인 것 같아요."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불만을 토로했다. 유디스는 일하느라 바쁘고 나는 구경거리가 되고 사람은 많아 덥고.... 화려한 파티가 점점 인간 사우나가 되어가는 걸 보자니 흥이 깨진다. 루센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홀 안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이 나를 곁눈질로 훑고 갔지만 눈이 마주치면 저쪽에서 먼저 시선을 피하곤 했다. "아무리 왕이 주최하는 연회라 해도 이렇게 넓은 홀이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많지는 않죠." 루센이 비웃듯 입가 한쪽을 틀어올렸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테이그도 묘한 웃음을 지으며 홀 안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거의 일년 만에 열린 왕의 연회이니 온갖 가문에서 다 찾아 왔겠지. 물론 왕의 초대장이 있어야 참석할 수 있는 자리지만 초대장이 배달 된 가문에서 수십 명씩 왔다면 얘기가 달라져. 다들 젊은 왕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겠지. 아, 어쩌면 왕과 친분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인간들도 있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는 왕이 오랜만에 주최한 이 파티에 얼굴을 보여야 자신의 입지가 확고해 진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원래 귀족이 아닌 탓인지 루센과 테이그는 그들의 습성을 역겨워 하며 신랄하게 비난하곤 했다. 비틀린 미소를 짓는 루센이 낯설긴 했지만 나로서는 아까부터 궁금해 하던 사실이 풀려 속이 시원하다. 그래, 왕이 주최하는 파티니까 나라도 꼭 와보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로군. "사실 왕은 일거리를 더 늘린 거나 다름 없어요." 사람들 속에 있던 우리는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홀의 외곽쪽으로 물러 났다. 주로 하인들이 다니는 이 부근은 다행히 인간밀도가 적었다. 한 손에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들고 마시며 나는 유디스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루센의 얘기에 귀 기울였다. "수 주전부터 정복국에서 알현하러 온 대표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시기에 파티라니 제 무덤을 판 거죠. 귀족들이 잔뜩 몰려 올 게 뻔한데 하필 이 바쁜 시기에 연회를 열다니요. 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사실 이 파티는 즉흥적으로 열린 거나 다름 없다. 그러고 보니 루센한테 그 얘기를 안 했네. 할까 말까.....음...하지만 원래 계획이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파티였다는 것은 창피해서 말하기 싫다. 그래서 그냥 멋쩍게 웃으며 쿠키를 집어 먹으며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루센과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 갔고 연회는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슬슬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연회장 안을 구경하는 것은 즐겁긴 했지만 그것도 이젠 지겹다. 배도 부르고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사람도 많아 조금 짜증이 났다. 어차피 유디스도 못 올 거라고 하니 흥미를 잃은 파티에 더 있을 필요도 없었다. 루센과 테이그에게 이만 돌아 가자고 말하려고 하는데 저만치서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어라, 유디스가 왜 벌써 돌아온 거지? "음? 이상하네요. 벌써 알현이 끝났을 리는 없을 텐데." 루센이 붉은 색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입에서 떼면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 틈에 둘러싸인 유디스의 얼굴은 짜증으로 굳어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저들끼리 하하호호 거리며 친한 체를 했다. 나는 그 무리를 비집고 녀석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솔직히 저 인파를 뚫을 생각을 하니 암담하다. 유디스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내가 손을 들어 크게 흔들자 그제야 표정이 풀어지며 환하게 웃는다. "이쪽으로 오는 데요?" 루센이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다. 왕과 대면하는 루센은 언제나 긴장하고 있어서 옆에 있는 나도 같이 긴장하곤 했지만 오늘은 기운도 없고 별로 긴장감이 들지 않아 그저 유디스를 향해 방싯거리며 손짓만 했다. 사실 웃기기도 했다. 유디스가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그 주위를 사람들이 졸졸졸 따라오고 있어서 모양이 좀 우스웠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까부터 나를 향해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사람들이 이때가 기회다 싶은지 슬금슬금 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 많이 기다렸지?" 등 뒤에 귀부인과 신사들을 잔뜩 끌고 오며 유디스가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베어 있는 걸 보니 꽤나 급하게 왔나보다. 오늘은 얼굴을 못 볼 줄 알았던 녀석이 이렇게 등장하자 나도 반가운 마음에 무언가 말을 하려 하는데 주위에서 수 많은 목소리들이 튀어나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머어머 아까 전하와 함께 춤을 추시던 분이시군요!" "저도 봤지요. 처음엔 어색했지만 역시 남자들의 춤이라서 그런지 패기가 넘치더군요." "어느 집안 자제분인지 정말 세련된 분이십니다. 전하와 똑같은 옷이 아주 잘 어울려요!" "총명해 보이시는 분이군요. 몇 년 뒤면 늠름한 청년이 되겠는데요. 오호호호" "연회에서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입니다만. 전하, 저희에게 소개 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뭐야 이 사람들, 왜 갑자기 나한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건데? 그리고 거기 당신! 아까 나 노려보느라 사팔이 되지 않을까 내가 걱정해준 사람이잖아! 뭐가 세련됐다고? 루센과 테이그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내 등뒤로 바짝 다가섰다. 나는 느닷없는 아부공세에 당황하며 유디스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녀석의 얼굴도 편해 보이진 않다. 사람들은 입에 발린 칭찬을 잔뜩 늘어 놓으며 어서 나를 소개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질투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묘한 표정이 그들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에드바라하의 윤승호다." 참다 못한 유디스가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별로 화난 목소리라거나 짜증이 담겨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한가로운 음악만이 부드럽게 홀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에..에드바라하?" "그...별궁에 볼모로 잡혀 있다는?" 자신들도 모르게 튀어 나온 중얼거림에 스스로도 놀랐는지 황급히 입을 막는다. 기기묘묘한 표정으로 동작 그만 자세가 된 사람들을 바라보니 코메디가 따로 없다. 수시로 울그락붉으락하고 표정이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쩌억 벌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얼굴 가득 경멸의 빛을 담고 고개를 팩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침묵의 순간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에드바라하의 분이시군요! 이거 뵈어서 영광입니다. 전 자이카나의 벨미르라고 합니다." "에드바라하라면 그 유서 깊은 가문이잖아요? 이제 곧 정식으로 왕궁의 가문이 되면 전하는 더욱 더 든든하시겠군요!" "같은 왕가의 가문끼리 친하게 지냅시다. 전 루탄의 로드만입니다." "어마, 저도 같은 왕궁소속 아오네르의 첼라예요. 잘 부탁해요." "이거 왕가의 권속끼리만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맙시다. 메르비아의 거스웰이라고 합니다." 양 손이 모자랄 정도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잡혀 정신 없이 악수를 했다. 아까의 침묵이 거짓이라는 듯 사람들은 더욱 더 목소리를 높여 자기 소개를 하고 한마디라도 더 말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서로가 서로의 말을 잘라버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악수는 나랑 하면서 왜 자기 소개는 유디스를 보면서 하는 건데? 조금 한심한 얘기지만 나는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데에는 이골이 나있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안색을 살폈고 학교에선 진유현과 반 아이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경멸의 감정은 씁쓸한 일이지만 누구보다도 잘 읽어 낼 수 있다. 아무리 나한테 입바른 칭찬을 하고 악수를 하며 자기소개를 해도 진심으로 웃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경멸과 조롱의 빛을 얼굴에 띠고 있었다. 심한 경우 나랑 악수를 하고 나서 슬쩍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사람도 있다. 더우니까 손바닥에 난 땀을 닦기 위한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뭐 눈에는 뭐 만 보인다고 지금의 내 눈엔 손바닥을 바지에 닦는 행동까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루센과 테이그가 왜 귀족을 싫어 하는지 조금 알 거 같다. "이만 가지. 난 승호와 할 얘기가 있어." 수 많은 손들이 악귀처럼 달라붙는 내 손을 낚아채고 유디스가 기분 나쁜 티를 잔뜩 드러내며 말했다. 유디스가 나를 자신쪽으로 끌어 당기는 아주 짧은 순간에 생긴 빈틈을 노려 루센과 테이그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그 동작들이 너무 자연스럽고 빨라서 사람들은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 채 나와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다음 기회에 뵙도록 하죠." 루센이 미소를 띠며 주변 사람들을 다독거렸다. 이쯤 되면 보디가드가 따로 없다. 테이그의 덩치와 루센의 말빨로 사람들의 마수에서 벗어난 나는 그 둘의 등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둘의 믿음직스러움을 확인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진짜 내 친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유디스와 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쉴 만한 공간을 찾고 있었다. 여전히 파리떼처럼 사람들이 유디스에게 달려들고 옆에 혹처럼 붙어 있는 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단단히 화가 났는지 유디스는 말도 안하고 그저 말 거는 사람들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잘못 붙였다가 왕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은 청년들과 아가씨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저만치서 사람들 틈에 파묻혀 고생하는 루센과 테이그가 보인다. 두 사람은 빨리 유디스와 나를 쫓아오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이번엔 주변의 레이디들이 루센의 옷자락을 잡고 안 놔준다. 음...잘생긴 것도 고생이다. "이층으로 가자." 계단을 향해 걸어가며 유디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이층에도 사람이 있었지만 일층 만큼은 아니었다. 왕의 좌석이 일층에 있는 탓에 대부분은 일층에서 어슬렁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가는 우리를 보고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 온다. 유디스는 조그맣게 욕하더니 황급히 나를 끌고 이층의 발코니로 몸을 숨겼다. "귀찮은 것들. 평소에 내가 뭣 좀 한다고 나서면 안된다고 목에 핏대 세우는 것들이 이런데선 꼭 친한 척을 하지." 유디스는 "쳇"하더니 발코니 난간을 발로 찼다. 딱딱하고 튼튼해 보이는 대리석의 난간에 손을 대어보니 한기가 스며들었다. 마침 더워서 기분 나쁜 참이었는데 냉기가 팔을 타고 전달되니 긴장이 풀린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부치고 난간에 기대어 있으니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훤히 드러난 앞이마를 훑고 간다. 나는 시원한 공기와 달빛에 마음이 느긋해져서 피식피식 웃으며 옆에서 툴툴대는 유디스를 바라보고 웃었다. "바쁘다면서 어떻게 왔어? 루센이 오늘 파티엔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거라고 하던데." "내가 금방 온댔잖아. 누구 맘대로 날 파티에서 빼는 거야?" "응? 하지만 알현인지 뭔지로 바쁘다고..." 발코니에 놓인 하얀 의자에 앉으며 유디스가 입을 삐죽이 내민다. 하얀 의자와 하얀 테이블이 셋팅된 발코니에는 달빛이 밝아서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주전자와 유리잔이 두세 개 있었는데 유디스가 주전자에서 무언가를 따르는 걸 보니 이 테이블이 폼으로 있는 건 아닌 가 보다. "그런 형식적인 인사따위 내가 안 받아도 상관없는데, 왜 꼭 나더러 하라는지 모르겠단 말야. 가져온 공물이야 왕궁의 창고에 넣어두고 문서에 기록만 남기면 될 것을 부득부득 내 얼굴을 봐야 한다니 악취미지. 자기네 부족을 쓸어간 인간의 얼굴이 그렇게 보고 싶을까?" 벌컥벌컥 음료를 들이키며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지 탕하고 거칠게 잔을 내려 놓았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금방 온 건데?" "다 취소시켰어." "엥?" "다 돌려보냈다고. 가져온 건 알아서 놓고 가든지 아니면 파티가 끝나고 내가 한가할 때 다시 찾아오든지 하라고 했지." "그, 그래도 되는 거야?" "안 될 거 뭐가 있겠어? 내가 왕인데."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다시 음료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러고는 "너도 먹을래? 하고 한 잔 따라주기에 얼결에 잔을 받아 들었다. "파티장까지 쫓아와서 일을 하라니.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귀찮은 연회를 열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궁시렁대면서 유디스가 또 한 잔 음료를 들이킨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무의식 중에 잔을 입에 갖다대었다. 냄새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맛은 달짝지근하니 괜찮았다. 처음 마시는 음료이긴 한데... ......이거 설마 술? 연거푸 세 잔을 들이키던 유디스가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내 옆으로 왔다. "이거 술 같은데." "맞아. 모르고 마셨어? 도수가 약해서 레이디들도 즐겨 마시는 거야." 하긴, 술인지 음료인지도 모를 만큼 달다. 술을 홀짝거리며 발코니 아래를 바라보니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한편에 보이고 멀리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파티라서 그런지 경비는 더욱 강화되었음에도 궁 전체가 워낙 소란스럽게 북적대고 여기저기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위압감은 들지 않는다. "기분 나쁘지 않았어?" 한동안 말이 없던 유디스가 발코니 아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파티랍시고 그 비죽비죽하던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한 걸 보니 왠지 진유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나는 그 모습을 쓰게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는 "뭐가?"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예상은 했지. 네가 에드바라하라는 게 알려지면 바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면서도 너를 이런 자리에 데려와 보고 싶었다. 어차피 네가 왕궁사람이 되면 겪어야 할 통과절차이기도 했고." "상관 안해. 그런 바보 같은 춤만 안 춘다면." 한껏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름대로 아까의 광대짓에 대한 항의였던 거다. 그러나 유디스는 큭큭대며 웃더니 잔뜩 뒤로 넘긴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이거 누구 작품이야? 보나마나 그 루센이라는 녀석이겠군." "이상하지 않아? 완전 아저씨들 머리 스타일이잖아." "그러고 보니 평소보단 나이 들어 보이긴 한다." "약 올리냐?" 나름대로 인상을 쓰며 노려 봤지만 유디스는 남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방실거리기만 한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화도 나지 않아서 술만 홀짝거리고 있는데 벌써 다 마셨다. "더 줄까?" "응." 본격적인 가을이 다가오는 계절의 밤바람은 꽤 서늘했다. 땀이 식으니 약간 쌀쌀한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이정도가 딱 기분이 좋을 정도로 적당했다. 아직도 홀에선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누군지 모를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어느새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신 나는 빈 잔만 든 채 저 멀리 어둠속에서 보이는 산자락의 음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유디스가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줄 알고 같이 마주봐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말은 안하고 점점 가까이 다가 온다. 손을 들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볼살과 턱살을 만지며 몸을 굽혀 온다. 왠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어서 "왜 그래?"하고 어색한 침묵을 깼다. "윤승호. 영광으로 알아라." "뭘?" 뜬금없는 말이라 이해를 못했다. 멀뚱멀뚱 눈만 깜박이며 녀석을 바라보는데 유디스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엄숙히 말했다. "너, 이 몸이 좋아해 주는 거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미간을 찌푸리고 입 모양은 "으웩"할 때와 비슷한 모양이 되어서 꽤나 이상한 얼굴일 게다. "그래,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으이구." 저 오만함이라니. 오냐오냐, 친하게 지내주는 거 감사하란 말이지? 나쁜 뜻이 없다는 건 알지만 솔직히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왕이라서 천성적으로 거만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이해해 주기로 했다. "아니, 아니,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유디스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막고 당황하며 대리석 난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여자라면 왕비가 되었을 거란 소리야." 무언가 굉장히 빙빙 돌려 말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녀석이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버벅대는 것일까. 나는 유리잔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면서 녀석의 드물게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좋냐?" "뭘 그런걸 물어보냐?" 어울리지 않게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묻는데 왠지 실없어 보여서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친구끼리라도 그런 거 물어 보면 좀 쑥스럽긴 하지. 뭐야, 새삼스럽게 우정을 재확인해보고 싶었어? 복잡한 표정의 유디스는 계속 무언가 말을 입안으로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그렇게 조바심 내는 게 성질에 안 맞았는지 "젠장...."하고 화를 내더니 애꿎은 난간을 발로 찬다. "제기랄....어째서 너 따위가..." 유디스의 불안한 모습에 나도 웃음기를 지우고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나......왜 저 녀석이 저렇게 거칠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나도 약간 정신이 멍멍한 것이 이게 소위 말하는 취기라고 하는 건가 보다. "너 따위가 왜..." 점점 불안해 진다. 술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표정이나 말투가 너무 진지하다. 험악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참을 수 없어서 유디스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왜 그래? 내가 또 실수한 거야?" 붙잡은 팔이 뜨겁다. 열기가 옷 위로 느껴진다. 얼굴은 달빛을 받아 창백한데 손으로 전달되는 뜨거움은 어디 아픈 게 아닌가 걱정 될 정도였다. 그리고 유디스는 그제야 진정을 한 듯 숨을 고르며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화난 것도, 취한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이었다. "누가 실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희미하게 웃더니 내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 쥔다. 얼굴이 코앞까지 닿았다 싶더니 머뭇거리는 건 잠깐. 바싹 마른 입술이 닿았다. 머리가 멍멍하다. "웅......" 숨쉬기가 힘들어서 목을 비틀어 얼굴을 돌리려고 했다. 뜨거운 손이 뺨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코로만 숨을 쉬자니 숨소리와 입에서 나는 마찰음이 너무 야하게 들려서 창피해 미칠 것 같다. 커다랗게 뜬 눈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유디스의 흑갈색 눈동자가 들어 왔다. 저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차마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어떻게 하지? 뿌리쳐야 하나? 발을 밟아? 급소를 무릎으로 쳐올릴까? 아니 그랬다간 에드바라하가 통째로 날아갈 거야! 호, 호응해 줘야 하나? 그럼 어떻게? 나도 같이 혀를 움직여? 우와악! 그런 짓을 어떻게 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알만 도록도록 굴리며 유디스의 안색을 살폈다. 녀석이 입술과 혀를 부벼왔지만 긴장 탓에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드러운 고민을 하고 있는데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액체를 닦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겹쳤다. "흐응..." 미약한 비음을 내며 녀석이 내 뒤통수를 붙들고 자신의 입으로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 약간의 움직임에도 깜짝 놀라 몸을 움칫거렸는데 녀석도 놀랬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큼지막해진다. 그리고는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봐서 부담스럽게 만들었던 유디스의 눈동자에 속눈썹이 드리워지면서 그늘을 만들었다. 그래, 차라리 감아라. 감아. 부담스런 눈빛이 사라졌다 싶더니 녀석이 허리를 강하게 잡아 당긴다. 아마 이 튼튼하고 딱딱한 대리석 난간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난 진작에 저 아래 숲속으로 곤두박질 쳤을 것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리석 난간 건설업자에게 감사를 하면서 겨우 몸을 기대어 지탱하고 있었다. "하아" 뜨거운 숨이 턱끝을 간질인다. 녀석의 입이 언제 턱으로 옮겨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입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을 할 수 있다! "저, 저기 유디스?" 이 멍청이! 좀 더 강하게! 더듬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하라고! "뭐, 뭐하는 거야. 그만둬..." 이런 패기 없이 모기만한 목소리라니! 유디스는 들리지도 않는지 숨을 뿜어내며 목덜미의 살에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호흡이 자유로워지자 몸에도 힘이 들어간다. 팔에 힘을 실어 녀석이 기분 나쁘지 않게 밀어내면서 그만두라고 말했다. "왜 그래?" 녀석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귓가에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나 싶어서 귓가를 벅벅긁으며 녀석한테서 떨어졌다. "내가 물을 말이야. 갑자기 무슨 짓 하는 거야?" 새빨갛게 익은 얼굴이지만 겨우 나도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더듬거렸지만 찬바람에 머리가 식자 온갖 하고 싶은 말들이 뇌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너도 승낙한 거 아니었어?" 유디스가 숨을 몰아쉬며 흐트러진 자세로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온갖 하고 싶었던 말들이 목구멍에서 탁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입만 쩌억 벌린 채 "너, 너, 너, 너..."하는 말만 반복했다. "하긴, 기분 나빴어도 왕인 나한테는 함부로 하지 못하겠군. 너 은근히 그런 거에 민감하니까." 아직 녀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지만 냉정을 되찾은 것 같다.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고. 그러니 승낙이라는 둥 그런 무서운 말은 쓰지 마!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입가의 침을 닦아내며 유디스의 말에 긍정을 표시하기 위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태도가 맘에 안 들었는지 녀석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싫어? 아니면 이제부터 싫어질 건가." 싸늘하게 말하는 얼굴이 무서웠다. "아니, 싫고 좋고를 떠나..이런 건...어...그러니까.... 어...우린 친구고...남자끼리고...그 뭐시냐...아직 미성년자에...에....." 더듬거리면서 녀석의 마음을 돌릴만한 적당한 말을 생각하려 했지만... 제기랄, 이 상황에 적당한 말이 어딨냐! 유디스가 다시 가까이 다가온다.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역시 네 녀석을 보면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정상은 아닌가 보다. 다른 사람들이 늘 하는 말있잖아. 왕은 미쳤다고." 녀석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진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녀석 답지 않다. 행여 도망갈까 봐 살금살금 다가오는 폼은 잠자리를 잡기 위해 발걸음을 죽이는 어린애와 같았다. 덥석 허리와 어깨를 잡힌 나는 펄쩍 뛰며 놀랐지만 유디스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었다. "그,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하려던 게 이거였어?" 뜨거운 녀석의 몸을 옷 위로 느끼면서 진저리를 쳤다. 목 위를 핥는 혓바닥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녀석은 아무 말없이 더 꽉 몸을 끌어안았고 복잡해진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취기 같은 건 날아간지 오래다. "저, 저기...역시 이런 건 곤란해... 그...." "흥. 혐오스럽다는 건가? 역겨워?"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가는 거냐! 목에 입술을 묻고 말하는 통에 간지러워 미치겠다. 목을 움츠린 탓에 녀석의 머리가 내 턱에 부딪힌 것도 여러 번이었지만 포기를 안 한다. 목줄기를 타고 올라와 귀로 이빨을 가져간 녀석은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지만 목에다가 이상한 짓 하는 것보다는 간지러움이 덜해서 차라리 나았다......아니, 지금 뭐가 낫다는 거야! "자, 잠깐! 기다려 유디스! 이건 아니야, 아니라구!" 차마 거칠게 내치지는 못하고 녀석의 입술만 떨어뜨리는데 성공했다. 허리와 어깨를 꽉 움켜쥔 녀석은 차가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런 무서운 얼굴 하지마. 진유현이 생각나잖아. "에...저기, 차근차근 얘기를 하자. 그래. 같이 얘기하다 보면 뭔가 좋은 방도가 생각날 거야. 에...이런 건 아무래도 인륜적으로나 도덕적으로....그..사회적으로도....에.....그, 그리고 역시 다른 사람보기에도 좀..." 가만히 내려다보던 유디스가 팔에 힘을 뺀다. 겨우 해방된 나는 어느새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었지만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뭐라건 상관 안 해. 왕은 나야." 귀에 닿는 유디스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그리고 뭘 어떻게 얘기를 하자는 거지? 내가 너를 만지고 싶은 거, 입 맞추고 싶은 거, 안고 싶은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해야 해?" 으악! 귀에 식용유를 들이 붇는 기분이다! 벌써 온 몸에 소름이 다다다다 솟아 오른다. "나, 나는 이런 거 아직은....그러니까.... 네가 싫다는 소리가 아니라....아무튼 난 남자고...." 머릿속으로는 온갖 말들이 뒤죽박죽인데 하나도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유디스가 우울하게 쳐다보는데 그 얼굴을 보니 싫은 소리도 못하겠다. "저기...그러니까 나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거 같아. 나는 좀 혼란스럽고 갑작스럽게 너랑 그...그...접촉 같은 거 하기엔 아무래도 좀 그래서...일단 시간을 줘." 겨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지금 필요한건 시간이고 일단 여기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유디스는 내 말에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휴우-하고 한숨을 쉬는데 녀석이 다시 살그머니 끌어 안는다. "기다리게 하지마. 나 그런거 체질에 안 맞으니까." 따뜻한 체온이 싫지는 않다. 그래. 이런 건 싫지 않아. 하지만 이대로 더 있다간 아까의 재현이 될까 봐 유디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려 준 후 얼른 그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럼 나 먼저 루센에게 가볼게. 지금쯤 엄청 찾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황급히 발코니를 벗어났다. 유디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끌어 안았던 자신의 양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발코니를 빠져 나오니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정신없이 이층을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밤은 깊어서 사람들 대부분이 귀가했는지 이층엔 인적이 드물었다. 언뜻 바라본 일층도 사람 수가 전보다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래, 우선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해보자. 돌아가서....아, 그러고 보니 화장실이 급하다. 아까 잔뜩 먹었으니 먹은 만큼 빼줘야 하는데....화장실이 어딨더라......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 보았다. 어찌나 구석에 쳐 박혀있는지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화장실을 발견하고는 볼 일을 볼 수 있었다. 일을 마치고 문밖으로 나와 이제 루센과 테이그를 찾아 돌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층으로 가는 계단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데 환하게 밝혀진 복도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홀로 꾸며진 일층과 달리 이층은 절반은 널찍한 공간이고 절반은 휴식을 위한 방들이 준비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개의 복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런, 그냥 아까 일층으로 내려갈 걸 그랬나. 무슨 성이 이렇게 넓냐? 계단이 보여서 반가운 마음에 내려가 보면 일층이 아니라 어딘가 이상한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홀은 안 나오고 자꾸 아래로 아래로 연결되는 계단에는 벽에 횃불이 음산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래서는 더 엉뚱한 곳으로 가게 생겼다.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의 어둠이 무서워서 황급히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 올라갔다. 이층의 환한 복도를 보니 그나마 안심이다. "진짜 아무도 없네...." 무턱대고 다니는 걸 그만두고 복도를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걷고 있었다. 창 밖으로 귀가하는 마차들이 줄지어 가는 것이 보인다. 연회장의 음악은 아직 그치지 않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줄어들고 달이 많이 기울어 있는 걸 보니 이제 곧 파티가 끝나려나 보다. "아니, 에드바라하분 아니십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청년이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좀 험악한 인상으로 무뚝뚝하게 서 있었는데 옷차림이 지나치게 수수한 걸 보면 파티에 참석하려는 게 아니라 저 청년을 호위하러 온 사람들 같다. 아무튼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엄청 반갑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아까 인사드렸는데. 자이카나의 벨미르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혼자 계십니까?" "아,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느라고요. 홀에 가려던 중입니다." 악수를 청한 그의 손을 맞잡고 최대한 호의를 담아 웃어 주었다. 이제 이 사람에게 일층으로 가는 계단만 안내 받으면 된다. 하지만 차마 일층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가 앞장서게 만들려고 했는데 이 사람,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이야, 설마 전하와 그렇게 친분을 맺은 사람이 헤시안님과 아디움님 외에 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망한 가문이라도 에드바라하는 뭔가 다르군요." "아하하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 거라니요. 워낙 왕좌를 비워놓는 날이 많으셔서 좀처럼 얼굴보기도 힘든 분을 매일같이 만나고 계신다니 보통 일이 아니죠. 어쩌면 에드바라하가 왕의 밑에서 다시 한 번 권력을 잡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을 정도랍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나? 이 사람들, 과민반응하기는....나랑 유디스는 그런 정치적인 일은 거의 얘기를 안하고 있다구. 어색하게 웃으며 오해를 풀어주려고 하는데 청년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지 좀처럼 내가 말할 기회를 안 준다. "듣자 하니 전하와 말을 놓고 계신다면서요? 이야~ 3대에 걸쳐 충성을 바친 저희 자이카나에서도 한 번도 그런 영광을 안는 자가 나오지 못했는데 과연 에드바라하. 루탄과 아오네르도 온갖 뇌물과 아리따운 여식을 바쳐가며 환심을 사려했지만 실패한 일을, 고작 백 수레도 채 안되는 공물과 동갑내기 소년 하나로 한 달도 채 안되어 전하의 마음을 사다니 윤승호님도 대단하지만 에드바라하의 가주라는 카이님의 얼굴 또한 무척 궁금해지는군요." 청년의 얼굴은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분노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표정을 한가득 담고서, 입술 끝을 끌어올려 어느새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된 그는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끼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퍼억 뒤통수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아프다는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몸은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머리 위해서 잔뜩 성이 난 청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드바라하의 둘째 적자라고? 에드바라하가 외동아들 하나 있다는 것은 나이 든 귀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녀석을 왕궁 안에 두다니 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 아냐?" 유디스를 욕하지마 이 나쁜 놈아..... 시끄럽게 떠드는 청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의식이 점점 멀어져갔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하인들이 뒷정리 하느라 바쁜 연회장안에는 어제의 파티가 거짓말처럼 조용하고 험악한 공기가 가득 차있었다. 이미 손님들이 돌아간 연회장이지만 병사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고 홀의 바깥에선 마차들이 줄을 지어 병사들의 엄중한 검사를 받고 있었다. 아직도 궁의 한편에 대기하고 있는 여러 대의 마차들은 그 마차의 주인들이 이 궁 안에서 머문다는 것을 증명하듯 마부도 없이 말들의 고삐만 말뚝에 줄이 메어져 있었다. 마차에 메여 있긴 해도 말들은 별로 불만이 없는 듯 하인들이 가져다준 여물을 먹으며 한가롭게 푸르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말들이 여물을 먹으며 쉬고 있는 동안 하인들과 병사들이 마차의 내부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다. 왕성이란 곳은 참 까다로운 곳이구나. 저렇게 손님들의 마차까지 일일이 수색해야 하다니 병사들도 피곤하겠어. 그런데...내가 어째서 이런 풍경을 보고 있는 거지? 내 몸은 실체가 없었다. 그리고 바라보는 풍경도 마치 하늘 위에서 본 것 같이 시선의 각도가 평소와 달랐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그래! 루센과 테이그가 웬 복면한 남자들을 죽이는 꿈을 꿨을 때, 그때와 느낌이 흡사하다. 그렇다면 이게 꿈? 이렇게 리얼한데? "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래도 넌 왕의 사촌이잖아!" 어딘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연회가 열렸던 궁의 후원....아니 훨씬 멀다. 저 멀리 왕 궁의 바깥 쪽이다. 어떻게 저렇게 먼 곳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이 낯익은 목소리에 내 시선은 그리로 옮겨갔다. 목소리가 임경철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시야가 휙 하고 바뀐다. 어느새 나는 성 밖에 있었고 마차에서 내리는 오세준 무리...아니, 아디움과 그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박재석, 김한수, 강지원, 임경철과 똑같은 얼굴의 그들은 머리색만 다르고 옷차림만 이상할 뿐이었다. 어딘가에서 한바탕 놀다 온 듯 옷 매무새는 흐트러져 있고 상당히 취한 것 같았다. "우리 완전 찬밥신세 아니냐? 망할, 왕이 그럴 줄 몰랐다." 박재석과 똑같이 생긴 녀석이 술에 얼굴이 벌겋게 변해 투덜거린다. "야, 야. 언제 왕이 우리한테 상관이나 했냐? 아딘한테만 잘해줬지 우리는 그냥 들러리 취급이었잖아." "아무튼! 뭐 좋아. 그렇다고 쳐. 그리고 맨날 우리는 없는 인간 취급하던 왕이 왜 갑자기 우리보고 왕 성 출입을 하지 말라는 거야? 더구나 본 궁에서 사는 아딘한테는 그 에드바라하 놈한테 접근하지도 말라고 했다면서? 그 자식을 유디스한테 알려 준 게 아딘인데 이게 대체 무슨 경우냐고!" 저마다 한마디씩 불평하며 화를 토했다. 몰랐다. 유디스가 아딘한테 그런 말까지 했나? "그리고 어제는 그 뭐야....왕이 전쟁에서 돌아 온 후 처음으로 여는 연회였잖아. 그 중요한 자리에 아딘과 우리만 출입금지? 야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냐?" 임경철을 닮은 녀석은 그렇게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흥분을 했는지 얼굴이 시뻘겋다. 녀석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까지 이상해 진다. 갑자기 아딘과 유디스의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한 거야? 그렇다면 왜? "아딘. 너 왕한테 무슨 잘못한 거 있냐?" 불만을 뿜어내는 당사자와는 달리 아딘은 별달리 표정의 변화가 없다. 조금 미소지은 것 뿐이랄까. 별로 웃음이 나올 상황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겠어. 나를 무서워 하니까 피해 있으라잖냐." "뭐? 왕이 그래? 그 자식이 너 무서워 하니까?" 박재석을 닮은 놈이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강지원 판박이가 "야, 조용히 해!"하고 핀잔을 준다. 아디움이 헛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댄다. "어제의 연회도 윤승호가 오니까 나는 오지 말라던데?" "야! 그거 완전 배신아냐 배신?!" 녀석들이 흥분으로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른다. 옆에서 마차를 지키고 있던 마부들과 시종들이 움칫 어깨를 떠는 것이 좀 안쓰러웠다. "그래도 어젯밤은 다른 곳에서 실컷 놀았잖아? 그럼 됐지 뭘 그래?" 능청맞게 웃는 아디움의 얼굴을 보며 일행은 가슴을 치며 답답해 했다. "그게 논 거냐? 스트레스 해소지! 명망있는 귀족들은 다 그리로 가버리고, 나머지 삼류 귀족들이나 돈 많은 평민들하고 진탕 퍼 마시고 싸움질 한 거. 그게 논 거라고 할 수 있냐? 엉?" 이것 참. 이거 꿈이라기엔 너무 사실적인데...지금 내가 보고 들은 게 맞다면 이유는 모르겠지만...아니,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지만 녀석들을 왕궁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음, 하지만 유디스가 어떻게 내가 저 녀석들을 싫어 한다는 걸 알았을까? 아, 어쩌면 아딘이 내 얘기를 하면서 말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날 귀보르냑 성이 함락 되던 그날 밤의 일은 나름대로 이야깃거리가 많았을 테니. "자자, 진정하고. 벌써 새벽도 지났고 아침이라구. 밤새도록 놀았으니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 오늘 저녁 또 놀 수 있지." 아디움이 박재석과 임경철을 닮은 두 놈을 진정시키며 도로 마차에 태우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이미 뻗어버린 김한수를 닮은 녀석이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아딘은 세 녀석을 실은 마차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마부에게 얼른 가라고 손짓한다. 마차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두 녀석의 얼굴이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런데...." 남은 건 아디움과 강지원을 닮은 녀석 둘이다. 마차 두 대가 주인을 기다리듯 한쪽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넌 기분 나쁘지 않아? 너네 둘. 아니, 전하와 넌 나름대로 잘 맞았잖아." 강지원을 닮은 녀석이 조심스레 말을 걸자 아디움은 묘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뭐 내가 이해해야지." 녀석은 약간 허허로운 표정으로 환하게 밝아진 아침 하늘을 응시했다. "이게 다 사랑 탓 아니겠어?" "엥?"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친구를 아디움은 키득거리는 작은 웃음으로 응수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아디움의 친구, 강지원을 닮은 그 녀석은 한숨을 쉬며 아디움의 어깨를 다독였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 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이만 가볼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그렇게 또 한 대의 마차가 조용한 아침의 길을 다그닥 거리며 멀어져 갔다. 친구들을 모두 보낸 아디움은 잠시 그렇게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더니 자신도 마차에 올라 타 성으로 갈 것을 마부에게 명령했다. 갑자기 아디움이 쓸쓸해 보여서 녀석의 안색을 살피는데 왠 걸, 녀석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혼자 큭큭대는 것이다. "왕 궁에 봄이 왔어요~" 내가 한순간이라도 저 놈을 생각해 준 게 잘못이지.... 성으로 향하는 아디움의 마차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며 혀를 찼다. 더 이상 볼 거리가 없어진 나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주려는데 저 멀리서 말을 탄 병사가 급히 아디움의 마차를 향해 달려 오는 것이 보인다. "큰일입니다. 아디움님!!!"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마차가 멈춘다. 아디움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이야?" 하고 묻자 병사가 숨을 고를 생각도 안 하고 급히 말을 쏟아 내었다. "왕께서 군대를 소집하셨습니다. 에드바라하의 분께서 현재 행방불명. 납치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에드바라하의 분이라면 나? 납치? 아 맞아. 나 아까 어떤 귀족 청년이랑 얘기하고 있다가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 맞고.... 목이 마르고 팔다리가 저려왔다. 눈이 뻑뻑해서 잘 떠지지도 않는데 뒤통수까지 시큰거려 기분이 나쁘다. 꾸물거리며 몸을 움직여보는데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고 주변 상황이 파악 될 때쯤에서야 내가 팔다리가 묶인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떴나 도련님." 잠시 현실이 제대로 인식 되지 않았다. 방금 전만 해도 연회가 열리는 홀의 이층을 헤매고 있었다. 아니, 왕성 입구에서 아디움을 본 게 더 나중 일이었나? 대체 내가 꿈을 꾼 거야, 아니면 실제로 그 자리, 아디움이 있던 그 곳에 있었던 거야? 몸을 일으켜 보려 해도 그 동작은 꿈틀거림에 불과했다.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등 뒤로 단단하게 묶여진 밧줄은 움직일 수록 손목에 상처만 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자 다시 뒷통수가 시큰해 진다. "아야야...." 신음을 내지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두 팔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몇 번 턱을 바닥에 찧을 뻔했지만 어깨와 허리를 비비적대면서 그럭저럭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아..." 허름한 골방 안엔 다 낡아 가는 침대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그 하나뿐인 의자에 어제의 그 귀족 청년이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청년의 보디가드로 보이는 덩치 좋은 어른 남자 두 명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청년은 밤을 꼬박 샌 듯 얼굴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옷도 파티 때 입었던 옷 그대로였지만 눈만 살아서 번뜩이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불안해서 떨리려는 목소리를 누르고 가능한 조용히 말했다. "몇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청년은 의자를 당겨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위협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 보지만 워낙 작은 방이라 금방 벽이 등에 닿았다. "대체 뭘로 왕을 구워 삶았나?" 청년이 초췌한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내가 입고 있는 하얀 천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대놓고 왕이 다른 사람을 가까이 둔 건 헤시안과 아디움 이후 네가 처음이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은 왕족이고 어렸을 때부터 왕과 같이 자랐다는 메리트가 있어. 그런데 넌 뭐지? 에드바라하에서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거냐." 전폭적인 지지라니, 에드바라하는 오히려 의식이 연기 되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뭔가 착각하는 거야. 내가 왕과 친하게 지내는 게 무슨 정치적인 건 줄 알고 있어. "오해예요. 나는 다만 왕과 나이가 같아서...그래서 왕이 친근감을 느끼고..." "농담하나? 이 넓은 성 안은 물론, 매일 성으로 얼굴을 내비치는 할 일 없는 귀족들 중에 왕과 동갑인 소년소녀가 대체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그 왕이 비슷한 또래에게서 친근함을 느끼는 귀여운 성격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어이없다는 듯, 그리고 다분히 비웃음 가득한 어조로 청년이 되묻는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내가 물을 말이다. 그 수 많은 아리따운 아가씨들 놔두고 왜 나한테 그런 짓을 하냐고. 간 밤의 일이 떠올라 당황했다. 그런 내 표정변화를 또 오해했는지 청년이 눈에 불을 켜고 어깨를 잡아 흔든다. "말해봐. 에드바라하에선 무엇을 바친 거지? 뭔가 획기적인 것이 우리 자이카나도 모를 만큼 비밀리에 오고 간 건가? 아니면......" 청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내 턱을 잡아 올리고는 이리저리 뜯어 보더니 자신 없는 말투로 한숨 쉬듯 내뱉는다. "왕은 남색이 취향이신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청년의 녹색 눈을 바라보았다. 곧 청년은 후회한 듯 내 턱에서 손을 치우고 다시 의자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실없는 소리를....잊어라. 정말로 남색을 밝히신다면 좀 더 제대로 된 게 왔겠지." 절반은 맞춰 놓고서도 청년은 자신의 추리를 거부하듯 고개를 털었다. 이거 안심해야 하나 불쾌해 해야 하나 묘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청년의 피곤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감고, 팔걸이에 팔꿈치를 받치고,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압하는 청년은 무얼 생각하는 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조용히 청년에게 물었다. 잘생겼지만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눈두덩이가 움푹 패인 청년의 인상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묻나. 이제까진 잘도 피해왔다만 이번엔 우리쪽에 운이 따라줬던 거지. 정말 굉장한 수행원들이 붙어 있더군. 표면상으로는 네 후견인이라고 하지만 그 솜씨가 귀족이라고? 난 차라리 카이라는 자가 결탁했다던 도둑의 무리에서 뛰어난 자들을 골라 보냈다는 데에 손을 들겠어." 오싹하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 너무 잘 알고 있다. 내가 에드바라하의 둘째 아들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고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루센과 테이그의 정체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가장 내가 불안함을 느낀 건 이런 일을 마치 여러 번 시도해 본 뉘앙스라는 거다. "저어...잘 모르겠는데...무슨 뜻이죠? 이제까지 운이 좋았다는 얘긴?" 청년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른다니 무슨 말이냐?"라고 묻더니 대답이 없는 내 얼굴을 보고 혀를 찬다. "너 설마 그들에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나? 우리가 보낸 자객들을 몇 명이나 죽여 놓고서도 설명 한마디 없었다고?"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꿈에서 봤던 루센의 낯선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발치에 죽어 있던 복면의 사나이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어? "무슨 소리에요? 자객이라구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움찔하고 청년 뒤의 덩치들이 반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지만 내가 위협의 대상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너..." 청년이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머릿속으로 무언가 굉장히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손은 턱을 받치고 또 한 손으론 턱을 받친 팔을 받치고 좁은 골방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쿡. 쿡쿡쿡..." 갑자기 작은 웃음소리를 내는 그의 행동이 불안함을 느끼며 점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청년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크게 한숨을 쉰다. 뭔가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얼굴이다. "너 말야..." 청년이 다가와 얼굴을 감싸쥐어 자신의 눈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눈동자를 굴려 청년의 녹색 눈을 피하려 했지만 얼굴을 단단히 틀어쥔 거친 손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혹시 평민이냐?" 나도 모르게 몸이 꿈틀거린 건 순전히 반사 행동이었다.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녀석이었던가? 하지만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배겨낼 수가 없었다. "불쌍하게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청년이 헛웃음을 지으며 내 얼굴에서 손을 뗐다. "에드바라하 쪽에서 가짜 아들로 보낸 만큼 뭔가 대단한 녀석일 줄 알았는데. 완전히 텅 빈 껍데기군.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쓸모 있는 걸까. 이거, 한 방 맞은 기분이다."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천정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좀 전 같은 번뜩임은 없었지만 대신 내게 보인 호기심도 사라졌다. "몰랐다니 설명해 주지. 너를 노리는 가문이 자이카나 뿐인 줄 아나? 루탄과 아오네르도 에드바라하 때문에 몸이 달아 있기는 마찬가지지. 적어도 자객이 한두 번씩은 네 방문 앞까지 갔을 거야. 식사 때 발견 된 독극물만 해도 수십 번일 테고 에드바라하에서 하인으로 보냈다는 세 명 중 두 명은 중상. 나머지 한 명은 에드바라하 쪽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 "네?!!" 몰랐다! 그렇다면 에드바라하 삼인방이 그동안 계속 나에게 오지 않았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어? 왜! 어째서 루센은 그런 걸 말해주지 않은 거야?!! 수 많은 기억들이 빠르게 교차했다. 언제가 루센이 내가 먹을 아침식사를 먹다가 토한 일, 유난히 자주 바뀌던 문 밖의 보초병들. 궁에서의 활동은 자유로웠지만 해가 진 후의 외출은 금지였고 유디스랑 같이 식사하기 전에는 항상 내 방에서 따로 먹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일들이 어쩌면 다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도 안 돼....전 궁 안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구요. 성 뒷편이나 아무도 없는 잡초밭 같은 데를 돌아다니다가 아디움자식을 만나기도 하고....아무튼, 아무튼! 난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는데 자객이라구요?" "넌 네가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무 위, 덤불 숲. 그리고 성 위. 너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감시원만해도 성안에 수십 명이 넘어. 가장 문제였던 것은 너를 없애려고 계획하는 가문들이 서로 손을 잡지 않고 따로따로 움직였기 때문에 정보도 부족하고 합동작전을 쓸 주변머리도 없었다는 것이지. 뭐 우리도 너 하나쯤 쉽게 없앨 수 있는 줄 알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건 사실이야. 어제 연회장의 이층을 헤매는 널 발견하고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지.. " ---내가 지금 혼자라고 생각해? 보이지 않는 저 풀숲너머, 성벽 위. 나무 위, 어쩌면 저 강둑 아래에도.... 나를 지키는 걸로 가문의 존속을 보장 받는 녀석들이 포진해 있으니 안심해도 돼. 어쩌면 너의 그 충실한 수행원들도 그 틈에 끼여 있을지도 모르지." 언젠가 유디스와 함께 산책가던 날 녀석이 말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까지 내가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수십 쌍의 눈들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비록 나를 위한 것이었다지만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청년이 의자에 앉으며 입을 쩌억 벌린 채 굳어 있는 내 얼굴을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어째서인지 피곤에 지친 루센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만둬요. 대체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득 될게 뭐가 있어요? 당신 말 대로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이런 거, 분명 들킬 거라구요!" 청년이 아무 표정 없이 내 쪽으로 다가 왔다. 그리고는 품에서 단도를 빼 드는 것을 보고 몸이 움찔 했지만 청년은 내 팔 다리를 결박하고 있는 밧줄들을 잘라낸다. 단도가 날카로운 건지, 청년이 힘이 좋은 건지 두 세 번 만에 밧줄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의외의 행동에 놀랐지만 팔 다리에 피가 통하면서 저릿거리는 감각이 몹시도 괴로웠다. 단도를 든 청년이 나를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득이라고? 에드바라하만 없어져 주면 여러 가문이 편안해지지. 이제까지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왕의 밑에서 벌벌 기면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느날 뚝 떨어진 에드바라하 따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밤잠을 설치는 지 너는 모를 거야." 약간 자조적인 말투로 청년은 살짝 입 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런 표정은 한순간. 이내 원래의 아무것도 담지 않은 얼굴이 되어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증거가 없으면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못한다. 자이카나가 비록 왕가의 권속이라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왕가의 밑에서 조용히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지금 당장 자이카나의 도움이 없다면 왕궁의 재정은 일주일 만에 무너진다고 장담하지. 네 그 훌륭한 수행원들이 나를 의심하는 건 알고 있어. 증거만 없으면 돼. 다른 곳에서 증인이 나와도 위증이라고 주장하면 된다. 그리고 죽은 자는 아무 말도 못하지." 팔다리를 주무르며 두려운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래. 죽은 사람은 아무 말 못해. 그런데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청년은 아까 그 단도를 들고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섭다. 기분 나쁜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설마, 설마 이 사람들...나를? "불쌍한 것." 배에 화끈한 통증이 엄습했다. "가자. 시간이 됐다." 청년은 창으로 밖을 내다 보더니 덩치들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아직도 꽂혀 있는 배의 단도를 보고 망연자실....아니, 엄청난 고통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프다. 엄청나게 아프다! 칼을 뽑으려고 손잡이를 손에 쥐어 보지만 그 약간의 자극에도 뱃속이 아작 나는 느낌이다. 뽑고 싶어도 손에 힘이 안 들어 가고 무엇보다 너무나도 아파서 어찌 할 수가 없다. 숨을 쉴 때마다 칼날에 살갗이 찢어진다. 하얀 옷에 뭉글뭉글 피가 배어든다. 아파. 미치도록 아파!! 살려줘. 이런 데서 죽기 싫어. 아직 유디스와 제대로 얘기도 못 했다구! 벨미르 바보 놈! 여기에 나를 죽이고 가면 시체가 남잖아! 증거를 안 남기고 뭐 어째? 왜 나를 이런데다 죽여놓고 가는 거야! 이렇게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다구!!! 꺼억꺼억 하고 목구멍에서 기괴한 신음이 올라왔다. 너무나도 억울해서 눈물이 흐르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 선다. 그렇게 미묘한 몸의 변화마저도 배의 근육을 움직여 꽂혀있는 칼날은 더욱 고통을 유발한다. 내가 왜 이런 짓을 당해야 하지? 다른 귀족들을 위협한 적도 없고 유디스한테 어떤 부탁을 한 적도 없다. 그냥 친구처럼 놀면서 지낸 게 전부야. 그런데 그게 배에 칼 맞고 죽을 만큼 나쁜 짓이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루센이 내 식사를 먹는 것도 그냥 배고파서 그런 줄 알고 있던 바보다. 에드바라하 삼인방이 교육시키러 오지 않는다고 좋아하던 멍청이라구!! 그래서 지금 벌 받는 건가? 싫어, 그런 이유라면 너무 억울해!! 머릿속이 하얗다. 점점 시야가 흐려져 간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것 같은 허름한 이층집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듯 집 주위는 풀 한 포기 제대로 돋아 있지 않아 황량했고 어찌 보면 폐가처럼 생기기도 했다. 그 폐가의 일층 입구에서 대 여섯 무리들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빠져 나오고 있었다. 벨미르라는 이름의 아까 그 청년과 덩치 두 명. 그리고 이번에 좀 괜찮은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말 몇 마리를 끌고 나왔다. "벨미르님.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생각보다 에드바라하에서 머리를 쓴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였어. 하지만 일은 잘 끝났으니 저 집은 태워버려." 벨미르는 그렇게 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화살촉에 둘둘 말린 헝겊에 불을 붙이더니 활시위에 매겨 그 허름한 집을 향해 쏘았다. 바싹 말라 있던 목재가 불을 만나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두세 개의 불화살이 폐가에 쏘아지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는지 벨미르와 다른 덩치들은 말을 돌려 빠르게 어딘가를 향해 달려 갔다. 나는 깜짝 놀랬다. 내가 왜 이런 풍경을 보고 있는 거야.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각도가 아까의 꿈과 시선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저 폐가의 이층에 있을 내 몸은? 이층의 창을 향해 폐가 안으로 들어 갔다. 안에는 허름한 침대와 의자 하나. 그리고 배에 칼을 꽂은 채 죽어 있는 내 시체가 보였다. 그럼 이건 유체이탈?!! 죽은 거야? 그런 거야? 당황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싶은데 실체가 없으니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물리적으로 진정시킬 방도가 없다. 어찌해야 하나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시체라고 생각했던 내 몸이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직 살아 있다. 배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보면 숨은 쉬고 있는 것 같고 통증 때문인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다. 도움을 청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실체 없는 몸으로 누구를 부른단 말야. 건조한 목재가 불길에 타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뜨거움이 여기까지 번지는 것 같다. 집의 오른편에서 서서히 타들어 오는 불길은 야금야금 폐가의 형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우선 이 불부터, 이 불부터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주위는 황량한 벌판이다. 원래 농부의 집이었는지 아래쪽 창고엔 이런저런 농기구가 쌓여 있지만 얼마나 오래 됐는지 다 녹슬어 있다. 뒷마당에 우물로 보이는 것이 있지만 다 말라버렸고 근처에 인가하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부르러 가고 싶지만 이런 혼 밖에 없는 나를 누가 알아 줄까.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내 몸을 떠날 수가 없다. 이래서야...칼에 찔려도 미약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몸이 불에 타 죽겠다!! 비. 그래 믿을 건 비 밖에 없다. 이런 제기랄, 어제 그렇게 화창했는데 무슨 비야 비는! 아니야, 아직 아침이지만 저렇게 하늘이 꾸물꾸물한 거 보면 뭔가 희망이? 아아 모르겠다. 우선 저 불길 좀 누가 어떻게 해줘!!! -와지끈. 이층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 불에 탄 건 아니지만 불길이 한쪽 기둥을 갉아먹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은 것이다. 이층의 한쪽이 기우뚱하고 기울어지자 불길은 나머지 한쪽을 향해 빠르게 타들어 갔다. 내 몸 주변엔 아직 불길이 번지지 않았지만 이미 연기가 자욱해서 시야가 흐리다. 집의 한쪽이 기울어지는 바람에 침대고 의자고 다 구석으로 쏠렸고 내 몸은 어딘가에 비죽이 튀어나온 나무 조각에 옷이 걸려 아까 쓰러진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물이 난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이제 좀 편히 살아 보려 했더니 이런 데서 어이없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죽는 건 싫다. 이제서야 죽는 게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멋진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내가 좋다는 놈도 생겼는데, 왜 하필 이런 때에 난 죽어버리고 마는 거야? 내가 편히 사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었나? 좀 편해지자고. 나도 좀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죽어서 편해지는 건 이젠 사양이야!!! 우는 걸까. 육체가 없는데 몸에서 끝없이 수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눈물이 흐른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비록 몸은 없어도 눈물이 쏟아진다는 느낌은 든다. 이 슬픔. 이 안타까움. 억울함과 야속함이 온갖 감정들과 뒤범벅 되어 홍수처럼 정신을 흔들어 놓았다. 아...... 비다. -쏴아아아아아 망연히 서서 허물어진 집이 비에 젖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불길은 집을 다 태우지는 못한 채 빠르게 꺼져갔다. 어찌나 빗발이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지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땅이 움푹움푹 패였다. 번개가 하늘을 가를 듯 새하얗게 가로질러 갔고 곧이어 고막을 찢어버릴 듯한 천둥이 쳤다. 집은 이미 그 형채를 잃고 있었다. 이층은 이미 폭삭 주저앉았고 일층도 거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또 한번 와지끈 하며 일층이 주저앉았으니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모양이 되었다. 그 폐허의 한 가운데에 나무파편의 잔해에 깔린 내 육체가 차가운 빗줄기를 맞으며 놓여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나무판자에 의해 빗방울이 상처에 직접 떨어지진 않았지만 이미 피가 하얀 연회복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파편에 옷 여기저기가 찢어지면서 피가 났고 종아리 아래가 새카맣게 타들어가 있다. 그리고 집이 무너지면서 어딘가 잘못됐는지 한쪽 팔이 비틀려 있었다. 자꾸만 웃음이 난다. 정말로 우스웠다. 그 모습을 하고도 나는 아직도 살아있었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 이제 경련도 일으키지 않는다. 창백하게 질려버린 얼굴은 고통의 빛도 담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허공에 공허한 내 웃음소리만이 메아리치는 착각이 들었다. 몸이 없는 탓에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공기를 타고 대지를 흔들어 버릴 듯이 지독한 천둥이 온 천지에 진동했다. 불쌍한 내 육체. 이렇게 지독하게도 숨이 붙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명의가 와도 이런 몸을 살릴 수나 있을까. 그렇지만 아직도 이 몸에 미련을 못 버리는 걸 보니 나는 정말 죽기 싫은 가보다. 이 꼴을 해도, 평생을 반병신으로 살아도 좋으니 살고 싶었다. 아직 저렇게 숨을 쉬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를 떠난 사이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여길 떠나 루센이나 유디스에게 간다 하더라도 또 어떻게 그들에게 내 의사를 전하지?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십 분을, 이십 분을, 삼십 분을......한 시간 가까이 지켜봐도 몸엔 변화가 없다. 여전히 약하게 맥이 뛰고 있었고 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빗줄기도 어느새 이슬비처럼 변해 있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된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어선 안 돼. 누군가, 나를 도와줄 사람에게로....... 순간 유디스의 얼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비가 내리는 저택의 정문엔 수백의 병사들이 대치중이었다. 갑옷을 입고 늘어서 있는 군대는 예전에 내가 왕과 처음 만나던 그 평원의 일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황금색의 번쩍거리는 갑옷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지만 이 곳에 그런 갑옷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대신 병사들의 맨 앞에 갑옷도, 보호구도 아닌 연회용 정장을 입고 말을 탄 한 사람이 엄청나게 눈에 띄었다. "전하! 이런 이른 아침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활짝 열려진 정문 안에는 자다가 급히 뛰어 나온 것이 분명한 반백의 노인과 흰머리를 채 틀어 올리지도 못해 산발을 한 노부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뒤에는 중년, 청년, 하인, 하녀 할 것 없이 어린애 빼고는 집안 사람들이 다 튀어 나왔는지 그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그들의 체온을 앗아갔고 바닥의 진창이 고운 옷을 더럽혔지만 그들이 몸을 떠는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그대의 막내 아들 [라 벨미르 자이카나]는 어디에 있나?" "저, 전하. 소인의 어리석은 자식은 어젯밤 연회를 즐긴 후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음이 분명하여 소인,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만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에드바라하의 그분의 행방은 도통 알 수가 없어 저희는..." 노인의 말을 자르듯 유디스가 검을 치켜 올렸다. 눈빛이 귀신 같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라. 윤승호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찾아낸다면 자이카나의 이름이 이덴의 역사에서 지워질 것이다." 유디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저택은 온통 말발굽으로 짓밟혔다. 잘 손질된 정원이나 화단은 물론 빠른 기동성을 위해 저택 내부까지 말들이 달렸다. 저택의 모든 침실, 응접실, 주방, 화장실까지 진흙투성이의 말발굽이 휩쓸고 지나갔고 병사들은 내부의 물건들을 온통 뒤집어 엎어 저택은 수십 명의 병사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문에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디스는 여전히 등 뒤에 나머지 수백의 병사를 대동한채 입을 꾹 다물고 난장판이 되어가는 저택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어제 연회에서 입었던 그 하얀 정장을 입고 있다. 깔끔하게 정돈했던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엉망이 되었다. 가무잡잡하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엔 핏발이 서서 살벌한 기운을 뿜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손엔 가죽 주머니로 감싸인 무언가를 안고 있었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유디스 나 여기에 있어... -나 여기 있다고! 제발 도와줘! 아무리 말을 걸어도 들리지 않는다. 눈치 챈 기미조차 없다. 지금 유디스는 머릿속이 가득차서 나의 희미한 외침따위 들어 오지도 않는다. 어떡하지? 자이카나의 벨미르가 나를 잡아간 건 맞지만 이 화려한 저택이 아니다. 좀 더 저쪽, 저쪽에 있단 말야!! 그래 루센. 루센은 지금 어디에 있지?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나머지 귀도 날아간다. 난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어." 루센의 목소리되 루센 같지 않은 음성이었다. 다섯 명의 남자들이 루센의 발치에 결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 주위를 왕의 병사들이 포위하고 있었고 테이그가 죽일 듯이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어딘가 잘려 있었는데 양쪽 귀가 없어진 자가 있는가 하면 손가락이 두세 개 절단 난 사람도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소름이 끼쳤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채 땅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큭." 루센이 검을 겨누고 있던 남자의 귀가 서걱-하는 소리를 내며 잘렸다. 루센은 지금 굉장히 초조해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피투성이의 얼굴로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고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 "지독한 놈들. 전부 목만 남기고 땅에 묻어버려." 테이그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병사들이 루센의 명령을 듣고 땅을 파기 시작하지만 귀와 손가락이 잘린 남자들은 아무런 동요의 빛도 보이지 않는다. 루센이 그들 모르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상대의 입이 너무 무거웠나보다. "이봐 당신." 병사들이 구덩이를 파는 소리를 들으며 루센이 그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다. 흰 수염이 희끗희끗 난 털보였는데 이미 한쪽 귀와 손가락 두 개가 잘려 있었다. 남자는 루센이 자신을 지명했지만 대꾸도 안했다. 상처가 무척이나 아플 텐데 신음도 흘리지 않는다. 루센은 미간을 찌푸리며 검끝으로 남자의 턱을 치켜 올렸다. "당신. 귀여운 딸아이의 귀나 손가락이 잘려도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남자의 작은 눈이 커다래졌다. 그 표정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루센의 얼굴은 비에 젖어 더욱 음산해 보였다. 남자는 "어, 어떻게..."라는 소리만 간신히 낼 수 있었다. "왕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지 마라. 너희들의 아지트를 찾아 낸 우리가 너희들의 신상도 모를까 봐? 여자애를 미끼로 하는 것 같아 찝찝하지만 내쪽도 워낙 급해서 말야. 자아 순순히 알려 주실까. 너희들의 고용주 벨미르가 에드바라하의 도련님을 어디로 데려갔지?" 털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변의 사내들도 동요하는 것이 보인다. 아직도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줄기가 그들의 몸과 상처를 적셔 상의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몸 상태에서도 꿈쩍 않던 털보가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린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을 한 듯 눈을 꾹 감고 작은 신음처럼 말을 내뱉었다. "아디라 마을 서쪽으로 황폐한 토지가 있는데....그곳의 폐가에..." 남자가 말을 마치고 입술을 짓씹는다. 얼마나 분한지 입술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주변의 사내들도 참담한 표정이 되었지만 루센은 빠르게 근처의 말에 올라 탔다. "테이그 갑시다! 병사들! 구덩이는 그만 파도 좋아! 그리고 저 녀석들은 자결 못하게 잘 감시하고 이 사실을 전하께 보고해! 빨리!!" 말에 올라탄 루센과 테이그는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둘 다 어제의 연회복을 입은 상태 그대로다. 모처럼 유디스에게 선물 받은 옷이 비에 젖고 진흙이 묻어 엉망이 되었다. "루센! 그 독한 놈한테 딸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놈들의 아지트도 겨우 찾아 낸 거잖아!" 달리는 말 위에서 하는 대화라 목소리가 커졌다. 테이그의 질문에 루센이 씨익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야!" "뭐?" "딸이 있는 지 없는지 알게 뭐야! 그냥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녀석 하나 골라서 족쳐본 거야! 보통 그 나이에 귀여운 딸아이 한둘쯤은 있는 거잖아? 이런 험한 일을 하는 놈에게 가정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맞았으니 됐지!!" 말들이 진흙을 튀기며 달렸다. 방향은 내 육체가 있는 쪽으로 정확히 달리고 있었다. 이제 안심해도 좋아. 곧 루센과 테이그, 그리고 유디스까지 내 몸을 발견하게 될 거야. 아직도 내 몸은 무사히 숨이 붙어 있을까? 어느 순간 나는 다시 다 무너진 폐가 앞에 서 있었다. 봐봐. 아직 살아 있잖아. 저렇게 끈질기게 살아 있잖아.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살아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혼자 외롭게 죽지는 않을 거야. 어쩌면 내 육체가 저렇게 생명을 부지 하는 건 유디스를 기다리는 지도 몰랐다. 이젠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내 시체를 발견하고 슬퍼 해 줄 사람이 있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유디스를 기다렸다. 루센은 넋이 나간 사람마냥 허물어진 폐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테이그도 말없이 서 있었다. 처참한 육체를 차마 건드릴 생각조차 못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망연자실해 있는 동안 어느새 비는 그치고 따스한 태양이 겨우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멀리서 하얀 말을 타고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 오고 있었고 그 뒤로 시커먼 수백의 병사들이 죽을 힘을 다해 따라오고 있었다. 루센이 힘겹게 다리를 움직여 폐허에 누워 있는 내 몸을 향해 다가왔다. 루센의 얼굴도 내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 있어서 어느쪽이 시체인지 분간이 안 간다. 테이그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절반은 타서 무너진 나무 판자와 기둥을 힘겹게 치우는 루센의 얼굴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윤승호---!!!" 유디스의 외침이 들렸다. 가죽포대기 같은 걸 단단히 감싸 안은 유디스가 하얀 말에서 튕겨 나오듯 뛰어내렸다. 이제는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폐가를 향해 달려오며 유디스의 표정이 점점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하얗게 죽어가는 내 육체를 보았을 때, 그때의 표정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루센은 묵묵히 주변을 치워내고 있었고 테이그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본 채다. 뒤에서 요란한 말발굽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군대가 평원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유디스의 목소리가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루센이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딘가 유디스를 힐난하는 뉘앙스였다. 왕한테 취할 태도는 아니었지만 유디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없는 것 같고 루센 역시 자신이 얼마나 무례한 행동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성을 잃기 직전의 두 사람의 상태도 모르는 듯 수백의 군대가 유디스의 뒤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면서 쓸데없는 소음을 불러 일으킨다. "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유디스가 비틀거리며 폐가를 향해 다가 온다. 말없이 내 몸 주변의 쓰레기들을 치우던 루센이 유디스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고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유디스는 형편없이 떨고 있었다. 비척거리는 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표정은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팔은 당장이라도 들고 있던 가죽 포대기를 떨어뜨릴 듯 위태로웠다. 그 모습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루센은 이내 표정을 흐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루센도 테이그도 유디스도, 간밤의 화려한 정장이 비와 땀과 진흙에 엉망진창이다.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구두는 진창 속에 빠졌다 나온 듯했다. 그리고 역시 연회복을 입은 채 누워있는 나도 하얀 옷을 피로 적시고 여기저기 찢어져 흙먼지에 더럽혀져 있었다. 여기 있는 누구 한 사람도 어젯밤의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득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실체가 없이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유디스에게서 빠드득 하고 이빨 가는 소리를 듣고는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다...죽여 버린다...." 아까까지 덜덜 덜고 있던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목덜미에, 관자놀이에, 옆에서 봐도 보일만큼 푸른 힘줄이 솟아 올라 있었다.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 되어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다. 무섭다. 이런 모습의 유디스는 본 적이 없다! "사, 살아 있어요!!" 비명과 같은 루센의 외침이었다. 유디스의 눈이 팽창되었다. 동시에 엄청난 빠르기로 달려와 가지고 있던 가죽 푸대 속에서 커다란 유리병을 꺼내들어 그 안의 액체를 누워 있는 내 몸 위로 미친 듯이 털어 부었다. "아직 살아 있어! 미약하지만 맥이 뛰고 있다구요! 늦지 않았어요. 아직 늦지 않았어!!!" 아까의 조용한 태도가 거짓말처럼 루센은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병의 액체를 쏟는 유디스의 옆에 서서 루센은 "살아있어, 살아있어"라고 연신 중얼거렸다. 깜짝 놀란 테이그도 루센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시체 같은 모습의 나는 유디스가 부어대는 액체 때문에 더 살벌한 모습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공만한 크기의 병에서 나온 붉은 액체는 어찌 보면 보석과도 닮아 있었지만 멀리서 보면 피의 색깔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니, 액체가 맞는 걸까? 마치 액체처럼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움직임이 액체라기 보단 기체 같기도 했다. 붉은 드라이 아이스가 잔뜩 흘러 나온다는 표현이 훨씬 더 적당하다. 다홍색 같기도 하고 진홍의 빛깔 같기도 한 이상한 액체는 점액질의 젤리처럼 내 몸 위에 쏟아져 내렸다. 유디스는 액체의 한방울이라도 다 쓸 참인지 유리병을 탕탕 쳐가면서 내 머리끝부터 새카맣게 타들어간 발끝까지 온통 붉은 액체를 들이 붓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중의 하나가 황급히 달려온다. 갑옷이나 투구의 장식이 다른 병사들과 좀 다른 걸 보면 지위가 높은 사람인가 보다. "저, 전하!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생명수를 일개 소년에게..." -서걱 지위 높아 보이는 병사의 투구 끈이 떨어졌다. 동시에 그 턱에 길다란 상처가 나 피를 흩뿌렸다. "닥치지 않으면 이번엔 확실히 목을 날려버리겠어." 병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검을 휘두른 유디스는 만일 이 일격에 저 병사가 죽었어도 상관없었을 거라는 말투였다. 완전히 질린 표정을 하고 병사가 슬금슬금 물러 난다. 뒤에 대기 하고 있던 군대가 동요를 하고 특히 말들이 유난히 진정을 못하고 있었다. "윤승호 눈을 떠..." 유디스가 조심스럽게 배에 꽂힌 검을 뽑아 내었다. 온몸이 붉은 액체에 뒤덮여 있던 차라 단검이 뽑혀 나가자 상처에 빨려 들어 가듯 액체가 스며든다. "죽으면 용서 하지 않을 거야..." 유디스가 얼마 남지 않은 유리병의 액체를 내 목구멍에 쏟아 부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삼키지 못하고 입가로 흘러 내리자 주저 없이 자신의 입에 액체를 머금고 내 입에 흘려 넣었다. "알았어? 너 죽으면 다 끝이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 몇 번을 입에서 입으로 액체가 오갔다. 바닥이 난 유리병을 집어 던지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만 중얼거리던 유디스가 점점 감정이 격해지더니 이내는 내 몸뚱이를 붙들고 무섭게 소리지르고 있었다. "죽으면 절대 가만 안둬. 알겠어? 에드바라하 따위 갈갈이 찢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일어나! 죽지 말라구! 자이카나도 아오네르도 루탄도 다 없애 버리겠어!! 네가 따르던 루센도 테이그도 전부 죽여버릴 거라구! 알았어?!!! 내가 여기 있는 머저리들을 다 없애버리기 전에 일어나란 말야---!!!!!" 왕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제일 먼저 말들이 동요한다. 병사들은 말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지만 그들의 표정도 좋지 않다. 이거 계속 여기서 바라만 보고 있다가는 정말 여러 사람 잡게 생겼다. 하지만 저 몸 속으로 들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할 수 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몸 전체에 들러 붙어 있던 액체들이 어느새 사라진다. 액체인지 기체인지 아니면 젤리인지... 아무튼 성분을 알 수 없는 붉은 그것은 공기 중에 산화되듯 점점 사라져 갔고 그 속에서 나는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내 다리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았다. 거짓말. 저거 거짓말이지? 세상이 빙글 회전하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정신이 들었을 때 눈에 보인 것은 유디스의 얼굴이었다. 기적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얼굴 어디에서 그런 서슬퍼런 기세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혼이 제대로 몸 안으로 들어 왔는지 조금씩 몸 안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각은 나를 안고 있는 유디스의 뜨거운 체온이었다. "아, 미안. 모처럼 네가 준 옷인데 엉망이 되었어." 왠지 이 상황에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일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갔던 것 같다. 유디스의 눈이 흐릿해 진다. 어, 우는 걸까? 하고 깜짝 놀라려는데 갑자기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 입술을 맞부딪쳐왔다. 아야야... 너무 세게 부딪혀서 턱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유디스도 아팠을 텐데 아랑곳 하지 않고 이빨이며 입술이며 혓바닥이며...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모두 움직여 남의 입을 통채로 잡아 먹으려는 듯 빨고 씹었다. 이빨과 이빨이 부딪히고 혓바닥이 씹혔다. 목구멍까지 혀를 넣는 바람에 헛구역질이 올라올 뻔했지만 입술이 물어 뜯기는 통증 때문에 토기를 느낄 타이밍도 놓쳤다. 입천장이고 볼 안쪽이고 혓바닥으로 긁어 대는 통에 입안이 얼얼하다. 너무나도 절박하게 느껴지는 그 행동이 어딘가 안쓰러워서 유디스의 등 뒤로 손을 돌리고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런데.... 그제야 수백 쌍의 눈들이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옆에선 루센과 테이그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유디스의 등 뒤로 수백의 병사들이 말에서 중심을 잃을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잘 안보이지만 대열이 흐트러진 것만 봐도 얼마나 난처해 하고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사악-하고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유디스를 겨우겨우 떼어내 보았지만 유디스는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죽는 줄 알았어..." 유디스가 처연한 표정으로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다시 입술을 내미는 걸 보고 당황해서 밀어내자 유디스도 이제서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 오는지 "쳇-"하고 혀를 찬다. "돌아가자. 일어날 수 있겠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보니 불에 탔던 다리가 조금 저릿저릿 했다. 아직도 배에 욱씬거리는 통증이 남아 있었고 비틀렸던 왼쪽 팔도 뻐근했다. 하지만 몸 전체적으로 봤을 때 유난히 상쾌하고 가뿐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혹시나 하고 웃옷을 들춰 배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커녕 흉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궁금함을 잔뜩 담은 표정으로 유디스를 바라보니 유디스가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하등 쓸모없는 조상들이 남긴 유일하게 쓸모있는 물건이었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유디스가 또 한번 나를 끌어 안고 이마며 볼에 쪽쪽하고 베이비 키스를 한다. 병사들의 시선도 창피했지만 얼빠진 표정의 루센과 테이그를 보는 것은 더 괴로웠다. 유디스는 말이 있는 곳까지 가면서 나를 옆구리에 끼고는 계속 스킨쉽을 시도했다. 유디스의 기분은 이해한다. 나도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으니까. 생각같아서는 유디스를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다. 펑펑 울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소생의 기쁨을 스킨쉽으로 표현하기에 내 얼굴은 두껍지 못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기절한 척 하고 있을걸. 유디스의 앞에 앉아 말을 타고 돌아가면서 나는 왜 내가 기절한 척 하지 않았을까 맹렬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등 뒤의 유디스는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는 내 몸을 안으며 연신 더듬어대고 있었기 때문에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올백으로 넘겼던 머리가 비에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넘기느라 발랐던 정체불명의 액체가 비와 섞여 뭐라 말하기 힘든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는데 유디스는 그 머리에 코를 묻고 이리저리 비비고 있었다. 냄새 나니까 그만두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머리에 코를 묻다가 귓가로 입술을 옮기고 목덜미에 이빨을 박다가 다시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는다. 고삐를 잡고 있지 않은 손은 옷 위로 배를 쓰다듬다가 가슴 여기저기를 문질러 대는 통에 젖은 옷이 더 몸에 달라붙어 기분이 나빴다. 루센과 테이그는 애써 시선을 외면하려 했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수백 쌍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관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유디스는 작게 웃거나 말없이 머리와 목덜미에 쪽쪽하고 입을 맞춘다. 귀에도 이마에도 벌써 몇 번이나 입술과 혓바닥이 오갔다. 본격적으로 화를 내려는데 한숨 쉬듯 내뱉는 유디스의 중얼거림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미치는 줄 알았다고..."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니 매섭게 대할 수도 없다. 사실 살아서 돌아 온 게 제일 기쁜 사람은 난데 유디스가 이렇게 좋아해 준다니 고마운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이눔아, 네 부하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보잖아! 얼굴을 어깨에 묻고는 손바닥으로 목젖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고개를 처박으면서 어떻게 말을 모는 건지 걱정이 되었지만 말은 자동차완 달리 주인이 엉뚱한 짓을 해도 제 갈 길을 가는 이동 수단이니 사고 날 걱정은 없겠다. ......아니, 아니 지금 사고 걱정을 하는 게 아니잖앗! 귀를 답싹 물고는 자근자근 씹어댄다. 말 안장을 잡고 있던 내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고는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꽉 쥔다. 쥐었다가 폈다가 하면서 남의 손을 조물락거리더니 손목을 잡고 들어 올려 손등에 키스한다. 하아...당최 남사스러워서 못 살겠다. 성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제야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귀족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가득 불쾌함을 담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큰 목소리로 욕설을 지껄이다가 왕의 군대를 보고 지레 겁을 먹는 자들도 있었다. "너를 찾아 낼 때까지 저 사람들 전부 감금 할려고도 생각했었어." 냄새 나는 머리에 얼굴을 묻고 유디스가 중얼거렸다. "좀 너무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말했더니 기분이 상했는지 귀를 잡아 당긴다. "넌 죽었다 살아난 몸이라구.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란 말야." 이것도 다 살아난 자의 여유다. 막상 신변의 문제가 해결 됐으니 남을 생각할 여유도 갖고...뭐 어쨌거나 나는 살았고 저 사람들도 감금 되지 않았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아니, 한가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땀과 비에 젖어 그닥 좋지 못한 냄새가 나는 몸을 안고 녀석이 부비적거린다는 거다. 마차에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우리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귀부인이 있는가 하면 못 볼 걸 봤다는 얼굴로 마차에 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청년도 있다. 어린 딸의 눈을 가리는 중년의 노부인도 보인다. "그만 좀 만져!" 참다못해 녀석의 팔뚝을 붙들고 작게 소리쳤다. 주위에서 이 소리를 들으면 애정싸움으로 생각할 게 뻔하다는 걸 생각하자 더욱 약이 올랐다. "싫어. 네 허락 같은 거 안 구할 거야." 혓바닥으로 길게 뒷덜미를 핥으며 웅얼거린다. 자신의 팔뚝을 붙잡은 손을 오히려 마주잡아와 팔목을 쓰다듬고 엄지 손가락의 뼈마디를 확인하듯 문질문질 거리면서 검지와 중지, 약지와 새끼 손가락까지 반복해서 문질러댄다. 아침부터 비를 맞은 탓에 몸이 차가워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때가 나왔을 거다. "네 대답을 기다리다가 너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정신이 나가버리는 줄 알았다. 어제 너를 놓아 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이젠 내가 보고 싶을 때 보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질 거야. 그래, 이제부터 넌 하루종일 내 옆에 있는 게 좋겠어." 어깨를 이빨로 깨물면서 중얼거린다. 옷 위로 깨무는 터라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만약 맨살을 깨물었다면 꽤 아플만한 강도였기 때문에 자신이 어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달라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제.....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입장의 차이가 컸고 나도 녀석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그래도 세상에는 도덕관념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20년도 안되는 짧은 인생의 경험상 유디스가 나한테 이러는 거, 내 상식으로는 절대적으로 적응 안된다. 한때 진유현을 친구 이상으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도 이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구. 그냥 유현이가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을 하며 장난치는 게 좋았고 제하나 오세준 같은 녀석들한테 하지 않던 친근한 접촉이 좋았을 뿐이다. 어깨동무나 뒤에서 간지럽히면서 장난치는 거...그냥 그런 것이 낯 간지러우면서도 기뻤다. 성격 좋고 통솔력 있는 반장이지만 은근히 아이들 사이에서 서열상 위라는 느낌으로 거리감을 두었던 진유현이었다. 그런 녀석이 보여준 친근한 행동이 나에게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뭐야, 유디스랑 다를 게 없잖아? 단지 일개 반장에서 왕이라는 위치로, 친근한 접촉이 노골적인 애정표현으로 바뀐 것 말고는...... 에......어라? 정말 비슷하네? 그러고 보니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었던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같은 반 친구한테 짓밟히며 강간당한 것도 상식은 아니지. 무엇보다 이런 엉뚱한 세계에 떨어진 것 자체가 상식이 아니다. 아아...그러고 보니 살인을 한 놈이 도덕관념 운운 하는 것도 웃기다. 생각해봐. 난 사람도 죽였잖아. 이제와서 뭘 핑계 대는 거야. 나는 지금 죽었다 살아났고 내가 좋다고 말해주는 유디스가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기분이 나쁜가, 좋은가 하는 거잖아?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럽긴 해도 내가 살아 돌아 온 것에 대한 기쁨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유디스가 싫지는 않은 거다. 녀석이 귓속에 혀를 넣으며 점점 진하게 애정표현을 하고 있었다. 고삐를 잡은 채 양팔 가득 힘주어 나를 꽉 끌어안는 모양에 병사들 몇이 기겁을 하고 물러 나는 게 눈에 띄었다. 좋다는 건 알겠는데 확실히 이런 표현의 방법엔 문제가 있다. 완전히 시각공해 아닌가! 뭐 그래도... 나는 등 뒤의 따뜻함에 안도하며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더듬거리던 유디스의 손이 잠시 멈춘다 싶더니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내 정수리에 뺨을 부빈다. 땀냄새도 나고 피냄새가 진동했지만 마음은 평온하다.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겠지... 어째서 나까지 유디스의 방으로 들어 왔는지 모르겠다. 두루마리 문서를 잔뜩 품에 안은 아저씨들이 헐레벌떡 쫓아온다. 머리카락의 절반이 하얗게 새어버린 아저씨들이 뭐라고 항의하는데 유디스가 문 앞의 병사들에게 "방해하면 죽인다."라고 말하는 통에 아저씨들은 쾅-하고 닫힌 문밖에서 "전하!!"만을 외칠 뿐이었다. "저 아저씨들 굉장히 급해 보..." 이빨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부탁하건데 키스를 할려면 미리 말하거나 좀 천천히 했으면 좋겠다. 자꾸 이런 식으로 박치기 하듯 입술을 들이밀면 언젠가 이빨이 부러지던지 입술이 이빨에 짓이겨질 거다. 이런, 조금 짭짤한 게 이미 찢어져 피가 났나 보다. 녀석은 정신없이 입술을 집어삼켰다. 내가 조금만 나이가 어렸다면 잡아 먹히는 줄 알았을 거다. 원래 키스라는 게 이런 거야? 영화에서 봤을 때는 부드럽고 로맨틱해 보이던데. 그 어떤 배우도 상대의 입술을 씹지는 않았다고. 입술만 씹는 게 아니다. 혀도 씹고 급기야 이빨도 씹는다. 그 탓에 가각-하는 소리가 나서 인상을 썼지만 아프지는 않기에 그냥 녀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찌 보면 살아난 것에 대한 굉장히 열렬한 환영인사다. 유디스는 입을 떼지않고 나를 질질 끌고 가 침대 위에 앉혔다. 너무 집중하기에 별다른 제지도 가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뒀더니 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푼다. 하지만 이 옷이 얼마나 복잡한 구조인지 나는 어젯밤 질리도록 경험했다. 아무리 이런 옷을 입는 것에 능숙한 유디스라 한들 입술을 맞춘 상태에서 보지도 않고 남의 옷가지를 벗겨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질에 못 이겨 죄다 뜯어낸다. 모처럼 유디스에게 받은 옷이다. 비록 피투성이에 땀과 비로 젖어 걸레짝이 되었다지만 이렇게 함부로 취급하는 게 기분 나빴다. 뿐만 아니라 몸에서 나는 구리구리한 냄새가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린다. "더러워 죽겠다. 우선 씻고 보자." 하얗고 푹신한 침대 위를 진흙과 피투성이의 옷으로 더럽히자니 뽀얀 침대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난 그 이층 폐옥이 무너지면서 온몸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나뿐이랴. 내내 비를 맞고 말을 달린 유디스 역시 땀과 비와 진흙투성이다. "나중에..." 지금 자신이 얼마나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나 보다. 얼굴에, 귀에, 목덜미에 그리고 드러난 어깨에, 소리를 내면서 쭉쭉 빨아들이는 마찰음이 민망하다. 안 씻어서 드러울 텐데 저렇게 빨아대면 짜지 않을까? 별 지저분한 생각을 하는 중에 상의며 와이셔츠며 구두까지 다 벗겨졌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바지까지 벗겨지는 건 좀 그렇다. 이제 그만하라며 녀석을 밀어 내는데 엄청나게 서운한 표정으로 "여기서 그만두라고?"라고 말하는 통에 좀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 여기서 더 뭘 할 건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유디스가 이상한 얼굴을 한다. 찌푸리는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당혹스러워 하는...왠지 낭심을 살짝 걷어차였을 때의 난감한 표정과 비슷했다. 그러나 곧 흥-하고 코웃음 치더니 입을 비죽이 내밀며 한마디 툭 내뱉는다. "이 다음이야 뻔하잖아?" 그러더니 자신의 상의도 벗기 시작한다. 멋있게 벗어 던질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단추가 너무 많아서 자신의 옷이지만 벗는데 애를 먹고 있다. 역시나...유디스는 또 화를 참지 못하고 단추를 북북 뜯어 내면서 힘들게 옷을 벗고 있었다. 단추가 잘 안 풀려서 신경질 내는 어린애 같았다. 그런 모습이 조금 귀엽다는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녀석이 바지랑 속옷까지 벗어 던지자 딱딱하게 얼굴이 굳었다. 으으음...... 역시 그건가... 지하창고에서의 일이 생각 났다. 하필 이런 때 그런 더러운 기억이 떠오르는 건 불쾌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형태만 다를 뿐 하고자 하는 목적은 똑같지 않은가. 남이 내 몸을 성욕의 발산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지금이 두 번째다. 그리고 둘 다 다른 사람이되 같은 얼굴이다. 강간범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과 정상적인 관계라니 웃기는 일이다. "관둬. 진짜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어." 따스한 접촉. 너무 좋아 못 견디겠다는 듯한 유디스의 절박함. 그리고 나는 방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극한 상황이 유디스의 도가 넘치는 스킨쉽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도덕이니 상식이니 인륜이니... 이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그냥 나 스스로 혐오감을 느낄 것 같아 무서웠기 때문이다. 인상을 더럽게 구기며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 보는 유디스의 표정이 어둡다. 왠지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짜증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유디스는 잠시 눈을 다른 데로 돌리며 이마에 손을 짚더니 낮게 욕설을 뇌까린다. "여, 역시...기분 나빠?" 침대에 알몸으로, 절반은 무릎 꿇은 자세로,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내 몸을 덮치듯 앉아 있는 유디스가 시선을 마추치지 못하고 자신의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키, 키스할 때는 가만히 있었잖아." 목소리에 떼쓰는 기운이 묻어난다. 유디스가 싫은 게 아니다. 이렇게 좋은 친구인데, 이런 짓을 해서 진짜 혐오스러워지면 어떡하지? 진유현 때는 어땠나. 그렇게 얻어맞고서도 남아 있던 미련을 기어코 끊을 수 있게 되었잖아. 아니, 이제 와서는 내가 정말 유현이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는지 조차 자신할 수 없지만 그 순간의 증오는 진짜였다. 그런데 유디스랑 이런 일을 하고... 그리고 나서 유디스가 싫어지면 나는 정말 갈 곳을 잃게 된다. 네가 그 얼굴만 아니었으면, 그 목소리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착잡한 심정이 되지 않을 텐데. 솔직히 같은 남자끼리 이런 거 이상하다. 하나도 흥분 안 돼. 하지만 아무리 재미없어도 그냥 니가 너무 기뻐해주는 거 하나만 보고도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 얼굴만 아니었으면... "넌 또 그래..." 유디스가 표정을 흐리며 내 얼굴을 내려다 본다. "넌 가끔 나를 보면서 이상한 표정을 지어.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네가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든다. 얼굴은 나를 향하고 눈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 네가 알까?" 정곡을 찔려 눈이 휘둥그레 졌다. 몰랐다. 유디스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아, 나 그렇게 티가 났나? 처연한 표정이었다. 왜 나를 보아주지 않느냐고 원망하는 것 같다. 순간 굉장히 미안하고 당황도 되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나도 모르게 유디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진유현이라는 자식을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귀에 그 이름이 꽂혔을 때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사람의 몸이 외부의 자극 없이 그렇게 펄쩍 뛸 줄은 예전엔 몰랐다. 내 몸의 반응이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디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황급히 아니라고 손을 저으며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무, 물론, 물론 진유현이랑 너랑 너무 똑같아서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아니야, 너를 보면서 그 자식 생각하는 건 아니라구. 말했잖아. 걔랑 나랑 얼마나 사이가 나쁜지. 아니, 아니, 그렇다고 너를 미워한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너무 똑같아서 생각은 나지만 그 자식이랑 너랑은 별개의 인간이고 어...그러니까..."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유디스는 얼굴에 표정을 지우고 변명하는 내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지만 표정 없는 유디스의 얼굴은 더욱 진유현과 닮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고 생각해?" "어?" "엄청나게 궁금했어. 나를 닮았다는 녀석이 어떤 놈인지. 하지만 너한테 몇 마디 얘기를 듣고 나서 일부러 그 자식의 화제를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 자식 얘기를 할 때의 네 얼굴이 보기 싫었어. 굉장히 그립고 안타까운 그 표정이 싫었다고. 이 빌어먹을 궁중에서 하루에서 수 차례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17년을 살아 온 나야. 너구리 대신의 속마음도 훤히 읽을 정도로 사람 얼굴 보는 데엔 이골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피했어. 그 자식에 대한 화제 뿐만 아니라 네 가족, 네 친구들 얘기도. 그 얘기를 할 때 네 얼굴을 보면 어딘가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싫었다고!!" 팡-하고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고개를 숙인 유디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어깨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짐작 할 수 있었다. 화가 난 유디스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졌다. 그 얼굴을 보면, 그래. 난 또 분명 유현이를 생각하겠지. "너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걸까? 아니면 그냥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에 불과한 걸까. 사실을 확인해보기도 이젠 겁이 나. 헤시안이 조금만 더 늦게 오기를 바라는 나를 깨닫고 하루에도 몇 번씩 놀라곤 해. 나를 이런 기분이 되도록 만들어 놓고 여기까지 와서 넌 그 자식을 생각하는 거냐?"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화기애애했는데. 아까 느꼈던 절박함은 단순히 내가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 아니었어? 유디스는 대체 어디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녀석의 과분할 정도로 넘치는 애정을 어디까지 소화할 수 있을까. 답이 없다. 진유현과 있었던 과거를 지우지 않는 한, 유디스의 얼굴이 다른 얼굴로 변하지 않는 한 이 지겨운 사슬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말야. 유디스. 나는 네 덕분에 비로소 녀석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거다. 그 얼굴과 목소리 때문에 아직도 진유현이란 주박에 묶여 있지만 덕분에 오히려 담담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거야. 유디스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해야 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결국 이 불편한 침묵을 깬 건 유디스의 투정부리는 목소리였다. "아~~ 젠장! 내가 언제부터 남의 말을 들었다고! 내 맘대로 할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제 네 눈치 같은 거 안 볼 거라구!" 풀죽어 있다고 생각했던 몸이 힘을 실어 강하게 덮쳐 온다. 놀라서 밀어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벗은 상체가 맞닿고 녀석이 다시 입술을 마주친다. 아까처럼 우악스럽게 빨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하게 덮친 기세가 무안하게 혀끝으로 입술만 간지럽히고 있었다. 유디스가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직접적으로 그 움직임이 내 몸에 전해졌다. 가슴의 돌기가 스쳐서 간지럽다. 그렇다는 것은 내 가슴의 돌기도 녀석에게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엄청나게 창피해졌다. 뭐 하는 거야 윤승호, 녀석이 싫어질까 봐 무섭다며? 아 몰라. 모르겠다. 어디까지 가나 보자. 어디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유디스의 이러한 행동을 어디까지 받아 들일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 녀석의 행동이 너무나 조심스럽고 너무 부드러워서 안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입술을 부드럽게 핥는 것도 턱을 살짝 깨무는 것도, 조심스럽게 몸을 끌어 안는 행동도 너무나 상냥해서 '우와, 이자식 나 진짜 좋아하나부다.' 하는 생각이 든다. 목덜미에 혀를 미끄러뜨리자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목을 움츠렸다. 혓바닥이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간다. 쇄골 뼈를 이빨로 깨물더니 어깨뼈를 따라 팔을 타고 혀와 입술을 부벼댄다. 팔꿈치 안쪽의 연한 살을 오물거리면서 깨물고 빨고 핥고 쪽하고 입맞추고 온갖 정성을 들이는 통에 얼얼할 지경이었다. 다시 팔의 선을 따라 혀를 미끄러뜨리자 간질간질한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손목 안쪽, 정맥이 파랗게 보이는 부분을 혓바닥으로 덮어버릴 듯 핥는다. 언젠가 자살하려고 컷터칼로 몇 번 그었던 곳이다. 얄팍한 상처와 약간의 피가 찔끔 나오고 끝나버려서 지금은 흉터도 남아 있지 않은 곳이라 이제까지 잊고 있던 부위였다. 손금을 따라 혀가 지나간다. 생명선이라고 하던가. 그 선을 따라 이빨로 긁어대고 입술을 맞대더니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갗을 앞니로 씹는다. 혀가 손등으로 옮겨 가고 네 손가락의 뼈가 튀어나온 부분, 그러니까 주먹 쥐면 가장 돌출되는 부분의 뼈를 하나하나 이빨로 씹는다. 그리고 손등. 그 위에 꾸욱하고 입을 맞춘다. 한참 동안 그 자세로 멈춰 있길래 나는 녀석이 드디어 싫증이 났나 싶었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손등에 입술도장을 찍고 있던 녀석은 내가 바라보자 계속 쪽쪽하고 입술을 찍는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녀석이 다른 손으로 가슴을 훑는다. 그런 델 주물러 봤자 땀 냄새나는 살덩어리만 잡히지 별로 감촉이 좋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고 보니 내 손 절반은 핏덩이가 엉겨붙어 있었는데 녀석이 다 핥아 먹었나 보다. 흔적도 없어. 비위 상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된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둘 다 냄새 엄청나잖아. 멍하니 누워 있는 나야 이 정도 냄새쯤 참을 수 있지만 저렇게 코를 박고 있는 유디스는 정말 괜찮은 걸까? 녀석이 가슴으로 입술을 옮긴다. 한 손은 여전히 아까 키스하던 손을 부여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다른 손으로 허리를 쓰다듬고 가슴에서 배로 입술을 미끄러뜨린다. 간지러워. 엄청 간지럽다구.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녀석이 워낙 따뜻하게 대해주니까 기분이야 좀 간질간질 하면서도 안락하지만 이것이 보통 말하는 섹스에서의 쾌락은 아닌 듯 싶다. 그럼 유디스는 뭔가 기분이 좋은 걸까? 가끔 한숨도 쉬어주고 내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좋은 것 같긴한데...어...서비스 받는 건 난데 왜 유디스가 기분 좋은 거지? "너 말야..." 배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디스가 고개를 빠끔히 들어 눈을 치켜올린다. "조금은 반응 좀 보이라구." 멀뚱멀뚱뜨며 유디스를 내려다보니 녀석이 한숨 쉬며 다시 몸 위로 덮쳐 올라와 이마에 뽀뽀를 한다. "그래도 난리치며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얌전하네. 아까 그렇게 말해서 화난 거야? 아니면 동정?" 반쯤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유디스가 물었다. 동정이라니 실례다. 나는 나름대로 녀석의 호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네가 너무 좋아하니까." "뭐?" "너무 기분 좋아하는 것 같길래." 유디스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더니 이내 "핫!"하고 헛웃음을 내뱉더니 장난을 가득 담은 표정이 되어 귀를 잡아당긴다. "너 그거 굉장히 건방진 소리란 거 알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싫은 표정은 아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눈을 맞춰 온다. "하지만 너도 기분 좋았으면 좋겠어." "응, 나는 이대로도 좋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바짓가랑이 위로 유디스의 손가락이 느껴졌다. 펄쩍 뛰어 올라 녀석의 행동을 막아보려 했는데 위에서 꽉 잡아 누르고는 입술을 마주쳐온다. 우와앗! 녀석의 것이 허, 허벅지에 닿았다구! 옷 위로 느껴지는 손의 감각이 낯설다. 남이 내 물건을 만지는 거 싫다. 창피하고, 이상하다. 주물럭거리는 손을 밀어 내려고 녀석의 팔을 잡아 당기지만 몸을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리는 게 오히려 유디스의 손이 허벅지 사이에 끼인 모양이 되어 버렸다. 으아아~~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그만두라고 하지만 귓가에 파고드는 녀석의 입김은 나른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엄청나게 불편하다. 약점을 남의 손에 잡히고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 당한들 기분이 나아질 리 없다. 중심을 잡힌 건 난데 오히려 유디스가 더 흥분하는 것 같다. 낮은 신음성을 내는가 하면 뜨거운 숨도 내쉰다. 내 허벅지에 대고 조금씩 마찰하는 움직임에 녀석의 것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든다.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 것은 그게 혐오스러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랫도리가 만져져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다. 사타구니를 잡은 손은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바지 위로 원을 그리며 쓰다듬고 있었다. "집중해...좀 더 반응을 보이라구..." 투정부리는 목소리가 뜨거운 숨결을 타고 전해졌다. 집중하라고 해도 말이지...민망하고 불편해서 신경만 쓰인다구! "저기, 난 굳이 이런 거 안 해줘도 괜찮으니까...어...저기 말이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식은땀이 흘렀다. 유디스가 투덜거리더니 바지 속으로 손을 넣는다. 깜짝 놀라서 "야!" 하고 화를 내는데 손가락이 중심에 닿는다. 아랫도리가 간질간질 하다. 긴장해버려서 유디스가 만지는 손의 감촉만 느껴지고 녀석이 무슨 표정으로 나를 보는지, 다른 손으론 무얼 하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남이 만지면 놀래서 위축 되는 거 아니었어? 그걸 이렇게 공들여 어루만지니 아무리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점점 아래로 피가 몰린다. 고환을 쥐고 주물주물 거리더니 길게 잡아 훑는다. 머리 뒤꼭지로 피가 몰리는 기분에 "흐윽..."하고 작게 숨을 삼켰다. "으음...역시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해주는 게 제일 빠르구나..."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유디스가 기분 좋은지 가슴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그 동작 하나도 신경 쓰여서 몸을 뒤틀게 된다. 허벅지 안쪽의 살을 쓰다듬으면서 아직도 내 사타구니에 집착을 보이는 유디스의 손장난은 혓바닥의 움직임과 함께 미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논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용변을 보는 기관에 이렇게 신경을 써서 어루만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고등학교 들어와서 여름방학 전에는 몇 번 혼자 했던 것 같지만 얻어맞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 따위 없었다. 아랫도리를 붙잡고 열중할 시간에 컷터칼을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횟수가 더 많았으니까. 기분이 점점 고조된다. 그렇다고 정신이 아득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긴장으로 저릿저릿해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뒤 마려운 것마냥 초조해 하고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남은 옷가지가 벗겨지고 유디스가 몸을 다시 겹쳐온다. 내 물건에서 손을 떼는 바람에 안도와 아쉬움 비슷한 기분이 올라왔지만 다시 물건 위로 겹쳐지는 뜨겁고 물컹한 감촉에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 정말, 기껏 일어난 놈이 다시 줄어드는 줄 알았다. 기분 진짜 이상하다. 다른 사람의 바짝 일어선 성기가 내 것과 겹쳐지는 일 따위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좀 더 육중한 부피감으로 유디스의 것이 위에서 짓누른다. 위 아래로 비비며 마찰을 해 온다. 구역질 나? 징그러워? 유디스가 싫어졌어? 혐오는 개뿔, 젠장. 엄청나게 기분 좋아! 고환과 고환이 맞부딪치고 서로의 주름이 짓이겨지도록 비비적 댄다. 위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발기한 그것이 맞닿은 자리가 뜨겁고 간지럽고 저릿한 감각이 사타구니 전체에 퍼져 허벅지가 경련하는 것 같다. "승호야..." "윤승호......" 뺨을 부벼오는 녀석의 입김이 뜨겁다. 약간 젖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 본다. 그런 녀석의 표정이 굉장히 야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 유디스가 계속 내 이름을 부르며 몸을 꽉 끌어 안고 하체를 부벼댄다.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마찰음,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아랫도리의 자극이 점점 기분을 몰아붙여갔다. 유디스가 다시 손으로 내 물건을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좀 더 강한 조임을 원했던 것이 손바닥에 감싸여 짓눌려졌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어 올려지면서 "히익!"하는 신음이 터졌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기분 죽인다! 무진장 좋다구! 사정의 쾌감에 한동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정되고 나서도 몸에 여운이 남는다. 이렇게 진하게 배출 해본 건 처음 같다. 끌어 안고 있는 유디스의 몸도 바르르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몸을 끌어 안은 탓에 뼈에서 삐걱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허벅지 아래로 녀석과 나의 정액이 진득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와아... 갑자기 굉장히 무안해 졌다. 조금 전 그렇게 창피한 짓을 하면서 히익거리고 있었는데 일이 끝나고 나니 남은 것은 약간의 여운과 쪽팔림으로 새빨갛게 익어버린 몸뚱어리 뿐이다. 으악! 그러고 보니 가관이다! 땀냄새에 피냄새에 정액냄새까지 섞여 엄청 드럽다! 게다가 슬슬 머리도 가렵기 시작한다. 나는 무언가 여러가지 이유로 쪽팔린 기분이 되어 슬금슬금 유디스에게서 등을 돌렸는데 가만히 있던 녀석이 등을 돌리는 나를 갑자기 끌어 안고 또 머리에 얼굴을 박고 비벼 댄다. "아아 윤승호..윤승호..." 등 뒤에서 끌어 안고 정신없이 여기저기 만져댄다. 설마 또 하자는 건 아니겠지. 동물이 얼굴을 비벼대는 것 마냥 목 뒤에, 어깨에 마구마구 뺨과 코와 입술을 부비며 내 이름을 부른다. 녀석의 수그러든 물건이 허리에 닿는 게 느껴지는데 덕분에 허리도 끈적거린다. "좋다...너무 좋다... 이것만 해도 너무 좋아.... 뭐가 갖고 싶어 응? 뭐 해줄까. 나 지금 굉장히 기분 좋으니까 아무거나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응?" 이 녀석 너무 흥분했다. 허리의 물건이 조금씩 일어서는 걸 오싹하는 기분으로 느꼈다. 하지만 솔직히 그냥 물건을 비비고 잡아 당긴 것 뿐인데 녀석이 저렇게 까지 좋아 하다니 의외다. 더구나 서비스 받은 쪽은 내 쪽이고... 유디스가 다리를 돌려 허리를 감싼다. 녀석의 팔과 다리가 거미처럼 엉겨붙어 빠져 나가지도 못하고 등 뒤로 녀석의 열렬한 뽀뽀를 받고 있었다. "아, 그래. 에드바라하. 에드바라하의 의식을 하자. 그것 때문에 계속 신경 쓰였지? 그래 한달 내에, 아니 보름 안에 식을 열자. 그리고 또, 또 뭐가 있을까. 응? 토지, 토지를 줄까? 맞아. 에드바라하가 관리할 귀보르냑 영지는 넓기만 하지 지형이 험해. 옆에 있는 크루녹 영지도 줄게. 응? 어때? 그리고, 그리고 뭐가 있지? 자이카나 놈들은 다 잘라버리고 에드바라하 사람들로만 채워 넣을까? 네 친구인 루센이나 테이그한테 장관자리를 주는 건 어때? 네 소유로 성을 하나 더 만들까? 응? 뭐라고 말 좀 해봐." "제발..." 왕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즉흥적이니 유디스의 밑에서 골머리를 싸맬 신하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래, 제발 뭐? 응? 뭔가 하고 싶은 거 있어? 다 들어 줄게. 다 해줄게!" 유디스가 눈을 빛내며 시선을 맞춘다. 내 얼굴에 어린 애원의 빛이 상당히 맘에 든 듯하다. 그렇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부탁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발......씻자..." -퐁 욕탕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간이 폭포를 바라보며 한가로운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좋다... 머리끝까지 물 속에 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개운한 마음으로 뽀득뽀득 몸을 씻고 있었다. 나른하게 폭포를 바라보니 폭포를 향해 내리쬐는 태양이 눈이 부시다. 물방을 입자가 폭포 주변에 무지개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물방울은 반짝반짝 빛나 예쁘기만 하다. "하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수영장만한 욕조의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맞은 편에서 심통맞은 표정으로 얼굴을 반쯤 물에 담그고 있는 유디스가 보인다. "너 말야. 사람이 모처럼 큰 맘먹고 해주려는데 산통을 깨다니." 하지만 그 순간 내게 필요한건 목욕이었다고. 나는 유디스를 향해 멋쩍게 웃어주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다고 유디스가 "쳇" 하고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면서 무심코 배에 손이 갔다. 나는 배를 문지르면서 '이 배에 칼이 꽂혀 있었단 말이지...'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 신기해. 생명수라니,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같은 거야? 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아니, 살아도 평생 불구가 되는 줄 알았어." 유디스가 다가 오더니 물 위로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춘다. "별로 가보 같은 것도 아니야. 게비도 할아버지가 정복 전쟁에 나섰다가 퀘도 근처의 한 마을에서 갈취한 것이지. 퀘도와 부디칸은 대륙의 끝에 있는 나라들인데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들 중엔 가끔 생명수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어. 한 방울만 해도 엄청난 고가에 매입되는 물건인데 게비도 할아버지와 흥정하려던 여행자가 운이 없었던 거지." "생명수라는 게 대체 뭐야?" 욕조의 물방울을 튕기며 물었다. 이젠 머리도 감았으니 녀석이 머리에 얼굴을 묻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감았어도 두피에 혀를 대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항간에 들리는 말로는 세상의 끝에 있는 물이라고도 하고 공기중의 수증기를 수십 년 동안 걸러내면 한 모금을 얻을 수 있다고도 해.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 한 방울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속설이 있지만 직접 내 눈으로 확인 해 본 것은 나도 처음이야." "그런 귀한 걸 아깝게......그렇게 다 써버렸는데...괜찮아?" 완전히 정상적인 몸이 된, 아니 어찌 보면 전보다 유난히 가뿐해진 기분마저 드는 느낌이었다. 그런 굉장한 것을 다 쏟아 붓다니, 그때 병사가 유디스를 막으려고 했던 기분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아찔해 지는 기분이 든다. 칼이 꽂혀 새빨갛게 물든 배. 까맣게 탄 종아리, 비틀린 팔...시체같이 창백하던 얼굴..... "읍, 푸, 푸하학!!!" 갑자기 유디스가 나를 정수리부터 물 속에 눌러버렸다. 얼굴까지 물 속에 들어 갔다 나오고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나는 푸학! 소리를 내며 벌떡 물 속에서 일어나 화를 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익사하는 줄 알았다고. "아까워? 너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거 알고 나 있는 거야?" 자신이 한 짓에 죄책감도 없다는 표정으로 뚱하니 앉아있는 녀석의 얼굴은 입을 비죽이 내밀고 있었다. 어린애 같이 삐진 표정이다. 나는 그제야 유디스의 말을 이해 하고 볼을 긁적거리면서 녀석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유디스가 물에 쫄딱 젖어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손가락으로 곱게 빗어 넘겨준다. "그래,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화낸다. 나 때문에 죽을 뻔한 거라구 너. 네가 다른 귀족들의 표적이 된다는 걸 알면서 혼자 있도록 놔뒀으니 절반은 내 책임이야." 유디스의 표정이 조금 무서워지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조용히 있으니 녀석이 반복해서 머리카락을 빗어 넘긴다. 엉킨 부분은 부드럽게 풀고 뻑뻑하다 싶으면 손에 물을 담아 머리에 붓는다. 물을 머금어 어제처럼 올백으로 잔뜩 넘긴 내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든 듯 유디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하니까 진짜 나이 들어 보인다." 약 올릴 거면 뭣하러 공들여서 남의 머리를 넘기는 거냐! 장난기를 담은 얼굴이 얄미워서 물을 뿌렸다. 그리고 투덜거리면서 머리를 원 상태로 내리려고 하니까 유디스가 "아앗! 기껏 열심히 다듬었는데!"하고 소리친다. 그 바람에 녀석의 목소리가 넓은 욕탕에 울린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 말한 건..." 유디스가 다시 머리카락을 넘기기 시작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넘겨주는 그 표정이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여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저 얼굴 보는 게 더 기분이 좋으니까 나중에 뭐라고 약 올리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른스러워 보인다는 뜻이야." 그리고 드러난 이마에 쪽하고 뽀뽀를 한다. "섹시해 보이기도 하고." 녀석이 양 볼을 감싸며 눈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 낯 간지러운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니 눈을 떼지 않은 채 코끝에 뽀뽀를 한다. 기분이 묘해져서 눈동자를 돌리고 "무슨 말도 안되는..."하고 궁시렁거렸다. 유디스가 코 앞에서 킥킥거리며 웃는다. 시선을 맞추기가 무안해서 고개를 털어 볼을 감싼 녀석의 손아귀에서 얼굴을 빼내었다. 등 뒤의 욕조에 몸을 기대며 녀석의 시선을 피하려는데 유디스가 다시 한 번 이마에 입을 맞춘다. 가벼운 뽀뽀인가 했더니 혀로 길게 이마를 핥는다. 몸을 기울인 녀석의 팔이 내 어깨 뒤로 뻗어 욕조의 가장자리를 잡는다. 그렇게 자신의 몸을 지탱한 유디스의 팔과 욕조 사이에 갇힌 나는 녀석이 이마에 뽀뽀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유디스가 이마의 가장자리를 혀끝으로 핥았다.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 그러니까 앞머리가 나 있는 두피를 혀로 핥고 입술을 부빈다. 가끔 이빨로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기도 하면서 이마의 선을 따라 혀로 핥는다. 조금 거북하다. 뭐랄까, 물컹거리는 혓바닥이 머리카락의 라인을 따라 핥고 있으니 마치 모자 같은 걸 썼을 때와 비슷한 답답함이라고나 할까? 앞이마의 머리카락 뿌리를 핥던 유디스는 관자놀이 부근으로 혀를 미끄러뜨리더니 입술로 꾸욱 누르기도 하고 이빨로 자근대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씹기도 하면서 관자놀이에서 귀로, 귀에서 턱으로 핥아 내려 간다. 혀로 핥은 자리는 이빨로 씹는 것도 잊지 않아서 나는 이대로 있다가는 얼굴 라인대로 이빨자국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 배도 고프고 넌 어제 잠도 못 잤으니 피곤할 거 아냐." 턱을 깨물던 유디스가 눈을 위로 치켜 뜨며 불만을 표시한다. 어느새 가슴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슬금슬금 배 아래로 내려간다. 녀석의 팔을 치워내고 촤아-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 났다. 나라도 먼저 나갈 생각이었다. 이대로 녀석이 하는대로 내버려두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허벅지께에서 찰랑거리는 욕조 안의 따뜻한 물을 가르며 물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유디스가 허벅지를 덥석 끌어 안는다. 우왁! 엉덩이에 얼굴이 닿잖아! 유지스는 욕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뒤에서 허벅지를 끌어 안아 엉덩이에 얼굴을 부볐다. 참으로 민망하고 창피해서 "뭐야! 놔!"하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욕탕 안에 우웅하고 울린다. 엉덩이를 할짝-하는 소리를 내며 핥는다. 깜짝 놀라 녀석의 팔을 치워내려고 발버둥치는데 욕조의 밑바닥이 미끄러워서 유디스가 단단히 잡고 있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엉덩이를 깨무는 통에 차라리 넘어지는 게 낫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퍼! 아프다구!" 되지도 않는 엄살을 부렸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이 입안 한가득 엉덩이를 베어물고 쭉쭉 빨았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느낀 건데 정말 드러운 놈이다. 찹찹거리는 소리가 민망하게 들린다. 팔꿈치로 정수리를 찍어버리면 화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녀석이 엉덩이 사이의 골을 아래에서 위로 혀를 세워 스윽 핥아 올리는 걸 느끼고는 거의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악!!!!" -텀벙 둘 다 물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뽀그르르하는 소리를 들으며 물 속으로 잠기던 나는 귀와 코와 입안으로 꽃향기를 가득 담은 물이 들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겨우 이 어색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데에 안도하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유디스의 방에서 먹는 걸로 했다. 나는 빨리 루센과 테이그를 만나서 물어 보고 싶은 것도 잔뜩 있고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지금의 분위기를 깼다간 유디스가 화 낼 거 같았다. 뭐가 그리 좋은 지 계속 싱글벙글하고 있는 녀석은 식사를 날라주는 하인을 방으로 들여 놓지 않고 문 밖에서 제 손으로 직접 음식이 든 트레이를 끌고 올 정도로 들 떠 있었다. 하얀 가운을 걸치고 타월로 머리를 말리고 있던 나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자 식욕이 당기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격식을 차리지 않은 식사를 하게 되어 굉장히 편했다. 유디스와 함께 궁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땐 옆에 항상 여러 명의 하인들이 시중을 든다는 명분으로 서 있었고 지나치게 넓은 식탁에 달랑 둘 만 앉아 식사를 하는 건 은근히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트레이에 놓인 음식을 제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지도 않고 셋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집어먹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제 연회에서 그렇게 많이 먹어놓고도 험한 일을 겪고 난 다음인지 무척이나 허기를 지는 것을 느끼며 유디스도 나도 아무 말없이 먹는 데만 집중했다. "하아~ 배부르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극락이 따로 없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유디스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눈가가 게슴츠레하고 표정에 힘이 없는 걸 보니...... "너 졸리지?" 내 질문에 뜨끔했다는 듯 표정이 변한다. "간 밤에 잠도 못자고 그 난리를 쳤지, 사정도 했지, 목욕까지 해서 몸은 나른하지, 배는 부르지... 졸리는 게 당연해. 이제 그만 자. 쉬어도 되잖아." "나를 뭘로 보는 거야. 겨우 하루 날새고 비실거릴까봐?"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본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다 먹은 음식을 치우는 왕의 모습이라니, 루센이 봤다면 입에 거품 물고 놀랄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녀석이 자야 내가 루센과 테이그를 만날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녀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토닥토닥 두들기다가 살살 쓰다듬어 주면서 비위를 맞춰주었다. "괜찮아. 이제 좀 자 두라구.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했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줄 테니까 편히 쉬어." 저 눈 풀어지는 거 봐라. 유디스는 좀 쑥스러운지 볼을 긁적이면서 "네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할 수 없지. 그럼 자 볼까?" 하고 건방진 소리를 내뱉는다. 솔직하지 못한 놈이라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너 자는 사이 루센에게 갔다 오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나오려고 했다. "나 자는 동안 계속 옆에 있어줄 거지? 내가 눈 떴을 때 안 보이면 왕궁을 뒤집어 엎을 거니까..." 앗, 이게 아닌데. "자장가 불러줘." 몽실몽실한 솜털 같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면서 떼를 쓴다. 어이가 없어서 "절대 싫어." 하고 강한 게 한마디 해줬더니 인상을 쓰며 입을 내민다. 비어 있는 자신의 옆을 탕탕 두들기면서 나도 이불 속으로 들어 오라고 무언의 강요를 한다. 아...이게 아니다. 난 유디스가 잠들 때까지 지켜보다가 루센한테... 젠장 모르겠다. 생명수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간 밤의 피로함이 개운하게 가신 상태다. 별로 졸립지도 않고 오히려 이 상태에서 뭔가 한다면 뭐든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최상의 컨디션이라구. 그런데 이 컨디션으로 이불 속에 누워 있자니 눈만 말똥말똥하다. 그리고 옆에서 유디스가 꽉 끌어 안고 있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 "토닥토닥." "뭐?" "자장가가 안되면 토닥토닥 해줘." 갈 수록 태산이다. 니가 애냐?! 하지만 나른하게 눈을 감는 녀석이 귀여워서 결국 유디스의 몸에 팔을 두르고 그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디스는 완전히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정말 피곤했나보다. 그러고 보니 간 밤의 꿈, 아니 꿈인지 유체이탈인지 모르겠지만 자이카나의 저택 앞에 병사들을 이끌고 있던 유디스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그 상태로 새벽 내내 긴장을 곤두세웠을 테니 얼마나 체력소모가 심했을지. 뿐만 아니라 내가 죽은 줄 알았던 순간의 유디스의 얼굴은 완전 넋이 나가서 저게 과연 이 나라의 왕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눈 앞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녀석의 뺨을 손가락으로 긁어 보았다. 녀석이 했던 것 처럼 얼굴라인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다가 갑자기 너무너무 귀여워져서 이마에 뽀뽀를 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람. 구석에 돌돌 말린 정액이 묻은 시트가 눈에 들어 왔다. 워낙 이중 삼중으로 시트가 씌워진 침대라 시트 한 장 정도는 없어도 자는데 지장 없지만 저 것을 하인들이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할지 심각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으음...아니야. 아주 쬐끔 젖었을 뿐이고 금방 마를 테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정말 생각할 수록 유디스와 나는 창피한 짓을 했다는 게 실감났다. 그래, 이렇게 창피한 기분으론 루센을 만나도 분명 버벅거리다가 유디스와의 일을 다 말해버릴지도 몰라. 착잡한 기분을 누르며 루센은 나중에 만나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루 정도면 루센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벌써 며칠 째 유디스의 방 밖을 나가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화장실도 욕실도 방 옆에 딸려 있었고 식사도 방에서 했다. 하인들이 방에 들어 오는 일은 거의 없어서 요 며칠간 내가 본 사람이라곤 유디스 뿐이었다. 창 밖을 바라보면 궁 안이 훤히 들어와 궁 내부를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워낙 멀어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한쪽 벽면에 가득히 꽂혀 있는 책을 읽다가 유디스랑 논 게 전부였다. 아니 놀았다고 해도...대부분 유디스가 끈적거리면서 귀찮게 굴다가 내 아들놈을 매만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사정하고...무진장 쪽팔리기는 한데 녀석이 너무 좋아하니까, 그리고 나도 기분 좋아서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거 너무 음탕하잖아. 하루에 대체 몇 번을 사정하는 거야? "저어...유디스? 나 이제 루센한테 가봐야 할 거 같아." 읽고 있던 책을 내려 놓으면서 내 발가락을 가지고 장난치는 유디스에게 말했다. 유디스는 발가락 하나하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어디서 나이프를 가져와 발톱을 잘라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발도 싹싹 닦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녀석을 바라보니 유디스가 고개를 들고 뚱한 표정을 짓는다. "아직 며칠 안 지났잖아. 그 녀석들도 네가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 됐고. 꼭 이렇게 급하게 만나야 할 필요 있어?" 발톱을 다 깎았는지 수건으로 발가락을 문질러댔다. 그리고는 다시 자기가 깎은 발톱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입을 맞춘다.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빼려는데 녀석이 꽉 붙들고 안 놔준다. 한 술 더 떠서 오므린 발가락의 끝을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주욱 혀로 핥는다. 차마 발로 차버리지도 못하고 인상을 쓰고 있는데 녀석이 엄지발가락을 입안에 넣어버리는 바람에 못 참고 거칠게 발을 빼내었다. "뭐 하는 거야 더럽게!" "아까 씻었잖아. 뭐가 더러워?" 녀석이 만만치 않은 힘으로 발목을 잡아 뺀다. 그 탓에 유디스와 나는 침대 위에서 발을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힘 싸움을 하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이런, 이게 아닌데. "잠깐, 이것보다 아까 얘기 말인데. 나 그만 루센도 보고 싶다구. 너도 그동안 계속 놀았잖아. 지난 번에 보니 할 일이 많은 거 같은데 이렇게 빈둥거려도 되는 거야?" 결국 발을 뺏긴 채 대자로 드러누운 나는 투덜거리면서 유디스에게 항의했다. 내 한쪽 다리를 무슨 기둥 붙든 것마냥 끌어 안은 녀석이 다시 발가락을 핥기 시작한다. 엄지발가락을 쭉쭉 빨더니 발가락 사이에 혀를 넣어 간질인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으히히"하고 웃자 녀석도 따라 웃는다. "네 보호자들은 지금쯤 엄청 바쁠 걸. 나중에 만나는 게 더 좋을 거야. 게다가 밀린 일감이래야 장관들이 다 제멋대로 꾸며놓은 문서에 옥새를 찍는 게 전부니까 나중에 해도 된다구. 그러니까 지금은 나랑 놀자 응?" 말은 저렇게 하지만 거의 매일 아침 점심으로 아저씨들이 문을 두드리며 "전하!"를 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뭔지는 몰라도 저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일 테다. 최소한 내 발바닥을 핥고 입맞추는 것보다는 중요할 것이다. 으윽...기분 이상해... 녀석이 발바닥의 한 가운데를 이빨로 긁었다. 순간 발바닥을 타고 전류가 흘러 사타구니로 직격한다. 움찔하고 발을 오므리자 유디스가 헤에....하면서 눈을 빛낸다. "발바닥이 성감대라니 특이하네." 베개를 녀석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새빨갛게 된 얼굴로 식식 거리며 책을 들고 침대 위를 벗어났다. 유디스는 으하하 하고 웃더니 내가 던진 베개를 꼭 끌어안고 묘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놀림 당한 기분이 들어서 녀석을 외면하고 책장 앞에 섰다. 지금 읽고 읽는 책보다 좀 더 어려운 수준의 책을 골라도 될 것 같았다. 회화체 남발의 책보다는 좀 딱딱하지만 재밌는 책이 없을까. 그렇다고 무슨 왕이 무슨 업적을 세워 얼마나 영토를 넓히고 자식은 누구고 하는 식의 책은 질색이다. 고어체가 잔뜩 있는 책도 사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공문서라면 올바른 어법에 깔끔한 필체로 알아보기 쉽게 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유디스. 나 방금 생각 났는데." 책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아직도 베개를 끌어 안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가 벤 베개에서 무슨 냄새라도 나는지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녀석은 내가 얼굴에 화색을 띠고 말하니 금새 기대하는 표정이 된다. "나 이제 글 읽는 거나 쓰는 거나 꽤 익숙해졌는데 뭐 도와줄 거 없어? 여기 와서 만날 놀기만 했는데 나도 뭔가 해야지." 그래, 뭔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매일 아저씨들이 유디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나도 뭔가 쓸모있는 일을 할 테니 뿌듯한 성취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제안에 흥미를 보이며 유디스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그거 좋겠다."하고 말해 나는 속으로 굉장히 기뻐했다. 유디스가 침대에서 일어 나더니 문밖으로 걸어갔다. 빠끔히 문을 열고는 밖에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한다. 문틈으로 줄을 지어 엎드린 아저씨들이 보인다. 어제도, 그저께도, 오늘 아침에도 찾아왔던 사람들인데 화려해 보이는 옷감을 바닥에 끌고 무릎 꿇은 채 "전하 부디!!"라고 말하며 거의 통곡에 가까운 외침을 내지른다. 솔직히 깜짝 놀랬다. 저 사람들이 아직도 안 가고 문밖에 무릎 꿇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젠장. 저 사람들은 유디스의 방에서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나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 내가 꼬드겨서 놀았다고 생각할거야! 이제라도 유디스가 일을 할 마음이 들도록 만들었기에 망정이지...하아...보라고. 유디스가 일거리를 가져오라고 말하니까 저 아저씨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뻐하잖아? 유디스가 가져온 두루마리 문서들은 눈대중으로 살펴봐도 수백 통은 되어 보였다.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중요한 문서들이 쟁반에 담겨 음식을 나르는 트레이에 실려오는 걸 보는 신하들의 표정이 착잡하다. 이번만은 혼자 처리가 안되는 분량인지 유디스는 신하 몇 명을 동원해 두루마리 문서를 장작개비처럼 쟁반 위에 쌓아놓고 방안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중요한 문서인 탓일까, 그 수 많은 문서들을 하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나이 지긋한 귀족들이 직접 옮기고 있었다. 탁자에 앉아 있던 나는 방안으로 실려오는 문서들을 바라보며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이게 다 유디스가 할 일이란 말이야? 이렇게 일거리가 많은데 이제까지 그렇게 빈둥거렸다고?!! 신하들이 지나가면서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는데 역시 그 눈길이 곱지 않다.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신하들이 나가고 방안에 남은 건 두루마리 문서의 산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며 유디스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이제부턴 일도 이 방에서 하기로 했어. 네가 도와준다니 나로서는 기쁜 일이지. 너무 겁먹지마. 여기에 도장만 찍으면 되니까." 그렇게 말한 유디스는 침대로 걸어가더니 침대 머리맡의 뚜껑을 밀어젖힌다. 그 속에서 작은 보석함과 같은 상자를 꺼낸 유디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나를 불렀다. "이게 옥새야. 저 두루마리 하단에 이걸 찍기만 하면 끝이지. 굉장한 노가다라고." 작은 함에서 꺼낸 것은 무식하게 큰 도장이었다. 도장의 면적이 내 손바닥 절반만하고 손잡이도 굵고 길어서 한 손으로 붙들고 꽝-하고 찍기에 딱 좋은 감촉이었다. 하지만 막상 손에 들어보니 무게도 상당해서 과연 이걸로 수백 번을 찍다 보면 손목에 쥐가 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일을 하게 되었다. 왕궁에 와서 처음 하는 일이다. 처음 하는 일이 옥새를 찍는 일이라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나도 뭔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대로 두근두근했다. 옥새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기뻐하는 나를 보고 유디스도 같이 미소를 지어준다. 무엇보다 이제 루센이 지난 며칠동안 뭐했냐고 물어 보면 당당히 이런 일을 했노라고 자랑할 수 있어서 그게 가장 다행이었다. 공문서는 정확한 표기의 어법과 깔끔한 필체로 되어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의 절반은 빗나갔다. 필체는 깔끔했지만 문서마다 쓰는 사람이 다른지 글씨체도 제각각이라 익숙해지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또한 어법은 정확했지만 나이 든 사람 특유의 권위의식이 배어 있어 단어는 어려웠고 표현도 생소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간단하게 '~했다.' 라고 쓰면 될 것을 갖은 수식어를 붙여 2~3줄로 끝날 문장이 그 두 배로 늘어나 있는 것을 보고 엄청난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무엇보다 내용이 만만찮아서 쥐뿔도 모르는 내가 여기에 도장을 찍어도 괜찮은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대규모 토목공사의 허가, 군비의 예산문제. 잦은 폭동과 소규모 반란, 행정적 재원부족에 따른 업무마비 등 등 등... 특히 가장 많은 내용은 자이카나에 대한 상소문이었다. "이 바보들이 상소문이랑 일반 문서랑 다 섞어놨네. 여기 빨간 끈이 매어져 있는 것은 보지마. 이건 안됩니다. 저건 안 됩니다...시끄러운 말들만 써 있으니까. 봐도 시간 낭비야. 그리고 너도...그렇게 자세히 읽어 볼 필요 없이 그냥 도장만 꾹꾹 찍으면 된다니까." 유디스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 안으며 투덜댄다. 침대에 엎드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두루마리 문서들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아까 그 아저씨들이 입에 거품물고 난리를 치겠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저 일거리들은 오늘 안으로 끝내지 못할 거다. 그러니 이 문서에 내가 도장을 찍고 있는 모습 같은 건 절대로 들켜선 안된다. 그러면 진짜 그 아저씨들...기절할지도 몰라... "어차피 찍을 거라면 누가 찍든 상관없잖아? 나는 보통 읽지도 않고 쾅쾅 찍는다구." "그, 그래도 돼?" 순간 이제까지 어떻게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갔나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우수하던지 아니면 그 뭐시냐...재무관 헤시안? 아무튼 유디스대신 일을 도맡아 했다는 헤시안이 무척이나 능력있는 자였나 보다. 하지만 그 헤시안이 제하라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자이카나가 왕가에 바쳤던 충성과 그 업무효율에 대한 우수성을 감안하여 선처해 주기를 바란다'는 문구의 두루마리를 읽으면서 한 손에는 문서를 한 손에는 옥새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솔직히 요 며칠동안 유디스랑 있으면서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모처럼의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었고 유디스 또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이카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라고 물으니 등 뒤에서 끌어 안은 유디스가 팔에 힘을 준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뭐뭣?!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유디스가 볼에 쪽하고 입맞췄다. 언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냐는 표정으로 생긋 웃어 보이며 턱을 내 어깨에 문질러 오지만 조금 전의 그 음산한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자이카나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얘기해 보려고 하는데 녀석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이빨을 박는다. 얇은 셔츠위로 더듬어 오는 손길이 묘하게 뜨거워서 또냐...하고 체념하게 된다. 대체 왜 내 몸을 만지면서 유디스가 흥분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런 녀석을 보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녀석이 등 뒤에서 하아-하는 한숨을 내 쉬거나 얇은 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둔 판판한 가슴을 주물러대어도 그러려니 하고 다음 문서를 해석하는데 신경을 썼다. 에...이것은 뭐냐...또 공사에 관한 얘기네... 변방에 드루키아족의 잔당이 남아서 습격해오니 성을 쌓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유디스가 상소문 빼고는 다 찍으랬으니...어디 보자 쟁반이... 푹신한 침대 위에서 도장을 찍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널찍한 은쟁반을 뒤집어 놓고 그것을 탁자 대신으로 해서 옥새를 찍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밀랍인지 뭔지를 꾸욱 찍고나니 누리끼리한 문서에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히는 게 맘에 들었다. 왠지 고풍적으로 보이는 것이 멋있다. 침대에 누워 쟁반을 받치고 찍는 모양이 그리 우아해 보이지는 않지만 뭐..... 그나저나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양이다. 이제 겨우 이 나라의 글을 깨우친 내가 침대 위를 뒹굴며 옥새를 찍고 있다니. 더구나 그 옥새의 주인인 유디스는 이불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 아래에 있는 내 등판이며 허리를 야금야금 갉아먹듯 이빨로 깨물고 있다. 왠지 한심하다. 국가의 중대한 문서를 침대 위에 어지럽게 늘어놓고 쾌락을 탐하는 왕을 본다면 신하들이 피를 토할 일이다. 문득 아까 유디스가 일거리를 가져오라 했을 때 기뻐하던 반백의 아저씨들이 떠올랐다. 굉장히 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라도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에 꾸욱꾸욱 도장을 찍었다. 옥새가 무거워서 팔목이 아프긴 했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루센과 테이그의 얼굴을 본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유디스는 굉장히 싫다는 표정을 하며 나를 루센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줬지만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일들이 잔뜩 쌓여 있음이 분명하다. 녀석은 "며칠만 기다려. 후딱 해치우고 돌아올게."라고 말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 갔다. 유디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녀석이 있으면 루센과 제대로 얘기를 나눌 수가 없기에 나는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승호!!!" 루센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이름을 외쳤다. 나도 왠지 감정이 격해져서 루센을 한 팔 가득 안으며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라고 중얼거렸다. 루센은 엄청난 힘으로 나를 마주 안아와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옆의 테이그는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내 어깨를 꽈악 잡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얼마만에 보는 얼굴들인지 모른다. 더구나 얼굴이 반쪽이 된 루센과 테이그를 보자니 가슴 한쪽이 찡해진다. 그동안 밀린 얘기도 많고 묻고 싶은 얘기도 잔뜩 있었다. 유디스는 물어도 대답을 회피하거나 잘 안 가르쳐주기 때문에 루센한테 묻는 게 제일 빠르다. 루센도 나한테 궁금한 것이 엄청 많은 눈치다. 우리들은 예전의 그 방. 내가 이 왕궁에 와서 처음 묵었던 그 전망 나쁜 방으로 향하면서 서로의 무사함에 대해 안도하고 기뻐했다. "오,오,오,옥새를 찍었다구요?" 그동안 유디스의 방에서 뭐했냐는 루센의 물음에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옥새가 일개 소년이 만질만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나는 이래 봬도 에드바라하의 대표. 그만큼 에드바라하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승호는 아, 안단 말이에요? 왕이, 전하가 그 오,옥새가 있는 장소를 알려줘요?" 그동안 고생이 많았는지 말까지 더듬는다. 확실히 루센에겐 휴식이 필요하다. "예. 침대 머리맡 뚜껑 속에 있더라구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 보지만 루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테이그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싶어서 두 사람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데 루센이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승호도 알겠지만...이 얘기 절대 다른 사람한테 해선 안되요. 옥새의 위치는 물론 승호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아, 당연하죠. 그 정도는..." "그, 그리고 앞으론 절대 하지 말아요. 옥새를 만지지도 말고 눈길도 주지 마요! 승호...모르겠어요? 그 옥새를 쥐고 있는 순간은 승호가 이 나라의 왕인 거라구요!" 어어? 그건 좀 비약이 심하다. 일개 농부가 옥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농부가 왕이 아니듯 내가 옥새를 들고 있다고 해서 왕은 아니지 않은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더니 테이그가 그 시커먼 얼굴을 더 험상궂게 굳히며 말한다. 그동안 살이 빠졌는지 광대뼈가 두드러져보여 더 무섭다. "차라리 일개 농부라면 다행이지. 넌 에드바라하의 대표다. 그런 위치에 있는 자가 함부로 옥새를 만지면 반역의 의도가 있었다고 오해를 당해도 할 말 없는 거야. 아무리 전하께서 허락하셨다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사양해야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 이후 옥새의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 제일 먼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은 네가 될 거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지만 유디스가 나를 의심할 리가 없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루센이나 테이그의 입장에서 보면 저렇게 불안해 하는 것이 당연한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유디스는 너무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이다. 그런 녀석의 행동이 다른 귀족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아무리 왕이 허락했다 하더라도 옥새에 손을 댄 내 얘기가 행여 알려진다면 곤란한 건 우리 쪽이다. 아 제기랄! 이거 머리 복잡해지네. 자랑하려 했다가 된통 혼난 기분이다. "아무튼...그래도 승호가 무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왕이 그렇게까지 행동할 줄은..." 루센의 표정이 흐려진다. 갑자기 그날 유디스의 애정행각이 떠오르면서 엄청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으으으 뭐라고 둘러대지? 내가 살아난 게 너무 기뻐서 그랬다고? 좀 진한 우정의 표현이라고? 원래 스킨쉽이 심했던 녀석이라고 할까? 아니다, 그냥 넘어가자! 이런 대화는 그냥 넘겨버리는 게 상책이다! "그보다 나 묻고 싶은 거 무지 많아요." 눈치를 살피며 루센을 바라보았다. 루센과 테이그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시작은 루센의 한숨이었다. 왕궁에 봉사하는 대신 그 가문의 존속을 인정 받는 왕가의 권속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문이 자이카나였다. 비록 직접적인 권한은 없지만 대부분의 행정적인 실무는 그 쪽 집안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었고 외교능력과 군사적인 면에서도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왕가의 권속을 무시하는 귀족들이라 해도 일단 자이카나라면 한 수 접어 줄 정도라고 한다. 자이카나 못지않게 아오네르와 루탄도 3대에 걸쳐 왕가에 충성을 바친 가문이다. 비록 자이카나만큼 인재가 많진 않지만 워낙 가문자체가 오래 되고 인맥이 넓어서 그 세력은 크지만 에드바라하가 들어오면 자이카나 만큼 싫어할 가문들이었다. 이러니 암살자를 보내는 가문을 추리하기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드바라하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암살자들은 자백을 하지않고 자살을 했지만 그래도 루센과 테이그가 얻어낸 수확이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니어서 언제부터인가 자이카나 가주의 막내아들 벨미르를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납치당한 그날은 순전히 우발적인 계획이었기 때문에 그 주도면밀한 벨미르로서도 채 뒷공작을 쓸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루센은 말했다. 급한 마음에 루센과 테이그는 평소 벨미르와 거래가 있던 청부업자들의 아지트를 족쳤고 왕은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 자이카나의 저택에 쳐들어 갔다. 자이카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현재 자이카나의 벨미르는 도주중. 그리고 왕성에서 일을 보던 자이카나의 다른 귀족들은 소식을 듣고 다들 어딘가로 도망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래도 왕가에 충성하겠다는 우직한 노인들과 설마 자신한테까지 피해가 오리라곤 생각 못하는 바보들 뿐이랬다. "그...군대가 출동했던 자이카나의 저택은 어떻게 됐어요?" 문득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땅에 엎드려 있던 노인과 노부인이 떠올랐다. 말발굽에 짓밟히던 아름다운 저택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날아갔어요." "예?" "완전 날려버렸다구요. 그 무식한 왕이. 저택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흔적도 없어요. 그 자리에 있던 식솔들은 전부 처형. 우리가 승호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보낸 전령이 도착하기도 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루센이 어이없는 일이라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자이카나의 가주다. 그걸 그렇게 간단히 죽여? "그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 거의 일주일간 승호와 함께 왕은 잠적했죠. 그 잠잠하던 일주일간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짐을 싸고 달아 났는지 몰라요. 덕분에 일거리들이 엄청나게 폭주해서 지금 왕실의 행정은 엉망이고 원로들의 원성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에요." -지금 당장 자이카나의 도움이 없다면 왕궁의 재정은 일주일만에 무너진다고 장담하지. 문득 벨미르의 음성이 떠오르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자신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행인 건 왕이 그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안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는 거야." 옆에서 테이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고 유디스가 그렇게 방에 틀어 박힌 원인이 나라는 걸 깨닫고 갑자기 귀 끝으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괜히 눈치를 살피며 바라보니 창 밖을 향한 테이그의 얼굴표정은 담담했다. "덕분에 죄 없는 자이카나의 많은 사람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왕이 왕좌로 돌아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되는 군." 나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날 오후부터 왕궁 안엔 피의 숙청이 단행되고 있었다. 자이카나의 남은 귀족들은 전부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수 많은 저택들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거나 압류처분 되었다. 재산은 몰수 당했고 그들이 관리하던 왕가 명의의 땅은 반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이카나를 가리켜 '제 2의 에드바라하'라는 둥 수군댔고 온갖 서류상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게 되었다. 자이카나 뿐만 아니었다. 아오네르와 루탄에서도 나에게 암살자를 보냈을 거라 의심되는 집안은 증거도 없이 짓밟혔다. 왕가의 권속은 아니었지만 에드바라하에 대해 반발이 심했던 정통 귀족들도 화를 당했고 나의 존재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중요 대신들은 관직을 내놓아야 했다. 왕궁의 귀족들 중 삼분의 일이 사라졌다. 그 모든 사실들을 루센에게 전해 들으며 나는 착잡한 마음이 되었다.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는 왕 성은 유난히 사람 수가 적어보였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 넘길 수 없게 되었다. 루센과 함께 에드바라하 삼인방의 병 문안을 하면서 식물인간이 된 라기오엘을 봤을 때는 참지 못하고 눈물이 나왔다. 말 수는 적었지만 한 번 혼낼 땐 무섭게 혼내던 사람이었다. 유디스가 나에게 퍼부었던 생명수 한 방울만 있었더라면...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옆의 침대에는 그나마 수업내용이 괜찮았던 게오가 누워 있었다. 게오는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지만 한달만 더 요양하면 그럭저럭 회복할 수 있었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피루만은 루센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에드바라하쪽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미안해요. 승호가 알면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았어요. 가뜩이나 불안에 떠는 승호를, 왕이랑 친해지라고 등을 떠밀면서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어요. 지금은 내가 왜 그랬는지 후회하고 있어요."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루센이 조용히 얘기했다. 루센은 내가 억지로 왕과 함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 자신이 나에게 했던 행동을 후회하며 굉장히 미안해 하는데, 나야말로 루센이 그럴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왕의 신임을 얻으라고 했지 왕의 잠자리 시중을 들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하던 루센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괴로워했다. 어딘가 원망하는 뉘앙스였지만 진심으로 나를 탓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유디스는 생각보다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좀 골치 아플 뿐이지 좋은 친구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루센이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다. 아, 이거 좀 쑥스럽네. 하지만 금방 루센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안색이 굉장히 나빠보여서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줄 알았다. 루센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시선을 돌리며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미간과 관자놀이를 짚어 얼굴 전체를 감쌌다. 루센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부릅뜬 채 땅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왕이 승호와 좋은 친구가 될 리 없잖아요. 승호는 그렇게 무서워 했잖아요. 나 때문에, 에드바라하 때문에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구요!" 요 며칠간 루센은 신경질적이었다. 여전히 침착하고 따스하지만 유디스와 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회피하거나 불안정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유디스를 변호하면 할 수록 상태는 더 나빠졌고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물고 만다. 창피하게시리 굳이 유디스와의 일을 들먹일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지만 저대로 루센이 유디스에게 갖는 오해를 풀지 않은 채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지 조금씩 걱정 되기 시작했다. 태풍이 지나갔다. 귀족들은 서로 쉬쉬 하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디스를 다시 만난 건 에드바라하의 의식 날짜가 공표된 그날 저녁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석양의 빛이 주황색으로 쏟아지다가 점점 약해져 갔다. 방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침대 위에는 잔뜩 쌓여 있던 두루마리 문서가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었고 한쪽 구석의 테이블 위에 아직 처리 못한 문서들이 몇 개 남아 있었다. 며칠 만에 다시 오게 된 유디스의 방을 바라보니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한숨도 나온다. 이 방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바보짓 밖에 없구나.... 문득 여기서 그 바보 같은 춤을 췄던 기억이 났다. 피식-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유디스가 들어왔다. "윤승호!" 착각인가? 녀석의 활짝 웃고 있는 얼굴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미리 와 있었구나! 늦으면 내가 데리러 갈려고 했는데!" 그래, 네가 루센 앞에서 민망한 짓 할까 봐 부르자마자 얼른 왔다구. 유디스는 방금 씻고 왔는지 가운차림에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의 환영은 착각이었던 것 같다. 요즘 궁이 너무 뒤숭숭하니까 헛것이 보이는 거야. 녀석이 머리를 타월로 문지르다 말고 덥석 안아온다. 귓가에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라고 쉼 없이 읊조리는데 그 한숨 섞인 입김에 목덜미가 간지럽다. 겨우 며칠이나 못 봤다구......속으로 투덜거렸지만...음...역시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느낌이어서 나는 녀석의 등을 토닥이며 "그래, 그래" 하고 달래주었다. 방금 씻고 왔는데도 유디스의 몸은 뜨거웠다. 안 놔줄 것처럼 꽉 붙들고 있더니 어느새 스르르 팔에 힘을 풀고 이마에 입술을 미끄러뜨린다. 미간과 콧날의 선을 타고 내려오던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에 쪽하고 베이비 키스를 하는 동안 나는 녀석의 머리를 타월로 문지르며 말려주고 있었다. 유디스가 눈을 맞추면서 실실 웃는데 괜히 무안해서 녀석의 머리만 타월로 벅벅 문지르고 있었다. 뭐 이렇게 될 걸 예상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저렇게 들떠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면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또 물고 빨고 핥고... 아...상상하니까 창피해진다. "다 없애버렸어." 유디스가 눈을 맞추며 뺨과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했다. 침대로 걸어가면서도 쉬지 않고 얼굴에 입을 맞추는 바람에 나는 뒤로 걸어가야 했다. "너를 해치려는 놈들, 나를 방해하려는 놈들.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다 치워버렸어. 에드바라하와의 의식도 곧 치를 거고 비어있는 관직자리는 다 에드바라하에게 줄 게." 마치 나 잘했지? 라고 묻는 것 같아 조금 떨떠름해졌다. 명색이 왕인데 이렇게 사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해도 되나 싶었다. 그렇잖아도 지난 며칠간 궁정에 불었던 피바람에 내가 다 오싹할 지경이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환하게 웃으며 단순히 길가의 돌멩이를 치운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내 주제에 대체 무슨 충고를 할 수 있을까.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멀쩡한 사람 실업자로 만들지 말라고? 주제넘은 행동은 옥새를 만진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나 때문에 사람들이 다치는 것도 싫다. 더 이상 함부로 굴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입은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피해주지마." 침대에 뉘여지고 녀석의 머리를 타월로 문질러대며 말했다. 유디스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는다. 그러고는 "너는 너무 물러."라고 큭큭대며 속삭였다. 귓바퀴를 따라 핥으며 혀를 뾰족이 세워 귓구멍 안에 깊숙이 넣는다.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리니 녀석의 턱이 내 어깨에 부딪혀 따닥-하고 이빨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혀를 깨물었음이 분명한데도 녀석은 키득거리며 귀의 연한 뼈를 자근자근 씹고 관자놀이를 혀로 핥다가 속눈썹을 가볍게 혀끝으로 건드린다. 눈 주변에 미지근하고 물컹한 혀가 왔다 갔다 하길래 찡그리듯 한쪽 눈을 감아버렸다. 감긴 눈꺼풀 위로 녀석의 혀가 깊게 핥더니 입술로 꾸욱 도장을 찍는다. 얼굴 전체가 침 범벅이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직도 손은 녀석의 덜 마른 머리카락을 타월로 비비고 있었다.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혀는 목구멍까지 깊게 넣어 나는 좀 괴로워졌다. 토기가 치밀어 오르기 직전 다행히 유디스는 혀를 목구멍에서 빼고 입천장을 간질였다. 볼 안쪽의 연한 살, 혓바닥 밑에 시퍼렇게 얽혀 있는 힘줄, 이빨과 잇몸의 경계선. 원래 키스란 게 이런 건가 의문이 들 정도로 유디스는 사소한 기관 하나하나에 집착을 했다. 테크닉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약간의 간지럼을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녀석은 키스만으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맞닿은 녀석의 아랫도리가 불룩하다. 몸의 여기저기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집요한 녀석의 혓바닥 만큼이나 사소한 부위 하나하나에 집착한다. 가령 셔츠가 위로 말려 올라가 드러난 갈비뼈를 손가락으로 쓸어 내린다거나, 등 뒤의 척추 라인을 따라 뼈마디를 확인하듯 꾸욱꾸욱 눌러본다거나, 평평한 가슴에 솟아난 돌기를 한참동안 가지고 논다거나 하는 행동들이 그러하다. 덕분에 나는 간지러움을 주체 못하고 "으히히" 하고 웃어버린다. "겨우 나흘이었는데 너랑 떨어져 있는 게 무서웠어. 네가 없어져 버릴 것 같아 싫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네가 있는 방향을 보며 네 생각만 했어. 시끄러운 놈들을 다 없애버리고 바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차마 피냄새가 베어 있는 차림으론 네 앞에 나서기가 싫어서..." 뱃살에 얼굴을 묻으며 유디스는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굴을 비비고 내 냄새를 확인하듯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꽈악 끌어 안는다. 젖은 타월을 저만치 치워버리고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녀석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어 주었다. "승호야..." "응" "승호야..." "응. 그래." 의미 없는 말을 주고 받았다. 녀석은 배꼽을 핥으며 두 다리를 꽉 끌어 안았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뒤통수부터 들기 시작한다. 보통은 이쯤에서 녀석이 내 물건을 잡고 흔드는데 그럴 때마다 창피하면서도 기분은 좋아서 녀석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 유디스가 배꼽에 깊게 혀를 박아 넣고 힘을 주어 돌린다. 왠지 방광을 직격당한 것 같아 "윽..."하는 신음을 흘리며 그만하라고 녀석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큭큭거리는 녀석이 웃을 때마다 살갗에 숨이 닿아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유디스의 얼굴이 점점 아래로 내려 가면서 양 손으로 바지와 속 옷을 살살 벗겨내리고 있었다. "너!" 녀석의 입김이 사타구니에 닿아 "히익!"하고 소리질렀다. 유디스가 눈을 치켜뜨며 장난스럽게 내 안색을 살피더니 몸부림치는 두 다리를 더 강하게 끌어 안는다. 창피해 죽겠다! 그런 거 쳐다보지 말란 말야! 혀를 내밀더니 톡톡 하고 물건의 끝부분을 건드린다. 연약한 귀두의 살에 혀끝의 점막이 닿았다 떨어지는 것이 감질나 허리가 뒤틀렸다. 하도 당황스러워서 "너...너...!"하고 말도 똑바로 잇지 못하는데 녀석이 음낭과 반쯤 발기한 그것에 입술을 부비며 쪽쪽거린다.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녀석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보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뜨거운 입안에 중심을 물렸다. 한꺼번에 덥석 입안으로 삼킨 유디스는 아무런 요령도 없이 쭉쭉 빨고 핥았다. 뜨겁고 강하게 조이는 녀석의 입안은 미치도록 자극적이어서 허리가 휘고 상체가 비틀렸다. 눈 앞이 새하얗다. 자극이 너무 세! 발기 된 것이 뜨겁고 끈적끈적한 입안의 부드러운 살과 마찰하며 단 숨에 쾌감의 극한까지 올라갔다. 너무 빨라서 참을 생각도 못했다. 덜덜덜 떨리는 몸이 창피해서 떠는 건지 사정의 여운으로 떠는 건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피가 몰린 얼굴을 양 팔로 감싸 안으며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녀석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허리께를 끌어 안고 배에 얼굴을 부빈다. "너는 여기에 자극을 줘야 겨우 느끼는 것 같아." 그런 쪽팔린 소리 하지마! 화가 나서 감히 녀석의 머리를 때렸다. 그래도 유디스는 기분이 좋은지 "후후후"하는 웃음을 흘리며 가슴께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 온다. 아직 배출하지 못해 잔뜩 부풀어 있는 녀석의 것이 살갗을 자극했다. "끝까지 가자..... 대신 잔뜩 서비스해줄 게..." 귓가에 나른하게 울리는 유디스의 음성이 굉장히 야하게 들렸다. 두 팔로 가린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아까의 사정이 너무 강했던 탓인가 보다. 엉덩이에 어정쩡하게 걸린 바지와 속옷을 녀석이 마저 벗겨내었을 때도 눈을 감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문득 아무런 반응이 없길래 흘끔 녀석의 동향을 살피니 유디스는 자신도 가운을 벗고 허벅지께에 앉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진지해서 나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참 이상하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유디스의 단단한 피부가 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타구니에 직접 닿은 녀석의 그것은 이미 한 번의 사정으로 힘을 잃은 내 것과는 달리 배출을 원하며 부풀어 있었지만 가만히 배를 쓰다듬는 유디스의 손에 조급함은 없었다. "네가 싫어 할 만한 일들은 다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뭐가 부족한 걸까? 끝까지 가고 싶어 미치겠는데...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삼켜버리고 싶은데... 엄청난 죄를 지은 것처럼 왜 이렇게 망설여 지는 걸까." 반쯤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토해내듯 나직이 말하는 유디스를 보며 갑자기 무진장 녀석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온갖 야한 짓은 혼자 다 해 놓고 그런 말이라니, 그럼 며칠동안 그 난리를 친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정말 안 어울린다. 안 어울리게 귀엽다! 누워서 큭큭거리며 웃고 있으니까 녀석이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부루퉁한 표정이 되었다. 점점 수그러드는 녀석의 불쌍한 아들놈이 느껴진다.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더 얻고 싶어하듯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가락의 의미를. 괜찮겠지. 연애감정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유디스가 만져도 싫지 않고 녀석의 흘러 넘치는 애정이 따뜻하다. 그러니까...진유현이 나한테 했던 강간이란 형태의 성행위를 이 녀석이라면 해도 괜찮을 거 같다. 유디스는 나를 상처 입히지 않을 거니까. 진유현이랑 다르니까. 다른 사람에겐 친절하면서도 나에게만은 매몰찼던 진유현과는 달리 유디스는 나한테만은 상냥하게 대해주니까...... 무언가 따뜻한 걸로 가슴속이 가득찬 느낌이 들어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괜찮아. 끝까지 같이 가자." 작게 미소 지으며 유디스를 향해 이리로 오라는 표시로 양팔을 뻗었다. 녀석의 표정이 굳는다. 그와 반대로 점점 작아지던 녀석의 그 것이 갑자기 불끈 솟아 내 아들놈을 때리는 것이 느껴져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밝게 웃는 나를 유디스가 무서운 힘으로 안았다. 강하게 어깨를 한 움큼 깨물렸다. 이번 건 진짜로 아팠지만 녀석이 너무 좋아해서 참아주기로 했다. 어깨에 얼굴을 부비고 가슴에 자신의 가슴을 부비고 다리가 얽혀 서로의 적나라한 생식기가 비벼진다. 그런 유디스의 억센 등에 양 팔을 둘러 진정시키듯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성기가 허벅지에 부벼졌다. 내 몸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을 좀 달래주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녀석의 것에 손을 갖다대었다. 흠칫하고 놀라는 유디스의 붉게 충혈된 눈가는 흥분으로 젖어 있었다. "큭-" 빨랐다. 몇 번 훑어준 것 뿐인데 아까 녀석이 입으로 해줬을 때의 내 반응보다 빨랐다. 쾌감으로 떠는 녀석의 몸을 끌어 안으며 "조루 아냐?"라고 놀렸다가 깊게 키스 당했다. 조금 거칠고 정신없이 빨아들이는 통에 숨쉬기가 버거웠지만 괴롭진 않았다. 문득 유디스가 방금 전에 내 걸 물었다는 것이 떠올라 계속 입술을 맞대고 있어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아무려면 어떠랴. 유디스는 입술을 부비며 엉덩이를 아플 정도로 주물러 댔다. 골짜기를 잔뜩 벌렸다가 닫기도 하고 살짝살짝 손가락이 입구에 닿다가 스윽 훑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를 넣고 가만히 있다가 다시 빼면서 "너무 뻑뻑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밤바람이 창을 타고 들어 왔다. 시원한 바람이 널찍한 유디스의 침실을 훑고 갔지만 혀로 할짝이는 소리가 끈적한 침대 위는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녀석이 하도 빨아서 젖꼭지가 얼얼하고 목덜미나 귓가도 계속 핥아 댄 탓에 잔뜩 젖어 있었다. 겨드랑이의 연한 살을 깨물다가 옆구리 라인을 따라 길게 혀를 끄는 바람에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어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 유디스는 물컹한 혀로 골반의 툭 튀어 나온 뼈를 핥더니 곧 이빨로 까작댄다. 야금야금 깨물며 엉덩이로 옮겨가는 이빨의 감촉이 묘하게 거슬렸다. 아...이건 좀.... 녀석의 코가 엉덩이 사이를 가르며 비비적 대고 있었다. "히익!"하고 소리지르며 반사적으로 몸이 녀석에게서 빠져 나가려는데 유디스가 엉덩이를 끌어안고 안 놔준다. 녀석이 그 말랑말랑한 살에 뺨을 대어 보고 숨도 들이 마시며 갖은 창피한 짓을 하는 바람에 반쯤 일어선 물건이 도로 움츠러들었다. 츕츕하고 엉덩이 살을 빨기도 하고 씹기도 하면서 꼬리뼈를 이빨로 긁는다. 그 사이로 혀가 들어 왔다. "자, 잠깐! 더럽잖아!!" 혀로 할짝대는 것을 느끼고 피가 머리끝까지 몰렸다. 엉덩이 사이 골의 안쪽. 항문을 보호하듯 꽉 닫힌 엉덩이의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가르며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얼굴을 더 깊이 파묻고 혀를 더 길게 내어 뺀다. 엉덩이에 파묻혀 있던 항문에 더운 숨결과 물컹한 혀끝이 닿는다. "히이익!!" 녀석의 머리를 무턱대고 잡아 당겼다. 유디스의 입에서 "아야야"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꽤나 아팠을 것이다. 감히 왕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고 있는 힘껏 몸을 틀어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려 했다. 야해, 야해, 야해!!!! 더러운 것도 불쾌한 것도 아니다. 입에서 신음이 나올 것 같이 기분은 좋다. 하지만 엉덩이라구. 유디스가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고 생각하면 쾌감이고 뭐고 싹 달아날 것 같은 무지막지한 창피함이 손끝까지 퍼진다. 중심을 물려 사정했을 땐 너무 직접적이라 이거저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지만 이건 그렇지도 않잖아! "괜찮아...괜찮아..." 유디스가 엉덩이에 얼굴을 비비며 뽀뽀한다. 허벅지와 종아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무진장 창피하지만...사정하기 전의 오싹오싹한 쾌감이 하체를 달군다. 항문에서 고환사이를 핥고 입술로 우물거린다. 미치겠다. 다리 한쪽이 들려 녀석이 다시 음낭을 핥고 있다는 것도, 한 손가락을 엉덩이 사이에 넣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도, 모두 정신 나갈 정도로 자극적이다! 미지근한 액체가 주르륵하고 엉덩이에 흘려 넣어졌다. 전신이 타오를 것 같은 감각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라 유디스가 뭘 부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니 "등잔기름. 이거라도 있으면 좀 더 부드럽겠지." 라고 말한다. 으아아...하는 구나, 진짜 하는 구나... 유디스가 가랑이 사이를 핥아 올리는 것에 등골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은 긴장하고 있었다. 지하창고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미끌미끌한 액체와 함께 손가락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진유현도 그랬던가? 손가락을 넣었던가?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혀로 핥진 않았어. 이렇게 부드럽지도 않았고 삽입하는데 뜸을 들이지도 않았다. 아랫도리가 질척질척해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얼굴을 가리고 신음성을 흘렸다. 온 몸의 신경들이 저릿한 자극으로 맥박치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흥분되는데 유디스는 어떨지 궁금해져서 슬쩍 내려다 보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손가락을 넣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유디스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몸이 움찔하고 튄다. 안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져서 좀 당황했다. 조심스럽게...녀석이 눈을 떼지 않고 그대로 내 몸 위로 겹쳐왔다. 유디스는 열기가 느껴지는 눈가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나의 한쪽다리를 들어 올렸다. 뜨겁다. 녀석의 몸도 숨결도, 바라보는 시선도. 항문과 살짝 맞닿은 녀석의 그것이 끈적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입구에 대고 몇 번 문지르다가 이내 유디스의 낮은 신음성과 함께 끝부분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지루하게, 간지럽게, 애태우듯이 미끄러지면서 내벽을 부비며 들어온다. 질척질척한 소음과 유디스의 한숨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몸의 맥박이란 맥박은 몽땅 엉덩이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뜨겁고 물컹하고 그 부피감에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욱신거리는 통증에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 고통을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이 정도의 아픔은 의아할 지경이다. 물론 아프다. 굉장히 아파서 녀석의 등을 팡팡 쳐댔으니까. 하지만 예상하던 만큼 끔찍하진 않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행위의 고통은 이것보다 더 지옥이었고 잔인했다. 하체를 칼로 도려내는 듯하던 진유현의 폭력적인 행위. 그리고 후끈하게 끼치던 피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아니, 그런 표현으론 성에 안 찬다. 굉장히 야하고 음란해서 뭔가 더 인간적이고 관능적이다. 뜨겁고 욱신거려서 하체가 타 버릴 것 같다. 안으로 들어온 유디스의 몸은 흥분으로 잔뜩 젖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귓가에 녀석의 낮은 탄성이 들린다. 유디스의 행동이 점차 빨라지고 앞 뒤로 허리를 움직여 깊게, 더 깊게 넣고 싶어하는 듯했다.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 몸이 흔들렸다. 질퍽거리며 성기가 드나드는 입구가 화끈거렸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유디스의 몸을 아래에서 올려다 보자니 이거 꽤 좋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땀에 젖은 얼굴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쾌감에 취해 있는 눈동자는 내게서 고정되어 떠나질 않는다. 엉덩이가 아픈 와중에도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조금은 흥분되어 있었다. 허리를 움직이며 유디스가 반쯤 발기한 내 아들놈을 문지른다. 평소보다 좀 급하게 문지르는 손이었지만 내 것도 금방 모양을 세웠다. 직접적인 자극이 느껴지는 탓에 반사적으로 허리가 들린다. 무의식중에 엉덩이를 조였는지 녀석이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렇게 우리 둘은 정신 없었고 내가 진한 쾌감을 느끼며 평소보다 오래 사정했을 때 그 자극을 못 참고 녀석 역시 몸을 떨었다. 머리끝까지 쭈뼛쭈뼛한 감각이 달리는 여운이 오싹오싹하다. "하아아-"하는 탄성을 내쉬며 숨을 고르는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나른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유디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 넣은 채인 유디스의 그것은 아까의 사정으로 그 부피가 많이 줄어들어 부담감이 덜했지만 이제 볼 일이 끝났음에도 유디스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는다. "승호야.....윤승호....." 그래그래.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며 귓가에 얼굴을 묻는다. 꼭 끌어 안아 오길래 같이 안아주자 더 힘껏 팔에 힘을 준다. ......다 줄어든 물건이 엉덩이 안쪽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좀 곤란하다 싶은 기분이 되어 몸을 굳혔는데 그렇게 꽉 끌어 안은 상태에서 녀석이 다시 엉덩이를 부빈다. 관두라고 녀석의 어깨를 찰싹 내려치는데 연달아 내 이름만 부르는 녀석은 이미 저 혼자 쾌락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아...맞춰주기도 정말 힘들다니까. 항문도 아프고 허리도 아팠지만 그냥 녀석의 페이스를 따라가 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몇 번을 녀석의 손에서 사정하면서 엉덩이로도 느낄 수 있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을 몸으로 깨닫고 죽고 싶을 정도로 쪽팔렸다. 하지만 온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리는 기분이 싫으면서도 좋아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고는 죽은 듯이 잠들고 말았다. 밤이 내려앉은 대지에 달도 없이 별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토지. 마을의 고요한 밤의 모습을 보자니 어딘가 모르게 향수가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위용을 드러내는 구 귀보르냑성의 모습마저 반가워서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성을 내려다 보며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 있을 때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됩니다! 승호가 위험해 질 수도 있어요!" 라노의 목소리였다. 성 안에는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원탁에 앉아 등잔불을 켜 놓고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노와 카이를 비롯하며 길드 사람들과 에드바라하의 귀족 몇몇으로 구성된 이 회의에는 굉장히 비밀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라노경. 이미 예전부터 계획해 온 일입니다. 이제 와서 그 소년 때문에 계획을 변경할 순 없지 않습니까." 아, 그 할아버지다. 예전에 나를 왕에게 보내자고 길이길이 날뛰던 에드바라하의 노인들 중 유난히 침착하고 수수한 차림이었던 백발의 할아버지.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귀족들 중 그때처럼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귀족들의 옷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사치의 느낌은 들지 않고 얼굴에는 기름기 대신 날카로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맞아 라노. 넌 너무 그 애에게 얽매이는 것 같아. 뭐 우리도 녀석을 인질마냥 왕궁에 보내서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그 녀석을 감싸고 도는 건 정도가 지나치다구." 옆에서 지켜보던 낯선 길드 젊은이가 라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했다. 그러자 다른 길드원들도 하나 같이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라노에게 쏠렸다. 라노는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고 매우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힘 없는 라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하지...처음 본 순간부터 난 녀석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어서 승호에겐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모두들 라노의 얘기를 들으며 묘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에드바라하의 귀족들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카이는 진지했다. "그러고 보니..."하고 운을 뗀 파웰이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 라노만큼은 아니지만 왠지 미안하다고 할까... 그래서 처음엔 그 녀석이 거북했어." "어? 나도. 이상하게 내가 죄 지은 기분이 들더라구." 티안이 파웰의 말을 받아치자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 답을 구하듯 라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라노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다가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 너는? 너도 지난 번에 왠지 승호가 신경 쓰인다고 했지?" 카이는 미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그 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손을 내린다. 아무리 봐도 저건 버릇 같다. 가만히 팔짱을 끼면서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카이의 입이 조용히 열리고 한도훈처럼 침착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윤승호를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빚진 기분이 드는 것은 그를 왕가에 보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신경은 쓰이지만 유쾌하진 않지. 묘한 기분이다." 이 말에는 에드바라하 쪽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인상을 쓰는가 하면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말을 뱉은 당사자는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웅성거림 사이에서 아까 그 백발의 할아버지가 들릴 듯 말듯 한숨을 쉬며 "그렇다고 계획을 바꿀 순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이다. 윤승호의 신변은 루센과 테이그를 믿는 수밖에 없어. 실력만큼은 길드 내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그들이다. 라노, 이건 계획대로 간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라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라노는 풀죽은 목소리로 "알아. 나도 안다구."라고 중얼거린다.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 졌다. 분위기가 기묘하게 침체된 가운데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아, 이제까진 구석에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거 놀랍군. 왕뿐 아니라 에드바라하 쪽에도 남색취향이 있을 줄이야. 과연, 평범해 보이는 그 아이가 알고 보면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는 건가?" 잔뜩 비아냥거리며 구석의 어둠에 몸을 맡기고 있던 자는 놀랍게도 벨미르였다. 허름한 평민의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저 얼굴은 벨미르가 분명하다! 맙소사, 도주중이라더니 이런 곳에 있었어? 라노들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 거야?! "입 조심해라. 우리들의 동료를 모욕하면 협상이고 뭐고 없어. "자이카나에 먼저 손을 뻗어온 건 그 쪽이야. 뭐 아쉬운 건 우리지만." 라노가 위협하듯 눈을 부라렸다. 커다란 눈망울을 부릅뜨니 제법 매섭게 빛이 났다. 벨미르 역시 그런 라노에게 지지 않게 거만하게 내리까는 눈으로 응수하고 있었다. "네가 승호를 죽일 뻔했다고 생각하면 당장 뼈를 분질러도 시원치 않아." "이미 가족을 잃고 재산은 왕가에 몰수되었다. 이제와서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라노와 벨미르가 서로 날카롭게 노려본다. 하지만 진심으로 살기를 띠고 있는 것은 라노쪽이고 벨미르는 뭔가 패기와 의지가 빠져 있었다. 굉장히 허무히,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있다는 느낌이다. 잘생긴 얼굴은 살이 빠져 핼쓱하고, 날카롭게 빛나던 두 눈은 생기를 잃어 자조적인 빛깔을 띠고 있었다. "둘 다 그만 둬 라노. 우리가 왕궁에 들어 갔을 때 자이카나의 인력은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벨미르공도 상심이 큰 것은 이해합니다만 아직 자이카나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카이의 정중한 부탁에 벨미르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다시 어둠이 깃든 벽 구석에 몸을 기댄다. 신경전의 상대가 사라진 라노는 원탁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며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에 잠긴다. 다시 회의가 시작됐고 두런두런 하는 말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등잔불이 어둠을 밝히며 일렁이는 가운데 회의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상념에 빠진 사람도 있다. 나 역시 구석자리의 벨미르에게 신경 쓰여서 무슨 회의를 하는 건지 신경 쓰지 못했지만 문득 회의에 집중을 못하는 늙은 귀족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년간 왕궁 살림을 도맡아 온 자이카나를 하루아침에 내치다니, 왕은 나라를 망칠 셈인가......" 쌀쌀한 밤이었다. 구 귀보르냑 성에서 벨미르를 발견한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는데 그 사이 시야는 바뀌어 이름모를 땅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고 토지의 냄새가 이덴과는 달랐다. 이상하게 오감이 발달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이 이덴이 아닌, 이덴보다 훨씬 서쪽에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황야였다. 그 붉은 대지를 대여섯 마리의 말이 달리고 있었다. 제일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사람은 작은 체구의 소년으로 소년은 매우 지친 얼굴이었지만 무언가 악에 받쳐 있었다. "헤시안님! 벌써 밤이 깊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쉬셔야 합니다!" 소년은 제하였다. 역시 제하가 헤시안이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하니 엄청나게 반가웠다. 두근두근거려 진정이 안되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싸늘한 바람이 강하게 황야를 훑고 지나간다. 제하는 걱정어린 남자의 말을 거부하는 표시로 고개를 저으며 악 다문 이빨사이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윤승호가... 그 자식이 성에 있다구. 그렇게 찾아 헤매도 나타나지 않던 녀석이 바로 유현, 아니 유디스의 옆에 있었단 말야!!!" 남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제하가 악으로 버티는 모습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하의 옆으로 달려온 나머지 남자들도 나란히 달리며 다들 제하에게 쉴 것을 부탁했다. "며칠 전 전하의 연락을 듣고 마음이 급하신 기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벌써 가을이고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아직, 기억도 돌아오지 않으신 상태에서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더욱 귀환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젊고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제하의 부하라도 되는 듯이 정중한 태도로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은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하처럼 지친 기색은 없었다. 체력의 차이가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은지 남자 하나가 달리는 제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제하의 말이 높게 앞발을 들어 올렸지만 제하는 익숙하게 말을 진정시키고는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를 노려본다. "제발 헤시안님....지금 자신의 안색이 어떤지 아시고 계십니까? 이 근처에서 야영을 준비할 테니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내일 일찍 출발하도록 하지요." 독기서린 제하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크게 숨을 내뱉고는 이제야 쌀쌀함을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떤다. 잠시 말을 세워두고 자신의 양팔로 몸을 감싼 제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쉬자..." 그 말이 신호가 되어 사내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린다. 그리고는 서둘러 야영할 준비를 했다. 황야라서 아무것도 없는 벌판에 말뚝이 박혀 말이 매어지고 모닥불이 피워진다. 자그마한 간이천막을 만드는 그들의 손놀림은 재빠르고 숙련되어 있었다. 한 남자는 제하를 위해 담요를 가져다준다. 말에서 내려 가만히 그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하는 어깨에 덮인 담요를 꽈악 끌어 모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엔 지금이라도 당장 쏟아질 것 같이 위협하는 수백만 개의 별들이 무시무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승호야...네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독기가 사라진 제하의 얼굴은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제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를 싫어하는 건지 동정하는 건지...모르겠는 건 녀석의 머릿속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제하가 반가웠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 쓸쓸한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안쓰러워져서 실체 없는 손으로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은 전해졌는지 제하가 눈을 감고 가만히 고개를 기울인다. 차갑지만 어딘지 상냥한 느낌이 드는 가을 바람이 황량한 대지에 불고 있었다. 제하의 귀환소식이 들린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그동안 유디스의 연락을 받지 않고 일방적인 통보만 하던 헤시안, 그러니까 김제하는 부디칸에서 이덴을 향하는 도중 비로소 왕의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그러니까 중간에 쉬지도 않고 국경선을 넘을 때 제대로 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이덴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거다. 아마 보름이 좀 넘게 걸릴 거라는 데, 부디칸과 이덴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엄청 빨리 오는 거라고 유디스는 설명해 주었다. 그날의 꿈은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단순한 꿈이 아니라 사실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센이나 유디스한테 얘기 할 수 없었다. 벨미르가 에드바라하 쪽에 있다니 유디스에게 말할 수 없음은 물론이요 루센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루센이 나에게 얘기해 주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불안해 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루센을 탓할 수는 없었다. 벨미르가 에드바라하에 있는 것은 아마도 에드바라하가 성에 들어왔을 때 좀 더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기 위해서 일테고 그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을 테지. 어쩌면 루센은 이런 사실 때문에 또 나에게 미안해 하고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찔렀던 자이카나의 주범을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내가 벨미르 얘기를 화제로 꺼내면 요즘 가뜩이나 피곤한 루센은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벨미르를 그다지 미워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찔렀던 그 순간에도 녀석에 대한 증오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고 꿈을 통해 본 벨미르의 모습에 동정이 갔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이카나의 직계 핏줄 중에 살아 남은 건 벨미르 뿐일 것이다. 비록 다른 자이카나의 일원들이 많이 살아 남기는 했지만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벨미르 밖에 없다. 가족이 몰살당하고 가문을 잃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 청년이 안쓰럽기도 하고 카이의 모습과도 유사해서 굳이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라 일이라는 게 원래 개인적인 감정가지고 하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에드바라하가 왔을 때 이 구멍 난 왕실 일을 수월히 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을이 무르익은 성안은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로 바빴다. 헤시안의 귀환과 에드바라하의 입성을 두고 성 안은 활기에 넘쳐 지난번의 사건이 거짓말 같다. 비록 성안의 경비가 강화되어 무장한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순찰을 돌고 있었지만 파랗게 높은 가을하늘 아래에선 그러한 모습도 하나의 오래 된 그림이었다. 정원의 나무들은 붉게 물들어 갔으며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가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사계정원은 언제 봐도 아늑하게 느껴졌다. 분수소리가 시원하게 들리고 '철그럭 철그럭' 하는 규칙적인 병사들의 발걸음도 이 평화로운 풍경에 동화되듯 자연스러웠다. 언제나 내가 즐겨 찾던 그 자리. 연무장을 사이에 두고 사계정원과 이어져 있는 작은 정원. 그 앞의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유디스와 때아닌 러브씬을 펼치는 탓에 지나가던 병사들이 기겁을 한다. "윽!!" 기습이었다. 평소처럼 한가하게 바람 쐬러 이곳에 온 건데 유디스가 등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와 눈을 가리고 고개를 뒤로 젖혀 입술을 부딪혔다. '철그럭 철그럭' 거리는 규칙적인 발걸음이 뚝 그치는가 싶더니 황급히 달려가는 듯 '철걱철걱철걱-!' 하고 소리의 템포가 빨라졌다. 갑자기 당한 탓에 녀석이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고는 감히 삿대질을 하며 "너,너,너,너!!!"라고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제발, 사람들 있는 데선 이런 거 하지마!" "왜? 나는 재밌는데." 유디스가 등 뒤에서 안으며 기분좋 게 웃는다.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병사들이 안되보였다. 상황이 이 모양이니 이 왕궁 안에서 내가 유디스랑 어떻게 노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생각할수록 창피해서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내가 방안에 있으면 유디스가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유디스의 침실 밖에서 애절하게 "전하!"를 외치는 할아버지들에게 나는 무진장 죄송할 뿐이다. 밖에 나온다고 해서 녀석이 제대로 정무를 돌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회의실에 얼굴정도는 비추는 것 같다. 그것도 한시간을 진득이 앉아 있지를 못하는 것 같지만 방안에만 있는 것 보단 낫다. "난 언제까지 네 방에 있어야 하는 거야? 이제 내 방에 돌아갈 때도 된 것 같은데." 등 뒤로 녀석의 체온을 느끼며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녀석과 한 방을 쓰는 것부터가 문제다. 유디스가 나랑 같이 있고 싶어하는 기분은 이해하지만 이러다간 진짜 나라말아 먹는다니까. "무슨 소리야. 넌 계속 내 옆에 있는 거야. 내 눈 앞에 네가 있어야 내가 안심할 수 있다구" 몸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유디스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루센과 제대로 얘기해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이 넓은 성에서 우연히 마주칠일도 없고 특별한 일 없이 루센을 찾아가기에 루센은 너무 바쁘다. 그나마 예전의 그 방에 있으면 루센이 가끔 찾아오기라도 하련만 이 녀석과 함께 있으면 찾아오기도 쉽지 않을 거 아닌가. "너 말야. 너무 빈둥대는 거 아니야? 퀘스터 장관님이 며칠 사이에 엄청 늙으신 거 안보여? 일 좀 해 일. 명색이 왕이잖아?" 이제는 제법 길게 자란 유디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핀잔을 주었다. 멀찌감치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또 오길래 얼른 녀석의 팔을 떨궈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디스가 불만스러운지 입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린다. "어차피 일이야 대신들이 다 알아서 할 텐데 뭐. 정 그렇다면 보고서나 읽어보러 가볼까?" 은근히 어깨에 팔을 둘러오며 자연스럽게 나까지 침실로 끌어들이려 한다. 이 놈의 속마음이 다 보여서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보고서라는 건 그 두루마리 문서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 문서들은 침실 한 구석에 장작개비처럼 쌓여져 있어 아무리 읽고 옥새를 찍어도 매일매일 새로운 문서들이 놓여지고 만다. 루센의 충고를 들어 나는 이제 옥새를 찍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녀석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제는 침실에서 문서를 보는 게 버릇이 된 유디스는 나를 품에 안고 옥새를 찍는 것에 재미를 붙인 듯했다. 게다가 그 품에서 불편하다고 투덜대면서도 금새 잠들어 버리는 나도 문제는 문제다. 잠에서 깨어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녀석은 옥새를 저만치 팽개쳐 두고 내 몸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침실로 가고 나면 그 뒤의 상황은 뻔하다. 정말이지, 먹고 자고 침대에서 뒹구는 게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니 이러다간 바보가 될 것 같다구. 앞과 뒤가 얼얼해질 정도로 쾌락에 젖어 꿈틀대다 보면 뇌까지 흐물흐물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싫지 않고 녀석의 페이스에 맞춰주고 있으니 나는 알고 보면 굉장히 밝히는 인간이었던 걸까? 이런 개방 된 장소에서 몸을 부비며 걸어가는 유디스를 강하게 나무라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정말 불가사의다. 뻔뻔함도 전염되는 거라면 나는 분명 유디스에게 옮은 게 틀림없어. 시원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나와 유디스는 투닥거리며 본 성으로 향했다.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기만 해도 좋다. 왕궁에 일손이 모자란 탓에 유디스가 명령했던 것처럼 보름 만에 의식을 준비할 수는 없었지만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모든 절차들이 끝나면 오랜만에 라노와 카이, 파웰과 티안의 얼굴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으음....라노들에게 유디스와의 끈적끈적한 상태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폭발할 것 같지만 녀석들은 그래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아니 기뻐해 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도 에드바라하를 위해 뭔가 하긴 한 거잖아? 행여 남자랑 뒹구는 놈이 기분 나쁘다고 할까 봐 걱정도 됐지만 라노라면 그런 식으로 나를 매도하진 않을 것이다. 길드나 에드바라하의 다른 귀족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말이다. 내 보잘 것 없는 인생에서 어린시절 이후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언제나 추억 속에서 미화되던 아름다운 시골 외갓집 풍경과는 달리 실체를 가진 진짜 행복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아늑하고 동화 같은 왕궁의 생활은, 음탕한 빛을 띠고 있긴 해도 그에 못지않게 순수한 애정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함에 안주하여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믿었다. 시간은 그렇게 조용하고도 다정히 흘러가고 있었다. 메마른 바다 - 하 hippocampus 08-28 18:26 | HIT : 1,901 제하가 돌아왔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왕궁은 발칵 뒤집혔다. 물론 이덴으로 향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름대로 하인들이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라고는 생각 못한 탓에 죽어나는 건 아랫사람들 뿐이었다. 더구나 일주일 뒤면 왕궁에 한 가문이 들어 앉게 되는 큰 행사가 있는 와중이다. 가뜩이나 인력부족으로 쩔쩔매는 성안은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로 정신 없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바쁜 성안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할 일이 없는 나는 언제나 그렇듯 미안한 기분을 느끼며 유디스가 아무렇게나 놓은 두루마리 문서들을 하나하나 정리하여 인장이 찍힌 것과 안 찍힌 것들을 분리하고 있었다. 제하가 돌아왔다는 소식에는 과연 유디스도 안색이 변해서 서둘러 의관을 차려입고 "금방 갔다 올 게."라고 말한 후 방문을 나섰다. 문서를 만지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만나는 거다. 드디어 이 거짓말 같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와 연결되는 고리가 바로 가까이에 와 있는 것이다. 흥분과 긴장으로 덜덜 떠는 손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벅찬 가슴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아...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대체 제하는 어떻게 내가 이 세계에 있는 걸 알고 있는 건지, 왜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 물어볼 것도 많고 신세 한탄할 것도 잔뜩 있다. 내가 겪은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말해주면 제하는 얼마나 놀랄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비록 녀석과 친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껄끄러운 사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누구보다도...어쩌면 유디스 보다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 유디스와 제하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내 얘기도 하겠지? 유디스는 나를 뭐라고 소개할까. 아 이런, 그러고 보니 제하에게 유디스와의 곤란한 관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 지 난감해 졌다. 역시 남자끼린데 이런 거 이상하겠지? 게다가 진유현과 똑같은 얼굴이고. 이거이거 왠지 머쓱해 지는데... 그런 상념들에 잠겨 있다가 문득 내가 열려진 창을 통해 따스한 주황빛 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지의 입자들이 빛 속에서 춤을 추며 한가롭게 떠다녔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려면 어떠랴. 요즘 나는 굉장히 여유로워져서 바람 빠진 풍선마냥 헤실 대고 있었다. 제하가 뭐라고 해도 어쨌든 우리는 동병상련의 동지가 아닌가! 묘한 연대감을 느끼며 마음은 두 근 반, 세 근 반, 제하의 얼굴을 꿈이 아닌 실제로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마저 문서를 정리하고 바람이 한들한들 새어 오는 창가에 서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깥이 소란스럽다. 의아함을 느끼며 문을 바라보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열렸다. 식식거리며 침실 문을 열어 젖힌 건 흙먼지를 뒤집어 쓴 김제하였다. 창가에 서 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굴이 밝아지며 눈을 빛냈다. 미소를 가득 머금으며 감격의 재회를 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제하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귀신 같은 형상의 제하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윤승호 너--!!!" 튀어나갈 듯한 제하의 움직임을 막은 것은 바로 뒤에서 황급히 제하를 따라온 유디스였다. 오른쪽 뺨에 닿는 햇살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제하의 서슬 퍼런 기운에 잠시 주춤하고 행동을 멈췄다. 유디스에게 뒤에서부터 팔을 잡힌 제하는 그대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헤시안 왜 그래?! 역시 너희들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어?!!" 뒤따라온 병사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몸을 긴장하며 태세를 갖춘다. 아무리 제하...아니, 왕의 오랜 친구인 헤시안이라 할지라도 갑작스러운 난동은 허용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제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몸에 힘은 풀었지만 나에 대한 독기는 여전히 날카롭다. "아, 물론 아는 사이고 말고. 아주 잘 알고 있지.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이잖아?" 비아냥을 담은 제하의 목소리에 어딘가 처절함이 묻어났다. 병. 재무관 병이라고 왕궁의 의사들이 뒷구멍에서 쑥덕대는 헤시안의 기억장애는 유디스와 아디움, 그리고 의사들과 몇몇 대신들 밖에 모른다. 물론 소문은 다 퍼져 있지만 그래도 헤시안의 증세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디스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침실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다. 더 이상 일개 병사들이 들어선 안 될 대화들이 오갈 것이라는 걸 짐작한 듯하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 왔다. 유디스가 나를 왕성으로 데려 온 진짜 이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 세 사람은 해가 져가는 방안에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 채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하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아마 오랜 여행에 지쳐 신경이 예민해진 탓일 거다. 어쩌면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제하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제하야. 이렇게 만나서 반갑..." 너무 평범한 인사였나? 뭔가 더 감격스러운 재회의 인사말 같은 건 없을까 고민하면서 겨우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제하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더니 유디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엄청나게 재빠른 속도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자식아!!! 겨우 그딴 말이나 지껄이는 거냐!!!!" 제하는 내 멱살을 잡아 올리고 눈을 부릅뜬 채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옆에 유디스가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이따위 짓을 해놓고 태평하게 그런 소리가 입에서 나와?!! 그래, 네 맘대로 되니 꼴 좋디? 우리들을 네 마음껏 주물러 놓고 보니 재밌어 죽겠지?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돌려 놔! 이만큼 가지고 놀았으면 됐잖아! 이제 우리들을 원래의 세계로 돌려 놓으란 말야----!!!!!!!" 처절한 비명이었다. 멱살을 잡고 흔드는 제하의 얼굴은 필사적이었고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제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제하는 내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전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한다. 지금도 그래.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다. 만일 네가 말한 단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나 때문에 우리가 이런 세계로 떨어졌다는 소린데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안 간다! 김제하. 넌 대체 뭐냐. 뭘 알고 있는 거냐구. -스르릉 섬뜩한 금속성의 검날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디스가 언제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장검. 유디스는 그 것을 빼어 들고 제하의 목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아무리 너라도 내 앞에서 이런 짓은 용서 못해. 윤승호에게 함부로 굴지 마라." 차갑고 낮게 읊조리는 음성은 진심이었다. 제하는 마치 유디스가 그런 행동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딱딱하게 얼어서 나를 바라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인형의 고개가 끼긱거리며 돌아가듯 유디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끼긱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제하가 눈물이 담긴 허망한 눈동자를 하고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잘도 구워 삶았구나." 서서히 멱살을 잡은 제하의 손에 힘이 빠졌다. 흐릿해진 눈동자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자신의 목줄기에 겨누어진 유디스의 칼날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고장난 인형이 눈을 깜박깜박거리듯 눈꺼풀을 닫았다 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탓에 굵은 물방울이 후두둑하고 떨어졌다. "네가...네가 원한 게 이런 거였냐..." 힘없이 떨어진 제하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것이 진유현에 대한 복수냐? 아니면 단순히 우리들을 조롱하는 것에 불과한 거냐......" 떨리는 두 손을 힘겹게 들어 올리더니 제하는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꽉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그 손은 많이 거칠어져 있었고 그 위에 눈물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져 내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통찰자라는 건 겨우 이정도야. 그저 보이는 현상의 진실을 아는 게 전부지. 무언가를 바꾼다거나 새로 만들어낸다거나 하는 대단한 능력따윈 없다구. 그걸 너는...너는...이렇게도 극명한 실력차이를 보여주며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구나......" 덜덜 떠는 손으로 제하가 자신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하는 그 모습이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제하의 말을 반도 못 알아 들었다는 거다. 유디스도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검을 거둘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무언가 제하와 내가 굉장히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하에게 말했다. 아마도 굉장히 얼빠진 목소리였을 것이다.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목에서 뚜둑 소리가 날 정도로 제하는 격한 동작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 탓에 눈물이 반짝거리며 튀었다. 태양은 이미 산너머로 모습을 가려서 방안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빛이 사라져가는 공간에서 어지럽게 흩어진 앞 머리카락 사이로 제하의 눈이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진한 살기를 담아, 검을 겨누고 있는 유디스가 움찔 할 정도의 기운을 내뿜으며 제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빌어먹을 세계는 네가 만들었잖아."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이 있다. 수수께끼나 퀴즈 같은 것도 그렇다. 아주 잘 알고 있는 단어지만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생각하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기억의 저편으로 곱아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런 때는 보통 답을 알고 나면 "아, 맞아. 내가 왜 그걸 몰랐지?"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해답이 눈 앞에서 흐릿하게 보일 듯 말듯 떠오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완전한 답이 보이지 않아. 그 희미한 정체를 붙잡기 위해선 좀 더 제하의 설명이 필요하다. 얼마나 그렇게 꼿꼿이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제하의 말을 듣는 순간 뇌의 기능이 정지하고 숨 쉬는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윤승호?" 내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유디스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제하의 표정도 점점 묘하게 일그러진다. 나는 얼굴이 차갑게 굳어서 입술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겨우 달싹거리며 입을 열어 말 할 수 있었다. "유디스. 둘만 있게 해줄래?" 유디스의 안색이 나쁘게 변했다. "그럴 수 없어." 라고 강하게 말하는 녀석의 의사를 나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제하의 목줄기에 겨누어진 검날을 맨손으로 스윽 밀어내니 오히려 유디스 쪽이 움찔하고 놀라 서둘러 검을 거둔다. 불만과 의문으로 가득찬 유디스의 얼굴을 보며 나는 무언가 둘러댈 만한 말을 찾아 목구멍 안에서 우물거리는데 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신병자들의 헛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나가 있어줘. 아니, 여기는 네 방이니 우리가 나가는 게 좋겠군." 싸늘하게 말한 제하가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가려 하는데 유디스가 신경질을 낸다. "대체 뭐야 헤시안! 너희들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내 팔을 붙들고 유디스는 제하를 향해 소리쳤다. 제하는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무언가 감이 잡힐 듯 말듯하는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제발...유디스 둘만 있게 해줘. 부탁이야..." 녀석의 손에 내 손을 올려 놓고 나직하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 녀석이 내 말을 들어줄까? 나와 제하 사이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낀다면 유디스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부득부득 같이 있겠다는 녀석에게 나는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라고 말하며 달래느라 혼이 났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제하의 시선이 따갑다. "알았어. 이 문 밖에서 기다리지. 만일 무슨 일이 생기는 것 같으면 당장 들어 오겠다. 알았어?" 제하를 향해 위협하며 유디스가 겨우 고집을 꺾었다. 녀석이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는 데에 안도했지만 제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주 가관이라는 표정이다. "놀랍군. 왕을 본인의 침실 밖에서 기다리게 하다니. 전대미문의 일이야." 차가운 어조로 제하는 팔짱을 끼었다. 제하를 노려보는 유디스의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지만 노여움보다는 '얘가 왜 이러나'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혼란스러운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십년지기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머리가 돌아서 무턱대고 여행을 갔다 오더니 상태가 더 나빠져서 귀환했다면 누구든 혼란스러우리라. 나는 유디스가 순순히 문 밖으로 물러나 주는데에 안도하며 녀석의 등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 와중에도 녀석은 정수리에 뽀뽀를 하고 나가는 바람에 나는 문을 닫으려는 자세로 굳어버렸다. 육중한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아주 볼만하군. 가관이야. 가관. 여기까지 오면서 들리는 소문을 설마하는 마음으로 흘려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하!" 나는 제하의 비아냥을 들으며 한동안 유디스가 나간 문 앞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뒤를 돌아 봤을 때 제하는 우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섬뜩하기도 했다. "내가......" 천천히 문에서 떨어지면서 제하에게 다가갔다. 제하는 이제야 내가 실토한다고 생각했는지 증오와 희망이 섞인 묘한 표정으로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뭘 만들었다고?" "이제 와서 발뺌하지마 윤승호." 즉각 칼날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가까이 가면 베일 듯이,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이 제하가 쏘아본다. 왜 나는 제하의 말을 비웃어 넘기지 못하는 걸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소리쳐야 되는데 이 묘한 위화감은 뭘까. 내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 어째서? 어떻게? 무슨 재주로? ......창조자? 낯설은 단어가 뇌리를 스친다. 몇 개월 전 제하가 옥상에서 내뱉은 의미 없는 말들은 이미 예전에 잊고 있었을 텐데 그 단어만이 묘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넌 내가 다 알고 있을 것처럼 말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이건 진짜야. 세상을 만들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제하는 화를 참는 듯 팔짱을 낀 손에 힘을 주었다.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아직도 여행복 차림 그대로인 제하는 초라한 행색과 어울리지 않게 서슬 퍼런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이야. 자기가 만들어 놓고 모른다고 하는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냐? 난 지금 네가 뭐라고 변명을 해도 안 통해.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언제 우리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줄 거냐는 거다." "김제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점점 기분이 히스테리컬해 진다. 손끝이 떨린다. 앞에, 바로 손에 잡힐 듯 말듯한 곳에 해답이 있는데...뭐냐 이 감질나는 기분은. 아직 좀 더 핵심에 다가가지 못했다. 단순히 내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더 다른,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이 꺼림찍한 기분은 뭐냐! "제발, 설명 좀 해봐! 솔직히 말이 돼? 내가 신이야? 앞 뒤 다 자르고 네가 할 말만 하지 말고 나한테 설명 좀 해달라고!!" 내가 너에게 숨기는 것 같냐 김제하? 응?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빌어먹을 세상에 혼자 뚝 떨어져서 얼마나 혼란스러워 했는데, 나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어째서 나를 다그치는 거냐! 제하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관찰하듯, 탐색하듯 바라보는 시선은 내장까지 훑어 보는 것 같아 소름 끼쳤지만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서리를 친다. "잠깐, 윤승호 너......" 그리고는 팔짱을 풀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너...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그렇다고 이 바보야!" 화가 나서 감정이 점점 격해진다. 아니, 화가 나는 건지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 이유도 없이 몸이 덜덜 떨리고 알 수 없는 억울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응어리지고 있었다. 제하 말대로 내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면, 나한테 그런 대단한 힘이 있었다면 진작에 이런 고생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다. 훨씬 나한테 유리하고 좋은 상황으로 만들었겠지.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서러움이 복받친다. "내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 정신차려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지, 기분 나쁜 산 속에 혼자 버려져 있지. 배는 고프고 춥고 무서워서 산 속에서 죽기 직전만큼 해매다가 겨우 살았는데, 감옥에 갇히지를 않나, 쿠테타가 일어나지를 않나, 불에 타 죽을 뻔했고 칼에 찔리기까지 했어! 내가 이 빌어먹을 세상을 만들었다면 어째서 이런 일을 당했겠냐!!!" 나는 씨근덕거리면서 제하를 노려 보았고 녀석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제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굉장한 충격을 받은 그 얼굴은 절망으로 흙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른다고? 윤승호 네가 모른다고? 이 멍청아. 네가 이 세계를 만들고 우리를 전부 여기로 끌고 왔잖아. 그런데 네가 모르면 대체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여기서 평생?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거냐고!!" 제하의 말은 이상하다. 이해 할 수가 없어. 아니, 솔직히 상식 밖이다! 하지만 그 말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예감은 뭐지? "무슨 소리야. 내가 너희들을 여기로 끌고 오다니.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차원이동까지 시켰다고 말하는 거야?" 빈정거림은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제하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의문을 가하고 있었다. 제하는 흙빛으로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팔을 뻗어 좀비처럼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온 두 팔이 내 양 어깨를 강하게 움켜쥔다. 녀석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진다 싶더니 내 어깨를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네가, 네가 그랬잖아! 기억 안 나? 수학 여행 가던 중에 생긴 버스사고! 그 직전에, 우리 반이 몰살당하기 직전에 네가 우리들 전부를 이 세계로 이동시켜 버렸잖아! 진유현도, 오세준도, 강지원, 박재석, 김한수, 임경철.... ...하다못해 운전사 아저씨랑 담임까지! 네가 전부 여기로 끌고 왔잖아!! 끌고 와서 우리들을 멋대로 이 세계에 동화시켜 버리고선, 1학년 1반 녀석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재구성해버려 놓고서-!! 모른다고?!!! 모른다고오---!!!!!!" 피가 끓는 듯한 절규였다. 제하의 손에 의해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실성한 사람마냥 고함을 지르는 제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시체 같기도 하고 귀신 같기도 했다. 온몸의 피가 얼어버릴 충격이었다. 뇌까지 차가워지는 오한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될 것만 같았다. 제하가 내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초점이 나간 내 두 눈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는 그 안에서 공포를 읽어낸 듯, 창백하고 멍하니 질려있던 제하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는 그 얼굴에선 금방이라도 피부조각이 바스스하고 부숴질 것만 같았다. "......뭐?" 내가 겨우 한마디 할 수 있었던 것은 제하가 기어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얼굴마저 얼어버린 듯 말이라도 하면 입 주변에서 얼음가루가 흩날릴 것 같았고 눈조차 깜박일 수 없었다. "모르는구나...너 정말로 모르는구나......" 꺼져가는 목소리로 제하가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어깨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분노보다 절망을 담고 있었다. "이 멍청아....그럼 넌 저 자식이 뭘로 보이냐. 유디스가 진유현인지 몰랐어? 아디움이 오세준인지 몰랐냐고! 대체 넌 어떻게 우리들 앞에 나타난 거냐?!!" "......유디스가 진유현이라고?" 몸은 굳어서 움직이질 않는다. 얼어붙은 눈동자는 제하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허공을 응시했다. 유디스가 진유현? ...진유현? "으으으...." 뱃속부터 끓는 듯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려고 한다. 인간의 소리가 아닌 짐승의 그르륵 거리는 소리가 폐와 목을 타고 신음처럼 비어져 나왔다. 제하가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눈물이 젖은 얼굴로 망연히 바라본다. 발끝과 손끝부터 미묘하게 진동하는 떨림은 전신을 감싸듯 퍼져나가면서 이내 격한 몸부림으로 바뀐다. 내뱉지 못한 비명이 목구멍 안쪽에서 진득하게 고여갔다. 뇌리에 유디스의 상냥하지만 음란한 얼굴이 수면에 비치는 흐릿한 영상처럼 떠올랐다. -승호야...윤승호...하아....좋아...너무 좋아.... 낮게 귓가에서 읊조리는 한숨. 몸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 주체 못할 만큼 흘러 넘치던 애정어린 행동과 속삭임. ...내가 경험했던 가장 따뜻한순간들이 거짓이었다고? "으아아아아아악-----!!!!!" 이제 해방이라고, 진유현의 그늘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고 안도하며,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행복하다고...이제야 나도 행복해 질 거라고...그렇게 믿고 있던 시간들이 전부 증오해 마지않을 진유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유, 윤승호 왜 그래, 정신차려--!!" "으아아아아아아악---!!!!!" 그 진유현이다. 그 진유현이야. 가슴까지 들쑤시던 독설과 조롱으로 반 전체로부터 나를 고립시켰던 그 자식. 상처가 욱신거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의 구타와 냉대를 받으며 녀석의 발치 아래 벌레처럼 기었던 일상을 제공했던 진유현. 싸늘한 시멘트 바닥에 등이 긁히면서 진유현의 아래 깔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던 지옥같은 기억. 진유현의 밑에서 아랫도리가 터진 채 눈알이 뒤집어진 나와, 유디스의 품에 안겨 히히덕 거리고 저질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던 추악한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죽어버릴 거야아---!!!!!" 등뒤로 제하가 끌어 안으며 말리는 게 느껴졌지만 온몸을 휘감는 혐오감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죽어버려야 한다. 유디스의, 아니 진유현의 밑에서 쾌락에 탐닉하던 이 저주스런 몸뚱아리는 없어져야 한다. 혐오스러워서, 경멸스럽고 흉측스러워서 내가 견디지 못해-!! -쿵. -쿵쿵쿵. 벽에 머리를 박았다. 제하가 끈질기게 방해한 탓인지 이 단단한 머리는 쉽게 깨지지도 않는다. 아아 사라져버리고 싶다. 몸서리치리만큼 끔찍한 이 사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건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애초에 내가 이런 개 같은 세계로 넘어 온 것 부터가 잘못되었어!!!!! "윤승호 그만둬! 유디스!! 야! 유디스!!! 좀 들어와 봐!!!" "으아악!! 죽어 버릴거야야아---!!!!" 그저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내 존재가 지워지길 바랬다. 나 스스로에 대한 끔찍한 역겨움이 미쳐버리고 싶을 만큼 참을 수가 없었다. 침실의 문이 열리고 저만치서 유디스가 달려온다. "승호야-!! 무슨 일이야!!" 유디스...아니 진유현이다. 내가 왜 몰랐을까, 저렇게 똑같은데. 저 얼굴이, 저 목소리가, 그저 옷차림과 체격이 좀 다르다고 해서 왜 진유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민태를 봤을 때도, 형석이랑 진영이를 봤을 때도. 오세준, 한도훈도. 모두 다 같은 애들이었다. 모두 다 1학년 1반의 그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의 신분이 너무나도 확실해서, 녀석들이 너무나도 치밀하게 이 세계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깜빡 속고 말았다-!! 그래 내가 만든 세계다.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가까이 오지마--!!!" 제하의 팔에 매달리며 유디스, 아니 유현에게 소리질렀다. 녀석이 놀랐는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 녀석을 눈 앞에서 치워줘. 지금은 저 자식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내가 미쳐 버리기 전에 지금은 제발 사라져줘-!!!! "스, 승호야, 왜 그래? 응? 나야 나." 유디스가...유디스의 탈을 쓴 진유현이 다가온다. 걱정하는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다. 차츰차츰 다가오는 녀석의 존재가 마치 괴물이라도 되는 듯 제하의 등 뒤로 숨으며 공포로 몸을 떨었다. 등이 벽과 맞닿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어. 진유현이 얼굴을 괴상하게 찌푸리고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다가온다. 유디스로 위장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담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는다. 싫어! 나에게 손대지마! 저리 갓--!!!! "히이이이익-!!"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죽도록 저 얼굴이 싫었다. 나 자신조차도 혐오스러워지는 이 때에 더 이상의 자극은 한계범위를 초과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 몸서리 쳤는지 모르겠다. 다만 갑작스레 깨닫게 된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한 쇼크로 몸의 반응이 유난히 민감해 졌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했다. 그렇게 나는 현실을 도피하듯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허공에 몸이 부유하고 있었다. 하늘아래 대지는 어슴푸레한 달빛으로 가득했고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생명들이 조용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의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생명들이 죽기도 하고 태어나기도 한다. 그들의 미약한 존재 하나하나가 소리가 되고 향기가 되고 감각이 되어 나에게 스며든다. 슬프다. 기쁘다. 행복하고 저주스럽다. 나의 세계다. 내가 창조해 낸 가짜 낙원이다.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고 유체이탈도 아니다. 나와 세계가 교감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나는 신이 아니야. 그래서 전지전능하지도 않아. ......정말 쓸모없는 능력이다. 어제 그런 소동을 부리고 나서 기절한 내가 눈을 뜬 건 오늘 정오였다. 눈을 떴을 때 진유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안도했지만 몸은 침대 밑으로 꺼질 듯 무거웠다. 나는 어느새 예전의 내 방에 돌아와 있었고 곁에는 루센과 제하가 피곤에 지친 얼굴로 옆에 앉아 있었다. 유디스...아니, 진유현이 제하를 해코지라도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안심이었다. 제하의 말에 의하면 나를 병에 의한 일종의 발작상태라고 둘러댔다는 거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유디스...아니, 유현이 나를 달래려고 할 때마다 발광해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제하의 옷깃만 잡고 두려움에 떠는 나를 유디...유현이 무슨 생각으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밤부터 사냥터로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니 녀석이 얼마나 쇼크를 받았을지 알만하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녀석을...유디스를...진유현을 무슨 얼굴로 마주봐야 할지 두렵다. 루센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해서 제하와 둘만 남게 되었다. 왜 인지 몸이 늘어지고 땀이 난다. 어제의 일이 어지간히도 쇼크였나 보다. 침대에 힘 없이 누워 제하를 바라보니 녀석은 잠을 설쳤는지 눈 밑이 검게 죽어 있었지만 옷을 갈아 입고 흙먼지를 씻어낸 차림은 말쑥해서 어제보단 많이 차분해 보였다. 나는 제하에게 천천히 내가 겪은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녀석은 내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한탄하면서도 나의 바보 같은 처지를 동정하면서...그리고 원망했다. 나를 만나면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던 제하의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족 취급 받으며 온갖 편의가 제공된 자신과는 다르게 창조자인 내가 이 세상의 진흙 밭을 구르고 왔다는 것이 불쌍했는지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하는 담담히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창조자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자다. 그 것은 단순히 물건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시간일 수도 있다고 제하는 퀭한 눈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설마 시간과 공간과 생명을 모두 만들어 낼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에 제하는 내 능력에 대한 쇼크가 컸다고 한다. 제하는 통찰자다. 통찰자는 사물의 진상을 꿰뚫어 볼 수 있지만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제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창조자의 존재를 모른 채 평생을 살아 갔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통찰자라는 것은 어찌 보면 점쟁이와 비슷하지." 창 밖으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쓸쓸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제하의 얼굴이 나이답지 않아서 조금 놀랬다. "신처럼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고 그 짐작이 맞아 떨어질 뿐. 하지만 원하지 않는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 온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야. 너를 봤을 때 너를 감싸는 붉은 에너지. 그 에너지가 가지는 창조자의 공기가 나를 숨막히게 했어. 애당초 창조자니, 통찰자니 하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나도 몰라. 그냥 아는 거야. 보는 순간 단어가 떠오르는 거라구. 그 섬뜩함을 이해할 수 있겠냐?" 말을 하면서 제하는 힘없이 늘어진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넌 모를 거야.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창조자에 대한 정보. 그 놀라움, 당혹스러움, 그리고 질투와 연민....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네가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지. 그래서 더 답답하고 괴로웠다. 솔직히 지나가는 말이라도 너에게 호감을 느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네가 창조자라는 사실과 함께 진유현과 나에게 크나큰 해악의 존재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와 닿았으니까. 어렴풋이 안다는 것은 차라리 모르느니만 못하는 거야. 무언가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게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에 떠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지. 통찰자라는 건 막상 일이 닥쳐야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내는 게 고작이니까. 그래서 더...더 네가 무서웠다. 너와 친하게 지내는 진유현을 말려보기도 하고, 너를 괴롭히는 진유현에게 잔소리도 해봤지만 결국 일은 이렇게 닥치고 말았어.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지." 처연한 표정의 제하는 더 이상 울지도, 소리지르지도 않았다. 원망하는 어조는 여전했지만 이제 아무리 나를 원망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거의 체념에 가까운 한숨마저 섞여 있었다. "창조자에게는 매개체가 있지만 난 네 매개체가 뭔지 모르겠어. 그걸 알면 네가 그 능력을 컨트롤 할 수 있지 않을까? 제기랄, 내 한계는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네가 알아내야 한다구!" 스스로를 탓하며 낮게 탄식하듯 말했다. 제하가 이마의 땀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었지만 그 손끝에 다정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에 너한테 이상한 질문을 한 적 있지? 몽유병이나 간질증상은 없냐고. 사고로 장기간 기절했던 경험 같은 걸 물어봤을 땐 너 정말 황당했을 거야. 너를 봤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솔직히 네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채지도 못할 줄은 몰랐다. 나는 창조자가 통찰자보다 더 뛰어난 자라고 생각해서 질투했고 그런 만큼 창조자는 뭔가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통찰자가 아는 걸 창조자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이 두 능력은 전혀 다른 종류인데도 말야." 그때 일을 회상하듯 제하가 쓰게 웃었다. 제하는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얘기하면서 스스로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 주는 제하가 고맙기는 했지만 왠지 안쓰러워서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녀석이 아직도 나를 미워해서 더 가슴이 아프다. "잘...모르겠어..." 엄청나게 쉬어 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매개체라니, 무언가 생각이 날듯 말듯하다. 제하가 차가운 물을 입 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그걸로 목을 축인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말을 않고 있었음에도 제하는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꿈......" "꿈?" "아마도 그걸 거야." 끝이 안 보이는 붉은 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생명수였던 것 같다. 이 세계가 언제부터 만들어져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능력의 원천이 그 바다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넘어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꾼 후 한 번도 꾼 일이 없다. 붉은 바다에 대한 꿈을 꾸는 대신 나는 꿈속에서 이 세계를 유랑하고 있었으니까. "꿈이라......" 내 얘기를 듣고 제하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한다.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자칫 잠으로 빠져 들어가려는 의식을 붙들고 가만히 제하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하다. 저렇게 동안인데 어느 순간은 십년도 더 늙어 보이기도 하고 어른들 같은 연륜이 느껴진다. 통찰자란 다 저런 걸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제하의 얼굴이 파르르 하고 떨린다. "설마..." 제하는 떨리는 손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짚더니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스, 승호야. 너 이 세계에 왔을 때 아무런 역할도 받지 못했다고 했지?" 표현이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하의 말에 의하면 그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녀석들도 다 이 세계에 떨어졌다고 한다. 제하가 여행하면서 만난 우리 반 애들이 적어도 절반은 넘으니 정확할 거다. 우스운 건 그들이 모두 이 세계에서 각각의 역할을 부여 받은 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거다. 내가 이 세계를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한 제하 입장에선 자신들이 꼭두각시가 된 것 같아 분노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만이 이 세계에 동화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세상이었지만 나 혼자만 제 삼자였다. 그 얘기를 했을 때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제하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맙소사...꿈이 매개체라면... 그리고 승호 네가 아무런 자의식 없이 이 세계가 만들어진 거라면..." 제하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간다. 씁쓸한 표정으로 웃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그것은 나에 대한 동정인지 더 이상 이세계에서 빠져나갈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체념인지 모르겠다. "이 무책임한 창조자야...만들어 놓기만 하고 모든 것은 우리들의 의지에 맡겨 버렸구나. 이 세계가 네 소망이 반영된 세계라면 우리들이 맡고 있는 역할은 우리 스스로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는 거냐...!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 반 녀석들 중 단 한명도 불행한 녀석이 없었던 거야? 그런 거야?" 제하가 이불깃을 강하게 그러모아 쥐며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굉장히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리고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문득 가슴이 울컥하고 응어리가 진다.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왠지 기분이 착 가라 앉는 것이 어떤 말을 들어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하의 말을 들었을 때도 '아, 그래.' 라고만 생각했을 뿐 격렬히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규칙적으로 내리는 빗소리가 마음을 더 침착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직 가슴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 놀랍지는 않은데...내가 이 세계를 만들면서 우리 반 녀석들의 의지대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준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그럼 나의 의지는? 나는 어떻게 되고 싶었지? 민태가 근육질의 강한 사내가 된 것도, 오세준 패거리들이 평소 노래를 부르던 노랑머리 갈색머리를 한 것도 모두 자신들의 평소 소망이었다고 한다면 내 소망은 어디로 간 거지? 그래......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신록. 계절마다 변하는 들판의 내음과 향기. 햇살이 내리쬐어 반짝이는 개울가. 황금색으로 일렁이는 가을의 논. 동심원이 그려질 것 같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아무도 모르게 피어 있는 작은 들풀. 그래...알겠다. 왜 이런 세상인지 알겠어. 자살이나 생각하던 녀석에게 새로운 인생따위 부여 될 리가 없지... 대신 내가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 거다. 제하가 얼굴을 닦아주었을 때 나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곤하다. 이제 좀 자고 싶다. 의식이 침잠해 가면서 제하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다정했지만 한숨이 섞여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윤승호 이 딱한 녀석아...넌 네가 만든 세계에서도 주인공이 아니구나..." 무림고수를 외치던 민원호는 아예 본인이 무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솜씨가 뛰어나서 이덴의 훨씬 동쪽 끝에서는 꽤나 이름을 떨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무사라는 녀석이 강아지 한마리 죽이지 못하는 소심한 녀석이라 돈 벌이는 시원찮은 것 같았다. 늘 잠만 자던 유진철은 여기서도 한량이었다. 이덴의 남쪽에 위치한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상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놀고먹는 중인 것 같지만 무능력한 탓에 미래가 불투명하고 주위에서 구박받고 있다. 한 번도 얼굴을 제대로 본적이 없는 운전기사 아저씨는 남쪽과 서쪽지방의 사이에서 교역을 하며 꽤 규모가 큰 운송단의 장이 되어 있었다. 몇 번 얘기해 본 적 없는 한 녀석은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는 헌터가 되겠다고 길을 떠나 유쾌한 모험을 하고 있었다. 김종혁이나 최우민, 박찬민, 이주영, 강현우, 정민성....등등등 모두들 이 세계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평범하게 살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사이가 좋은 녀석들은 형제가 되기도 하고 여기서도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1학년 1반의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생활고와 사소한 트러블에 웃고 울면서 본인들의 진짜 세계를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담임이었다. 언제나 지겹다는 표정으로 담배에 절어 학급 성적에만 연연하고, 좋은 대학을 외치며 공부 못하는 학생 일엔 관심도 없던 담임이 여기에서도 교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십 년은 젊어져서 시골마을에 오두막을 하나 지어놓고는 가난한 농민의 아이들을 상대로 글을 가르치는 열혈교사가 되어 있었던 거다. 수십 명의 감정들이 쉴 새 없이 흘러 들어와 더 이상 유랑하기가 힘들어졌다. 점점 세계와 교감하는 강도가 높아 지는 것 같다. 특히 1학년 1반 아이들이라면 더 그렇다. 나와 가까웠던, 그러니까 친하지는 않아도 1학기 때 조금이라도 안면을 텄던 녀석들 일수록 감정이입이 강해진다. 독심술 같은 게 아니다. 녀석들이 울면 나도 슬프고 웃으면 나도 기쁜 거다. 한 사람의 감정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여러 사람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이건 일방적인 정신 교감이다. 나 혼자 녀석들의 희로애락에 동조하는 것이다. 내가 만든 세계? 웃기는 일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나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인생마저도 무의식이지만 자기 스스로 정했다. 아니...좀 달라... 어느 정도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어... 그래 무의식... 내가 녀석들에게 가지고 있던 무의식중의 이미지가 각자의 의지와 조합되어 한 명 한 명에게 역할이 부여 된 것이다. ......문득 왜 진유현이 왕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 이런.... 스스로가 비참해진다. 웃음이 나온다. 실체가 없는 나 대신 허공에 차가운 바람이 불며 비웃는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독재자는 진유현이었던 거다. 그 조그마한 교실 안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 중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진유현이 내 무의식 안에서 거만한 왕으로 비춰지던 거다. 나 뿐만이 아니다. 우리 반 모두가 진유현을 은근히 반의 일인자로 의식하는 가운데 이 어처구니 없는 세계로 떨어졌다. 그래서 진유현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 세계의 왕이라는 역할을 차지 할 수 있었고 이것은 1학년 1반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인 것이다. 누구나 강한 힘을 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반 아이들이 제각각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며 이 세계에 동화된 것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한계를 무의식중에 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이되 최강이 아니고 부자이되 나쁜 머리를 한탄해야 하는 현실에서의 고민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현실에서 친구인 녀석들은 여기서도 친구다. 민태와 형석이, 진영이가 그렇다. 진유현이 왕이니 항상 옆에 붙어 있던 제하나 오세준도 자연스럽게 왕족이라는 위치로서 유현의 곁에 머물게 된다. 박재석, 김한수, 강지원, 임경철과 같은 패거리가 시시껄렁한 귀족으로서 오세준의 곁에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게 세상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끼리 트러블이 생기고 사건이 일어나고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바뀌는가 하는 건 더 이상 내 영역이 아니다. 역할을 부여받은 녀석들 스스로의 힘이다. 그러니까 난 무능한 창조자다. 나는 세상을 만들기만 했을 뿐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여기서 살아가는 1학년 1반과 내가 만들어 낸 무수한 생명들의 것이다. 이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받지 않은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바라보고 같은 감정을 공유할 뿐이다.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세계와 동화된 상태인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나도 극명해서 오히려 괴롭다. 제하와 만나고 나서 능력은 커진 것 같지만 이따위 쓸모없는 능력은 차라리 없는 게 낫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세계를 빠져나가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나는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다. 대체 얼마나 잠을 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부슬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고 몸은 물먹은 솜마냥 무겁다. "아직 안정이 안 되었다니까! 좀 더 승호의 몸이 회복되면..." "시끄러워! 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어제만해도 팔팔하던 애가 왜 갑자기 비실거리냐고! 헤시안, 자꾸 이러면 너라도 용서 못해!" 유디...아니, 진유현과 김제하가 싸우는 소리다. 간혹 루센이 말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아무래도 왕과 왕족의 다툼이라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정의 무늬가 왠지 정겹다. 생각해 보면 이 방에서 지내던 생활이 가장 평화롭지 않았나 싶다. 루센한테 잔소리도 듣고 에드바라하 삼인방에게 구박도 받아가며 가끔 찾아오는 유디...유현과 함께 티타임을 보낸다거나 하던 왕궁에서의 초기 생활. 녀석이 애정을 퍼부었던 쾌락의 나날보다 가끔씩 찾아와서 썰렁한 담소를 나누다가 헤어지던 그때가 훨씬 나았다. 차라리 그렇게 좋은 친구사이가 끝까지 유지되었다면 지금처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냥 친구로...좋은 친구관계로 남았다면 충격도 덜했을 텐데... 나는 그런 폭력을 행사한 진유현을 용서할 수가 없다. 지금의 유디스가 아무리 따뜻하게 나를 대한다고 해도 진유현 본인이다. 녀석이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이유가 그 악몽 같은 날의 기억이 몸 속에 남아 행한 거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그렇게 다정했다. 진유현을 잊어 버릴 정도로, 똑같은 얼굴임에도 모든 것이 용서 될 정도로 다정했다구. 유디스였기에 나 역시 행위를 즐긴 거다. 유디스였기에 완전히 마음을 의지했던 거다. 그런데...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이렇게까지 너를 좋아하게 됐는데 내가 좋아하던 유디스란 인물이 진유현이라고 하면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해? "승호야!!!" 기어코 문을 열어젖히며 유디스...진유현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왠지 우습다. 어제는 유디..진유현의 침실에 제하가 뛰쳐들어 왔지. 그때는 유현이 제하를 말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제하가 유현을 말리는 우스운 상황이었다. 유현의 모습역시 어제의 제하 못지않다. 사냥터에서 방금 돌아온 듯 몸에서는 피냄새가 풍겼으며 옷은 진흙투성이다. 비에 젖은 채 씻지도 않았는지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다 젖어 있다. 눈만 부리부리하게 살아서는 내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좀...나아졌어?" 녀석답지않게 주춤거린다. 어제 발광하는 내 모습에 어지간히도 놀랬나 보다. 몸이 무거운 탓인지 확실히 마음도 진정되었다. 쇼크가 커서 발작하던 어제와 달리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은 유현을 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은 조금 피곤해서 일 거다. "걱정 많이 했지?" 작게 웃어주었다. 그 한마디에 화색이 도는 유현의 얼굴도 우습다. 그래, 지금 녀석은 유디스지. 이제 와서 갑자기 진유현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녀석의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유디스란 인물이 나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나는 타인의 감정까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녀석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만이 사무치도록 와 닿아 혼돈만 가중된다. 진유현이 현실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1학기 때 보여준 다정함을 농축시킨 듯한 유디스가 진유현의 진짜 모습이라면 이후 돌변한 진유현의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유디스라는 인물을 통해 어떻게 드러날지 두렵기만 하다. 어쨌든 나는 가능한 익숙해져야 했다. 유디스가 진유현이라는 데에 적응해야 했다. 그래서 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을 때 안심하라고 달래면서 미소 짓는 수밖에 없었다. 유현이 한숨을 내쉬면서 차마 자신의 더러운 손으로 만지기는 미안했는지 입술만 비죽 내밀어서 이마에 뽀뽀할 때도 가만히 웃는 얼굴로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얼굴이 다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불 속의 몸은 가늘게 몸서리치고 있었다. 이삼일을 앓으면서 몸 상태는 회복되어갔다. 앓았다기보다는 그냥 축 쳐져서 무기력한 상태였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누워 있는 동안 잦은 트랜스 상태를 겪어 주위 사람들을 걱정시켰고 의사들도 병명을 알 수 없어 당황했다. 헤시안, 그러니까 제하의 병을 고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나를 데려온 유디스...아니, 유현은 오히려 우리 둘이 만나고 나서 둘 다 상태가 나빠졌다고 생각했는지 굉장히 언짢아 했다. 그러나 별 일 없이 내 몸은 안정을 되찾았고 내가 아프던 내내 내리던 비도 그쳐 건조하고 쌀쌀한 가을 바람이 왕성 내에 불고 있었다. 나는 아직 유현의 침실이 아닌 내 방에 머물고 있었고 그런 나를 보기 위해 유현은 본 궁 보다 이 별궁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빨리 안고 싶어...자고 싶어...아, 벌써 며칠이나 못했다고..." 대낮부터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풍기며 유현이 엉겨 붙어왔다.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나를 머리부터 한 팔로 끌어 안더니 머리카락과 뺨, 목줄기 등에 정신없이 입맞추면서 열렬히 구애를 하고 있었다. 시큰둥하게 책을 읽으며 녀석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더니 읽고 있는 책을 뺏어 들고 깊게 혀를 넣어 입안을 휘젓는다. 옷 속에 손을 넣어 평평한 가슴을 쓰다듬고 그 몸을 내게 기대어 왔다. 예전에도 유현의 이런 행동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는 녀석이 귀여웠고 사랑스러웠고 또 달아오르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서 나도 조금은 두근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몸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 채 마음은 차갑고 머릿속은 복잡해서 도무지 녀석에게 호응할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솔직히 거부감 든다. 녀석이 남자라는 것도, 아직 미성년인 내가 이런 짓을 한다는 것도, 이유 모를 어색함과 거리낌을 느끼게 한다. 유디스였을 땐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면서 진유현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단박에 17년간 나를 지배해 온 고정관념이 몸을 묶는다. 이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진한 스킨쉽이 새삼스레 껄끄럽다.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을 굳이 원효대사의 예를 배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몸소 절절히 체험하고 있었다. 온갖 민망한 상황은 다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유현을 매몰차게 밀어 낸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히히덕거리며 달라 붙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착잡하고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내 마음도 모른 채 유현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흥분을 꾀하고 있었다.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가 답답했는지 유현이 귓가에서 혀를 찬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남자들 공통의 약점에 손을 뻗는다. 흠칫하고 놀래서 허리가 튀었지만 바지 위로 녀석의 손에 잡힌 그것은 놀랜 내 마음만큼이나 줄어들어 있었다. "아직 몸이 피곤해. 오늘은 그만두자." 유현의 팔을 붙잡으며 어색하게 말했다. 유현은 눈썹을 꿈틀하면서 불만을 표시하더니 말없이 잡고 있던 것을 훑어 내리고 조물락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르게 오히려 움츠러드는 물건을 느끼고 유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싫다고 했잖아. 이제 그만......윽!"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와 정통으로 붙들렸다. 유현이가 만져도 떨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했는데 성기에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지자 오싹하는 한기가 등골을 훑는다. 그래서 오히려 물건은 좀처럼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다리 사이의 손이 부담스러워서 허리를 비틀어 유현에게서 물러나보려 하지만 다른 팔로 나를 끌어안고는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부드럽고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애무하는 손은 내가 어떻게 했을 때 좋아했는지를 기억하고 집요하게 문지른다. "제기랄..." 낮은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유현의 따뜻한 손에 조금씩 힘을 얻어가는 생식기가 저주스럽다. 이쯤에서 발버둥쳐 볼까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진지한 유현의 표정이 마음을 약하게 한다. 끊임없이 퍼붓는 입맞춤이 혐오스러우면서도 눈물겹다. 상반된 마음이 충돌하는 가운데 내 물건은 발기하다 만 상태에서 더 이상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유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일어나려 했다. 이대로 녀석에게 몸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유디스가 유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죽고싶은 기분은 온데 간데 없고 욕망에 길들여진 몸뚱어리만이 남았다. 녀석이 손만 대도 벌벌 떨던 주제에, 녀석과 몸을 섞은 자신을 저주했던 주제에 이 꼴이라니 한심하기 그지 없다. 조금 화가 났는지 녀석이 거칠게 끌어 안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유현의 다음 행동에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손으로 주무르는 것에 한계를 느꼈는지 대뜸 바지를 벗기고 입으로 물었다. 혐오고 뭐고 이런 자극에는 도무지 대책이 없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구강의 내부는 녹아버릴 듯 부드러웠고 물컹거리는 혀의 미세한 돌기 하나하나가 자극이 되어 요도 끝을 침범한다. 강하게 흡입하는 압력에 하체가 들썩거리고 다리 사이로 느껴지는 녀석의 숨결에 정신이 아찔해 진다.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오싹 오싹하는 전류가 몸을 흐르고 있음에도 마음은 한 없이 슬퍼지고 만다. 유현의 손은 급하지 않게 천천히 허벅지를 어루만지지만 녀석의 목구멍까지 깊게 흡입 당한 나는 시트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번쩍하는 쾌감은 분명 지옥에서부터 올라온 것일 거야. 심한 자괴감을 느끼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래에서 유현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내 몸 위로 겹쳐 왔다. 울고 있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움찔한다. "정말, 오늘 컨디션 안 좋나 보네. 미안...다음에 할 게." 얼굴을 가린 손가락 위를 혀로 핥는다. 아쉬운 듯 쪽쪽 거리더니 바지를 입혀주고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주며 다독인다.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작게 울먹였다. "헤시안...헤시안을 불러줘..." 다독여주던 녀석의 동작이 멈췄다. 이를 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이 녀석과 있으면 아직도 진짜 진유현과 유디스의 사이에서 혼동하게 된다. 제하를 만나서...그 녀석과 이야기 하다 보면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방법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 그저 이 비틀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가진 제하가 옆에 있어 주어야 나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제하는 유현의 명대로 자택에서 근신 중이었다. 궁에서 지내는 유현과 아디움....아니, 오세준과는 달리 가정이 있는 정상적인 집에서, 왕족 바르테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헤시안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에드바라하의 의식은 또 며칠 연기되었다. 유현을 제외하고 왕위 계승권을 가진 유일한 왕족인 헤시안, 그것도 재무관으로써 뛰어난 자질을 보인 그 헤시안이 돌아온 이상 의식에 그가 빠질 수 없다는 노인들의 주장 때문이라고 유현은 쩔쩔매며 설명했었다. 뿐만 아니라 헤시안처럼 중요한 인물이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에드바라하에도 좋은 일이라고 루센이 말했을 때는 좀 의외였다. 루센은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하루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보는 게 고작이었지만 예전처럼 의식을 빨리 치르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직도 유현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았는지 "곧 승호도 그 지긋지긋한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에요. 조금만 참아요."라고 말하는 평온한 얼굴은 무언가를 억지로 회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내가 스스로 왕에게 다가갔다는 것, 그것을 루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유디스가 유현이란 걸 알아버린 지금은 굳이 루센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도 몰라. 지금 내가 유현에게서 벗어나고 싶은지 어떤지. 유디스가 유현이란 걸 알았을 때 밀려오는 생리적인 혐오감이 조금씩 사그라지면서 유디스와 보냈던 좋은 기억만 머릿속에 남는다. 정말, 자기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니 얼마나 간사한가. 내 부름에 집에서부터 찾아온 제하는 궁정의 대신들과 함께 왔다. 달라붙는 유현을 억지로 떼어내고 본 궁으로 가라고 말하니까 녀석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하지만 제하의 뒤에 병아리처럼 줄줄 따라 온 노인들의 성화가 대단했기 때문에 투덜대면서 억지로 걸어나가는 모습은 맛있는 것을 남겨두고 학교에 가는 어린애의 뒷모습과 닮아 있었다. "완전히 빠져있군. 저 정도일 줄은 몰랐어." 비아냥이 아닌 진심으로 제하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이제는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런데 왜 날 부른 거야?" "그냥...여행이야기나 들을까 해서." "여행?" 제하가 돌아다녔다는 나라에 대해 듣고 싶었다. 물론 잠이 들어 트랜스 상태에 빠지면 대륙의 끝까지 돌아다니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가 이유도 모른 채 슬퍼지거나 기뻐지는 건 피곤했다. 제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을 꾹 감았다 뜬다. 무언가 결의를 다지는 그 표정에서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제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몸이 미약하게 떨릴 정도로 의외의 것이었다. "유현이가 왜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제하가 의자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시선은 나를 보지 않고 아까 내가 읽다 만 [게비도 왕의 일대기]란 책을 휘리릭 넘기고 있었다. 질문 해 놓고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제하도 어지간히 그 화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궁금하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왜 그랬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는 걸. 하지만 그것도 이 세계에 넘어오기 전의 일이다. 유디스가 유현이란 걸 알게 된 후론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유현이의 마음을 알았다가 저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유디스의 행동이 진심이 아니라 어떤 다른 외부요소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 겁이 났다. 유디스가 된 유현을 끔찍해 하면서도 마음 어디선가는 그래도 저 마음이 진심이라고 그렇게 믿으며 그 믿음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자신이 있다. 나에게 심한 짓을 한 진유현이지만 아주 조금쯤은 나라는 녀석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서 유디스란 인물로 그 호감이 표현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껄끄러운 대화를 하고있다고 생각한 제하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래...항상 궁금했어..." 목소리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제하의 맞은 편 의자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주전자를 들어 보았다. 묵직한 것을 보니 새 음료가 담아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과 내 컵에 무색의 그 액체를 따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 오세준도, 너도. 당사자인 진유현조차도 왜 나를 때리는지 얘기해 주지 않았어." 원망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힐난하는 어조가 묻어나서 조금 놀랬다. 제하는 컵에 담긴 음료를 마시며 한숨을 쉬었다. "너 처음엔 유현이랑 친했지. 유현이가 너한테 한 행동이 그냥 친구한테 하는 짓 같았어?" 제하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빤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저렇게 말을 돌리는 걸까. 제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지난 일을 회상하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녀석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녀석이 유독 너한테만 끈질기게 달라붙는 걸 단순한 친구사이의 우정의 확인이라고 생각한 거냐? ......하긴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구나. 하지만 그 자식이 얼마나 정 없는 놈인데. 자기네 부모님한테도 안 부리는 어리광을 너한테 떠는 거 보고 진짜 질렸었다고." 소꿉친구이며 부모님끼리 잘 아는 사이인 탓에 제하는 유현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다고 한다. 어릴 때 성질 나쁘고 제멋대로인 유현이 유일하게 사귄 친구였다. 제하의 말로는 자신이 유현의 비위를 잘 맞춰준 것 뿐이라고 했지만 진유현은 자신에게 아부 떠는 녀석을 싫어했으니까 제하가 유현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친해졌다고 보긴 어려웠다. 오히려 애늙은이에 가까운 어린 제하가 유현을 다독이며 달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유디스란 녀석은 진유현의 어릴 적 모습에 가까워. 유현이가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컸다면 아마 딱 저 유디스 처럼 됐을 거다. 그 자식이 커가면서 어른들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알아가고 또 그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거 보면서 아무리 내 친구지만 어쩔 때는 정이 뚝 떨어질 때가 있어. 게다가 진유현은 안 그런척하면서도 남의 이목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녀석이거든. 그 이중적인 모습이라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저 오만방자함에 거만함을 떠는 유디스가 차라리 순수하게 보이더라." 나는 무색의 액체를 들이 마시며 가만히 제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렸을 때의 진유현이라면 엄청난 떼쟁이였을 것 같아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곧 그 미소는 씁쓸하게 바뀌었다. "이 세계가 네 말대로 각자의 소망과 무의식을 담고 있다면 유디스란 인물은 진유현이 진짜 바라는 자신의 삶이었을 거야. 아무에게도 제지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않는...막말로 마음껏 전장에서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그런 인생. 정말...지독하게 이기적인 녀석이야 진유현은." 달칵-하며 제하가 자신이 마시던 컵을 잔 위에 올려 놓았다. 다시 심호흡을 크게 한 녀석이 하얀 테이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너는 진유현이 현실에서도 자기 맘대로 하고 다녔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집안은 엄격하고 아버지는 유현이에게 바라는 욕심이 크시지. 그건 유현이 탓도 있어. 자신이 잘난 인간이란 걸 여러 방면으로 보여드렸으니까. 아마 그대로 계속 인생을 살았더라면 유현도 만족하면서 살았을 거야. 너라는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면 말이지." 미간을 찌푸리며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는 제하의 손끝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나도 정확한 건 아니야. 그냥 감인데... 아마 진유현은 너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거 무슨 뜻이야?" 무언가 빙빙 돌려 말하는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제하가 하는 얘기들이 나를 때리고 괴롭힌 것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갈피를 못 잡겠다. "그러니까 아마도...어디 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제하가 곤란한 듯 턱을 긁적이며 말끝을 흐린다. 나는 그 모습을 노려보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꽤나 딱딱한 얼굴이었을 거다. "진유현은 너를 좋아했을 거야. 유디스와 같은 의미로."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그런 녀석이 그렇게 개 패듯이 사람을 패냐?" 머릿속 어디선가 아주 조금은 예상한 대답이어서 그런지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래, 유디스로 변한 진유현이 저렇게 열렬하게 나오는데 예상 못 할 정도로 난 눈치가 둔하지 않다. 다만, 그래서 더 진유현이 나에게 가한 폭력이 이해되지 않는 거다. "말했잖아. 유현이는 보기보다 주위의 이목을 상당히 신경 쓴다고..." 험악하게 눈을 치뜨는 나를 보고 제하가 쓰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제하를 볼 때마다 나까지 가슴이 서늘해져서 기분이 좋지 않다. 어째서 겨우 고등학생인 네가 이렇게 늙어 보이는 걸까. "너는 유현이의 행동이 갑자기 변한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녀석은 그 전부터도 고민했을 거다. 무의식 중에 너를 바라보고 너를 만지는 반장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놈들도 우리 반에 몇 명 있었어. 그걸 알면서도 유현이는 너한테 접근하는 걸 그만 둘 수 없었지. 그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보충수업이 끝나고 겨우 보름에 불과한 방학을 맞았지만 그동안 유현이는 너를 보지 못했어. 그리고 그제서야 그 바보 같은 놈이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제하는 '아마...'라는 말로 말끝을 흐렸지만 말투를 보니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오랜 세월 보아온 사람의 감정을 눈치채는 건 일반인이라도 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통찰자인 제하라면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제하의 말을 믿어야겠지만......점점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보름동안 유현이는 미국에 가 있었어. 그리고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유현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 녀석은 엄청나게 정서가 불안정했지. 그때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국에서 학교를 보고 왔다고 하는군. 1학년을 마치고 유학을 간대. 유현이도 아버지가 미국으로 불러내서 가봤더니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하더라며 난리를 치더라고. 원래대로라면 그런 엘리트 코스 밟는 걸 제일 환영해야 할 녀석이 말이야." 창 밖으로 푸드덕 하고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푸른 창공아래 펼쳐진 깨끗하고 그림 같은 세상을 노래하듯 작게 지저귄다. 새의 노랫소리와 제하의 말이 뒤죽박죽 엉켜 머리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알겠냐? 유현이는 너를 끊고 싶었던 거야. 겨우 보름동안 네 얼굴을 못 봤다고 전전긍긍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런데 유학을 간다? 몇 년 동안 너를 못 본다? ...게다가 사회에서 매장되기 딱 좋은 동성애를 한다? 녀석이 그런 걸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차라리 자기 감정을 씻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고 싶었을 거야. 결국 당하는 네 입장은 생각 못하고 자신의 기분만 후련해 지기 위해 그런 짓을 하는, 엄청나게 이기적인 녀석이라고. 처음엔 무시였다. 방학 잘 지냈냐고 인사하는 나를 외면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다음은 비아냥, 그 다음은 욕설. 나도, 반 아이들도 진유현이 왜 그러는 지 이유를 몰라서 허둥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맞기 시작했다. 오세준 패거리들이 동원되고 학교 밖의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진유현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까지 지으며 나를 밟고 그것을 즐겼다. 단지 자신의 감정을 끊기 위해서라고 해도 녀석은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 걸로...설명이 안 돼..." 이를 갈며 몸서리쳤다. 제하는 내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자신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는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절반은 높은 성벽이 가로 막고 있었고 그 성벽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유현이는 욕구불만이었어. 풀지 못한 성욕이 폭력으로 나타났다고 하면...너는 더 상처 받겠지..." 중얼거림에 가까운 그 소리를 듣고 난 뇌 속의 플라멘트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탕! 화를 못 참고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내리쳤다.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던 진유현의 폭력은 결국 강간까지 이르렀다.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데, 녀석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지금이라도 쑤실 거 같은데...... 어떻게, 어떻게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거냐?! 이해가 안된다. 진유현의 사고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래서 나를 괴롭혔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사람 하나를 완전히 병신취급했다고?!!!"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동안 겪어왔던 지옥 같은 시간들이 허무해 진다. 지나치게 새파래서 오히려 화를 돋구는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제하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내뱉는 말에는 안타까움이 어려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유현이는 전쟁터에 있었어. 그리고 유디스란 인물이 어렸을 때부터 줄곧 전쟁과 관련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랬지. 7살 때 에드바라하 가문 정벌에 참전했고 14살 때 태자인 형을 죽이고 왕이 됐으며 16살 때부터 미친 듯이 전투만 했다고 하더군. 모르겠냐? 유현이는 현실에서의 욕구불만을 살인이란 형태로 이 세계에서 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네가 나타나고는 전혀 출전하지 않았다면서." 나를 바라보는 얼굴표정이 처연하다. 햇빛을 등진 제하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녀석의 얼굴을 더욱 슬프게, 더욱 기이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 한 것 같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왕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잡게 되면서 녀석에겐 사회적인 제약이 사라진 거야. 아마 유현이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겠지. 그러니까...유디스의 탈을 쓴 진유현의 마음은 진짜라고 믿어도 좋아. 윤승호." 순간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 움찔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는 제하의 얼굴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정곡을 찔린 느낌이 썩 유쾌하진 못하다. 하지만 덕분에 확실해졌다. 기분은 정말 더럽지만 머릿속의 뿌연 안개가 환하게 걷히는 감각이었다. 머릿속이 깨끗해 지면서 동시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제하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겁하다. 진유현. 네가 그렇게 겁쟁이였는 줄 미처 몰랐어. 그리고 나는... ......아직도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 제하에게 설명을 들었어도 나의 혼란스러움은 가실 줄 몰랐다. 궁금증은 풀렸지만 감정의 앙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진유현이 나를 때리는 이유를 몰랐을 때보다 더 답답하다. 녀석이 싫고... 밉고... 증오스럽고... 끔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이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어... 이대로 유디스의 상냥함에 기대어도 괜찮은 걸까? 녀석이 진유현이란 것을 알면서도? 아니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녀석에게서 도망쳐야 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에게 유디스...진유현은 수시로 방문해서 뜨거운 접촉을 구하고 있었다. 끈적거리는 몸, 달착지근한 속삭임도 섬뜩하기만 할 뿐인 나로서는 녀석의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날이 갈 수록 유현의 불만은 쌓여갔고 나는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의식 일이 차츰 다가오고 성 안에는 드디어 에드바라하의 귀족들이 입성하여 하루에도 수백 명의 외부인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새 식구를 맞는 국가차원의 행사는 이제 곧 사흘을 앞두고 있었다. 거대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허공에 누워 귀를 막고 눈을 막고 감각을 차단하여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외면하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의식이 이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종종 이렇다. 피곤한 몸으로 잠들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의식이 멋대로 움직인다. 지축을 울려버릴 것 같은 함성은 고막이 쩌렁쩌렁하도록 계속되었다. 오감이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심장이 쿵쿵쿵 뛰고 온 몸이 오싹오싹하게 떨려올 것만 같은 지독한 살기에 숨이 막혔다. "거만한 이덴의 소르 왕가에 저주가 있으라!!!!" "악독한 왕 유디스의 피를 드루키아의 대지에 뿌리자!!" "패배의 치욕을 청산하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긍지를 되찾자!!!!" 와아아아-하는 함성소리가 가득채운 벌판에는 드문드문 잡초들이 나 있었지만 토지는 건조하고 기름기가 없었다. 그 황량한 대지위로 수백, 아니 수천은 됨직한 사람들이 각자 무장을 하고 살기로 시뻘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들은 날이 번쩍이는 칼을 들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팔뚝을 높이 치켜들면서 목청껏 외치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오들오들 떨려왔다. 이들의 지독한 살기와 증오, 복수심이 한데 엉키어 나에게 흘러 들어왔다. 가능한 마음을 닫으려고 노력했지만 수천이나 되는 사람들의 독한 감정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드루키아라면 유디스왕, 진유현이 마지막으로 정복했던 지방이다. 수십 개의 부락이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어 아직 국가로까지 발전하지 못한 형태라고 루센에게 들었다. 드루키아의 대표들은 지난번 연회 때 공물을 들고 찾아왔다가 유디스가 알현을 무시해 버린 적이 있었다. 결국 대표들은 유디스의 얼굴도 못보고 돌아갔지만 그들이 잔뜩 바친 페고열매는 한동안 내 주요 간식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그 이름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드루키아족의 용맹한 전사들은 연맹의 장로들의 비겁한 태도를 비난한다. 드루키아족의 긍지 높은 부족민들은 이덴의 속국임을 거부한다. 드루키아족의 현명한 학자들은 우리의 동맹들을 신뢰한다...." 맨 앞에서 이덴을 저주하며 수천의 병사들을 이끌던 한 남자는 다 낡고 헤진 누리끼리한 양피지를 펼쳐 큰 목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달되면서 평원에는 고요함만이 감돈다. 그렇게나 시끄럽게 왁왁대던 사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흥분된 눈으로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상당히 장문의 글을 다 읽어 내리던 남자는 투지를 불태우며 다시 한 번 병사들의 사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것이 아닌, 너덜너덜한 가죽옷을 입고 창과 방패가 전부인 그들이지만 의욕만은 넘쳐 흘렀다. 그렇게 한낮의 대지를 진동시키는 함성이 그칠 줄 몰랐다. 나는 그들의 살기를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어지럼증을 느끼며 의식을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바람이 약하게 불어도 붉은 흙바람이 일어나는 어느 마을이었다. 누더기가 다 된 옷을 걸친 한 소녀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우물을 긷고 있었다. 그러나 우물은 말라가고 있는지 바가지에 담긴 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모래와 진흙이 섞인 지저분한 물이었다. 몇 모금 안 되는 물이 담긴 바가지를 들고 소녀는 총총총 어디론가 뛰어갔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위태위태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엄마~ 물 가져왔어!" 땟구정물이 흐르는 얼굴로 소녀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앞니 두개는 빠져서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여자애는 비듬이 섞인 머리를 산발로 하고 소녀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노파에게 바가지를 내밀었다. 노파는 냄새 나고 더러운 담요에서 겨우 몸을 일으켜 소녀가 떠온 물로 목을 축였다. 사래가 들었는지 쿨룩쿨룩 기침을 하는데 기침을 할 때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어깨뼈가 섬뜩했다. "그런데 아빠는 언제 오는 거야? 벌써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수전증이라도 걸린 듯이 덜덜 떠는 손으로 노파가 내민 바가지를 받아들고 소녀가 천진하게 물었다. 노파는 못 먹어서 마른버짐이 잔뜩 핀 딸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성의 토목공사가 한참이니 한동안은 돌아오시기 힘들 거야. ...이런 수확철에 강제 부역이라니 영주님도 너무하시지." 노파가 한숨을 쉬며 구멍 뚫린 천정사이로 들어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워낙 마르고 얼굴이 거칠어서 노파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할머니라고 불리기엔 이른 나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세상을 체념한 한 때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몸서리를 쳤다. 기분이 나빠져서 얼른 그 집에서 멀어졌다. 그녀가 바라보던 천정의 구멍을 통해 빠져나온 나는 점점 더 높이, 높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마을의 황폐한 풍경이 한눈에 보이고 논에는 추수를 하다만 곡식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내린 비로 낱알이 썩어가는데도 아무도 거둬가는 사람이 없다. 좀 더 높이 올라가자 이번에는 저 멀리 영주의 성이 보이고 그곳에서 수 많은 남자와 여자가 돌을 나르고 흙을 퍼 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농민임이 분명한 아저씨들이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도르래를 당기고 있었다. 아직 아가씨임이 분명한 여자들도 돌을 나르느라 손바닥이 다 터졌다. 도랑을 파고 흙을 반죽한다. 무엇을 위한 공사일까 자세히 살펴보니 성을 확장하는 공사였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공사에 굳이 농민까지 동원해서 일을 시키는 모습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이곳 영주는 뭐 하는 사람이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중에 유디스한테 얘기해서 혼내주려고 가문의 문장이나 영토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한탄과 고통에 의한 원망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미 영주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감정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영주의 이름과 영토의 이름을 드디어 알아냈을 때 '너 이제 죽었어!'라고 결심하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낯익은 이름과 가문의 문장. 그것은 내가 유현의 품에서 뒹굴면서 멋도 모르고 꾹꾹 찍어댔던 문서의 한 귀퉁이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변방에 드루키아 족의 잔당이 남아서 습격해오니 성을 쌓고 싶다는 내용의 문서였는데 왕가에 재정적 지원을 요구하고 농민을 부역에 동원할 테니 왕가에 바치는 세금을 감해달라는 내용도 추가로 써 있었다. 그 문서에 내가 허가의 인을 찍었다. 붉게 찍힌 옥새 인장이 맘에 들어서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 문서였다. 말도 안 돼!! 분명히 그 문서는 성을 확장한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내가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건 내가 자격도 못 되는 주제에 함부로 나섰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화악-하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무수한 원망과 한탄의 신음소리가 온 몸을 향해 덮쳐 들었다. 따끔따끔거린다. 사람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바늘로 찌르듯 살갗을 뚫고 들어와 몸을 관통한다. 수백 개의 바늘이 몸에, 심장에 꽂힌다! 아파, 괴로워-!! 심장이 죄어드는 감각에 몸이 덜덜 떨렸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시야가 빙글빙글 돈다. 사람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그것은 내 의식을 난도질했다. 성안의 유동인구가 날이 갈 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사흘 뒤면 의식이다. 미리 들어와서 이것저것 준비할 사항이 많은 에드바라하의 귀족들이 속속 추가가 되었고 왕가에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될 에드바라하의 의식을 보러 먼 지역에서부터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은 증인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이유로 별 시답잖은 귀족의 방문까지 환영하느라 궁전은 포화상태다. 자이카나의 부재로 업무에 큰 구멍이 생긴 왕가는 급한 대로 에드바라하의 사람들을 바로 일에 투입 시켰는데 그 덕분에 에드바라하의 입장은 더욱 상승 되었다. 왕가가 에드바라하에 거는 기대는 컸고 귀족들이 에드바라하에게 손가락질을 하긴 했으나 한 편에서는 아직도 옛 향수에 젖어 경외심을 갖고 있는 늙은이도 있었다. 모든 사람이 바쁜데 나만이 할 일이 없었다. 과히 좋지 않은 기분이다. 게다가 대낮부터 유현에 대한 스트레스에 괴로워 하다가 꾸벅꾸벅 존 탓에 의식이 이덴을 한 바퀴를 돌아서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무겁다. 드루키아 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내가 본 영토에서 농민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도 다 어디엔가 알려줘야 하는데 막상 진유현한테 말하려니 녀석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럽다. 가뜩이나 녀석의 끈적거림을 묵묵부답으로 무시해와서 유현은 지금 쌓일 대로 쌓였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꼬박꼬박 나를 찾는 모습이 주위 사람 보기에 부담스러워서 가능한 녀석을 피했고, 만나더라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응대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유현은 하루의 절반을 무뚝뚝하게 대하는 나와 있으면서 온갖 상냥한 행동으로 내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했다. 내가 요즘 컨디션이 나쁜 것이 병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녀석은 자신의 주치의들에게 꼬박꼬박 정기 검진을 받도록 하고 있었지만 의사들은 기력이 쇠해졌다고 말할 뿐 별다른 말이 없다. 그런데도 유현은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내 몸을 의사들 탓으로 돌리고 애꿎은 의사와 요리사만 족치고 있는 거다. 덕분에 요즘은 매일 건강식만 먹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유현을 찾으면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만나려는 거 같아서 기분이 찜찜하다. 어떻게 할까...고민하다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루센이라면 어떻게 해줄 거야. "라노?" "승호야---!!!" 작은 체구의 소년이 큰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며 내 이름을 외쳤다. 나는 의외의 인물이 루센과 함께 있는 것에 놀라 잠시 몸을 정지했지만 이내 눈 앞의 반가운 인물에 목소리가 방정맞게 높아지는 것도 모르고 환호를 했다. "우와 오랜만이다! 진짜 반갑다, 반가워!!! 와하하하!!!" "잘 있었냐? 으아~ 내가 너 그렇게 보내고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냐? 건강한 거 보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로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끌어 안고 어깨를 두드리며 난리를 쳤다. 그래, 정민태다. 소심하지만 정이 많고 겁도 많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의젓하게 변해서 한 길드의 장이 되어 내가 만든 세계의 일부분을 움직이고 있는 나의 친구였다. 잠시 내가 루센을 찾아 온 목적도 잊은 채 회포를 풀기 바빴다. 오전에 궁성에 도착한 라노, 그러니까 민태는 루센과 함께 나를 찾아가기 위해 적당한 타이밍을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와아아~ 나 왕성이란 거 처음 봐. 되게 으리으리하다. 귀보르냑 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걸?" 루센이 내온 다과를 받아 오면서 민태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가죽을 기워 만든 평민의 옷차림에서 벗어나 루센처럼 부드러운 공단의 정장에 구두를 신은 민태의 모습은 의외로 볼만했다. 나는 대체 어떻게 온 거냐고, 카이나 파웰, 티안도 왔냐고 궁금한 것을 쏟아 내었다. "카이는 아마 제일 마지막에 올 거야. 파웰이랑 티안은 며칠 전에 도착했는데 못 만나봤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파웰과 티안이라면 형석이랑 진영인데 요 며칠간 좀처럼 루센을 만날 기회가 적어서 얘기를 들을 기회도 없었다. 라노, 아니 민태는 형석이와 진영이의 얘기를 하면서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큭큭 대며 웃었다. "이~야 신분상승이란 게 바로 이런 거지. 그 촌놈들이 지금 에드바라하의 귀족이 되서 궁정에서 일하고 있다면 믿어지냐?" "어어? 정말?" 의외의 소식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궁정에서 일하고 있는 에드바라하 귀족의 삼분의 일은 길드에서 엄선하여 뽑아낸 정예요원으로서 이 일만 끝나면 정식으로 귀족이 될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생각해봐라. 십년 전에 그렇게 초토화됐는데 솔직히 에드바라하의 인간들이 어디 남아났겠냐? 인력이 부족한 건 왕실 뿐만 아니라고. 에드바라하야 말로 일손이 모자라서 미칠 지경이야. 게다가 쓸모없는 노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래서 몇 차례 대대적인 축출이 있었지. 이야~ 우리쪽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구. " 민태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지만 루센과 마주 보며 미소를 주고 받는 모습이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의식을 날려 귀보르냑 성을 바라보고 있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회의를 하던 자리에 상당한 멤버의 체인지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동시에 벨미르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에 괜한 화제는 피하기로 했다. "나도 귀족으로 여기 와 있는 거야. 뮤디오 라노 그라데쥬. 멋지지 않냐? 으하하하~~~" 따지고 보면 나도 에드바라하의 아들 노릇을 하고 있고 루센과 테이그도 귀족행세를 하고 있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 것이다. 이제 와서 길드 사람들이 귀족행세를 한들 일만 잘 돌아가면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중엔 진짜 귀족이 될 거라며. 왕성 사람들을 속이는 거 같아 찝찝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전만해도 허름한 옷에 단도 하나를 들고 산을 누볐을 도둑 길드 출신들이 갑자기 무게를 잡고 있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더구나 그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이 궁중 예법을 전수 받느라 진땀 흘리는 장면은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웃고 떠들다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민태는 길드가 아예 에드바라하의 사병집단이 된 것 같다며 투덜거리기도 했고 철물점 식구들의 안부도 전해주었다. 나도 그동안 잘 지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내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챘는지 민태는 언제나 그렇듯 화려하게 수다를 떨었고 그런 녀석의 모습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차! 생각났다. 루센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요." 이제서야 나는 루센을 찾아 온 이유를 떠올렸다. "무슨 일인데요?"라고 물으며 조용하게 미소짓는 얼굴은 창백하고 야위어 있었지만 모처럼의 즐거운 시간을 가진 탓인지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뭐라고 말해야 되지? 막상 말문은 열었는데 내가 무의식 상태에서 이덴을 여행했다는 얘기를 하면 가뜩이나 나에 대해 걱정이 많은 두 사람을 더욱 걱정스럽게 할 거다. 윤승호가 스트레스를 못 이겨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게다가 나는 민태한테 전과가 있잖아? 민태..그러니까 라노는 아직도 내 정신병이 덜 나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에..에...모일락 영지 말인데요..." 우물쭈물거리며 눈치를 살피니 루센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승호가 모일락을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잖아도 문제가 많았는데 이번에 한 건 걸린 것 같아요. 왕한테 올라가는 문서에 허위기재를 하고 지원 받은 돈으로 성을 쌓는데 쏟아 부었다고...가뜩이나 이덴의 최전방 지역이라서 아슬아슬한 지역인데 말이죠." 아, 이미 루센도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든 해결되겠구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오르려고 하는데 루센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가...승호에게 그런 얘기도 해요?" 기쁨의 빛은 당혹감으로 바뀌고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루센이 뭔가 잘못 말했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고 민태는 단박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능하면 유현과 관련되는 화제는 피하고 싶었지만 역시 무의식 중에 튀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구나. 멋쩍게 웃으며 다른 화재로 돌리려고 했는데 민태의 표정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다. 아까처럼 유쾌하게 수다를 떨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민태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풀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 민태는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깍지를 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당히 괴로워 하는 것 같았다. "아, 아니아니, 라노가 내게 미안해 할 거 없어. 오히려 여기서 잘 먹고 잘 자고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있는 걸!" 손을 내저으며 억지로 웃어보였다. 과장되게 웃음소리도 크게 해 보고 민태의 등도 팡팡 쳐보며 괜찮다고 말해서 겨우 민태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 씁쓸한 표정에 내 가슴이 다 철렁할 지경이었다. "조금만 참아. 에드바라하 일만 끝나면 해방시켜줄게." 루센이 보고서에 뭐라고 썼는지는 몰라도 민태 역시 내가 왕에게 사로잡혀 무슨 성 노리개로 쓰이고 있는 줄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유현이 나에게 하는 행동거지를 직접 보았다면 절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텐데...하긴 루센이 그런 달착지근한 왕의 모습을 봤을 리가 없겠구나. 뭐, 나 역시 한동안은 유현과 떨어져 있고 싶었다. 끊임없는 애정공세에 시달리는 것도 힘들지만 그렇게 다정한 녀석을 보면서 분노를 태우기도 힘들다. 진유현에 대한 증오와 유디스에 대한 애정이 마음속에서 하루에도 수 없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유현의 옆에 있으면 이유없이 괴롭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진유현을 내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렇게 애매한 태도로 매일같이 녀석을 보았다가는 언젠가 유현이 폭발할 거다. 그리고 그 후의 상황을 나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차라리 좀 떨어져서 얼굴도 안보고 내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지 않을까? 애매하게 웃는 내 손을 강하게 붙잡고 민태는 시선을 떨궜다. 꼭, 꼭, 해방시켜주겠다며 입안에서 되새김하듯 웅얼거리는 그 모습에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민태와 루센의 생각과는 반대로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내가 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차마 드루키아의 얘기까지는 꺼내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세상은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조차 굳이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모든 일은 자기들끼리 잘만 돌아간다. 드루키아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루센이나 유현한테 얘기해주지 않아도 다음날 정식으로 전령이 도착해서 드루키아의 반란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빨리 전령이 도착한 걸 보면 아마 내가 반란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훨씬 전부터 전령이 왕성을 향해 뛰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미 이덴의 외곽지역과 다른 나라에도 소문이 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전쟁이라니, 의식은 바로 내일이었다. 예정 된 에드바라하의 의식은 취소되고 대신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길다란 탁자에는 유현을 중심으로 좌우에 수십 명의 할아버지와 아저씨들이 주루룩 앉아 있어 심각한 표정으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탁자 끝, 한 가운데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는 유현은 평소와 다르게 온갖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겹겹으로 입고 있었고 머리에 왕관도 쓰고 있었다. 음...나이가 어린 탓인지 왕이라기 보다는 왕자 같았다. 하지만 연극무대에나 나올법한 치렁치렁한 의상들이 녀석에게 어색하지 않은 걸 보니 나도 심미안이 많이 바뀌었나 보다. 왕궁에서 저런 옷을 많이 봤으니 익숙해진 거겠지. 사실 그동안 나와 유현의 패션은 왕궁 내에서도 파격적이긴 했다. 자기네 방 안이 아니고서야 궁성 내부를 바지랑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나와 진유현...그리고 오세준 정도? 하지만 이번만큼은 장소가 장소인 탓에 답답한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있었다. 소매에 달린 레이스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이것이 흔히 왕궁에서 걸어 다니는 보통 귀족들의 옷차림이었다. 내가 회의장에 온 건 순전히 루센의 부탁에 의해서다. 여기 모여 있는 대신들은 이 나라에서 내노라 할 만한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니까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이 회의 장소도 아무 귀족이나 못 들어 오기 때문에 에드바라하의 대표도 아닌, 나의 보호자 겸 수행원에 불과한 루센이 참석할 자격이 안된다는 거다.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동안 나보다 더 왕실을 위해 일한 루센인데, 아무것도 안 한 내가 없으면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나는 가능한 유현과 마주치지 않길 원했지만 회의의 내용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루센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 앉기로 했다. 비록 에드바라하가 아직은 정식으로 입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테이블의 가장 끄트머리, 즉 왕과 가장 먼 자리에 앉아야 하는 낮은 위치였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먼 자리에 있어도 유현의 뜨거운 눈초리가 느껴지니 가까이에 앉았으면 얼마나 암담했을 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역시 변방의 수비 병력만으론 무리입니다. 드루키아의 기세가 생각보다 대단해서 수비대들은 계속 후퇴 중이라고 합니다. 벌써 이덴의 국경선을 넘었다고 하더군요."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보내 초반에 진압해야 하오. 녀석들의 움직임에 자온과 이베라스가 동요하는 눈치오!" "차라리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가 이덴의 내부로 놈들을 유인한 후 단 칼에 쳐 버리는 것이 어떠할런지요?" "그럼 주민들은 어떡하고요? 그 야만인들에게 짓밟히도록 그대로 놔두란 말이오?" 만날 사무만 보던 할아버지들의 회의라기엔 꽤나 박력이 넘쳤다. 나는 이들이 전부 군사전문가는 아닐까 감탄했지만 결국 회의의 내용을 전부 알아듣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만큼 난 이덴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낯설은 고유명사가 거론되면 그게 사람이름인지 지역이름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아무튼 나는 그냥 허울좋은 껍데기일 뿐인 에드바라하의 대표다. 진짜 알맹이는 옆에서 내 보호자 자격으로 들어와 열심히 경청하는 루센이고, 루센을 대동하여 이 자리에 앉은 것만으로도 내 할 일은 끝이었다. 나는 졸리는 것을 느끼며 하품을 했는데 그러다가 유현과 얼굴이 마주쳤다.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왜 이리 가깝게 느껴질까. 나만을 주시하며 시선도 돌리지 않는 유현은 과연 저 할아버지들의 피 토하는 논쟁을 제대로 듣고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호전적이었던 왕이 반란소식을 듣고서도 잠잠한 것에 의문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나를 꼽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창피해 죽을 것 같다. 나 때문에 왕이 정무를 보지 않고 출전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어 올 정도면 대체 어느 만큼 이야기가 퍼져 있는 걸까. 성 내를 산책할 때마다 느껴지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잘 훈련 받은 병사들이야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지만 지나가는 왕족아저씨, 귀족 나부랭이, 하인들의 수군거림까지 모를 정도로 나는 둔하지 않다. 가뜩이나 쪽팔려 죽겠는데 이런 공공연한 장소에서 그렇게 쳐다보면 어떡하냐고 이 바보야! "전하...듣고 계시는 겁니까?" 불만을 품은 한 신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올렸다. 유현은 고개를 한 번 까딱하더니 "듣고 있어."라고 말하는데 그 신하에게 시선도 주지않은 채 말하는 모습이 매우 불순해보였다. "그렇다면 전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변국에게도 얕보이는 결과가..." "난 출전 안 해. 장군들 많잖아? 그 중 적당한 녀석을 하나 골라서 진압하라고 해. 기왕이면 지난번 드루키아와 싸운 경험이 있는 장군이 좋겠군. 필요하다면 아디움에게 자문을 구해도 좋아." 회의장에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마다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왕의 무책임한 언사에 기분이 상한 것만은 확실했다. "어찌 저렇게 무심하실까...", "하다못해 책임자 임명이라도 결정해주시지.", "드루키아와의 전투라면 전하가 가장 잘 아시지 않소?" 등등 유현의 태도에 한탄을 했다. "그런데 전하는 대체 누굴 보고 계시는 거지?"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화살처럼 내 귀에 꽂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르륵 달아 올라 시선을 떨궜지만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진유현이 한마디를 날려 나에게 결정타를 먹이고 있었다. "그래, 에드바라하 쪽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군."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갑작스러운 수십 쌍의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경직시켰다. 눈을 크게 뜨고 '너 왜 이러냐!'라는 시선을 유현에게 보냈지만 너무 멀어서 녀석이 내 원망 섞인 표정을 읽을 수 있는지 걱정이다. 게다가 멀리에서도 보이는 저 올라간 입 끝. 젠장, 재밌냐? 재밌어? "뮤디오 루센 에드바라하라고 합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제 생각은 다른 분들과 다릅니다." 그렇다! 나에겐 루센이 있었지! 안도감을 느끼며 루센을 구원 줄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았다. 주위에서 "건방진...", "감히 무슨 자격으로.." 라는 둥 험악한 소리가 들려서 내가 다 놀랠 지경이었다. 그러나 루센은 태연했다. "지금 병력을 드루키아에 집중하는 것은 시기상 좋지 않습니다. 드루키아는 얼마 전에 전하께 한 번 패배했기 때문에 군사를 충분히 재정비 할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공물을 바쳤던 장로들과 다른 자세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미 그들 내부에 균열이 생긴 상태라고 봐야 하겠죠. 이대로 조금만 시간을 끌면 드루키아는 자멸할 겁니다. 우선은 전방에 있는 영주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여 농성할 것을 지시하고 이후 드루키아의 보급로를 끊는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 해야 합니다. 전투는 소수의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상대를 지치게 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최선일 듯싶습니다." "게릴라전이라니, 곧 제국이 될지도 모르는 이덴의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인가?! "병력이 지원오지 않는 것을 영주들에게 뭐라고 설명한단 말이오?!" "당신은 단순히 에드바라하의 의식이 지연되는 것이 불만인 것 아닙니까?" "아니, 일리 있는 말입니다. 지금 궁정이 어수선한 이 때에 대규모 병력이동은 성안의 인사들에게 불안감만 가중시킬 거요." "이미 한 번 물리친 적입니다. 무엇을 두려워 하시는 겝니까? 전면전입니다! 전하께서 다시 한 번 용맹을 보여주시면 그 야만족들은 물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온과 이베라스도 잠잠해 질 것입니다!" 회의장이 난리가 났다. 아까 보다 더 열을 올리며 침을 토하는 아저씨들은 루센의 의견을 비난하기도 하고 일부는 옹호하기도 하면서 회의실이 웅웅거릴 정도로 떠들어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루센을 비난...아니, 비난에서 벗어나 거의 협박하는 분위기로 흐르면서 어느새 루센의 의견은 묵살되었고 점차 전면전이 대세로 기울게 되었다. "바보들..." 들릴 듯 말듯 작은 루센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누가 들을세라 몸을 움추렸다. 루센이 많이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해서 흘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 얼굴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시끄럽지만 지루한 회의는 끝날 줄 모르고 있었다. 결국은 군대를 보내자. 얼마나 보낼 거냐, 장군은 누가 될 거냐로 소란스러워지고 유현의 얼굴은 변함없이 내 쪽을 향해 있다. 허공에서 본 드루키아인들의 살기는 진짜였다. 햇빛에 그을려 시커멓게 탄 억센 손에 날이 잘 선 무기를 들고 환호하며 유디스를 향해 저주의 말을 내뿜고 있었다. 평원이 들끓도록 진동하던 고함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행여나 잠들면 그 무시무시한 살기를 다시 한 번 느낄까 봐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곤 한다. 그들과 유현이 싸우면...유현은 죽을까? 그러면...그러면 나는 속이 시원해질 수 있을까? 섬뜩한 한기가 심장을 관통했다. 아니, 내가 바라는 게 정말 뭐지? 나는 유현이 죽는 걸 바라고 있었어? 아니다. 그건 아니야. 저 자식이 밉고 저주스럽지만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미워하고 있다. 도대체 어느 게 진짜 내 마음이야?!! 문득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자근자근 씹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서 루센이 주의를 주고 나서야 알았다. 죽어버려? 아니 그건 너무해. 하지만 정말 저 얼굴을 볼 때마다 괴로워 진다. 제발 한동안만 저 녀석과 떨어져 있으면 좋겠다. 역시 전쟁터에 나가는 게 확실한데...하지만 죽을지도 모르고...어, 정말 죽을까? 제위한 이후 내내 싸움만 해서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는 왕이라며. 죽으면 그건 너무 하잖아. 아니, 죽어도 싼 놈이야. 아냐 아냐, 그래도 유현이는 나쁘지만 유디스는 상냥한데...... 최근 이런 식의 대화가 수십 번 마음속에서 오간다. 내 자신이 우유부단한 인간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만큼 결단력 없는 내가 한심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수 없이 고뇌한 끝에 내린 결론은 '조금 더 있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상황에 질질 끌려가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는 진유현과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녀석과 떨어져 있기에 전쟁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저기 루센..." 작은 목소리로 루센을 불렀다. 회의에 집중하던 루센은 "네?"하고 나를 돌아봤다. 언제 봐도 다정한 얼굴이다. "유...아니, 전하께서 출전하면 어떻게 될까요?" 주위에서 누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낮췄지만 아무도 나와 루센의 대화에 신경 쓰지 않는다. 시끌시끌한 회의장은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노인들과 중년 아저씨들의 싸움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승리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겠죠." 루센이 웃으며 명쾌하게 대답했다. 너무도 자신에 찬 루센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런 얘길 했어요? 병력을 집중하면 안된다고..." 싱긋 웃는 얼굴엔 약간의 장난기도 담겨 있었다.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루센은 목소리를 낮추어 간단하게 말했다. "전하가 나서면 승리는 확실하지만 왕성이 비잖아요. 게다가 날파리 잡으려고 쇠몽둥이를 휘두를 수도 없는 일. 물론 명예도 드높이고 주변국에 대해 힘을 과시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실질적인 소득은 전혀 없을 걸요." 나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승리가 확실하다면...유...전하가 출전했으면 좋겠어요..." 루센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루센은 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유현을 힐끔 보고 다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어두운 안색이 드리워지는 루센의 얼굴을 보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칠 염려는 없는 거죠?" 루센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상냥했고 부드러웠다. "드루키아의 병력은 이덴과 비교가 안 되요. 전하는 후방에서 지휘만 해도 되지만...설령 전투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무적의 행진을 하고 계신 전하께서 입으시는 부상이야 경미한 수준이겠죠." 루센의 말을 들으니 이제 좀 안심이 된다. 우습다. 녀석이 전쟁터에 나가도 안 죽는다는 말이 안심이 되는 걸 보니 나도 어지간히 이기적인 놈인가 보다. 왜냐면 이따가 회의가 끝나면 유현에게 출전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 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녀석이 나 때문에 죽으면 곤란하니까, 그러면 그 죄책감에 나는 또 괴로워 할 거니까. 녀석을 전쟁터로 내보내도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승호야! 윤승호!!!" 회의가 끝나고 우르르 몰려나가는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의 눈총을 받고 있던 나와 루센은 유현의 부름에 다시 한 번 시선 집중을 받게 되었다. 으악!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접근해 오면 대책 없다! 나는 루센도 놔두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좀처럼 뛰기가 쉽지 않았다. "승호야! 회의에 참석하면 한다고 미리 말하지 그랬어! 내가 좋은 자리로 줬을 텐데." 그럴까 봐 말 안 한 거다. "지겨웠지? 아~ 나도 그래.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본다. 그치?" 어제 저녁에도 봤잖아. "왜 그래, 아직도 몸이 안 좋아?" 어깨에 팔을 두르고 이리저리 집적대는 유현을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본다. "어흠."하는 헛기침을 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노려보기도 한다. 이렇게 적의에 찬 시선의 한 가운데에서 유현과 함께 있으려니 정말 죽을 맛이다. 나는 괜히 신경질을 내면서 유현의 팔을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식식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유현이 쫓아오면서 계속 추근대고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끊이질 않는다. "사람들 앞에선 그러지 말랬잖아!!" 한적한 오후였다. 회의장과 연결된 긴 복도를 꺾어져 계단을 올라가 한참을 걸었더니 아까와는 달리 인적이 드물고 햇빛이 잘 들지 않아 그늘진 암울한 복도가 나왔다. 나는 사람의 기척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화를 낼 수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 그리고 겨우 어깨동무한 것 뿐인데 뭘." 빙글빙글 웃는 모습엔 반성하는 기미가 전혀 없다. 벽에 등을 기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낮에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계절이었지만 낮게 새어 나오는 한숨에 김이 서릴 것 같이 마음이 차갑다. 유현은 뭐가 좋은지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우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요즘 몸은 어때? 헤시안이 이상한 병 같은 거 옮긴 거 아냐? 그 자식도 어째 상태가 이상하고...." 제하를 건드리면 화낼 거라고 단단히 일러 뒀으니 아마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모양으로 축 쳐져 있는 원인이 제하라고 생각하는 지 유현은 제하의 상태를 매일 의사에게 보고 받고 있다고 한다. 잠시 침묵을 지키자니 녀석이 조심조심 얼굴을 쓰다듬는다. 지난번처럼 귀찮다고 쳐버리지 않는 것에 안심했는지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양 손바닥으로 어깨 끝을 빙글빙글 문질러대고, 그대로 팔의 라인을 따라 쭈욱 쓸어 내려와 양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내 두 손을 자기 눈 앞으로 들어 올려 번갈아 가며 양 손등에 키스하면서 혀로 핥아 나를 자극시키려고 무진장 노력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쭉쭉 빨면서 녀석이 몸을 밀착시켜 온다. 등 뒤에 서늘한 벽의 감촉을 느끼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손가락에 집착하는 녀석은 아마 내 표정 같은 건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솔직히 나는 상당히 참고 있었다. 진유현이 성적욕구를 품고 접근해 올 때마다 진유현과 유디스를 따로 떼어 생각하려 노력도 해 보고 녀석의 스킨쉽을 무시하려고도 했으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스물스물 피어 오르는 바늘 같은 혐오감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무시할 수 있다면... 차라리 무뎌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아...오늘은 괜찮은 거야?" 귓가에 더운 숨을 내쉬며 녀석이 중얼거렸다. 벌건 대낮부터 발정한 녀석이 저질스럽게 보였지만 따지고 보면 얼마 전만해도 나 역시 낮이고 밤이고 녀석과 뒹굴던 저질스런 놈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 놈에게 부탁할 말이 있지 않은가. "잠깐, 할말이 있어." 허리를 끌어 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려는 녀석을 조심스럽게 밀어내었다. "...말 해봐..."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던 유현은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빨리 얘기하고 빨리 하자는 눈 같다. "이런 거 한동안은 그만 둬. 비상시기에 뭘 하는 거야?"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 나갔다. 하지만 진유현은 "별로 비상사태도 아니야." 라고 말하고 다시 손을 뻗어 온다. 이대로 녀석의 하는 짓을 다 받아주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나는 그 손을 세게 쳐 버렸다. "내 눈에는 비상사태로 보여. 그리고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네가 나라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싫어." 유현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싶더니 다시 부드럽게 풀린다. 머리를 긁적이며 개구쟁이처럼 웃더니 "뭐야,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 "창피하지 않아? 난 대신들 얼굴보기 미안해 죽겠다." 조금 효과가 있는지 유현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내 얼굴이 자못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제야 정색을 하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드루키아족이 쳐들어 온다고 해도 놈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내 군대를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설마 불안해 하는 거야?" 내가 가장 불안한 것은 너라고 말하고 싶지만 꾹 참았다. 겁낼 필요 없다고 엄청나게 다정한 표정으로 말해도...내가 원하는 건 유현의 출전이니 녀석이 전쟁터에 갈만한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야 했다. "왜...왜 네가 직접 나가지 않은 거야? 네가 나가면 승리는 보장된다며." "그럼 너랑 떨어지게 되잖아." 싱긋 웃으며 사심 없이 말하는 모습에 왠지 죄를 지은 기분이 된다. 이대로 유현에게 전쟁에 나가 달라고 말해도 녀석이 순순히 받아 들일까? 혹시 자기를 죽게 만들려 한다며 화내는 거 아냐? 아니...나는 정말로 녀석을 보내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약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결심을 다졌다. 그래, 일단은 시간이 필요해...진유현, 너랑 나랑은 좀 떨어져 있어야 된다구. 행여 네가 돌아오는 날까지 마음이 정리가 안 되더라도 지금은 일단, 네 얼굴에서 멀어지는 것이 최선이다. "나는 네가 출전했으며 좋겠어." 유현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의문으로 바뀌고 약간은 안타까운 눈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적어도 한 달은 나가 있어야 할지도 모를 텐데... 드루키아의 바보들이 그렇게 무서워?" 순식간에 겁쟁이 취급을 당한 탓인지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조금은 왕다운 일을 하란 말이야! 너 그동안 얼마나 탱자탱자 놀았냐? 이번 기회에 주변의 불온한 소문도 가시게 할 겸...아, 아무튼, 그렇게 이길 자신이 있으면 직접 이겨보란 말야!' 이 정도면 간덩이가 부었다고 볼 수 있다. 갈수록 건방져 지는 구나. 윤승호...라고 생각하면서도 쿡쿡거리며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 진짜 내 멋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뭐야...무서워 하는 것 맞네." 귀엽다는 듯이...아니 어쩌면 내가 우스운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애매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녀석은 "음...그래도 너랑 떨어지는 건 싫어." 라고 해서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 안 한지 꽤 됐잖아. 내가 얼마나 쌓였는데 출전하라고? 여기서 얼굴도 못 보게 되면 욕구불만으로 미쳐버릴 지도 몰라..." 장난기어린 얼굴은 조금 원망의 빛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미치겠는 건 나다. 녀석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전쟁터에 나갈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아, 이를 어쩐다...유일한 방법이 사라지는 것 같은 아쉬움에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유현의 손을 들어올려 살짝 쥐었다. 양 손으로 유현의 왼손을 포개고 조용히 올려다보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지금은 안 되지만..." 침을 꿀꺽 삼켰다. 부드럽게 포갠 손에 힘을 주며 똑똑히 말했다. "이기고 돌아오면 잔뜩 서비스해줄게." 녀석의 입가가 눈에 띄게 경련했다. 제기랄, 내가 말해 놓고도 민망하다. 속으로 욕하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곧 이빨이 부러질 듯이 녀석의 입이 달려들었다. 짭조름한 피맛이 나는 걸 보니 입술이 터진 것 같다. 유현에게 잡힌 뒤통수의 머리카락도 뽑힐 듯이 아팠고 허리를 끌어 안은 녀석의 팔에 유달리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빨과 이빨이 따그닥 거리는 소리가 혓바닥이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용한 실내를 음습하게 메웠다. 내 침을 전부 빨아 삼킬 듯 입술째로 쭉쭉 빨던 유현은 자신의 팔과 다리로 내 몸을 휘감아 나에게 밀착시키고 정신없이 몸을 부벼댔다. 가슴도, 배도, 가랑이 사이도...몸이 맞닿은 모든 부분에 흥분을 느끼며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그만 그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 나중이라고!" 있는 힘껏 밀어내었지만 유현 역시 만만치 않은 힘으로 더욱 세게 끌어 안으려 한다. 젠장, 표정이 아예 맛이 갔다. 반쯤 벌린 입에선 더운 한숨이 흘러 나오고 눈은 붉게 물들어 물기가 어려 있다. 입가가 부르트고 피가 맺힌 걸 보니 입술이 터진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여차하면 발로 찰 기세로 몸부림을 쳤더니 그제야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나를 끌어 안은 팔이 덜덜 떨리고 있는 걸 보면 오늘은 녀석이 안 보이는 곳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야겠다. "그, 그 말, 무르기 없기다? 내가 돌아와서 다, 다른 소리 하면 안 돼? 서비스...확실하게 받을 거야. 그동안 못한 것까지 이자 쳐서 곱빼기로 받을 거라구. 각오해 응?"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흥분했나 보다. 그나 저나 곤란하게 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이거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을 해야... "하아..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있자. 조금만...나 지금 주체가 안되니까 조금만..." 다시 끌어 안으려는 유현을 느끼고 흠칫-몸을 굳혔지만 너무도 따뜻하고 안쓰러운 포옹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강하게 몸을 죄는 녀석 탓에 갈비뼈가 아팠지만 그 보다는 귓가에 나직이 내 이름을 연이어 부르는 녀석 때문에 머리가 더 아팠다. "승호야..승호야...아아....윤승호..." 나는 뜨거운 체온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서늘함을 느끼며 멍하니 있었다. 진유현은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회의의 결과와는 달리 느닷없이 출전을 명한 왕 때문에 대신들은 물론, 에드바라하와 기타 궁정에 있는 수 많은 귀족들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일부는 그 버릇 어디 가냐고 하며 왕의 호전적인 성격을 비웃었고, 일부는 드디어 왕이 정신차렸다며 기뻐 했으며, 아주 소수는 왕이 출전을 결심하면서 또 다시 미뤄진 에드바라하의 의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였다. 벌써 몇 번째 지연된 것인지 모른다. 한 여름에 했던 약속이 가을인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일손이 모자라다고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맺지도 않은 에드바라하를 잔뜩 부려먹고 있으니 사람들은 우리에게 동정을 표하기도 했고 일부는 고소해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의외네. 그 왕이...절대 안 간다고 버텼다며 갑자기 왜 맘을 바꿨대?" 민태가 과자를 와삭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에 출전한 거라고는 에드바라하한테 미안해서라도 절대 말 못한다! 하지만 눈치 빠른 루센은 이미 알고 있는지 쿡쿡 웃으며 내 앞에 따뜻한 우유를 내놓았다. 이른 아침이라 쌀쌀함을 느꼈던 나는 유리컵을 두 손으로 모아 쥐며 슬그머니 루센의 눈치를 살폈다. "글쎄요. 뭔가 계기가 있었겠지요?"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그 얼굴에 원망의 빛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미안해지는 마음이 든다. 영문을 모르는 민태만이 우유를 들이키며 "앗, 뜨거!" 하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창 밖으로 차가운 아침 공기가 들어 오고 있었다. 루센은 조금 춥다고 느꼈는지 유리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루센의 방은 내 방보다는 작았지만 깔끔했고 책상 주변에는 문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승호는 요즘 잠을 못 자나요? 눈이 빨갛고 많이 피곤해 보여요." 루센이 상냥하게 말을 걸며 이마에 열이 없나 확인해 보기 위해 손을 대어 본다. 크고 길지만 마디가 억센 손은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조금...불면증인가 봐요..." 불면증이라기보다 나 스스로 잠드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느꼈던 드루키아 전사들의 살기도 무서웠지만 사람들의 원망이 너무나도 아팠기 때문이다. 내가 무턱대고 옥새를 찍은 문서만 수백 통. 그 안에 모일락 영지와 같이 잘못 허가한 문서가 또 없으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넓은 대륙의 어딘가에서 병사들의 살기보다 더 무서운 원망과 저주를 내뿜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 진다. 하지만 내 잘못이니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서 도와줘야 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내 능력을 십분 이용하면 좀 더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건방진 생각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무서웠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절규의 외침을 듣는 것은 악몽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무사히 잠에서 깨었다는 안도와 함께 눈을 뜨자마자 루센의 거처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아디움도 이번에 왕이랑 같이 출전한다며?" 민태가 기분 나쁜 녀석을 떠올렸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루센에게 말했다. "아디움공은 전하의 훌륭한 오른팔이니까요. 어지간한 전쟁터는 두 분이 같이 누비고 다녔잖아요. 이번 출전도 새삼스러울 거 없겠죠." 오세준이 전투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좀 의외였다. 완전 폼으로 왕족을 해 먹는 다고 생각했던 오세준이 보기보단 인맥이 넓고 왕실 정예부대와 비견 될 정도의 사병집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굉장히 놀랬었다. 그래서 귀보르냑성이 함락 되었을 때도 그렇게 여유였던 걸까. 그렇다는 것은 강지원, 김경철등 다른 놈들도 전투에 참여하는 거겠지? 뭐 전쟁이라면 경험 많은 놈들이니 별 일이야 없을 테고 사실 박재석 같은 녀석은 조금 고생했으면 하는 마음도 들어서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치 못했던 부분에서 1학년 1반 아이들이 이 전쟁에 엉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아디움 그 자식이 전쟁터에 가는 건 이해 되는데 헤시안이란 사람은 왜 간대? 그것 때문에 원로회에서 말이 많았다면서? 재무관이 전쟁에 참여해서 뭐 하려고? 게다가 요즘 무슨 이상한 병에 걸려서 정신도 오락가락한다며." "잠깐, 라노 뭐라고? 제하...아니. 헤시안이 전쟁에 나가?" 생각할 여지도 없이 민태의 말을 잘랐다. 제하는 자택에서 근신중인 탓에 요즘은 영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자식은 또 나간다는 거야? "헤에? 너 그 사람이랑 친하냐?" "그러게요. 저도 승호가 헤시안님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 걸요." 루센과 민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하에 대해선 루센에게 얘기를 안 했다. 해봤자 좋은 얘기가 아니니까. "어...그게...유디스랑 같이 있다 보니 어쩌다 아는 사이가 됐는데...." 우물쭈물 대는 나를 보며 루센이 눈을 가늘게 뜬다. 하지만 "전하와 함께 있었으면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군요."하고 약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그보다 루센, 헤시안이 전쟁에 나간다니 무슨 말이에요?" 루센의 설명에 의하면 제하가 막무가내로 유현을 따라간다고 우겨서 결국 허가를 받았다는 거다. 헤시안이란 인물은 군사적으로도 소질이 있었는지 가끔 전쟁터에서 지략을 발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헤시안, 그러니까 제하는 깡통인 상태나 마찬가지다. 전략은 커녕 적군에 인질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녀석이 하는 일이니 믿을 만 하겠지만 제하는 조금 무모한 부분이 있었다. 지도에도 없는 퀘도의 국경선 너머를 열흘간이나 돌아다니기도 하고 나를 찾는다고 무턱대고 대륙의 끝으로 말을 달린 놈이다. 아무리 통찰자라고 해도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니까 녀석이 오판을 내릴 수도 있는 거다. 아무래도 직접 녀석을 만나러 가야 겠다. 제하가 머물고 있는 바르테스가의 시종들은 나를 노골적으로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소문의 그 에드바라하의 도련님이란 게 꽤나 신기했나 보다. 게다가 여기는 바르테스가의 영역이니 이곳에서 십 수년을 봉사해온 하인들의 분위기는 궁전과는 달랐다. 바르테스가라면 유현과 제하가 속한 가문으로 그 권력은 이덴에서 최고라고 루센이 열을 올리면서 설명해 주던 것이 아련히 기억이 난다. 권력은 최고인데 혈육이 많지 않은 점이 유일하게 걱정거리라고...... 머릿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안내하는 노인을 따라 걷자니 어느새 제하의 방에 다다랐다. 그리고 방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제하와 오세준이 같이 있는 걸 보고 좀 놀랬다. "어라? 의외의 손님이군." 오세준이 눈을 크게 뜨더니 휘이~하고 휘파람을 분다. 은근히 반가워 하는 거 같다고 느낀 건 내 착각인가? 오세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나는 문을 닫으며 제하가 권해준 의자에 가 앉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이미 차는 식었고 과자도 바닥이 난 상태였다. "간식거리 좀 더 가져오라고 시킬까?" 라고 묻는 제하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오세준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에 부담을 느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도 출전한다는 소식 들었어. 대체 왜 그런 거야?" 오세준이 옆에서 "응? 나?" 하면서 장난을 친다. 자신에게 묻는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 괜히 참견한다. 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오세준을 바라보자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마, 장난이야 장난." 하고 손사래를 친다. "너한테까지 얘기가 간 거야? ...그 늙은이들 아예 광고를 하지. 일개 재무관이 전쟁터에 나가는 게 뭐 대수라고..." "헤시안이라면 일개 재무관이 아니지. 요즘은 상태가 안 좋지만 그동안 네가 해치운 일들만 따져도 장관자리는 벌써 해 먹고도 남았어. 네가 없어지면 대성통곡할 늙은이들이 이 궁전에 널리고 널렸다." 옆에서 오세준이 맞받아 친다. 이번에는 나도 오세준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네가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뭐 있어? 혹시 또 뭔가...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거야?" 조심스럽게 오세준의 눈치를 보며 얘길 하니 제하가 피식하고 웃으며 "그렇잖아도 아디움과 그 얘기 중이었다." 라고 말한다. 오세준은 내 말의 뜻이 정확히 파악이 안 되는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제하는 알아 들은 것 같으니 오세준이 이해를 하든 말든 상관없다. "오해 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 일은 나 혼자 무언가를 알고 하는 행동이 아니야. 그냥 나는 유혀...유디스를 혼자 보내기가 걱정되는 거야. 알잖아. 녀석이랑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내와서 그 녀석은 내가 보살펴야 된다는 묘한 심리가 있거든." "이봐, 이봐, 유디스는 혼자가 아니라고. 나도 출전한다는 걸 잊은 거냐?" 불만스럽게 오세준이 말했지만 제하는 말없이 웃고 만다. 헤시안과 아디움은 별로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를 주고 받는 걸 보면 완전히 서로를 무시하는 것만은 아니었나 보다. 헤시안이란 인물과 아디움이라는 인물 사이에는 유디스가 있어 묘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마치 현실에서의 김제하와 오세준의 관계 같다.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그럼, 너 지난 번에 여행갈 땐 유디스를 놔두고 어떻게 간 거야? 유디스가 뜯어 말렸는데도 말을 타고 무작정 달렸다며." "그때랑은 다르지. 그때 유디스는 안전한 궁전에 있었고 나는.... ...나는 굉장히 급했거든." 제하가 턱을 긁적이며 쓴 웃음을 짓는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오세준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뭐가 급했는데?" 하고 묻는다. "알잖아. 윤승호를 찾는 것." 오세준이 "아항~" 하고 콧바람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무모한 여행은 제하의 폭주였다고나 할까. 결국 나는 못 찾고 엉뚱한 1학년 1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유디스와 아디움, 그러니까 자신들이 진유현과 오세준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두 사람에게 우리는 일종의 정신병자였다. 녀석들은 우리 둘이 이미 아는 사이라고 단정 짓고 어딘가에서 이상한 병을 얻어와 서로가 서로를 찾는 거라고...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소리는 믿지 않았다. 뭐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하며 포기한 일이다. "장담하는데 이 전쟁은 이겨. 그러니까 궁전에서 유디스를 기다리는 게 여러 사람 걱정시키지 않는 일이라구. 그걸 알면서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아무리 우리가 우세하다지만 거기는 전쟁터야. 아직 기억도 돌아오지 않은 네가 가봐야 쓸모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오세준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제하의 아픈 부분을 꼬집었다. 제하는 "아까부터 넌 그 말만 하네."하고 웃으며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뭐라고 말해도 내 생각은 변함없어. 유디스도 허락했는 걸." 오세준과 내가 동시에 "뭐?!"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제하를 바라봤다. 씁쓸하게 미소 짓는 제하의 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얼굴빛이 더 어두워 보였다. "나 요즘 그 녀석한테 미움 받고 있다. 따라오든 말든 맘대로 하라더라." 목소리에 서운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 탓이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채고 "이 자식을!" 하고 말하며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만둬 윤승호. 네가 나서면 나는 더 기분이 나빠." 상황이 갑자기 민망해졌다. 오세준도 눈치라면 만만찮은 놈이라 제하의 말을 이해하고 혀를 찼다. 나를 흘끔 바라보는 그 동작 하나에도 부담스러워져 점점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진짜, 진짜 괜찮은 거야? 꼭 가야 돼?" 바보 같은 말만 되풀이 하며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제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그냥, 내가 가야 된다는 느낌이 들어."라고 근거 없는 말을 너무도 확실하게 말했다. 느낌에 의존하는 제하의 말에 오세준이 답답한지 한숨을 쉰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제하를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 왜 이렇게 애가 탈까. 공기 중에 거북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제하가 살짝 미소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디움, 네가 내 걱정을 해주다니 놀라운 걸." "중간에 힘들다며 재무관이 징징 짜면 곤란하거든."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이 완전히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제하의 마음은 돌려 놓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묘한 시간이었다. 오세준과 나와 김제하가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하다니 굉장히 언밸런스한 장면이다. 오세준 같은 놈은 전쟁터에 나가서 화살 한 대 맞아야 된다고 무의식 중에 생각하던 내가 갑자기 녀석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하다. 아직도 녀석에 대한 앙금이 마음 깊숙이 쌓여 있는데 조금 몇 마디 했다고 '그래도 화살은 너무했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조금 얼떨떨하다. 함성과 환호가 공기를 가득채우고 있었다. 전투 준비는 빠르고 거창하게 진행되어 병사들은 출전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온 성안의 귀중 인사들은 처음엔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전투하러 간다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막상 이렇게 출전 날이 다가오니 승리를 기원하며 꽃을 뿌리고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역대 왕들의 역사상 이렇게 많은 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전쟁터에 나가는 왕은 없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대관식 때나 각지에서 귀족들이 모이지 전투하러 나서는 왕을 마중하러 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일정이 어긋난 탓에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유래없이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출전하는 왕의 모습은 더욱 빛날 거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더구나 이것은 승리가 확실한 전투이다. 좀 더 생각이 앞서 나가는 사람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에드바라하를 정식으로 맞아 들이고 나면 이덴을 제국으로 선포하고 왕이 황제로 등극하는 거 아니냐며 흥분하고 있었다. 유디스...유현의 황제설은 아주 예전부터도 있어왔던 얘기였다. 이제껏 정복한 국가와 부족들의 영토만 합쳐도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 거대하다며 사람들은 자긍심에 빠져 있었다. 물론 퀘도와 부디칸처럼 영토의 경계가 모호한 나라는 제외하고 말이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는 루센과 민태에게 전해 들었지만 흥분으로 술렁대는 성안을 거닐다 보면 여러 가지 정보가 귓속에 들어온다. 그 중에는 나에 대한 얘기도 있어서 금방 기분이 다운되어 버리지만. 그렇게 궁성은 전운으로 인한 긴장과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들떠 있었다. 성 안 곳곳에 꽃잎이 뿌려졌고 행진가가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대기 하고 있는 병사들의 갑옷이 햇빛에 번쩍거린다. 인적이 드문 4층의 테라스 위에서 병사들의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 보며 왠지 실감이 나지 않고 있던 차였다. "윤승호!! 여기 있었구나!" 저만치에서 유현이 달려왔다. 아마도 테라스에서 목을 빼고 구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이다. 지난번에 봤던 넌센스의 황금갑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그걸 입고 뛴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거추장스러워 보였으나 녀석은 절그럭거리며 잘도 달리고 있었다. 요 며칠간 급하게 전투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얼굴을 못 봤다. 나에게는 황금 같은 휴식의 시간이었지만 녀석에겐 그다지 유쾌한 시간이 아니었을 거다. 얼굴에 한 가득 반가움의 빛을 표시하는 녀석에게 마지못해 웃어줬다. "금방...금방 다녀올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줘." 내 손을 부여잡으며 바라보는 유현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무언가 아쉬워 하는 표정으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이 마음은 진짜였다. 전쟁터로 밀어 넣은 것도 찝찝한데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그리고 나는 유현이와 떨어져 있고 싶은 거지 녀석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죽으면 죄책감이 남는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유디스란 인물에, 진유현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심해라. "저기..." 내 손을 부여잡고 조물락거리던 유현이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열에 들뜬 눈으로 작게 속삭였다. "승리를 기원하는 축복의 키스...해줘." 전쟁터에 나가는 놈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적선하는 마음으로 녀석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해 주었다. 잔뜩 기대하던 표정이 약간 허물어 진다. 하지만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행여나 지워질까 봐 황급히 손을 내리는 모습이 자꾸 내 마음을 약하게 한다. 씁쓸하게 웃으며 잘 갔다오라고 다시 말하는데 녀석이 팔을 잡아 당겼다. 입술이 터질 걸 각오했지만 굉장히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촉-하고 가볍게 뽀뽀하다가 말캉한 입술을 건드리며 혓바닥이 들어왔다. 끈적하고 미지근한 혓바닥이 다정하게 입안을 두드리고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어 우물우물거린다. 나는 눈을 감지 않고 녀석의 속눈썹이 드리워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어딘가 애틋하게 느껴져서 뿌리치지 못하고 묵묵히 있었다. 유현은 이제 한동안 나를 못 만나는 것이 어지간히도 아쉬웠는지 부드러운 키스임에도 입 안이 얼얼해질 정도로 오래 부벼댔다. 입을 떼었을 때 열정으로 흐릿해진 눈이 가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번쩍 뜨고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꼭 잡은 손이 떨어지는 걸 아쉬워 하며 유현이 점점 뒤로 물러났다. 뒷걸음질 치면서 지겹게도 손을 안 놓는다. 결국 녀석과 내 팔의 길이가 다해 떨어지고 나서야 유현은 뒤를 돌아 자신을 기다리는 병사들을 향해 갔다. 녀석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다. 절그럭거리는 녀석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서비스 기대할게!!" 큰 소리로 외친 후 복도 끝에서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유현을 보며 쓰게 웃었다. 테라스에선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늘어선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수많은 아가씨와 아저씨들, 노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군대는 떠나고 있었다. 규모가 꽤 커서 그 많은 병사들이 이동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들의 꽃다발을 하나하나 받으며 여유를 부리는 탓에 더욱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검은 갑옷의 군대는 다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역시나 저 센스 없는 황금갑옷은 눈에 잘 띈다. 적군의 표적이 되기 딱 좋다니까. 문득 유현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리고 테라스에 나와 난간에 양 팔을 기대고 구경하는 나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도 살짝 손을 흔들어 전송을 해주었고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걸 알면서도 활짝 웃었다. 유현이 떠난다. 덤으로 오세준도 제하도 유현과 같은 길을 떠나고 있었다. 이유 모를 쓸쓸함을 느끼고 테라스에 기대어 있던 나는 내가 유현의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멋쩍게 손을 내리고 꽃잎이 뿌려지는 길을 행진하는 군대의 뒷꽁무니를 지겨운 줄도 모르고 계속 바라보았다. 무운을 기원하는 씩씩한 나팔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그 많은 병력이 출동했는데도 성 내부는 북적북적했다. 사실 경비대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성을 보호할 만한 기본적인 병력까지 전투에 참가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성안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아무리 가을바람에 낙엽이 날리고 있다해도 썰렁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왕성에 들어와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루센의 심부름으로 여기저기 퍼져 있는 민태, 형석이, 진영이에게 무슨 쪽지 같은 걸 전해주기도 하고 병사들의 교대시간을 체크하기도 했다. 어느날은 왕성을 거닐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루센의 메세지가 담긴 밀랍으로 봉해진 작은 편지를 민태에게 전해주러 가던 도중이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 보았지만 낙엽이 하나 둘 흩날리는 길에는 순찰을 도는 병사들과 저들끼리 떠들며 지나가는 귀족들이 몇몇 눈에 뛸 뿐이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가운데 오싹오싹하는 살기가 온몸을 지배했다. 지나가는 귀족들이 길 한 가운데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수근거리며 지나갔지만 내가 느끼는 감각은 저들의 것이 아니었다. 먼...좀 더 먼... 저기 보이는 산자락 너머에서 흘러오는 엄청난 사람들의 기운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맙소사 나는 지금 깨어 있는데.... 잠도 들지 않았는데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강한 살기라니! 날이 갈수록 증폭되는 능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워진다. 아무 쓸모도 없으면서. 이런 능력 있어봤자 고통스러울 뿐인데... 이따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롱한 가운데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언뜻 들리기도 하고 당당히 행군하는 발걸음과 말발굽 소리가 고막을 뒤흔드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이것을 꿈으로 봐야 할지 내 의식이 직접 겪은 일로 봐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유현의 출전이 꽤나 마음에 걸린 것 같다. 녀석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드루키아가 이덴의 국경을 넘었으니 역시 전장은 이덴이 되는 거겠지? 아무리 승리가 확실한 전투래도, 전쟁이라기 보다 진압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이 말해도 전쟁은 전쟁. 내가 유현의 등을 떠밀지 않아도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그 지역의 주민들이다. 만약에 여기서 의식이 멋대로 날아간다면 나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전신으로 뒤집어 써야 될 거다. 피해 받는 일반 농민들의 절규에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오싹해져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이 성에 없어도 성안의 일들은 잘만 돌아 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 뿐이었을까? 흐드러지게 핀 가을 꽃 사이의 작은 길을 걸으며 루센에게 가던 중 멀리서 치렁치렁한 정장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수염이 휘날리게 달리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탄 것도 아니다. 저 사람들이 제 발로 뛰다니 어지간히 급한 일이었나 보다. 그렇게 머리를 긁적이며 루센에게 갔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정체불명의 군대가 바로 코앞까지 도착했다고 한다. 그 수는 적어도 만 단위가 넘는다고 노인들은 광분했다. 뒤통수를 치는 소식에 나는 유현의 군대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드루키아족이 쳐들어 온 건 줄 알고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에드바라하의 대표 자격으로 루센을 대동하고 할아버지들의 회의장을 찾았는데 회의실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그런 대규모의 군대가 바로 에버린 지역까지 왔는데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번 일을 알게 된 것도 왕성에 기거하는 시간이 길어 질 것 같다고 훼고 영주가 자택으로 편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 아니오! 대체 왕실의 전령들은 다 뭘 하고 있었소이까!! 그 군대가 지나쳐온 영지에서는 왜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도 안 해 준 거요?!!" "대체 목적이 뭐랍니까?! 깃발도 문장도 없이 그저 왕성을 향해 진군하기만 하고 있다는 군요. 급히 전령들을 보내어 상황을 조사해 보라고 했는데 전부 소식이 없습니다!" 나와 루센은 그 할아버지들과 좀 떨어진 자리에 앉아 망연히 그 소식을 듣고만 있었다. 다른 대표들, 그러니까 아오네르나 루탄의 대표들처럼 회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들 멍한 표정이었다. 할아버지들의 얘기를 대충 들어보니 유현의 군대나 드루키아와는 상관없은 제 삼의 군대 같았다. 그 사실에 불행 중 다행이라며 안도했지만 이러다가 유현이 없는 사이 왕성이 큰일나게 생겼다. "군대를 더 늘려야 합니다! 속히 근처의 영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전하께도 알려야 해요! 급한 대로 성 아래의 마을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성벽의 경비를 강화 합시다!' "지금 당장 필요한 병력을 어디서 충원한답니까! 지원군이 와도 저 수상한 군대들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는 없습니다. 활도 쏠 줄 모르는 성 아래의 농민들을 데려다가 무엇에 쓰시려고요!" 할아버지들은 기염을 토하며 대책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의 의중도 모르고 우리의 병력규모는 적과 비교했을 때 얼마 안된다. 성문을 단단히 지키고 농성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대신들은 한탄했다. 쓸모없는 고함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보이지 않는 스파크를 형성했다. 대책은 나오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무의미한 회의였다. 나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방도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루센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루센도 심각해져서는 노인들의 설전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가가운 지역에 사는 왕족과 귀족들의 사병들을 동원하자고 했으나 그 수가 미미하고 전투 경험도 없이 저택이나 지키던 경비병들에 불과했다. 그거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며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확정하고 있었다. 회의는 매일 아침 열렸다. 나도 불안한 마음에 꼬박 참석을 했는데 덕분에 얻게 되는 정보는 상당했다. 현재 성 안에 있는 각지에서 모여든 귀족들의 안전이 문제이지만 일단 소문만 퍼지면 그 귀족들을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거라는 낙관론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왕이 자리에 없다 하더라도 성안의 경비가 약화 된 것도 아니다. 아직 저들의 확실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만일 성을 함락하려 한다면 일단 성안에서 버티는 쪽이 유리한 법이다. 그러한 낙관적인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이 가장 불안해 떠는 것은 정보의 부재였다. 며칠이 지났지만 저 군대의 목적이 무언지, 병력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성에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지원군이 도착해주어야 하는데 좀처럼 다른 지역의 영주들과는 연락이 잘 되지 않고 있었다. 전령을 보내기만 하면 소식이 없거나 시체로 발견되곤 했으며 전서구를 보내도 발목에 편지를 맨 비둘기가 매의 날카로운 부리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기 일쑤였다. 이래서는 출전해 있는 유현에게 언제 연락이 갈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체불명의 군대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높은 망루에 올라가 바라보면 개미떼같이 새카만 군대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라고 한다. 경비가 강화되고 군인들의 눈이 날이 갈수록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각 가문에서 급하게 차출한 병력의 수는 얼마 안되고 그나마도 정규군이 아니어서 믿음직하지 못하다. 에드바라하의 의식을 보러 왔다가 졸지에 성안에 갇힌 귀족들은 불만을 표시하며 화를 내기도 하고 망연자실해 있기도 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성안에 살기와 노여움과 체념, 불안, 공포가 가득하다. 사람들의 감정들이 마치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내 몸을 옭아맨다. 이따금씩 느꼈던 산 너머의 살기. 그것이 저 군대였을 줄이야. 이만큼이나 되는 인간들의 절박한 감정들이 모이면 의식이 생생하게 깨어 있어도 소용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진득하게 고여 있는 음습한 감정이 내뿜는 에너지는 바늘이 되고 올가미가 되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수전증 걸린 것 마냥 손이 덜덜덜 떨리는가 하면 걷는 도중에 명치끝이 아파오기도 하고, 병사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나갈 때면 구토감이 들기도 했다. 의사를 찾아 진통에 좋다는 약초를 달여 먹어도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성 안은 전시 상태였다. 정체불명의 병사들은 바로 코 앞까지 도착해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전투준비로 바짝 긴장한 병사들 사이에 서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성 아래에서 올라오는 수 만의 병사들에게서 느껴지는 투기에 몸에 한기가 든다. 성에는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성 밖의 군대들과 작당하고 왕성을 팔아 넘기려는 가문이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기 시작하고 일부 가문들은 탈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워낙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다 보니 사이 나쁜 가문끼리는 서로 상대방이 이 기회에 자신을 해칠까 봐 식사로 나오는 음식을 일일이 시종들에게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숨이 막혔다. 이러다가 우리 스스로 자멸할 것만 같았다. 피곤한 몸을 뉘이며 오늘도 이상한 곳으로 의식이 날아가지 않기를 빌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가 오늘따라 유달리 아늑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의식이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게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걸고 깜박 잠이 들었다. 기분 나쁜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주 잠깐 잠들었을 뿐인 것 같은데 창 밖엔 벌써 달도 저만큼 기울어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잠들기 위해 몸을 약간 뒤척이는데 또 다시 인기척이 났다. 나는 이불 속에 누워 빠끔히 눈만 내놓은 채 설마...하는 마음으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 창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 안으로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고양이 같은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내게 다가 오고 있었다. 전신이 오싹하고 떨려와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반응했다. 도둑이...그런 내 반응을 눈치챘다! "누구...읍!!!" 문 밖에 지키고 있을 병사들을 부르기 위해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어떻게든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내는데 귓가에서 당황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쉿! 윤승호 나야 나, 라노!" 목소리를 잔뜩 죽이며 내 입을 틀어 막는 손은 민태였다. 나는 그제야 어둠 속에서 민태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노? 이 밤중에 어찌 된 일이야? 대체 저 창문으론 어떻게?" 민태의 차림은 왕성에서 입고 있던 귀족들의 옷이 아니었다. 예전 길드에서 입었던 것처럼 실용성 있는 옷에 활을 등에 매고 어깨엔 밧줄 같은 것을 둘둘 말아 걸치고 있었다. 허리춤엔 단도와 두어 개의 가죽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다. 우선은 저 문 밖의 경비병 모르게 여기를 빠져 나가야 해. 따라와."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충 옷을 갈아 입고 라노를 따라 창가로 가 보았다. 창가에는 밧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밧줄은 언제나 창 밖의 경치를 방해하던 높은 성벽과 이어져 있었다. "맙소사! 설마 이 밧줄을 타고 여기로 들어 온 거야?" 이정도면 거의 닌자가 아닌가! 자세히 보니 창문 옆 벽에 석궁이 단단히 박혀 있다. 그리고 그 석궁과 이어진 밧줄이 허공에 거미줄 한 가닥이 늘어진 것처럼 반대편의 성벽과 이어져 있었다. 이걸 타고 왔단 말야?! "히히히 전직 도둑길드를 무시하지 말라구." 민태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즉사다! 그러고 보니 성벽 위에는 언제나 지나다니던 보초병들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횃불도 꺼져 있다. 라노는 성벽과 이어지는 밧줄을 끊어내 버린 후 어깨에 지고 있던 밧줄을 창 아래의 숲으로 길게 내린다. 마치 어둠으로 사라지는 것 같이 밧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자, 잠깐, 이걸 타고 내려 간다구?" 순간 내가 뭘 해야 되는지 알 거 같아서 당황하며 라노를 말렸다. 그러나 라노는 "응!"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밧줄의 끝을 방안의 침대 밑동과 연결한다. "걱정 마, 걱정 마. 안 무섭다니깐." 그러면서 또 다른 밧줄로 내 허리를 묶었다. 아프지 않게 두터운 헝겊으로 여러 번 둘둘 만 부분을 내 허리와 배에 감고 반대편을 다시 침대 밑동에 묶는다. 나는 차마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내가 왜 문을 놔두고 창문으로 가야 하냐고 항변했더니 라노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눈을 빛냈다. "아직은 녀석들이 알면 곤란하단 말야. 지금 네 방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이 눈치 빠른 놈들이라 당당히 문으로 너를 데리고 나갔다가 무슨 오해를 받으려구? 가뜩이나 궁전 분위기가 수상한데 도망간다고 생각하면 낭패지. 아~아~ 아무튼 난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무, 무슨...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 가는 거야?" 나는 민태에게 등을 떠밀려 창 아래로 늘어진 밧줄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자, 자세한 건 나중에~ 일단 내려갑시다아~" 뭔지는 모르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밧줄을 잡았다. 침대 밑동에 묶인 밧줄 하나는 창 밖 저 아래로 늘어져있고 다른 하나는 내 허리에 묶여 있다. 그러니 내가 이 밧줄을 타고 내려가다가 실수로 놓치더라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릴 뿐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다. 밧줄이 조여서 배가 엄청 아프기는 하겠지만. 아니, 그런데 정말 이거 괜찮은 거야? 이거 아닌 밤중에 웬 암벽 타기냐!! 뭉기적거리며 겨우 발이 땅에 닿자 풀썩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저 위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와는 다른 밧줄을 타면서 옆에서 행여나 내가 떨어질까 주의를 기울이던 민태도 한시름 놓은 듯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면서 호흡을 골랐다. 나는 민태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왜 이런 짓을 시킨 거냐고 재촉했지만 민태는 주위만 휘휘 둘러볼 뿐 아직 설명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요즘 성안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일단 저 바깥에 정체 모를 군대가 버티고 있으니 사람들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기는 하다. 그래서 나도 지금 영문도 모른 채 민태를 따라오긴 했지만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잠잠히 시키는 데로 한 건데... ...그보다 이거 진짜 도망치는 거 같잖아? "라노, 우리 설마 도망치는 거야?" 배와 허리에 둘둘 말린 밧줄을 치우며 저 멀리를 응시하던 민태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물음에 민태가 어깨를 흠칫하는 것이 보인다. 그 동작에 확신이 생긴 나는 비록 눌러 죽인 작은 목소리였지만 말도 안된다며 화를 냈다. "정말이야? 그럼 에드바라하는 여기서 도망치는 거야? 말도 안 돼,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왕성을 지키느라 정신 없었잖아!" 내가 화를 내는 것에 놀랬는지 민태가 깜짝 놀라며 손을 내밀어 손사래를 친다. "아냐, 아냐! 도망이라기 보다...아, 젠장. 도망치는 건 너 혼자라고!" 에? 의문을 표시할 새도 없이 민태는 내 손목을 잡고 달렸다. 창 밖으로 항상 내려다 바라보던 숲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한밤중에 달려본 적은 없었는데 이곳은 생각보다 더 울창하고 더 음습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라노! 나만 도망치다니 다른 사람들은!" "곧 전투가 시작된다고! 다른 사람들이야 원래 싸움이라면 이골이 났지만 너는 다르잖아! 네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마음대로 싸울 수 없어!" 뭐야, 그러니까 전투를 대비해서 나를 데려가는 거야? 어차피 내가 전력에 보탬이 되지 않을 테니 민태의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굳이 이렇게 몰래 갈 필요가 있나? 민태는 어떻게 전투가 곧 시작되리란 걸 알고 있는 거지? "그럴 거면 문밖의 병사들한테 사정을 설명해도 됐잖아! 왜 이런 방법을..." "우리가 싸울 상대가 바로 그 병사들이라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리는 민태를 쫓아 달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이 차가워져서 땀도 나질 않았다. 호흡은 가빠오르고 등골은 오싹해진다. 숲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샛길로 빠져 달리고 있지만 지나치리만큼 주위가 조용하고 사람이 없다. "라노 혹시...저 성밖에 있는 정체불명의 군대에게..." ......투항할 생각인가? 그래서 저 군대와 손을 잡고 왕성의 병사들과 싸우는 거야? 섬뜩한 기운을 느끼며 민태의 뒤통수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정치라는 것이, 궁성이라는 곳이, 치사하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판이라지만 이건 좀 비겁하잖아! "헤헤헤...벌써 눈치 챘어? 카이녀석이 온갖 재주를 발휘해서 끌어 모은 군대야. 귀보르냑 때와는 비교도 안되지. 이렇게 있으니 옛날 생각나네 그치? 천천히 달리는 속도를 늦춰가면서 민태가 뒤에 있는 나를 향해 씨익-하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더니 작은 정원쪽으로 몸을 낮춰 달려간다. 달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초생달의 날카로운 빛이 가을밤의 차가운 바람이 되어 살을 에는 것 같다. 얼음장 같은 한기가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승호야?" 하얀 대리석의 동상 뒤에 숨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민태가 나의 상태를 깨닫고 이제야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민태의 얼굴은 차가운 달빛아래에서도 따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많이 놀랬구나. 말 안 해서 미안.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어." 차마 내 얼굴보기가 무안했던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찬바람을 맞은 채 멍하니 안절부절못하는 민태의 옆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 저 밖의 군대가 카이의 군대라고? "저기..저기...라노...나 이해가 안 되서 그러는데.... ...어...그러니까 지금..." "응. 귀보르냑 때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드루키아족을 부추겨 전쟁을 하도록 유도한 것도 우리거든. 유디스왕이 빠져나간 것은 아쉽지만 덕분에 성안의 병력이 줄어들어 다행이야. 게다가 내부에는 에드바라하로 가장한 길드원들이 잔뜩 있으니 거저 먹기지. 사실 저 군대의 절반은 자온이랑 이베라스인데.... 앗하하 뭐, 연합군이라고나 할까!" 뒷머리를 긁적이며 민태는 경쾌하게 말을 했지만 내 눈을 피하며 어색해 하는 모습이 다 드러났다. 싸늘한 가을의 밤바람을 맞으며 민태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독이라도 되는 듯 심장에 꽂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서 소음이 들린다. 엄청난 굉음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성 밖에 대기하고 있는 카이의 군대가 곧 있을 전투에 몸을 긴장하여 심장이 맥박치는 엄청난 소리였다. 조용한 가을 밤하늘 아래 쿵-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내 고막을 찢어 놓을 듯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던 민태가 "어?" 하고 이상한 표정이 된다. "승호야? 승호야!" 녀석이 내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어 보지만 몸에 감각이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내 뺨도 찰싹찰싹 때려보고 어깨를 더욱 강하게 흔들지만 이상하게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눈이 멍하게 풀린 채 초점 없이 라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쯤 벌린 입가가 바보스러웠지만 그 입을 닫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내 얼굴이 이렇게 자세히 보이는 거지? 시선이...왜 이렇게 높지? "이런, 윤승호 정신차려!!" 민태가 나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시체마냥 늘어진 채 라노의 등에 업혀 어딘가로 운반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잠도 들지 않았는데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채로 의식만이 몸에서 빠져 나와 버리고 말았다! 육체라는 보호막이 없어진 지금의 나에게 성 안과 성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들은 치명적이다. 가능한 한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저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의식이 너울너울 하늘위로 올라간다. 나를 업고 뛰는 민태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나는 곧 성안과 성밖의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병사 두 명이 하품을 하며 어두운 성 내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이은 밤샘 경비에 많이 지친 듯 얼굴은 피로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유달리 오늘따라 성 안이 어둡고 오가는 병사들의 수가 많이 줄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며칠 째야. 저 놈들 밥은 다 누가 먹여주나." 성 밖에 대치중인 카이의 군대를 떠올렸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턱수염이 덥수룩한 병사가 투덜대었다. 옆에서 따라오던 콧수염의 병사는 아직도 졸린 지 눈이 게슴츠레하다. 그들은 절그럭 거리는 갑옷의 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위치로 걸어갔다. 그러나 점차 목적지에 가까워 질수록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던 그들의 눈이 크게 벌어지고 얼굴에 못마땅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이들! 이 상황에 잠이 와?!!" 콧수염과 턱수염의 두 병사는 자신과 교대 해줘야 할 병사 둘이 서로 등을 기대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더구나 이 부근에서 순찰하고 있어야 할 다른 병사들도 보이지 않는다. 정문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성과 외부를 차단하는 중요한 입구였는데 이렇게 무방비로 놓여져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콧수염과 턱수염은 동료의 직무태만에 화를 내며 잠들어 있는 동료를 발로 차, "이봐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서로 등을 기대던 병사들이 스륵 하고 힘없이 옆으로 기울어졌을 때 그들의 목이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콧수염의 목이 우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꺾였다. 동시에 턱수염의 목도 누군가의 억센 팔뚝에 의해 조여졌다. "으허헉"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목구멍에서 내지르던 턱수염은 곧 눈이 뒤집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숨을 멈추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산만한 덩치의 남자들이 번뜩이는 안광을 빛내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곤 시체를 나무 뒤로 숨겼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남자는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더니 "시간이 다 됐군" 하고 중얼거린다. 그 덩치의 남자는 테이그였다. -고오오오오옹 -고오오오오옹 공기가 공명하는 음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웠다. 웅장하고 깊은 소리를 내는 뿔피리의 소리는 잠든 대지를 깨우며 차가운 밤하늘 아래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성 내의 공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이따금 들려오는 고함소리를 따라 횃불이 하나 둘 켜지더니 이내 고함이 커다란 괴성으로 발전하고 병사들은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여기 횃불! 누가 꺼트린 거야!! 병사들 다 어디 갔어!!" "북을 울려라! 전투개시다!" "궁수부대 앞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둥둥둥둥둥둥 -고오오오오옹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한데 섞이어 흥분과 긴장으로 가득찬 공기가 파열될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안고 있었다. 궁의 병사들은 한밤중의 전투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착착 대열을 이루어 갔지만 그 대열의 여러 요소요소에 구멍이 나서 평소만큼 일사분란 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성 안의 어두컴컴한 한 모퉁이에는 전투개시를 알리는 병사들의 고함과 북소리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주검들이 목줄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직 그들의 몸은 따뜻했으며 쏟아지는 피에선 더운 김이 피어 올랐다. 수십 구의 시체들 사이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일렁이며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그림자는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몸을 풀더니 손에 묻은 단도의 피를 털어낸다. 싸늘한 달빛을 받아 확인해 본 그림자의 얼굴은 루센과 아주 많이 닮았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고 어두운 계열의 실용적인 길드의 복장을 한 루센은 평소의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운 채 하늘의 달처럼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북문이 개방되었습니다." "서문도 개방되었지만 뒤늦게 알아챈 병사들이 현재 길드원들과 대치중입니다." "동문은 병사들의 저항으로 실패입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의 사람들이 나직하고 빠르게 루센에게 보고를 했다.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 할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알았다. 이제 이런 식으로 내부를 혼란시키는 것은 한계야. 정면승부로 가자." 루센은 하늘 한번 보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검은 옷의 사람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고오오오오옹 -둥둥둥둥둥둥 성 내부에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정문과 성벽을 수비하는 데에 배치되었지만 외진 곳, 샛길, 건물 뒤편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자객들에 의해 말을 타고 가는 지휘관이 공격 당하는가 하면 적게는 수 명, 많게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길드원에 의해 살해되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이 죽어나갈 때마다 움찔거렸지만 워낙 어둡고 지금 이 장면이 현실 같지 않아서 오히려 마음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왠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영화나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고오오오오옹 "와아아아아아아아!!!!!!" 문득 거대한 함성이 성 아래의 병사들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시선을 돌려 성밖으로 빠져나가 보았다. 발끝부터 저릿저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이 함성소리를 따라 올라왔다. 발끝을 거쳐 종아리, 허리, 가슴과 머리끝까지 쭈뼛쭈뼛하게 곤두서서는 온몸이 쥐가 난 것처럼 저렸다. 벌레가 기어가는 참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살기가 내 심장을 압박해 답답하게 죄여왔고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병사들이 일제히 창과 검과 방패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목청을 높였다. 투기가 하늘을 찌르고 대지를 진동 시켰다. 질서있게 대열을 이룬 병사들의 갑옷은 밤의 어두움 속에서도 횃불 아래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가 잘 벼려진 칼날같이 섬뜩했다. 군대의 가장 앞에는 유달리 튀어나와 있는 한 병사가 우러러보듯 성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밤의 어둠에 동화될 것 같이 새카만 말을 타고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는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카이...아니, 한도훈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고 투구 아래 눈을 빛내는 모습이 낯설다. 언제나 침착하고 차분하던 녀석이 묘한 긴장감과 투쟁심으로 들떠 있었다. 병사를 이끌고 있는 녀석의 어깨가 몇 톤이나 되는 바위덩이처럼 느껴졌다. 등 뒤에 새카맣게 늘어서 있는 수만에 달하는 목숨의 무게였다. 왠지 모르게 오싹하는 한기를 느끼고 있었는데 한도훈의 뒤로 펼쳐진 병사들의 물결 사이로 길다란 깃발이 비죽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아무런 표시도, 문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병사들이 수천 개의 깃발을 세우며 무언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황금독수리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에드바라하?" 성 위에서 바짝 긴장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전투경험이 많고 나이 지긋한 병사들이라면 그 문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많지 않아도 교육을 잘 받은 도련님이나 귀족가의 영양들이라면 한번 정도는 눈에 익히고 지나갔을 법한 그 문장이었다. 이것은 루센에게 들은 이 나라의 상식이었다. "에드바라하에 영광이 있으라--!!!!!" 군대가 뿜어내는 강한 에너지가 성을 덮쳤다. 살기등등한 그들의 모습과 예상치 못한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성 안은 혼란에 휩싸여 패닉 상태였다. "이런 망할! 에드바라하가 배신했다!!!" "윤승호! 그 자식을 잡아와! 루센이라는 작자도 끌고 와라!" "북문과 서문이 개방되었습니다! 서문쪽에서 우리 병사들 부상자 다수! 지금 산을 타고 넘어온 또 다른 병력들이 개방 된 문 앞에서 전투중입니다!" "가르빌 장군님은 어디 계신가! 왜 아직도 소식이 없으신 거냐!!" 사방 곳곳에서 당황에 찬 음성이 노기를 띠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성 전체가 들썩들썩하며 한쪽에선 귀족들이 벌벌 떨고 있었다. 밖의 군대가 에드바라하라는 것이 삽시간에 퍼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일부는 분노하며 입에 주워담기 힘든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의 욕설을 다 귀담아 듣는 것엔 한계가 있었지만 별로 자세히 듣고 싶지도 않았다. 성 밖에서는 지치지도 않은지 끝없는 위협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에드바라하 일당들, 이미 자취를 감췄습니다! 윤승호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속았어요! 우리들은 완전히 속은 겁니다!!" 한 병사의 절규가 유달리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 알 것 같다. 에드바라하는 처음부터 충성할 생각이 없었어. 루센과 민태가 했던 일련의 작업들은 성을 좀 더 쉽게 함락하기 위한 눈가림이었던 거다. 그 용맹하다는 유디스의 군대가, 유현의 병사들이, 맥없이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올라오는 씁쓸함을 느끼며 작게 조소했다. 왕성의 병사들이 좀 더 선전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곧 제국이 될 거라고 들떠 있었던 자만심 가득한 성이었던 만큼, 그 거만함에 걸맞게 멋지게 싸울 줄 알았다. 그들의 자긍심에 어울리는 전투를 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에드바라하가 고전하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도 했다. 하지만 왕성의 군대는 카이의 군대와 정면으로 부딪히기도 전에 내부에서 일어나는 산발적인 전투로 애를 먹고 있었다. 산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규모의 병력들이 성의 북쪽과 서쪽을 치고 들어왔다. 안에선 이미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말들이 정원을 짓밟고 병사들의 피가 분수대에 뿌려진다. 성의 내부까지 말들이 치고 올라와 곱게 깔린 복도의 양탄자에 진흙의 말발굽이 찍혔다. 그 모든 장면들을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응시했다. 사람이 죽는 장면을 보면 분명 죽어가는 사람과 싱크로해서 나 역시 끔찍한 고통을 느낄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있었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쏟아지는 처절한 절규의 외침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감각은 마비가 되어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전군! 진격한다-!!!" 문득 파도가 출렁이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한도훈의 목소리가 평소의 차분함과는 달리 흥분에 고양되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우렁찬 음성과는 반대로 그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한도훈의 명령은 병사들의 사기를 돋구어 엄청난 함성을 유도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잠잠했던 수 만에 달하는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물결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진유현의 왕성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맞부딪히고 있었다. 모닥불이 어둠 속에서 하늘하늘 타오른다. 초원을 가득 매운 야전 사령부의 병사들은 장작불로 어둠을 밝히며 각자의 막사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수 천이 넘는 천막에는 각자의 말이 매어져 있고 짐과 무기들도 잘 정비되어 사용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에는 보급품이 잔뜩 쌓여 있고 아직 잠이 들지 않은 병사는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전투를 위해 자신의 무기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크고 튼튼한 천막 안에서는 밤이 새도록 회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무언가 낌새가 이상합니다. 놈들의 코빼기도 볼 수 없다니 함정임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하지만 드루키아 전사들은 함정이나 기습공격 같은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단순 무식한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전면승부. 그것만이 전사의 명예를 드높인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러니 함정이라는 판단은 조금 섣부른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니요, 아니요, 이대로 계속 진군하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한번이라도 싸워 봤습니까? 시간이 이렇게 흐르기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 뭔가 있는 겁니다." 완전무장 상태의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탁자 한 가운데에 지도를 펴고 서로 머리를 맞댄 채 근심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턱을 괴고 있던 유현은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디스, 넌 어떻게 생각해?" 공식 석상이 아닌 탓에 아디움, 아니 오세준이 평소의 말투대로 유현에게 물었다. 오세준도 중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빨리 끝내고 가야 되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 보다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태도에 오세준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난 하루 빨리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이제까지 장거리 원정도 몇 번 있었지만 이번처럼 왕성과 연락이 두절 된 적은 없었어. 유난히 정보가 차단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도 처음이야. 기분이 나쁘다. 오늘 밤이라도 당장 되돌아가자." 오세준이 진지하게 말하며 유현의 의중을 살폈다. 그러나 오세준의 얘기를 듣고 "철수는 안 돼."라고 고개를 저은 유현은 눈을 빛내며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드루키아가 우리에게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이 틀림없어. 쫓아가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밟아주고 당당하게 돌아가는 거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잔혹한 빛을 띠고 있었다. 주위의 할아버지들과 아저씨들은 웅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오세준만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며 유현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곧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씨이...서비스 해준댔단 말야..." 혼자 중얼거리는 유현의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쪽 하늘에 밝아오는 찬란한 여명의 빛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세상을 반으로 가르는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간밤의 참상을 비추며 대지를 더욱 밝게 빛으로 채워나갔다. 성은 어이없이 함락되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을 퍼부으며 저항해봤지만 이미 내부로 들어오는 입구가 돌파된 마당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성 뒤에선 산을 타고 넘어오는 에드바라하의 소수부대에 의해 성 안은 이미 전쟁터로 변했고 정문이 열린 것도 금방이었다. 모든 상황을 장기판의 말들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보고 있던 나는 굉장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신마취를 당하기라도 했는지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그저 보고 듣기만 했다. 터질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도 어느새 그 존재감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반응이 없다. 왕성에 에드바라하의 깃발이 걸리었다. 아침의 태양을 받아 빛나는 황금독수리의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피에 젖어 있었다. "앗! 환자가 정신을 차렸어요!!" "오! 맙소사, 정말 살아났단 말야? 라노대장을 불러 빨리!" "의사는 어딜 간 거야!! 장작불 좀 더 때고 물도 가져와!!!"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 너머로 낯선 사람들이 당황하며 허둥대는 것이 보였다. 눈을 뜨고서도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어디지....? "뭐? 깨어났다고!!! 말도 안 돼 아까 분명 심장이 멈췄었단 말야!!!" "이 돌팔이 의사 같으니라구! 멀쩡한 애를 왜 맘대로 죽여?! 봐, 눈을 떴잖아!" 날카로운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나이든 할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굵고 탁한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한데 엉켜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처음 보는 아저씨가 번개같은 속도로 달려와 부축해 준다. "이것 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잖아! 나 이제 할아버지한테 진찰 안 받을 거야!" "거 이상하네. 분명 맥이 멈췄었는데..." 허연 수염을 꽤나 멋드러지게 기른 할아버지가 나보다 두어 살 많아 보이는 아가씨한테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부축해준 아저씨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시며 여기가 어딘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꼬마야 괜찮니? 후아~ 라노대장이 너 업고 들이닥쳐서는 반드시 살려 내라고 난리였는데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아저씨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디 불편한덴 없고? 평소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니?"라며 신경을 써주는데 나로선 이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도통 모르겠다. 라노한테 대장이라고 하는 거 보면 역시 길드 사람인가? "라노는요?" 내가 조그만 목소리로 입을 여니 주위에서 왁자하게 떠들던 아가씨도 할아버지도 아저씨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본다. "오오 말했다. 말했어." "아아 십년 감수했네. 라노한테 죽는 줄 알았다구."라고 저마다 떠들어서 정신 없었다. "라노대장은 간밤의 일로 엄청 바쁘단다." 옆의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음, 음."하고 뭔가 감격스러운 듯 말을 삼켰다. "맞다, 너 그동안 기절해 있어서 몰랐지? 으하하 듣고 놀라지 마라. 무려, 무려! 에드바라하가 왕성을 점령했다는 거 아니냐, 우하하하하하!!!" 난로 옆에서 장작을 집어넣던 아저씨...아니, 아저씨로 보기엔 좀 젊어 보인다. 그러니까 주근깨 많은 그 청년이 호들갑을 떨며 박장대소를 했다. 옆에 있던 다른 붉은 머리의 아저씨가 "그렇지! 이제 왕성은 우리 거야 으하하하! 라노길드가 성까지 훔쳤다고 세상에 소문이 자자할 걸?!" 라고 맞장구 치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간밤의 일이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 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입맛이 쓰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에요?" 아가씨와 할아버지는 무언가로 서로 싸우고 있었고 청년과 붉은 머리 아저씨는 만담 같은 걸 주고 받으며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다. 내 질문을 들은 사람은 옆에 있는 이 아저씨 밖에 없다. 뭔가 산만한 사람들이다. "왕성 아래의 마을이야. 그 중 좀 외진 곳에 있는 집 몇 채를 우리가 두어달 전부터 쓰고 있었지. 라노가 너를 여기까지 업고 데려 왔지만 급하게 다시 성으로 올라갔어. 얼굴 색이 새파랗게 질린 라노는 처음 봐서 난 우리의 작전이 다 들통 난 줄 알았다." 두어달 전부터?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아저씨가 안 좋은 버릇이라며 주의를 줘서 순간 머쓱해졌지만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그 어떤 것 때문에 다시 손이 입가로 올라갔다. "그동안 이 마을에서 뭐하셨어요? 설마 여기서 살림 차린 건 아닐 테고..." 아저씨가 내 말에 와하하하-하고 웃는다. 그 웃음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흘끔 이쪽을 쳐다봤지만 금방 신경을 끄고 자기들끼리 장난치다가 싸우다가...아무튼 정신 없다. "그래, 너는 사정을 잘 모른다고 들었다. 우리가 설마 여기서 농사짓고 있었겠니? 이 허름한 집은 이래봬도 이덴의 정보부였다고. 이야~ 트레져헌터에, 뒷골목 장물아비에, 도둑질에...안 해본 일이 없지만 왕성의 정보망을 통제해본 건 또 처음이라 잘 할 수 있을지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데. 라노대장은 들볶아대지 루센이 가져온 일거리는 잔뜩이지... ...으아~정말 지옥이었다." 이불을 꽈악 틀어쥐었다.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무는 내가 이상했는지 "꼬마야? 아직도 몸이 안 좋아?" 하고 아저씨가 묻는다. 안 좋은 건 몸이 아니라 심장이다. 심장이 너무나도 아프다. 그러니까, 루센과 민태에게 나는 보호의 대상이었지 동등한 동료는 아니라는 거...알고 있다. 나한테 그런 얘길 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심정, 백번 천번 이해한다. 왕권을 전복한다는 계획을 내가 알아봤자 불안에 벌벌 떨다가 유현에게 뒷덜미나 잡혔겠지. 어쩌면 더 이상 나에게 불안감을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루센, 특히 민태는 나한테 빚진 게 있는 것 같다고 했어. 그것이 현실세계에서의 마음이라는 거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민태를 탓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을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내가 어떻게 그들을 탓하겠어? 하지만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알면서도 통제가 안된다. 루센도 테이그도 민태의 심정도 다 이해가 가는데 그런데도 나에게 아무런 말을 안 해 준 것이 왜 이렇게 야속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왕에게 발설할까 봐 그랬을까? 왕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격려하던 루센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리고 나중에 유현의 애첩 비슷한 것으로 전락한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내가 배신할까 봐 나를 못 믿었을지도... 자꾸 나쁜 생각이 든다.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너무나 서럽다. 진유현의 왕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보다 친구들에게 신뢰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 나를 괴롭혔다. 이런 나라따위 누가 왕이 되든 알게 뭐냐. 지금 당장 내 자신의 비참함 때문에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아마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민태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세상의 소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힘들어서 외면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결국은 이것도 다 내 탓인 거야? 쓰디쓴 헛웃음이 눈물과 함께 흘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저씨가 낡은 이불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괜찮냐고 묻는다. 손등으로 슥슥 눈가를 닦은 나는 더 이상 짐이 되는 것이 싫어서 억지로 눈물을 참고 고개를 저었지만 목이 매여 말은 하지 못했다. 다행히 저기서 떠드는 네 사람은 추태를 부리는 내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자기들끼리 열심히 얘기 중이었다. "그럼 남은 것은 왕을 치면 되는 건가?" "사실 그게 관건이지. 어제 일은 빈집털이에 불과했으니까 본격적인 한 판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구! 드루키아족과 싸우기 위해 병력을 빼 준 것은 고맙지만 덕분에 왕이나 아디움 같은 알짜배기는 손도 못 댔잖아. 원래 예정은 에드바라하가 의식을 치르는 척하면서 왕을 암살하고 뒤집어 엎는 거였다고." "그러게 말야, 드루키아를 미끼로 내주고 병력 일부를 빼낼 셈이었는데 왕 본인이 나서는 바람에 예정이 틀어졌지." "맞아, 맞아. 성안에 있던 우리 길드원들이라면 잠자는 왕의 목도 따 올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깝지 않아?" "에이~ 그건 아니다. 요즘 아무리 왕의 상태가 맛이 갔다고는 하지만 암살 당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걸? 차라리 왕이 푹 빠져 있다는 녀석에게 독살하라고 시키는 편이..." 거기까지 말하던 주근깨의 청년이 합-하고 자신의 입을 틀어 막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주위 사람들이 무언의 눈빛으로 청년을 째려보며 나무랐고 청년은 눈알을 굴리며 안절부절 하더니 갑자기 화를 낸다. "우씨. 솔직히 내 말이 틀렸냐? 저 녀석은 뭐, 길드원 아니냐구! 물에다 살짝 약만 타면 되는 일인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런 좋은 방법을 안 쓴 거야?" 도리어 화를 내는 주근깨의 청년이 당당하게 말을 하자 일제히 주변에서 주먹세례가 날아들었다. 진심으로 때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차는 모습은 나름대로의 훈계였다. "이 눈치 없는 것아! 입 좀 닥쳐!"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길드원, 하물며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길드원이라면 유현과 내가 어떤 사이인지 모를 리가 없다. 저들의 입장에선 내가 침실에서 유현의 심장에 칼이라도 꽂아주길 바랄 수도 있겠지. ...하하 말도 안된다. 진유현이 죽다니, 그 제멋대로에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그 놈이 암살이나 독살이라니...그런.... 문득 머릿속의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애써 무시하려 했던 사실이 수면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나라따위 누가 왕이 되어도 상관없지만...그런데...그러면 진유현은 어떻게 되는 거야?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세계에서 우리 반 아이들 중 그 누구 하나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진유현이라니, 그 녀석이 비참하게 피를 뿌리며 머리가 잘리는 모습 같은 거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성도 하룻밤 안에 함락 당했으니 진유현이라고 위험하지 말란 법 없다. 나는 무의식 중에 진유현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원상복귀 될 거라고 믿고 있었나? ......만일 그렇게 되면 죽는 것은 민태와 한도훈이잖아... 오싹오싹하는 한기가 스물스물 발끝부터 피어 올랐다. 유현을 전쟁터로 내 몬 것은 나였다. 이게 그 결과다. 내가 아니었으면 어제의 전투는 더 치열하고 길게 이어져서 당하는 것은 에드바라하 쪽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반대로 죽어가는 병사들 속에 진유현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나 때문에 왕성이 함락 당했다는 오싹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유현이 이 소식을 듣는다면 바로 성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이다. 만일 한도훈의 군대와 진유현의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나는 어느쪽을 응원해야 하지? 아니, 그 전에 드루키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왕성 내에 있는 수많은 귀족들은? 왕족들은? 맙소사! 녀석은 내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거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이는 의문과 진유현이 나를 오해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친구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뇌가 터질 것 같다. 나는 에드바라하의 반란을 정말로 환영할 수 있는 건가? 진유현이 당하지 않으면 한도훈과 정민태가 죽는다. 루센과 테이그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 친구들이 다치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아. 하지만 그러면 진유현과 김제하, 오세준은 어떻게 되는 거야? 걔네들도 죽어버려? ......제하는 이것을 예감했었나? 훈훈한 방안에 찬바람이 부는 착각이 들었다. 바깥에서는 겨울이 다가옴을 알리는 북풍이 창문을 흔들고 지나갔으며 그 바람은 내 심장까지도 전달되는 것 같았다. 제기랄... 진유현을 받아들일까, 그대로 도망쳐 버릴까, 아니면 멋지게 복수해 버릴까...그렇게 이를 갈며 고민하던 것들은 차라리 애교에 불과했다. 싸늘한 아침이 지나고 햇빛이 어느 정도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다. 말을 타고 민태와 함께 성으로 가던 나는 간밤에 간편한 복장으로 나오는 바람에 한기를 느꼈는데 민태가 눈치챘는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주려 했다. 보호 받는 느낌이 싫어서 한사코 거절했더니 민태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아까는 정말 난리였다. 문을 부서져라 열어 젖히고 쳐들어 온 민태는 나를 얼싸안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구!!"라고 소리지르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하룻밤을 꼬박 샌 사람답지 않게 활기에 넘쳐 있었지만 많이 걱정했는지 멀쩡한 나를 확인하고는 굉장히 기뻐했다. 그런 녀석에게 뭐라고 따질 수도 없어서 잠자코 있었더니 녀석은 느닷없이 카이가 나를 부른다며 성으로 가자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그 집에 있던 다른 네 사람에게도 일거리를 잔뜩 안겨 주면서 "앞으로 할 일은 많다, 라노길드의 동지들이여!힘내라! 으하하하하하~~"라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울상이 된 사람들을 뒤로하고 떠나자니 내게는 주어진 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더 우울해 졌다. 그 탓인지 좀 전만 해도 활기에 넘쳤던 민태가 조용해지고 한동안 그렇게 침묵이 감돌다가 결국 말을 꺼낸 것은 민태쪽이었다. "말 안 했던 거 미안해.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 저기...사실 너는 너무 위험에 노출 되어 있기도 했고...괜한 걱정 끼치기도 싫었거든...있잖아...화 많이 났어?" 솔직히 가슴이 쓰리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나에게 말 안 했다고 투정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다. 가슴 한쪽이 따끔거릴 뿐, 민태와 루센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충분히 느끼고 있으니까... 나는 괜찮다고 작게 웃었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를 조금만 믿어줘. 너희들이 믿을 만한 녀석이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 흔들거리는 말 위에서 민태의 얼굴이 미안한 빛을 띠며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에 활짝 웃음을 머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실은 말이야..."라고 운을 떼기 시작한다. "나도 처음에 카이한테 얘기 들었을 땐 엄청 놀랐어. 글쎄, 카이 그 자식 어느새 다른 나라에 대해 물밑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거야. 그것도 녀석이 길드에 들어오기 전부터 말이야! 그것도 모르고 에드바라하의 노인들은 왕가의 권속으로 들어가자고 징징대지 카이가 교섭한 나라에선 뚜렷한 확답을 안주지...결국 노인들이 하자는 대로 왕가의 권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었던 거지." 민태는 이제까지 나에게 말 못한 것을 이 기회에 풀어 놓으려는지 몸짓까지 과장스럽게 섞어가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것이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이것저것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듣고 보자니 단순히 자기 입이 근질근질 했던 거다. 생각해 보면 저 말하는 거 좋아하는 녀석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다. "그거 아냐? 지난번에 왕가의 권속으로 들어 가자던 영감탱이들, 싹 몰아내고 이제까지 노인들 성화에 힘을 못쓰던 젊은 귀족들로 물갈이 했어. 젊다고 해봐야 아저씨들이지만 카이가 예전부터 왕권 전복에 대해 의논해온 사람들이라는데......" 민태의 얘기를 들으며 성을 향하는 길은 한가로웠다. 민태는 자이카나의 얘기까지 했는데 "아, 그 벨미르란 놈 면상을 확 줘 패고 싶은데 말이지..."라고 말하면서 내 안색을 살피기도 했다. 몇 번이나 벨미르랑 결투할 뻔 했던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진영이와 형석이가 자기만 빼 놓고 왕실로 먼저 간 것에 불평하기도 하고 라이사 아줌마가 만든 밥이 먹고 싶다는 둥... 이야기는 완전히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성의 곳곳에서 고함소리와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태와 함께 말을 타고 가던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서 갑옷을 벗은 채 톱을 들고 씨름을 하는 병사들을 보고 있었다. 간밤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었고 시체를 질질 끌고 가는 병사들도 보였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풍경이 변할 수도 있는 건가...하고 혀를 차며 성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공사를 하는 거야? 크게 파손된 곳이라도 있어?" 너무 쉽게 함락된 탓인지 성 자체가 파괴된 부분은 적을 터이다. 병사들은 수리보다는 뭔가를 더 만들고 덧붙이고 구조물을 세우는 등의 작업이 한창이었다. 내 말에 민태는 으쓱하면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가볍게 입을 연다. "곧 쳐들어 올 왕의 군대에 대비해야지. 어젯밤의 전투는 몸풀기야. 진짜는 유디스왕의 본대와 한 판 붙어서 그자의 목을 따야 비로소 이 나라가 우리 것이 되는 거지." 흠칫하고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역시 그런 거다. 이들은 지금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고 있는 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그 변태 같은 왕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행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너만은 꼭 탈출 시킬 거야." 민태가 결의를 다진 얼굴로 주먹을 꽈악 쥐어보였다. 자기 딴에는 믿음직스러워 보이기 위해 한 행동이었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무척이나 끔찍한 소리로 들렸다. 불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다리사이에 힘이 꽉 들어가 말의 배를 조였고 말은 주인의 상태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자꾸 투레질을 하며 행동이 거칠어 지려고 한다. 민태는 당황하며 "어? 야 승호야, 너 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 아냐?" 라고 말해서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애매하게 웃어 넘겨 갈 길을 재촉했지만 민태가 자꾸 내 얼굴을 흘끔 거린다. 카이...한도훈이 기다리는 본 궁을 향해 말을 타고 가면서 나는 민태를 안심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성의 복도에도 피 묻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넘쳐났다. 비록 간단한 차림이라고는 하나 귀족의 옷을 걸친 나를 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따갑다. 그러나 옆에서 길드원이라고 광고하는 차림의 민태를 보고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긴 홀을 따라 안으로 들어 갔다. 본 궁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록 병사들은 눈에 띄게 줄었고 바닥에 묻어 있던 핏자국, 시체들의 살덩어리도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홀의 막다른 길에 내 키의 세 배는 됨직할 만큼 거대한 문이 있었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는데 민태가 머뭇거리더니 머리를 긁적인다. "카이가...너한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대. 둘이서 얘기하고 싶댔으니까 나는 이 앞에 있을 게." 나는 한도훈과 단 둘이 된다는 사실에 머쓱함을 느끼며 열려진 틈새로 들어갔다. 붉은 양탄자가 길게 뻗어 있었고 그 끝의 단상 위에는 거인이나 앉을 법한 의자가 하나 있었다. 예전에 연회에서 유현이 앉아 있던 의자와 비교하면 화려한 면에서는 좀 떨어졌지만 크기는 더 큰 것 같았다. 의자...아니, 옥좌겠지. 그 옥좌 앞에 한 사람이 내게 등을 지고 서 있었다. 나는 양탄자를 따라 걸어가면서 엄청나게 넓지만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이 홀에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천정은 높았고 벽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창문에선 아침 햇빛이 대리석의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입을 열면 입김이 나올 것 같은 한기가 드는 공간이었다. 벽에 별다른 장식도 없다. 몇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무기가 옥좌 뒤에 장식마냥 걸려 있고 옥좌의 좌우에 무식하게 큰 깃발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화려함보다는 크기로 승부하는 곳인가 보다 여긴. 나는 계단을 올라가 그 거대한 깃발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도훈에게 다가갔다. 깃발은 아직 에드바라하 것으로 대체되지 않았는지 머리가 두 개인 흑사자의 문양이 그대로 달려 있었다. "오랜만이야..." 무심코 음성이 튀어 나갔다. 이미 내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한도훈은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제의 당당함이 무색하리만치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다. 하지만 긴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는 이어지는 녀석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잘 지냈나." 엄청나게 쉬어 빠진 목소리였다. 간밤에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상상이 간다. 퀭한 두 눈은 이 세계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더 마르고 더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눈만은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한도훈도 이렇게 열정적인 녀석이었나? 때로는 무슨 재미로 세상 살까 싶을 정도로 바른 생활에 농담도 잘 안 하는 녀석이었다. 비록 진유현을 고발하려다가 된통 깨지기는 했지만 이빨이 부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갈 때까지 저항하는 심지 강한 놈이기도 했다. 그런 한도훈이 반란군이라니 왠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응. 잘 지냈어." 한도훈이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헛기침을 하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얘기가 나왔다. "돌려 말하지 않을게. 왕과 네 관계. 루센에게 들었다." 똑바로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엔 비난조나 동정의 빛은 없었다. 나와 유현의 일이라면 왕실 전체가 알고 있으니 이미 길드에도 소문이 좌악 퍼졌을 것이다. 괜히 민망해져서 나는 머리를 긁으며 시선을 피했는데 한도훈이 이어서 말했다. "루센은 네가 강제로 당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지만 내가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너는 상당히 왕의 신뢰를 받고 있었어." 그리고 한도훈은 자신의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 앞으로 내 보였다. 부드러운 비단에 싸여있던 그것은 옥새였다. "이것을 일개 노리개에게 멋대로 쥐어주는 왕은 없어. 아무리 유디스가 제멋대로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남의 손에 맡길 정도로 경우 없진 않아. 루센에게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이덴의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가 한도훈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무게를 가늠하듯 손으로 재어 보는 녀석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창에서 들어오는 빛에 얼굴의 음영이 지면서 조금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왕은 시큰둥한 반응으로 우리가 보낸 공물을 죄다 태우거나 버렸다. 너를 보낸 것도 에드바라하의 권위가 바닥까지 실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왕의 태도가 바뀌어 에드바라하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네 입김이 왕에게 작용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더군."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던 나를 한도훈이 순간 날카롭게 바라봤는데 저건 숫제 째려보는 것에 가깝다.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던 녀석이 저렇게 노려보니 뜨끔하고 마음이 아파왔다. 양호실에서 나를 힐난하던 때가 생각나서 나는 또 녀석에게 혼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한도훈은 뒤로 주춤하는 나를 보고는 잠시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더니 다시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에드바라하를 위해 그렇게 한 거냐? 에드바라하를 위해, 너를 구한 라노를 위해, 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를 에드바라하에 유리하게 움직이게 만든 거냐?"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어서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기회를 주지않고 한도훈이 이어서 말했다. "네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유디스의 출전이 너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보고에 나는 혼란을 느꼈다. 네가 우리를 위해 왕을 출전 시킨 건지, 아니면 왕을 위해 성밖으로 빼 낸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아니, 우선 네가 처음부터 우리 계획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한도훈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이었다. 정말이지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인 것은 여전하구나. 나는 그런 녀석이 싫지는 않아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리었지만 그것은 본의 아니게 쓴웃음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너희들의 계획을 알 리 없잖아. 한마디도 안 해준 주제에." 조금 원망하는 뉘앙스가 묻어났는지 녀석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냥, 녀석이랑...그러니까 유디스랑 좀 떨어져 있고 싶었어. 알다시피...유디스가 지나치게 달라붙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거든." 온갖 민망한 꼴은 다 보였으면서 이제와 이런 말한다는 것도 좀 우습지만 그것이 진심이기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한도훈은 더욱 딱딱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역시 너는 싫은데도 에드바라하를 위해 억지로 그런 거냐? 물론 왕이 강제로 너를 취했다고 하면 네게 아무 힘이 없으니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그게 아냐." 한도훈의 말을 잘랐다.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나도 안다. 강제로 범해진 에드바라하의 도련님, 침실에서 정사를 의논하다...뭐 이런 식의 얘기를 한도훈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속닥거리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이끄는 눈치가 조금이라도 나에게 있었으면 이렇게 멍청하게 일이 터지고 나서야 깨닫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대단한 녀석이 못 돼. 내가 뭘 해서 에드바라하가 이득을 얻은 게 아니야." 에드바라하를 위해 왕에게 미움을 사면 안된다고는 생각했지만 유현에게 뭘 어떻게 해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녀석은 언제나 내게 무언가를 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한도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유디스를 싫어하지 않아. 강제가 아니었어." 녀석의 단단하던 얼굴이 허물어졌다. 경직된 얼굴의 근육이 풀리고 입가의 근육이 힘을 잃었는지 입술이 작게 벌어져 녀석답지 않게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도훈이 오래간만에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도 유디스가 좋았고 내 의지로 녀석과 어울린 거야.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녀석이 불편하지만 어쨌든 그 녀석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이고 어쩌면 지금도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리고...그래서 녀석을 용서하기가 힘들어." 쓰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까...에드바라하를 위한 것이 아니야." 바닥에 흩어지는 햇빛이 서늘한 홀의 한 귀퉁이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실낱 같은 빛 줄기가 한도훈과 나의 발치에서 아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내 어깨 위로 한도훈이 손을 얹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자 아까의 날카로운 빛이 거짓말 같이 사라진 한도훈이 따뜻하지만 슬픈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쭉 너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의외의 말을 내뱉은 녀석은 다른 한 손도 맞은 편 어깨에 대더니 꾸욱 어깨를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약간 고조 되었는지 녀석이 내 어깨를 몇 번 꽉 쥐었다 폈다 한다. "네가 에드바라하를 위해 억지로 몸을 내준 거라고 말했으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참을 수 없었을 거다. 네가 부귀영화를 노리고 일부러 왕에게 접근한 거라는 소문을 들으며 너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의심했다. 너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왕궁이란 곳을 용서할 수 없었고 너를 그곳으로 내 몬 나를 용서 할 수 없었어." 내 어깨를 감싸 쥔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가자 손의 온기를 아쉬워하는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그것을 내가 추워하는 것으로 오해했는지 녀석이 내 양팔을 스윽스윽 문질러 주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를 그렇게 왕성으로 보냈던 것에 후회는 하지 않아. 당장 급한 것은 나의 동료들과 친구들, 그리고 에드바라하였고 처음 보는 너를 희생양으로 보내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이후 네가 왕성에서 잘 지낸다는 보고를 받고 어느 정도 안심한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그동안 왕권을 전복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이보다 더 비겁하고 더 치사한 수도 많이 써 왔으니까." 한도훈은 등 뒤의 차갑고 거대한 옥좌의 팔걸이에 손을 대고 칼날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커다란 머리 두개의 흑사자 문양의 깃발을 올려다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이 방법이 얼마나 비겁한지, 귀족들이 얼마나 손가락질 할지 나도 알아. 만일 실패한다면 온갖 오명을 뒤집어 쓰고 후세에 길이 전해지겠지. 아마 승리한다 해도 이 일에 관련된 주변국들이 앞으로 엄청나게 간섭할 거야. 그렇지만 나는 결국 내 동료들이 가장 적게 피해를 보는 방법을 선택했고 이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해. 아무리 비열해도 그 대상은 권력다툼에 눈먼 귀족들과 통치보다는 전쟁이나 일으키는 난폭한 소르 왕조니까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너는 아니야. 과정이,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너는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여기로 떠밀려 졌다.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 엄청나게 고지식한 놈. 이런 녀석이 어떻게 타국과 연계하고 왕권을 뒤집을 생각을 했을까. 실소를 흘리며 뭔가 멋진 말을 해서 녀석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묵묵히 깃발을 바라보던 녀석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유디스를 친다. 이 왕가를 빼앗을 거다. 그러면 또 우리는 너를 괴롭게 만들겠구나." 그 말에 웃음이 뚝 멈췄다. 녀석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고 녀석의 얼굴만큼이나 내 얼굴도 굳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일이 실패할 경우, 너 역시 무사하진 못 할 거다. 라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피해 없게 한다고 장담하지만 난 솔직히 모든 것이 실패한 상황에서 너의 안전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 왕은 네가 출전을 권유한 것이 배신이라고 생각할 거다. 어쩌면 에드바라하와 길드원 보다 너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른침을 삼키고 한도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발치로 떨궜다. 오들오들 한기가 든다. 무거운 홀 안의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방금 전 한도훈의 온기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유난히 추워서 나는 스스로 내 팔을 감싸 안고 발치를 내려다 보며 미간을 굳혔다. "결국 너는 원치 않게 에드바라하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어. 우리는 너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치 짜고 한 것처럼 상황이 너무나 잘 들어 맞아서 나는 놀라고 있다. 에드바라하는 너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거야. 일이 성공하더라도 실패하더라도 너에게는 고통스럽겠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한도훈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팔을 감싸 쥔 채 발치를 내려다 보던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돈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예상외로 내 목소리 역시 담담해서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나도 길드의 동료라고 생각해줘." 말을 하기 시작하니 몸의 떨림도 어느 정도 멈추는 것 같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뜬 나는 줄곧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제삼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고락을 같이 해온 다른 동료들 보다 덜 믿음직스럽겠지만 그렇게 타인을 말하듯이 말하지 말아. 나는 에드바라하의 반란을 반대하지도, 유디스의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슬퍼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 나를 동등한 친구로 보아주길 바랬다. 1학년 1반의 교실에서 느꼈던 무서운 소외감을 이런 식으로 맛보고 싶지 않았다. 내 말이 예상외였는지 한도훈이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럼...너는 내가 유디스를 몰아내고 왕좌에 앉아도 정말 괜찮은 건가?"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태도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너라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추수직전의 밀밭을 바라보며 자국에 대한 자긍심으로 빛나던 유디스는 내 안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어두운 교실에서 나를 소외시키던 무서운 진유현의 얼굴. 그렇지만 나를 비누방울처럼 아껴주던 유디스와 한여름의 체육시간에 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쳤던 진유현의 모습도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상반되는 두 사람의 모습 하나하나, 전부 따로 떼어낼 수 없는 진유현 본인의 모습이었다. 애정과 증오를 안은 복잡한 마음을 지금은 덮어두기로 했다. "한가지 부탁이 있어." 한도훈의 눈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녀석의 옷깃을 쥐었다. "유디스를...죽이지 말아줘." 가능한 덤덤히 말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간절한 목소리가 나왔다. 한도훈은 나를 빤히 내려다 보더니 눈썹은 찡그리면서 입가는 웃고 있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거 힘든 부탁인데......" 옷깃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도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살짝 겹치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노력해 볼게. 유디스는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까, 쉽게 다치지도 않을 거야. 걱정은 하지 말아." 한도훈은 자신 없는 약속에 확답을 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신 노력하겠다는 말 역시 빈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꽤나 녀석을 곤란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부탁을 철회할 생각도 없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서늘한 홀 안의 옥좌 앞에서 묵묵히 한도훈의 손을 두드리며 말없이 격려하던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다치지 말라고. 에드바라하가 성을 점령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귀족들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번 일이 완전히 마무리 되면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지금 당장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사로잡힌 대신들은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수많은 귀족들을 구하기 위해 각 영토에서 지원군이 올 거라며 저주를 퍼부었지만 에드바라하에게 있어서 저 귀족들은 아주 훌륭한 인질인 것 같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자이카나가 입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크게 동요한 것은 왕가에 종속되어 있는 다른 가문들이었다. 제 2의 에드바라하라고 수근거리며 이제 다시는 이덴 안에서 귀족이 되지는 못할 거라고 비웃음 반, 동정 반을 사고 있던 자이카나가 에드바라하의 보호 아래 등장한 것은 많은 늙은이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일부에선 에드바라하의 사람을 해하려 한 자이카나와 손을 잡다니 배알도 없는 가문이라고 욕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은 두 거대 가문의 연합을 두려워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는 자이카나에게 선처를 바란다는 상소문이 상당히 많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그 가문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대신들 중 몇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미 우리 편으로 넘어 와서 앞으로 있을 유현과의 전투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자신의 목숨 줄을 두려워 해 뚜렷한 반발은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실제로 에드바라하에 돌아선 가문도 있었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한도훈이 가장 많이 걱정하는 부분도 귀족들의 그러한 반응이었다. 에드바라하는 그렇게 위태위태하게 성안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수용하지도 못한 수많은 포로들의 문제도 컸고 몇 배로 늘어나 버린 성 안의 식구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창고의 절반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밤 늦도록 뚜닥뚜닥거리는 공사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사방에서 거친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한도훈이 이끌고 있는 병력의 절반 정도는 에드바라하의 것이었지만 그 절반중 60%는 자온의 군대, 나머지는 이베라스와 용병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실력이야 뛰어나겠지만 다른 나라들의 병력들이 한데에 모여 있으니 서로 부딪히는 일도 많은 것 같다. 특히 성정이 거칠고 의리 없기로 유명한 이베라스의 병사들을 통제하기가 힘들다며 민태가 몇 번이나 우는 소리를 했었다. 순간의 승리를 기뻐할 틈도 없었다. 전열을 가다듬고 부족한 인력을 메우느라 라노길드의 우수한 인재들이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만 놀고 있는 것도 미안해서 감자깎기라도 시켜달라니까 민태가 안된다고 방방 뛴다. "지금 성 안이 얼마나 흉흉한데 하인들하고 어울리겠다고? 너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 된다구!" 그렇게 말한 민태는 보디가드라는 명목으로 길드원 둘을 붙여줬지만 내게는 감시원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바쁜 때에 나 때문에 길드원을 둘이나 낭비한다는 것도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혼자 다니던 샛길도, 정원의 깊숙한 곳도, 평소라면 인적이 드물어야 할 으슥한 복도도 항시 순찰 도는 병사들로 인해 빈틈이 없었다. 그들의 절그럭 절그럭 거리는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망치질소리, 고함소리가 이제는 익숙한 소음이 되었다. 지난번처럼 루센의 심부름을 하는 것도 등 뒤에 길드원을 둘이나 달고 다녀서야 효율성이 전혀 없어서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 일쑤였다. 그래도 나 모르게 상황이 변하는 게 싫어서 오전과 오후에 열리는 회의에는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는데 그때가 모두를 만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아, 회의에는 물론 그 벨미르도 참석한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고개를 돌리지만 묵묵히 말석에서 얘기만 듣고 있는 나보다는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실상 궁 내에서 벌어지는 행정적, 재정적인 부분은 거의 자이카나가 도맡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드바라하가 궁에 들어와서 바로 실무에 투입 될 수 있었던 것도 자이카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언제까지 이런 전시체제에 있어야 할까. 걱정 말라며 웃는 루센의 상냥한 얼굴도 이제는 조금 달라 보여서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는지 "무서운 거에요?"하고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쓸어주는 루센의 체온이 따뜻하다. 전투가 승리로 끝난 다음날, 나를 보자 마자 얼싸안고 기뻐하던 루센을 떠올리면 나는 이 사람에게 상당히 의지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그가 차갑고 무서운, 살인기술에 능한 길드원이라해도 말이다. 군대는 황야의 한 가운데에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보니 마치 살아 있지 않은 토우...그러니까 흙으로 빚어 놓은 인형 같았다. 그 맨 앞에서 밤색 말을 탄 한 사람이 유현에게 무언가 보고 하고 있었는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이 보고라기보다는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성이 함락되었답니다!! 에드바라하가 배신했어요!!!" 나는 심장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들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유현의 얼굴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꾸만 의식이 군대를 향해 가까워 지고 있었다. 시커먼 기마병과 보병들은 오랜 행군에 지친 기색조차 없어 보였지만 자신들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확실히 충격인 듯 그들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겁니다! 성 안에서 일하던 에드바라하의 귀족들 절반이 가짜였답니다! 자온과 이베라스가 한통속이 되어 공격했고 변방에서 보이는 타르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군대의 수뇌부로 보이는 아저씨들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유현의 옆에 나란히 말을 타고 있던 오세준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가 금새 미간을 찌푸리곤 이를 빠득 갈면서 "유디스!"하고 친구의 이름을 외친다. 그 약간 떨어진 뒤에서 엄청나게 지쳐 있던 제하가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 맞은 표정으로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속았다! 역시 드루키아는 눈속임이었어!! 유디스, 어쩌면 우리는 그 꼬맹이한테 당한 걸지도 몰라!!"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며 유현에게 다가온 오세준은 험상궂은 그 표정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쯧쯧"하고 혀를 찼다. 유현의 얼굴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나는 제대로 쳐다보기가 겁이 났다. 그렇지만 흉하게 일그러진 유현의 얼굴은 그 무서운 얼굴 그대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디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지, 충분히 이상해! 진작에 눈치채고 병력을 돌렸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눈 뜨고 집을 내어 준 꼴이라니!!" 화를 내는 오세준과는 반대로 유현은 말없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오세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승호를 보내라고 에드바라하에게 강요한 건 우리였어. 그렇지? 우린 처음부터 윤승호가 평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 그 말에 화를 내던 오세준도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몇 번 까닥까닥 하더니 "그, 그렇지"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헤시안, 너는 어떻게 생각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제하는 유현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유현은 끈기있게 제하의 말을 기다렸지만 이마에 돋아 있는 퍼런 실핏줄은 지금 녀석이 얼마나 많이 참고 있는 건지 보여주고 있었다. "에드바라하의 일은...잘 모르겠어. 나는 네 명대로 자택에 근신하고 있었으니까." 제하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하가 루센이나 에드바라하의 사람들과 만날 일은 거의 없었구나. 통찰자라는 것도 만능인 재주는 아닌가 보다. "하지만...내가 본 바로 윤승호는...전혀 그런 거 모르고 있었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 윤승호란 작자, 평민이라면서요! 전하, 그런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 어찌...!!!" 옆에서 듣고 있던 턱수염 달린 아저씨가 제하와 유현의 대화를 듣고 참지 못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 아저씨의 턱에 유현의 검 끝이 닿았다. 검을 뽑는 소리조차 나는 듣지 못했다. "입 닥치고 나서지마. 지금 폭발 직전이니까." 투구아래 그늘진 유현의 눈가가 더욱 어두워졌다. 턱수염의 아저씨는 입을 벙긋거리면서 무언가 항변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피부가 따끔따끔 거릴 정도로 내뿜는 유현의 살기를 느꼈는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승호는 그런 일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연기할 정도로 대단한 놈이 아니거든.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믿어도 좋아." 제하는 충실한 부하에게 검을 겨누는 유현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졸지에 제하의 변호를 듣게 된 나는 지금 이 순간 녀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물론 대단한 놈이 아니라는 말엔 조금 상처 받았지만...... "흐음...헤시안 말대로 그게 연기라면 엄청난 것이긴 한데...... 생각해 보면 윤승호가 에드바라하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지...." 이제야 이성을 차린 오세준도 턱을 쓰다듬으며 "쓰읍"하고 잇새로 공기를 들이마시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유현, 오세준, 김제하의 태도가 이러하니 답답한 것은 부하들이었다. 아까 검이 겨눠진 턱수염의 아저씨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있었지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다른 대신들 역시 "지금 윤승호라는 작자가 문제인 것이 아니지 않소..."라고 저들끼리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지? 윤승호도 모르고 있었던 거지?" 유현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마치 협박하듯 오세준에게 물었다. 오세준도 미간을 찌푸리며 "으음...이용당한 걸지도..."라고 중얼거려서 유현의 눈썹이 꿈틀하고 지렁이 기어가듯 움직였다. "......승호가 위험해..." 낮게 중얼거리는 유현의 말을 듣고 오세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는지 "뭐?"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할 생각도 없는지 유현은 자신의 하얀 말을 돌리더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지휘관들에게 다가가며 무서운 소리로 이를 갈며 외쳤다. "전군! 말을 돌려 이덴의 성을 되찾으러 간다!! 배신자를 처단하자-!!" 그제야 안절부절못하던 아저씨들이 가슴을 쓸어 내리며 왕의 명령을 뒤로 전달한다. 명령은 물결처럼 군대의 끝까지 퍼졌고 병사들은 분노와 배신감에 불타올라 공기를 찢을 것 같은 살기를 내뿜었다. 그 중 유현의 살기는 유난히 독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나는 온 몸이 썩어 들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도 안 되는 착각이 들었다. 점점 목이 따끔거리면서 호흡이 곤란해지고 있었다. 녀석이 방출하는 살기는 거의 독에 가까웠다. 나도 모르게 바라본 녀석의 눈동자는 핏줄이 일어 서 있었고 투구의 그늘에 어두워진 얼굴은 무시무시하리 만치 괴기스러웠다. 진유현은 얼굴의 모든 근육을 파들거리며 분노의 함성을 병사들과 함께 외치고 있었다. "에드바라하아아--!!!!" 성을 향해 충혈된 눈을 빛내는 유현을 보며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 "우웨에엑---!!!!" 나는 복도 한 가운데서 창틀을 부여잡고 바닥에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달려온 두 길드원들이 등을 두들겨 주며 괜찮냐고 물었지만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야 했다.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창 밖을 보시다가 현기증이라도 나신 건..." 등을 쓸어 내리는 손길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전망 좋은 창가에서 멍하니 분주한 성 아래를 내려다 보다가 어느 순간 의식이 날아가 버렸다. 잠든 것이 아니다. 지난번 전투 때처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토 하면서 정신이 돌아 온 것은 처음이었다. 점점 내 상태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의식이 나가기라도 하면 어쩐다지?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내뿜던 진유현의 독기와 스스로를 통제 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살갗에 오돌토돌 닭살이 일기 시작했다. 아직 겨울은 아니건만 내뿜는 숨결에 서리가 맺힐 것 같다. "저어...의사를 부를 까요?" "아, 아니 됐어요. 일시적인 거니까....." 문득 대리석 바닥을 더럽힌 내 토사물을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나는 두 길드원들이 자신들이 치우겠다는 것을 부득부득 우겨서 그 토사물을 치웠다. 걸레 자루를 들고 서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살기가 폐부를 찔러도, 농민들의 원성이 바늘처럼 심장에 꽂혀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유현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몸에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다. 자이카나의 저택 앞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유현에게서도 무서운 살기를 느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그 보다...이제부터가 문제잖아... 유현이, 왕의 군대가 이 사실을 알았으니 조만간 엄청난 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거다. 느낌이 나빠, 왠지 이번 전투는 지난번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들었다. 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다들 전투에 참가하는 걸까? 한도훈이나 민태, 진영이, 형석이...걔네들은 그냥 후방에서 지휘만 하면 안 돼? 그러고 보니 루센과 테이그는 전투형이다. 두 사람이 다치는 것도 싫은데 아무래도 싸움이 시작되면 두 사람이 제일 앞에 나설 것 같단 말이지... 한숨을 쉬었다. 공기 중에 남아있는 토사물의 비린내가 정리하지 못한 내 감정의 찌꺼기마냥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더욱 짜증이 났다. 아무도 죽길 바라지 않아. 하물며 그 진유현 조차도... 뚝딱거리던 소리가 어느새 사라지고 창 밖으로 바라본 성벽에는 바리게이트가 쌓여 있었다. 급조해 낸 것이라 튼튼할지 의심스러웠지만 궁수들이 위험에 덜 노출 될 것 같긴 했다. 뭔가를 파고 쌓아 올리고...나는 그러한 구조물들의 의미조차 몰랐지만 정체불명의 군대가 왔다고 소란 떨며 무의미한 회의만 줄창 해대던 고관대신들의 쓸모없는 대처법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 전투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나와는 달리 루센과 민태는 우리측 병력손실이 거의 없었다며 좋아 하고 있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주로 소규모 부대의 산발적인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정문에서 한도훈이 지휘하던 대규모 병사들은 끓어오르는 투기를 뿜어낼 기회도 없이 그냥 공짜로 입성한 탓에 지금 우리측 병사들의 사기는 대단하다고 한다. 에드바라하가 안고 있는 수많은 골치덩어리 중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사들의 의욕이 충만하다는 점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긴장한 병사들이 간혹 저들끼리 말다툼하기도 하고 주먹다짐도 오고 가는 모습이 성안을 돌아다니는 내 눈에도 보였다. 그들은 주로 용병들이나 이베라스 쪽 군인이었는데 주위의 병사들은 그런 일이 흔한지 싸움을 말릴 생각도 안하고 낄낄거리며 구경하기도 했다. 나는 모르는 게 있으면 내 보디가드로 있는 길드원에게 물어 보면서 에드바라하의 군인과 자온, 이베라스, 그리고 일반 용병들을 겨우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왕의 군대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들었다. 다들 올 게 왔다는 표정이다. 회의 중에 몰래 바라본 한도훈의 얼굴은 굉장히 무서웠지만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역시 승호 넌 성을 먼저 빠져나가 있어라." 회의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민태가 갓 구운 빵을 뜯어 먹으며 말했다. 옆에서 진영이와 형석이가 맞장구를 친다. 나는 "뭐? 왜 나만?"이라고 멍청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래도 전투가 벌어지면 위험하니까 너라도 먼저 안전한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되지. 이래봬도 오지랖이 넓다구. 너 하나 몰래 숨겨 줄 곳은 미리 준비할 수 있으니까 염려 마." "그거...또 나만 도망가라는 소리야?" 내가 병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왠지 우울한 이야기였다. 이건 마치 쫓겨나는 느낌이다.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니 민태가 먹다 말고 머리를 긁적인다. "유디스가 자기네 군대에 명령을 내렸는데..." 머뭇거리는 민태대신 형석이가 이어서 말하려고 하자 민태가 손을 내저으며 "야, 파웰!"하고 소리지른다. 형석이는 짜증내며 "니가 자꾸 숨기려고 하면 승호도 기분 나빠할 거 아냐."라며 민태의 빵을 뺏어 자기 입으로 구겨 넣는다. "이번엔 뭔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민태를 바라보았다. 또 나에게 뭔가 숨기는 건가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더니 녀석도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알았어, 알았어."라며 한숨을 쉬었다. "유디스가 그랬다더라 윤승호는 반드시 생포하라고." 달그락-하는 소리를 내며 묽은 닭고기 국물을 떠 먹던 숟가락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래?"라고 말했지만 민태는 내 동요를 눈치챘는지 애꿎은 뒤통수만 긁적인다. "절대 죽이면 안된댔지?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놈은 갈갈이 찢어 버린다고." "응. 대신 생포해 오면 단장급으로 승진에 평생 놀고 먹을 토지와 재산을 준다고 했지."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형석이와 진영이를 민태가 표정으로 윽박질렀지만 진영이는 "과보호는 안 좋아 츳츳츳"하고 민태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민태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력에 놀라며, 또한 유현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것에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거 큰일이네. 그 자식 나한테 원한이 많은 가봐. 죽여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은가 보지?"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세 사람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더니 진영이가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또 뭔가 해서 진영이를 바라봤더니 진영이는 형석이와 민태의 얼굴을 훑어 보고 마지막으로 내 얼굴 한번 보더니 허공을 향해 이상하다는 표정을 해 보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이도 유디스의 생포 명령을 내렸잖아." 그러자 대뜸 형석이의 입에서 "그게 뭐가 이상하냐?"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그야 왕권을 이양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냐? 어쨌거나 왕좌에 앉으려면 명분은 있어야 하니까." "야, 명분은 무슨! 옥새도 우리손에 있는 마당에 굳이 그 위험한 인간을 잡아들일 필요가 있겠냐? 게다가 그 유디스가 퍽도 왕권을 카이에게 넘겨 주겠다." "아니면, 남아있는 소르 왕조의 추종 세력이 제일 골칫거리니까 그들을 어떻게 구워 삶으려고 생포하라고 했나보지." "뭘 어떻게 구워 삶을 건지는 몰라도 유디스를 생포하는 건 무리 아니냐?" "꼭 생포하라고는 안 했어. 가능한 생포하고 그게 안될 경우에도 죽이지는 말라고 했지." "그게 그거잖아!" 진영이는 민태가 자신의 빵을 슬그머니 집어가는 것도 모른 채 형석이와 말싸움 아닌 말싸움을 하느라 정신 없었다. 민태는 능청스럽게 진영이의 빵을 뜯어 먹으며 "쟤네들 얘기 신경 쓰지마"라고 나에게 눈짓을 했다. 사실 내 앞에서 유디스의 얘기 자체를 조심하는 민태와 루센보다는 저렇게 자연스럽게 얘기해주는 진영이와 형석이 쪽이 대하기는 편했다. 물론 마음은 뜨끔 거리며 아파왔지만 유현의 소식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리고 한도훈이 그런 명을 내렸다는 것에 나는 매우 감사하고 있었다. 국그릇을 달그락 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했지만 내가 에드바라하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유현을 떠올리니 입맛이 썼다. 지금의 내 모습은 다른 사람이 보면 영락 없는 배신자 그 자체인데 말이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며 이미 바닥이 난 국에 소금을 치다가 그 짠 맛에 정신이 확 들고는 되는 일이 없다며 괜히 투정을 부렸다. 나를 성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적당한 곳을 찾아 다니던 민태는 "여기가 제일 안전해."라는 한도훈의 한마디에 절망하고 말았다. 에드바라하의 병력이 성에 집중 되어 있는데 왕이 생포명령을 내린 판국에 성을 빠져 나간다는 건 위험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나를 성안에 두고 싸우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민태는 안절부절못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잘 있나 확인해보러 오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유현의 군대는 바로 지척까지 당도했다. 성밖의 군대에 마음을 졸이며 경계태세로 들어 간 것은 바로 얼마전의 상황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같은 패턴이었지만 에드바라하 쪽이 좀 더 안정적으로 대응한다고나 할까. 겁을 집어 먹었던 예전 왕궁의 병사들 보다는 투지에 불타 올라 있었다. "저기...저건 좀 심하지 않아?" 침을 꿀꺽 삼키며 민태가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만 해도 에드바라하의 군대가 바로 저랬다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나 역시 입을 벌린 상태에서 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 적어도 한도훈이 이끄는 군대는 지평선을 뒤덮진 않았지. 성 위에서 바라본 한가로운 가을의 벌판을 새까만 개미떼들이 조금씩 갉아 먹어 오는 것 같았다. 성을 향해 곧장 오고 있는 유현의 군대는 이렇게 높은 곳에서 바라봐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고개를 좀 더 오른쪽으로 돌려 마을을 바라보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의 평화로운 모습과 왼쪽에서 시커먼 물결이 밀려오는 것 같은 병사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어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애초에 왕성에서 출전 할 때도 상당한 병력이었지만 각 영지에서 지원해 준 군대와 기존 유디스가 끌고 갔던 군대가 합쳐졌으니 저 정도인 거죠. 바꿔 생각해 보면 유디스가 동원 할 수 있는 병력은 저게 한계라는 거에요. 다른 영주들은 성 안에 모셔져 있는 분들 때문에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것 같군요." 옆에서 태평하게 말하는 루센의 얼굴엔 긴장하는 낌새도 없었다. 살짝 겁을 먹었던 민태가 너무도 자신만만한 루센의 모습을 보고 무안함을 느꼈는지 머리를 긁적인다. "하지만 저 숫자가 공격해 들어오면 솔직히 자신 없는 걸." "설마 공격해 들어 올까요? 제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이대로 봄까지 여기에 갇히는 거라구요. 얼마 전 거둬들인 곡물로 창고가 가득했지만 벌써 많이 소비했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던 루센은 내 얼굴을 보더니 헛기침을 한다. 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루센의 마음이야 알지만 매일 회의에 참가 하는 마당에 이제와서 숨긴다고 내가 모를 일은 아니었다. "유디스 성격에...진치고 상대가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녀석은 아닌 걸요." 나는 중얼거리듯이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역시 그렇겠죠?" 루센이 쓴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이나 먼 곳을 응시하는 얼굴이 영락없는 아가씨였지만 루센이 그 애매한 표정 뒤에서 얼마나 많은 계산을 하고 있을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민태는 저렇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게 다 드러나는데 말이다. 나는 민태와 루센을 번갈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라노라는 인물은 실상 민태이지만 루센은 루센인 채로, 처음부터 이 세계의 사람이다. 어설프게 이 세계로 넘어와 인생을 리셋한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을 살고 있는 내 세계의 진짜 주민. 아마도...내가 만들어낸 피조물.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것을 정신차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나는 잠시 자기혐오에 빠져 다른 사람 몰래 머리를 쥐어 뜯었다. 피조물 같은 소리하네. 루센의 보호가 없었으면 수십 번도 더 죽을 뻔한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 윤승호.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진 나는 긴 호흡을 내 쉬며 한 눈에 들어오는 평원 위에서 까맣게 넘실거리는 군대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저기 어딘가 진유현이 있고 오세준이 있고 김제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우울해 진다 나는 이대로 여기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걸까? 만일 내가 현실로 돌아간다면 여기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민태는 라노인 채로 유현은 유디스인 채로, 도훈은 카이인 채로 살아야 하는 건지...이곳에서 빠져 나갈 해답이 있다면 그 해답에 가장 가까울 사람은 난데 내가 이 모양이니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다. 강한 바람이 불어도 탁한 속마음은 시원해 지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 어디가 출구이고 어디가 통로인지, 어디로 가야 내 갈 길이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내 뒤에서 묵묵히 보좌하던 길드원들도 잃어 버리고 얼른 따라오라며 앞서가던 민태의 등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선 곱게 차려 입은 귀족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 다니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들을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대로 우리들을 가둬 죽일 셈인가! 그대들의 약속을 무슨 근거로 믿으란 말이오!" "왕은 우리를 공범자로 몰진 않겠지? 우리도 에드바라하한테 갇힌 피해자잖아." "아직 모르네, 성이 점령 된 건 아니니까 말조심하게나!" 병사들에게 호통을 치는 할아버지들이 있는가 하면 저들끼리 뒤에서 소곤대는 작자들도 있었다. 단체로 항의하는 귀족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그들 틈에 섞여 있자니 시끄러워서 정신 사납다. 지금 성 밖에선 한창 전투 중이었다. 언제, 어떻게 공격이 시작된 건지 잠을 자고 있던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잠결에 어렴풋이 나팔소리와 북소리를 들었고 그것을 자장가 삼아 새벽의 단잠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달콤히 잠을 즐기고 있는데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문을 거칠게 열어 젖히며 들어온 길드원들 때문에 잠이 깨버렸다. 예전의 그 전망 나쁜 방에서 벗어나 한도훈, 민태들과 같은 건물로 거처를 옮긴 나는 전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창가로 달려갔다. 성 중앙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서서 병사들이 사방으로 일사불란하게 좌악 퍼지는 모습을 보니 얘기로만 들었던, 어두운 방의 불을 켰을 때 도망가던 바퀴벌레 떼가 연상되어서 순간 닭살이 돋았다. 그 후 민태와 길드원들을 따라 가장 안전하다는 곳으로 오긴 했지만 에드바라하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경호하는 곳은 바로 이 북쪽 별궁, 전국의 귀족들이 바글바글한 이곳이었던 거다. 멀리서 아련히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 말발굽 소리, 비명소리. 그 소리들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며 에드바라하를 저주하는 소리도 있었고 뜻 모를 욕설이 섞여 있는가 하면 고함을 지르던 병사가 괴성을 내며 죽어 가는 소리로 점점 구체화 되어 가고 있었다. 집중하면 할 수록 모든 잡음들은 마치 스피커의 볼륨을 서서히 올리듯 커졌고 금새 고막을 찢어버릴 기세로 엄청난 소음을 냈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따라오지 않고!" 누군가가 내 팔을 쑥 잡아 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민태가 화를 내며 평소답지 않게 초조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녀석은 한도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보아 성에서 내보내 주겠다고 요 며칠간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나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민태 스스로의 집착 때문인 느낌이 들어서 녀석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잠깐, 잠깐, 라노! 너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한창 전투 중인데 길드의 대장인 네가 없어도 괜찮은 거야?" "아직 성문은 튼튼해. 지금은 나보다 카이 녀석이 분발해야 할 시기니까 우선 너부터 어디 안전한 데로 가야 해." 민태는 이런 어수선한 틈을 타 나를 빼내려고 하지만 이런 와중에 굳이 고집을 부리는 녀석을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의문은 옆에서 따라오던 길드원들에 의해 가중 되었다. "라노대장,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도 카이님께서 빨리 오라고 하셨잖아요. 윤승호님은 저희에게 맡기고 대장은 어서 제 위치로..." "시끄러워! 내 손으로 이 녀석의 안전을 확인하기 전까진 안돼!" 유달리 날카로워진 일갈에 길드원들은 망연한 표정으로 민태를 바라보았다. 민태는 그들의 시선에 자신도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어디론가로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틈바구니를 해치며 북쪽 별궁의 뒤쪽으로 돌아 나온 우리들은 샛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너 이상해! 왜 이렇게 초조해 하는 거야? 지금 나가면 나더러 어디로 가라고! 카이가 그랬다며, 이 성보다 안정한 곳은 없다고!" "그걸 어떻게 믿어! 우리가 지지 말란 법 있어? 카이를 따라 여기까지 왔지만 솔직히 난 유디스를 이길 자신이 없단 말이야! 그 자식한테 너를 뺏길 것 같다구!" "대장이라는 놈이 무슨 허약한 소리야! 유디스랑 싸워보지도 않았잖아! 넌 그 자식 만난 적도 없으면서!" 참지 못하고 민태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화를 냈다.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 녀석답지 않은 모습에 짜증도 났고 나를 지나치게 감싸고 도는 모습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만났어." 내가 뿌리친 자신의 오른손을 들여다보며 민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났단 말야, 젠장. 여기 왔던 첫날, 너를 만나려고 가던 길에 마주쳤었어. 별 것 아닌, 정말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그냥 나는 에드바라하의 귀족인 척 인사를 했고 유디스 그 자식도 내 인사를 무시하지 않고 가볍게 받아주고...그리고 끝난 일이었어." 동그란 얼굴만큼이나 편안하고 장난기 어려있던 민태의 얼굴이 미묘한 두려움으로 질려 있었다. 그런 대장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길드원들이 안색을 딱딱히 굳히며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데...그런데 말이지.... 뱀 앞의 개구리라는 기분을 알아? 나 그 자식한테 모든 걸 들킨 줄 알고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알아? 아디움한테도, 아니 그 누구한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던 내가 그날 처음 본 사람을 마치 오래 전 부터 두려워 해 온 상대처럼 느꼈어." 부하들이 듣던 말던 민태는 상관하지 않았다. 수전증 걸린 사람마냥 미약하게 손가락을 떨면서 이빨을 깨물고 있었다. "이상하지...네가 무사하다는 확신이 없으면 나는 불안해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어. 그 유디스한테만은 두 번 다시 너를 보내고 싶지 않아. 승호야, 나 너한테 죄 많이 지었나 보다. 갚아도 갚아도 마음 편해 질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제발, 너한테는 아무 일도 생기지 말았으면 해." 멍하니 민태의 말을 듣던 나는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와도 비슷했고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을 담고 있는 감정이었다. "라노..." 아이들이 두려워 하는 상대는 분명 진유현 보다는 오세준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오세준이 진유현 보다 한 수 아래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진유현에게 미움 받는 다는 것은 오세준의 폭력과 반 전체의 외면을 동시에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장의 상냥한 얼굴에 아이들은 자신들에겐 해가 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을 뿐이다. 표면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진유현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이 거짓 세계에서 녀석을 왕으로 만들어 버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하늘을 향해 눈을 감았다. 이 세계를 만든 것은 나지만 우리들의 밸런스를 맞춘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서글픈 마음과 분한 마음이 교차 하면서 풀 죽어 있는 민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조금은 매섭게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다시 시작된 세상이잖아. 여기까지 와서 녀석에게 주눅들기야? 그런 거...너무 억울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잖아! "이길 수 있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어깨를 한 손으로 틀어 쥐고 강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이겨. 이기고 돌아와서 그딴 녀석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웃어주자. 기 죽을 거 없어. 왜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카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부터 도망 시킬 생각하지마! 싸우지도 않는 주제에 이런 말 할 주제는 못 되지만 이 성이 함락 되면 끝이라고 생각하라구! 내가 걱정된다면, 이기면 되는 거야!"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녀석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녀석이 수학여행 때 조심스럽게 찾아와서 같이 놀자고 한 거,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지 나는 모른다. 그저 진유현과 오세준의 화살이 한도훈에게로 넘어가니까 그제서야 쭈뼛거리며 다가온 친구들이 고맙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그때의 용기를 지금이라면 좀 더 멋지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민태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나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북쪽 별궁에서 몸을 사리고 있기로 했다. 민태는 다행히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았지만 비척거리면서 무언가에 홀린 듯이 돌아가는 뒷모습이 조금 걱정 되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크게 한숨을 쉬고 나니 옆에서 길드원들도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조금...놀랐습니다. 대장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나를 지키는 두 명의 길드원 중 짧은 갈색머리 청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라노길드의 특성상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은 나보다 세살 위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윤승호님은 그..." 존댓말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들이 나를 보고 "윤승호님"이라고 부르는 데에도 아직 적응이 되지 않고 있었다. 루센도 나한테는 존대를 하지만 루센은 아무한테나 다 존댓말이고... "그...대장하고는 어떤 사이..." 별궁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평소의 딱 부러지던 모습답지 않게 그가 말꼬리를 흐린다. 이들은 나에게 친절하긴 했지만 필요한 말 이외에는 주고 받지 않아서 적잖이 거리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새삼스레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니 그도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힌다. "라노한테는 신세 많이 졌어요. 생명의 은인이라고나 할까... 그런데도 저 녀석은 나를 도와주려고만 하니 미안할 따름이죠." 갈색머리 청년에게 웃어 보였지만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별궁 1층의 홀에 수염 난 아저씨, 할아버지들은 물론이요 귀부인들과 젊은 청년들까지 와글와글 모여 있어서 내 신경은 온통 그리로 쏠려 있었던 거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그들은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항의하고 저들끼리 소란 피우고 어서 빨리 집으로 보내달라고 고함치는 등, 아까 민태와 함께 지나쳐 왔을 때와 별반 차이점이 없었다. 저 사람들은 전투가 시작 되고 나서 계속 저렇게 아우성치고 있었던 걸까? 가만히 바라보면 홀 가장자리나 이층의 난간에서 그런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 보고만 있는 귀족들도 상당하다. 이 건물 전체가 전국의 귀중인사들로 바글바글하니 여기에 불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계속 할말이 남아 있는 것 같이 뒤를 흘끗흘끗 바라보는 청년을 따라 내가 임시로 있을 방을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옆에서 금발을 짧게 친 다른 길드원이 나를 곁눈질 하는 동료에게 주의를 준다. 하아...나는 곁눈질 좀 했다고 화를 내진 않는다구. 이 사람들은 실력은 좋아도 길드의 중심멤버는 아니라서 그런지 내가 진짜 한도훈의 동생, 에드바라하의 도련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를 마치 상전 대하 듯 하는데 그게 조금 불편하게 느껴져서 두 사람의 경직된 등을 바라보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복도에도 귀족들 투성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멀리서는 아련히 함성소리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잠자코 내게 배정 된 방으로 걸어가고 있자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진장 궁금해졌다. 안내를 하는 길드원들에게 물어봐도 소용없겠지? 이들도 아까부터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지금 성밖이 어떤 상황인지 알 리 없잖아... 끄응...이럴 때 그 능력이란 것을 써 먹으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지금이라도 당장 자 버리면 의식같이 가벼운 건 금새 하늘로 솟구쳐 올라갈 것이다. 아니, 굳이 잠들 필요도 없이 요즘같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라면 내가 약간만 주의를 기울여도 눈뜬 채로 기절할 수 있을 걸. 빨리 배정 된 방으로 들어가서 자버리는 게 역시 상책이겠지만 남들은 죽어라 싸우는데 대뜸 퍼 자는 나를 보고 저 두 사람이 얼마나 한심해 할까 하고 생각하면 무안해진다. 귀를 기울이면 이명이 심해지면서 점점 볼륨이 높아지듯 현장의 목소리들이 생중계 되고 만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에 피를 뒤집어 쓴 병사들의 모습이 아른거릴 것만 같다. 생각만으로도 오싹해져서 어깨를 움츠리는데 코끝을 찌르는 고약한 느낌을 받았다. ......이거 무슨 냄새지? "저기...이상한 냄새 안 나요?" 제일 꼭대기까지 올라온 나는 방문을 열어주는 갈색머리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갈색머리의 길드원은 당황하면서 "이, 이 방밖에 지금 남은 방이 없어서 우선은 이곳으로 만족하시고..."라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나는 손을 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방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라...좀 더 밖에서 나는 냄새 같은데..." 귀족들이 머무는 별궁의 방치고는 소박했지만 결코 더럽다거나 누추한 방은 아니었다.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나는 창을 활짝 열고 밖에서 들어오는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벌름거렸다. "으윽...지독해. 이거 뭐에요? ...설마 피냄새?!" 내 말에 깜짝 놀라 창 아래를 내려다본 두 길드원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여기저기 살피고 킁킁거려보지만 나를 향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어...윤승호님? 저흰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금발의 청년이 미심쩍어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예?"라고 멍청하게 반문했다가 두 사람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얼굴 근육이 경직 된 나는 비릿하게 끼쳐오는 피 냄새가 더욱 독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냄새를 저들이 못 맡는 것은 당연했다. 눈가가 심하게 파들거렸다. 귓속을 파고드는 이명이 더욱 심해지고 이제는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하는 와중에도 환각이 보인다. 금발과 갈색머리의 두 사람이 네 사람이 되고, 여덟 사람이 되고, 어느새 갑옷을 입고 달려가는 병사들이 되어 빗발치는 화살에 목이 꿰 뚫려 절명하고 만다. "흡-"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비틀거리는 몸을 한쪽 벽에 기대어 겨우 지탱했다. 방안은 어느새 고함과 절규가 난무하는 성 밖의 전쟁터로 변하고 있었다. 말을 탄 지휘관이 검을 높게 치켜올리며 전진을 외치지만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무릎을 꺾는 병사들이 늘어만 간다. 그 와중에 거대한 사다리를 성벽에 대느라 안간힘을 쓰는가 하면 성 주위에 에드바라하의 병사들이 설치해 놓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병사도 있다. 유현의 군대가 쏘아올린 화살에 맞아 성벽 위에서 곤두박질치는 에드바라하의 병사들도 상당했다. 욕설과 고함이 죽기 직전의 단말마와 섞이어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피냄새와 땀냄새, 무시무시한 살기가 한데 어우러져 지독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길드원이 걱정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다가와 물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머지 손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했지만 내 두 눈은 이미 방안의 풍경을 담고 있지 못했다. 눈에 비친 장면들이 떨어져 나갈 줄을 모르고 함성과 비명소리는 길드원들이 재차 묻는 말소리와 섞여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뭐라고요?" 눈동자에 힘을 주어 바라보니 갑옷을 입고 창칼을 치켜 올리며 전진하는 병사들의 모습 뒤로 흐릿하게 방안의 풍경이 겹쳐진다. 마치 텔레비젼의 채널이 혼선된 느낌이다. 길드원들이 다가와 무언가 열심히 말을 하는데 고장난 테이프의 녹음된 음성을 듣는 것처럼 문장이 끊겨서 들린다. "...니까! 침대에서 쉬시라구요!!!" 참다못해 거칠게 어깨를 흔드는 금발청년의 손에 의해 훅-하고 영상과 음향이 꺼졌다. 순식간에 방안은 고요가 맴돌았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전투소리가 거짓말 같았다. 새파랗게 질려서 나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침대로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얼굴에서 식은땀이 났다. "무슨 병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야..." "아니, 괜찮아요. 이런 상황에 의사라니 말도 안돼요. 그냥 좀 쉬면 나아질 거니까 나 깨우지 말아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억누르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망연히 바라보는 네 개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침대 밑으로 몸이 꺼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머리가 어질어질 하는 감각에 정신을 맡겼다. "정말 괜찮은 건가? 완전 새파래져서는, 저 사람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어..." "라노대장은 아무 말 없었잖아. 몸이 약한 건 아니라며. 대체 저렇게 허약한 정신력으로 어떻게 왕을 홀린 거야?" 복도쪽 창가에서 도란도란 말하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잘 들렸다. 허공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뭐야, 설마 내가 진짜로 유현을 꼬셨다고 생각하는 건... "그러고 보면 출신부터가 수상해. 에드바라하의 생존자라는 거 맞아? 카이님이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 "하지만 라노 대장도 그렇고 루센형도 그렇고 카이님도...저 사람한테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다고. 그 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거 아니겠어?" 금발이 고개를 저으며 갈색머리의 청년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갈색머리는 눈을 무섭게 빛내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너 루센형이 저 사람한테 대하는 거 봤냐? 아무리 카이님의 동생이라도 그렇지. 그 무뚝뚝한 형이 완전 녹더라 녹아. 친동생이라고 해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아까 라노대장도 그래. 유디스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둥 네가 안전해야 맘 놓고 싸울 수 있다는 둥. 그거 보통 애인한테 하는 말 아니야? 이건 길드 내에서 은근히 도는 소문인데 카이님이 어디서 남색관련의 전문가를 데려왔다고..." "야, 야. 말 조심해! 누가 들을라!" 금발이 황급히 갈색머리의 말을 가로막고는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별궁의 꼭대기 층인 이곳엔 경비하는 병사들이 복도를 걸어 다니며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볼 뿐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나는 빼고 말이다. 정말이지 저런 얘기를 듣는 것은 귀족 영감탱이들의 푸념으로도 족하다고. 민태와 루센까지 싸잡아서 유현과 같은 취급이라니 이 사람들 대체 자신들의 동료를 뭘로 보는 거야? 더구나 저 갈색머리, 나를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거냐?! 왠지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해서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 싫어 졌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런 데서 얼쩡거리고 있지? 나는 왜 또 이런 식으로 허공을 부유하고 있지? -와아아아아아아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성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는 점점 가까워 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싸움이 계속 될 건지, 누가 이기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다. 새까만 병사들이 밀물처럼 성을 향해 밀려오면서 마치 파도가 부딪히듯 성벽 아래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기어코 사다리가 걸려 그 위를 기어 올라가는 것에 성공한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검으로 에드바라하의 병사들을 쳐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올라오던 다른 병사들은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맞거나 뜨거운 기름이 들이 부어져 듣기에도 살벌한 괴성을 지르며 성 아래로 떨어지곤 했다. 성 아래에서는 불화살이 빗발쳐 궁수를 보호하는 바리게이트에 쏘아졌다. 건조한 기온과 가을의 순풍에 의해 바싹 마른 나무재질의 바리게이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이 거세어졌으나 병사들은 불붙은 부분만 쳐서 아래로 밀어내었다. 그러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구조물이 뜨거운 기름이 부어진 병사들의 몸 위로 떨어져 산채로 불이 붙은 병사는 버둥대며 바닥을 구르는 것이다. -쿵 어디선가 돌덩이가 날아와 와지끈 소리를 내며 성벽 위에 쌓아두던 바리게이트의 한쪽이 무너졌다. 개미같이 바글거리는 병사들 사이로 정체불명의 포차가 운반되어 왔고 숟가락처럼 생긴 목재기구에서 쉴 새 없이 돌덩이들이 날아들어 성을 공격했다. 일부는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일부는 성벽 너머, 멀쩡한 건물을 파괴시키기도 했다. "빌어먹을, 우리들의 성을 우리 손으로 파괴해야 하다니..." 포차의 사격을 지휘하던 군인이 나직하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는 곧 손을 들어 올려 포격을 재차 명령하였고 병사들은 창과 활 대신 돌덩이를 나르고 있었다. 벌레떼가 성벽에 붙어서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불화살이 난무하고 여기저기서 죽어가는 병사들이 부지기수다. 무모한 정면 승부였다. 유현의 군대는 성을 돌아서 뒤를 친다던가 산을 타 넘는 방법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긴, 만일 그랬다면 산에 매복하고 있는 길드원들에게 각개 격파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성추는 아직도 준비 안됐나!!!" 후방에서 지휘관들이 말을 타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있었다. 부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녔지만 전투는 별다른 성과 없이 소모전만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에버린 영지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소?! 이런 장난감 같은 도구론 성문 근처도 못 갈 거요!" "급조한 기구라 이것이 한계입니다! 투석기와 사다리를 만드는 것도 간신히 시간을 맞추어 온 것이구요!" "이런 망할! 뭐 이딴 무식한 싸움이 다 있소! 병력이 많으면 뭐 한답니까! 그 어느 때보다 준비도 미비하고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상대에게 정면 돌파라니!!" "하지만 시간을 끌 수록 불리해 지는 것은 우리입니다! 곧 겨울이라구요!" 지휘관들의 의견이 충돌하는 가운데 애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전투는 해가 남향에 걸릴 때까지 계속 되었고 어디선가 커다란 뿔 같은 것이 기기긱-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운반 되어 왔다. 병사들 수십 명이 그 뿔에 달라붙어 돌격하는 모습은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정말 무식하기 그지 없었다. 병력을 들이붓던 유현의 군대는 생각보다 끈질기게 공격해 왔다. 성벽 위의 바리게이트는 불타고 있었고 벽에 달라붙어 있던 사다리들도 불을 뿜고 있었다. 왕의 군대는 성문에 뿔같이 생긴 나무기둥을 들이 박아 밀어 넣고는 불을 붙여 폭파 시켰다. 퍼걱-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고 굳게 닫힌 성문이 너덜너덜하게 되었지만 그 뒤에 막아놓은 엄폐물이 너무 단단해서 그런지 문은 열리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연약해진 성문을 향해 또 다시 다른 나무뿔을 운반해와 종을 치 듯 문을 두드렸다. "전하! 이대로 소모전을 펼치다간 이기더라도 피해가 너무 큽니다! 차후를 도모하여 좀 더 준비된 상태에서 적을 공격하는 것이..." "부관, 지금 농담하는가? 우리에겐 다음이 없어! 우리가 준비하는 시간 만큼 저 녀석들도 시간을 버는 거야. 모르겠나!" 병사들 사이에 섞여있어 자칫 지나칠 뻔했지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하는 갑옷은 역시 눈길을 끌었다. 유현은 비오듯 땀을 흘리며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녀석은 굉장히 초조해 하고 있었다. "저것은 우리의 성이다. 저 성의 약점은 우리가 가장 잘 알아! 지금 당장 피해가 얼마냐, 이기고 난 후의 손해가 어떠냐, 하는 한가로운 얘기를 할 여유 없어! 병력은 우리가 위다. 밀어 붙이면 이길 수 있다!!" 강하게 못을 박고는 유현은 말을 달려 앞으로 뛰쳐 나갔다. 녀석은 씨근덕거리며 전진을 외쳤지만 내 눈에는 파도가 바위를 때리듯 병사들의 물결이 성벽에 부딪쳐 속절 없이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까지 해서 녀석이 과연 승리를 할 수 있을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퍼런 실핏줄이 올라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음성은 유현의 목소리 같지 않았고 며칠 동안 밤잠을 못 잔 건지 눈이 빨갛다. 그런 녀석의 태도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평소의 진유현은 느긋하고 남을 몰아 붙일 때는 계획된 행동아래 차근차근 말려 죽이는 것을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유디스가 차분히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 유현이란 인물과의 차이점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무모하지 않은가 싶다. 꼭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아. 또한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방패로 쏟아지는 화살과 기름을 막으며 성벽을 기어 올라가는 병사들의 비정상적인 투지도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성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들의 지휘관을 믿는 건지, 아니면 전쟁이란 최면에 빠진 건지 제삼자인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점점 죽고 죽이는 이 지옥의 현장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이것은 지난번의 전투에도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찰나의 순간 극단적인 감정들이 수도 없이 교차한다. 감각이 무뎌져 마비 상태가 된 나는 마치 영화나 게임을 보듯 무덤덤하게 관람하고 있었다. -윤승호님! 윤승호님! 귓가에서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짝거리는 금발을 짧게 친 청년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에 적응이 안되어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무슨...일이에요?" 멍청한 목소리로 입을 여니 안도의 한숨을 쉬는 두 사람이 보인다. 갈색머리 청년이 들고 있던 쟁반을 앞으로 내밀었다. "식사입니다. 너무 깊게 주무시는 것 같았지만 아침도 거르셨기에..." 벌써 점심 때인가? 몸을 일으키며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수프를 보았지만 식욕은 없었다. 방금 전 만해도 산채로 사람이 불에 타고 화살에 눈이 뚫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입맛이 날 리 없다. 기분이 찝찝하다. 밖에선 죽어라 싸우는데 나는 여기서 한가롭게 밥이나 먹다니, 앉은 자리가 불편하고 버섯국이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남의 먹는 모습을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두 사람 때문에 더욱 속이 거북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머뭇거리는 갈색머리가 짜증 났다. 당신, 아까 하는 얘기 다 들었다고. 괜히 그 청년을 째려보고 있는데 금발의 청년이 얼굴 가득 근심을 담고 물었다. "아까 주무실 때,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호흡도 없이 자는 건 처음 봐서..." 금발의 말에 잠시 손을 멈췄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식사를 계속했다. 입안에서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거 같이 개운하지가 못하다. "심장이 뛰고 있나 확인 해 볼까도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나가 있는 동안 육체는 거의 죽은 상태 인 것 같다. 이게 들키면 완전 나를 환자 취급할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다. 민태가 알기라도 하면 정말 아득하군. 정신병자에다가 때때로 호흡이 멈추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할 거 아냐... 잠버릇이라며 무책임한 대답을 해주자 두 사람은 멀뚱멀뚱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투는 사흘 낮 밤을 계속 되었다. 쉬지않고 싸웠다는 뜻은 아니다. 처음엔 밤이 되면 쉬기도 하고 날이 밝아야 다시 싸웠다. 마치 시~작 이라는 신호라도 되는 듯이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 의미 모를 괴성과 함께 유현의 군대가 달려 들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성 위에선 화살과 돌덩이가 빗발치는 것이었다. 공격하는 자들도 막으려는 자들도 필사적이었다. 계속되는 인간 파도에 성벽이 움찔하고 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유현의 군대는 그 기세가 대단했다. 병사들은 성 아래에서 그렇게 쉴새없이 성문을 두들기고 있었고 평원의 후방에선 무언가 뚜닥뚜닥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급기야는 이동식 사다리 같은 것이 만들어 져서 그 위에 올라가 궁수들이 성벽을 향해 불화살을 쏘아대기도 했다. 성문은 너덜너덜 해져서 금방이라도 열릴 듯 위태로웠다. 그리고 이내 "와아아아아아---!!!!"하는 거대한 함성이 들렸고 아슬아슬하게 흔들거리던 문이 와지끈 소리를 내며 열렸다. 위에서 기름과 돌덩어리들을 던지던 병사들은 사색이 되었고, 아래에서 방패로 떨어지는 무기들을 막고 있던 병사들은 기세가 등등해져서 열린 성문으로 일제히 진격해 들어 갔다. 들어가자마자 그들에게 쇠꼬챙이가 촘촘히 박힌 수레가 달려들었다. 바닥의 함정에 걸려 절명하는 병사들도 믾았다. 그러나 한번 문이 열리자 군대의 사기는 한껏 치솟아서 물밀듯이 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함정이 있다고 뒷걸음질 치고 싶어도 뒤에서 미는 동료들 때문에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만다. "성문이 열렸다아아---!!!!!" 세 번째 밤은 그야말로 날이 새도록 치열하게 싸워댔다. 문이 열린 마당에 더 이상의 후퇴도 없었다. 성을 기어오르는데 성공한 병사들의 뒤를 따라서 다른 병사들도 사다리를 타고 개미떼가 올라가듯 성벽을 넘었다.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왕의 군대에 의해 처음에는 승리를 장담하던 에드바라하의 정예 멤버들도 안색이 파리해 져서는 지휘관급의 인물들까지 전투에 나섰다. 전투 초반만해도 성을 함락하는 것은 절대 무리라고 고개를 젓던 장교급 부하들도 기어코 성문이 열린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비교적 성의 입구쪽에 위치한 연회용 별궁까지 병사들이 쳐들어 왔다. 기병과 보병이 한데 얽히어 서로를 베는 광경은 살육 그 자체였다. 분수대는 물과 함께 피가 흘러 넘쳤고 화단은 시체들이 거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쓰러진 병사의 몸통이 말발굽에 의해 짓이겨지고 한쪽 팔이 떨어진 채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병사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건 하얀 말 위에 올라탄 진유현이었다. "윤승호-!!! 어딨어 윤승호----!!!!" 검붉은 핏물이 튀어 황금색의 갑옷 절반이 다른 색깔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을 표적으로 덤벼드는 병사들을 귀찮다는 듯이 검으로 베어 버리고는 내 이름을 부르며 미친 듯이 성 안을 헤맸다. 살짝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것이... 눈동자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거칠게 내쉬는 호흡이 불안정하다. 언제 휴식을 취했는지, 잠은 잤는지, 자세히 보면 살짝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휘두르는 팔의 움직임도 둔하다. 내 착각인가? 투구도 어디다 팽개쳐 놓고는 머리끝부터 피를 뒤집어 쓴 모습이 악귀의 형상이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얼굴의 절반이 피투성이다. 그것이 자신의 피인지 타인의 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나는 과거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머리카락, 비정상적으로 기괴하게 뒤틀리며 번들거리던 녀석의 눈동자. 살갗을 뜯어 피맛을 보던 피로 얼룩진 입가. 숨이 막혔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윤승호--!!!! 나와라 윤승호!!! 나다!! 내가 왔어---!!!" 악몽이었다. 끔찍한 악몽이 반복되는 착각을 일으켰다. 설마 저 자식은 저렇게 귀신 같은 모습을 하고 나를 구하러 왔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를 강간할 때와 똑같은 형상으로 나를 찾으며 에드바라하에게 이용당하는 나를 도우러 온 거라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지금 내가 제일 무서운 건 너다! "으아아악!!!" 나쁜 꿈을 꾸고 깨어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놀란 두 길드원이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소리쳐 물었다. 심장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 쉰 나는 그들의 질문에 답할 생각도 없이 멍하니 허공만을 응시했다. 망막에 피투성이의 유현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검은 핏덩이가 말라붙은 갑옷 위에 새로이 뜨겁고 새빨간 피가 쏟아졌다. 하얀 말의 이곳 저곳에도 선혈이 튀어 지저분하게 묻어 있다. 성 안을 휘저으며 활보하는 유현을 길드의 궁수들이 활로 겨냥하지만 주변의 다른 기병들과 보병들에 묻혀 좀처럼 조준하기 힘든 듯했다. "윤승호님? 물을...." 금발의 길드원이 가져다준 물컵을 마시며 호흡을 골랐다. 사흘간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다 깨길 반복한 나를 뭐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그들로서도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 편이 경호하기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저어... 아무래도 장소를 옮겨야 할 듯 싶습니다." "...왜요?"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벌써 밖에서 들리는 함성소리가 이만큼이나 가까워 졌다. 이 별궁에서 기거하는 눈치 빠른 귀족들이라면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아래층은 울고 불고 난리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말하며 금발 청년이 목소리를 떨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성의 입구쪽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중이었지만 성밖에서 대기하는 병력은 사흘간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았다. 우리쪽의 피해도 크다. 나는 빠르게 단념하고 유현이 침투해 들어 왔다면 이미 함락된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어서 나갑시..."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아직도 의식의 절반이 전투현장에 있던 나는 걷다 말고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비틀거리면서 침대 위로 다시 주저앉으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무슨 병이라도 있으신 것 아닙니까?! 왜 자꾸 이러십니까!" 급박한 상황에 마음이 초조해졌는지 결국 금발청년이 화를 내고 만다. 울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나 역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방금 눈앞에 비친 영상은 분명 한도훈이었다. 그리고 그 한도훈이 진유현과 대치하는 장면을 보고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카이가 위험해..."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진유현과 일 대 일로 대치 하다니 총 지휘관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무모하게 나서도 되는 거야? 주변에는 진유현뿐만 아니라 녀석의 병사들도 있다. 물론 에드바라하의 병사들도 서로 엉켜 싸우고 있다. 그런 현장에 왜 네가 나서는 거냐고! "나, 나는 도망갈 수 없어요. 나만 이렇게......" 빌어먹을, 한도훈이 여기서 죽으면, 나는, 나는, 내가 만든 이 세계를 저주하고 저주하고...이딴 세계 망해 버리라고 저주할 거다!!! 하지만 의문을 표시한 금발머리의 표정은 금새 험악하게 바뀌어 내 팔을 잡고 소리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무튼 우리는 라노대장한테서 당신을 부탁 받았단 말입니다! 성의 입구가 열린 이상, 당신을 여기 둘 수 없어요! 에드바라하가 망해도 라노길드는 건재하고, 살아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허약한 소리는 하지 말아요. 일단 살고 보는 거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금발의 청년은 나를 들쳐 업고 뛰기 시작했다. 옆에서 바라 보고 있던 갈색머리의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따랐지만 그 표정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나는 그것을 굉장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분이 든다. 이제 와서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고맙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또래 평균키인 나를 업고 뛰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도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내려달라고 꿈지럭 거리다가 "아픈 사람은 가만히 있어요!"하고 버럭 소리지르는 탓에 무안해졌다. 달리기 편하라고 목을 끌어 안고 눈을 감았다. 눈만 감아도 진유현의 모습이 보인다. 한도훈도 보인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그러니까...둘 다 내 세계에서 죽는 꼴은 절대로 못 본다. 피를 뒤집어 쓰고 노려보는 진유현을 한도훈이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찾는다고 유현이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 탓에 전투현장과는 조금 동떨어진 곳이었다. 피튀기는 아수라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련하다. 마치 이곳에만 보이지 않은 막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두 마리의 말이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를 하듯 조심조심 이동했지만 어느쪽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뮤디오 카이 에드바라하라고 합니다." 한도훈은 한 손을 가슴에 들어 올려 제법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머리는 숙이지 않았다. 숙였다간 언제 저 유현의 검이 날아올 지 모를 일이었다.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진유현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윤승호 어디에 숨겼어." 독기가 풀풀 풍겼다. 녀석의 등 뒤로 시커멓고 탁한 연기가 피어 오르는 환각을 본 것도 같다. 그러나 한도훈은 진유현의 살기를 눈치 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고서도 저렇게 담담한 건지, 그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승호는 더 이상 전하의 신하가 아닙니다." 한도훈이 무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진유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서로의 주변을 맴돌며 탐색하던 두 마리의 말들도 점점 호흡이 거칠어 진다. 진유현이 피가 말라붙어 이제는 무뎌질 법도 한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뒤로 물러 났다. 마치 도움닫기 하기 직전의 운동선수처럼. "윤승호를 이용한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나한테 바쳐 놓고 이제 와서 빼앗아 가겠다고? 어림 없는 소리다!" 한도훈의 눈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현이 달려들었지만 도훈의 대응은 침착했다. 두 마리의 말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검이 교차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말에서 떨어졌다. 육중한 갑옷을 입고도 땅을 구르며 벌떡 일어난 두 사람은 땅을 굴렀던 그 반동으로 서로에게 달려 들었고 검과 검이 몇 차례 부딪혔다. "에드바라하의 전멸을 약속하지! 너를 죽이고 승호를 되찾으마!!" "놀랍군요! 승호가 우리에게 이용당했다고 믿는 겁니까? 배신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웃기지 마라! 그런 얄팍한 이간질에 속을 줄 알아!!" 무서운 속도로 진유현이 몰아붙였다. 방금 전만해도 말 위에서 비틀거리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정확한 목표물 없이 마른 가지 쳐내듯 휘두르던 팔의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졌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의 마찰음과 함께 두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나는 한도훈이 진다고 생각했다. 유현의 기세는 어마어마했고 도훈은 그런 유현의 검을 맞받아치며 뒤로 물러나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얼굴이 베일 뻔하고 옆구리가 찔릴 뻔했어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행여나 승호에 대해 오해하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유현의 강한 타격을 퉁기며 뒤로 밀려난 도훈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얼굴엔 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크게 지친 모습은 아니었다. 유현은 그제야 한도훈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피가 말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슨 뜻이지?"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윤승호가 계획적으로 배신한 거라고 믿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흥, 그런 거 녀석을 모르는 놈들의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왜 네가 그런 거에 안심하는 거냐?" "승호는 당신에게 오해를 사면 가슴 아파할 거니까." 유현의 손이 움찔했다. 녀석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나한테까지 전달되어 왔다. "나는 승호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당신 말대로 승호를 이용하는 꼴이 되어 버렸지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승호도 이해해 주었고 그 아이는 이제 완전히 에드바라하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유디스왕, 나는 당신의 나라를 넘겨 받는 것으로 윤승호는 물론이고 그동안 나를 따라왔던 부하들에게 보답을 할 것입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한도훈의 눈은 무덤덤함을 버리고 상대를 태워버릴 듯한 열기를 담고 있었다. 검을 고쳐 잡은 손이 더 이상의 봐주기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투지를 잃어버려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쪽은 유현이었다. "이상한 말이군. 마치 나를 쓰러뜨리는 것에 승호도 동의한 것처럼 들린다. 내게 오해 받는 것을 슬퍼하는 녀석이 왜 너를 이해한다는 거지? 윤승호를 에드바라하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고? 헛소리! 잔뜩 이용해 먹고 필요 없어지면 버릴 속셈 아닌가!" 검을 겨누는 한도훈의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마치 예전에 테이그가 가르쳐 주었던 검술 자세의 교본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씁쓸하게 웃는 모습은 어딘가 위화감을 들게 했다. "승호는 우리의 귀중한 동료입니다. 버리는 일 따윈 없어요. 승호는 당신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당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확실한 것은 소르왕조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알고 계십니까? 승호는 당신이 살아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이 왕으로써 남길 바라는 건 아닌 것 같군요." 진유현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는 것 같더니 이내 분을 못 참고 정자세를 하고 있는 한도훈에게로 달려들었다. 테이그에게서 배운 얼마 안된 쥐꼬리만한 나의 검술지식으로도 볼 때 저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침착하게 빈틈을 파고든 한도훈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나! 네가 승호와 나에 대해 뭘 알아!!!"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유현이 막무가내로 내리치고 있었다. 차분하게 맞받아치며 날카롭게 호를 긋는 한도훈의 검날은 흔들림 없이 정확했다. 그러나 그 정확한 공격을 막아내는 진유현도 대단해 보였다. 교차하는 검날에서 금방이라도 불꽃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검술교본을 그대로 그려내는 듯한 한도훈의 움직임은 깔끔하게 똑 떨어져서 멋있긴 했지만 공격이 제대로 먹히진 않았다. 반대로 아무렇게나 내리친다고 생각했던 유현의 검은 의외로 화려했다. 하지만 감정 조절이 안된 탓인지 쓸데없는 움직임이 너무 많아 상대에게 상처를 못 입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함부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마라!!!" 거칠게 들이미는 검날을 막아내며 한도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 검자루가 맞닿아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어느쪽도 먼저 물러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현의 얼굴이 도훈의 코앞에 있었다. 악의와 분노가 가득 담긴 유현의 귀신같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은 한도훈 입장에선 고욕이었으리라. "너 혹시..." 가늘게 뜬 진유현의 눈 속에서 묘한 빛이 반짝거렸다. 입꼬리가 올라가자 입가의 근육이 움직이면서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음습하게 일렁거리는 진유현의 얼굴에 한도훈이 뒤로 주춤하며 얼른 몸을 피했다. 힘겨루기에서 밀려난 도훈을 유현은 칠 생각도 안한 채 그대로 멀찍이 떨어져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호라~ 너도 그 자식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냐?" 턱을 쓰다듬으며 빈정거리는 그 태도에 한도훈의 어깨가 움찔 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느라 도훈 역시 반격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하긴,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놈을 던져 줬더니 나를 녹여놔서 깜짝 놀랐기도 했겠지.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은 거냐? 녀석이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착착 감기는지...아니, 어쩌면 이미 확인이 끝난 건가? 그래서 동료니 뭐니 쓸데없은 핑계로 이번엔 네 옆에 둘 속셈인가?" 입가를 일그러뜨린 유현은 천박한 눈빛으로 얼어붙어 있는 한도훈을 훑어 보았다. 칼자루를 어깨에 매며 과장스런 몸짓까지 섞어가는 유현은 듣기에도 낯부끄러운 소리를 뻔뻔하게 내뱉고 있었다. "흐음~ 알고 있어? 그 자식이 처음에는 목석 같지만 한번 달아오르면 귀여운 소리를 내며 엉겨온다는 걸. 등줄기를 핥아 줄 때 내뱉는 한숨이 얼마나 달착지근한지...허리에 감기는 허벅지 안쪽이 어떤 식으로 경련을 일으키는지...배꼽의 오목한 곳에 혀를 넣어 돌리면 어떻게......" "그만 둬!!" 방심상태라고 생각했던 유현이 빠르게 도훈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도훈이 이빨을 짓씹으며 달려들자 유현도 눈을 빛내며 맞상대했다. 눈동자는 욕정으로 반들거리며 자기 말에 심취해 있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윤승호를 네가 아나? 입 안 가득 녀석의 것을 물고 있을 때 어떤 식으로 허리를 뒤트는지, 사정직전의 얼굴이 얼마나 색스럽고 이 세상 어떤 음란한 광경보다 자극적인지 너는 아나? 뜨거운 내부가 얼마나 나를 미치게 하는지 알아?!! 모르지? 그렇지? 너는 모르지---!!!!" 기이하게 뒤틀린 입가는 웃는 것 같기도 했고 화내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한도훈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이빨을 악 다물었다.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도 허공에 흩뿌려지는 땀방울도 슬로우모션이 되어 두 사람의 움직임이 느리게 흘러갔다. 창피해 죽을 거 같다. 얼굴에 확확하고 열기가 치솟는다. "에드바라하의 일원이라고? 헛소리 마라! 가늘게 내쉬는 신음성도 내 꺼고 땀에 젖은 얼굴도 다 내 꺼야! 손가락, 발가락, 다리 사이의 그것까지 남한테 안 줘! 안 준다구!! 윤승호 내놓으란 말이야 이 에드바라하의 배신자야--!!!" 누가 저자식 입 좀 막아줘! "당, 당신이 그렇게 저질스런 인간인 줄 몰랐군! 잠시라도 왕에 대한 예우를 취하려 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당신 머릿속에 그런 것밖에 들어 있지 않다는 거 잘 알았어! 그러니 이 나라는 내가 받겠다!" 드물게 화를 내는 한도훈과 이미 제정신이 아닌 유현이 부딪쳤다. 이를 아드득 하고 깨무는 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기합을 넣으며 서로에게 달려들고 몇 합을 부딪치고, 그러다가 쓰러지면 다시 몸을 굴려 일어나서 상대에게 반격을 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전투는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성 안으로 병력이 들어온 이상 전면전 뿐이었다. 에드바라하의 병사들도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알고 죽기살기로 저항했다. 그래서 좀처럼 유현의 군대는 안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숫자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어느쪽도 자신들이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유현의 군대는 자신들이 정예부대이며 머릿수가 많다는 것에 승리를 확신했고 한도훈의 군대는 치밀한 준비성과 길드원 특유의 소수병력 싸움에 대한 자신감으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밤이다. 야간 전투는 자신들쪽이 더 유리하다고 길드원들은 믿고 있었다. -둥둥둥둥둥둥 -고오오오오옹 불길한 뿔피리 소리와 북소리가 멀리 서쪽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유현과 도훈의 싸움에서 고개를 돌려 북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서쪽 구릉 위에서 태양을 등지고 또 다른 무리의 군대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깃발은 처음 보는 디자인이었고 말을 탄 기병보다는 보병의 수가 훨씬 많았다. 갑옷도 없이 노출 된 근육은 갑옷보다 더욱 단단해 보였고, 도끼와 물결모양으로 휘어진 칼날의 무기는 그들의 몸에 새겨진 문신과 어울려 마치 야만인처럼 보이게 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낯익은 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도훈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자신의 갑옷을 적셨다. 숨을 몰아 쉬는 유현의 옆구리에서도 왈칵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몸에서 나는 혈향의 비린내를 깨닫자 의식은 순간적으로 성 안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유현의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 부릅뜨고 있었으며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쪽 팔을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으로 검을 쥐고 있는 한도훈의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처음 유현의 앞에 나타났을 때의 깨끗한 모습은 사라지고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이제 몇 번만 검을 부딪히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나는 그런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내가 한도훈에게 유현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한도훈의 저 살기는 진짜다. 그리고 진유현 역시 탁한 살기를 뿜으며 한도훈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이럴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무력하고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다. 육체가 있다면 손톱이라도 깨물었겠지만 지금은 세상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어지러울 뿐이었다. -챙그랑 한도훈의 무릎이 꺾이며 검이 하늘 위로 날아 갔다. 앗-하는 사이에 검을 놓친 도훈은 정수리에 내려쳐지는 유현의 검을 피해 몸을 옆으로 날렸다. 바닥을 구르며 검을 줍기 위해 달리는 도훈을 유현은 놓치지 않고 쫓았다. 유현은 검을 높게 치켜 올렸고 포기하지 않은 한도훈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주우려는 찰나였다. 두 사람의 사이를 시커멓고 커다란 물체가 갑자기 뛰어 들었다. "유디스--!!!" 아디움...아니 오세준이었다. 검은 말을 타고 갑옷에 투구까지 착실히 쓰고 있는 모습이라 자칫 못 알아 볼 뻔했지만 저 목소리와 얼굴은 오세준이 분명했다. "유디스 후퇴하자! 문제가 생겼어--!!!" 말을 거칠게 몰며 오세준은 고의적으로 한도훈과 진유현의 사이를 벌려 놓고 있었다. 검을 주워 드는데 성공한 도훈과 유현의 사이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던 오세준은 유현의 옆구리에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얼른 말 위에 올라 타! 빨리!" "코 앞에 에드바라하의 가주가 있는데 여기서 물러나란 말이냐!" 그 말에 오세준이 놀란 얼굴로 한도훈을 바라보았다. 도훈은 검을 고쳐 쥐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 나고 있었다. 말을 탄 상대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를 것만 같았던 오세준은 말을 탄 채 한도훈에게 다가가다 말고 멈칫했다. 멀리서 북소리가 둥둥둥-하고 들린다. "제기랄! 아무튼 지금은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 후퇴다! 빨리-!!" 한도훈에게 덤벼들려는 유현을 막아 서면서 오세준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도훈이 재빨리 말 위에 올라 타는 것을 보고 유현도 자신의 흰 말을 찾아 탔다. 피와 흙탕물에 얼룩져 백마라고 보기도 어려운 유현의 말은 긴장했는지 거칠게 콧김을 내쉬고 있었다. 유현은 한도훈을 향해 다시 돌진하려고 했다. 한도훈도 검을 고쳐 쥐며 돌격 태세를 갖췄지만 오세준이 나서서 방해했다. "이 멍청아! 기분은 알겠지만 후퇴란 말이다! 드루키아가 후방을 공격하고 있다구-!!" "뭐라구?!!" "우리가 싸우려고 할 땐 코빼기도 안 비치던 드루키아가 이제야 나타났어! 그것도 에드바라하를 지원하러! 가뜩이나 피해가 막심한데 여기서 더 버티다가는 진짜 전멸하고 말 거다!!" 진유현은 멀찍이 떨어져서 공격해 오길 기다리는 한도훈을 바라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한도훈은 어쩌면 저 북소리가 누구의 지원 병력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게 안도하는 한숨을 쉬는 것 같았지만 표정만은 딱딱했다. 유현은 숨쉬는 것 조차 힘에 부치는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식식거리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베어져 나오는 옆구리의 상처가 보기에도 끔찍하다. 머리는 산발에 온몸이 피투성이인 귀신 같은 몰골을 하고서도 피가 말라붙은 시커먼 얼굴에 눈만 반짝거렸다. "...시끄러..." "뭐?" "후퇴 같은 소리하네...바로 눈 앞에 윤승호가 있는데 여기서 물러 나라고? 곧 함락이야! 이런 성 따위 빨리빨리 함락해버리면 우리쪽이 승리하는 거다!!" 이미 이성을 잃고 유현이 날뛰려고 했다. 가로막는 오세준조차 베어버릴 기세여서 세준은 혀를 찼다. "유디스. 징계는 나중에 받을게." 한도훈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이를 가는 진유현을 바라보며 오세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유현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이다. 소리도 내지 못한 유현의 눈동자가 황당함을 담고 서서히 감겨졌다. 오세준은 말에서 굴러 떨어지려는 유현을 잽싸게 받으며 자신의 말 위로 유현의 늘어진 몸을 옮겼다. 도훈이 그런 오세준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세준은 낮게 코웃음 치더니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한도훈에게 일격을 가했다. "가주씩이나 되는 놈이 호위도 없이 혼자 유디스랑 맞장뜨고 있을 리가 없지. 어딘가에서 궁수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을 거야 그렇지?" 제법 날카로운 지적에 한도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면서 오세준이 비릿하게 미소 짓는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이쯤에서 타협하지요. 가주님. 내가 막지 않았다면 당신은 유디스에게 큰 부상을 입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를 그냥 곱게 보내줘." 한도훈이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손이 높이 치켜 올려 멀리 있는 상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손을 올린 자세가 무슨 신호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니 오세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오세준이 쓴 웃음을 지으며 유현을 데리고 주춤주춤 물러 나더니 급히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피에 얼룩진 백마가 달렸고 그들이 달린 방향에는 아직도 에드바라하와 왕의 군대가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에드바라하...아니, 옷차림을 보니 길드원이다. 활을 겨누고 있던 길드의 궁수들은 한도훈의 손동작에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카이님은 왜 꼭 일 대 일로 싸우겠다고 나서서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드시는 건지." "저 말 탄 사람은 쏘면 안 돼?" "쏘지 말라고 신호 하셨잖아. 라노대장이랑 달라서 카이님은 엄하시단 말야." 투덜거리던 그들 중 한명이 망연히 서있던 한도훈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함성과 어우러져 진동하고 있었고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는 서쪽 해는 대지에 길다란 그림자를 뿌리고 있었다. "휘유~ 아무래도 신은 우리 편인 것 같아." 중얼거리는 궁수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멍하니 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세 좋게 몰아 붙이던 유현의 군대는 돌연 떨어진 퇴각명령에 주춤했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사람을 돼지 잡듯 치고 들어오는 드루키아의 존재를 알고 경악했다. 에드바라하는 성의 입구를 전장터로 내 주었지만 정문과 가장 가까운 몇몇 지점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더 이상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불허하고 있었다. 성 안으로 치고 들어 갈 수록 미리 유리한 고지를 자리잡은 궁수들이 건물 위에서 화살을 쏟아 붇고 있기에 성 함락이 쉽지는 않았다. 안과 밖에서 갇힌 꼴이었다. 앞에는 에드바라하가, 뒤에는 드루키아가 있었다. 같이 싸우다 지친 에드바라하만이라면 머릿수로 밀어 붙이련만 등 뒤에서 체력만땅의 드루키아족이 달려드니 사기 등등하던 유현의 병사들도 점차 질리기 시작했다. 오세준은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왕 대신 퇴각 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은 장수들은 안타까워하며 명령을 하달했다. 성문이 열린 판국에 후퇴라니 억울해서 눈물을 뿌리는 병사들도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전장은 에드바라하, 드루키아, 왕의 군대가 한데 얽히어 뒤죽박죽의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죽이는 자의 비명도 죽는 자의 비명도 모두 섞이어 어둡고 진득한 웅덩이에 고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 진득한 웅덩이는 나였다. 온갖 독하고 극단적인 감정들이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감당하지 못할 온갖 인간군상의 에너지들이 나를 올가미 속에 가둬두고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느새 주변은 깜깜해지고 옆에서 아롱거리는 촛불만이 좁은 골방을 비춰주고 있었다. 내가 정신차린 것을 확인한 금발이 엉엉 울면서 나를 끌어 안았다. 빠끔히 열린 골방 밖에서 갈색머리가 만세를 부르며 요란스럽게 뛰어 다니는 모습이 비춰졌다. 갈색머리의 청년 역시 울고 있었다. 밖에서 환호의 소리가 들려온다. 에드바라하가 이긴 것이다. 양측에 엄청난 피해를 내고 사상자와 부상자의 처리만 해도 몇 달이 걸릴 거라는 전투가 끝난 뒤 남은 것은 폐허였다. 비교적 성문 입구쪽에 있던 연회장은 병사들의 시체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자주 다니던 산책로에도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성벽과 성문은 완전히 파괴되어서 너덜너덜했다. 그러다가 나는 병사들이 시체를 치우는 현장에서 하얀 말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인을 잃은 말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지저분하기 그지 없었으나 화려한 장식과 황금의 안장을 보고는 누구의 말인지 짐작 할 수 있었다. 목줄기에 화살을 맞고 배에는 치명상인 듯 가로로 길게 베어져 있었다. 그 사체는 싸늘하게 식어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어대는 나를 병사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많은 정치적 진통에도 불구하고 에드바라하의 정권을 위협할 뚜렷한 세력은 없었다. 자이카나가 지원하고 자온과 이베라스, 드루키아가 협력했다. 멀리서 타르만이라는 나라도 은근슬쩍 에드바라하를 지지하는 제스츄어를 취해왔다. 기존 소르왕조에 충성하던 귀족들은 서로간에 구심점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에드바라하의 밑에 들어오게 되었다.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영주들은 내색조차 하지 못했고 시간은 자꾸 흘렀다. 결국 보름 뒤, 에드바라하가 왕가의 권속에 들어가는 의식을 보러 온 귀족들은 카이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아이러니를 빚어내게 되었다. 그것은 뮤디오 왕조의 시작이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이미 겨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추웠다. 아침엔 서리도 내렸다. 입김이 새어 나오는 이른 아침의 궁성을 걸으며 멍하니 넋을 놓고 쨍-하고 깨어질 듯이 새파랗게 차가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도 귓가에 환청처럼 누군가의 목소리, 누군가의 비명소리,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마구 뒤엉켜 웅웅거린다. 그것이 환청이 아닌 정말로 어딘가에서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란 것을 알고 있다. 라디오의 잡음처럼 수백 개의 채널이 혼선되어 들리는 그 소음에 잠시 집중해 보면 목소리들이 점점 구체화 되어 어느새 다른 목소리들은 제거 되고 종국에는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남게 된다. -승호야...승호야... 눈 앞에 유현의 모습이 허상처럼 비추어졌다. 어딘지 모를 저택의 정원에서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 사이를 걸으며 청승맞게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은 건지 배에 붕대를 감은 채였다. 붕대 외엔 맨몸인 상체 위에 외투를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었지만 아침의 찬바람을 맞고 있는 녀석에게 추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유디스! 이런데 있으면 감기 들어! 상처라도 덧나면 어쩌려고 이런 꼴로 나와 있는 거야? 뒤에서 제하가 담요를 들고 종종 뛰어 왔다.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체구가 작은 제하는 유현의 몸 위로 담요를 덮어 앞섶을 꽁꽁 여며준다. -아디움한테 아직 소식 없어? -지금 그 녀석도 필사적이야.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지만 아직도 소르왕조에 미련을 갖고 있는 영주들은 이제까지 아디움이 섭외한 가문이 전부인 것 같아. -흥, 애초부터 귀족들은 왕가에 충성을 바치는 놈들이 아니었어.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왕권 독주체제가 놈들로써도 불만이었겠지. 유현은 코웃음 치며 나른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이곳은 오세준의 별장이었다. 왕실 소유의 모든 토지와 재산은 에드바라하 쪽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바르테스가'의 이름이 아닌 '귀보르냑'으로 등록이 된 이 저택만은 아직 무사했던 것이다. 뭐, 여기도 언제 몰수될지 알 수 없다며 오세준이 사방팔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긴 하지만. 나는 원한다면 녀석이 낮 동안 무얼 하는지, 무얼 먹는지, 어떻게 잠드는지 볼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사나흘간 고열로 끙끙 앓으며 내 이름만 불러대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이 다짜고짜 오세준과 대판 싸웠을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유현의 군대가 머물 장소와 부상자의 치료와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 주던 귀족들의 수가 한도훈의 대관식 이후로 급격히 감소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살이 빠진 유현의 볼이 움푹 꺼지고 눈 밑에 시커먼 그늘이 생겨서 지워질 줄 몰랐다. 이제는 많이 자라 귀를 덮고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더 음침하고 어두워 보이는데 겨울이고 아픈 몸이라 그런지 입술까지 하얗게 텄다. 그런 모습에 괴로워하면서도 자꾸만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사정을 알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모든 감각이 유현의 근처에서 맴돌게 되는 것이다. "승호야-!!!" 민태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오는 녀석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너 또 멍하니 있었구나! 아침마다 이 곳을 돌아 다니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기에 민태도 금방 내 위치를 알았을 것이다. 얼마 전만해도 피투성이의 시체가 그득그득 쌓여 있던 곳이라 조금 섬뜩한 느낌도 들긴 하지만 여기는 이전, 내가 유현을 유디스라고만 믿고 있었을 때 둘이 종종 다니던 산책로였기 때문에 익숙한 길이기도 했다.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어." 민태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그래?" 하고 작게 웃어 보이는 내 입에서도 입김이 새어 나갔다. 오후가 되면 그럭저럭 괜찮은데 역시 아침은 한겨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쌀쌀하다. 양 어깨를 감싸 쥐며 민태를 따라 걸어갔다. "헤헤헤 반가운 손님이 오시거든. 오늘은 철물점 식구들도 입성하게 될 거야. 무려 귀족이란다. 귀족! 피오르 할아범, 다 늙어서 호강하는 구만 으히히히히~~~"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낄낄대는 민태는 좋아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요즘의 민태는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온몸으로 행복의 오오라를 뿌리고 있었다. 도둑길드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왕실 근위대소속의 특수부대가 되었고 길드원 절반이 귀족이 되었다. 민태 본인은 물론 루센과 테이그를 비롯해서 티안, 파웰 등은 작위까지 얻었으며 루센의 경우 비어버린 장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나이 든 귀족 할아버지들에게 '라노경'이란 호칭을 듣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지 입이 귓가에 걸려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을 종종 보곤 했던 것이다. "그럼 제루랑 로비에느도 볼 수 있겠네? 다들 오랜만이다." 꼬마들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떠올리니 목소리에 절로 반가움이 묻어났다. 나는 민태와 잡담을 하면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오쯤 되어서 만난 철물점 식구들은 예전의 이미지와 달리 깔끔하고 고풍적인 옷을 입고 있어서 처음엔 못 알아봤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옷을 멋들어지게 차려 입어도 그 후덕하고 소박한 성격만은 여전 한 것 같았다. 오랜만이라고 등을 팡팡치는 베너 아저씨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눈물짓는 라이사 아줌마도 너무 반가워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우와아아~ 승호형 왕자님 같아!" 성 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어린 아이인 제루와 로비에느는 저렇게 입혀 놓으니 마치 인형 같았다. 네가 더 왕자 같다고 말해주었더니 제루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배시시 웃는다. 로비에느도 내 소맷자락을 잡고서는 반가움을 표시했다. "하, 하지만 승호형은 진짜 왕자님이잖아. 나보다는 형이....." 제루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계속 왕자..왕자...를 중얼거렸다. 나는 무슨 소린가 해서 라이사 아줌마를 쳐다봤더니 아줌마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제루의 어깨에 터억-하고 그 두툼한 손을 올려 놓는다. "왕자가 아니고 왕제라고 몇 번을 말하니. 승호는 카이님의 아들이 아니란다." 나는 그제야 제루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우스운 일이 되었지만 한도훈이 왕이 되었으니 졸지에 나 역시 왕족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유일하게 왕위 계승권을 가지는 건 너야. 윤승호. 대관식 날 나를 조용히 불러 그렇게 말하던 한도훈의 진지한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에드바라하의 직계후손은 한도훈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를 부러워 하는, 아니 거의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제루는 라이사 아줌마의 친절하고 끈질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왕제와 왕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냥 왕자하면 안돼?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하고 투덜대는 녀석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에드바라하의 반란 작업을 나는 알지도 못 했고 적극적으로 돕지도 못했다. 항간에는 내가 왕의 정신을 흐려놓은 공적이 크다고 하지만 유현과 뒹굴던 것을 공적이라고 하다니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게 수치스러운 오명까지 뒤집어 쓰면서 진유현의 왕조를 밀어내고 얻게 된 '왕제'라는 칭호는 너무 무거워서 어깨가 아프다. 대관식 이후 에드바라하는 왕가의 권속이라는 제도를 없애버리고 자이카나는 물론 아오네르나 루탄과 같은 가문들이 독자적인 귀족가문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덕분에 왕가의 권속으로 기를 못 펴던 가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에드바라하를 지지했던 자온과 이베라스를 속국에서 해방시켜 주고 유현이 정복했던 드루키아를 대등한 국가로 인정해 주었다. 드루키아족의 새로운 지도자는 기존 드루키아 특유의 무식한 방식을 버리고 에드바라하와 손을 잡았다. 유현의 군대를 유인해 낸 것이나 후방에서 치는 방법이나 그들의 습성과는 맞지 않는 거라고 했지만 덕분에 이겼으니 전사들의 불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회를 계기로 연합 부족체였던 드루키아는 국가임을 선포했고 이덴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도훈은 마치 진유현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가지치기 하듯 잘라 버리고 있었다. 그동안 정복한 국가와 부락들 중 힘이 없는 지역은 그대로 이덴의 일부로 유지했지만 독립을 원하는 지역에 한해 매년 조공을 바칠 것을 조건으로 독립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제국이 될 거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귀족들은 맥이 빠지기도 했고 일부에선 덩치만 비대하게 키우는 것보다 나을 거라며 수긍하기도 했다. 묘한 일이었다. 국가간의 힘의 균형을 에드바라하가 동맹과 조공으로 유지한다면 귀족간의 균형은 자이카나가 중간에 나서서 해결했다. 소르왕조를 지지하던 귀족들 중에도 유현의 폭정에 질려 있던 가문을 잘 골라 살살 구슬려 내는 데에 성공하고 나니 점점 이 땅에서 전 왕이었던 유디스의 설 자리가 없어졌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을 본의 아니게 자세히 아는 이유는 순전히 루센 때문이었다. "승호도 앞으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인 걸요. 아! 나중에 시간 나면 제왕학도 가르쳐 드릴게요. 검술과 승마도 다시 배워야 하니까 적당한 강사를 구해 봅시다. 승호가 왕족이라니 뭔가 굉장해요!" 민태 못지않게 얼굴이 활짝 핀 루센은 여전히 업무량에 치어 살면서도 얼굴은 싱글벙글 화색이 돈다. 덕분에 아리땁던 얼굴에 홍조도 띠고 거칠던 피부도 포송포송해진 것 같다. 눈 밑의 그림자는 여전 하지만. "이름 뿐인 왕족인 걸요. 다른 사람들처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쓸모도 없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루센이 화를 낸다. 모르는 건 앞으로 배우면 되고 나는 존재 자체로 중요한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그 말이 내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하다못해 예전 귀보르냑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구간 일을 하거나 식당의 심부름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하면 에드바라하 전체가 다른 귀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소리에 허드렛일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성에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여기에 들어 왔을 때부터 일다운 일은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도 내 의지로 해 본 적이 없다. 우울한 기분에 잠겨 있는데 루센이 내 머리에 그 큰 손을 터억 올려놓으며 쓰다듬었다.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이 참한 아가씨 같다. "승호, 나는 말이죠. 승호가 우리에게 오고 나서부터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느낌이 자꾸 들어요. 마치 신이 에드바라하를 축복하는 것 같다구요. 이런 말 웃기죠? 하지만 정말 나는 승호가 에드바라하의 승리를 위해 나타난 것 같은 걸요." 신의 축복...이라.... 나는 쓰게 웃었다. "차라리 망명합시다! 부디칸 같이 먼 나라로 가서 몇 년 동안 숨어 지내면서 힘을 키우는 겁니다. 이대로는 무리예요. 이덴의 귀족들에게는 자이카나가 뒷손을 써서 파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콧수염과 턱수염을 날카롭게 기른 단발머리의 중년 아저씨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지도를 펼쳐 놓고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을 하는데 사실 그 설명의 반도 못 알아 들었지만 요지는 이 나라에서 오래 있다가는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유그리안, 사헬, 켄네르, 가르벤....그리고 여기 토푸영지에선 아직도 전하의 힘이 유효합니다. 메르고지역도 완전히 뮤디오 왕조에 돌아선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 희망은 있고요. 우선은 남은 병력을 재정비하고 시간을 벌도록 하지요." 단발머리 아저씨에 이어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가 차분히 설명했다. 여기는 저 할아버지의 저택이었다. 한밤중에 등잔불을 펴 놓고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수는 약 대여섯 명. 테이블의 한 가운데에는 눈을 반쯤 내리 깐 진유현이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 오세준의 별장이 에드바라하의 군대에게 들키고 급히 이곳으로 옮겨 온 것 같았다. 그 과정을 나는 직접 보진 못했지만 궁금해서 들여다본 오세준의 별장은 에드바라하 군인의 시체에 의해 끔찍한 폐가로 변해버렸다. 그 시체 중에 진유현이나 오세준, 김제하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필요 이상의 살상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전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발머리 아저씨가 유현의 안색을 살폈다. 약간의 침묵 후 유현의 입이 열리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불편한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 "여기, 에버린을 돌아 산을 타 넘으면 북문에 도달할 수 있어. 소규모의 군대로도 공략가능하니까 정문쪽에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소모전을 펼친다. 병력이 충원되는 대로 바로 진격하는 거다.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곤란해." 그렇게 말하는 유현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다만 주위에서 보던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서로를 바라보고 곤란한 눈빛만 교환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전하..그것은..." "왜? 자신 없는가?" 힐끗 바라보는 유현의 눈초리에 단발머리 아저씨가 쩔쩔맸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디움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유디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당장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이베라스랑 싸울 땐 두 달 동안 성 앞에서 진치고 놈들이 항복하기를 기다렸으면서 이번 일은 왜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 건데?!!" "시간이 지날 수록 놈들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뿐이야! 지금 우리를 지원하는 영주들이 언젠가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어? 흐지부지 시간 끌다가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야!!" "그렇다고 무턱대고 진격이냐?! 병력을 갖다 박을 생각이야?!!" "제기랄 시간이 없단 말이다! 시간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도 나는 아까워!!" 유현과 오세준이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저씨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자리를 피했고 구석자리의 제하만이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 볼 뿐이었다. "솔직히 너 이러는 거! 그 자식 때문이잖아! 그딴 정신 나간 평민따위 얼마든지 널렸다구!! 그렇게 아랫도리가 궁하냐? 지금이라도 나가서 여자하나 데려와 줘? 사내자식으로 하나 구해다 줄까?!!!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콰당탕 성질을 못이긴 유현이 주변의 의자를 발로 차 부러뜨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 쉬며 정면을 노려보는 유현의 눈은 탁하게 흐려 있었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알아, 알아, 나도 안다고--!!!" 테이블을 탕탕 내려 치는 유현은 이를 갈더니 두 눈을 꾸욱 감았다. 숨을 몰아 쉬는 어깨에는 아직도 붕대가 매어져 있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패배했다는 정신적인 충격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듯 싶다. "이런 젠장할..." 바가각-하고 테이블 위에서 주먹을 쥐는 유현의 손톱이 단단한 목재 테이블 위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동시에 손톱사이에서 피가 베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제하는 깜짝 놀라 유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오세준이 말렸다. 오세준은 가만히 유현의 어깨를 노려보고 있었다. "솔직히....모르겠어..." 유현의 움켜쥔 주먹은 이미 자신의 손끝에서 나온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 손을 몇번 쥐었다 폈다 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히 모든 것이 내 맘대로 되고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부릅뜬 눈동자에 초점은 없었다. "...내가, 내가 그 자식을 발견한 탓이야... 처음부터 그 윤승호란 자식만 없었어도 네가 이렇게 될 일은...." 오세준도 저런 표정 지을 줄 아는구나... 괴로움에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무는 오세준의 얼굴은 처음 본다. 진유현 이상으로 능글능글하고 여유만만하던 녀석이 궁지에 몰리면 저런 표정도 나온다는 것이 새롭기만 했다. "윤승호...그래 윤승호....." 오세준의 말을 듣고 있던 유현이 작게 중얼거린다. 쥐락펴락 하던 손바닥을 꽈악 움켜쥐더니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디움...헤시안....내 머리가 잘못된 걸까? 이상한 일이다. 내 왕좌가 남에게 넘어 간 것이 분하고 화가 나는데 그것 이상으로 다른 일이 신경 쓰인다." 오세준과 김제하,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유현은 입술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마치 혼잣말 하듯 내뱉어내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승호가 없다는 것이 제일 불안해. 생각 같아선 성에 몰래 잠입해서 승호만 납치해 오고 싶다. 아니, 일부러 잡혀주면 어떨까? 응? 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래도 승호가 한 번쯤은 보러 와 주지 않을까? 감옥 안에서라도 좋아. 한번만 더 얼굴을 보고 싶어." "유디스-!" "십 년 이십 년 기다렸다가 왕권을 되찾는 거 생각 안 해 본 거 아니야. 그런데...그런데 말이지...빼앗긴 왕좌는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승호는 나중에라도 볼 수 있을까? 그 사이 죽어버리거나 다른 데로 가버리거나 하면 어떡해? 보고 싶어 죽을 거 같아!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데 승호가 옆에 없다! 그 생각만 하면 왕좌도 나라도 다 필요 없어-!!" "이 자식아 정신차려!!!" 오세준이 유현의 양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차라리 정말로 잡혀 버리면..." -빠악 참다 못한 세준이 주먹을 날렸다. 상당히 세게 때린 것 같았는데 유현은 잠시 고개만 돌아 갔을 뿐 별다른 반격은 없었다. 뺨을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짓는 유현이 낯설게 느껴졌다. "허튼 소리하지마! 넌 다시 왕이 될 거다! 내 인맥과 재산을 총동원해서 너를 꼭 제자리로 돌려 놓을 거니까 너는 이제까지 해 왔던 대로 그렇게 당당하고 건방지게 있기만 하면 돼! 그 자식이 배신을 했건 안 했건 그 놈만 없었으면 일이 이렇게 까진 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런데도 넌 아직 정신 못 차리는 거냐? 윤승호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치고 앞으로 할 일만 생각하란 말야!!" 멱살을 잡아 올리는 오세준의 얼굴은 필사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그렇게 노려 보더니 멱살 잡은 손을 거칠게 풀고 시선을 돌린 것은 오세준 쪽이었다. "쳇-"하고 불평을 뱉어낸 세준은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방안에 남은 유현과 제하 사이만 묘한 침묵이 감돌 뿐이었다. 망연히 유현을 바라보는 제하도 허공을 사납게 노려보는 유현도 아무 말 하지 않고 한참동안 그렇게 무거운 침묵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가운데 각각의 무용담이 이어졌다. 민태, 형석, 진영, 루센, 테이그 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철물점 가족들과 다른 길드원들에게 둘러싸여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잡담을 하는 시간은 내가 여기로 오고 난 뒤 처음 같았다. 한도훈은 비록 지금 이 자리에 없었지만 녀석도 처음에 얼굴정도는 비추고 사라졌는데 유현과 싸우다가 다친 팔이 아직 다 안 나아서 기부스를 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때 내가 말이야...성 위에서 순찰을 도는 병사의 목을 그냥...콱!" 나보다 겨우 세 살 많은 한 길드원이 과장스럽게 손동작까지 섞어가며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귀족의 옷인데 말투나 행동은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주위의 다른 젊은이들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얘기를 듣고 있었고 때로는 누가 더 큰 부상을 입었나 서로의 흉터를 자랑하기도 했다. 한쪽 테이블에선 왕성의 과자가 신기했는지 예쁜 모양의 쿠키를 한참 바라보던 로비에느가 암-하고 한 입에 깨물어 먹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내 몫의 과자를 더 주었더니 굉장히 기뻐했다. 이런 소박한 파티 자리가 너무나 반가웠던 나는 과장된 길드원들의 이야기에도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로 사소한 얘기 하나하나가 즐거웠다.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한 라이사 아줌마의 요리도 궁중의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 귀족들의 연회라면 질렸다. 대관식 이후 왕족이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서 주최하는 파티에 끌려 나가야 했지만 하나같이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자리일 뿐이었다. 특히나 대부분의 귀족들이 나에 대한 소문을 뭘로 들었는지 호기심의 눈을 반짝거리고 쳐다보는 것이 아주 고역이다. 솔직히 괴로웠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시선들이 심장을 할퀴었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기만 해도 나를 경멸하는 것 같았고 저들끼리 하는 얘기도 내 험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에 슬쩍 미소라도 지으면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아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리곤 했다. 생각하면 할 수록 내가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착각하게 된다. 나 때문에 유현이 망한 것 같고 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 같고 나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이 든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래서 더욱 일을 하고 싶었다. 아무 일이나 해서 나도 뭔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부터 쭈욱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루센이나 민태, 도훈은 내가 왕족의 신분에 맞게 고고하게 지내며 교양따위를 익히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지, 가뜩이나 바쁜 그들에게 알려줄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감정을 이야기 하는 것 조차도 창피하니까. 마구간지기도, 병사들도, 하인들도 모두들 제 역할이 있는데...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승호? 안색이 안 좋아요." 루센이 내 이마를 짚어 보며 말했다. "이 자식이 말야. 요즘 픽픽 쓰러지고 멍-한 게 맥아리가 하나도 없더라구. 보약이라도 하나 지어 줄까? 약초라면 내가 또 일가견이 있는데." 민태가 음료를 들이 마시며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서 "라도 대장 나도 보약!!"하고 떼쓰는 소리가 들린다. "오냐 뱀탕이라도 끓여줄까? "으악! 그것만은 싫어!" 라는 농담소리가 다시 한 번 자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지만 슬슬 맥주가 날라오기 시작하고 라이사 아줌마는 제루와 로비에느를 데리고 아이들 방으로 갔다. "우왓! 광란의 밤의 시작이냐!" 하인들이 내 오는 술을 보고 다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형석아 진영아...우린 아직 미성년자라고.... 익숙한 폼으로 맥주를 들이키고 "크아~"하는 것은 확실히 현대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특히 민태가 술이라니 민태 어머니께서 아시면 기절할 일이다. 녀석들의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서 실실 웃었다. ...우리들, 현실로 돌아 갈 수는 있는 걸까. "라노. 처음 나를 발견 했던 산 말인데..." 분위기가 술 파티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응? 크릴 산맥 말하는 거야?" "이덴에서 가장 크고 울창한 산맥이라고 말했었지?" "어, 그랬지. 거기 들어 갔다가 실종된 사람도 수두룩하고... 내가 오두막 지어 놓은 데 기억하지? 거기까지가 한계야. 그 안으로 들어 가면 나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되더라고. 뭐 덕분에 은신처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지만 이야~ 그런데서 널 발견한 건 정말 기적이었다구." 귀보르냑 영지에 병풍마냥 둘러쳐진 크릴 산맥은 이덴을 거쳐 동남쪽의 타르만, 북서쪽의 퀘도지역까지 뻗어 있다는 대륙 최고의 산맥이었다. 산이 워낙 무식하게 크고 깊어서 보통은 그 산을 경계로 나라간의 국경이 정해지지만 그 중에도 비교적 산세가 약해지는 곳이 있어서 물자와 사람이 오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럼 귀보르냑 영지는 국경지역인 셈이네. 그런 것치고 병력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산맥을 등지고 있는 것만으로 완벽한 요새야. 오히려 다른 어떤 지역보다 안전하다고 봐야 하지. 산맥너머의 지역은 아직 부락 수준에서 못 벗어난 나라들이 대부분이라서 위협적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귀보르냑 영지와 연결되는 곳의 산세는 험악하기로 유명해서 다른 지역 사람이 넘어 왔다는 소리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도 없었어. 에엑? 그러고 보니 승호 너 뭔가 기억 나기 시작한 거야?"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보이는 민태를 보자 내가 기억상실증의 환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곤란해져서 턱을 긁적이고 있는데 마땅히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도 궁금함이 가시지 않는지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던 녀석은 큼지막한 닭다리를 하나 접시에 담아 주고는 "먹어! 일단 먹고 나면 생각 날 거야!"하고 말하며 큰 소리로 웃는다. 여러 가지 사념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닭고기가 향신료와 어우러져 풍기는 냄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겨울로 접어 들어 대부분의 꽃이 시들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사계정원에는 겨울 꽃들로 가득했다. 꽃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알록달록하게 피어 난 모양은 어느 계절 못지않게 예뻤다.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해 자주 찾곤 하던 사계정원 입구의 나무도 여전했다. 그 큰 가지를 드리우며 푸른 잎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연병장으로 향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이 나무그늘 아래에서 책도 읽고 유현과 장난치던 일을 상기 시키니 묘하게 감상적이 되었다.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쉬면 입에서 김이 나온다. -윤승호....왜 나를 이렇게 만든 거냐... 네가 밉다. 너는 나를 얼간이로 만들어 버렸어... 귓가에서 아른거리는 유현의 탄식이 슬프게만 들린다. -그런데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가슴을 후벼 파는 목소리를 떨쳐버리기 위해 몇 번이나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유현의 목소리는 24시간 내내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변방의 어느 노파의 처절한 절규보다도, 굶주림에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신음성보다도, 내가 보고 싶다고 소리치는 녀석의 음성이 가장 뼈에 사무친다. 유현의 목소리만도 감당하기 힘든데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소리에 하나하나 신경 쓰다가는 정신이 너덜너덜해져서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저 사람들의 고통을 느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그저 천리안에 불과한 조금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새벽 직전의 습격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드리워진 을씨년스러운 저택에 에드바라하의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잠입해 들어 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안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었다. 환하게 켜진 저택의 창문을 타고 비명이 흘러 나오는가 하면 핏줄기가 뿌려지기도 했다. 저택의 후문에선 이미 몇몇 그림자가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사방은 소란스러웠고 찬바람이 마른 가지를 흔들었다. "저기다! 잡아라!!!" 새까만 고요를 깨뜨리는 병사의 고함이 들리고 저택의 호위병들이 달려 와 에드바라하의 군인들과 맞서 싸우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병사들 틈을 헤치며 후문을 향해 달리는 몇몇 그림자를 알아본 에드바라하 병사들이 화살을 쏘기도 했으나 어둡고 장소가 협소하여 궁수들이 활약하기엔 적당치 않았다. 도망치던 길쭉한 그림자 하나가 손에서 번쩍이는 무언가로 자신에게 덤벼드는 병사들을 헤치며 날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스산한 빛을 내는 검날은 눈 앞의 피를 부르는 듯 섬뜩했다. "적당히 해 유디스!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야!" "여기서 어느 정도 머릿수를 줄여 두는 것이 꽁무니를 빼기에도 편할 거다!"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유현이 더욱 깊숙이 병사들을 향해 돌진한다. 어쩔 수 없이 유현을 말리던 오세준이 같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멍청아!! 우리가 왜 도망치고 있는지 잊은 거야? 네 녀석이 잡히면 말짱 꽝이라구!! 내 별장을 시체소굴로 만들어 놓은 것도 모자라서 또 발광이냐!!" 그러나 유현은 들은 체도 않았다. 사철나무들이 드리워진 저택의 후문은 좁은 골목과 나무들의 가지가 서로 엉켜 있는 탓에 하나의 숲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솔길을 따라 달려오던 에드바라하의 병사들은 눈을 빛내며 살기 등등하게 열이 올라있는 유현과, 그런 유현을 보호하기 위한 오세준과, 저택을 지키고 있던 다른 경비병들을 함께 상대하느라 자신들의 예상보다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진유현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굉장히 기분 나빠서 속이 메스꺼워졌다. 코끝에 확하고 피냄새가 나는 가 싶더니 유현이 다른 병사의 몸에서 검을 뽑아 내고 있었다. 검 끝의 피가 마를 새도 없이 다시 뒤에서 달려드는 병사의 목줄기를 베었다. "전하!! 어서 이쪽으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단발머리의 중년 아저씨가 초조한 음성으로 후문쪽을 가리키며 유현과 세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저택의 후문은 어둠 속에서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호숫가와 맞닿아 있었고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이는 나룻배 하나에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 중엔 담요로 몸을 둘둘 말은 제하도 있었다. 주변의 할아버지와 아저씨들로 이루어진 무리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을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야 어둠 속에서 "으악!" 하고 죽어가는 그림자 밖에 볼 수 없었지만 행여나 그 시체 틈에 유현이 있을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불안과는 다르게 유현은 무사한 것 같았지만 타인의 피로 몸을 적시고 있는 모습은 정상인 같지가 않았다. "나는 전하가 점점 두려워 지고 있소..." 반백의 할아버지가 단추 구멍같이 조그마한 눈으로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들릴 듯 말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피와 땀과 긴장으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진유현의 몸에서 나는 독기가 점점 썩은 내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를 틀어 막고 싶지만 육체가 없는 의식은 그것조차 되지 않는다. 지독하고 역겨운 냄새는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쓰렸고 그것은 녀석이 피투성이가 되었을 때 가장 악취를 풍겼다. 그날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났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하는 것이었다. 어두워진 성내를 조용히 걸었다. 지나가다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을 받아주고 가끔 군인들이 경례를 하면 손을 들어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맘 때쯤이면 잠이 들 시간이었지만 일거리가 많은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깨어 있음이 분명하다. 루센이 그렇고 한도훈이 그렇다. 뭐 민태랑 진영이, 형석이도 바쁘겠지만 녀석들은 시험 전날도 밤샘 공부 같은 건 못 하는 녀석들이다. 그런데 일이 밀려 있다고 해서 늦게까지 안 자고 있을 리는 없으니 걔네는 패스. 한도훈의 방 앞에 섰을 때 그 삼엄한 경비에 주눅이 든 것도 잠시, 나를 알아본 병사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다. 나 대신 안에 노크도 해주고 누구누구님이 왔습니다...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 간 곳엔 역시나 아직도 등잔불을 밝히고 잠들지 않은 도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편한 셔츠에 편한 바지 차림인 녀석은 등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질끈 묶고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늦은 방문에 도훈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어서와. 이런 밤중에 무슨 일이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소파로 옮긴 도훈은 차를 내어 오려는 시종을 물리치고 방안에 둘만 남게 하였다. 녀석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마치 이 방이 처음부터 한도훈의 것처럼 느껴졌다. 한도훈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유현이 쓰던 방을 그대로 쓰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유현이 쓰던 방은 폐쇄되었고 지금 도훈이 쓰고 있는 방은 다른 방이었다. 유현의 방보다는 약간 작고 덜 화려했지만 동선이 편하고 성 내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며 도훈이 직접 선택한 방이다. "팔은 좀 어때?" 진유현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어 아직도 기부스를 풀지 않은 녀석의 왼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과격한 움직임은 못 하겠지만 곧 붕대를 풀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열려진 셔츠의 안쪽으로 가슴에도 붕대를 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늑골도 몇 대 나갔다고 민태가 호들갑 떨던 것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성이나 귀족 다루는 거엔 많이 익숙해졌어? 대관식 한 지 얼마 안 지났는데 네가 왕이라는 게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딱히 아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솔직히 얘기했다. 그랬더니 한도훈이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데...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우물쭈물대는 나를 눈치챘는지 녀석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쓸데없이 말을 돌리는 것을 포기하고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 내었다. "부탁이 있어..." 한도훈의 표정은 진지했고 나도 이 분위기에 힘을 입어 말을 이어나갔다. "나... 이 성 안에 있는 거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알지? 루센은 남의 뒷말이나 하는 놈들을 눌러버릴 정도로 능력을 키우라고 하지만 지금은 힘들어. 어떨 땐 루센과 라노의 지나친 과보호마저도 부담스럽다고 느껴지는 걸." 가만히 듣고 있는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한마디 해주길 기다리던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말까지 꺼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녀석이 납득하려면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는 건지 속으로 가늠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여기 와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상황에 끌려 다닌 것 같아. 내가 가만히 있어도 일은 벌어졌고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그때 휩쓸려 다녔지. 사실, 별로 하고 싶은 일도 없었어. 어쩌면 아무것도 안 해도 알아서 이끌어주는 너희들에게 나는 안주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내가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지더라." 한도훈의 내려 깐 눈은 반응이 없었다.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 같긴 한데...이쯤에서 얘기하면 허락해 줄까? "그래서 말인데 나 성을 떠나고 싶어." 예상치 못했던 부탁이었는지 녀석이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내 눈이 가늘어 지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곤란해." 무미건조하게 내뱉는 짤막한 음성이 너무나도 야속했다. 쉽게 허락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주 떠난다는 것이 아니야. 잠깐 여행 좀 하고 싶어. 내가 기억이 오락가락 한다는 거 라노한테 들었지? 요즘 들어 자꾸 뭐가 떠오르려고 하거든.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말까지 지어내며 한도훈을 설득하기 위해 용을 썼다. 하지만 녀석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직 나라 안이 흉흉해. 유디스가 너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도 들어와 있다. 지금의 왕권에 아무 문제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왕관을 쓴지 한 달도 안 지났어. 안정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여행이라니 게다가 이제 겨울이야. "알아, 나도 안다구. 그런데...여기서 지내는 매일 매일이 너무 괴로워..." 애원하는 얼굴로 부탁했다. 하지만 한도훈의 대답은 확고했다. 녀석도 안타까운 표정이었지만 가지런한 치아를 담은 입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며 도리어 나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녀석의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은 필사적인 심정이었다. "뜰을 거닐 때에도, 복도를 지나가도, 유디스가 자꾸 생각나. 녀석을 그렇게 만든 거 솔직히 나잖아. 그 자식은 어디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나는 여기서 편안히 지내고 있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어." 밤이라서, 등잔불의 빛이 은은해서, 그리고 진지하기 그지없는 한도훈의 분위기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다 내뱉게 되는 것 같았다. "미안해 카이. 나 네가 왕이 되는 건 좋지만 역시 유디스를 떠올리면 괴로워. 나만 이렇게 안락하게 있는 것이 녀석한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고 엄청난 배신자가 된 기분이야. 그렇다고 녀석 앞에 스스로 나갈 용기도 없어. 몸을 혹사 시키면서 고생할 만한 배짱도 없어. 그래서...그래서...." 그래서 나는 이 세계를 떠날 거다. 다른 녀석들도 데리고 떠날 거야. 그래서 그 방법을 알기 위해 여행을 가는 거다. 애당초 이런 제멋대로인 세상,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도 못할 나 같은 창조자는 있으나마나 한 거 아닌가. 현실에서 겪어 보지 못하는 눈이 휘둥그레 해질 만한 모험. 너희들은 충분히 즐겼잖아. 혁명이 있었고 승리했고 이제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지루한 명제만이 남은 거야. 그러니 이쯤에서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년이 걸릴 지 십년이 걸릴 지 몰라. 어쩌면 우리들은 저 현실세계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육체가 진짜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더 이상 현실에서 멀어지기 전에...내가 만든 이 엉뚱한 세계에서 누군가 죽어버리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빨리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어도 좋아. 부모님이 이혼하고 학교에서 소외당하는 것도 괴롭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반이 갈라지고 우리는 졸업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계는 달라. 이혼 하신 부모님조차 이 세계에는 없다. 나는 여기서 평생을 나도 모르는 사람의 한숨과 기쁨과 고뇌와 비명을 들으며 살아가고 싶지 않아. 유현의 목소리에 한없이 슬퍼지는 것도 사양이야. 설령 내 능력이 점점 강해져서 진짜 창조자 다운 모습을 갖춘다고 해도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목숨을 책임질 정도의 큰 그릇이 나는 못 된다. 이 감정을 책임회피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더 이상 이 엉터리 세계에서 우리들을 방치 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아아 나는 정말 자격 없는 창조자다.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어. 그것은 이 왕성에서 거드름 피우며 교양을 익히고 글을 배우는 일이 아니야. 나는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 놓고 싶다. 내가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로 돌아 가야 한다. 꿈은 끝내야 해. 도훈은 내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 들였지만 좀처럼 승낙해 주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떼를 쓰는 것도 녀석에게 못할 짓이지만 조금만 더 이 성의 편안함에 몸을 맡겼다가는 이대로 눌러앉아 버릴 것만 같은 자신이 두렵다. 나같이 우유부단하고 추진력 없는 인간은 생각날 때 얼른 하지 않으면 또 언제 결심이 설지 모른다. 지금 이 때, 모처럼 결심을 다진 이 때에 해야 했다. 며칠에 걸쳐 나는 끈질기게 졸랐고 결국 수행원 세 명을 대동하고 수시로 연락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한도훈에게 말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루센에게 말했다간 내가 여행 가면 안 되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서 나 스스로 떠날 의지를 꺾도록 만들었을 것이고 민태한테 말했다면 절대 안된다고 바락바락 우겨서 나는 아마 떠나기도 전에 질려버릴 것이다. 행장을 꾸리며 앞으로의 고생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서야 내가 할 일을 하는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귓가에서 맴도는 진유현의 중얼거림도 애써 무시하고 의식을 먼 곳까지 날려 내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매일 밤 황야를 날았다. 넓은 지역을 정신체만으로 날아다니는 것은 생각 외로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나의 의식은 묘하게도 크릴 산맥과 대륙의 끄트머리만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몸소 확인해 봐야 겠다고 생각하자 떠나갈 방향이 잡혔고 그 방향은 의외로 제하가 여행한 것과 같은 경로였다. 제하는 세상의 끝을 향해 달렸다고 했다. 그 곳에 내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적어도 퀘도너머의 지역으로 가야 이 빌어먹을 세상을 벗어날 수있을 거라고 생각했댄다. 그리고 묘하게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세상의 끝으로 갈 거다. 하지만 그전에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귀보르냑 영지로 돌아가 내가 꼬박 일주일을 넘게 헤매던 그 악몽 같은 산 속을 살펴보자고 계획을 세웠다. 길이길이 날뛰는 루센과 민태를 진정시키는 일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화낼 거라는 것을 예상했고 그래서 떠나기 전날 말했는데 그것이 더 기름을 부은 듯했다. 보기 드물게 무서운 얼굴이 된 루센도 루센이지만 따라오겠다고 날뛰는 민태 쪽이 더 골치 아파졌다.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다녀오겠다는 것 뿐인데 곧 겨울이고 여기저기 유현의 잔당들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두 사람의 반응은 격렬했다. 끝끝내 고집을 부리는 나를 바라보는 원망스러운 눈에 조금 뜨끔했지만 역시 떠나기 전날 말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루센의 저런 표정을 며칠만 더 보았다가는 "나중에 봄 되면 갈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여행의 출발은 새벽에 몇몇 사람의 배웅만 받으며 시작 되었다. 해도 뜨지 않아 어슴푸레한 남문입구는 몹시도 추웠으며 외투에 망토에 모포까지 뒤집어 쓴 나는 한도훈과 루센, 테이그, 민태 등의 배웅을 받으며 성문을 나섰다. "승호님. 이 길은 산과 통합니다만....목적지는 귀보르냑 영지가 아니었습니까?" "아...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요." 내 수행원으로 따라온 세 명의 길드원 중 한 명은 전에도 내 가드를 맡은 적이 있는 금발의 청년이었다. 이 자가 자진해서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을 땐 좀 의외였지만 굳이 안된다고 할 이유도 없고 해서 같이 가는 중이었다. 이름은 마이엘이라고 했는데 내 이름 뒤에 꼬박꼬박 님자를 붙이는 것은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근육질의 떡대였는데 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스킨헤드가 바투, 키가 큰 더벅머리가 라한이라는 이름이었다. 둘 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길드원이고 느껴지는 분위기가 살벌해서 이런 사람들과 같이 여행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나름대로 도훈이 녀석이 신경 써서 골라준 거라고 생각하며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말을 타고 올라가니 상당히 큰 호수가 나왔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어둑어둑한 호수의 수면은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했고 표면은 얇게 얼어 있었다. 호수를 잠시 바라본 나는 다시 말을 끌고 산 위를 향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세 사람은 조용했고 그래서 나는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들을 새벽의 찬 공기에 씻어 낼 수 있었다. 울창한 숲을 헤치며 올라가자 이내 예전에도 들렀던 낭떠러지가 나왔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두근두근 하는 기분으로 낭떠러지 끝에 서니 역시나 탁 트인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와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몇 달 전만해도 황금의 물결을 이루고 있던 들판의 곡식들은 이미 추수되어 짤막하게 베어져 있었고 그 위를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드는 싸움이었으니 이 정도는 감수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수확철 이후의 전투였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랄까...... 저 멀리 산 너머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눈부신 광경에 말없이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몸을 작게 떨었다. 옹기종기 모여선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벌써부터 밥을 짓느라 굴뚝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집도 보였다. -...이게 내 땅이다. 내가 다스리는 아름다운 영토다...라고 말하고 싶었어. 환청이 들린다는 착각을 하며 쓰게 웃었다. 잠시 일출의 광경을 바라보다가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말머리를 돌려 산을 내려왔다. 아무 것도 묻지 않는 세 사람이 지금은 고마웠다. 이제는 왕실 소유가 된 귀보르냑 영지에 도착한 것은 열흘이 넘어서였다. 내가 장기간의 여행이 익숙치 않은 탓도 있고 해가 빨리 지는 계절이라 오래 말을 달리지 못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돈은 넉넉해서 식사를 하거나 여관을 잡을 때 상당히 럭셔리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해야 하는 경우는 정말 곤욕이었다. 하지만 수도에서 변방까지 말을 타고 고작 열흘이라... 이덴의 왕성은 나라의 크기에 비해 꽤나 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은 오랜 정복전쟁으로 불어나는 땅덩이에 비해 왕성은 몇 백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다 보니 그리 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대로 유현이 황제가 되고 제국 선포를 했으면 수도 천도도 헛소문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이덴이 제국이 되는 건 물 건너 간 상태다. "으으 굉장히 춥군요." "크릴 산맥 주변은 기온이 낮은 편이니까요." 멀리서 보았을 땐 산 꼭대기에 만년설이 하얗게 뒤덮여 있어 제법 운치를 자아냈지만 이렇게 영지 안에서 바라보니 그저 험난하기만 한 산이었다. 오랜만에 찾아 온 영지는 에드바라하가 귀보르냑 성을 함락한 이후 야반도주를 했던 주민들이 돌아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고 마이엘이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라노길드의 본점은 귀보르냑 영지다. 나는 이 세 사람도 이곳 출신인가 싶어서 물어봤더니 다른 두 사람은 떠돌이, 마이엘만 이곳 사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눈치 없는 나는 "가족이 있으면 한번 만나러 가요."라고 했다가 마이엘이 자신은 고아라고 웃으며 말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형석이네 가족이 하는 여관이었는데 내가 이 마을에 처음 온 날 민태가 소개 시켜준 바로 그 여관이었다. 형석이의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굉장히 반겨주었지만 솔직히 기분이 이상했다. 형석이네 부모님을 뵌 적은 없어도 이들이 진짜 가족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며 형석이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아들이 귀족이 되었으니 성에서 편히 살아도 되건마는, 수십 년을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는 없다며 여전히 여관 일을 하는 소박한 부부였다. 하지만 역시 아들과 떨어져 사는 것은 많이 쓸쓸하셨는지 형석이의 편지와 선물을 전해드리자 눈물이 글썽해졌다. 두 분은 굉장히 고마워 하시며 여관비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사양하느라 진땀 뺐다. 그렇게 마을에서 하루를 소비하고, 다음날은 때 아닌 등산을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산이었다. 내가 의식을 날려 산 속을 살피려고 하면 금새 튕겨져 나온다. 역시 이곳에 무언가 있다고 느낀 나는 옷을 두툼하게 껴 입고 산을 올랐다. 길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태의 오두막까지의 길은 이곳 출신인 마이엘이 알고 있었고 적어도 거기까지 가면 뭔가가 보일 줄 알았다. 울창한 숲은 내 육체의 시야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시야마저 차단하고 있어서 나는 약간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고 나도 모르게 오기를 부리게 되었다. "이 이상은 들어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민태의 오두막도 지났고 한 참을 안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아침 일찍 등반하기 시작해서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내가 떠내려 왔다는 강물을 지표로 삼아 산으로 올라 가던 중, 스킨헤드의 바투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해가 지면 이 근처에서 노숙을 해요. 난 여기서 일주일 넘게 헤맸다고요. 하루 이틀 안에 끝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무거운 짐은 저 사람들이 다 지고 있었지만 그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잠시뿐, 나는 초조해 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산 안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의식을 날려도 잡히지 않은 산 속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무언가가 구부러진 것 마냥 의식이 자꾸 한자리를 맴돈다. 가도가도 똑같을 뿐이 숲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기 위해 집중을 했다. 하지만 아까 봤던 나무를 또 보고 아까 지나친 바위를 다시 발견하게 되고 만다. 마치 사람이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맴돌듯이 나의 의식도 그렇게 헤매고 있었다. "여기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산 같지가 않군." 라한이 자석으로 된 추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것은 실에 매달린 작은 막대기였는데 실 끝을 늘어뜨리자 공중에 매달리게 된 막대기는 라한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저 스스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 기묘한 움직임에 인상을 찌푸린 나는 그 자석 추를 보자니 두통이 엄습할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여기는 무언가가 뒤틀려 있다. 이마를 짚으며 잠시 서서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숲을 잔뜩 노려봤다. 이대로 물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 가면 분명 처음 내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 갈 수 있을 까? 그것도 아니다. 나는 이 산속에 처음 떨어졌을 때 정신없이 날뛰고 달리다가 우연히 시냇물같이 작은 물줄기를 발견했을 뿐이다. 이 안으로 쭈욱 들어가도 그 안개가 자욱하고 음습한 곳을 찾아 낼 수 있다고는 장담 못하겠다. "동물들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기분 나쁜 곳이다. 이런 숲에서 몇 날 며칠을 지내다간 미쳐 버려도 이상하지 않겠어." 망토를 입가까지 둘둘 만 라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고 날카로운 눈으로 숲을 노려보고 있었다. 산을 오르느라 녹초가 된 나와는 달리 두 사람은 무한 체력을 증명하듯 호흡조차 거칠어지지 않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자리를 잡도록 하지요. 내가 찾는 건 더 안으로 들어가야 있을 것 같으니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자 다른 세 사람들은 묵묵히 야영할 준비를 했다. 조금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나도 마른 가지를 모아와 야영준비를 도왔다. 산속의 해는 일찍 진다. 게다가 겨울. 엄청 춥고 조용하다. 나는 타닥타닥하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 앉아 모포를 둘둘 감고 있었지만 뜨거운 얼굴과는 다르게 불을 등진 뒷부분은 매우 차가워서 태양을 맴도는 수성의 기분을 한껏 실감하고 있었다. 마이엘이 가져다준 따끈한 스프를 후루룩 마시며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따갑다. 모포에 얼굴을 묻고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만 복잡하다. 어쩌면... 맞은 편에서 라한이 혼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자석 추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내 의식이 이 산을 넘지 못하는 것도 저 자석과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뭐야 이거,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산맥을 넘으실 거면 차라리 타르만이나 푸디그를 경유해 가는 건 어떨까요? 그 쪽에는 비교적 산세가 약해서 건너편의 소국들과 교류가 있으니까요." 내 목적이 이 산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 마이엘이 옆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별로 건너편으로 넘어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처음에 있었던 그 안개 끼고 기분 나쁜 장소를 찾으면 뭔가 보일 거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거 곤란하게 되었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 이런 산 속을 헤맨 적 있다니, 길이라도 잃어 버리셨었나요? 용케 무사히 빠져 나왔네요." 마이엘의 말에 나는 긍정하듯 멋쩍게 웃었다. 내가 이 세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런 무관심마저도 무서워서 꽤나 삭막한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떻든 이 마이엘이란 녀석은 가끔 한마디씩 질문도 해주고 내 말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사실 아무것도 묻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이렇게 질문 해 주는 것이 나에 대한 관심으로 보여서 조금 다정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정말 사람의 마음은 이중적인가 보다. 더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원래 목적지였던 퀘도를 향할 것인가 고민하는 사이 스르르 졸음이 몰려왔다. 다음날은 고열과 두통에 시달렸다. 나를 들쳐 업고 서둘러 마을로 내려온 세 사람은 의사를 부르고 도중에 민태의 오두막에 들러서 가져온 약초 몇 뿌리로 약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여행의 피로와 산속의 음습한 공기가 평범한 일반인인 내게 무리였을 거라고 라한이 무뚝뚝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에 더해 정신적인 피로감도 한 몫 했을 거다. 낮에는 말을 타고 달리고 밤에는 크릴 산맥을 살피려고 기웃거렸으니 종잇장 보다 얇은 내 허약한 정신력이 버텼을 리 없다. 예전에 제하가 귀환했던 그날, 녀석에게서 내가 창조자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대륙 여기저기를 종횡무진하던 때가 있었다. 덕분에 1반 아이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지만 그때 아마 며칠동안 앓았었지. 내가 의식을 멋대로 날리기 시작하면서 툭하면 픽픽 쓰러지던 이유도 이제서야 이해가 간다. 창조자라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몽롱한 시야너머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직은 까만 밤, 저녁 내내 곁을 떠나지 않던 마이엘도 건너편에서 잠들어 있다. 낡은 나뭇결 무늬의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지만 아른아른 거리는 한 사람의 실루엣은 익히 알고 있는 녀석의 것이었다. 안돼...이번 여행하는 동안 되도록 보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생각나면 가끔씩, 그리고 안부가 궁금할 때, 그럴 때 보자고 혼자 결심했었다. 여행을 시작한 것에는 왕성에 있으면 시도때도없이 녀석이 생각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몸과 마음이 약해진 이때에 녀석의 얼굴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나를 더 괴롭게 하지 말라구. 그리고 이렇게 약해져 있을 때는 언제나 그렇듯 의식은 나를 배반하고 저 좋을 대로 허공을 부유한다. -유디스!!! 유디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야 이 미친 자식아아아---!!!!" 유현의 실루엣이 차분히 손을 놀리는 데에 반해 등 뒤에서 고래고래 욕을 하는 세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어느 허름한 헛간이었다. 주변에는 울창한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달빛마저 가리는 그런 기분 나쁜 숲속에서 헛간인지 마구간인지 사람이 사는 집인지 모를 나무로 된 건물이 뒤로 강물을 등지고 유령의 집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 허름한 집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의 세준이 달려 나오면서 말을 타려고 준비하는 유현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있었다. "퀘스터 장관님을 못 믿는 거냐? 곧 배가 도착하면 다른 녀석들하고 합류할 수 있어. 켄네르 영지로 가는 길까지 호위할 소수 병력도 올 거야.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야 나라를 세우든지 망명을 하든지 할 거 아냐! 그런데 너 머릿속이 깡통이 된 헤시안만 데리고 어딜 가겠다고? 제정신이냐?!!" 세준은 등을 보이고 있는 유현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짚으며 동시에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손은 음침하고 그늘진 얼굴이 천천히 뒤 돌아 보자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앞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치켜 뜬 눈동자는 멀리서 보았다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구슬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윤승호가 스스로 성을 나갔다. 이건 기회야. 녀석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때야 말로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나는 급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지금쯤이면 벌써 귀보르냑 영지에 도착했을 거다." 유현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에 오세준이 안장 위에 앉아 있는 제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헤시안! 너라도 뭐라고 말 좀 해봐! 평소엔 그렇게 쫑알쫑알 대던 입이 왜 갑자기 조용하냐! 이게 말이 되냐? 지금 유디스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는데 사자 아가리로 뛰어들어도 유분수지 그 엿 같은 길드의 본거지인 귀보르냑으로 가겠다고? 헤시안 너 기억을 잃더니 판단력도 바보가 된 거야? 유디스가 가자고 하면 어디든 쭐레쭐레 따라 갈 거냐구!!" 제하는 두터운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으면서도 추운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침착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떨림은 없었다. 다만 입을 열 때마다 흘러 나오는 하얀 김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나도 말렸어. 하지만 소용이 없더라. 혼자 보낼 바엔 같이 가겠다고 결정한 것 뿐이야." "아우우- 이 답답한 것들!!!" 오세준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 쥐어 뜯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유현은 그런 자신의 친구를 한 번 보고는 훌쩍 말 위로 올라 탈 뿐이었다. 말 아래에서 화를 내며 유디스를 바라보던 세준이 이를 갈듯이 유현을 노려 보았다. 순간 오세준의 얼굴이 날카롭게 일그러졌다. 굉장히 빠른 움직임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 유현을 노리는 세준의 검 끝은 아주 약간 떨고 있었다. "돌아 오는 거지?" 말고삐를 잡고 있는 유현은 무방비 상태였다. 여기서 오세준이 마음만 먹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거리였지만 유현은 가만히 있었다. "돌아 오는 거지? 그렇지? 네가 윤승호를 만나서 뭘 어쩌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자식을 데려오면 기껏 아군으로 만든 귀족들이 엄청나게 반발하겠지. 그래도 좋아. 네 놈이 어디서 뭘 하고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를 위한 왕국을 착실히 준비해 나갈 거다. 그러니까 너는 사지 멀쩡히 돌아 오기만 하면 돼. 알겠어? 돌아 오는 거라구!" 유현이 물끄러미 세준을 내려다보았다. 드물게 진지한 얼굴, 진지한 자세의 세준은 그 답지 않게 초조해 하고 있었다. 녀석의 눈동자가 충혈 된 것을 보는 것은 또 처음으로, 요즘 오세준은 내가 볼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보여 주고 있다. 오세준과 진유현의 우정이 돈독하다고는 생각한 적 없지만 가끔 세준이 유현의 무리한 명령에도 "예이~예이~"하고 넉살 좋게 대꾸하며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본 적은 있다. 나를 때리던 박재석이나 임경철들은 오세준의 그런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은근히 진유현을 겁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녀석들의 어쭙잖은 우정이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부러웠다. "......너에게도 왕위를 이을 자격이 있어. 아딘." 무뚝뚝한 유현의 음성에 오세준의 팔이 부르르 떨린다. 세준은 화가 났는지 얼굴이 구겨지고 악문 잇새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내 자리 넘보면 가만 안 둬." 조용한 유현의 음성이 어두운 허공에 맴돌았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얼굴은 아까의 사나운 표정보다는 조금 풀어져 있었다. 그 부드러운 표정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아채기 힘든 것이어서 오세준이 저 얼굴을 봤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유현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세준은 멍하니 있다가 화를 누그러뜨리듯 천천히 검을 거두고 묵묵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돌아온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현의 말을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들었는지 작게 안도하는 숨을 내쉬고 있었다.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찬바람이 숲의 나뭇가지를 스치며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는 유령의 집 같은 배경의 목조건물과 더불어 어딘가의 혼령처럼 한들한들거렸다. 더이상 유현을 설득하길 포기한 오세준이 뭐라고 투덜투덜 거리더니 팩-하고 등을 돌려 걸어간다. 말 위에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현과 제하는 곧 푸르릉 거리는 말에게 기합을 넣으며 오세준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의 흐름을 따라 달리는 말발굽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거슬렸는지 등을 돌려 걸어가던 오세준이 멈칫한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밀정녀석, 쓸데없는 얘길 유디스한테 해가지곤..." 오세준의 작은 한숨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버섯국에 잡곡죽으로 배를 채우니 눈 앞이 핑글핑글 돌던 어지럼증도 줄어드는 것 같다. 밖에선 제법 바람이 세차게 부는지 창문이 덜컹거렸고 길을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다. 오늘은 날씨가 꽤나 추운가 보다. "왕궁에 스파이나...뭐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식사도중 마이엘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마이엘이 턱을 긁적이며 "글쎄요..."라고 말하지만 딱히 부정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있겠죠. 아직 모든 귀족이 에드바라하로 돌아선 것도 아니고 유디스도 살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우리도 전문가들이 잔뜩 있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숟가락을 입에 물고 조금 생각에 잠겼다. 진유현이 나의 행방을 안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왕궁에 첩자가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던 오세준의 중얼거림도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다 먹은 그릇 앞에서 수저를 깨물고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묵묵히 건포를 뜯던 바투가 한마디 했다. "또 등산하려는 생각은 관두는 게 좋소. 하늘을 보아하니 곧 눈이 올 것 같은데 굳이 저 산을 넘어야 한다면 마이엘의 말대로 푸디그나 타르만을 경유하는 것이 나을 듯하오." 과연 바람이 세차게 부는 창 밖의 하늘은 대낮임에도 우중충하니 어두운 구름이 뒤덮여 있었다. 맞은 편의 라한은 예의 그 자석을 바라보더니 "이상하네..."하고 혼자 중얼거린다. 자석은 허공에서 얌전히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이요? 아아..맞아. 이렇게 추우니 눈이 오기도 하겠군요..." 멍하니 라한의 자석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퍼뜩 기분 나쁜 생각이 들었다. 눈이라고?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마이엘이 한가롭게 바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이 마을에서 며칠 신세를 져야 겠는 걸요. 눈 내리는 벌판을 여행할 수 없으니." "음...그리고 여행을 간다면 역시 좀 더 남쪽에 있는 타르만이 좋겠지. 위치상으로야 푸디그가 훨씬 가깝지만 이 계절에 크릴 산맥을 넘으려면 아무래도 북쪽으로 향하는 건 무리다. 이거 한참을 돌아가야 겠다." 멍하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마을에서 더 지체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 유현이 여기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몰라! 그렇다고 내가 유현의 얘기를 하면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할 것이고... 유현이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만일 어젯밤 출발했던 곳이 귀보르냑과 가까운 위치였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 거다. ...지금 어디쯤인지 살펴볼까? 숟가락을 문 채로 멍하니 테이블의 한 곳을 응시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테이블의 나뭇결 무늬가 아니라 찬바람을 맞으며 황야를 달리는 말 두 필. 그것이 진유현과 김제하임에는 틀림없는데 제하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황야의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에 제하는 말 위에 앉아 있음에도 금방 쓰러질 듯 아파보였다. 얼굴에 발갛게 열이 오르고 있는 것 같은데 유현은 아는지 모르는지 앞만 보고 달린다. 녀석의 호흡도 거칠다. "승호님? 밥, 더 드릴까요?" 빤히 바라보는 마이엘의 얼굴너머로 이상한 표정을 하고 나를 보는 바투와 라한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아직도 숟가락을 입에 물고 멍청하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 "주...주세요..." 역시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의식을 날리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다고 허구한 날 잠만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니 능력이 있어도 귀찮은 건 마찬가지라고 한탄하며 억지로 죽 한 그릇을 입안으로 우겨 넣었다. 시커먼 구름이 하얀 면솜을 잘게 찢어 뿌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아도 그 유려한 움직임을 따라 갈 수 있을 만치 천천히 내려오는 뽀얀 눈송이는 내 엄지 손톱보다 큰 놈도 있었고 가끔 새끼 손톱만한 크기의 놈도 있었다. 바람이 없어 사방은 고요했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사락사락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사납게 바람이 몰아치고 뼈를 에는 듯 추웠던 날씨는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누그러졌다. 여전히 춥긴 했지만 이렇게 완전무장하고 나서면 알갱이가 큼직한 함박눈을 구경하는 데에 무리는 없다. 서울에선 이만큼 큰 눈을 본 기억이 없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금의 편안함이 거짓말같이 느껴져서 더욱 발걸음을 못 떼고 있었다. -제기랄, 이런 데서 눈이라니. -눈이 그치면 나가자. 승호도 이런 눈발 속에선 움직이기 힘들 거야. 두 사람의 대화가 아련히 들린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열로 앓아 누워 있는 제하와 초조해 하는 유현을 생각해 냈다. 두 사람은 지금 어딘가의 마을에서 국지적인 눈보라에 발이 묶여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더구나 제하는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만일 날씨가 이렇지 않았다면 유현은 제하를 버려두고 떠났을 것이다. 녀석은 원래도 좋은 성격은 아니었는데 점점 성질이 나빠지는 것 같다. 항상 눈에 핏발이 서 있고 사람을 쳐다봐도 노려보기 일쑤였다. 지금 녀석들이 묵고 있는 숙소도 여관주인이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의 아내와 한참 상의 한 뒤 겨우 두 사람을 들여보내 주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승호님? 이제 안으로 들어가시죠. 머리에 눈이 쌓였어요." 아니나다를까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담요에 새하얗게 얼음 알갱이가 달라 붙어 있었다. 멋쩍게 웃으며 마이엘과 함께 안으로 들어 갔다. 여관의 공기는 훈훈하게 데워져 있었고 주점 겸 여관을 하는 형석이네 가게에 손님이라곤 우리뿐이었다. "이런 계절에 여행이라니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보죠?" 형석이의 어머니라는 사람이 간식거리를 내오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접시에 담긴 완두콩은 막 구웠는지 따끈따끈하고 구수했다. 나는 콩을 우물거리며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라고 말했지만 나를 길드원으로 알고 계시는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가 보다. 왕의 명으로 어딘가 심부름이라도 가는 줄 알고 계시는지 비밀스러운 눈초리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비밀이 많은 법이죠. 우리 아들도 그랬다니까~" 라며 호호호 웃으셨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거죠?" 마이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그쳐도 한동안은 길이 얼어 붙어서 제대로 움직이기가 힘들 것 같다. 이거 좀 곤란한데.... 뒤에선 진유현이 따라오고 있고 앞길은 험하기만 하다. 왜 하필 이런 때에 이런 계절인지 새삼 후회 되기도 하고 날씨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일단은...산을 넘는 게 무리라면 퀘도로 가요." "퀘도...요?" "크릴산을 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산 자체에 볼일이 있었으니까요. 저 산에 더 이상 들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이제 원래 목적지로 가야죠." 나는 가만히 제하가 해주던 얘기들을 더듬어 보았다. 퀘도의 끝으로 말을 달린 제하는 그 긴 여행의 시간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오직 나에 대한 미움만으로 그렇게 험한 길을 달렸던 걸까? 왜 대륙의 끝으로 가면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다 문득 이런 계절에 더 북쪽으로 올라가다니,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어 할 세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게다가 정작 고생하는 것은 길안내를 하고 짐을 들고 온갖 궂은 일은 다 떠맡아 하는 저들이 아닌가. 하지만 "퀘도라...북반구로군..."하고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마이엘은 내 의견에 항의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바투랑 라한도 지도를 꺼내 들고 경로를 살핀다. 불평이 쏟아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적극적인 반응이라 나는 좀 얼떨떨해졌다. 그래서 빤히 그들을 바라보다가 라한이 고개를 드는 바람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왜? 우리들이 뭐가 이상한가?" "아, 아뇨...저기.....괜히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 미안해서..."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바투가 지도를 접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게 일이오. 전하의 명을 받아 당신을 원하는 곳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것이지. 미안함을 느낀다니 나로선 그게 더 놀랍군." "이정도로 고생이라니 우리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데? 이래봬도 사막이든 빙하든 자신 있다고 자부하는데 말이지." 무뚝뚝한 바투와 입 끝을 말아 올려 기이한 표정이 된 라한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의 말이 조금 딱딱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일단은 불평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새 옆에서는 아줌마가 다가와 참견을 한다. "어머, 퀘도로 가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겠네. 역시 바다를 건너는 거니? 아니면 푸디그를 경유하려고? 눈은 내일이면 그치겠지만 그래도 언 땅이 녹을 때까지 며칠 더 묵다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구운 콩을 한 바가지 더 들고 접시에 담아 주면서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셨다. 하지만 며칠 더 머물다니 안 될 일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눈이 그치자마자 출발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뱃길로 가죠. 헤시안도 그리로 갔다고 했으니까...." 순간적으로 제하라는 이름이 튀어 나올 뻔했다. 뒷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는데 워낙 주변이 조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들렸나 보다. "헤시안? 아아, 그 스트레스로 인한 기억착란으로 재무관병인지 뭔지 이상한 병에 걸린 그 사람이요? 승호님이 그 사람을 알아요?" 마이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말실수 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으음...유디스가 왕이었을 때 조금...알았어요." "혹시 그자가 떠났던 경로를 따라 가는 건가?" 의외로 바투가 예리하게 물었다. 나는 놀란 얼굴로 바라보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말했더니 그의 경계선을 알 수 없는 이마에 주름이 진다. "그렇다면 자네도 헤시안과 같은 목적으로 가는 거였나?" "예?" 그리고 나는 오늘 묘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대륙의 끝을 세계의 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대륙의 끝으로 가려면 보통 부디칸이나 퀘도를 향하게 되는데 가족을 만나러 가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면 모험자들이 그 땅을 밟는 이유는 딱 하나,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비싼 옷을 걸치고 퀘도를 헤매는 여행자라니 모험가들이 의심하지 않을 리가 있겠소? 우리들은 곧장 북쪽으로 향하는 이덴 왕족의 목적이 생명수라고 확신했지. 이전 게비도 왕이 어느 여행자의 목을 치고 생명수를 빼앗았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해서 이번엔 야욕을 불태우는 유디스가 사전답사로 헤시안을 보낸 거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더군." 그러나 결국 제하는 생명수를 구하지 못했다. 녀석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모험가들이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바투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명수라는 것은 보통 대륙의 끝, 세상의 끝에 있다고 하지. 하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없어. 다만 퀘도와 부티칸의 끄트머리의 하천, 혹은 산줄기 아랫자락에서 마치 용천 마냥 퐁퐁 샘솟는 붉은 물질을 발견할 뿐이야. 그것도 아주 소량의, 공기 중으로 산화 되기 직전의 타이밍을 운 좋게 잡아야 얻을 수 있거든. 생명수는 공기와 닿으면 일정 시간이 지나 사라져 버리니까. 들리는 말에는 지하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서 드루키아까지 생명수가 흐른다고도 하는군. 그곳의 페고 열매가 붉은 빛을 띠고 약재효과가 있는 것이 다 그때문이라고..." 꽤나 흥미진진했는지 여관 주인인 아줌마와 아저씨도 식탁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아 바투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차피 손님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다. 밖에선 눈발이 흩날리고 있고 장작불은 타닥타닥...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이 아늑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헤에? 그럼 승호님의 목적은 생명수예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마이엘과 아줌마, 아저씨와는 달리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라한과 바투는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저 두 사람이 저런 눈으로 보면 좀 무서운데....나는 양 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헤시안이 내준 숙제를 해결하러 가는 것 뿐이에요." 녀석이 얘기 해주지 않았으면 나는 이 세계의 실체를 평생 몰랐을 거다. 제하의 말마따나 여기서 우리들을 현실로 돌려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나 뿐, 그래서 움직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추가의 설명을 요구하는 듯 일제히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나는 곤란하게 미소 지으며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할 말도 없었다. 그런 내 반응을 아줌마와 아저씨는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전하의 명령으로 행하는 일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 암암..."하고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괜히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마이엘을 비롯한 다른 두 사람도 더 이상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복이 쌓여가는 창 밖을 바라보며 적어도 내일은 눈이 그치길 간절히 바랬다. 화창하게 개인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활짝 핀 얼굴로 여관 밖에 나왔다. 겉옷을 걸치지 않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날씨는 포근했고 거짓말 같이 눈이 그쳐 따사로운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날씨라면 오늘이라도 당장 길을 떠날 수 있겠는 걸요. 어제 그 기세로 볼 때 며칠은 더 눈이 올 줄 알았는데." 옆에서 마이엘이 웃으며 다가와 "그래도 외투는 입으세요."하고 옷을 어깨에 덮어 주었다. 며칠 전만해도 그렇게 황량하던 거리가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고 그 와중에 꼬마들이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것도 다 날씨가 풀린 덕분이다. 얼음이 꽁꽁 언 눈덩이를 치우는 것만큼 귀찮은 것도 없다며 한탄하던 여관집 주인 아저씨는 진흙과 섞여 흐물흐물해진 눈이 마음에 드시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여관 입구를 치우고 계셨다. 차가운 공기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훑어 주는 듯 기분이 상쾌하다.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자 아주머니께서 서운해 하시며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챙겨주셨다. 마이엘은 마을의 상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샀고 라한과 바투는 무기와 말굽에 신경을 쓰며 다시 한번 장비 점검을 했다. 그러나 별로 준비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에 정오가 되기 전에는 출발할 수 있었다. 포근한 날씨는 며칠 계속 되어서 우리는 생각보다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자정이 지난 주점은 등잔불 하나에 의지해 음산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음산함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살벌한 공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고 천정에 매달린 등이 한들한들 흔들린 탓에 그림자가 어지러이 춤추고 있었다. 제하와 유현은 서로 노려보며 대치 중이었다. 아련히 피냄새가 확 끼치고 어디선가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 신음 소리는 제하의 등 뒤, 테이블과 의자가 바닥을 뒹구는 주점의 한 구석에서 쓰러져 있는 남자의 것이었다. ...이런 맙소사! 형석이네 아버지, 여관 집 주인 아저씨다! 아저씨는 배에 심한 검상을 입고 있었는데 이 역한 피냄새는 그때문이었다. 옆에서 아주머니가 새파랗게 질려서는 앞치마를 찢어 겨우 지혈을 하고 있었지만 제하의 등 너머로 유현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만하자...이제 다 알았잖아...이 분들께서 전부 말씀해 주셨잖아... ...유디스...진정해...진정하라구..." 침을 꿀꺽 삼키는 제하의 목젖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앓고 난 제하의 얼굴은 수척했고 목줄기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제하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유현을 막아 서며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를 속이려고 했어. 감히 반대쪽인 타르만으로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왕에게 거짓을 고하는 자는 극형이야." 제하는 초조한지 자꾸 침을 삼키며 유현에게서, 아니 정확히 하자면 유현의 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서...어서 승호를 쫓아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우리는 시간이 없어 그렇지? 지금은 밤이지만 요즘은 날씨가 많이 풀렸고, 빨리 말을 달리면 내일 새벽 중으로 다음 마을에 도착 할 수 있을 거야. 얼른 여기를 떠나자, 응?" 가만히 제하의 말을 듣던 유현이 고개를 까딱 거린다. 머리카락이 드리워지고 빛을 등 뒤에서 받는 녀석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우리를 고발하면 귀찮아져. 여기서 없애버리는 편이..." "아니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이 분들은 말씀하시지 않을 거야. 그, 그렇죠? 우릴 봤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나중에 찾아와 보복할 거에요! 그러니까 말하지 않을 거죠? 그렇죠?" 거의 사정하는 어조로 제하가 등 뒤의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 안 해..안 해요, 안 할 게요..." 하고 중얼중얼 거리셨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는데 유현은 가만히 아주머니의 얼굴과 제하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쯧-"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검을 거둬들였다. 안도의 한숨이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를 느슨하게 풀었다. 제하는 눈에 눈물방울이 맺혀서는 "잘했어, 유디스..."하고 유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재빨리 여관을 나와 밖에 매어둔 말 위에 올라 타려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주머니께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동네 사람들!!! 여기 괴한이! 괴한이 나타나서 우리 남편을 찔렀어요!!!! 여기 이 사람들이...!!!" 흡- 나는 숨을 멈췄다. 아주머니의 목덜미에 작은 칼날이 박혔다. 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여보---!!!" 다친 배를 감싸 쥐며 기어 나온 아저씨 역시 목줄기에 단도가 박히며 그대로 절명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꼿꼿이 얼어 붙었다. 제하 역시 믿기지 않는 듯 말을 타려다 만 자세로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왜..." 덜덜 떨리는 제하의 턱은 따각따각 하고 이빨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왜 죽였어--!!!!!" 유현의 멱살을 잡으며 제하가 달려 들었다.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제하의 얼어붙은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여관 입구에서 목에 칼이 꽂혀 쓰러져 계시는 두 분, 비록 가짜라고는 하나 이 세계에서는 형석이네 부모님들이다. 나는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유현은 강한 힘으로 자신의 멱살을 잡은 제하의 손을 떼어 냈다. 미간을 찡그린 녀석은 말 위로 올라탔다. "쓸데없는 걸 묻는군. 그럼 그대로 동네방네 떠들도록 놔두었어야 한단 말야?" 조금씩 소란스러워 지며 주변의 집에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하는 말소리가 들리자 유현이 제하를 재촉한다.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리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제하도 말 위에 올라 탔지만 뚝뚝 흘리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너는...너는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이고...그렇게..." "언제나 있었던 일이다. 기억만 잃은 줄 알았더니 머리도 어떻게 된 거 아냐?" 차갑게 말을 던지며 유현은 제하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마악 달리려던 참에 무언가 생각난 듯 녀석이 고개를 돌리고 물끄러미 제하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쓸모 없어진 건 아니더군. 과연 헤시안. 저 여관집 부부가 거짓말하는 것을 용케 알아 차렸어. 귀찮은 혹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비웃음처럼 입 끝을 올리며 그렇게 말한 뒤 "핫-"하는 기합을 넣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제하는 말고삐를 움켜쥐며 괴로운 듯 이를 악 다물었다. 그러다 결국 눈물을 훔치고 나서 유현의 뒤를 따랐다. 하나 둘 켜지던 불이 다시 꺼지며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곧 관심을 끊고 잠자리로 돌아갔다. 어둑어둑한 여관 입구에서 두 구의 주검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얼굴은 바닥을 향해 쓰러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원망하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악---!!!!!!" "무슨 일입니까!"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뺨은 나도 모르게 축축이 젖어 있었다. 보초를 서던 마이엘이 깜짝 놀라며 달려왔고 수면을 취하고 있어야 할 바투와 라한은 마치 계속 깨어 있었던 것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민첩하게 경계했다. 나는 부들부들 거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아무 위험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 마이엘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나 난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날이 밝으면.... 형석...아니, 파웰에게 전보를 보내요...빨리....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예?" 미간을 찌푸리는 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보건 말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욱욱 거리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오열을 했다. 아직도 아주머니께서 주신 간식을 다 먹지도 못 했는데 나는 두 분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죽음이 나로 인한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자 미칠 것 같은 죄책감과 무력감이 엄습해왔다. 다정하신 두 분을 죽인 유현이 밉고 그걸 막지 못한 내가 증오스러웠다. 빨리 돌아가자. 이 세계에서 빨리 없어지자. 생명의 무게가 종잇장처럼 가벼운 이 세계에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도록,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승호...만나면 어쩔 거야?" 황야의 어느 바위틈에서 모닥불을 쬐던 제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던 탓인지 목소리는 갈라지고 마치 중얼거리듯 작은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 맞은 편 바위 위에서 하얀 헝겊으로 칼날을 닦던 유현의 손이 멈췄다. 불빛과는 좀 떨어져 앉은 녀석은 대답 대신 팔을 높이 뻗어 달빛에 검신을 비추어 본다. 모닥불의 강렬하고 일방적인 불빛이 아닌, 희미하고도 은은한 달빛을 받아 파르라니 빛나는 검날은 벌써 여러 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깨끗하고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달빛은 희미하게 유현의 실루엣만 비출 뿐 녀석의 얼굴은 눈빛조차 보이지 않을 만치 어두워서 얼굴이 아예 시커멓게 보인다. 씨익하고 입이 벌어지자 가지런한 치아가 어두운 얼굴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죽여버릴 거야."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주위의 싸늘한 공기에서 얼음조각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제하는 그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슬픈 눈을 하고 잇새로 나지막하게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왜?" "나를 감히 이 꼴로 만들었으니까." 앞머리의 그늘에 가려진 유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얗게 드러낸 이는 먹이에 굶주린 들개의 미소 같았다. "녀석을 끊어버려야 내가 다시 왕이 될 수 있으니까." 바람조차 불지 않은 황야의 밤은 바위틈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에 비친 두 개의 인영만이 살아 있는 존재인 양 고요했다. 이 넓은 대지에 생명체라곤 제하와 유현, 그리고 모닥불 뿐이었다. 말라 비틀어진 고목나무에 메어 둔 말 두 필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듯 푸르릉 거리긴 했지만. 고개를 떨군 제하는 주황빛, 노란빛, 붉은빛의 불꽃을 얼굴에 새기며 망연히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따금 콜록 거리며 차가운 밤공기가 견디기 힘든지 모포를 두르고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날 며칠을 달려 내 뒤를 쫓아 왔다. 귀보르냑 영지의 여관에서 내 목적지를 알아냈으니 제하의 능력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나를 쫓아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게다가 퀘도로 가는 루트는 한정 되어 있다. 설령 유현과 제하가 내 발자취에 대한 단서를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퀘도로 갈만한 길목에서 '때 아닌 계절에 북쪽으로 향하는 도련님 일행'에 대해 묻는 다면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대답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비록 쫓기는 입장이긴 했지만 언제라도 유현과 제하의 행방을 알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조급함은 느끼지 못했다. 날씨는 더없이 좋아서 겨울치고는 따뜻한 기온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이곳의 겨울이 원래 이렇게 짧은가 의문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봤는데, 다들 고개를 저으면서 이덴의 북부는 적어도 넉 달은 겨울이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중간에 마을에 들러 식사를 하고 있으면 올 겨울의 이상 기온현상이 화제에 올라 내년 농사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고 요 며칠 길가에서 계절을 착각한 봄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따뜻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겨울을 기준으로 봤을 때의 얘기다. 여전히 바람은 찼고 해는 짧아 오랫동안 말을 달리지 못한다. 아침이 되면 낡은 여관 이불 속에 파묻혀 "아, 추워...일어나기 싫어..."를 연발하는 나날임에는 변함없었다. "퀘도까지 배로 직선 항해를 하는 것도 가능하겠군. 부디칸을 경유하면 금방 육지에 다다를 수 있겠지만 육로로 가면 아무래도 빙 돌아가게 되니까...." 우리는 이덴 북서부에 위치한 어느 항구도시의 주점에서 빵을 뜯어 먹으며 지도를 보고 있었다. 여행은 순탄했다. 간혹 산속에서 나타나는 맹수들은 라한과 바투가 해치웠고 가끔씩 산적이 출몰하긴 했어도 별로 위협을 느낄만한 상대들은 아니었다. 다들 집 잃고 땅 잃어 굶주림을 못 참고 산적이 된 전직 농민들이었으니까. 중간에 별다른 휴식 없이 항구로 직진한 우리들은 이렇게 여관에서 며칠을 기다리며 우리들을 태워줄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그렇게 눈에 띄나요?" 한참 배편에 대해 이야기 하다 말고 불쑥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주점은 혼자 낮술을 마시는 아저씨도 있고 대여섯 명이 모여 식사를 하는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저들이 자꾸 힐끔힐끔 쳐다본다고 생각되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주방 아저씨 조차도 우리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으니까. 내 걱정어린 물음에 마이엘은 빙긋 웃으며 "눈에 띈다기 보다는요..."라고 운을 떼기 시작했다. "이 근처에서 퀘도로 가는 배편을 알아보는 여행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눈여겨 보거든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마이엘을 쳐다보니 "생명수 말이에요, 생명수."라고 조그맣게 말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비밀스런 움직임에 주점 사람들의 귀가 꿈틀거렸다는 건 솔직히 무서운 일이었다. "일종의 반사작용 같은 거에요. 상인도 아닌 여행자가 관광할 것도 없는 퀘도에 간다면 다들 한 번씩은 생명수를 떠올리거든요. 게다가 우리들은 모험가 치고는 깔끔한 복장에 승호님과 같은 미성년자도 섞여 있으니 지레 수상하다고 의심하는 거죠." 그렇게 말한 마이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우리 둘의 귓속말에 점점 몸이 기울어지는 주점의 사내들을 보고 짓궂은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은근히 이러한 시선집중을 즐기는 것 같았다. 묵묵히 음식을 먹는 라한과 바투를 보며 "위험하지 않을까요?" 라고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는데 세 사람은 이런 일에 익숙한지 별것 아니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자만심인지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세 사람의 표정에 걱정의 기미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저들이 위험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뒤따라 오는 유현이 우리들의 행방을 이런 수다꾼들에 의해 쉽게 접한다는 것에 있다. 어차피 퀘도로 가기 위해 거치는 마을은 한정되어 있었고 마을의 몇 개 안 되는 여관을 뒤지면 우리들이 묵었던 곳을 찾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게다가 무슨 여관 주인들이 그리도 입이 싼지 제하가 동전 몇 푼 쥐어 주면 우리들의 갔던 방향이나 주점에서 떠들었던 일까지 신이 나서 술술 뱉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비밀 회의하듯 방에서 얘기하자고 하기도 그렇고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세 사람의 대화를 막을 수도 없어서 혼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나와 유현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내가 수시로 주의를 기울여 녀석의 행동을 파악한다면 결국 녀석은 나를 만나지 못 한 채, 어쩌면 퀘도의 넓은 땅에서 내 행방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부디 나를 포기하고 오매불망 기다리는 오세준의 곁으로 가서 나라를 다시 세우든 망명을 하든 본인 할 일을 알아서 하길 바랄 뿐이다. 나를 죽이겠다는 녀석의 말은 사실 슬펐다. 결국 나는 녀석에게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씁쓸한 감정은 위협을 느끼기 보다는 '그럼 그렇지'하는 체념에 가까웠다. 자기 중심성이 강한 그 녀석이 유난히 나에게 집착했던 것이 오히려 거짓말 같기만 하다. 이것 봐. 역시 그 진유현이잖아. 부와 힘과 권력이 사라지니까 금방 꼬리를 말고 본색을 드러내는, 어쩔 수 없는 이기주의자. 제 맘대로 안 되는 나를 없애려고 쫓아오다니 최저다. 아, 뭘 새삼스레 이런 생각하는 거냐. 처음부터 둘은 같은 인간이었잖아. 빨리 이 세상을 떠나버리면 이런 지긋지긋한 도돌이표의 음악도 끝낼 수 있겠지. 진유현은 더 이상 나를 죽이겠다고 아득바득 이를 갈지 않아도 되고 김제하도 유현이 옆에서 상처 받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그런 너희들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나도 해방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세상따위, 알게 뭐냐. "그런데 유디스 얘기 들었나?" 누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 갑자기 한심함이 엄습해 왔다. 이제는 왕도 아니고 그저 쫓기는 도망자일 뿐인데 이런 시골 항구의 주점에서 이름을 부르든 욕을 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지금 이덴 북부지방에서 유디스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해. 시작은 귀보르냑 영지였다더군!" "말도 안 돼. 지금 유디스는 충신들과 손을 잡고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니야. 아니야. 유디스가 망하기 전에 첩이 하나 있었잖아? 그 첩을 카이님에게 뺏기고 열 받아서 자살했대드라." "응? 그 애첩이랑 같이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갔다고 들었는데?" 뭔가 이상한 소문이 묘하게 왜곡되어 퍼져 있는 것을 깨닫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히 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단어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근데 정말 꼴사납지 않냐?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여자한테 푹 빠져서는 요 몇 달간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잖아. 영주들은 갑자기 세금을 올리지를 않나 쓸데없는 공사는 왜 그리 많이 하던지...그래도 유디스 놈, 전쟁만 할 때는 곧잘 이겨서 가끔 축제도 열고 덕분에 우리들 떠돌이 상인들은 재미가 쏠쏠했는데." "아 글쎄 그 여자가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일주일 내내 방구석에 틀어박혀서는 그 짓만 했대잖아! 크아~ 얼마나 끝내주는 미인인지 한 번 보고 싶구만." "내 친척이 수도에 갔다가 봤다는데 의외로 아주 아담하고 젖내나는 어린애라고 하더라구." "무슨 소리. 가슴이랑 엉덩이가 빵빵한 새빨간 머리카락의 정열적인 붉은 미녀랬어!" "아냐, 아냐, 지난 번에 연회가 크게 한 번 열렸었잖아? 드루키아에서 바친 무희였는데 그때 구릿빛 피부에 새까만 머릿카락을 허리까지 드리우고 낭창낭창 휘어지는 남부무희의 춤 솜씨에 홀딱 반한 거야!" 여기 꼬질꼬질한 남자애가 당사자라는 것을 모르는 아저씨들이 듣기 민망한 음담패설을 주워담고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여자가 됐는지, 어쩌다가 이야기가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문은 늘 그렇듯이 입방아를 찧어대는 본인들이 좋을 대로 뒤틀려지고 있었다. 마이엘은 그들의 말을 듣고 자리가 불편했는지 "안으로 들어 갈까요?"하고 말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왕성에 있을 땐 귀족들이 더 심한 소리를 수군거리기도 했다. 저 정도면 애교지. "아무튼 허튼 소린 집어 치우고 중요한 건...유디스가 출몰한다는 소문이야." "들리는 말에는 누군가를 수소문하고 있다는데 그러면서 향하는 방향이 아무래도 퀘도 같다더군." "뭐야? 그러면 역시 유디스의 목적은 생명수란 말인가? 지난번 헤시안이 퀘도와 부디칸을 여행한 것과 혹시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생명수 이야기가 나오자 아저씨들의 목소리는 급격히 줄어 들었다. 그래봤자 나한테는 다 들리지만 그들의 대화중에 내가 관심 보일 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유디스가 어느 마을에서 병사들과 대치하다가 몇 명을 죽였다는 둥 하는 소리가 나오면 '내가 안 보는 사이 또 누굴 죽였구나...'하고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 쉴 뿐이었다. "그런데...역시 유디스가 찾는 건 당신인가?" 바투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저 아저씨들의 말을 안 듣는 척 하더니 이미 듣고 있었나 보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묵묵히 따끈한 음료에 입을 대는 바투는 시선을 테이블로 향한 채였다. "아마도......" "그럼 위험한 거 아냐?" 라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뭐 어차피 그런 애송이 따위 우리 손에 걸리면 국물도 없지만."이라며 코끝으로 비웃었다. 마이엘은 이 새로운 사실에 놀랐는지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하더니 이내 배낭에서 부스럭거리며 다 구겨진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 정성스레 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소년의 인상착의와 함께 금액이 적힌 현상수배 종이였다. "이거 얼굴을 익혀 둬야 겠네요. 나는 그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까. 라한씨와 바투씨도 얼굴 모르죠? 승호는 이제까지처럼 우리들 옆에 꼭 붙어 있고 개별행동은 하지 마요." 새삼스럽게 마이엘이 주의를 주며 종이를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어떤 솜씨 나쁜 화가가 그렸는지 지독하게도 안 닮았다. 솔직히 저거 보다는 잘생겼다구. "이거, 본인이랑 닮았소?" 바투가 심각하게 종이를 보며 묻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전혀. 백날 봐야 옆에서 유디스 본인이 지나가도 못 알아 볼 걸요." "예에? 그 정도에요? 그래도 상당히 잘 그린 그림인데요..." 마이엘이 뚫어져라 보던 시선을 떼며 미간을 찌푸린다. 기껏 그림 속의 얼굴을 익히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찬물을 끼얹었나 보다. 하지만 안 닮은 건 안 닮은 거라고. 저걸 대체 누가 그린 거야? "보라구요. 이 얼굴, 유디스는 나랑 동갑인데 이건 완전히 아저씨잖아요. 이보다는 훨씬 어려보이고 머리카락도 이렇게 짧지 않아요. 뭐야, 쌍꺼풀도 없네. 코도 이렇게 펑퍼짐하지 않고 광대뼈도 별로 안 튀어 나왔다구요." 말하면서 나도 모르게 흥분되어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부분이 이렇게 다르고 저 부분이 저렇게 다르고...아무튼 이 현상수배종이 맘에 안 든다. 괜히 머리에 핏대를 올리며 열변을 토하는데 문득 세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이엘은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고 바투는 물만 마신다. 라한이 한마디 툭 던졌다. "혹시 너무 못 생기게 그려서 화난 건가?" 나는 "예?"하고 멍청한 질문을 했다가 내가 좀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이 잘 나오든 못 나오든 나랑은 상관없은 일인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을 내고 있는 거지? "명색이 현상 수배범인데 그림이 당사자와 너무 다르면 신속한 신고가 이루어 질 수 없잖아요?" 결론을 내리고 그렇게 말을 하니 다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조용히 식사를 했는데 나는 그 침묵이 괜시리 신경 쓰였다. 우리가 항구의 여관에서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동안 유현과 제하는 쫓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슬슬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마다 치안은 강화되었고 그 탓에 나의 행방을 묻고 다니던 유현은 병사들과 종종 맞부딪혔다. 그런가 하면 어디서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이상한 무리들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기도 한다. 다행히 제하가 있어서 함정에 빠지거나 거짓말에 속는 일은 없었는데 대신 정면승부 때에 녀석은 유현의 걸림돌이 되기 일쑤였다. 상인도 아니고 모험가도 아닌, 허리에 장검을 찬 소년 두 명이라는 조합은 의외로 눈에 띄었는지, 여관에서 잠자다가 주인의 신고로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 덕분에 제하와 유현은 요즘 계속 노숙이다. -타닥타닥 익숙한 솜씨로 모닥불을 피우게 된 제하는 한 손으로 무릎을 모으고 앉아 마른 가지를 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옆에서 진유현은 모포로 몸을 둥글게 만 채 누워 있었고 품에는 항상 차고 다니던 긴 칼을 안고 있었다. 급하게 지은 천막은 비록 어설펐지만 겨울 밤의 싸늘한 기온에선 어느 정도 두 사람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거의 초봄이라고 해도 좋을 날씨였지만 역시 밤 기온은 차다. "쿨럭쿨럭쿨럭" 기침을 하는 제하의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녀석은 용케 유현이 끌고 가는 대로 잘 따라 다니고 있었다. 이미 한번 여행 경험이 있어서 몸이 전보다 단련되어 있었다는 점이 체력적으로 꽤나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현의 지나친 강행군과 새벽마다 모포 속에서 달달 떨며 눈을 뜨는 일상의 반복은 녀석을 많이 지치게 했는지 얼굴도 몸도 말이 아니다. 제하는 부르튼 차가운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모포를 다시 한번 어깨 위까지 끌어 올렸다. "으으으..." 문득 신음소리가 들리고 제하는 고개를 돌려 유현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유현의 얼굴은 모포에 반쯤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찡그린 미간이나 끙끙대는 신음 소리, 그리고 움찔움찔하고 경련하는 몸뚱어리가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제하는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진유현의 곁으로 좀 더 다가갔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닫힌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잇새로 괴로운듯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유디스?" 제하가 녀석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조금 강하게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탁탁 두드렸다. 유현은 계속 미미한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할 뿐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그러자 불안함을 느꼈는지 제하가 모포를 끌어 내리고 "유디스 왜 그래!"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번쩍, 어둠 속에서 구슬이 반짝였다고 느끼는 순간 유현은 제하를 찍어 눌러 내리고 있었다. "으윽-!!!" 한 손으로 제하의 목줄기를, 다른 한 손으로 어깨를 짓누르던 유현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확장된 동공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있었다. 밑에서 제하가 괴로워 하며 유현의 팔을 때리자 그제야 겨우 정신이 드는지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헤시안?" 갈라진 목소리가 음산하게 튀어 나왔다. 빤히 내려다보던 유현의 얼굴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목줄기와 어깨를 눌러 내리는 팔에 힘은 빠졌지만 여전히 제하를 내리깐 자세에서 비켜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제하는 불안함을 담고 유현을 올려다보았지만 무리해서 밀쳐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유현이 입을 열었다. "헤시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래에 갈린 제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너는 윤승호와 닮았어." 뜬금없는 소리에 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다가 봉창,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유현은 전혀 일관성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아. 너도 윤승호처럼 항상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곤 해. 나는 그것이 너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이상한 병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점을 빼고서라도 너희는 묘한 부분에서 많이 닮았다. 왜 그럴까?"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유현을 바라보는 제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현의 손이 제하의 목줄기에서 배회한다 싶더니 이내 부들부들 떨린다. 손 뿐만 아니라 어깨도, 그리고 얼굴 표정은 어둠에 가려 잘 안보였지만 굉장히 동요하는 것 같이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닮았어..." 그리고 제하의 비명이 터졌다. "이 자식아 그만둬-!!!" 그대로 사고가 정지했다. 머릿속으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눈으로 보고 있는 사실이 뇌로 전달되지 않는다. 모든 신경이 얼어붙어서 바삭바삭 갈라질 것만 같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뭐지? 저거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야? 저 진유현이 제하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거칠게 제하의 몸을 쓸어 내리며 자신의 몸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눈은 어딘가 핀트가 나간 사람마냥 멍하고 입은 무방비하게 벌어져 마치 정신병자 같다. 뒷덜미로 수십 마리의 송충이가 기어가는 착각을 받으며 지난 일이 오버랩된다.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바닥, 희미한 형광불빛, 코끝을 찌르는 피냄새. 분노할 여유조차 없이 공포에 몸을 떨었던 구역질 나는 기억이 눈앞의 영상과 겹친다. 발끝부터 벌레가 기어올라와 머리끝까지 스물거리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하고 뇌가 얼어버리는 것 같다. "야!! 야 너 제정신이냐!!! 이거 안 놔?!!!" 작은 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힘으로 제하가 주먹을 뻗어 유현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제하의 손에서 으득-하는 소리가 났을 정도의 힘이었다. 그러나 끄덕 않는다. 두 팔이 잡히고 몸을 칭칭 감고 있던 망토가 떨어져 나갔다. 얼굴을 묻고 상대의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킁킁 거리는 유현은 내 눈에 이미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미쳤다! 제대로 미쳤다!! 나는 패닉에 빠져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고 안절부절하자 시야가 흐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무력하게 이렇게 보고만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방도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러는 와중에도 제하는 무서운 힘으로 저항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승호한테도 이랬냐?! 그 자식도 이렇게 범했어? 남들한테 손가락질 받는 게 무서워서 녀석을 괴롭혔던 주제에 발정난 아랫도리를 주체하지도 못한 개자식아! 너는 세상이 네 맘대로 안되면 다른 사람한테 화풀이 하는, 그런 형편없는 저질인 인간이야!!!" 이를 아득바득 갈며 몸서리를 치는 제하는 유현이 덮쳐오는 손길을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또 필사적으로 고함치고 있었다. 나는 제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유디스가 아닌, 진유현에게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쌓였던 제하의 진심이란 것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실망했는지 알기나 해? 승호의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꼬리가 길어 밟힐 거라고, 똑똑한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으니 결국은 그만 둘 거라고, 그렇게 믿었어, 아니 믿고 싶었어! 너를 막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윤승호한테 얼마나 미안했는지 네가 알아?!! 그러면서 윤승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을 네가 아냐고!!! 그런데 여기서, 여기서 또 나를 실망시킬 거야?!! 정신차려--!!!" 제하가 겨우 풀린 한 손으로 아무거나 잡고 유현의 머리를 갈겼다. 묵직한 그것은 모닥불로 쓰기 위해 놓아둔 나무 작대기였는데 그 타격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제하의 말이 먹혀든 건지 녀석의 행동이 느릿느릿 멈추기 시작했다. "녀석이랑...달라..." 멍하니 내려다 보던 유현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목 아래까지 살이 드러난 제하는 식식 거리면서도 손에 잡고 있던 작대기를 꾸욱 쥐고 있었다. 한 대 더 때리려고 팔을 휘두르려다가 유현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멈칫 한다. "냄새도 다르고 목소리도 달라, 찡그리는 표정도 말투도 달라." 제하가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는 것에 화도 내지 않는다. 제하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던 말들이 유디스가 아닌, 진유현에게 한 말이란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이제까지 제하가 했던 말은 완전히 무시한 채 자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제하의 얘기는 듣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숨을 색색 몰아쉬던 제하는 손에 나무 작대기를 든 채로 멈춰서는 중얼거리는 녀석을 의문을 가득담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방금 자신이 당할 뻔한 일도 잊고 유현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야, 유...유디스...너 진짜 괜찮은 거냐?" 오히려 제하쪽이 반문할 정도로 유현의 행동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혼자서 자기 세계에 빠져 있다. 여전히 눈에 초점이 없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제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제하는 흠칫하고 몸이 굳다가 기이하게 눈과 입이 일그러졌다. "헤시안...지금의 내가 맘에 안 들지?" 양 손바닥을 보며 혼잣말을 하던 유현이 갑자기 제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얼굴은 제하를 향하고 있는데 눈은 무언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흐리멍텅하다. "그런데 이게 다 윤승호 때문이야. 이 내가 감히 왕좌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게 만들다니 그딴 것은 없어져야 해. 안 그래? 빨리 가서 왕관을 찾아야 하는데, 내 충성스런 신하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자식이 이 하늘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머릿속에 피가 솟구치면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죽여버려야 해. 내가 미쳐버리기 전에 빨리 찾아내서 죽여버려야...놈이 없어져야 밤이고 낮이고 심장을 파먹어대는 기생충들도 잠잠해 질거야. 그렇지?" 제하는 무섭게 일그러뜨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릅뜬 눈과는 달리 턱이 달달 떨리며 오한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몸도 떨고 있었다. 제하의 목덜미와 턱주변에 닭살이 돋아 있었지만 무섭게 진유현의 얼굴을 노려보며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천막 안은 너무 어둡고 모닥불의 빛을 등진 유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얼굴 없이 눈과 입만이 살아 있는 듯 하얗게 드러나 황무지의 굶주린 개가 먹이를 상상하는 표정으로 귀신같이 미소 지었다.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얼굴로 웃고 있지만 수전증 걸린 사람마냥 양손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후...하..." 유현은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그 무시무시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다시 몽롱해진 눈동자는 무엇을 보는 건지 허공을 흐릿하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현은 잠이 다 깼으니 자기가 보초를 서겠다고 말하며 모닥불 앞으로 다가갔다. 뒤에 남아 바보같이 눈만 끔뻑거리는 제하는 멍하니 녀석의 등만 바라보았다. 불빛이 녀석의 실루엣을 비추었지만 넓고 피곤해 보이는 등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컴컴하게 보인다. 제하는 한동안 그렇게 움직이질 못하고 있다가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숙이고 망토며 모포를 잔뜩 몸에 둘렀다. 아마 오늘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음이 분명하다. 제하는 바닥 위로 물방울이 몇 개 똑똑 떨어지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 위로 몸을 뉘였다. 흐느낌을 겨우 참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진유현은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어라고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 살려줘-!!!" 한 남자가 도망가며 등에 칼을 맞아 절명했다. 주춤주춤 몇 무리의 남자들이 뒤로 물러 나다가 굳은 결의를 다지며 손에 든 낫이며 삽을 들고 달려든다. 긴 검이 호를 그리며 그들의 목줄기와 가슴과 배를 훑으며 피를 마시고 있었다. 농민, 아니 지금은 산적이 된 전직 농민들은 그렇게 유현에게 살해당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상대가 먼저였다. 산을 넘는 여행자이겠거니 하고 달려든 그들은 비록 수배 전단지와 닮지 않았지만 눈치로 유현의 일행을 알아보았다. 현상금에 눈이 뒤집힌 요령 없는 초보 산적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 유현의 앞을 호기 좋게 막아 섰다가 두세 명은 말발굽에 짓이겨지고 또 몇은 말 위에서 휘두른 검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대로 유현이 말을 달렸으면 사망자는 그것으로 끝일 터였다. 그러나 말에서 내린 유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검을 겨눴다. 유현이 말에서 내리자 만만하게 본 남자들은 동료의 복수도 할 겸 현상금도 탈 겸 눈에 불을 키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아무리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유현이라지만 여러 명을 상대로 이렇게 압도적인 실력의 차를 보일 수 있나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십여 구의 시체가 생겼고 대부분이 부상자들이다. 유현의 몸에도 상처가 났지만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낫에 맞아 길게 베인 팔뚝의 상처에서 피가 베어져 나오지만 언제나 그렇듯 유현의 싸움방식은 대범하고 무모했다. 도망가는 자는 쫓아가서 죽였다. 항복하며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비는 자도 베어버렸다. 희미하게 웃음을 띤 입가에선 작은 웃음소리도 새어 나온다. 현상금에 눈이 멀어 실력의 차를 알고도 쪽수만 믿고 덤볐던 초보 산적들은 전멸...아니, 두세 명은 살아나간 것 같지만 엄청난 부상을 입은 몸이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고갯길에는 자신이 죽인 시체 위에서 검날을 털고 있는 유현이 있었고 그 모습을 멀찌감치서 질린 얼굴로 바라보는 제하가 있었다. 다각거리는 말굽소리를 내며 제하는 만족스러운 표정의 진유현에게 창백한 얼굴로 다가갔지만 보기 흉한 광경에 속이 울렁거리는지 겨우 역겨움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놈들 표정 봤어?" 검을 검집에 넣으며 유현이 시체의 머리를 발로 굴린다. 혀를 길게 빼물고 입에서 피를 토한 시체의 눈은 허옇게 돌아가 있었다. "그 공포, 그 절망감에 사로잡힌 표정이라니. 추남들이었지만 그래도 눈요기는 되었어." 시체의 얼굴을 툭툭 장화 끝으로 치기도 하고 짓이기기도 하면서 장난을 치는가 싶더니 흘러내리는 핏물을 흙먼지의 장화로 밟으며 그 찐득찐득함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로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체들을 바라보던 유현은 문득 고개를 허공으로 돌리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본 적이 없네."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지며 차가운 공기 중으로 위험한 문장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웃는 모습, 쑥스러워 하는 모습. 머뭇거리던 표정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비참해 하는 모습이나 화내며 소리치는 모습. 고통으로 일그러질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굉장히 궁금해. 아아 아까워라. 이럴 줄 알았으면 녀석한테 좀 더 많은 짓을 할 걸. 몸은 구석구석 다 핥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다 기억하고 있는데 의외로 놓친 부분이 많잖아. 더 그 자식의 많은 것을 알았어야 했어...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겁에 질린 모습이라든가..." 혼잣말이었다. 누가 듣기를 바라거나 대답하기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제하는 구역질을 참으며 그런 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어 떨어질 것 같은 고약한 기분이었지만 녀석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유현의 모습이 내가 보지 못한 진짜 진유현 같아서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미치도록 울부짖도록 괴롭히면 또 어떤 표정이 나올까? 수치감에 벌벌 떨고 아픔으로 눈물이 맺히는 거야.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그것도 굉장히 자극적이지 않아?" "그만두고 빨리 가자. 시간이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한 것은 너야." 제하가 더 듣기 괴로웠는지 재촉했다. 그러자 유현이 "아하~"하고 어깨를 으쓱한다. "너무 걱정마 헤시안. 승호는 확실히 죽일 거니까 행여나 내가 살려 줄까 봐 불안해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뭐, 기왕이면 예전에 이러저러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평소처럼 웃는 유현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제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체를 피해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유현은 따라갈 생각을 안하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제하가 "뭐해?"하고 신경질을 내며 뒤돌아보았지만 피냄새에 취한 녀석은 핏덩이를 밟고 두 팔을 벌려 한껏 역겨운 냄새를 들이 마시고 있었다. 그 표정은 배부른 짐승 같았다. "하아...좋군. 심장을 갉아먹는 기생충들도 조금은 잠잠해 진 것 같아." 움찔하고 제하의 몸이 떨렸지만 그 뿐이었다. 제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눈을 감아 외면해 버린다. 이것이 하루이틀 있는 일이 아니다. 요즘 진유현의 일과는 볼 때마다 피냄새가 진동하고 살점이 튄다. 한 편의 호러영화다. 갓 죽은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모락모락 김을 내는 장면을 보면 그날의 식욕도 떨어진다. 이날 유현의 살육행진은 계속 되어서 초보산적을 해치운 산너머 다음 마을에서도 병사들과 몇 판 거하게 했다. 두 명, 세 명, 유디스를 우습게 보고 조금씩 병사들을 보낸 게 화근이었다. 결국 대여섯의 희생자를 내고 부랴부랴 군대가 출동했을 때 유현은 이미 다음 마을로 떠난 뒤였다. 이런 식으로 희생당한 병사만 수십 명에 죄 없이 희생당한 민간인도 꽤 된다. 처음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말리던 제하도 이제는 방해가 안 되도록 멀찍이 피해 있을 뿐이었다. 제하는 완전히 유현을 포기해 버렸는지 의욕을 상실한 표정으로 기계처럼 녀석을 따라갈 뿐이었다. 여관의 뒤뜰에 개나리가 피어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포근한 날씨가 계속된 탓에 종종 계절을 착각하고 봄 꽃이 피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얼어 죽곤했다. 그러나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꽃이라니 뭔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히 날씨가 좋다고 히히덕거릴 문제가 아니다. 아마도 원인은 나. 그 생각이 맞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기온은 낮은 편이었지만 사람들 말로는 예년보다 훨씬 높다고 하고, 바람이 거의 없는 탓에 말을 달리지만 않으면 겨울바람에 얼굴이 얼얼해질 일은 없었다. 이것이 내 탓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무의식 중에 조금만 따뜻했으면, 조금만 덜 추웠으면 하고 바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하의 기침소리가 굉장히 신경 쓰이기 때문인지도. 어쩌면 병사들에게 쫓기며 노숙을 하는 진유현이 자꾸만 눈에 밟혀 어디서 얼어죽지는 않았나 매일 아침 확인하는 것이 지겨워서 인지도 모른다. 입으로는 못된 말만하고 점점 상태가 이상해져 가는 녀석을 눈살을 찌푸리며 보면서도 자꾸 미련을 못 버리는 건, 역시 내 세계에서 녀석이 죽어버리는 게 찝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덕분에 걱정이 태산 같은 건 농민들 뿐. 나는 이제라도 정상적인 겨울이 되기를 바래야 하나 고민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마냥 청명하고 높은 하늘엔 구름이 몇 조각 한가롭게 떠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에 손가락을 치켜 들고 "추워져라!"하면 추워질까? 아냐, 그냥 추워지라고 하는 것보다 좀 더 확실한 기상현상을 명령하면 이 기현상이 정말로 내 탓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다. 나는 조금 긴장한 상태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부릅떴다. 몸에 힘을 주고 하늘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번쩍 치켜올리며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눈아 내려라!" 집게손가락으로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던 나는 긴장으로 몸을 굳힌 채 가만히 있었다. 정말로 눈이 올까? 오면 어떡하지? 역시 모처럼 핀 꽃들은 다 얼어 죽어버리는 건가 그래도 할 수 없지만..... "뭐 하시는 거에요?" 등 뒤에서 마이엘의 목소리가 들려서 "으악 깜짝이야!"하고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 놀래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니, 저기..운동...운동을 좀....아하하..." 가볍게 스트레칭 동작을 하며 팔을 두어 번 쭉쭉 폈다. 마이엘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으쓱한다. "특이한 운동이네요. 처음보는 동작인 걸요."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멋쩍게 웃었다. 괜히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을 느끼며 화제를 돌리기 위해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꼬, 꽃이 예쁘죠?" "예. 그렇군요. 날씨가 맑아서 항해하긴 좋겠어요." 마이엘이 웃으며 말했다. "배가 들어왔어요. 웃돈을 좀 얹어줬더니 내일 중으로도 출발이 가능하다는군요. 슬슬 떠날 준비를 하지요." 나는 눈을 빛내며 드디어 출발하는 거냐며 기뻐했다. 지겨운 여관 생활은 편하긴 했지만 유현은 쫓아오지, 우리들 여행에 진전은 없지...마음은 조금 불안했던 탓이다. 마이엘의 뒤를 쫓아가며 여전히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구름 몇 개만 둥둥 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진심이 아니고서는 마음대로 기상이 바뀌는 건 아닌가 보다. 배라고 해서 한강의 유람선이나 뉴스에서 보았던 거대한 선박을 예상했던 나는 돛이 달리고 나무재질로 이루어진 배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여기저기 만져보고 있었다. 배는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객실도 있어서 대충 구색은 맞춰져 있었고 우리를 비롯해 다른 손님들도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이 계절에 퀘도를 향하는 여행자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음침한 인상에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먼지와 때에 절은 낡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 우리 일행은 너무나도 말쑥한 편이라는 점이 눈에 띄기는 했다. 게다가 여기 완전 애송이로 보이는 나까지 끼여 있으니 선원들이 지나가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뭐, 다른 여행자가 우리를 노려보든 말든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갑판에 올라서서 시원하고 비린내가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갈수록 이상해지는 진유현의 태도에 우울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결국 제하라는 혹을 데리고 병사들과 현상금 사냥꾼들을 피해 다니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일부러 먼 도시까지 달려서는 그곳에서 용병을 사서 다시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이다. 용병길드는 진유현이 누구인지 알아 보았지만 현상금을 타겠다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굉장히 쿨한 얼굴로 허름한 사무실에 앉아 있던 길드의 중개인에게서 열 댓 명의 용병들을 소개 받았고 그 중 제하가 추려낸 일곱 명만을 데리고 그 도시를 떠났다. 걱정이 늘었다. 유현과 제하만이라면 바투와 라한, 그리고 마이엘이 어떻게든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덩치가 산만하고 눈초리가 매서운 아저씨들까지 섞였으니 역시 내가 녀석들을 잘 감시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하루종일 그 놈들만 바라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장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볼 수록 몸의 부담도 가중되는데, 한 번은 도훈과 민태일행이 잘 있나 왕성을 둘러 보았다가 그 피로감을 못 이기고 하루종일 꾸벅꾸벅 존 일도 있었다. ...그렇게 쉽게 피로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진유현을 확인하는 것은 역시 놈의 추격이 무섭기 때문일 거다. 가끔 잠든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일도 있었는데 많이 수척해졌어도 잠자는 모습만큼은 고등학생다워서 볼 때마다 우울해지곤 했다. 하아...녀석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길고 지루한 항해는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되었다. 바다를 처음 본다는 마이엘은 배가 조금만 심하게 움직여도 멀미를 하는 주제에 기어코 갑판에 나와 똑같기만 한 바다를 한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라한과 바투는 소금기에 무기가 녹슨다면서 틈만 나면 안에서 손질하기 일쑤였고 나는 멀미하는 마이엘의 등을 두드려주거나 먼 수평선을 응시하면서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퀘도로 가는 배를 구하기 위해 항구에서 머물렀던 시간을 예상해 볼 때 나는 유현 역시 우리만큼 배를 구하는 데에 애를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마음을 놓고 있었다. 더구나 용병을 사느라 멀리 길을 돌아왔으니 그동안 유현과 제하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 좁혀진 녀석과 나의 거리는 다시 멀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유현이 항구에 도착한순간 나는 아차했다. 태평하게 배편을 기다릴 녀석이 아니었다. 녀석은 항구에 들어서자마자 퀘도로 가는 배는 한동안 없다는 선주를 붙들고 무조건 출항하라고 시켰다. 검을 뽑아 들고 설치는 미친 인간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바다 사나이들이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십여 명이 아작 났고 항구에서는 한바탕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경비병까지 동원되었지만 결국 항구에 정박 되어 있는 배를 거의 갈취하다시피 빼앗아 억지로 뱃사람 몇을 끌고 와 출항을 강행했다. 유현일행이 배에 올라탔을 때 유현을 비롯해서 다른 용병들은 물론, 제하 까지도 옷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을 만치 처참한 몰골이었다. 경비대가 쏘아대는 화살을 무시하고 유유히 바다를 향해 떠나는 배위에서 제하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것이 만 하루 만에 일어난 모든 일이었다. 나는 그 추진력과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이쪽으로 가는 길이 제일 안전하겠군." 희미한 호롱불에 의지하며 하나뿐인 지도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우리 넷은 객실에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덴이 지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다분히 자국 중심 주의적인 지도 위에는 북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대륙의 일부가 붉은 줄로 그어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지형적인 줄이 아닌, 마치 자로 대고 반듯이 그은 붉은 줄은 그 경계선 이후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다들 지도에도 없는 땅이라고 부르는 대륙의 불모지였다. "상당히 길고 피곤한 여행이 될게요. 이덴의 땅이 기름지고 초목이 많은 데에 비해 퀘도는 거의 황무지니까. 기온도 훨씬 낮으니 항구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장비부터 단단히 챙겨야 겠소." "유디스가 쫓아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제까짓 게 우리가 어디로 갈지 알기나 하겠어요? 어쩌면 지금쯤 항구에서 국경 수비대에게 붙잡혔을지도 모르구요." 마이엘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 유현의 화제를 꺼냈지만 나는 그 국경 수비대가 이미 절반이 죽고 나머지는 출항하는 유현의 배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화살만 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못했다. 배를 타고 추격할 생각조차 안 하던 병사들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행 초심자가 퀘도를 넘는다는 것은 조금 위험하지 않겠소? 물론 헤시안이라는 자도 곱게 자란 왕족주제에 여길 넘기는 했지만..." 바투가 매끈한 이마를 빛내며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만치 미세하게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인해 봐야 할 것이 있어요.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헤시안이 죽어라고 퀘도로 달렸던 이유와 비슷해요. 물론 생명수가 목적은 아니구요." 바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이 여행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이렇게 묵묵히 따라와 주는 것에 다시 한번 안도하고 미안함을 담아 웃어보였다. 나중에 한도훈을 만나게 되면 이 사람들 칭찬을 잔뜩 해줘야 겠다고 생각하며 나머지 일정에 대해 밤 늦도록 상의를 했다. 퀘도는 붉은 대지였다. 계절 탓인지는 몰라도 공기가 건조하고 토사는 붉었다. 대체적으로 바위산이나 민둥산이 많았는데 그것이 살벌한 풍경에 일조했다. 항구나 도시에는 비교적 사람이 많고 물자가 오가지만 바닷가나 강가를 제외하고는 내륙으로 들어 갈 수록 땅은 황폐하고 인가가 드물다는 설명을 들었다.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이 땅의 건조함과 삭막함에 질리고 말았다. 날씨는 더없이 추웠으며 바람은 강했다. 항구에서 쉬었던 것도 잠시, 유현의 추격에 안달이 난 내가 빨리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벌써 일주일 넘게 황야에서 야영만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점점 버텨내질 못해서 열이 오르기 일쑤였고 늘 감기기운을 달고 다녔다. 날씨만 춥다 뿐이지 이건 숫제 사막이다. 황량한 벌판을 다각거리는 말발굽소리를 들으며 걸어가고 있노라면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붉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씌우고 가는 일도 허다했다. 목구멍이 항상 칼칼했으며 열기로 눈시울이 뜨겁다. "승호님, 괜찮으세요? 다음 마을까지는 며칠 더 있어야 하는데..." 지도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이엘이 안부를 물었다. 활짝 웃으며 끄떡없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미소 짓는 입가에 힘이 풀린다. 그러다가 내 상태가 많이 나빠보였는지 오늘은 이쯤에서 쉬자는 의견이 나왔고 결국 해도 지지 않았는데 노숙할 준비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황야에서 아프면 대책이 없다. 약초나 민간요법에 빠삭한 라한이 냄새 고약한 약을 달여주면 그나마 버티긴 했지만 이 땅만 유난히 중력이 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몸이 무겁고 쉬이 지쳤다. 그래서 유현이 어디쯤 와 있는지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 넓은 땅에서는 우리의 행방을 알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단정하고 마음을 안이하게 먹었다. 몸이 아픈 탓에 경계심이 흐려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며칠을 골골대다가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음이 놓인 탓인지 확실하게 앓아 누워 버렸다. 덕분에 여관이라곤 달랑 하나뿐인 이 작은 마을에서 몇 날을 허비했는지 모른다. "역시 기후가 안 맞는 모양이네요. 한동안 너무 무리하기도 했구요. 그래도 퀘도의 겨울치고는 상당히 따뜻한 날씨라서 다행이에요. 이곳 농민들은 좀 고생하겠지만..." 마이엘이 라한이 달여준 약을 갖다 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코를 막고 그 약을 쭈욱 들이켰는데 먹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고약한 냄새와 맛 때문에 다 들이키고 나서는 등에 소름이 돋아 몸서리를 쳤다. "퀘도 너머, 지도 이후의 지역으로 넘어가려면 장비나 식량의 보충이 필요한데요. 라한과 바투의 말로는 이 마을을 들르는 것이 좋을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설탕덩어리를 잽싸게 입에 넣으며 마이엘의 설명을 들었다. 내가 앓는 사이 세 사람끼리는 이미 동선을 다 짠 것 같다. 지도에는 몇 군데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전부다 지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말하자면 대륙에서 가장 끝에 있는 마을들이었다. 그 중 산을 넘어야 하는 마을들은 여행하기 힘드니까 빼고, 그러고 나니 남은 마을은 두 개 뿐이었다. 그 하나는 너무 남쪽에 있어서 여기랑 멀고 남은 것은 퀘도에서도 최북단인 마을이었다. 이래저래 상황을 따져보니 어차피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우리가 이 대책 없는 여행을 떠나 온 것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이덴의 숲과 들판을 말로 달리고 바다를 건너 지금은 퀘도의 끝이 없는 황야를 달리고 있었다. 식량은 충분했고 돈도 많아 여행자 치고는 호화롭게 돌아다니는 편이었지만 이 드넓은 땅에 워낙 마을의 수가 몇 개 없다 보니 그 고생이란 이덴에서의 여행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끝없는 붉은 지평선과 그 지평선을 따라 마치 장벽처럼 길게 둘러쳐진 희미한 산자락은 아무리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황야에서 보는 밤하늘은 무시무시하게 빛나는 별들이 쏟아질 듯 위협한다. 몸도 정신도 피곤에 지쳤지만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끝으로 달리고 있었다. 의식을 날려 퀘도 너머 저 땅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노력도 당연히 했었다. 그런데 피곤했다. 엄청나게 피곤했다. 그래서 의식은 날아가다 말고 그대로 지쳐버리기 일쑤. 허공에 둥둥 뜬 채 황야의 벌레들이 울부짖는 소리만 듣고 있다가 관두기를 몇 차례. 몸이 힘들다 보니 이제는 유현의 행방을 파악하는 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다. 뭐 그래도...녀석은 지금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지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려 애써 노력했다. 지금은 앞만 보고 싶었다. 무안이라는 마을은 이제까지 거친 퀘도의 마을 중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다 쓰러져가는 집과 집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이따금 그 허름한 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나거나 가축의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사람 사는 곳임에는 틀림없는데 붉은 흙먼지가 허공에 흩날리는 광경은 마치 폐허 같았다. "이거 묵을 곳이나 있을지 모르겠군." 바투가 혀를 차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쩍 마른 개가 어슬렁거리다가 우리들을 보고 깜짝 놀라 꼬리를 말고 도망간다. 작으나마 밭도 있고 다 떨어진 울타리를 손질한 흔적도 보이지만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들이 음산한 분위기에 일조를 한다. 라한은 무슨 마을이 이렇게 황량하냐고 투덜댔는데 마침 있을 만치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우물을 긷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마이엘이 먼저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영감님, 저희는 여행자인데요. 이곳에서 며칠 묵을만한 곳이 없을까요?" 할아버지는 작아서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마이엘을 바라보며 "으잉?"하고 되물었다. 귀가 잘 안 들린다고 생각했는지 마이엘은 똑같은 말을 다시 했고 할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시며 "따라오시게."라며 앞장을 섰다. 우리들은 다들 말에서 내려 걸음 느린 노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거 요즘엔 손님이 많구먼...지난번에도 웬 장정들이 떼거지로 묵더니만..." "장정이요?" "그려. 가끔 생명수를 찾는 여행객들은 봤지만 그리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온 것은 처음이여. 각자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생명수도 좋고 모험도 좋지만 아무래도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너무 무섭드만. 허긴, 그 사람들 덕분에 마을에 좋은 돈벌이가 되긴 했지만서두..." 할아버지의 뒤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드디어 생명수를 찾아 다니는 모험가들이 연합이라도 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도 생명수를 찾는 모험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한데...그 사람들이 괜히 우리를 경계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저 집이여. 우리 마을에서 제일 커서 여행자들이 자주 묵고 가는 곳이지. 지금은 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가정집 같은데 그렇 다고 여관이라기엔 좀 작다. 하지만 뭐 여관이면 어떻고 가정집이면 어떠랴. 빨리 식량이랑 물을 충전하고 한숨 잘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을. 아직 식량도 물도 충분했지만 유비무환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바투와 라한, 마이엘의 뒤를 따라 할아버지가 가리킨 집으로 들어 갔다. "어?" 널찍한 마당의 평상 위엔 서너 명의 장정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를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던 모양인데 졸지에 불청객이 된 나는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바투가 익숙한 태도로 주인장을 불렀고 몸집이 뚱뚱한 아주머니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런 어쩌죠? 방이 전부 찼는데..."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눈짓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껴서 고개를 돌려보니 평상 위의 남자들이 탐색하듯이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 보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매우 거슬렸다. "그럼 다른 집에서라도 신세 질 수 없을까요? 돈은 충분히 지불할 테니..." 장정들의 눈초리가 맘에 안 들었는지 바투는 인상이 험악해져서는 옆에 있는 내가 봐도 느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동은 어디까지나 공손해서 아주머니는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신 듯했다. "글쎄요...이 동네는 대부분 단칸방이라서...아, 저 분들께 양해를 구해보죠. 저쪽 손님들끼리 모여서 주무시면 여러분들이 묵을 방 하나는 나올 거에요." 순간 바투와 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아주머니는 개의치 않고 평상에 앉아 있는 일행에게로 가버리셨다 아마 우리들의 표정엔 '저 자들과 같은 집에서 묵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라고 써져 있을 것이다.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아주머니께서 평상 위의 남자들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들은 심상치 않은 눈빛을 우리에게 보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런 거라면 대장에게 물어보슈. 어차피 방값은 대장이 내니까." ......어? 그런데 저 사람 낯이 익네? 그럴 리가 없다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아주머니께선 "대, 대장이요?"하고 중얼거리며 쩔쩔매신다. 그리고는 대장이라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건지 맨 끝쪽의 방에 가려다 멈칫, 가려다 멈칫 하더니 다시 평상 위로 와버리셨다. "저기...저는 그분이 좀 불편해서 그러는데.... 여러분들께서 직접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그냥 노숙하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장정들의 분위기는 살벌했는데 라한도 바투도 마이엘도 눈치챘는지 잔뜩 긴장을 했다. "그냥 다른 데로 갈까요?" 하고 작게 말했는데 큰 소리로 떠드는 저 건달 같은 사람 때문에 내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대장! 잠깐 나와봐 유디스대장!!" 어? 지금 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한참을 그 건달 같은 남자가 소리를 지르자 일자로 쭈욱 뻗은 회관의 끝 방에서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머리가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꿈틀거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에이, 설마...하는 망설임이 차마 등을 돌려 달아나게 만들지 못하고, 문 밖으로 나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픈 호기심에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피곤에 지친 한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반만 뜨고는 마당으로 나왔다. 방에서 바로 나온 차림인데도 완전 무장한 상태였고 손에는 날이 새파란 장검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검을 손질하고 있었는지 다른 한 손엔 흰 천을 들고 있었다. "마이엘, 바투, 라한." 남자의 옆 모습이 나오자마자 나는 꼿꼿이 굳어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응?"혹은 "예?"하고 입을 열어 나를 바라봤는데 그 순간 방에서 나온 장검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질렀다. "도망쳐요----!!!!!!!" 내가 생각해도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말에 올라타 급하게 채찍질을 했다. 놀란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 올렸지만 이미 승마에 이골이 난 나는 익숙한 솜씨로 말을 진정시키고 무조건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등 뒤로 무시무시한 고함과 비명이 난무했지만 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달렸다. "윤승호-----!!!!!" 찢어질듯한 비명소리가 바람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유현의 일행과 우리 일행이 섞이어 적어도 열 명 남짓의 거구들이 옥신각신하니 고요하던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사색이 되어 말을 달리는 내 옆으로 아까의 그 할아버지가 표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멀뚱멀뚱 바라보았고 나는 그 옆을 위험하게 스쳐 지나갔다. 눈은 앞을 향해 달리면서 온갖 신경은 뒤에 집중되어 있었다. 언뜻 바투와 라한, 마이엘이 일곱 명의 장정들을 상대로 힘겹게 막아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느새 말을 탄 유현이 괴물 같은 얼굴로 나를 뒤쫓기 시작했고 그것을 막으려는 마이엘의 노력은 유현이 고용한 용병들에 의해 저지 당했다. 빌어먹을 어디선가 본 얼굴이라 했더니... 유현과 함께 다니던 용병들의 얼굴을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거기서--!!! 거기서 윤승호---!!!!!" 오싹하고 뒷덜미가 선뜩해져 왔다. 마치 바로 귓가에서 외치는 소리마냥 생생해서 말고삐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잡히면 죽는다. 바로 죽일 거다! 다각거리는 말발굽소리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유현의 존재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목줄기가 채여 떨어 질 것 같아 말의 옆구리를 발로 차며 재촉하고 있었다.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져 빠르게 지나가고 마을을 벗어나 쭈욱 뻗은 붉은 대지를 향해 달리면서도 귓가에서 웅웅대는 진유현의 목소리 때문에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히히히히히힝!!!!" 말이 반항하며 갑자기 멈춰 서서는 앞발을 허공에서 허우적댄다. 거의 90도로 기울어진 말 안장 위에서 고삐를 단단히 붙잡고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 채 말한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빨리 가라고, 빨리 앞으로 달리라고, 아마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윤승호--!!!!" "히히히히히힝--!!!" 고개를 돌려 보니 마을 어귀에서 붉은 먼지를 이끌며 달려오는 녀석이 보였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미친 듯이 말의 옆구리를 차고 채찍질을 하며 화를 냈다. 그런 내 성화에 못 이겼는지 겨우겨우 몇 발자국 앞으로 가는 말이었지만 가다가 주춤, 가다가 주춤하는 모습이 매우 불안했다. "야 인마 너 왜 이래! 이제까지 잘 달렸잖아! 얼른 뛰어! 뛰라구!!!"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말과 씨름을 했지만 마치 몇 시간이나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마을에서 약 백 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우뚝 선 말은 돌아갈 생각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만 있었다. 무서운 거야? 응? 무엇에 무서워하고 있는 거야? 문득 앞을 바라본 나는 아득하게 뻗은 끝없는 대지를 보았다. 잿빛하늘 아래에 붉게 이는 흙먼지가 스산한 기운을 돋구고 있었다. 퀘도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것에는 역시 이후로는 지도도 없고 인가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말이 안절부절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지금 당장 등 뒤에서 쫓아 오는 귀신 같은 형상의 진유현이 저 끝없이 펼쳐져 생명감이라고는 모래 알갱이 만큼조차 느껴지지 않는 대지 보다 더욱 두려웠다. -푹. 말발굽 아래 화살이 꽂혔다. 깜짝 놀라 뒤 돌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진유현을 비롯하여 다른 용병들이 말들을 진정시키느라 정신 없었고 그 중 아예 말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나를 향해 화살을 쏘고 있었다. 두 번째 화살이 말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는 이번에야 말로 굴러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앞으로 가라구 이 바보야! 여기 있다간 죽어! 알았어? 응? 저 사람들한테 죽는다고! 달려! 달리란 말야!!" 고삐로 채찍질하며 절박하게 소리질렀다.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그제야 조금씩 앞으로 걸어간다. 비틀거리는 말 위에서 등 뒤를 바라보니 아까 나한테 화살을 쏜 남자가 진유현의 주먹에 얻어맞고 있었다. 진유현은 그렇게 동료를 패더니 대뜸 검날을 자신의 말에게 겨눈다. 저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잠시 몸을 굳혔는데 유현이 다시 말에 올라타자 이번엔 그 말이 순순히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이젠 말한테도 협박하는 거냐?!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아직도 걷고만 있는 말을 붙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말에게 사정을 했다. 푸르릉 거리던 말이 겨우겨우 달리기를 시도한다. 유현의 얼굴이 벌써 이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윤승호!! 거기 서!!! 서란 말이야!!!" 심장이 쿵쾅거리며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호흡은 가쁘고 어깨는 잔뜩 움츠려 들어 근육이 아프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려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사막 위를 정신없이 달렸다. 누군가의 더운 숨결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간지러우면서도 거슬린다. 차가운 손가락이 턱의 라인을 따라 내려가다가 목덜미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드러난 목줄기를 부드럽게 감싸쥔다. 손은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나 내 목을 가볍게 쥐고 있었고 힘을 줄듯 말듯 아슬아슬한 움직임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만둬." 제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잠시 멈칫했을 뿐 목을 쥔 손은 그대로인 채 누군가의 더운 호흡이 귓가와 목 근처에서 맴돌았다. 냄새를 맡는 개처럼 킁킁거리기도 하고 변태마냥 "하아-"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할짝 귓바퀴를 핥는 미적지근한 혀가 끈적거리는 촉수마냥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목을 어루만지고 가슴을 끌어 안는 팔의 체온이 따뜻하고 기분 좋아서 눈이 떠지지 않는다. 너무 피곤하고 졸리워 깜빡 잠들다가 뺨을 핥는 짐승의 신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만두라구! 넌 다른 사람들도 안 보이냐?!!" 씩씩거리는 제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대로 다시 잠 속으로 빠졌다. "헤에~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대장의 애인이 남자였다는 소문." "은근히 기대했는데 저건 그냥 남자애잖아. 의외로 평범한 취향인가?" "또 모르지, 잠자리 기술이 끝내주는지도." "그런데 뭐야, 대장은 저 놈을 죽인다고 쫓아 온 거 아니었어? 말과 행동이 다르잖아." "원래 애정문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키키키"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낄낄거리는 천박한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어 뇌까지 선명하게 전달된다. 열고 싶지 않은 눈꺼풀은 나도 모르게 벌어지고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노란색부터 붉은색까지 선명한 색채를 보여주며 날름거리는 불꽃이었다. 등뒤에 따끈한 체온이 맞닿아 있었다. 두터운 겨울 옷 너머로 심장소리가 느껴지고 살 냄새가 났다. 누군가 나를 등 뒤에서 끌어 안아 모포로 둘둘 감싸고 목덜미에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쉬고 있었다. "깼어?" 제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아, 잠깐, 조금 불편해도 그대로 있어줘. 유현이 녀석 이렇게 잠드는 거 오랜만이니까..." 미안한 표정을 하며 양 손바닥을 펴 진정하라는 자세를 취한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제하와 모닥불을 번갈아 보는데 정신이 멍한 게 수습이 안된다. 검푸르게 빛나는 황야의 밤하늘 아래에서 두 개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하나는 내 앞에서, 그리고 하나는 약간 떨어져 용병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에 둘러앉은 그들은 저들끼리 소근소근 말을 주고 받으면서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내가...어떻게 된 거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땠더라? 황야에서 말이 갑자기 반항하는 바람에 더 이상 도망 못 치다가...어...그러다가 겨우 말을 달래서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고...음...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리다가 달리다가... 유현이 쫓아오고...그리고..... 녀석이 바로 옆까지 추격해 와 깜짝 놀란 나는 경끼를 일으키며 말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그래, 나는 손을 뻗어 나를 잡으려는 괴물 같은 녀석의 얼굴에 놀라...... 삐그덕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비틀어 올려다보자 평온하게 잠든 유현의 얼굴이 보인다. 등줄기에 닭살이 우두두두 일어났다. 귀신에게서 도망치다가 정신 차려 보니 귀신의 소굴에 들어와 있다는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녀석의 체온이 맞닿은 자리가 긴장으로 경련한다. "우와아악!!!"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체가 무언가에 묶여 있어 일어나려던 기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고 제하의 표정이 하얗게 굳어 버렸다. 몸부림 치려 하자 뒤에서 우악스러운 손이 뻗어와 강하게 몸을 옥죄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귓속으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왜 나를 피하는 거야?" 더없이 달콤하고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못한 게 없다면 도망갈 이유도 없잖아..." 뺨과 뺨을 부비고 모포 속에서 가슴과 배를 쓸어 내린다. 밧줄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던 나는 녀석의 품안에 갇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등 뒤의 녀석의 체온, 냄새, 목소리...모든 것이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진유현이 내 턱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을 보도록 돌렸다. 기이하게 돌아간 목뼈에서 뚜둑하는 소리가 들렸고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웃고 있었다. 비웃음과 경멸, 그리고 마치 하찮은 것을 보는 듯 상대를 내리까는 표정. 유디스의 다정한 얼굴보다 훨씬 익숙한 진유현 본연의 표정이었다. "덕분에 지옥을 보았어." 얼굴에 가까이 댄 입술 틈에서 달짝지근하게 속삭이는 숨결이 새어 나왔다. 따뜻한 입김이 닿자 뺨과 턱주변에 솜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이 느껴진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깨는 이미 저항할 힘을 잃고 크게 뜬 두 눈은 깜박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너만 없었어도 내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어떻게 해야 내 속이 시원해질까? 너를 없애버리면 나는 이 갑갑함에서 해방될까?" 턱을 단단히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불안감을 느끼고 목을 자라마냥 움츠렸지만 다른 한 손이 머리카락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머리가죽만 아플 뿐이었다.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니 녀석은 씨익하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다. "하지만 당장 죽이지는 않을테니 안심해. 지금은 심장을 갉아먹던 벌레들이 조용해서 기분이 좋거든." 엄지손가락이 다 터져버린 내 아랫입술을 꾸욱 누른다. 말라서 거칠게 일어난 입술의 살갗을 손톱 끝으로 즐기듯 두어 번 긁으며 놀더니 눈빛이 진중해진다.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지고 미지근한 이빨이 입술에 닿았다. "휘유~" 용병들의 야유 섞인 휘파람소리가 어두운 황야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유현은 제 이빨로 내 입술에 거칠게 일어난 살점을 뜯어내어 짭짭거리며 씹고 있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녀석의 침에 의해 입술이 축축이 젖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녀석은 입술이 젖어 살점 뜯어 먹기가 수월하지 않자 더욱 깊숙이 파고 들었고 용병들의 야유도 점점 잦아들어갔다. "으윽." 입술의 얇은 표피가 제대로 벗겨졌다. 우물거리며 살점을 입안에서 씹고 있던 유현은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혀를 길게 빼어 아랫입술을 핥는다. 아픔과 함께 입술 새로 흘러 들어오는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아기가 젖병을 빨듯 쭉쭉 빨아대는 통에 나도 모르게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깨물린 입술의 고통이나 비틀린 목의 불편함보다는 뚫어져라 나를 보는 녀석의 시선이 가장 괴로웠다. 열기와 살기가 뒤섞인 기묘한 눈동자가 숨막히게 응시하고 있었다. 퀘도라는 곳을 달리다 보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황야의 저편에 지평선 너머 아른거리듯 산맥이 희미하게 보인다. 가끔 그 희미한 산맥에 의해 사방이 갇혔다는 착각이 들만큼 거리감각이나 공간감각이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신기루 같이 희미한 안개에 감싸인 산줄기도 대륙의 끄트머리까지 와서 보니 어느새 이만큼이나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들은 제하를 따라 그 산을 목표로 달리고 있었다. "여기선 나침반도 필요 없고 해와 별의 움직임도 소용없어. 우리가 남쪽이라고 판단하고 몸을 움직여도 실제로 가는 방향은 남쪽이 아니니까. 방향이 조금씩 엉망으로 뒤틀려 있어. 제대로 된 길을 찾으려면 내가 가는대로 따라오는 것이 좋아." 그렇게 주장하며 제하는 베넴산이라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거기 지도에 동그라미 쳐 놓은 산 보여? 베넴산이라고...저게 그 산이야. 우리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남쪽으로 내려와 있어. 우리들에 대한 악명이 퀘도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은 알지? 이제 와서 다시 무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베넴산이라면 무안마을과 함께 퀘도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다. 베넴산 이후로의 지역도 지도에 없는 부분인데 제하의 설명 대로라면 우리는 무안마을에서 고작 몇 킬로미터를 벗어 났다가 한참을 빙 돌아 가게 되는 꼴이다. 하지만 제하의 말을 나는 믿기가 힘들었다. 저 산이 베넴이라고? 저 산 너머에 마을이 있고 비로소 지도 안의 지역으로 들어간다고? 내가 보기에 저 산, 아니 산이라기엔 너무 거대해서 지평선을 가득 메우는 산맥은 마치 대륙의 종착점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제하가 허튼 소리를 해 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어? 의심은 갔지만 그냥 내 쓸데없는 기우라고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여기는 이상한 땅이었다. 황야의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말들은 반항을 포기하고 주인의 지시를 잘 따랐지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혼자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거나 어딘가로 제멋대로 걸어가곤 했다. 뿐만 아니라 실에 묶인 자석을 늘어뜨리면 허공에 매달린 자석이 수평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회전했다. 그 모습을 보고 험악한 용병들의 인상이 일그러지며 혀를 찼다.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판단했는지 그들도 이미 이곳을 여행한 경험이 있는 제하의 말에 생각보다 순순히 따랐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붉은 대지는 사막이나 다름 없었고 계절의 개념마저 상실하여 지금이 겨울인지 가을인지 모를 서늘한 기온이 항상 유지되고 있었다. 거칠고 습기 없는 공기는 사람의 숨통마저 말라 비틀어지게 할 것 같다. 마이엘과 바투, 라한의 생사가 불분명했다. 제하말로는 셋 다 큰 부상을 입었다는데 제하는 물론 용병들까지도 나를 쫓느라 정신 없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은 안 했다고 한다. 마이엘들이 다쳤다는 말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끼며 몇 번이고 그들의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이 불모지에서 나는 의식을 날리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천리안 마냥 어디든 볼 수 있었던, 그나마 내가 창조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일한 부분마저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크릴 산맥 때처럼 이 땅에서만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자석이 수평으로 빙글빙글 돌 듯 내 의식도 한자리에서 빙빙 돈다. 걱정 되서 미칠 것 같은데 마이엘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기는커녕 등 뒤의 유현이 어떤 표정인지조차 볼 수 없었다. 나는 손목이 묶인 채 유현의 팔 안에 갇혀 있었다. 주인을 잃은 내 말은 유현에게 잡혔던 순간 이미 어디론가 가버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그 후로 유현의 말은 2인분의 몸무게를 버텨야 했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유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노려 보고 있을까? 아니면 가끔 그랬듯이 아련하고 쓸쓸한 눈으로 보고 있을까... 녀석과 맞닿은 부위가 화상을 입은 듯 욱신거리고 솜털이 바짝 일어서 긴장하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진 부상은 괜찮아?"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비집고 제하의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나는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치 못하고 있었기에 한 템포 늦게 대답을 했다. "...응. 아무 이상 없는 것 같아. 어디 쑤시거나 하지도 않고." "그렇지? 정말 신기해. 나도 여기 오기 며칠 전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어." "아..그거 잘됐네..." 나는 묶여 있고 제하는 내 얼굴을 보고 얘기 하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삭막했지만 서로의 부상을 걱정해 주는 평범한 친구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제하는 여행이 지루했는지 이것저것 묻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타고 있는 말, 굉장히 튼튼하지 않아? 벌써 며칠이 지나 물이랑 소량의 먹이밖에 안 줬는데 불평 없이 잘 따라오고 있잖아. 우리들도 그래. 식량을 아껴먹고 있는데도 전혀 허기가 지지 않지." 옆에서 본 제하의 얼굴은 살짝 웃고 있었다. 등 뒤에서 "어? 정말 그렇네?" "나도 지난번에 군대한테 쫓길 때 입었던 상처가 벌써 다 나았어."라고 뒤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상해...그렇지?" 묘하게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제하가 드디어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제하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녀석이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내겐 아무 답도 없어. 김제하. "나는 아직도 이 세계에 대해 잘 몰라." "그러면 왜 세계의 끝에 가려고 계획하고 있었어?"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러자 뒤에서 시끄럽고 수다떨기 좋아하는 용병들이 "그야 생명수지 생명수!"하며 떠들어댄다. 일곱 명이나 되는 장정들 중 적어도 네 명이 수다쟁이니 정신이 사납다. "나도 몰라. 그냥, 네가 지난 번에 왜 여기로 말을 달렸을까 신경 쓰였을 뿐이야." "정말 그 뿐?" 녀석이 가만히 바라본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더니 여기로 와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고." 제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눈을 빛내며 "그렇지, 역시 그래,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하고 중얼거린다. 뒤에서 떠드는 용병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수다에 빠져 있어서 제하의 그런 이상한 모습을 본 것은 나와 유현 뿐이었다. "허튼 생각하지 마라 헤시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현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제하는 녀석의 태도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지 힘없이 미소 지어 보이고 있었다. "걱정마 유디스. 우리들 모두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나도 승호도 협력할 거고. 그렇지 윤승호?"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 가능한 말로 돌리며 확인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체 어떤 표정으로 유현이 나를 노려보는지는 몰라도 목덜미가 따갑다. 문득 허리를 안은 팔에 단단한 힘이 들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근육의 사소한 움직임에 흠칫하고 놀라 몸을 움츠리니 그것이 불만인지 고삐를 잡은 손에 꽈악 하고 힘을 준다. "흥, 내가 무서우냐?" 몸을 옭아매던 손이 점점 가슴께로 올라오더니 목덜미로 올라가 목을 조르기 직전의 손동작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살이 빠진 탓에 유난히 불거져 나온 목젖을 쓰다듬으며 턱과 목줄기를 훑고 있었다. "모처럼 살려 주는데 말야. 좀 더 고마워 할 것이지." 건방진 말투로 중얼거린다. 사실 만나자 마자 죽거나 엄청나게 얻어 맞을 것을 각오한 나는 녀석의 조용한 행동이 오히려 불안했다. 차라리 시원하게 터지는 것이 속 편하겠다. 이따금 목을 쥐는 손놀림은 위협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언제 칼을 들이댈지 몰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말로는 죽인다, 죽일 거다, 하는데 행동은 정반대로 조심스럽고 따뜻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든다. 가끔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에는 내 이름이 섞여 있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녀석답지 않은 조심스러움은 대체 뭔가? 머리가 터질 거 같아. 뭐야, 뭐가 이렇게 복잡해. 너는 나를 어쩌고 싶은 거야? 너한테 잡히는 순간 이제 다 끝났다고, 강간에 살인까지 날 거라고 생각하는 나를, 피 말려 죽일 참이냐? 네 놈의 왕좌와 자존심이 나 때문에 무너져서 속상한 것은 알겠지만...그러면 평소대로 차고 패고 하는 게 진유현 너 아니었어? 진유현의 입은 밉다. 일부러 마음을 후벼 파는 소리를 지껄인다. 내가 왜 너 따위에게 빠졌을까, 뭐가 좋다고 네 말대로 전쟁터에 나갔을까, 너는 에드바라하가 반란할 거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지만 그 기막힌 타이밍은 뭐냐? 하면서 추궁했다. 이제는 여유까지 생겼는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힐난에 대답을 못해 쩔쩔매는 나를 즐기고 있었다. "너도 상당히 나한테 빠져 있었잖아. 내가 꽤 잘해주긴 했지. 네 아들놈은 누구를 생각하며 위로했을까? 네 주제에 누구를 꼬셨을 리는 없고 그동안 어떤 식으로 해결 한 거야? 응? 이렇게? 이렇게 했을까?" "왜 그렇게 흠칫거려? 오싹오싹해? 오랫동안 못했더니 민감한 몸이라도 됐나... 넌 좀 나무토막 같은 구석이 있어서 꽤 공들여야 반응을 보였는데 이것도 괜찮군. 어때? 죽이기 전에 극상의 쾌락을 맛보게 해주지. 말만 잘 들으면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나라를 되찾으면 별궁 한켠에 네가 묵을 방 하나는 내어 줄 수도 있다구." "내가 왜 널 살려두는지 알아? 넌 인질이다. 인질. 이제 와서 네게 인질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라는 놈이 건방지게 너를 동료라고 했으니 그 말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 이 기회에 확인해 볼 수 있겠군. 하지만 너를 이렇게 떠나 보낸 거 보면 녀석들도 네가 껄끄러웠나 봐? 전 왕의 밤시중이나 들던 동료라니 창피할만하지." "아니, 죽여버릴 거야. 퀘도만 넘으면 죽여버릴 거라구. 지금은 내가 좀 마음이 너그러워져서...너그러워져서.... 그래, 공개처형이 좋겠다! 대신들 앞에 데려가서 너를 공개처형하면 그들도 속이 시원하겠군. 퀘스터장관 알지? 그 할아범이 제일 기뻐할 거다. 매일매일 내 방문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밀린 정무를 좀 봐달라고 통사정하던 노인네였으니까." "너는...그래...처음에도 나를 무서워했지. 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내가 좋았지? 너도 많이 즐겼잖아. 응? 좋았잖아. 좋았다고 말해..." 헷갈려 미치겠다. 녀석은 뒤에 있는 용병들의 수다에 질세라 끊임없이 내게 무언가를 묻고 대답을 종용하고 혼자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음담패설 같은 것도 늘어 놓고 협박도 하면서 간간히 내 이름을 섞어 부르기도 한다. 녀석이 야한 말을 지껄일 때면 어김없이 뒤에서 환호가 들렸지만 지그시 유현을 노려보기만 하는 용병도 있었다. 얼굴이 시뻘개진 제하는 걸음을 빨리하며 일행을 재촉했지만 제하 혼자 무리에서 동떨어져 앞서 갈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소란스럽다가도 금새 잠잠해진다. 그 침묵이 오히려 답답해서 유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나는 녀석의 호흡과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고 만다.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면 아까의 폭언을 쏟아낸 것과는 달리 굉장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내 머리에 기대기도 했다. "승호야..." 굉장히 작게 속삭이는 소리는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 후욱-후욱-하는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르고 허리에 감은 오른팔에 잔뜩 힘이 들어 간다. 가끔은 밧줄에 묶여 벌겋게 자국이 난 내 손목을 수전증에 걸린 사람마냥 덜덜 떨면서 쓰다듬지만 자신의 행동을 눈치채고 얼른 손을 뺀다. 수척해지고 눈이 움푹 꺼진 얼굴로 나를 조롱하고 협박도 했지만 때때로 녀석이 답답하고 안타까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엇이 두려운 건지 손길은 멈칫거리며 겁을 내고 있었고 꽉 움켜쥔 허리는 내가 도망갈세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등에 맞닿은 온기가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과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직접 맞부딪치는 것의 차이는 확실히 달랐다. 예전처럼 정신체인 상태에서 유현을 보기만 했던 것보다 녀석이 나에게 직접 화내고 가시 돋친 말을 하는 편이 훨씬 덜 무서웠다. 살 냄새가 나고 열기가 전해진다. 거기에 유현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자 마음은 점점 여유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지금의 진유현을 바라봐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나는 괜찮은 거야? 용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녀석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야. 우선은 담담해지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진유현을 똑 닮은 유디스를 처음 보았을 때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유디스가 유현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언제까지고 저런 녀석의 그늘에 얽매여 있는 것은 나만 손해니까. 그렇지만 폐인처럼 시커멓게 죽어 있는 놈의 얼굴에서 살아있는 생물체마냥 도록도록 움직이는 허연 눈동자가 숨막히게 응시하고 있으면 내가 정말로 저 녀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섬뜩해지기도 했다. 비록 말라 비틀어졌어도 용케 죽지않고 황야에 뿌리를 내린 고목나무는 가지가 몽창 잘린 채 장작불의 땔감으로 쓰이고 있었다. 먹을 것도, 불에 태울 것도 없는 이 붉은 사막에서는 점점 낮과 밤의 기온차도 사라지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어둠을 밝히기 위해 습관적으로 불을 지폈다. 하루종일 나를 안고 말을 몬 유현은 벌써 잠들어 있었다. 녀석은 여차하면 내가 도망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등 뒤에서부터 팔과 다리로 얽어 베개를 끌어 안듯 휘감고 잤다. 잘 때는 손목의 밧줄을 풀어주긴 했지만 어쨌든 이만저만 불편한 자세가 아니다. 그렇게 잠이 오지 않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노라면 시선은 자연히 우리가 목표로 향해가는 베넴산에 머물게 된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산은 마치 괴물 같았다. 시커먼 장막으로 막혀 있다는 착각이 든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시선을 뗄 수가 없어져서 몽롱한 눈으로 하염없이 응시했다. 저만치서 떠드는 용병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고 눈 앞의 산만이 내 세계의 모든 것인 양 시야에 가득찬다. "저 산, 상당히 가까워졌지?"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제하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불빛 탓인가...제하의 얼굴은 자세히 살펴보니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마르고 거칠어진 녀석의 뺨에 오랜만에 도는 화색이다. 시커먼 눈 밑이 안쓰럽다는 내 생각과는 달리 그 두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이 비정상적인 사막을 벗어난다는 기쁨 때문인가? 녀석은 들 떠 있었다. "처음 퀘도에 도착했을 때 알았지. 아, 저기가 이 땅의 끝이구나 하고." 속삭이는 제하의 목소리는 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용병들은 떠드느라 정신 없고 유현은 잔다. 나는 제하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어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저 산은 베넴산이 아니야." 눈이 크게 떠졌다. 다른 사람이 들었을까 봐 가슴이 쿵쾅거리고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 너.....거...짓......말을...." 누가 들을까 꼼짝도 못하고 작게 목소리를 죽였다. 나중에는 소리가 아예 잦아들어 입만 벙긋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세상의 끝으로 간댔지? 네 목적지를 귀보르냑에서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를 거야. 네가 무사히 이 땅에 도착하면 무언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두근거렸지. 집에 돌아 갈 수 있다고 말야.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기껏 퀘도까지 온 게 허무하잖아? 그래서 일부러 일행을 속이고 여기까지 온 거야. 보라고...저게 어디 그 야트막한 동산이란 말야? 베넴산은 훨씬 작다고." 제,제,제하야! 목소리가 너무 큰 거 아니야? 흥분으로 톤이 높아지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유현이 깰까 봐 꿈지럭 거리지도 못했다. 부산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불안해 하고 있는지 알 법도 하건마는 제하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지난번에 여행했을 때...수행원들이 다 말리는데도 지도를 넘었어. 흐릿하게 보이는 산줄기 너머야 말로 내가 원하던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달렸지. 그런데 가도가도 끝이 없더라. 다가갈 수 없는 산이었어. 그때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기분이었는지, 아무리 말을 달려도 똑같은 거리를 유지할 뿐인 신기루 같은 산을 바라보며 얼마나 막막했는지 넌 모를 거야. 그런데 지금은 아냐, 봐. 이렇게 가까워져 있어. 왜 인줄 알아? 그건 윤승호, 네가 있기 때문이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제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얼굴 전체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라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갑자기 산이 다가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 나는 어차피 창조주의 세상에서 노는 장기 말에 불과하다는 거지. 장기 말이 장기판 바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말을 움직이는 주인에 의해서고. 그런데 여기 주인님이 몸소 납시어 주셨으니 내가 그렇게 죽어라 달렸을 땐 보이지 않던 세상의 끝이 이렇게 허무히 나타나는구나." 원망과 부러움을 담아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흘겼다. 오늘따라 말이 많아진 녀석은 조금 감상적이 된 듯하다. 제하의 어깨너머 보이는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모닥불에 데워진 공기가 훈훈하게 사방을 감쌌다. "실감이 안나. 여기가 세계의 끝이라니. 너무 평범하고 삭막해서 실망스러울 지경이야. 마왕 따위가 지키고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산과 바위가 녹아 용암이 들끓는다거나 빙하에 꽁꽁 얼어붙어 사시사철 눈보라가 몰아치는 극한정도는 될 줄 알았다고. 이 상상력 부족한 놈아 하다못해 그 흔한 드래곤 한 마리도 없냐?" 제하가 시선을 돌려 어둠에 깔린 아득한 대지를 먼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서 뚱하게 있었지만 녀석은 내 머리카락을 콕콕 잡아 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다. 응? 장난? 저 김제하가? "나라면 요정이나 마법사도 잔뜩 등장시켰을 텐데. 드래곤은 물론 서펜트, 오크, 트롤, 가고일도 멋질 텐데 말이지...나라면......" 잠겨 드는 목소리로 쓸쓸하게 중얼거린다. 씨익 웃던 얼굴은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손끝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산을 넘자. 저 산을 넘으면 너는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법을 알 수 있을 거야. 어째서 그걸 창조자인 네가 모르고 통찰자에 불과한 내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그것이 유일하게 내가 너보다 나은 점이겠구나..." 뒷말은 혼잣말인 듯 나를 보지않고 허공에 대고 읊조렸다. "그런가...겨우 이것이 창조자의 세계에서 내가 갖는 유일한 메리트란 거지..."하며 헛웃음을 친다. 그 웃음이 너무 덧없고 허무해서 가슴이 쓰렸다. 제하는 왜 저렇게 어린 나이에 그런 식으로 웃는 걸까. 바람은 없었고 공기는 언제나 그렇듯 건조하고 찼다. 계절을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온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니미럴...이 산을 올라야 한단 말야?" 까마득한 절벽 위를 바라보며 용병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비죽이 바위가 튀어나온 벌거숭이 산에서 녹색이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간혹 하얗게 말라 비틀어진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고 시커먼 고목이 돌 바위 틈에 용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이 산에서 살아 있는 존재의 전부였다. 산줄기는 왼쪽을 보아도 오른쪽을 보아도 끝없이 뻗어 있었다. 이건 아예 벽이다. "욕 나오네 이거. 물도 다 떨어지고 식량도 바닥났는데 난데없은 암벽등반을 하게 됐잖아?" "염병할, 헤시안! 나중에 일 잘되면 우리한테 한 자리 괜찮은 걸로 주는 거야? 약속 잊지마!" " 식량이 떨어진지는 오래다. 몸은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않고 있었지만 사람이란 건 습관적으로 물을 마시고 위장에 음식을 넣어주어야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드는가 보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멀쩡하다는 것은 어쩐지 우리가 인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제하는 걱정 말라며 나중에 일만 잘 되면 작위도 주겠다고 장담했다. 용병들은 그말에 반색을 하며 "헤시안, 정말 작위 주는 거지? 응?"하고 몇 번이나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유현이 나라를 다시 되찾을지 말지는 모를 일이지만 떠돌이 용병으로서는 잘 되도 그만 안 되도 그만 아닌가... 뭐 어차피 돈은 두둑이 받았겠다, 여차하면 자신들이 유현의 밑에서 무언가 한 자리를 꿰어 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하의 말도 잘 들었고 비록 망했지만 한 때 왕이었던 유현을 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에도 꽤나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산은 험해서 말은 그대로 버려야 했다. 주인을 잃은 말들이 갈 길을 잃고 한자리에서 빙빙 맴돌다가 저들끼리 부딪힌다. 말 하나는 아예 주저앉았다. 다른 몇 마리는 어디론가 터걱터걱 걸어간다.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저 말들은 죽는다. 아니, 늙어 죽을 때까지 이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 병들지도, 배고프지도 않은 채 평생을 방황하다가 삶을 끝낼 것이다. 운이 좋다면 용케 길을 찾아 퀘도 안으로 들어 갈 수 있겠지만 최악의 경우 늙지도 않고 영원히 사막을 헤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무서워져서 부르르하고 몸서리를 쳤다. 산을 오르기 전에 유현은 손목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손목에는 검푸른 멍이 들었고 일부는 살갗이 벗겨져서 벌겋게 부어있다. 유현은 묵묵히 밧줄을 단도로 끊어 내면서 그 상처들을 뚫어져라 노려 보고 있었다. 정육점의 고기를 감정하듯 이리 뒤적, 저리 뒤적, 남의 소매를 들춰 보더니 혀로 낼름거린다. 상처에 닿는 혓바닥의 돌기와 뜨거움 때문에 무척이나 쓰렸다. "아파..." 작게 중얼거리는 나를 눈동자만 올려 빠끔히 보는 유현은 무표정했다. 다시 시선을 내리고 손목을 핥는 데에 열중하자 속눈썹의 그늘이 퀭한 눈가에 내려 앉는다. "누군 좋겠네. 칫..." "대장! 대낮부터 그만하고 얼른 올라가자고! 나 이런 동네에서 며칠만 더 있다가는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애!" 앞서가는 용병들이 신경질을 낸다. 아무리 그래도 사내놈은 싫다는 둥 대장의 취미도 나쁘다는 둥 투덜 거리고 있었지만 유현이 내게 비비적 대거나 할 때면 그들의 눈은 기분 나쁘게 번뜩이거나 혀를 축이기도 했다. 유현의 행동에 환호하는 것은 그 자신들의 난감한 표정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눈치 없는 자식아...이런 짓 좀 하지 말라구... 손목을 핥는 녀석이 짐승처럼 미개해 보였다. 입을 열었다 하면 못된 말만 하는 주제에 행동은 개나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 심사가 뒤틀리면 깨물고 내가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는지 슬쩍 몸을 밀착해 오기도 했다. 입맛을 다시면서 끙끙대는가 싶으면 또 뭐가 불만인지 폭언을 내뱉는다. 이제는 녀석의 "죽인다"가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지 몸소 체험하자 이 답답한 녀석의 자존심이란 게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우스꽝스러운지 알 것 같았다. "그만해." 하루종일 손목을 붙들고 늘어질 것 같은 유현을 제하가 툭 친다.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유현은 나를 한껏 노려 보더니 머리통을 붙잡고 자신의 앞으로 세운다. "가자." 또 다시 뒤통수에 녀석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래가 부스스 흩어지는 바위산에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없었다. 절벽에 착 달라 붙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가 있는가 하면 45도 경사의 비탈길이 계속 되기도 했다. 자갈과 모래가 발 밑을 구르며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내 가슴도 철렁 내려 앉는 듯했다. 산은 벌레도 이끼도 없이 바싹 말라 있다. 손끝에서 바삭바삭 부서지는 돌 바위의 감촉은 불쾌하기만 했다. "쿨럭, 쿨럭, 쿨럭..." "이런 썅, 무슨 놈의 먼지가....에이취!"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이나 묵은 듯한 흙먼지가 사람의 손에 닿자 깃털보다 가볍게 허공에 흩날렸다. 덕분에 일행은 기침과 재채기를 토해냈고 먼지에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마저 팔이며 다리며 벅벅 긁기에 바빴다. 바람이라도 살랑거리면 우리들은 졸지에 붉은 흙가루를 뒤집어 서야 했고 그것은 숨쉴 때마다 고역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적당한 공간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자갈과 바위가 무수한 지형 위에서 억지로 쉬어야 했다. 모닥불도, 텐트도 없다. 각자의 모포를 몸에 대충 두르고 자는 새우잠이었지만 용병들은 그런 거에 익숙한 듯 다음날 아침만 되면 또 빠릿빠릿하게 산을 탔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유현의 머리카락은 완전 80년대 장발족이다. 다듬지 않아 지저분한 머리카락과 오랫동안 깎지 못한 수염이 녀석의 나이를 실제보다 몇 년은 늙어 보이게 했다. 그러고 보니 제하도 나도 꼴이 많이 아니다. 얼굴에 물이 닿아 본지가 언제였더라? 냄새도 이만 저만 아닐 텐데, 역시 유현이 내 몸을 끌어 안았다가 흠칫흠칫 하고 놀라며 떨어지는 것은 그 탓이 아닌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소리 없는 밤은 무섭다. 찌륵찌륵 하는 풀벌레 소리나 부엉이의 울음소리, 뻐꾸기나 개구리소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다른 곳에서의 밤과 달리 이곳의 밤은 적막하다. 너무 적막해서 용병들의 수다소리가 정겹게 느껴질 만큼. 개구리 대신 떠들던 용병들도 잠에 곯아 떨어지는 한밤중이면 바람소리와 우리들 자신이 내는 숨소리만이 이 산의 고요를 깨는 전부였다. 나를 감시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건지 불침번이 없어진지는 오래다. 그들은 내가 유현을 해치거나 도망을 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아예 접어두고 오직 이 괴물 같은 지역을 벗어나야 된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요 며칠 엄청난 강행군이 계속되었고 덕분에 산의 정상은 머지않아 보였다. 깜박 잠이 들었나 싶더니 어느새 정신이 말똥말똥해 진다. 뒤에서 옭아 맨 손이 아무래도 편치 않아 자꾸 뒤척이게 되고 잠도 깊이 못 든다. 피곤한 몸은 더욱 쑤시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자는 녀석의 숨결이 거슬려서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어지간해선 잠 들 수 없다. 제기랄 내가 무슨 쿠션도 아니고, 이 꼴이 대체 뭐람. 이게 무슨 인질이라는 거냐? 녀석의 팔과 다리 사이에 끼여 몸을 꿈지럭대면 녀석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조여 왔다. 도망가려는 걸로 오인할까 봐 불편해도 꾹 참다가 다시 잠들기를 벌써 몇 날 며칠...나도 좀 제대로 편하게 자보고 싶다! 어깨를 이렇게 저렇게 비틀어 보기도 하고 엉덩이를 슬금슬금 빼보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용을 썼다. 놈이 습관처럼 팔에 힘을 주었지만 지지않고 허리를 비틀며 꿈틀꿈틀 거렸다. 조금만 자세가 풀리면 허리라도 좀 피고 잘 텐데... "씨발, 죽고 싶냐..." ...깨, 깼나? 엉덩이를 요리조리 움직여 보다가 귀 뒤에서 들리는 갑작스런 음침한 소리에 행동이 멎어 버리고 말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던 유현은 곧 이빨을 갈며 뭐라고 욕지기를 내뱉으며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불편해..." "닥쳐." 젠장 또 심사가 뒤틀렸군. 아야! 왜 깨무는 건데! 뱃살 좀 그만 잡아뜯어! 답답하고 짜증도 나서 "씨이...나도 좀 편하게 자자..."하고 투덜댔더니 배를 꼬집던 유현이 잠시 행동을 멈칫거린다. 등 뒤에 얼굴이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뒤통수에 닿는 숨결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의 행동은 가끔 서늘한 표정을 담고 마치 죽여버리고 싶은데 차마 죽일 순 없고, 살려두자니 심사가 꼬인다는 그런 얼굴로 바라보기도 해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론 이렇게 머뭇거리는 걸 보면 안타깝게 바라보던 녀석의 눈동자가 생각이 나서 마음은 심란하기만 하다. 뭔가 할말이 있는가 싶으면 삼켜버리기도 하고 가만히 쳐다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괜히 신경질도 부린다.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끝은 내가 창피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득해져 가는 녀석의 욕정을 모르진 않는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나른한 한숨 속에 담긴 아쉬움과 열기에 척추가 지끈 거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가늘게 떠는 손끝이 무엇을 구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귀까지 새빨개 지곤 했다. ......나는 아직도 유디스란 인물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거다. 사람에게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고, 그래도 포기를 못하고 미련스럽게 예전의 좋았던 감정을 질질 끄는 나의 못된 버릇은 유디스라고 달라질 일이 없다.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그랬고 진유현에 대한 감정이 그래. 빨리 정리를 해야 마음이 편할 텐데 알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또 마음이라 혼자서 괴로워 하고 끙끙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유디스가 유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아니, 오히려 더 괴로워. 차라리 유디스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진유현을 계속 미워하고 증오하고 그렇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설령 제하가 유현의 속마음을 알려 준다 하더라도 녀석의 이기심을 경멸하며 그 이기심에 희생이 된 나를 비웃으며 평생을 살아 갔을테지. 조금은 가슴 아파하면서, 조금은 안타까워 하면서. 더욱 더 힘을 주어 감아오는 유현의 팔과 다리 때문에 엄청나게 불편한 자세가 된 나는 뻐근한 허리를 뒤틀어 녀석을 마주보려고 몸을 움직였다. 내가 꿈틀거리는 것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항이라고 느꼈는지 유현은 뭐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더 꽉 끌어 안았고 나도 오기가 생겨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낑낑거렸다. 이봐, 난 너한테 할말이 있다고! "얼굴 좀 보자." 처음으로 내가 유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동안 일방적인 대화만 하던 유현은 의외의 말에 놀란 건지 옥죄어 오던 팔의 근육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때다 싶어 비비적 거리면서 꽈배기처럼 몸을 뒤틀어 녀석을 마주보니 겨우 그 얼굴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시커멓게 그늘진 눈동자가 당황의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조그맣게 운을 뗀 목소리는 혹시 누가 들을까 아주 작았다. 제하나 다른 용병들이 들으면 당장 목을 치려고 달려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목소리는 더욱 작게, 유현에게만 들리도록 소곤대면서 가능한 녀석에게 가까이 대고 말했다. "나는 네가 왕이 아니어도 좋아." 낡고 헤어져 먼지까지 뒤집어 쓴 유현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도 좀 그렇지만..... 밤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잠시 미친 건지도 모른다. 침을 꿀꺽 삼키고 가슴은 두 근 반 세 근 반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은 술술 움직이고 있었다. "도망가서...우리끼리 살자." 말했다. 말하고 말았다! 내가 한 말에 지레 놀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이다. 이 쪽팔린 얘기를 들은 사람은 유현 뿐인 것 같았다. 유현은 그대로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뜬 눈동자가 동그랗게 놀라서는 끔뻑 거리고만 있었다. "그..그러니까...예전처럼...다시 친하게...친하게 지내자.... 왕좌 같은 거 잊어 버리고....무, 물론 그게 힘들다는 건 알지만... 그냥...어디 먼데로 가서....둘이만 살면....안 될까..." 새빨갛게 불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실 친구들에게 이만저만 미안한 일이 아니다. 배신자로 찍혀 버릴지도 모르지. 다들 얼마나 어이없어 할지, 얼마나 엄청나게 화를 낼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유현과 사라져 버리면 제하는 또 얼마나 절망할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안되면? 만약 이 산을 넘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대로 유현에게 억지로 끌려가서 녀석이 왕권을 되찾느라 벌이는 한도훈과의 접전을 보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아. 벌레 보듯 쳐다보는 대신들의 시선도 감당하기 힘들다. 제하는 또 나를 원망하겠지. 어느 길을 걸어도 나에게 괴로운 선택이라면 적어도 녀석만, 진유현 이 녀석만 끌어 안고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 녀석이 한 일을 용서하거나 이해 하는 것이 아냐. 그냥 그 짐을 안고 사는 거다. 녀석이 나를 괴롭혔던 거, 강간했던 거, 모든 것이 밉지만 한 때나마 나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좋은 기억도 많았고 나도 녀석이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면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덮어두고 아무도 다치지 않는 그런 괜찮은 관계가 우리 사이에 가능하지 않을까? 희망을 담아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희멀건 눈동자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너무나 어이없어서 기가 막혀 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너......" 어둠 속에서 입이 열리며 이빨이 살짝 보였다. 그 틈새로 흘러 나온 음성은 떨리고 있었고 둥그렇게 뜬 하얀 눈알은 가늘게 좁아 졌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노려보는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미미하게 떨고 있는 팔의 근육이 느껴져서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녀석도 놀라고 있는 거야. 내가 너무 의외의 말을 하니까 당황하고 있는 거라구. "계속 생각해봤어. 너랑 내가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하고." 용기를 내어 웃어 보였다. 내가 녀석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색하지만 녀석의 등 뒤로 한쪽 팔을 둘렀다. 이제 보니 내 팔도 떨고 있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 불안정하게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유현은 연신 두리번두리번 거린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눈알이 정신 없다고 느끼는데 녀석은 나를 끌어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더니 등을 주무르고 또 쓰다듬고 있었다. "너를 죽이려고 했어...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데...그런데 나와 같이 살 수 있어?"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가 내게 용기를 주었다. 녀석의 뒤로 돌린 한 손으로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괜찮으니까 도망가자. 우리 둘만 살자."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면 다시 시작하자. 응? 나를 괴롭혔던 녀석을 용서할 수 없지만 나를 아껴줬던 녀석을 좋아한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서로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뭐 후각은 금방 마비되고 마니까 금새 익숙해졌다. 두터운 옷을 사이에 두고도 체온은 전해지고 맞닿은 심장의 맥박소리도 느껴진다. 등을 쓸어 내리고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유현의 대답을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가서...모든 걸 다 버리고..." 경련을 일으키던 몸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간다. 거친 호흡이 다듬어 지고 부산하게 움직이던 손놀림도 멈추었다. 조심스레 바라본 녀석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윤승호..." 어둡게 잠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으윽!" 순식간에 바닥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녀석이 몸을 뒤집어 위에서부터 짓눌러 내리고 있었다. 녀석의 손은 우악스러워서 뼈째로 뜯어 버릴 것 같은 악력으로 양 어깨를 틀어 쥐고 있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흙 바닥이 머리, 등, 허리에 착 달라붙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눈은 부리부리하게 빛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핏발 선 눈이 뚫어 죽일듯이 쏘아본다. 하얀 이빨이 씨익하고 어둠 속에서 벌어졌다. "건방지구나 윤승호....네가 감히 나를 농락하려 들다니. 안 어울리게 유혹까지 하고는, 그렇게 몸이 고팠나? 응? 굶주린 거야?" 충혈된 눈동자가 코 앞으로 내려오는 공포를 느끼며 "히익!"하는 작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녀석의 하얀 잇새로 날름거리는 물체가 턱 끝을 핥았고 그 기분은 뱀이나 지렁이와 같은 생물체의 감각과 닮으면서도 달랐다. 축축하고 물컹거리는. 그렇지만 뜨거운. "너 따위가 뭔데 감히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 내가...이 내가 고작 너 같은 인간 때문에 모든 걸 버릴 것 같아?" 데어버릴 것 같은 입김이 뺨에 녹아 들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고 느낀 나는 절망에 빠져 더듬거렸다. 나름대로 창피함을 무릅쓰고 한 일이 매몰차게 거절 당하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조금 화도 났다. "나에겐...그만한 가치가 없는 거냐? 네가 가진 자존심이 그렇게 대단해? 너는, 너는 끝까지 나를...나를 외면할 거야?" 제발 양보 좀 해줘 유현아. 사납게 쏘아보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다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는 아무런 따스함도 자상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웃기지마."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서져라 움켜쥐는 어깨가 아파 미간을 찡그렸다. 따갑게 쏘아보는 눈이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모처럼 결심한 일이었는데...여러 가지를 감수하고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후회했다. 이런 녀석에게 무언가 기대를 하는 게 아니었다고 느끼는 마음은 몇 번이고 같은 상처를 입는다. 울분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속으로 삭이고 있는데 녀석의 거친 손놀림이 몸 위를 배회한다.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간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간 웃옷을 끄집어 올렸다. 차가운 공기와 맞닿은 뱃가죽에 오스스한 추위를 느껴 어깨가 흠칫거렸다. 이제 당황한 것은 나였다. 기분 나쁜 예감을 느끼며 황급히 두 손으로 녀석의 손을 막아 보았다. "흥, 위급해지니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의외였어. 네게서 그런 달콤한 유혹을 받게 될 줄은. 마음이 동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렇게 맘만 먹으면 너를 가질 수 있는데!" "그, 그만 둬-!!!" 소리를 지으며 녀석을 때렸다. 강하게 억누르는 힘을 아래에서 밀쳐내기가 녹록치 않았다. 뺨과 목덜미를 부비는 입술의 뜨거움에 몸서리 치다가 목구멍으로 밀어 넣어지는 물컹한 이물감에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오오 대장 불 붙었다!!" "휘익- 한판 화끈하게 땡겨 보라고!" 깜짝 놀라 몸부림치며 녀석을 밀어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잠에서 깬 건지 산적 같은 몰골의 용병들이 일어나 환호를 하고 있다. 그들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고 때때로 입맛을 다시며 노려보는 자도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유현을 말리려고 달려오던 제하가 붙잡혀 악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 "놔! 이거 안 놔?! 유디스 정신차려-!!" 잠깐...지금 이거 뭐야...? 거친 숨소리가 입안을 파고 들고 옷가지가 억지로 벗겨져 나갔다. 연한 살을 훑어 내리는 까칠하게 마른 손과 하체에 비벼오는 육중한 무게감을 느꼈다. "으, 으아악-!" 뭐야? 지금 뭐하는 거야? 왜 이렇게 되는 거야? 열기로 탁해진 녀석의 핏발선 눈동자가 까만 그늘 아래에서 깜박이지도 않고 응시한다. 소름끼치도록 역겨운 기분이 들어 녀석을 밀어 내기 위해 발로도 차보고 손으로 머리며 어깨며 닥치는 대로 때렸다. 먹히질 않는다. 왜, 왜 잘못 맞은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나는데도 요지부동인 거냐? 화도 내지 않고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묵묵히...... 길게 뺀 혀로 목줄기를 핥는다. 혀가 지나간 자리가 칼로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유디스!! 유디스 그만 둬!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봐!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제하의 목소리가 귀에 뱅글뱅글 돈다. 몇 겹이나 되는 웃옷이 벗겨지고 한 장만 남은 얇은 셔츠가 가슴께까지 올라가 차가운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 바지사이로 들어온 손이 사타구니를 붙잡고 강하게 움켜쥐자 눈 앞이 하얗게 변하는 고통이 엄습해 온다. "흐윽..." "이거지? 응? 이걸 원한 거지? 도망이니 뭐니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냈지만 너도 이런 게 그리웠던 거잖아. 응? 응?" 끈적한 속삭임이 귀를 오염시킨다. 거칠게 잡아 뜯는 손이 살점을 찢어버리려는 듯 강하게 움켜쥐어 아릿한 통증을 남긴다. 싸늘한 공기에 의해 차가워진 가슴과 배에 녀석의 뜨거운 한숨과 열기가 뿜어지고 공포로 쪼그라든 사타구니는 장난감마냥 녀석의 손에 쥐여져 희롱 당하고 있다. 문득 광인 같았던 진유현의 행동이 뼛속에 새겨진 듯 하나하나 기억 나기 시작했다. 목줄기를 물어 뜯으며 키득거리던 낮은 음성. 허벅지를 할퀴듯 쓸어 내리던 거친 손놀림. 새삼스럽게 기억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악몽...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런 거 이제 와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 잊고 싶었다. 묻어 두고 싶었어. 내가 이 엉망진창의 세계에서 네 곁에 있기 위해서는 그런 일 따위 떠올려선 안 되는 거라구! 그런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야? 나를...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줘. 애써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지금의 너와 어떻게든 잘 지내 보려고 마음 먹은 나를 더 이상 몰아 붙이지 말아 달라고! 넌 여전히 이기적이고 비겁하고...자기가 쥔 것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겁쟁이다. 그런 걸 알면서 나는 또 감정에 질질 끌려가는 멍청이라서 네가 조금만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도 금방 약해지고 마는데, 이렇게 억지로 부딪쳐 오면 나는 널 어떻게 대해야 해?!!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기 싫어! "으아아악!! 그만둬 유현아----!!!!!" 벗겨진 바지가 허벅지에서 걸렸다. 내 몸을 바짝 끌어안은 불편한 자세에서도 억지로 바지춤을 풀어 내리고 엉덩이를 조물락거리던 유현은 어느 순간 행동을 멈추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노출된 허벅지가 작게 경련했다. 왜 유현이 행동을 멈췄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설마 이제야 내 마음이 통한 거야? 나의 절박한 심정이 네게도 느껴져서...그렇게 놀란 얼굴로 그렇게 얼어붙은 표정으로....아니, 그런 것 치곤 좀 이상하다. 왜 저렇게 무섭게 일그러지는 거지? "유현....이라고?" 섬뜩한 빛이 녀석의 눈동자를 훑으며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유리알이 반짝이는 것처럼 날카로운 빛을 지녔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군...그렇지?" 커다란 손이 얼굴 앞으로 뻗어 온다. 무서움을 느끼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 나는데 녀석의 시커먼 손이 얼굴을 꽈악 움켜쥐고는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눈과 고정시킨다. 얼굴 전체를 옭아 맨 다섯 개의 손가락 틈으로 두려움에 떠는 내 시선과 들개처럼 번뜩이는 녀석의 시선이 맞닿았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 있다고 했지. 그 놈에게...그 놈에게 당한 거냐? 그래서 그렇게 싫었던 거야? 헤시안이 돌아오고 나서 갑자기 행동이 변했던 것도 그 놈과 연관이 있었던 거지! 그렇지!!!" 바지를 끌어 올릴 생각도 못했다. 나도 모르게 흙바닥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을 주자 손톱사이로 흙이 들어간다. 아무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 녀석이 한 손으론 어깨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채를 잡고서 눈을 뒤집듯이 부릅뜬다. "그 놈이야? 그 진유현이라는 자식이 너를 범한 거야?! 내가 아니라...나를 만나기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엉?!!" 더 이상 흉측해질 수 없을 만치 일그러진 유현의 얼굴이 코앞에서 거품을 물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미치기 직전으로 발광하는 녀석은 나를 물어 죽이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며 까드득-하는 소리를 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까부터 녀석의 손이 쥐어 뜯던 어깨는 이제 욱신거리는 근육통을 호소한다. 울분이 복받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갑갑함을 무슨 수로든 토해내고 싶었다. 왜 네가 나에게 소리지르는 거야? 소리지르고 싶은 건 나라고. 나야말로 너한테 쌓아두고 하지 못한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화를 내는 거야?!!! "깜찍하게도 나를 속이고 그냥 사이가 나빠진 친구인 척 거짓말이나 하고! 왜, 이제 와서 그 자식이 생각 나? 아니, 그동안 나와 하면서 그 자식과 비교 했나?!! 이런 빌어 먹을--!!!" 틀어 쥔 머리채가 뽑혀나갈 듯이 아팠다. 눈가에 고인 물방울은 분해서 그런 건지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파서 그런 건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다그치는 녀석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이 응어리가 되어 열기와 함께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자식은 어땠어? 나랑 비교해서 어땠냐구!! 아직도 이름 부를 정도로 못 잊은 거냐? 엉?!! 그런 거냐?!!!" "아팠어---!!!" 폭탄이 터져 나오듯 격하게 소리질렀다. 눈가가 음습한 기운으로 벌겋게 부은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빨을 간다. 유현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제하가 보고 있든 사정 모르는 용병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잔뜩 고인 웅덩이를 막아두던 얇은 나무 지렛대가 무너지고 악취를 내는 썩은 물이 쏟아졌다. "아팠다구! 괴로웠다구! 내가 너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알아? 그렇게 당한 뒤로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지 아냐고!! 그래도 친구라고,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너한테 미련을 못 버리던 나를 완벽하게 뭉개놓은 주제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머리카락만큼도 알아주지 않았잖아! 날 밟으면서 재밌어 했잖아!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진유현--!!!" 눈앞이 흐리멍텅해졌다. 이제는 뭐가 어찌 되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내가 너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유현아. 지금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려다 보는 네가 얼마나 비겁해 보이는지 알아? 네가 하나도 기억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벽에다가 소리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걸 알면서... 이렇게 소리라도 질러야 겨우 숨통이 트일 것 같은 내 기분을 네가 아냐고! "미쳤냐 윤승호?! 이젠 머리가 돌아버렸구나! 날 봐! 난 유디스다! 그깟 진유현 같은 새끼가 아니라고! 감히 어딜 보는 거냐! 나다! 나라고!!" "아, 그래! 조금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지! 결국 너는 그런 인간이었어! 조금도 변하지 않아! 상황이 바뀌고 배경이 바뀌어도 네가 선택한 답은 겨우 이거잖아! 고작해야 힘으로 짓누르는 게 네게는 가장 편한 길이겠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죽도록 미웠어!!! 하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잘 해보고 싶었다구! 진유현도 유디스도 둘 다 너니까! 그런데 넌 아니잖아! 끝까지 너 밖에 모르잖아!!!" "닥쳐! 너 지금 어디서 그 따위 말을 지껄이는 거야! 나를 그런 자식과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죽고싶냐?!!"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손이 양 어깨를 잡고 정신없이 흔들어 댄다. 녀석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멍멍한 귓가에는 아무 소리도 들어 오지 않았다. 눈시울과 콧잔등이 속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뜨겁게 부었다. 축축한 액체가 지저분한 얼굴에 끝없이 흘러 내렸다. 우리...이 꼴이 대체 뭐냐.....? "헤시안!!" 문득 한기가 느껴졌다. 눈물을 닦으며 올려다보니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있던 유현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쏘아 보며 서서히 일어 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마치 때릴 듯한 기세로 제하에게 성킁성큼 걸어갔다. "헤시안!!! 너는 알고 있지?! 네가 돌아온 날, 윤승호와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냐! 쭉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땐 단순히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믿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뭐야! 역시, 내가 모르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지!!" 서슬퍼런 목소리가 산에 쩌렁쩌렁 울렸다. 공기를 탄 유현의 목소리는 후우웅하고 불길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섞이어 웅웅대다가 잦아들었다. "그래! 자업자득이다. 이 멍청아!!!" 느닷없는 제하의 반격에 유현은 물론, 나도, 제하를 붙잡고 있던 용병들도 깜짝 놀랐다. 제하는 "놓으라구! 네 녀석들에게 추가 보수를 주는 건 나란 말이다!"라고 일갈하여 용병들을 움칫하게 만들더니 결국 풀려났다. 숨을 몰아 쉬던 제하는 무서운 기세로 유현을 쏘아 보았다. "진유현 이 자식아, 그렇게 잘난척하더니 꼴 좋구나. 나라도 잃고 부하도 잃었어. 이젠 윤승호 까지 잃을 거냐? 현살에서 기어코 일을 저지르더니 여기까지 와서도 이 모양이야!!" "이런 제기랄, 너희 둘 다 완전히 미쳐버렸군!" 유현과 제하는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악을 써댔다. 어깨를 들썩이는 유현의 뒷모습이 불안하기만 하다. 구경하는 용병들은 재밌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주섬주섬 바지를 추켜 올렸다.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 추웠지만 손이 덜덜 떨려서 겉옷을 하나하나 챙겨 입을 정신이 없었다. 옆에 있던 망토를 주워 대충 두르니 그나마 좀 낫다. 볼썽사납게 훌쩍이는 얼굴을 문대어 닦아내도 주책 맞은 눈물이 그치지를 않는다. 낡은 망토로 박박 문대자 얼굴이 쓰리고 눈가가 따갑다. 불현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제하도 유현도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다. 어려보이는 얼굴에 안 맞게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제하의 얼굴이 유현의 어깨 너머로 보였다. 많이 초췌해지고 핼쑥해진 제하의 얼굴은 노기로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잔뜩 찌푸린 얼굴이 점점 놀라움으로 변해간다. 그런 제하의 표정변화가 괜시리 신경 쓰이던 가운데 유현이 서서히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입술을 이빨로 짓이기며 흰자위가 어두운 얼굴 위에서 허옇게 빛날 정도로 치뜬 두 눈이 그로테스크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녀석의 양 어깨가 부자연스럽게 꿈틀거렸고 꽉 움켜쥔 두 주먹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윤승호! 도망가!!!" 귓가를 파고드는 제하의 목소리에 놀라 몸이 경직되었다. 어깨가 움칫하고 흔들린 유현의 눈동자가 잠시 옆으로 움직였지만 금새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한다. 나는 곧 제하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유현의 얼굴은 죽은 줄 알았던 먹이감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봤을 때의 신중함과 비슷했다. 설마 도망가겠어? 하는 표정과 여차하면 재빨리 잡아야 한다는 표정이 교차한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은 마치 다시 손에 잡히면 이번에야 말로 완전히 숨통을 끊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으, 우와아아악!!!" 덮치기 직전의 맹수와 같은 조용한 몸놀림으로 자세를 낮추는 녀석을 보고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뱃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달은 밝았지만 위협적으로 튀어나온 바위 그늘까지 비춰주진 못했다. 그 어두움 아래 벼랑이 있을지, 함정이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두 다리는 그 어둠 속에 발을 내딛고 앞으로 튕기듯 튀어 나간다. "윤승호 거기 서--!!!!!" 목덜미를 누군가 채어 간다는 착각이 든다. 쉬지 않고 험한 지형을 뛰고 구르며 기어 올라가도 지칠 여유조차 없었다. 고함지르는 목소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 질수록 전신을 지배하는 공포는 커져 갔고 몸서리가 쳐졌다. 차라리 심장이 터져 버려서 이 끔찍한 혐오감을 상쇄시켜주길 바랬다. "이런 씨팔! 대장! 같이 가!!" 용병들이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자박거리는 발소리를 낸다. 고요한 바위산에서 우리들이 내는 숨소리 하나하나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부산하게 달리는 발자국소리, 흙벽을 기어오르는 소리, 내지르는 비명, 거친 호흡, 심장의 박동소리.... 손톱이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지는 아픔조차 아픔으로 느끼지도 못하며 산을 기어 올라갔다. 뜻뜨미지근한 액체가 볼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서 털어졌다. 짭짤한 액체가 입 끝에서 느껴지지만 이것이 땀인지 눈물인지는 모르겠다. 제기랄, 싫다 싫어. 모든 것을 끝낼 거다. 어딜 가도 내가 행복해질 방도는 없는 건가 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냥 편하게 쉬고 싶어. 교실에서 따돌림을 당해도 좋고 부모님이 이혼해도 좋아. 현대문명의 안락함에 기대서 그냥 그렇게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면 돼. 결국 진유현은 이기적인 진유현 그대로이고 나는 나약한 윤승호인 채로 이 세계에서조차 변함이 없다. 차라리 희망이라도 없었으면 좋았을 걸. 진유현과 지냈던 좋은 기억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이렇게 가슴아파 할 일은 없었을 텐데. 결국 뭐야. 여기나 현실이나 똑같잖아. 나 자신의 무력함을 알려주기 위해 이 세계는 만들어진 거야? 이딴 거지 같은 세계.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밤이고 달은 밝지만 바위 그늘에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지금 당장이라도 저 까마득한 어둠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어버려도 하나도 아쉬울 것 없다. 아니 오히려 죽어 버리면 현실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강력한 유혹마저 느껴졌다. 뒤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거기 서, 안 서면 죽일 거야, 부탁이야, 제발......갖은 협박과 애원이 섞인 짐승의 울부짖는 괴이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온다. 간혹 믿을 수 없는 말도 섞여 있었다. ......같이 살자. 네 말대로 하자. 그러니 제발 도망가지마. 설마, 잘못 들었겠지. 이제 와서...이제 와서 비겁하게 그런 말하지 말라구. 그거 반칙이야. "승호야! 윤승호--!!! 다 버릴게! 다 버릴테니까!! 제발--!!!!!" 그러니까 늦었다구. 아까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한 주제에 뒤늦게 그런 말을 해도 하나도 설득력 없어 진유현. 어슴푸레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부족한 내가 진유현과 다른 용병들의 추격에 용케 아직도 안 잡히고 있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아래에서 용병들은 제하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고 유현은 구르고 떨어지느라 제대로 산을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유현은 당황한 건지 너무 서두른 건지, 이제껏 내가 잘 피해왔던 돌부리에 넘어지거나 깊게 패인 바위 틈에 다리가 끼이면서 엄청나게 추레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니 한 조각의 걸레뭉치가 붉은 흙더미 위에서 뒹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목소리라면 너무도 또렷하게 들린다. 온 산에 퍼지도록, 마치 대륙의 저 끝까지 들리라는 듯 유현의 목소리가 산 전체에 가득했다. "도망가지 마! 어떻게 만났는데, 내가 어떻게 널 찾았는데--!!! 더 이상 널 못 보면 난 미쳐버릴 것 같다구! 안 죽일게! 안 죽인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서란 말야!!" 멍하니 내려다보며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나를 능멸했으면서 저렇게 애원하다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녀석인지 시험하고 싶은 거야? 자기가 만든 세상, 제대로 통제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너에게 또 얼마나 모욕을 당해야 정신을 차릴까. 네 녀석이 죽어라고 기를 쓰며 바득바득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뜨끔하는 이 멍청한 나를 어찌해야 되겠어? "으아악!!! 가지마!!! 가지 말라구!!! 뭐든 할 테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마-!!!!" 자기 성질을 못 이겨 제 몸이 엉망이 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저래서야 갖고 싶은 장난감 안 사준다고 시장바닥에 드러누워 발광하는 어린애와 뭐가 다를까. "죽여버린다! 안 서면 죽인다고!! 여기 활도 화살도 있어! 내가 못할 것 같아?!!!" "아니야! 그 말 취소야! 아무 짓도 안 할게! 손도 안 댈게! 그냥 있어주기만 하면 돼!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돼!!!" 욕설과 협박과 회유와 억지를 부려가며 걸레뭉치가 구르듯 산을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마저 올라가던 길을 갔다. 산에는 나무도 풀도 없어서 바위 그늘 말고는 시야를 가릴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유현이 어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산을 기어 올라오는지 볼 수 있었고 제하가 용병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우리를 쫓아 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점점 드세지고 있었다. 산 정상에 가까워진 탓인지 훤히 밝아 오는 하늘이 유난히 낮아 보인다. 바위를 타고 올라 겨우 산 꼭대기에 도달했지만 꼴이 말이 아니다. 옷의 여기저기가 긁히고 찢어져, 드러난 살갗에는 생채기가 나서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뺨을 때렸고 마른 흙먼지가 사방에 휘날렸다. 긁힌 자국과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뺨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간지럽힌다. 산 꼭대기 아래는 직선으로 깎아지른 듯 험준한 벼랑이었다. 차갑고 강한 바람은 그 벼랑 끝에서 나를 날려 버릴 듯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환해지는 반대편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지만 새하얗게 빛나는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맑았다. 끝이다. 이것이 내 세계의 끝.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장면이었다. 벼랑 너머 하늘까지 가득 메운 진홍색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까마득한 아래로 그 성분을 알 수 없는 다홍색, 혹은 붉은 색, 혹은 진홍색으로 빛나는 물질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그것은 물이라기보다 차라리 젤리에 가까운 점액질의 성질을 띠고 있어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처럼 파도가 치는 것도 아니고 잔잔한 물결조차 없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미세한 흐름만을 보이며 진홍색의 액체는 환하게 밝아오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은 도화지에 줄을 그어 놓은 것처럼 수평선 하나를 경계로 하늘과 바다로 나뉘어 있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바위산맥은 마치 땅덩어리와 바다의 경계선처럼 길게 뻗어 좌우로 끝없이 이어져 있다. 루비처럼 빛나는 진홍의 바다는 언제나 꿈속에서 보았던 그것과 같다. 무릎에 힘이 빠졌다. 저 음울하기 짝이 없는 절망의 빛깔이라니 완전히 질려버렸다. 진득하게 녹아 있는 비참함과 그리움. 혐오와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과 절망과 탄식과......온갖 기분 나쁜 감정들이 농축되어 가득 고인 거대한 웅덩이. 불길하게 일렁이는 붉은 색. 그것이 생명수이자 내 힘의 근원이었다. "아하하하하하...." 그 오랜 시간동안 고작 이런 거나 쌓아두고...그래서 이런 세계나 만들고...그래 놓고 자신이 바라던 세계에서 조차 행복하지 못한 나란 인간은 대체 얼마나 나약한 바보인가! 그대로 주저앉아 나 자신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너무 창피해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웃음이 바람소리와 함께 섞이어 허공에 흩날렸다. 수평선너머 고개를 내미는 눈부신 태양이 못 견디게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 음침한 바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저렇게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주제에 생명수 같은 거창한 이름을 가진 액체가 몹시도 저주스러웠다. 어두운 감정이 고여 생긴 액체가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니 아이러니다. 바람에 눈물이 방울져 흩날렸다. 몸을 날려버리려는 기세로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 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가 바로 눈 앞에 다가온 양 굉장히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붉은 젤리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수면은 다홍색에 가까운 붉은 색이고 그 안으로 깊어질수록 짙은 적색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바라보아도 요염하게 일렁이는 붉은 빛깔은 눈 속을 파고들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들여다보다가 순간 현기증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아앗!" 떨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균형 잡아 뾰족하게 튀어나온 암석의 모서리를 부둥켜 안았다. 다행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모면할 수 있었지만 대신 목에 대충 두르고 있던 망토가 잘못 걸려 풀어지고 바람에 날려 저 벼랑 밑으로 떨어졌다. 망토라서 그런가? 떨어지는 속도가 일정하다. 바람에 나부껴 천천히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천자락이 떨어지는 속도라기엔 너무 비정상적으로 보여서 나는 주위의 큼지막한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어 아래로 던져 보았다. 가속도가 없다.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돌멩이는 망토보다는 무거워서 먼저 수면에 맞닿았지만 그대로 착지해 움직임을 멈췄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딪쳐 깨지거나 튕겨 오르지도 않았다. 못이 자석에 달라붙듯 그대로 수면 위에 안착해 바다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리고 있었다. 뒤따라 떨어진 망토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살펴보니 붉은 수면 위로 바윗덩이며 돌멩이, 흙가루가 둥실둥실 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특이한 현상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왜 이렇게 잘 보이는 걸까? 혹시 나의 창조자로서의 능력이 다시 발휘되는 걸까? 하지만 여전히 의식은 꽉 막힌 채 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을 유현이나 제하의 얼굴마저 볼 수 없었다. 다만 볼 수 있는 것은 저 바다 위의 돌멩이며 내가 흘린 망토자락따위. 그리고 들여다보면 볼 수록 가까워지는 진홍의 수면. 멍하니 절벽아래를 응시하다가 문득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엇?" 멀쩡하던 수면에 동심원이 생겼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지면서 오스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수면 아래에서 서서히 어떤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느 숲...아니, 산 속이었다. 가드레일이 부서져 있고 그 아래로 수풀이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버스 한 대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전복되어 있다. 엔진은 아직도 꺼져 있지 않았고 옆으로 넘어진 버스의 바퀴는 헛돌고 있다. 깨어진 창 밖으로 가방이며 쇼핑백이 튀어 나와 굴러다녔고 각종 과자와 음료수들이 쏟아져 수풀과 섞이었다. 눈가가 팽창했다. 목덜미를 타고 턱과 귀까지 닭살이 돋아 지잉하는 이명이 들린다. 맙소사.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으아아아악!!!!!" 너무 무서워서 뒤로 물러났다. 저 버스! 저 버스는 우리 반이 수학여행 때 타고 가던 버스다! 차 유리 맨 앞에 1-1이라고 써놓은 하얀 색 종이도 붙어 있고 [향강 운수]라는 촌스러운 이름도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체...아니, 우리들의 몸은 어디있어? 벌써 구조된 것으로 보기엔 사고현장이 너무 생생하다. 이렇게 큰 사고에 핏자국조차 없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저 멀리 뒤따라 오던 다른 반의 버스가 하나 둘 서는 것이 보였다. 버스 안에서 내리던 다른 반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절규하는 모습도 보인다. 아우성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너무도 리얼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본 영상이 사실이라면,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이 세계로 끌어 올 때 시간도 함께 끌고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럼...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야? 이 가짜세계의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예전의 생활로...무시당하고 외면 받는, 쓸쓸하고 어두운 그 교실로. 그 집으로. 몸이 가늘게 떨려 왔다. 그렇게도 그리던 실제 세계가 코 앞에 있었다. 내가 만든 세계를 버리고 전쟁도 생명의 위협도 없는 안락한 회색빛깔의 현실로 돌아가는 거다. 그렇게 하자고 쭈욱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작은 망설임이 있었다. 외출하고 나서 집에 무언가를 두고 온 것 같다는 찜찜함, 기르던 강아지를 시골집에 맡겼을 때의 작은 아쉬움, 헤어지는 걸 서러워 하는 아기의 얼굴을 봤을 때의 안쓰러운 느낌. 주제에...그래도 내가 만든 세상이라고 정이 든 거였나..... 씁쓸하게 웃었다. 바람이 매섭게 몸을 때렸다. "윤승호--!!! 기다려 윤승호---!!!!!!"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라 몸이 펄쩍 뛰었다. 얼른 주변의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니 저 멀리서 유현이 미친 듯이 내 이름을 부르며 기를 쓰고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설마 나를 봤을까? 심장이 사정없이 고동쳤다. 고개가 빠질 것처럼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모양을 보니 아직 나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훤히 드러난 산꼭대기에선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금방 발각될 것이다. 녀석이 내가 숨어 있는 바위덩이를 눈치채지 말기를 바라면서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녀석의 얼굴은 멀리서 보면 검댕에 그을린 것 마냥 새카맸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검은 머리카락이 부석부석한 잿빛이 되어 바람에 마구 휘날려 산발이 되어 있었다. 유현이 바다를 바라본다. 알겠어? 유현아, 그 재수없는 바다에는 말이지 너에 대한 나의 증오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 얼마나 너를 원망했는지,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지......보여? 의미 없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녀석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알아준다 한들 또 뭐가 달라질까? 녀석이 망연자실 넓은 대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몸은 내가 숨어 있는 곳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어깨가 점차 들썩인다고 생각했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릎이 구부러진다. 가늘게 떨리는 녀석의 양 손이 점점 가슴께로...그리고 얼굴을 지나...머리로 올라간다. 그러더니 지저분하게 뒤엉킨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엄청나게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안 돼에에에에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나는 바위를 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는지 손톱에 돌 조각이 파고들어 왔지만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의미불명의 괴성을 내지르며 유현은 저 멀리, 벼랑의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대로 무릎을 끓었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운 신음성을 뱉어내던 유현은 한동안 그렇게 꿇어 앉아 절벽 밑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왜 유현이 저렇게 절규하는지 이해했다. 녀석이 바라보는 곳에는 내가 목에 두르고 있던 망토가 수면 위에 안착해서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이......자식...." 신음과 같은 음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유현은 화가 난 탓인지 당황한 탓인지 온몸이 경련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전신으로 내뿜는 기운은 살벌하기만 하다. "네 녀석이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섬뜩했다. 혹시나 내 위치가 들킨 건 아닐까 불안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시선을 절벽 아래로 향한 채 환자처럼 몸을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흐트러지는 얼굴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진다. "끝까지 달라붙어 주지. 시체라도 건져서 되살려낼 거야." 순간 유현의 몸이 도약하며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관이 움직임을 정지하여 뇌의 사고조차 멈춰 버렸다. 심장이 떨어지고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선다. 손가락 하나, 호흡하나 내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물리의 법칙을 무시한 유현의 몸이 일정한 속도로 하강했다. 물론 사람의 몸이라 그런지 만만찮은 속도로 떨어지긴 했지만 가속도가 없는 하강이란 건 낯설게 느껴졌다. 유현과 함께 자갈이며 모래와 흙이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유현의 몸이 수면에 닿았다. 그대로 바다 위에 착지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녀석은 발끝부터 쑤욱 붉은 액체 밑으로 꺼졌다. 눈을 흡뜨고 그 괴이한 광경을 지켜보는데 유현의 몸은 그 곳에 바다 같은 건 없다는 듯이, 아무런 마찰이나 저항을 받지 않고 수면의 밑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몸이 완전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 직전 내가 떨어뜨린 망토를 낚아채었다. 그 더럽고 낡은 망토를 품에 안아 냄새를 맡고 입을 맞춘다. 고작 넝마조각에 불과한 천조각을 마치 연애편지를 모아 쥐는 소녀처럼 소중히 끌어안고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 그 절박한 제스츄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그런 모습, 비겁하잖아.... 그런 걸 보는 나는 어쩌라고, 자꾸 마음 약해지는 나를 어쩌라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진유현----!!!!!!!!" 멀리서 제하의 절규가 들려왔다. 뒤늦게 따라온 제하는 유현이 뛰어 내린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 올라갔다. 제하의 뒤를 따라 귀찮다는 몸짓으로 올라오던 용병들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뛰어 내리는 모습을 아래에서 바라보고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다들 멍하니 절벽 위를 바라보았고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위 그늘에서 몸을 드러내자 새하얗게 질린 제하의 얼굴이 나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달려오다가 점점 얼굴 근육이 놀라움으로 벌어진다. 눈이 커다래지고 입은 바보처럼 열렸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시선은 내 어깨 너머 붉게 펼쳐진 바다에 머무른다. "이게...이게...대체...." 제하는 기는지 달리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암벽을 타고 올라와 절벽의 끄트머리에 섰다. 수평선 너머로 떠오른 태양의 강렬함에 눈이 부실법도 하건마는 제하의 눈은 깜박이지도 않는다. "윤승호....이건...이건 어떻게 된 거야? 이건....이건 대체 뭐냐구!!" 나는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 나올까 봐 말을 하지 못하였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마 흙과 먼지에 지저분해진 얼굴에 눈물자국이 구정물처럼 흐르고 있을 것이다. "이...이것이 생명수냐?...이 광대하고 짙은 에너지가...다....네 힘이란 말야?" 제하는 빤히 바다를 바라보다가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서는 턱이 경련하고 있었다. "세상에..."하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 막는다. 핼쑥한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무섭다...승호야 난 네가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고개를 겨우 돌리며 눈을 멍하니 뜬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 퀭한 눈동자가 마치 괴물을 보는 것마냥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어린 물기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떡하지? 나 네가 너무 무서워. 너무 미워. 부럽고 질투가 나서 돌아 버릴 것 같아!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이만한 능력이 있었으면서 넌, 넌 대체-!!!" 주룩-하고 제하의 눈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너를 잔뜩 미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외치는 제하의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심장을 후비는 제하의 절규와 눈물이 고통스럽다. "...유현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문득 제하는 나를 빤히 노려보다가 진홍의 바다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제하는 턱이 떨리는지 이빨을 따각거리며 경련하는 손가락으로 저 아래를 가리켰다. "네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저 바다에 떨어진 유현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바다는 여전히 고요하다. "유현이는...유현이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멱살이 잡혔다. 부릅뜬 제하의 눈이 코 앞에 있었다. 제하가 노려보면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시선을 피할 생각은 없다. 울부짖는 제하를 보며 나도 흉한 몰골로 훌쩍거렸지만 녀석은 가차없이 소리지르며 멱살을 잡아 흔든다. "그 자식은 그래도 내 친구야! 아무리 못돼먹은 짓을 하고 정신이 나갔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같이 해 온 친구, 아니 이미 내게는 가족 같은 녀석이라고! 너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네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하지만...이건 아니라구--!!!" 엉엉 목놓아 울고 싶었다. 나도 괴롭다며 같이 소리질러 주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꽉 막혀 "윽...윽..."하는 신음성만 새어 나온다. 이 세계에선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남아 있던 한조각의 미련마저 진유현과 함께 바다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 멱살자락을 부여 잡고 우는 제하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소매로 대충 얼굴을 훔쳤다. 귀와 코가 멍멍하고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지만 차가운 바람이 금방 열기를 식혀준다. 조심스럽게 제하를 떼어내자 녀석의 몸이 의외로 힘없이 떨어졌다. "이제 됐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 겨우 그친 눈물이 또 한 방울 흘러내린다.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책 맞는 눈물이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이 지겨운 세상을 끝내자." 제하는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녀석은 똑똑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말 것이다. "너..." 크게 뜬 눈이 순해보인다. 그래, 그렇게 독살스러운 표정만 짓지 않으면 녀석의 얼굴은 원래 순하고 서글서글해서 호감 가는 녀석인데 말야...이렇게 엉뚱한 세계에서 고생을 하느라 볼 살이 쪽 빠져 비루해보이긴 했지만 원래는 잘 웃고 조금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란 걸 알고 있다. "너...무엇을 하려고....." 놀란 눈으로 바라본 제하의 얼굴을 보며 살며시 뒤로 물러 났다. 발 밑으로 모래며 자갈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세찬 바람이 아까 보다 심해져서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펄럭 휘날렸고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나부껴 뺨을 아프게 때렸다. 나는 가능한 환하게 웃어보이려고 노력했다. "안녕" 작게 인사하며 그대로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 허공을 디뎠다. 쑥하고 몸이 꺼진다. 낙하를 하며 바라 본 바다는 음침하다고 저주하긴 했지만 이렇게 아침해에 빛나는 것을 보니 굉장히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붉은색, 혹은 다홍색으로, 혹은 진한 핏빛으로 일렁이는 젤리 같은 액체가 흔들흔들거리며 나를 집어 삼켰다. 눈을 감아 버리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학생들의 비명과 고함으로 벼랑 위는 아비규환이었다. 그렇게 높은 벼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체가 굴러온 흔적은 무참했고 안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사고를 당한 학생들이 적어도 팔 다리 하나 정도는 아작이 났을 거라고 구조 대원들은 생각했다. 버스 안에는 교복차림의 남자 아이들이 붉은 액체와 함께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그 액체는 버스에서 흘러 넘쳐 주변의 수풀을 적시고 있었는데 멀리서 그 광경을 본 학생들과 선생들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곳에 서 있는 누구도 그것이 피임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버스가 절벽에서 떨어졌어도 이렇게까지 낭자하게 피가 흘러나올 리가 없다고 구조 대원들은 생각했고 역시나 가까이 가 보면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혈액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마치 이 버스 안에 딸기 맛 젤리를 한가득 부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대원도 있었고 붉은 시럽이 쏟아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대원도 있었다. 무언가 단체로 먹을만한 음료수나 간식 같은 것이 터져서 학생들의 몸과 진득진득하게 얽혔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해하기도 쉬웠다. 대원들은 가뜩이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아이들을 구조하는 데에 더 번거롭게 되었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아이들을 구조하기 시작한 뒤 10여분도 지나지 않아 액체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해 버렸고 구조 대원들이 놀랄 새도 없이 학생들은 한명한명 차분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벼랑 위에서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학생들도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각자 반의 버스에 올라탔으며 그날의 수학 여행은 취소되어 버렸다. "이상하다...아까는 분명 버스 안에 아무도 없었는데....." 사고현장을 목격한 학생들 중 몇 명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리고 말을 한 본인조차도 잘못 봤겠거니 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의 사고는 뉴스와 신문의 한코너를 장식했다. 놀라운 것은 버스 안에서 기절해 있던 1학년 1반의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 버스기사까지 어느 누구도 외상이 없다는 점이었다. 의사들과 기자들은 기적이라는 둥 천운이라는 둥 입방아를 찧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까운 시내의 병원으로 옮겨진 아이들은 대부분 반나절 안에 깨어 났으며 다들 한숨 푹 자고 난 사람마냥 개운한 얼굴이었다. "아, 좆나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단 말야..."하고 중얼거리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을 차려놓고도 더 자려고 이불 속에서 발버둥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들의 사고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부모들은 처음엔 눈물을 흘리며 무사한 자식의 모습에 안도했지만 더 자고 싶다며 꾸물거리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어지기도 했다. 일부의 아이들, 즉 정민태와 안진영, 김형석, 그리고 한도훈과 오세준처럼 승호와 깊게 관여한 아이들만이 이틀에서 사흘가량 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퇴원 후 멀쩡히 학교를 다니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김제하와 진유현, 윤승호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서울의 병원으로 각각 이송되었다. 모든 것이 평소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록 수학여행 일정은 취소되었지만 시간표대로 각 과목별 선생님은 드나들었고 자율학습과 아침 보충 수업도 이어졌다. 선생님들은 1반에 들어 올 때마다 격려도 하고 이럴 수록 정신차려야 한다고 충고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나 여드름이 싹 없어졌다?" "어?! 나도 나도! 여드름도 여드름이지만 지난번에 넘어져서 무릎 까진 거랑 아빠한테 터진 거랑 다 없어졌어!" "머리 깨져서 꿰맨 자국은 어디로 갔냐아아아!!! 사나이의 증표가 사라졌다아아아!!!" 사고 이후 왠지 피부가 더 탱탱해 진 것 같다며 아이들은 거울을 보고 흡족해 했다. 덕분에 전교에선 미남 반이라는 둥 불사신 반이라는 둥 명예스러운 소문이 돌기도 했고 혹시 1반이 단체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무슨 약품개발의 실험체로 쓴 게 아니냐는 진지한 농담까지 흘러 나왔다. 교무실에선 보기 드물게 얼굴이 엉망이 된 오세준이 담임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 큰 사고가 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인근의 깡패와 싸움질을 하다가 경찰에 걸려서 학교에 알려진 것이 화근이었다. 이제껏 [표시 안 나게, 증거 없게]가 모토였던 오세준이 최근 마구잡이로 주먹질을 하고 다닌 탓에 근처의 한주먹 쓴다는 패거리들은 물론, 세력싸움과는 상관없는 길거리 양아치까지도 긴장하고 있었다. "너...왜 답지 않은 짓을 하냐...." 며칠간 수염도 안 깎았는지 거멓게 피폐해진 얼굴로 담임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졸업은 해야 할 것 아니야...학부형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어. 아버님 체면도 생각해야지..." 오세준이 교무실에 오면 다짜고짜 싸대기가 날라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다른 선생님들은 이성적으로 타이르는 1반 담임을 보고 기겁했다. 그렇잖아도 요 며칠 무언가 나사가 하나 풀린 듯 맥빠지는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장선생이 드디어 사고 후유증을 겪는 거라고 입을 모아 수군댔다. "죄송합니다." 또 한번 교무실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능글능글한 얼굴로 "난 잘못 없어요~ 에이 죄송하다니까요~" 하며 수많은 폭력사건에서 몸을 사리며 뺀질거리던 오세준이 진짜 죄송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저것도 사고 후유증이냐고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를 무시한 채 담임과 오세준은 말없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너 유현이랑 친구라고 했지. 알고 있냐? 유현이랑 제하...어제 퇴원했댄다. 제하는 다음주 월요일부터 등교할 수 있지만 유현이는 상태가 안 좋아서 한동안 자택에서 요양해야 한다고 하더라." 담임은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굉장히 담배가 피우고 싶은 모양이다. 교무실에선 금연이라 피울 수 없었지만 오세준이 자리를 뜨고 나면 당장 교사 화장실로 달려가 담배 한가치를 꺼내 물 생각이었다. "소식은...들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조용히 말을 주고 받던 담임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만 가봐라" 하며 오세준을 교실로 돌려 보내고 자신도 품에서 급히 담뱃갑을 꺼내 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다른 선생님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교무실의 많은 선생들이 오세준을 때리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며 훈계하지도 않은 채 돌려보내는 장선생의 뒷모습을 보며 정밀검사를 다시 한번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매우 걱정했다. 민원호는 요즘 고민중이다. 자신이 그렇게 열광하던 무협지가 이제는 시시하게 느껴졌다. 진정한 명작이라고 극찬하는 소설 몇 개만 빼놓고는 다들 고만고만해 보이고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 놈의 60갑자 내공, 쉽게도 얻는다. 얼씨구 이 자식은 또 여자가 꼬이네, 씨발 또 주화입마야? 도무지 책에 집중할 수 없는 자신을 느끼고 괴로움에 빠졌지만 곧 새로운 장르에 푹 빠져들었다. 이번엔 환타지였다. 송유환은 요즘 이유 모를 짜증과 무기력함에 젖어 있었다. 그냥 사는 게 무료하고 허탈했다. 게다가 이제껏 친하게 잘 지내왔던 친구 김인성이 이유없이 몹시도 미워져서 내가 왜 이러나 하는 자책감도 들기 시작했다. 유환이 하도 짜증을 내다보니 인성이 "뭐냐? 생리하냐?"라고 농담을 걸었다가 대판 싸운 것은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도 의아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저 세계에서 사이 좋은 동업자였다가 김인성의 배신에 의해 쫄딱 망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정민태와 김형석, 그리고 안진영들은 전보다 더 친해졌다. 원래도 사이 좋은 애들이었지만 유난히 똘똘 뭉쳤다. 그러던 가운데 민태가 한도훈에게 괜히 친한 척 말을 걸고 밥도 같이 먹자며 제안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세 명이 쪼르르 달려와서 같이 매점이나 가자고 권유하는데 도훈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왕따가 된 부반장을 동정하는 거 아니냐고 갖잖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보기엔 심드렁한 표정의 도훈이 민태들과 놀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오세준 패거리는 학교에 오지 않은 날이 더 많아졌다. 그 중 임경철 혼자만 학교에 나왔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끔 1반의 분위기 메이커로 나설 땐 사정없이 아이들을 웃기기도 했던 그였고 그래서인지 비교적 아이들이 위화감을 덜 느낀 상대였다. 이렇게 오세준무리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오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다른 아이들과 동화되어 버렸다. "그 자식 좀 이상해졌어. 솔직히 난 겁나서 같이 못 어울리겠더라." 가끔 아이들이 왜 오세준과 같이 다니지 않냐고 물으면 임경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난 연장 들고 설치는 싸움판은 사양이야. 이 나이에 감방 가기는 싫다구."라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거의 열흘 만에 학교에 온 제하는 등교하던 날, 반 아이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무사귀환 축하!] [잠자는 왕자님, 공주의 키스는 누구?]같이 분필로 갈겨댄 장난스러운 글귀가 책상 위에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이걸 치우는 건 나란 말이다!" 하고 투덜거리는 제하의 등을 친구들이 팡팡 두들기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반장은 아직이야? 같이 퇴원했다며..." 제하의 친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하는 일순 얼굴이 굳었지만 금새 표정이 풀려서는 "음...그게...몸이 좀 안 좋은가 봐" 하고 얼버무렸다. 식은땀이 흐르는 제하를 눈치채지 못한 아이들은 턱을 괴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너 누워 있는 사이 한번 문병 갔었어. 그냥 보면 잠자고 있는 것 같은데 의식은 없다니 의사들이 돌팔이가 아닌가 의심도 했지. 진짜 잠자는 왕자가 따로 없었다니까." "가는 김에 반장 얼굴도 보려고 했는데 반장이 입원한 방은 무슨 특실인가 뭔가 그렇다며? 면회도 안된다고 해서 결국 그냥 왔지. 뭐." "근데 윤승호는 아직 퇴원도 안 했다더라. 명색이 같은 반인데 찾아갈까 하다가...제하 너랑은 입원한 병원도 다르고 또 민태네가 갔다 온다기에 우린 그냥 가만히 있었지. 솔직히 그 자식 맘에 안 들지만 아직도 의식 불명이라니 그건 좀 불쌍하다 그지?" 제하는 친구들의 말에 "으응..좀 그렇지." 하고 대꾸했지만 사실 기분은 굉장히 착잡했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와 버린 친구들을 보면서 '너네들, 정말 완전히 잊어 버린 거냐?' 라고 속으로 소용없는 물음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아직도 현실에 와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다시 그 괴상한 세계의 사막에서 눈을 뜨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들었고 어떤 때는 악몽도 꾼다. 부모님의 얼굴도 친구들의 얼굴도 마치 몇 개월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그렇게도 원하던 원래의 세계였다. 하지만 제하의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 승호가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은 하얀 천정이었다. 삐익삐익 소리를 내는 기계소리와 병원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난다. 승호는 자신이 입고 있는 환자복을 확인 하려는 듯이 소매를 들어 올려 옷자락에 규칙적으로 정렬된 @@병원이라는 문구를 응시했다. 현실로 돌아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하얗고 네모진 병실 안에서 가습기의 김이 뿌옇게 뿜어져 나온다. 한쪽 탁자엔 꽃병이 예쁘게 세팅되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문득 발치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엎드려 계셨다. 언제나처럼 예쁘게 손질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질끈 동여맨 어머니의 머리모양이 승호는 낯설게 느껴졌다. 잰틀맨으로 부하직원에게 인기 많은 아버지의 머리는 며칠간 감지 않아 기름기가 흐른다. 부모님의 정수리를 보는 것이 처음 같다고 생각하며 승호는 두 사람을 한참동안 내려다 보았다. 가만히 손을 뻗어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자신의 손조차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으음....응?" 승호의 어머니가 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다. 초췌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아들의 얼굴에 그녀의 표정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병실 안에 어머니의 울음 섞인 비명이 메아리쳤다. "승호야---!!!!" 아내의 외침에 놀라 잠에 서 깬 승호의 아버지 역시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 다 승호의 얼굴을 만지고 손을 쓰다듬으며 오열을 한다.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병실로 달려온 간호원들과 의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승호를 바라 보았다. 승호는 말없이 두 분의 오열을 받아 들였다. 자신의 가슴도 미어질듯한데 왠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몸은 괜찮냐?" "예." "병원에선 별다른 이상 없대고?" "예." "수업 듣다가 정 힘들면 조퇴해도 된다." "예." 여전히 초췌한 얼굴의 담임은 자신보다 더 생기 없는 승호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승호가 조용히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가자 주변의 선생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저애예요? 다른 애들은 다 퇴원했는데 계속 입원해 있었다는 애. 이제 퇴원했으니 장선생도 한시름 놓았겠어요." "그런데 원래 저렇게 생긴 아이였나요? 그...뭐냐...굉장히 삭아보이는데..." "어머, 삭아보여요? 제가 보기엔 그냥 어른스러워 보이던데요." "그나저나 그 반 반장은 언제쯤 다시 등교한대요? 반장이 없으니 부반장이 대신 그 일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 한도훈이었나? 지난번 일로 의기소침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또릿또릿하게 잘해서 놀랐어요." 승호네 담임에게 모여들던 선생은 어느새 수다에 빠져 "아무튼 인재란 인재는 다 장선생네로 갔어."라는 둥,"대신 오세준이가 골치 썩히잖아요." 라는 둥 나름대로 농담이랍시고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했다. 하지만 승호네 담임은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교실 안에선 승호의 친구들이 소란을 떨며 승호를 맞이 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민태를 보고 진영이 오바하지 말라며 놀렸지만 본인도 약간 울컥해지는 감정이 들었다. 생각보다 승호의 혼수상태가 오래 갔기 때문에 걱정하는 마음이 컸던 탓도 있지만 이유 모를 알싸한 감정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웬 일로 자리에서 벗어난 한도훈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묵묵히 퇴원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승호의 얼굴은 물기 없이 바삭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문병 갔을 때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승호에게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야,야, 그 병원에서 치료는 제대로 한 거냐? 너 기절해 있는 동안 포도당 주사는 제대로 맞힌 거 맞아? 얘 왜 이리 얼굴이 반쪽이 됐어?" "우리 봐라, 똑같이 사고를 당하고도 볼에 탱탱하게 살이 올랐는데 이건 완전히 좀비잖아! 어이구 승호야, 니 머리결이 비단결이었는데 이게 뭐냐!" 호들갑을 떠는 민태와 진영, 형석은 잿빛으로 푸석푸석해진 승호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안타까워했다. 조용한 아침자습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그들이 떠드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다. 제하 때와 같은 열렬한 환호는 없었지만 흘끔흘끔 승호를 바라보며 저들끼리 "다행이네."하고 소곤거리기도 했고 "그냥 계속 누워 있지 뭣하러 학교는 나온대냐."하는 가차없는 말도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승호는 친구들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가죽을 기워 만든 옷에 허리에 단도와 수통, 작은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길드원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교복 차림의 친구들이었다. 오죽하면 오랜만에 보는 교복이 낯설게 느껴질까. 긴 머리의 카이 대신 안경 쓴 한도훈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했고 정말로 원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어...팔은?" 한도훈의 팔에 기부스가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승호가 물었다. 한도훈은 작게 웃으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다 나았다고 하더군." 이라고 말하며 다쳤던 팔을 흔들어 보였다. 한도훈의 얼굴이 좋아보여서 승호는 마음이 놓였다. 언제나 눈가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피곤한 모습의 카이를 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렇게 생기 넘치는 한도훈의 모습은 더 밝아 보인다. 작게 웃으며 제자리로 가려던 승호는 문득 교실의 뒷편이 휑덩그레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세준, 박재석, 김한수, 강지원의 자리가 비었다. 임경철은 맨 뒷자리에서 다른 녀석들과 수다를 떨며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고 승호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손을 들어보인다. 그리고 유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제하가 안절부절못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교시가 시작하기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 승호는 조용히 제하에게로 걸어갔다. "묻고 싶은 얘기가 있어." 승호는 민태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한 뒤 제하만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가을 하늘은 맑고 높았다. 스산한 아침바람이 옥상 위를 싸늘하게 훑으며 지나갔고 바닥의 먼지가 낙엽과 함께 뒹굴었다. 승호는 이렇게 제하와 옥상 위에 단 둘이 있으니 학기초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그때 제하가 자신에게 창조자가 아니냐며 따져 물었던 것을 떠올리니 쓴웃음도 나왔다. 제하는 철조망이 쳐진 옥상 끄트머리에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호는 그 뒷모습이 매우 침울하다고 느끼며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제하였다. "묻고 싶은 게 뭔데?" 고개를 돌린 제하의 얼굴은 저 세상에 있었을 때보다는 훨씬 혈색이 좋았다. 그러나 깊게 가라앉은 눈은 더욱 음울했고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 "내가 떠나고 나서.... 그 후에 내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제하의 눈이 번뜩인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네 손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나한테 물어 봐?" "아니...알고는 있어. 그 세계가 없어졌다는 거...이젠 확실히 느끼고 있어... 하지만 그 세계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그래서 물어 보는 거야." "아하~ 버려둔 강아지의 임종이 궁금하시다?" 본의 아니게 비꼬는 어조로 말이 튀어 나갔다. 승호는 제하의 칼날 선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고 제하는 자신의 혀를 저주하며 "제기랄!"하고 낯은 욕설을 내뱉었다. 애꿎은 철조망을 팡팡 치던 제하는 물끄러미 승호를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 부석부석하게 말라버린 피부. 갈라터진 입술과 잿빛으로 빗자루마냥 뻣뻣한 머리는 예전 승호의 모습이 아니었다. 적어도 5년은 나이 들어 보인다. "그 꼴은 뭐냐. 다들 피부가 탱탱해져서 미남으로 거듭났구만, 왜 너만 그렇게 말라 비틀어진 고목 나무처럼..." 어느 순간 제하의 입이 벌어져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뭄의 논바닥 마냥 갈라진 승호의 입술이 유난히 거슬린다. 기분 나쁜 예감을 하던 중 승호가 제하의 예감에 확인사살을 했다. "그래. 난 이제 창조자도 뭣도 아냐. 내 힘은 다 사라졌어. 지금은 그냥...왠지 허전하고 가슴 아픈 상실감만 남아 있는 빈 껍데기일 뿐이야."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억지로 웃는 승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부서질 것 같았다. 제하는 허탈한 듯 "이런..."하고 숨을 내뱉었다. 철조망의 성긴 틈새에 넣은 손가락을 강하게 움켜쥐고 우울한 눈으로 승호를 바라본다. "그건 세상의 종말이었어." 철조망이 구부러지고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승호가 표정 없는 얼굴로 제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네가 뛰어 내리고 잠시 후 엄청난 지진 같은 게 있었어. 산이 무너지는가 싶었지. 그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니 빌어먹게도 잘 보이더군. 사막의 바닥이 여러 갈래로, 마치 종이 찢어지듯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라구. 그리고...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어." "그게 바다였는지 뭔지는 모르겠지만..."하고 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승호를 향해 조용히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 했다. "바다라고 생각했던 붉은 물질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어 내가 서 있던 절벽뿐만 아니라 반대쪽, 저 멀리 지평선 끝에 있던 산맥 너머로도 붉은 액체가 솟아 오르더군. 그래, 사방에서 그 기분 나쁜 액체가 솟구쳤어. 하늘로 뻗어 올라 태양을 가리고 시야를 가렸지. 그리고는 끝이야. 그대로 감싸듯 우리가 있던 세상 위로 쏟아져 내렸어. 시뻘겋게 날름거리는 액체에 휩쓸려 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떴을 땐 병실이었다." 승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고 갈라진 입술에선 피가 나왔다. "너는 그 세계를 버린 거지." 차분한 음성이 승호의 귀를 때린다. "창조자에게서 버림받은 세계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넌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거야." 찬바람이 불었다. 계절은 가을이었지만 이미 저 세계에서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거친 두 사람에게는 현실의 가을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느낌을 주었다.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많은 생명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는지 알아." 승호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표정과 어조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멍했다. "루센도, 테이그도 길드원들도 이제 어디에도 없어. 나를 보살펴 주었던 마이엘과 바투와 라한, 철물점 식구들, 하다못해 얄밉던 벨미르마저도 이제 없어. 죽었다? 아니 조금 달라. 완전히 사라진 거야. 전부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중얼거리듯이 나오는 대로 말을 쏟아냈다. 제하 앞에서가 아니면 이런 대화는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쭈욱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나 때문에 한 세계가 없어졌어. 내가 만들었지만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선 안 될 생명들을 내 멋대로 꺼트렸어. 그런데 김제하, 이상하지? 눈물이 하나도 안 나와. 그냥 가슴만 답답해. 내가 슬퍼하는 건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자신의 손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승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하는 그 무덤덤한 얼굴이 기분 나빠서 인상을 썼다. 초점 없는 승호의 얼굴은 감정 없는 인형 같았고 혹은 긁으면 부서져 내리는 모래가면 같기도 했다. 비록 승호의 혼란이나 감정이 잘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기가 느껴지지 않아..." 제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승호의 얼굴을 건드려 보았다.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피부지만 막상 만져보니 조금 차갑고 거칠기만 할 뿐 사람의 피부임에는 분명하다. 머리카락의 윤기도 완전히 사라지고 눈동자마저도 건조해 보인다. 전신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마냥 거칠고 딱딱했다. "대체...왜 이렇게 된 거야? 아직 겨울도 아닌데 하얗게 트고 갈라졌어." "글쎄...모르겠어. 힘을 다 써서 그런가? 그래도 처음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진 거야." 악건성의 피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던 제하는 자기 행동에 흠칫 놀라 손을 거뒀다.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 승호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든다. 붉은 에너지로 숨막히게 하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있었을 때보다도 지금처럼 맥이 하나도 없고 일반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에너지마저도 말라버린 승호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히 능력을 잃은 승호를 보며 묘한 열등감의 해소를 느끼는 자신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그런데...진유현은?" 잠시 머뭇거리던 승호가 어렵게 입을 뗀다. 아까의 담담했던 태도와는 달리 눈에 약간 생기가 도는 모습은 제하를 불러 낸 본래 목적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승호의 작은 행동에도 신경을 기울이던 제하는 유현의 이름이 나오자 표정이 일순 차갑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얼굴이 얼어버리기라도 했는지 말문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타격이 큰 것 같아. 다른 친척들이나 친구들의 면회도 거절하고 있어. 상태는 안 좋지만 전문의의 치료를 거치면 차차 나아지겠지. 너의 그 피부도 많이 나아진 거라며? 그러니까 유현이도 많이 좋아질 거야" "전문의? 그렇게 심해? 어딘가 외상이 있을 리는 없을텐데..."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승호의 얼굴이 부담스럽다. 제하는 초조한 듯 입맛을 다시며 유현의 상태를 떠올렸다가 지그시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금의 유현의 상태를 승호에게 알리기가 싫었다. 저쪽 세상에서 승호와 지나치게 가까이 있었고 이쪽 세상으로 오기 직전의 원념이 너무 강했다. 그랬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유난히 후유증이 오래 가는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곧 안정을 되찾아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거라고 제하는 믿었다. "그냥...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분명히.. 그 자식은 자아가 강한 녀석이니까..그러니까.."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듯 중얼거렸다. 승호는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지만 제하 본인이 말해주고 싶지 않은 일을 굳이 캐낼 생각은 없었다. 예비종이 울리고 있었다. "곧 1교시 시작하겠다." 돌아 가자며 승호가 먼저 발길을 돌렸지만 제하는 옥상의 시멘트 바닥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승호가 "제하야?"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승호를 망연히 바라본다. "그래...반드시 좋아질 거야....." 누구에게 향하는 건지 모를 말을 조그맣게 읊조리던 제하는 자신이 승호에게 무언가 구하고 있는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제하는 자신의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유현을 시골의 요양소로 보내버리겠다는 진유현 아버지의 발언은 제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것이 홧김에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현의 상태가 이대로 지속되면 시골이 아니라 치료를 목적으로 어디 해외 먼 곳으로 보내버릴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제하는 교실 중간쯤에서 떠들고 있는 민태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승호의 자리 근처에서 새로 나온 게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중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은 민태와 형석이, 진영이였지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윤승호와 그 주변의 다른 녀석들이었다. 이야기는 점점 커져서 결국 민태네 집으로 다 같이 놀러 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아, 나 오늘은 안 돼." 생각났다는 듯이 승호가 입을 열었다. 민태가 아쉬워 하며 "왜?"하고 묻자 승호는 그 부석부석한 뺨을 살짝 긁적였다. "어머니랑 피부과에 가는 날이거든. 일주일에 두 번은 가야 해." "아! 너 피부가 전신 악건성이랬지. 그런데 너 전에는 꽤 괜찮은 피부였잖아?" "사람 피부타입이란 건 변하기 마련이야. 우리 누나도 고등학교 때 여드름으로 고생하다가 지금은 완전히 다 없어졌는 걸?" "야,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하루 아침에 바뀌냐?" 화제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승호 앞자리의 장현성은 여드름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며 괴로워 했고 형석이가 혀를 차며 "여드름은 치료하면 낫는다지만 피부 까만 건 어째야 하냐?"하면서 자신의 까만 얼굴을 한탄했다. 승호는 희미하게 웃으며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제하의 기분은 편치 않았다. "부탁할 게 있어." 병원 예약시간 때문에 마지막 교시를 조퇴하고 학교를 나가려던 승호 앞에 실내화 차림의 제하가 나타났다. 신발로 갈아 신던 승호는 멀뚱멀뚱 제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제하는 "잠깐이면 돼."라고 말하면서 승호를 학교 건물 뒷편으로 데리고 갔다. "부탁...이라니?" 제하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진유현 이외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유현 일이라면 더더욱 승호와 연관되는 것을 싫어하는 제하였기에 의문만 커졌다. "이런 말...미안해서 차마 못했는데...." 제하가 고개를 숙였다. 풀 죽어서 숙인 고개가 아니라 승호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숙인 고개였다. 승호는 제하의 정수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놀랐다는 표시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유현이를 만나줘." 고개를 들어올린 제하의 표정이 간절하다. 승호는 별다른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고작 유현을 만나러 가는 일인데 저렇게 비장하게 부탁해야 할까 싶은 기분도 들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승호의 승낙에 제하는 오히려 당황했다. "그..그 자식 상태가 좀 안 좋아서...네가 위험해 질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나를 위험하게 내버려 둘 거야?" 무 덤덤히 흘러 나오는 말에 화들짝 놀란 제하는 뻣뻣이 굳어서 입만 벙긋거렸다. 승호의 표정은 제하의 조심스러운 경고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덤덤한 표정으로 빤히 제하를 바라보던 승호는 "언제쯤 가면 돼?"하고 물었다. 제하는 얼떨결에 "으..으응 빠를수록 좋은데..."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번 주 토요일로 날짜를 정했다. 제하는 본관 입구에 서서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 승호를 바라보았다. 교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뒷모습은 평온하고 안정되어 보였다. 승호와 제하는 택시를 타고 구불구불한 주택가를 한참 기었다. 제하의 설명에 따라 길을 꺾어져 올라가던 아저씨는 이쪽 길로 들어가면 나올 때 손님이 없다며 투덜댔지만 아직 고등 학생인 제하에게 더블요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큼직하고 예쁜 집들이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여 띄엄띄엄 서 있는 동네는 인적도 드물고 버스조차 들어오지 않아 대낮에도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여기가 유현이네 집이야." 택시를 보내고 시커먼 철문 앞에 선 제하가 대문 옆의 인터폰을 눌렀다. 작은 카메라가 제하의 얼굴을 인터폰 너머의 누군가에게 전달하자 "예. 들어와요."하는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 나왔다. 제하는 승호도 왔다고 이야기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어느새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그냥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푸릇한 잔디밭에 일정한 간격으로 평평한 바위가 박혀 있었다. 마치 징검다리 같은 돌 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깨끗이 다듬어진 정원수와 작은 연못이 보였다.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나무들과 고풍스러운 가로등을 뒤로 하고 대리석의 계단을 올랐다. 계단 가에 장식된 화단이며 관목이 예쁘기는 했지만 집 현관과 대문이 멀어서 지각할 때는 큰일이겠다고 승호는 생각했다. "원래 대문으로는 잘 안 다녀. 차고를 통해서 바로 집 밖으로 나가는데... 뭐 한가할 때는 여기 정원을 걷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풀리니까..." 침묵이 불편했는지 제하가 중얼중얼 떠든다. 과연 이런 집이면 요양소로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며 승호는 서울 한복판의 전원주택을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그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냉소적으로 보여서 제하는 승호가 행여나 불쾌해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현관 앞에는 고용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와 있었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제하는 긴장을 했다. 지금이라도 승호를 데리고 나가버릴까...하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갈등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제하의 발은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그런 제하를 승호가 따라오고 있었다. -쨍그랑-!!!! -와장창창--!!! "으아아아아아아악-!!!!!!!!" 낯익은 목소리가 공기를 파열시켰다. 눈을 둥그렇게 뜨는 승호를 뒤로하고 제하가 주먹을 꽉 쥔다. "또...발작이 시작됐나요?" "으응. 제하 학생이 오기 전부터 저랬어. 아까 진의원님이 들어 가셨는데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아." "유현이...아버지께서요?" 제하가 아무도 없는 이층계단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위에서 알아 들을 수 없는 고함소리가 흘러 나온다. 상당히 여러 사람들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다. "꽉 잡아!" "조심해!"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였다. "스, 승호야 좀 안 좋을 때에 왔나 보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가고 다음에......" 식은땀을 흘리는 제하가 안쓰럽다고 생각하며 승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뒤이어 진유현의 목소리가 분명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 들었다. "윤승호 데려와아아-----!!!!!!" 제하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승호는 눈을 굴리며 "나를 부르는데?"하고 태평한 얼굴로 이층을 가리킨다. "올라가봐도 될까?"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유현의 비명이 다시 한번 온 집안에 울렸다. 제하는 저 목소리를 듣는 것만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데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하는 승호가 굉장히 낯설어 보였다. "위험하면...나랑 아저씨들이 어떻게든 막아 볼게." 눈을 꾹 감았다 뜬 제하가 결심을 굳힌 듯 승호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도 거실처럼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비명이 들려오는 것은 더 안쪽,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곳이었다. 빠끔히 열려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일층에서 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소음이 귀를 쩌렁쩌렁 울렸다. "놔아아아아---!!!!" 문 안에는 작은 대기실마냥 길다란 소파가 놓인 공간이 있었다. 안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 방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당황한 남자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놔! 내가 찾으러 갈 거야! 내가 그 자식 끌고 오겠다구-!!!" "문간호사 그 쪽 팔, 그 쪽 팔 꽉 잡아!" "환자가 유리조각 밟지 못하게 조심해!" "진정제! 진정제는 어딨어!!" 가구도 별로 없어 널따란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바닥으로 온갖 식기와 링겔병, 주사기 따위가 깨져서 굴러 다녔다. 음식물이 쏟아져 여기저기 흩어졌고 군데군데 혈흔도 보인다. 침대 위에는 몸부림치는 유현과 그런 유현을 힘으로 누르려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남자 간호사들이 있었고 유현의 팔뚝은 링겔 바늘이 빠져나가면서 흘러 나온 혈액으로 피범벅이 되었다. 부산하게 바닥의 유리조각을 치우는 다른 남자 간호사들의 옷도 유현의 피로 점점이 얼룩져 있었다. "아버지---!!!! 당신, 당신이라면 고등학생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호적까지 말살해서 데려 올 수 있잖습니까!!! 팔을 부러뜨리든 다리를 부러뜨리든 좋으니까 당신 그 잘난 힘으로 내 앞에 끌고 오란 말입니다-!!!" 한쪽 벽에선 중년에 정장을 입은 남자가 꼿꼿이 서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반백의 머리카락으로 상당히 근엄한 인상이었지만 자신을 향해 악을 써대는 유현의 모습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신이 못하시겠다면 내가 합니다! 내가 그 자식 잡아 오겠다구요! 어째서 묶어두는 겁니까! 난 가야한단 말입니다--!!!" 이 광경에는 줄곧 무덤덤하던 승호도 굉장히 놀라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식은땀도 흘렀다. 하지만 제하가 보기엔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약간 벌린 정도에 불과했다. 승호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최근엔 늘 창백한 얼굴이었기에 대체 얼마나 놀란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꼿꼿이 서 있던 중년의 남자는 더 이상 못 보겠는지 반쯤 열려져 있는 문을 박차며 의사와 함께 방을 나왔다. "저게 누군가! 저게 내 아들 진유현이 맞단 말인가?! 머리에 이상이 없다니 병원의 진단을 믿을 수 있어?!!!!" 몇 번이나 본 광경이지만 날이 갈수록 유현의 발작적인 상태는 심해졌다. 아들의 모습에 분노를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던 남자는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제하를 발견했다. 제하는 어색한 얼굴로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남자에게 인사했다. "아, 제하 왔구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억지로 웃어보이는 남자의 이마 위엔 땀이 맺혀 있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이 많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유현과 닮아 있었다. "인사해 승호야. 유현이 아버님이셔. 아저씨, 얘가 윤승호에요." "안녕하세요." 남자의 눈이 예상치 못한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승호에게로 고개를 돌린 그는 부릅뜬 눈과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만 펴진다면 좀 더 미남으로 보일 얼굴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표정관리가 되지않고 있었다. "자네가..." 부들부들 떠는 솥뚜껑 같은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 온다. 좀비가 다가오듯 천천히 승호에게로 다가온 그는 양 손을 승호의 어깨에 올려 놓고 꽉 움켜쥐었다. "자네가...윤승호인가? 대체...대체 우리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유현의 아버지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제하보다 약간 큰 키에 비리비리해 보이는 체구. 농담으로라도 유현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할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 나쁜 얼굴이다. 정치판에 있으면서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눈 앞의 아이는 가늠하기 힘든 인상이었다. '저 얼굴이 고등학생이라고?' 승호의 얼굴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것은 피부가 지독한 건성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세상 험한 일은 다 겪은 듯한 얼굴은 가끔씩 자신도 놀라곤 하는 제하의 어른스런 얼굴과도 닮아있었다. 어찌보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얼굴 같기도 했다. "아니에요. 승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제하가 승호의 어깨로 파고드는 남자의 손가락에 가만히 손을 얹어 진정시켰다. 무의식 중에 힘을 줘버린 자신에게 놀라며 유현의 아버지는 손을 거뒀다. 승호의 어깨에 손가락 자국이 나 있는 것이 못내 거슬렸는지 "미안하구나. 내가 좀 흥분했다."하며 툭툭 털어준다. "그런데 제하군. 지금 유현군과 이 아이를 만나게 하는 것은 위험할 것 같구나." 옆에서 나이 든 의사가 한마디 했다. 지금도 "윤승호 이 자식--!!"하고 목놓아 부르는 유현을 말리느라 남자 간호사들이 땀 뻘뻘 흘리는데 승호 본인이 나섰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 의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괜찮아요. 들어가 볼게요." 걸음을 옮기는 승호의 앞을 덩치 큰 간호사들이 막는다. 유현의 아버지는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손짓으로 승호를 들여 보내 주라고 지시했다. 승호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제하와 유현의 아버지, 의사가 들어 왔다. "이거 놔! 놓으라구우---!!!!! 진정제를 담은 앰플이 죄다 깨어진 바람에 서너 명의 건장한 남자 간호사들이 억지로 유현을 침대에 묶고 있었다. 침대에 고정된 유현의 옆에서 한 남자 간호사가 재갈을 물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틈에 방금 문 밖을 나섰던 유현의 아버지가 있는 것을 보고 얼른 손을 거뒀다. 유현은 도리질을 치며 침대 위에서 힘겹게 반항하고 있었다. "...그거 풀어줘 봐." 유현의 아버지가 승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남자 간호사는 머뭇거렸지만 의사가 눈짓으로 종용하자 기껏 묶어 두었던 유현의 팔다리를 억울한 마음으로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현이 몸부림을 치면서 턱과 배를 가격한다. 남자 간호사 둘이 각각 턱과 배를 움켜쥐었다. 유현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침대 아래로 뛰어 내렸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승호를 확인하고 그대로 동작이 멈췄다. "안녕?" 승호가 멋쩍게 웃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가장 무난한 말을 꺼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녕하냐고 묻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승호는 딱히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다시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넸지만 유현은 그대로 멈춰 서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간호원들이 여차하면 유현을 붙잡으려는 제스츄어를 취했지만 의사가 말린다. 유현은 빤히 승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미소 짓는 승호의 얼굴이 거짓말 같았다. 혹시 저것은 아버지가 고용한 가짜가 아닐까 하는 망상도 해본다. 어쩌면 자신이 드디어 미쳐서 환각을 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윤승호?" 유현이 천천히 다가 오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반사적으로 움찔했고 손을 흔들던 승호도 유현에게로 걸어갔다. "살 많이 빠졌네." 그렇게 말하며 바라 본 진유현의 얼굴은 유쾌한 몰골이 아니었다. 평소에 별로 크다고 생각한 적 없던 진유현의 눈가는 움푹 꺼지고 퀭해서 눈망울도 커보였다. 그 눈망울에 어린 물기는 진유현 답지 않았고 부산하게 굴리는 눈동자도 진유현답지 않았다. "이거...진짜야....?" 믿어지지 않는지 유현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저 환영에 손가락이 닿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이 겁나서 만지려고 뻗은 손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다가 앙상한 손끝이 승호의 콧잔등에 닿았다. 콧잔등과 인중, 입술을 쓸어 내리던 팔이 작게 경련했다. 푹 꺼진 눈두덩이 안에서 잔뜩 부릅뜬 눈동자는 검은자위보다 흰자위의 면적이 월등히 넓을 만큼 팽창되어 있었고,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마른 혀가 비쳤다. 목이 타는지 하얗게 튼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지며 툭 불거져 나온 목젖이 위 아래로 움직인다. "지..진짜다...진짜 윤승호..." 순식간에 덮쳐오는 힘에 승호는 일순 뒤로 넘어질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서 있었지만 몸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고 위에서 짓눌러 오는 우악스러움에 허리가 꺾일 것 같았다. 목 뒤로 두른 유현의 팔 근육이 심하게 요동 치며 부들거렸다. 승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고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를 연발하는 유현의 눈엔 아버지도 제하도 의사와 간호사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에 닿은 승호의 어깨를 부수어 버릴 듯이 강한 힘으로 부둥켜 안고는 머리며 얼굴이며 손바닥으로 문질거리면서 승호의 온몸을 주물러 터트리려는 듯이 더듬었다. 승호는 남 보기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어깨가 좁았나?' '이 녀석이 원래 키가 이거 밖에 안됐나?' 햇빛에 그을은 건강한 피부도, 오랜 전장생활에서 얻은 생존을 위한 단단한 근육도 유현에겐 없었다. 침대에 누워 요양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퇴원 후 집에 갇혀있던 진유현은 감정소모가 극심했고 영양이 불균형해서 몸은 말랐다. 악밖에 남지 않은 정신력이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다가 단번에 허물어 졌다. 승호는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떨리는 유현의 팔이 낯설다. 유디스였다면 울었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진유현과 유디스를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인지 이미 저쪽세계에서 죽고 싶을 만큼 실감했다는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보고 싶었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던 유현이 승호의 뺨에도 부벼왔다. 조금 당황한 승호는 유현을 떼어내려 했지만 얼굴이고 목이고 유현의 눈물로 범벅이다. 이마와 콧잔등, 뺨과 입술 끝에 입을 맞추며 열렬하게 반겼다. 까칠한 유현의 입술이 아프게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 터진 입술로 승호의 입술을 강하게 짓누른다. 말라버린 입술과는 달리 그 혀는 굉장히 뜨거워서 서로의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목구멍으로 파고 들어오는 혀를 느끼고 깜짝 놀랐지만 승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만 굴려서 주변을 살펴보니 유현의 아버지와 의사는 물론 남자 간호사들 모두 경악으로 얼어붙어 있다. 제하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 위에서 잠을 자는 유현의 손은 승호의 소매자락을 잡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 후 한번도 진정제 없이 잠든 적이 없던 유현은 승호를 얼싸안은 채로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잠에 빠져 버렸다. 옷자락을 놓지않는 유현의 손은 힘을 주어 잡아 빼면 못 떼어낼 것도 없건마는 승호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방금 전의 소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뚝뚝한 간호사들은 유현의 발에 박힌 유리조각을 뽑으랴 피딱지가 말라붙은 팔을 소독하고 새로 링겔 주사를 놓으랴 정신 없이 움직였다. 대기실 같이 좁은 옆방에서 유현의 아버지와 제하의 대화가 두런두런 이어지고 있었다. "저 아이는 뭐냐....? 대체 유현이가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됐어..." 답답한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유현의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현이 승호의 이름을 부르며 데려오라고 난리 칠 때는 아들이 같은 반 학생에게 된통 당한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제하에게 승호가 누구냐고 묻기도 했고 나름대로 뒷조사를 했지만 서류철의 사진으로는 상대의 인상까지 알 수 없었다. "유현이의 저 반응을 이해 할 수 없구나.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댔으면서 저게 뭐냐...윤승호와 유현이는 무슨 관계야?" 제하는 가만히 유현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망설이다가 심호흡을 한번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유현이 만약 남자를 좋아한다면, 그러니까 이성으로써 남자를 좋아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꿈틀하고 주름이 일렁거렸다. 근심이 깊게 패인 이마와 눈가는 어느새 날카로워져 험악한 인상을 풍겼다. "내 새끼가 호모새끼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라며 읊조렸지만 아까의 장면을 떠올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편한 심중을 숨길 생각도 안하며 유현의 아버지는 잘라 말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야지." 제하는 쓰게 웃었다. 그런 답이 나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현이 저렇게 된 겁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러니까 저 둘은 '친구'예요." "뭐?" "아시겠어요? 유현이는 승호를 '친구'로써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거에요. 소꿉친구인 제 말도 듣지 않을 만큼. 그렇게 공을 들이던 학교 생활을 포기할 만큼이요." 유현의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우롱하는 거니? 제하야." "아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유현이 정신병원 신세 지는 것도 싫고 가족의 미움을 받는 것도 원치 않아요. 아저씨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저 둘은 아주 사이가 좋은 '친구'인 거예요. 예? 그렇게 해주세요." 그가 제하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들을 리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자는 소리다. "목놓아 부르고, 잠자면서도 헛소리로 찾아대고, 만나서는 펑펑 울고, 소맷부리 쥐어 잡고 겨우 잠드는 것이 그냥 '친구'? 얼굴 부비고 입술도 문대는 것이 단순한 '친구'라고 말하는 거냐?" 제하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유현이 승호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것은 제하 역시 가장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다. 그렇지만 유현이 앞뒤 분간 못하는 바보가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기에 이제 와서 승호를 유현에게서 떼어놓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지금 유현이 호모면 어떻고 정신병자면 어떤가. 일단은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하는 생각했다. 그것이 승호에게 어떤 불이익이 될지 알면서도 마음은 진유현에게 기운다. "아저씨..." 제하가 간절히 부탁한다. 유현의 아버지는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뜨거운 한숨이 흘러 나왔다. 한동안 작은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래....친구로 하자는 말이지....." 유현의 아버지는 헛헛하는 웃음을 내뱉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승호는 깜빡 잠에서 깼다. 잠든 유현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졸리워서 침대에 엎드려 잠을 청한 것이었는데 벌써 시간이 꽤 흘러 버렸다. 분주히 오가던 덩치 큰 간호사들이나 꼬장꼬장해 보이는 의사 선생도 옆에 없다. 방안은 고요함에 잠겨 유현의 고른 숨소리와 승호 자신이 부스럭 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승호는 일단 집에 연락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 탁자 위에 전화기가 있는 것이 보인다. '맘대로 써도 될까...'하며 잠시 망설였지만 곧 소매자락을 잡고 있던 유현의 손을 떼어내고 수화기를 들었다. 승호의 작지만 낮은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방안에 울렸다. 노을이 지기 직전의 어스름한 태양빛이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예예. 아니오 금방 갈 거에요. 예...너무 걱정 마세요." 주말에는 늘 비어 있는 집이었지만 오늘따라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친구네 놀러 왔다는 말을 남기고 아버지와 간단하게 몇 마디 한 후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아, 깜짝이야." 덤덤한 얼굴에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어쨌든 승호는 놀라고 있었다. 유현이 유령처럼 침대에 일어나 앉아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유현의 눈동자는 까맣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냐..." 자다가 깬 직후였고 지나치게 소리를 질렀던 탓에 유현의 목이 많이 쉬어 있었다. "기억 안나? 제하가 데려왔어." 승호가 물컵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나 물컵은 받을 생각도 안하고 유현은 승호를 노려보았다. 허세를 부리기 위해 작게 욕설도 읊조렸다. 그러나 눈 앞의 실체에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승호의 냄새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뜨거운 불덩어리가 단전에서부터 올라와 심장을 태우고 목구멍을 달군다. --아아 윤승호 이게 환상은 아닌 거지? 계속 보고 싶었어. 계속 네 이름을 불렀어. "흥, 고소하다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한심해 보여? 어때 윤승호. 이 모양 이 꼴이 된 나를 보고 맘껏 비웃으니 속이 시원하던가?" --네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 네 얼굴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하아...이렇게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거리인데...조금만, 조금만이라도 그 몸을 만져서 감촉을 느끼고 싶은데... "나도 항상 아까처럼 발광하는 건 아니야. 평소엔 정신이 말짱하다구. 왜 실망했어? 늘 그런 식으로 발작하고 정신병자마냥 침대에 사지가 묶여 지랄댔으면 좋겠지? 미안하지만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라서 말이야." "그랬구나. 다행이네." 윤승호가 말을 한다. 눈 앞에 뻣뻣이 서 있는 인간의 형체가 환상이나 마네킹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나직하지만 뜨거운 숨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 사실이 유현을 미치도록 흥분하게 만들었지만, 대뇌에서는 유현을 현실에 안주하게 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능숙하게 단련된 세치 혓바닥을 열심히 채찍질한다. 팽창하는 욕구를 억누르기 위한 가학적인 폭언이 뱀과 개구리처럼 튀어 나왔다. "너...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런 씨발, 내가 좀 맛이 가서 행동이 이상할지는 모르지만 네깐 녀석하나 어떻게 못할 줄 알아? 네 놈의 뼈다귀를 분질러 버리는 거, 일도 아니야!" "그래 꼴 좋지? 마음껏 비웃으라고. 대신 나중에 눈물 쏙 빠지게 예뻐해 줄 테니까 걱정말고 학교에서 기다려. 맞는 걸로 모자라다면 뒷구멍도 귀여워 해주지. 아마 그 지하창고, 아직까지는 쓸만할 거야. 그렇지?" "네가 벌레처럼 꿈틀꿈틀 대는 거 꽤 재밌었다구. 내가 어디까지 널 밟을 수 있는지 보여 줄까? 강간따위는 시작에 불과해. 질질 짜면서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하게 만들어......!!" 승호는 제멋대로 놀리는 유현의 입술을 꼬집었다. 유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려 승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하도 황당해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승호는 유현의 입술을 부드럽게 잡아 움켜쥐며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입 좀 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너, 말이랑 행동이랑 틀리잖아." 유현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무의식 중에 승호의 옷깃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에 피가 몰리면서 손이 움찔거렸지만 이상하게 옷자락에 감아 쥔 손가락이 풀리질 않는다. 당황하는 유현을 내려다보며 승호가 천천히 유현의 입을 막은 손에 힘을 풀었다. 유현은 떨어져가는 온기가 아쉬워서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미끄러져 가는 승호의 손가락 끝을 할짝하고 혀를 대어 본 게 전부였다. -만지고 싶다! 닿고 싶다! 핥고 싶다! 그 손가락을 빨고 싶어서, 입술 사이에 혀를 넣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른다. 달아오른 몸을 숨길만한 독설도 이제 바닥이 났다. 비웃으면서 이죽거릴 여유조차 없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육체의 수은주는 욕망의 끓는 점을 향해 소리없이 올라간다. "몸은 좀 어때? 의사선생님 부를까?"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서기 위해 발길을 돌리던 승호는 뒤에서 덮쳐오는 팔에 휘감겨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등 뒤의 심장이 맥박 친다. 어깨와 목덜미의 우묵한 사이에 고개를 묻은 유현의 숨소리가 교복셔츠 한 장을 통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가지마...아무데도 가지마..." 신음하듯 토해내는 목소리에 승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약하게 경련하는 유현의 근육들이 잔뜩 수축되어 있다. 아까의 살기등등하던 기세는 오간 데없고 쇠약해진 육체가 악만 남아서 필사적으로 끌어 안고 있었다. "그래, 네가 이겼어 윤승호. 미치겠다. 너를 안고 싶어 미치겠다구. 심장이 뛰고 있는 가슴에 이빨을 박고...푸른 정맥이 보이는 손목에 키스하고...손가락 하나하나 자근자근 씹으며 빨고 싶은 내 추잡한 망상을...넌 모를 거다..." 도망가지 못하게 꾸욱 안았다. 지금 손을 놓아버리면 영영 승호를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현은 머리카락까지 쭈뼛쭈뼛해지는 공포를 느낀다. "나는 미친 것이 분명해." 유현이 약한 소리를 한다. "아버지가, 제하가, 세준이 손가락질 할 거다. 혐오하고 침을 뱉을 거다. 그래, 이제 나는 끝장이야. 그런데 너를 놓을 수가 없어." 승호의 체취에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다. 얼굴과 맞닿은 따스한 목덜미가 솜털보다도 부드럽게 느껴졌다. 거친 입술을 부비며 습한숨을 내쉰다. 감은 눈꺼풀을 귀에 비비고 부석부석한 승호의 머리카락에 자신의 이마를 문대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승호의 건조한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뻣뻣하게 서서는 유현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만 뿌리치지도 호응하지도 않는다. 시선은 앞을 향한 채 얼굴에 표정은 없다. 유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승호의 체향을 한껏 들이 마시었다. 귓가에 어렸을 때부터 계획한 미래가 산산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유현은 한숨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너와 같이 있고 싶어." 유현이 다시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시라도 승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정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것이 거의 정신병 수준이었다. 그리고 승호를 만나면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접촉하기 위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완전히 바보가 되었다. 유현의 아버지는 그날 승호에게 했던 유현의 스킨쉽에 대해 묻지 않았고 간호사들은 입막음을 해둔 후 전부 잘랐다. 요즘 승호는 학교가 끝나면 유현의 집에 먼저 들른 후 집으로 늦은 귀가를 한다. 승호의 부모님들은 굉장히 걱정을 했지만 유현의 아버지에게서 전화로 사정을 듣고 나서야 안심을 했다. 유현과 승호의 관계를 그저 친한 친구라고만 인식한 승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종종 번갈아 가며 승호를 데리러 직접 유현의 집까지 오기도 했다. "그 아이도 안됐구나. 다들 퇴원해서 건강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데..쯧쯧... 반장이었다며? 똑똑한 아이가 그리 됐으니 부모님 걱정이 크실 거야." 승호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승호의 아버지는 진심으로 유현과 그 부모를 동정했다. 자식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던 기분은 승호 아버지도 뼈에 사무치도록 경험했다. 다른 아이들은 다 깨어 났는데 승호만 죽은 듯이 누워 있었을 때는 이것이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네 친구가 진의원의 아들일 줄은 몰랐다. 아빠가 사업해 봐서 좀 아는데 그 사람 인맥이 보통이 아니야. 그 자식들도 한가닥 할 거라고 업계에서 말이 많은데..." "한번 유현이네 들러서 식사라도 하시지 그래요. 걔네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승호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과 본의 아니게 친분을 맺게 되어서 들뜨기는 했지만 긴장이 되고 걱정도 되었다. 똑같은 사업가라 할지라도 승호 아버지의 작은 회사는 권력이나 뒷공작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런 정치인과 연을 맺는 건 오히려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대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 아빠는 부담스럽기만 하구나." 한숨을 쉬며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승호는 의외로 아버지는 소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들썩들썩하다. 교문 앞으로 경찰차들이 왔다 갔다 하고 학교주변의 치안은 엉망이 되었다. 중간고사 기간부터 시작 된 고등학생들의 세력싸움은 절정을 맞이해 한바탕 파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그 파란의 중앙에 서 있는 것은 오세준이었다. 오세준이 이끄는 패거리들은 강지원, 김한수, 박재석을 제외하면 모두 타학교의 학생이거나 나이는 미성년자이되 학생이 아닌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린애들 세력다툼의 중심에 자기네 학생이 있다는 것은 학교로서도 이만저만 골치가 아니다. 담임에게 들어오는 압력도 무시 못한다. 장선생은 벌써 몇 번이나 경찰서를 들락날락 했는지 모른다.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교무 회의에선 이미 자퇴 아니면 퇴학이라고 결정 내린 상태이다. "여어~ 윤승호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학교에 얼굴을 들이댄 오세준이 화장실에서 승호를 보고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주변의 아이들이 오세준을 슬금슬금 피하자 화장실은 금방 한산해진다. 손을 씻고 있던 승호는 얼굴이 푸르딩딩한 오세준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어딘가에서 진탕 싸움박질을 한 흔적이 역력한 얼굴은 반창고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너 뭐냐? 안 본 사이에 폭삭 늙었구나. 유현이가 많이 괴롭히디?" 키득키득 거리며 다가오는 폼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불안정했다. "소식은 들었다." 세준이 승호의 곁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교실로 돌아 가려던 승호의 앞은 가로 막혔고 세준은 비킬 생각을 안 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승호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 댄 세준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유현이가 네 놈의 개가 됐다며?" 세준의 눈이 기분 나쁘게 번뜩거린다. 지척에 세준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지만 승호는 가만히 번뜩이는 세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오세준의 눈은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면회도 안 되고 밖에 외출도 안 나온다고 하더군. 제하가 그러는데, 다른 사람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며 진유현은 한동안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 제하를 다그치며 진유현의 소식을 물었을 때 오세준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은 그 자리에 굳어 있어야 했다. "승호를 보면 달려드는 폼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라며 한숨 쉬던 제하의 말을 자신이 잘못들은 건 아닌가 하고 귓구멍을 후비기도 했다. 제하가 세준에게 새삼 유현의 감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진유현이 윤승호를 짓밟을 땐 항상 옆에 오세준 무리가 있었고 유현을 관찰하던 오세준이 그 속마음을 알아채는 건 금방이었다. 단정하고 칼 같던 유현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흐트러지는 모습에 흥미를 느낀 것도 사실이다. "것 참 웃긴 일이네. 학교를 안 나오는 쪽은 네가 됐으면 됐지 설마 진유현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걸? 그래, 윤승호 너도 참 비위 좋구나. 그 자식이랑 용케 같이 있네. 뭐야 동정이야? 아니면 고소하다고 비웃는 거냐? 복수의 기회라도 노리는 거야?" 비웃음은 섞여 있었지만 은근슬쩍 승호의 의중을 떠 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평소에도 흠칫흠칫 하고 자주 놀라는 승호인 만큼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무언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승호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런 거 아니야."라고 말하고 나서야 세준은 지금 승호가 자신을 무서워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너...." 히죽거리던 오세준의 얼굴이 드물게 차가워졌다. 비록 표현은 다를지라도 진유현을 걱정하는 마음은 오세준도 제하와 다를 바 없었다. 승호와 유현이 매일 만난다는 얘길 들었을 땐 드디어 유현이 승호를 꼬시는 데 성공한 거라고 혼자 키득대기도 했다. 겁 많던 윤승호가 어떻게 넘어갔는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 온 건데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친다. "오세준! 여기 있었냐! 은광고 애들이 기다린다고!" 화장실 안으로 강지원과 박재석, 김한수가 들어왔다. 그들은 승호의 얼굴을 보더니 대번에 안색이 변한다. 그 표정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승호가 저들을 괴롭힌 줄 알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 금방 갈게." 승호의 몸을 덮치듯 막아 서던 세준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져 승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지만 빗자루처럼 부석부석한 머리카락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라보이는 볼 살 때문인지 승호가 낯설어 보였다. "아무튼 유현이랑 친하게 잘 지내라구. 이 몸은 오늘 이후로 학교에서 꺼져주실 테니까 마음 푹~놓으시게나. 아, 그 뺑글뱅이 안경 부반장한테도 안부 좀 전하고." 키득키득 하고 웃으며 예전의 유들유들한 오세준으로 돌아왔다. 옆에서 박재석이 "우웩, 그 독종!"하고 혀를 빼어 문다. 승호는 그 말에 의문을 느끼며 눈을 조금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하고 물어보니 오세준이 싱긋 웃어 보인다. "방금 담탱을 만났지. 자퇴서 내고 오는 길이야." 승호는 멍하니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강지원이 한숨을 쉬며 "자랑이 아니야 이것아..."하고 중얼거린다. 오세준은 자퇴했지만 나머지 애들은 또 정학 처분이다. 한학기에 두 번이나 정학이라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당사자들은 일단 퇴학이 아니라는 데에 의의를 두는 것 같았다. "오세준 너..." 미간을 찌푸리는 승호의 표정에 주위 아이들은 '어쭈?'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세준은 여전히 씨익 웃고 있었지만 이어지는 승호의 말에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된 바에야 네가 왕이 되어 버려."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그것이 조크인지 진심인지 아니면 요즘 새로 나온 은어인지 박재석과 김한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신종 외계어냐?" 하며 서로 어이없어 하는 아이들을 두고 오세준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야~ 표현 한번 멋진데? 너도 이 근처 세력다툼의 결과에 관심 있었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휜 오세준이 웃는다. 웃고 있지만 승호에게 저런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찜찜하다. 정색을 하고 똑바로 쳐다보는 승호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다가 승호의 눈이 왠지 자신을 동정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야야, 그만 가자. 은광고가 기다린다며." 오세준이 승호에게서 등을 돌리며 화장실을 나섰다. 강지원을 비롯한 세 명이 승호와 세준을 번갈아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세준이랑 저 새끼랑 언제 친해진 거야?", "몰라. 그래서 이제부턴 손대지 말라고 한 건가?"라며 쑥덕거리는 소리가 화장실 안의 승호에게도 희미하게 들리며 멀어져 갔다. 이미 수업종이 친지는 오래다. 냄새 나는 화장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승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세준에게서 아무런 공포도 미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무리들을 무서워하고 증오했던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기억만 남아 있다. 기억을 되새겨도 '아, 그놈들 참 나쁜 놈들이었어.'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들어 부석하게 마른 입술을 훑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이제 와서 현실의 오세준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유디스를 왕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디움의 모습을 보면서 수십 번 읊조렸던 혼잣말이었다. 유현은 하루의 절반을 약과 잠에 취해 산다. 잠에서 깨었을 때 승호가 옆에 없다면 제정신일 확률은 50대 50이다. 예전과 같은 큰 소동은 없었지만 유령 같은 몰골에 잠옷 차림으로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거나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오매불망 승호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가 인내심이 다하면 제 분을 못 이겨 달려가 열리지 않는 대문을 두드린다. 그때문에 승호는 자율학습을 생략하고 정규 수업이 끝나면 바로 유현의 집으로 온다. 학업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친구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것에 부모님은 걱정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승호는 약을 먹고 잠을 자는 유현의 손을 들어 손가락을 살폈다. 손톱사이에 까만 페인트 칠이 벗겨져 잔뜩 끼어 있고 손톱 끝은 부러지거나 닳아져 있었다. 승호를 기다리다가 또 철문을 박박 긁은 것이 분명하다. 유현 때문에 고용인들은 대문 안쪽에 부드러운 매트라도 하나 덧대야 하나 고민 중이다. "미련스럽게시리...." 아파보이는 손톱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며 혀를 찼다. 방금 전, 승호가 토닥거려주는 손길에 안도를 느끼며 잠에 빠져든 유현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쉽게 잠이 드는 건 저녁식사 후에 먹은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한 탓이다. 그리고 이렇게 약에 의존해 잠이 들면 다음날 대낮에 눈을 뜨고 승호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승호는 유현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문 밖에는 의사와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호는 유현의 손의 상처를 부탁하며 그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학생, 의원님께서 부르시네. 서재로 가 봐." 나이 든 의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승호는 알겠다고 말하며 서재로 향했다. 유현이 머물고 있는 방과 정 반대쪽 복도 끝에 위치한 서재는 살짝 열려 있었다. 유현의 아버지가 승호를 따로 불러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승호는 식사도 유현과 함께 먹었기에 그 아버지와 진지하게 이야기 할 기회는 좀처럼 없었고, 그저 집으로 돌아갈 때 오늘의 유현이 상태에 대해 간단히 말하는 게 전부였다. -똑똑 문은 열려 있었지만 형식상 노크를 하고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책상 위에 스탠드 불빛만이 어두운 서재를 밝히고 있었다. 뭔가를 읽고 있었는지 유현의 아버지는 승호를 보자 "어, 왔니?"하고 반기며 안경을 벗고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여기 편하게 앉거라."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의 소파쪽으로 다가간 유현의 아버지는 승호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도 편하게 앉았다. "그래, 오늘 유현의 상태는 좀 어떠니?" 평범한 대화였다. 승호는 여느 때처럼 오늘 유현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어제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다고 덧붙인다. 서재는 어두웠다. 책상을 밝히는 눈부신 스탠드 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엔 지장은 없지만 불빛이 미치지 않는 소파 뒤쪽, 바닥, 천정과 책장이 어둠에 잠겨 있어 귀신 이야기나 비밀스런 로맨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울릴법한 분위기였다. 유현의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네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단다."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토한다. 만면 가득히 수심의 빛이 어려 있다. "유현이를...어떻게 생각하나?" 승호는 말이 없었다. 표정도 거의 없었지만 약간 곤란해 했다. "네게는 정말 많은 폐를 끼치고 있어. 학업에도 집중을 못하고 모처럼의 주말에도 친구들이랑 놀지도 못하잖니...그리고 또...그...뭐냐 그...유, 유현이의 이상한 행동도 많이 불쾌하겠지. 처음에는 솔직히 많이 놀랐단다. 저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저리 됐는지..." 유현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맘 같아선 승호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 유현이가 이 꼴이 된 거냐!" 라고 소리 치고 싶었지만 그런 말로 호통치기엔 늦어도 한참 늦었다. 무엇보다 폐를 끼치고 있는 쪽은 자신의 아들놈이다. 이제라도 승호가 방문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의사는 좀 더 경과를 두고 보자고 말하지만 이런 상태가 대체 언제까지 지속될 건지... 애비 된 입장으로선 견디기 힘들단다." 하루종일 책 한 권 들여다보지 않고 텔레비전 조차 보지 않는다. 몇 시간동안 멍하니 현관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아들의 모습을 보자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모습을 고용인에게 보인다는 것도 수치였지만 가족들이 가장 괴로웠다. 때문에 아내는 막내 아들과 함께 사돈댁에 보내버렸고 큰 아들은 한동안 학교 근처의 아파트에서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큰 딸은 유학중이다. 우선은 눈 앞의 이 아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유현의 아버지는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필요하다면 잔뜩 이용할 생각이다. 그리고 유현이 다 나으면 버릴 거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승호에게 상냥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다. "너도 유현이 때문에 많이 불편하겠지? 솔직히 너희들의 관계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야. 너도 앞으로 대학도 가고 여자친구도 사귀어야 하지 않겠니..." 유현의 아버지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칫 상대가 기분 나빠 할 까봐 나름대로 조심했지만 승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우리 아들 옆에 있어주어서 이 아저씨는 안심이 되긴 해. 그래도 그...유현이의 지나친 스킨쉽이나 과도한 애정표현은 아무리 사고의 충격으로 어딘가 잘못된 거라고 해도 좀....보기 안 좋더구나. 하지만 용케 그런 아들놈을 상대하는 걸 보면 역시...너도...그런 거냐? 그, 유현이가 그런 의미로 좋다거나......" 승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턱을 긁적이며 뭐라고 말해야 고민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모르겠어요." 승호의 입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현의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제가 유현이를 좋아하는 걸까요? 유현이가 저를 찾으니까 옆에 있어요. 스킨쉽이 과도하긴 하지만 딱히 싫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라도 유현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길 바래요." 유현의 아버지는 표정이 굳었다. "그 정상적인 생활이란 건 너에게서 유현이 벗어나는 의미한단다." 유현의 아버지는 무의식 중에 차갑게 말해버렸다. 의사의 보고에 의하면 진유현의 일방적인 구애 행동에 윤승호가 적절히 받아주며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했다. 누구에게든 절대 꿇릴 것 없던 유현이가 저런 듣도 보도 못한 평범한, 그것도 남자아이에게 애정을 구걸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유현이 하나로 인해 우리 집안에 얽힌 인간관계가 얼마나 많이 변할지 너는 모를 거다. 이대로 저 아이가 낫지 않으면 나는 아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구나." 정신과 기록이 남기 때문에 함부로 정신병원에 넣는 것은 곤란했다. 이미 유현의 상태가 남의 귀에 들어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은 사고 후유증이라며 둘러 댈 수 있지만 앞으로도 이 모양이라면 변명거리가 없어진다. 차마 다른 집 자식 앞이라 자신의 체면 운운 하는 추한 말까진 하지 않았지만 이미 기분은 나락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유현이가 차차 나아지면 그때 유현이에게서 떨어지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그제야 승호는 유현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이해했다. 잠시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스탠드 불빛에 드러난 주름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승호는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는 걸 포기했다. "제가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니에요." 눈가의 주름이 꿈틀거린다. "유현이가 저를 놓아주는 거죠." 유현의 아버지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승호의 말이 틀리지 않기에 천천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인상을 썼다. 알고 있다. 이런 얘기는 승호가 아니라 유현이에게 해야 하는 얘기였다. 너의 미래와 집 안의 안정을 위해서는 승호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고 아들에게 직접 해야 했던 말이었다. 승호에게서 결국 아무 것도 읽지 못했다. 이 표정 없는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유현의 옆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승호는 마치 '유현이가 하도 부르니까 불쌍해서 와주는 겁니다.'라고 거만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단순히 친구네 집으로 문병 오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래....네 말이 맞다. 쓸데없는 소릴 해서 미안하구나. 부모 마음이란 게 제 자식 흉은 안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를 하고 싶어 하지. 네가 유현이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 줄 알면서 이런 못난 말을 하다니...내가 잠시 착각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부드럽게 웃으며 어깨를 살짝 두드리는 유현의 아버지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웃고 있는 입가의 근육이 경련할 것 같다. 눈 앞의 아이가 "예. 괜찮아요."라고 순순히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아버지가 기다리시겠구나." 문득 시간이 꽤 늦었음을 깨달은 유현의 아버지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강씨가 집에 갈 때 바래다 준다는 것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도 피곤하실 텐데 바래다 주는 것 정도는 우리가 하게 해 주지 않겠니?" "에...하지만 학교에서 올 때도 언제나 신세를 지는 걸요." "거절한다고 다 미덕이 아니란다. 아저씨가 미안해서 그래." 나이 든 사람이 완강히 권유하는 걸 끝까지 사양하기도 맘이 편치 않다. 승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입안에서 삼킨다. 유현의 아버지는 승호의 드문 표정 변화를 보며 '바래다 주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라도 있나?'하고 의아해 했다. 승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아이처럼 웃었다. "...사실은 누군가가 절 기다려 주는 게 굉장히 기뻐서요. 저...아버지랑 같이 자동차를 타 본 게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승호는 쑥스러운지 "헤헤헤" 하는 소리를 냈다. 비록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였지만 승호가 소리 내서 웃을 거라고는 생각 못한 유현의 아버지는 약간 충격이었다. 저렇게 웃을 수 있으면서 이제까진 긁으면 부서질 것 같은 얼굴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승호가 나간 후 유현의 아버지는 서재의 불을 켰다. "어떠셨어요?" 서재 뒷편, 책장과 책장 사이의 공간에서 제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책장 뒤에 숨어 있던 제하는 방금 전의 바보 같던 대화를 떠올리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아이...뭐냐... 어둠 속에서 그 대화가 뭐였는지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었다. 유현의 아버지는 품 속에서 담배를 꺼내려다가 제하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도로 집어 넣었다. 할 수 없이 팔짱을 끼고 담배에 자꾸 손이 가려는 것을 막았다. "유현이는...유현이는 저 아이만 보고 있는데... 마치 나와는 상관없다는 표정이라니, 저 아이에게 유현이는 뭐냐? 매달리는 건 유현이 뿐이냐? 설마 내 아들놈이 짝사랑이라도 하는 거냐?" 서재의 창가에서 밖을 내려다 보는 유현의 아버지에게 정문으로 달려가는 승호의 정수리가 보였다. 정문 밖에는 승호의 아버지가 차를 가지고 와서 대기중이다. 매일같이 이러는 것도 서로의 집안에 못할 짓이다. "차라리...차라리 말이다...."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제하를 등지고 유리창을 마주한 탓인지 숨김없이 드러났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무능력해 보였다. "자신도 유현이를 좋아 한다고 말했으면 안심했을 거다. 훗날 저 아이에게 돈봉투를 내밀며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아버지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적어도 지금은 저 아이에게 유현이를 믿고 맡길 수 있었을 거야. 그래, 어차피 남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그런 감정 갖는 것 자체가 무리지. 유현이 저 아이에게 가지는 감정을 저 아이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착각한 것이 잘못된 거였어." 말투는 침착했지만 속에선 부글부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제하 앞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지만 이번엔 담배에 손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은 유리창에 하얀 입김을 남기며 번져 갔다. 은색 소나타가 승호를 태우고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저 아이의 무표정이 불안하다. 유현이를 바라보는 저 아이의 얼굴에는 따스함이나 애틋함이 없어. 저 아이가 과연 유현의 완쾌만을 바라고 자기 생활까지 포기하며 매일 문병을 오는 걸까? 차라리 나와의 연줄을 기대하는 거라고 믿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 그런데 저 애의 부모는 한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아. 이거 고도의 심리전이냐 아니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유현의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끄응-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내뱉는 담배연기는 짙은 흰색으로 너울거렸다. "괜찮을 거에요." 유리창에 비친 제하의 모습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호는 저도 잘 알아요. 다른 불손한 의도로 유현이와 있는 것은 아닐 거에요. 저렇게 감정표현이 무디게 된 것도 사고 탓인 걸요. 알고 보면 엄청 정에 약한 녀석이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정...이냐?" 유현의 아버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승호는 단순히 친구가 불쌍해서 매일 문병을 온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유현의 아버지가 가장 끔찍해 하는 점이다. 감히 동정이라니, 자신의 아들이 그런 취급 받는 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복잡하구나. 부모의 마음이란 건." 자조의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한번 담배의 연기를 들이 마셨다. 찬바람이 창을 타고 넘어와 텅 빈 교실을 훑었다. 승호는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창문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운동장에선 1반 아이들이 구령에 맞춰 달리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승호의 눈은 묘하게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주번은 좋겠다. 이 추운 날 안 나가도 되고" 교실 문을 열며 제하가 말을 걸었다. "그러는 너는 체육시간에 땡땡이야? 나중에 혼날려구." "내가 누구냐, 다 허락을 받고 온 거 아니겠어. 체육은 지금쯤 내가 양호실에 있는 줄 알 거다." 감색의 체육복을 입은 제하는 찬바람이 불어오자 "으~추워"하며 어깨를 움츠린다. 상의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턱을 움츠린 모습은 중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열심히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네 녀석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더라. 뭘 그렇게 열심히 보냐? 우리 반 애들 지쳐서 헥헥 대는 게 그리도 재밌어 보이더냐?" 제하가 농담을 걸어왔다. 승호도 운동장에서 시선을 돌리고 어깨를 으쓱한다. 기분이 좋은지 눈이 휘어져 있었고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참 이상해." 제하는 승호 앞에 다가오며 "뭐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댔다. 입을 비죽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승호는 가끔 제하가 귀엽게 보였다. "나는 아무래도 우리 반 애들한테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아. 그 오세준 패거리마저도." 창가에 등을 기대고 양팔을 창턱에 걸친 승호는 고개만 돌려 운동장 아래를 바라보았다. 제하는 승호 앞의 책상 위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혹시 우리 반 아이들이 네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것 때문에 그러냐?" "응. 아마도 그게 원인일 거라고 생각해. 한배를 탔던 사람들에게는 미우나 고우나 정이 들기 마련이잖아?" 제하가 빤히 쳐다보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럼 나도?"하고 묻자. 승호는 주저 없이 "지나치게 친근해서 이젠 지겹다. 야."하고 받아 친다. 바람이 차다. 승호는 그 차가움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 같지만 건조한 피부에 찬바람을 쐬다니 극악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하는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왁자한 운동장의 소음이 아련하게 멀어진다. "......유현이도?" 제하가 승호의 얼굴을 보지 않으며 물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승호는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진유현은 좀 달라." "헤에~?"하는 장난스러운 감탄사를 내며 제하가 승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승호는 잠시 입을 다물고 한동안 바로 앞의 책상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러나 승호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아서 "나는..."이라는 말로 운을 떼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깨어 난 후부터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아." 제하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고 추워서 팔짱을 꼈지만 건방져 보이지는 않았다. 진지한 제하의 얼굴은 긴장 탓인지 추위 탓인지 약간 굳어 있었다. "예전과 다른 부모님의 관심이 기쁘기도 하고 왠지 이상해져 버린 몸의 변화가 무섭기도 해. 그런데 그건 머리가 느끼는 감정이지 심장이 느끼는 감정은 아닌 것 같아. 친구들과 재미있는 얘기를 하면 '아, 이 얘기는 재밌다. 웃어야겠다.'하고 뇌 속의 사고 회로가 명령을 내려. 그리고 웃고 있으면 즐거운 기분이 들긴 해. 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느끼는 만큼 재미있다고는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아. 뭐랄까, 똑같이 종아리를 맞아도 한 사람은 굉장히 아파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따끔한 정도의 아픔만 느끼는 경우랄까....내가 딱 그 모양이야." 조용히 말하던 승호는 창턱에 걸치고 있던 한쪽 팔로 머리를 긁적였다. 부석부석한 머리카락이 멋대로 엉켜서 잘못 빗으면 끊어질 것 같다. "그런데 진유현이랑 있으면 심장이 맥박 치는 소리가 들려. 근육이 긴장하기도 하고 혈액의 흐름이라도 느끼는 건지 피부 아래가 간질간질 해.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서 뭐가 진짜 내 심정인지 모를 때가 많아. 그 불안정한 기분을 친근감이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그리고 승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 어지간히도 유현이에게 감정이 많았나봐? 지금 내가 격렬함을 느끼는 상대는 진유현 뿐이거든. 물론 옆에서 보기엔 뭐가 격렬한 거냐고 비웃겠지만 나름대로 녀석과 있으면 감정변화가 리드미컬해 진다구. 아무래도 저쪽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이 이곳까지 와서 영향을 미친 것은 나에게도 해당 되는 일이었나 봐." 가만히 얘기를 듣던 제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윤승호에 대한 감정과잉으로 얼간이가 된 진유현도, 덤덤하게 웃기만 하는 윤승호도...이것도 저것도 다 맘에 안 든다. 그 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제일 싫었다. "유현이 아버지는 네가 그런 생각하고 있는 줄 전혀 모르실 거야. 나도 지금 네 얘기 듣고 놀라는 중이니까." 약간 볼이 부풀어 있는 제하의 얼굴은 무언가에 삐진 얼굴 같기도 했다. 승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저씨한테 그런 말을 할 순 없잖아. 제하 너, 쪽팔리게 이런 거 남에게 말하기 없기다?"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또래아이의 얼굴이었다. 비록 남들보다 감정변화가 미미하지만 승호는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는 보통의 아이였다. 제하는 하얗게 일어난 뺨과 갈라진 입술 때문에 환자처럼 보이는 승호를 보면서 마치 자신의 비밀을 밝히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알 수가 없어." 승호가 "응?"하고 반문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지만 너한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어졌어." "어? 그거, 너도 혹시 뭔가 이상이 생긴 거야?" 창턱에 걸치고 있던 팔을 내리며 승호가 물었다. 통찰자로서의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너만 그래. 너에게서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여전히 생명력이나 에너지가 보이는데 너한테서만 그런 게 보이지 않아. 이런 말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그래, 마치 무생물을 대하는 느낌이야." 한숨을 쉬는 제하는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승호는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작게 휘며 "그럼 나는 네 앞에서 거짓말을 해도 안 들키겠네."하고 장난스레 말했다. 그리고 승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유현이를 잘 부탁해." 문득 제하가 그렇게 말했다. 약간의 망설임을 담은 표정이 미약하게 흔들린다. 시선은 승호를 보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 있다. 자신이 이런 말 할 자격이 있을까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어 보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끄집어 낸 말에 후회는 없었다. "그래.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해." 바람이 훙훙하는 소리를 내며 창문을 흔들었다. 창문의 덜컹거리는 소리, 바람소리,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가 고요한 교실 안을 가득 메웠다. 쉬는 시간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주택가에 검은 색 승용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승용차는 진승환이라는 명패가 달린 새카만 철문 앞에 멈춰 섰고 그 안에서 아직 교복 차림의 승호가 내렸다. 승호는 인터폰으로 안과 대화를 했고 철문은 금새 열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승호의 등 뒤로 강씨 아저씨가 주차 하기 위해 반대편으로 차를 몰고 간다. 지하 주차장을 통하면 바로 집과 연결 되어 수고스럽게 정원을 걸어갈 필요는 없겠지만 승호는 늘 정문으로 들어 갔다. 잘 꾸며진 정원을 산책하는 것도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유현이 현관문 앞에서 대문만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기다려 주고 반겨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철문을 지나 잔디 위에 놓여진 징검다리 같은 돌 바위 위를 걷고 있으면 저 위에서 유현이 뛰어 내려 오는 것이 보인다. 편한 면 바지에 긴 팔 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차림은 꽤 추울 텐데도 유현의 얼굴은 상기 되어 있었다. 그래도 요즘은 신발이라도 신고 뛰어 나오니 다행이다. 한쪽 손에는 의사가 이거라도 읽으라며 억지로 권유한 얇은 책을 들고 있었는데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던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다녀 왔어." 승호는 유현이 온몸으로 짓누르는 걸 겨우 아래에서 버티면서 늘 하던 인사를 했다. 꽉 끌어 안은 몸이 차다. 찬바람에 얼어붙은 뺨을 얼굴에 대고 부비니 따가워서 볼이 얼얼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다구." 엄살을 떨며 유현이 승호의 얼굴 여기저기에 뽀뽀를 했다. 개였다면 얼굴 전체가 침 범벅이 되도록 핥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굳이 개가 아니더라도 가끔 진유현은 승호의 얼굴을 잔뜩 핥아 놓아 승호를 곤란하게 만든다. 승호의 몸을 잔뜩 만지며 냄새를 맡고 얼굴을 부비던 유현은 문득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승호가 오늘따라 달라보였다. 그제야 승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미용실에 들렀다 오느라 그랬어. 어때 어울려?" 승호의 머리는 시원하게 깎여 있었다. 앞머리도 겉눈썹 위로 올라 갔고 귀밑머리도 다 파였다. 목 뒤쪽은 아예 바리캉으로 밀어 버려서 푸릇푸릇한 머리카락의 뿌리가 보였다. 만지면 까슬까슬한 느낌이 손바닥을 간질인다. 정수리와 뒤통수의 머리카락은 그렇게 많이 자르지 않았기에 완전한 스포츠 머리는 아니었지만 꽤나 터프한 스타일이었다. "중학생 같애." 유현이 승호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승호는 머리가 짧아진 탓에 목덜미가 선뜻해졌지만 그 스타일에 별로 불만을 갖진 않았다. "머리가 너무 뻣뻣해서 빗을 때마다 엉키고 끊어지는 걸. 언젠가 자른다고 맘먹고 있었거든. 미용실에서 이것저것 영양크림이랑 트리트먼트랑 해 줘서 조금 시간이 늦었어." 그렇게 말하고 승호는 웃으며 집으로 들어가자고 유현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가만히 서서 승호의 뒤통수만 만지작거리던 유현은 그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에 혀를 대었다. "뭐 하는 거야. 너무 늦게 올라가면 아줌마가 와서 볼 거라구." 뿌리치고 걸어가려다가 뒤에서부터 잡혔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익숙한 패턴이긴 했지만 그래도 벌건 대낮에 정원에서 이러는 건 집안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니다. "큭...간지러워 윤승호..." 짧은 머리카락을 혀로 쓸어 보면서 유현이 쿡쿡 웃었다. "그런 델 핥으니까 당연하지."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유현은 훤히 드러난 승호의 목덜미와 귓가가 마음에 드는지 혀로 할짝거리며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머리카락을 이빨로 씹어 살며시 잡아당겨보고 푸르게 드러난 곳을 혀로 길게 핥다가 한입 가득 입에 문다. 유현은 이제까지 방해하던 머리카락들이 사라진 곳을 입술로 문질러 대며 꽤나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나중에 머리 빡빡 밀어라. 정수리도 깨물어 보게." "지금도 깨물고 있잖아." "머리카락이 있을 때하고 없을 때하고는 다르단 말이다."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승호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쉬었다. 유현은 등 뒤에서 끌어 안고 교복 자켓 안으로 손을 넣으며 "아, 따뜻해."하는 뻔뻔스런 소리도 내뱉는다. 자꾸 옷 속으로 들어오는 손가락은 조끼 안으로, 와이셔츠 안으로 슬금슬금 파고 든다. 조금 뻔뻔하고 징그러운 구석이 있긴 해도 이렇게 보자면 환자라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 멍하니 있었냐는 듯 팔딱팔딱 뛰고 잘 웃는다. 말도 많아졌다. 조금 어리광도 심해지긴 했다. 애초에 유현이 환자로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윤승호의 부재로 인한 발작, 혹은 자폐 증세다. 그 원인이 해결된 상태에선 누가 봐도 정상인이다. 그래서 승호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유현이 사회에 복귀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춥다 들어가자."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덮는 것을 보며 승호가 강경하게 유현이 손을 잡아 끌었다. 유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지만 승호가 자기 손을 잡아주자 기분이 흐뭇해져서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손을 마주 잡고 정원을 거닐며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사이 좋은 형제 같았다. 바람도 불지 않은 회색의 하늘에서 소리없이 새하얗고 따뜻한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막을 걷고 있었다. 온통 붉은 모래와 흙먼지투성인 사막은 뜨거운 태양도 지표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새파랗게 맑은 창공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눈이 부신 태양은 환하고 따스하게 대지를 비추었다. 맨발에 닿은 붉은 흙의 입자는 너무도 부드러워서 뻘의 진흙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흙 가루가 스며들었다가 빠져나가는 감촉이 나쁘지 않다. 사막의 여기 저기엔 몇 십 미터나 되는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올라가 있었다. 마치 개미탑 같다. 사방을 바라봐도 똑같은 풍경에 오히려 아늑함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산책하고 있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미풍이 전신을 시원하게 감싸준다. 한참동안 걸은 느낌인데 이상하게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작은 웅덩이 같은 것을 발견했다. 퐁퐁퐁- 바닥에서 샘이 솟아 나는 것마냥 어떤 액체가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웅덩이의 크기는 세숫대야만한 아주 작은 면적이었지만 그곳에 고인 붉은 액체는 아주 맑디 맑아서 바닥의 모래 입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일 정도다. 손을 넣어보려 했지만 깨끗하고 잔잔한 웅덩이를 흐트러뜨리기 싫어서 그냥 보기만 했다. 투명한 붉은 색 수면 위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한참동안 그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꽤나 미남이라고 자화자찬 하기도 했다. 쭈그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 났다. 사막은 드넓고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록 웅덩이에서 붉은 액체가 기운차게 솟아오르고 있긴 하지만 이런 속도로는 몇 십년, 아니 몇 백년이 흘러도 이 사막을 바다로 채워 놓기엔 무리가 있을 거다. 조금 아쉬웠지만 그것으로 만족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사막을 산책했다. 붉은 웅덩이를 뒤로 하고 파란색 하늘과 붉은 색 대지가 맞닿은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걸어 갔다. 마음은 가볍고 기분은 상쾌하다. 부드러운 흙 위를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다. 내 발자국이 찍힌 길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어디에선가 진유현의 냄새가 난다. Fin. 메마른 바다 - Epilogue hippocampus 09-29 00:04 | HIT : 1,837 메마른 바다 Epilogue 대로변에 위치한 대형 학원의 정문 앞에서 청바지와 점퍼차림의 한 청년이 서성이고 있었다. 청년은 같은 자리를 왔다갔다 맴도는가 싶더니 인도와 차도를 경계 짓는 철제 가드레일에 걸터앉기가 무섭게 다시 일어났다. 무척이나 초조한 얼굴로 아까부터 수십 번은 더 확인한 손목시계를 또 한번 확인한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겨울 해는 짧아서 거리는 네온 사인과 자동차의 불빛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청년의 등 뒤로 차들이 달리며 찬바람과 먼지, 배기가스를 뿜어 낸다. 한 무리의 오토바이떼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도시의 소음에 한몫 거들고 있었다. 거슬리는 크랙션 소리가 청년을 향해 계속 가까워졌다. 의미 없이 빵빵거리는 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청년은 점퍼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눈 앞의 학원 정문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열 서너 대의 오토바이가 자동차들이 달리는 8차선 도로를 벗어나며 지나가는 차량의 통행을 방해한다. 운전자들은 알록달록한 폭주족들의 오토바이를 보며 낮은 욕설을 내뱉었지만 폭주족들은 솜씨 좋게 차도를 벗어나 무사히 인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야! 진유현! 너 진유현 맞지!!" 청년이 뒤돌아보았다. 오세준이 폭주족들을 뒤에 꼬리처럼 매달고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 만큼이나 다채로운 머리를 한 폭주족 틈에 있으니 검은 머리의 오세준이 굉장히 모범적으로 보였다. 세준의 얼굴은 어찌나 반가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야 임마! 오랜만 아니냐! 이야~ 이 녀석 키 큰 것 좀 보게. 나야 오세준. 설마 그 사이 잊어먹진 않았겠지?" 인상 험악한 무리가 금새 학원 앞 인도를 덮었다.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이 위축되어 흘금흘끔 눈치만 보고 있었고 학원의 수위는 여차하면 경찰을 부르기 위해 수화기를 부여 잡고 있었다. "아...그래. 재작년 가을에 보고 처음인가..." 유현이 놀랐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오세준하고는 한때 꽤 붙어 다닌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데도 감흥이 없다. 일년도 넘게 만나지 못했지만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 든다. "야 임마! 뭐가 재작년 가을이냐! 작년 설날에도 너네 집에 찾아 갔었잖아!" 오세준이 섭섭하다는 듯이 유현의 등을 팡팡 쳤지만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돌아 다녀도 되는 거냐? 몸은 많이 나아졌나 보지? 이야아~ 너를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진짜 몰랐다. 그래, 윤승호도 잘 있고?" 그 이름에 유현이 움찔했다. 반가움에 겨워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한 것 치곤 뒤늦은 반응이다. "응. 지금 수업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야." 그 말에 세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으하하하 그럼 그렇지, 네 놈이 혼자 이런데 나돌 리가 없지."하며 혼자 좋아 한다. 그러다가 "아, 참!"하더니 폭주족들 중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한 사람을 유현의 앞으로 소개시켰다. "강지원, 얘도 진짜 오랜만이지? 머리가 노랗기는 한데 알아 보겠냐?" 세준이 낄낄 웃으며 지원의 부스스한 노란 머리를 헤집어 놓았다. 강지원은 어색해 하며 진유현과 눈인사를 했지만 내심 왜 이런 짓을 시키냐는 눈치다. "그래. 오랜만이다. 그런데 박재석이나 김한수는 이제 같이 안 노는 거냐? 임경철도 안 보이는데." 유현이 무심코 흘린 말에 세준의 입이 벌어진다. 주위의 폭주족들이 왜 저러나 하는 눈으로 세준을 바라봤지만 오세준은 지금 나름대로 감격에 겨워하는 중이었다. "기억하는구나..."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지원에게만 들릴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유현과 짤막하게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후, 세준은 다음에 또 보자며 폭주족들을 이끌고 다시 도로로 나갔다.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세준은 길 건너 빌딩의 후미진 골목 끝에 바이크를 주차에 두었다. 주위의 동료들이 얼른 가자고 보챘지만 세준은 오히려 그들 보고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열명이 넘는 무리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드물게 진지한 세준의 표정에 별다른 대꾸 없이 저들끼리 먼저 출발했다. 오토바이에 기대어 유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세준의 얼굴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옆에 남은 건 그 기분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강지원 뿐이었다. "진유현...분위기가 좀 변했네. 그런데 버스사고로 중상 입어서 자퇴한 것 치고는 너무 멀쩡한데?" 친구의 음성을 들으며 세준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지원이 습관처럼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중상이라.....그것도 중상이면 중상이겠지. 특히 머리쪽이 말야..." 한 모금 빨아 들이는 담배 끝에서 발갛게 불꽃이 피었다가 사그라 든다. 이내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 한 점 없는 골목길에서 하얀 연기가 예쁜 실선을 그리며 한가로이 공기중으로 흩날려갔다. "맞아, 유현이 학교를 자퇴했을 땐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둥 죽었다는 둥 이상한 소문도 돌았었잖아. 다른 애들 다 살아난 사고에서 반장 혼자만 혼수상태가 되었다며 전교는 물론 인근 학교까지 수군수군댔지." 그때 일을 생각하며 지원이 새삼스럽다는 듯 먼 발치의 유현을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마르고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유현은 더 없이 건강해 보였다.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자라서 귀를 덮고 눈을 찔러 좀 어두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정서불안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머리가 크게 다친 사람 같지는 않았다. "현대의학도 많이 발전했나 보네. 학교생활에 욕심 많던 진유현이 자퇴할 정도의 부상을, 1년 반도 안 되서 완치 시키다니. 음, 역시 돈이 좋긴 좋은 건가 보다." 지원도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세준이 실소를 터트린다. "엥?"하고 쳐다보는 지원의 입가엔 불을 붙이다 만 담배가 물려 있었다. "사랑의 힘이야. 사랑의 힘." "그게 무슨 소리야?" "킥킥킥......" 세준은 진심으로 웃으며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었다. 작년 겨울, 그리 춥지 않던 설 연휴의 둘째 날 유현의 집을 방문한 것은 실수였다. 그다지 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세준은 그날 본 진유현의 모습이 짧은 인생에서 가장 재미 없는 광경이었다고 생각했다. -없어....없어..... 정신없이 집안을 왔다 갔다 하는 유현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화장실 문도 열어 보고 장롱 문도 열어 보더니 급기야 쓰레기통까지 뒤진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문이란 문을 죄다 열고 통이란 통은 죄다 뒤엎는 그 모습은 마치 마약 중독자가 약을 찾아 헤매는 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땐 정말 눈 앞에 있는 게 진유현이 맞나 싶더라. 나중엔 저 꼴을 보느니 아예 죽여버릴까도 생각했지." 뒤집혀진 벌레가 그 자리를 맴돌 듯 집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유현의 모습은 끔찍했다. 고용인들이 유현을 말려 보지만 차마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른다. 그날은 운 나쁘게 유현을 폭력으로 제압할 권한이 주어진 간호사와 의사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최근 꽤 호전되었다고 방심한 탓이기도 했다. -없어..아무데도 없어...어디로 간 거야 윤승호!!!!! 세준은 면회사절의 유현을 어떻게 해서든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면회사절의 대상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집안의 고용인들이 세준을 알고 있어서 생각보다 쉽게 들어 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용인들은 오전부터 발작을 일으키는 유현을 달래느라 정신 없던 탓도 있었다. -없다고!!! 어기다가 숨긴 거야!!!!!! -세준학생! 유현학생 좀 어떻게 말려봐요!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려는 유현을 무의식 중에 등 뒤에서부터 움켜잡았다. 그때 끌어 안았던 감촉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비쩍 마른 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체온이 세준의 온기마저 앗아가려는 것 같았다. 유현이 발버둥칠 때마다 느껴지는 잔뼈와 근육의 움직임은 물컹물컹한 거대한 구렁이가 품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혐오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녀석이 팔꿈치로 머리통을 날리는데...아주 죽는 줄 알았지. 빠개지는 골을 붙잡고 끙끙대는 사이 놓쳐버렸지만 뭐." 결국 고용인들은 유현의 사지를 붙잡으며 강제로라도 침대에 묶어두기로 했다. 나중에 진의원에게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유현이 정원으로 나가 지난번처럼 온몸이 흙과 피투성이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줌마와 아저씨들의 손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유현의 비참한 꼴을 보고 세준은 생애 처음으로 살인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그 난장판이 순식간에 평정되더라고. 뭐였냐고? 윤승호지 뭐. 그 자식이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헐레벌떡 뛰어 오더군. 놈이 숨이 차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현관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난 예전에 기르던 곰돌이가 잠시 환생한 줄 알았다." 총알처럼 덤벼드는 유현의 무게를 못 이기고 승호는 현관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유현이 얼굴을 핥으며 입술을 문대었다. 승호는 "어..그만해...그만해..." 하고 전혀 설득력 없는 목소리로 유현을 말렸지만 다짜고짜 입 박치기를 해대는 통에 그 건조한 목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있었다. "뭐어? 그 진유현이???" 처음 듣는 얘기에 강지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가끔 세준으로부터 유현과 승호가 종종 만난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다. "둘 사이에 봄이 왔어요~" 라거나 "우정이냐 사랑이냐 그것이 알고싶다!"라는 식의 농담조였기 때문에 단순히 '승호와 유현이 화해했구나...'라고 생각했던 지원은 쇼크였다. 재차 담배를 꺼내 물면서 세준이 씁쓸하게, 그러나 굉장히 재밌다는 듯 비웃었다. "그제야 제하 녀석이 왜 그렇게 의기소침했는지 알겠더라고. 내가 약올리면 한마디도 안 지던 녀석이 완전 풀죽은 꼴은 우스웠지만......직접 보니 그럴 만도 하더라." 그날 승호는 설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외할머니의 산소를 찾아갔다 오던 길이었다. 외가댁은 기억 속의 풍경보다 조금은 쓸쓸했고 돈 문제와 땅 문제에 얽힌 친척관계는 여전히 나빴지만 외할머니의 산소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승호에겐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친척들의 다툼을 피해 조금 이른 귀경길을 나서던 승호에게 아침부터 전화가 오더니, 도착하고 나선 이 모양이다. 승호와 집안의 고용인들에겐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처음 보는 세준으로서는 이만저만 쇼크가 아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온 거야! 가지 말라고, 아무데도 가지 말라고 했잖아!!! 어린애가 땡강 부리듯 칭얼거리는 것도 고등학생이 하니 이만저만 볼썽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품에 매달리며 멱살까지 잡고 다그치는 모습은 마치 싸움을 거는 것처럼 보였다. 승호는 어디를 갔다 왔다고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유현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천천히 유현을 달래면서 오늘은 명절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승호의 차분한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더니 유현은 그제야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푼다. -아... 승호의 배 위에 앉아 동작을 멈추었다. 멍한 얼굴은 정신을 차린 것 같기도 했고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설날이 오늘이었나.... ....그래서 집안에 이렇게 사람이 없었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던 유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준은 그 집을 나와 버렸다. "그거, 정신병자 아니야?" 강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말을 마친 세준은 벌써 몇 대째인지 모를 담배를 또 하나 꺼내든다. 학원에서는 한 타임이 끝났는지 많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틈바구니에서 유현이 목이 빠져라 승호를 찾고 있었다. "낸들 아냐. 그제야 유현이네 아버지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아들의 일을 숨기려는지 알겠더라고. 우리집 영감한테 '유현이가 미쳤소.' 하고 얘기해 주면 좋아했겠지만 그 영감탱이 볼따구에 심술보 붙는 게 싫어서 말 안해줬지. 그러니까 너도 다른 애들한테는 얘기 하지마." 지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새 담배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던 지원은 세준의 옆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눈동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원에게 진유현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처음엔 반장이 승호를 괴롭히기 위해 오세준을 이용하려는 건 줄 알고 기분 나쁘기도 했고 그 장단에 맞춰주는 세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준과 유현은 친구라기 보다는 나쁜 일을 꾸미는 악당끼리 손을 잡고 협력하는 관계로 밖에 비추어 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못마땅했다. 가끔 보면 세준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유현을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 방식이라는 것이 지원으로선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의 이야기도 그랬다. 보통 친구가 발작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아파하지, 죽여버리고 싶어하진 않을 거 아닌가? 지원은 습관처럼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윤승호다." 세준이 들뜬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그 시선을 따라 학원 앞을 본 지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 한도훈도 있는데?" 세준이 눈을 빛낸다. 오랜만에 이채를 띠게 된 그 눈은 학원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안에 와서 기다리지 그랬어. 오늘 진도 빨리 빼느라고 조금 늦게 끝났거든." 승호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옆에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두터운 코트와 목도리로 완전 무장한 한도훈이 안경너머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훈은 난데없이 나타난 불청객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고 유현은 무의식 중에 승호를 자신 쪽으로 잡아 당기며 도훈을 노려보았다. "이 학원은 교실에서 로비로 나오는 출구가 여러 개라서 안에 있으면 네가 어느 통로로 나오는지 모르게 돼. 너 핸드폰도 안 갖고 나갔잖아." 승호는 깜박했다고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짧게 친 머리는 찬바람이 불 때마다 추워 보였다. 유현은 그 머리를 품에 감싸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그대로 실행했다. 한쪽 팔로 승호의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고 졸지에 얼굴이 유현의 점퍼 속으로 파묻힌 승호는 "어어어?"하고 버둥댄다. 마치 적을 만났을 때 고개만 풀숲에 처박고 있는 타조처럼 부자연스러운 자세였다. 도훈이 움찔하고 반응한다. "집에 가자." "자, 잠깐잠깐! 유현아 앞이 안 보......" 머리를 잡힌 승호가 당황하며 고개를 비틀어 빼냈다. 겨우 빗질로 정돈한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버렸다. "오늘 웬 일로 학원 앞까지 나온 거야? 집에 무슨 일 있어?" 승호가 엉망이 된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으며 말했다. 유현은 뭐가 불만인지 눈빛이 사나워져서는 한쪽 팔로 여전히 승호의 뒷목을 잡고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냥... 네가 안 보이길래. 보고 싶어서." 오랜만의 악몽이었다. 초저녁무렵, 늘 하던 운동을 마치고 잠깐 선잠을 자고 있는 사이였다. 몇 달 동안 잊고 있던 꿈은 자기 직전에 베란다 밖으로 바라본 붉은 석양 탓인지 오늘따라 생생하고 두려웠다. 깨고 나서 승호가 안 보였을 때는 온몸에 오한이 돋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마 나쁜 꿈을 꿨다며 칭얼댈 순 없어서 둘러댄 핑계였는데 그 핑계가 얼마나 조악한 것인지 한도훈의 기가 막혀 하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승호가 유현을 빤히 쳐다보더니 보일 듯 말듯 눈을 가늘게 휘었다. "도훈아, 그럼 내일 학원에서 보자. 난 유현이랑 먼저 갈게." 살벌하게 노려보는 진유현을 흘끗 쳐다보며 도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은 두 사람의 관계가 여전히 적응 안됐지만 유현이 승호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면서 억지로 납득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일 민태와 만나기로 한 거 잊지마." 문득 생각이 났는지 도훈이 승호에게 당부를 했다. 승호는 "물론이지."라고 말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유현은 입을 비죽 내밀며 웃고 있는 승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가렸다. "빨리 가자니까. 추워."라고 말하는 폼이 심통 맞아 보인다. 승호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어차피 도훈의 집은 반대 방향이라 학원 앞에서 서로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도훈은 무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뙤약볕이 아스팔트를 달구고 자동차의 본네트가 지글지글 끓고 있는 그런 여름의 한낮이었다. 도훈이 승호의 집을 찾은 건 그렇게 지독히도 덥던 보충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담임을 어떻게 설득시켰는지는 몰라도 고2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내내 빠지고 있던 승호가 내심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 동안 수업시간에 나눠준 프린트를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다가 승호에게 전해 주기 위해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한 아파트 단지를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승호가 올 봄에 새로 이사한 집은 원래 살던 집보다 학교에서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길래 도훈은 전화기에 메세지를 남겼다. 혹시 집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나 걱정은 됐지만 그럴 땐 프린트물을 편지함에 넣어두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 그런지 입주하지 않은 세대가 훨씬 더 많았다. 옆 단지는 아직도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었고 전체적으로 한산하고 인적 없는 동네였다. 도훈은 흐르는 땀을 훔치며 아파트 복도에 일렬로 늘어선 여러 개의 현관문을 지나쳤다. 가장 끝쪽에 위치한 승호네 집 현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여름이라 문을 열어 놓은 것일까...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안에서 약하게 에어컨의 냉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듯 했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다니 전력 낭비라고 생각하며 도훈은 벨을 누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와 손이 멈칫했다. "유현아 문이 열린 것 같은데?" 승호의 목소리에서 나와선 안 될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또 딴 생각한다. 지금은 여기에 좀 집중해. 벌써 몇 분째인데 반응이 이렇게 느리냐?" 승호는 "그래도 문이..."라고 웅얼거렸지만 유현은 이런 복도 끝에 누가 오겠냐며 핀잔을 준다. 도훈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곧 패닉상태에 빠졌다. '어째서 진유현이 윤승호와 한 집에 있는 거지?!!!' 벨을 누르지 않는 것도, 열린 문틈을 몰래 엿보는 것도 도훈의 가치관에 반하는 것이었다. 손이 덜덜덜 떨리고 눈은 홉뜨며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엄청나게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훈의 몸은 마치 누가 조종이라도 하듯이 기계적으로, 열려진 문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가구가 얼마 없어 휑한 느낌이 드는 거실이 신발장 너머로 눈에 들어왔다. 거실 한 가운데의 소파엔 승호가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양 팔을 등받이에 걸쳐 놓고 있는 폼이 게으른 쌀집 가게의 아저씨 같은 포즈였다. 뒤로 젖힌 고개는 졸리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뜨거운 한낮에 일광욕을 하는 강아지나 고양이가 연상될 법도 했다.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훈은 순간 큰 소리를 낼 뻔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반바지에 면티차림인 편안한 승호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위가 도훈의 사고를 정지 시켰다. 까만 머리가 승호의 다리 사이에서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한 손과 입을 움직이고 있었고 다른 손으론 승호의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이 진유현이라는 것은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아..." 승호의 신음은 나른하고 건조했다. 유현은 펠라치오에 열중해 있지만 승호는 단순한 마사지라도 받는 것마냥 늘어져 있었다. 표정은 더없이 안락해 보였다. 가늘게 내리깐 두 눈이 움찔하고 경련하면서 이따금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도훈은 지금 이 순간이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저 진유현이 남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입으로 봉사를 하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상대가 윤승호라니!! "윽..." 낮은 신음성과 함께 승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늘어져 있던 몸이 아주 잠시 긴장하며 경련을 일으킨다. 승호의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딱딱하게 굳어진 도훈은 등 뒤로 싸늘한 한기가 훑고 가는 착각을 느꼈다. 승호의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든 유현이 미소 지으며 문가에 멍청히 서 있는 도훈을 비웃 듯이 흘겨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한번 가게 하는데 되게 힘드네. 너 불감증 아니야? 하도 빨아서 입안이 다 얼얼하다구." 유현이 도훈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소파에 늘어져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던 승호는 눈을 감은 채 작게 웃었다. "힘들면 안하면 되잖아." "아 치사해. 혼자만 받을 거 다 받아놓고 이제 와서 딴 소리야." 유현은 투덜거리면서도 승호의 아랫도리를 닦아 주고 바지 지퍼를 채워 주었다. 승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럼 나도 해줄까? 펠라는 못하지만 손이라면..."라는 둥 도훈이 듣기에 섬뜩한 소리만 하고 있었다. "기왕 치사해지는 김에 끝까지 치사해져 볼래? 엉덩이쪽도 신경써 줄 수 있는데. 원하면 삽입은 안할께. 손이랑 입으로. 오케이?" "관둬. 우선 문이나 닫..." 위로 겹쳐오는 유현을 기분 좋게 밀쳐내며 현관문을 바라본 승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곳에는 햇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아파트 복도를 배경으로 여름날 납량특집의 귀신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 있는 도훈이 뻣뻣이 서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수십 장의 프린트물이 차르륵하고 쏟아진다. "도훈아---!!!!!" 한도훈은 그대로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 순간만큼은 승호의 표정도 흙빛으로 질려 버렸다. 유현은 도훈을 따라 나가려는 승호의 허리를 움켜잡으며 그 귓가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내버려 둬. 어차피 전해준다던 프린트는 놓고 갔으니 저 녀석의 볼일은 끝난거 아냐?" 승호는 체온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도훈이 올 줄...알고 있었어?" "자동응답기. 아까 네가 수퍼에 갔을 때 전화 왔었는데...내가 말 안했던가?" 유현이 고의적으로 악질적인 장난을 친 것이 분명했다. 좀처럼 화내는 일 없던 승호가 입술을 꾹 다물고 유현의 품에서 빠져 나가려 했다. 키득키득 웃으며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유현에게 짜증나서 승호는 머리로 그 턱을 들이받아 사납게 뿌리쳤다. "진유현. 이 일로 도훈이가 날 멀리하게 되면 난 네게 굉장히 화가 날 거야." 승호가 뒤도 안 돌아 보고 서늘하게 말했다. 짓궂게 웃던 유현이 그제야 "어어?"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붙잡을 새도 없이 승호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도훈을 쫓아 나갔고 혼자 남은 유현이 멍하니 거실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한도훈 기다려!!" 급하게 복도로 달려나간 승호는 엘리베이터가 이미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여름용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계단을 뛰어 내려 일층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다급함이었다. 여기서 한도훈과 헤어지면 친구 하나를 영영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계단을 달려 단숨에 일층까지 뛰어 내려온 승호는 도훈이 아파트 단지를 걸어 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급한 마음에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도훈이 걸음을 멈춘다. 승호는 마음속으로 작게 안도했지만 뒤돌아보는 도훈의 표정은 굉장히 살벌했다. "제정신이냐!!!!!" 도훈은 승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일갈했다. 승호는 달려오던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로 동요했지만 안타까운 얼굴로 도훈의 사나운 눈초리를 정면으로 받았다. "그 자식한테 무슨 짓을 당했는지 벌써 잊었어?! 그게 그렇게 쉽게 놈을 용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야?!!" 도훈은 방금 자신이 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평소의 그와 다르게 소리를 지르며 승호를 다그치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속어를 쓰지 않는 편이지만 유현에게는 예외였다. 육두문자로 표현해도 부족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욕의 범위가 적다는 것이 오히려 원통했다. "어떻게 그 녀석과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도훈은 뱃속으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텅 빈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있지도 않은 폭력 욕구가 일어나는 착각마저 들었다. 눈 앞에 진유현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동안 말 안해서 미안해." 승호가 조그맣게 말했다. 작년 가을부터 좀처럼 표정변화가 없던 승호가 드물게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것이 저렇게 미안한 표정이라면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따가운 뙤약볕이 아파트의 그늘 사이로 아프게 쏟아졌다. 그 열기에 정수리부터 타버릴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도훈은 승호를 노려 보았다. "뭐라고 할말이 없어. 특히 너한테는 더욱 말할 수가 없어서 숨기려고 했던 건 사실이야." 도훈이 이빨을 갈았다. 주먹이 쥐어진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머릿속이 정리가 되질 않는다.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햇빛 때문에 더욱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차가운 지하실의 한기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구타당하는 몸뚱어리, 산발이 된 머리카락. 푸르게 멍자국이 든 승호의 상체에 생기는 이빨로 물어뜯은 상처. 정신없이 승호의 살갗을 씹어대는 유현은 길에 떨어진 음식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굶주린 개와 같았다.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유현이, 수학여행날의 사고 때문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 생각하면 간단할거야. 그래서....그러니까...녀석의 머릿속에 나 밖에 없어서...음...이렇게 말하면 조금 창피하지만..." 승호의 하체에 매달리던 유현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도훈은 순진하지 않았다. 찢어져 흘러 내리는 붉은 핏줄기가 울긋불긋한 허벅지 위를 타고 흘러 내렸고 양 입 끝을 잔뜩 비틀어 올리며 이빨을 드러내어 웃고 있는 유현의 얼굴은 광대마냥 괴이했다. 지독한 피냄새와 역겨운 정액냄새. 승호를 업었을 때 등 뒤로 축축하게 흘러 내리던 그 끔찍한 감촉을 도훈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유현이는 내가 없으면 안돼. 그래, 나를 좋아한다고 봐도 될 거야. 나 역시 내 의지로 녀석과 함께 있는 거라서......" -퍼억 반사적으로 도훈의 주먹이 튀어 나갔다. 저도 모르게 뻗은 주먹에 승호의 몸이 휘청하고 흔들렸다. 이빨에 의해 입안이 찢어졌지만 승호는 아픈 뺨을 감싸지도 안고 가만히 있었다. 두 눈은 조금 충격 받았는지 크게 뜨고 있었고 시선은 땅을 향한 채 차마 도훈을 마주보지 못한다. "아...!" 도훈은 뒤늦게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닫고 잠시 주춤했다. 승호를 때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유현을 향한 분노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다가 승호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터져 버렸다. 모든 것은 날씨 탓이다 이성을 녹여 버리는 날씨 탓이야! "때릴 생각은 없었어. 미..." "너한테라면 맞아도 좋다고 생각했어." 쓴웃음을 지으며 승호가 입가를 훔친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으려다가 꿀꺽 삼켜버린 승호는 그 비릿한 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맛도 오랜만이군."이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도훈에겐 그 어느 때 보다도 낯설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그 사고 이후로 승호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 "늘 미안한 기분이었어. 누군가 유현과 나의 사이를 비난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한도훈 너라고 생각했지." 도훈은 눈앞이 어지러웠다. 언제나 승호에게 죄지은 기분이었다. 다들 그 변화가 사고 탓인 줄 알고 있지만 도훈만이 다르게 생각했다. 어딘가 결핍된 승호의 모습은 지하실 사건의 충격 때문이라며 곡해했고 그것을 막지 못한 자신을 계속 책망해 왔다. "사실 난 유현이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어. 처음엔 우리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유현이네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일이 우습게 됐지. 진작에 말하고 싶었지만 네가 나를 경멸할까 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도훈은 승호를 때렸던 주먹을 펴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본 것, 승호가 말하는 것, 모두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었다. 지금, 지난 몇 개월간의 자책감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내가 어떤 생각으로 너를 봐 왔는지...." 도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얼마나 괴로워하고, 너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힐 듯이 가슴이 답답했다. 안경을 벗어버리고 양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움켜 쥐었다. 머리가 아팠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단어가 목구멍에서 걸린다. 하지만 더 이상 쓸데 없는 말을 지껄였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자신이 없었다. 승호에게 상처 주는 말, 자신을 혐오하는 말, 유현을 저주하는 말...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방금 본 도색적인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번뇌하는 속마음을 들키는 일이었다. "미안해." 승호가 주춤거리며 다가온다.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는 그대로도 좋은 거냐. 저 자식과 같이 산다고? 생각해봐. 네가 녀석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모욕당하고 능멸당했는지를. 진유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내가 모르는 너희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나조차도 이렇게 손이 떨릴 정도로 그 때의 일이 생생한데 어떻게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지?" 도훈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며 추궁했다. 체념한 듯한 승호의 모습이 보기 싫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나오면 이번엔 진심으로 승호를 때릴지 모른다. 도훈은 조금 쓸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승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일은 지금도 가끔 생각 나." 하얗게 말라서 갈라진 승호의 입술이 오물오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잊은 게 아냐.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나고 끔찍했던 그 일들은 지금 떠올려봐도 소름이 끼쳐. 물론 당시의 감정만큼 고통스럽진 않지만 그렇다고 유현에 대한 혐오감이 사라진 건 아니야. 하지만 이상하지? 분명히 화가 나고 증오스러운데 그것과 동등할 정도로 다른 절박한 감정이 나를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아. 아니, 그 절박함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인지도 몰라. 이해할 수 있겠어? 난 이젠 무얼 해도 예전만큼 희로애락이 느껴지지 않아. 종종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진짜인지 의심하기도 해. 그래서 이 절박함이 내게는 소중한 거야. 얄팍한 우정인지 애정인지 동정심인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어. 뭔지 몰라도 이만큼 격렬한 감정이 나한테 있다는 것에 안도하곤 하지. 내가...더 이상 누군가에게 이렇게 강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승호는 쓰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없어질 것 같은,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그 얼굴에 도훈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저런 승호는 싫다. 예전처럼 잘 웃고 장난치던 승호가 몹시도 그리웠다. 도훈은 팔과 목덜미에 닭살이 돋았지만 동시에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진유현과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거. 싫지 않아. 녀석이 밉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 녀석이 미운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 내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녀석 뿐이거든. 녀석과 같이 있으면 정신이 없어. 지치지 않고 쏟아내는 애정을 감당하기 힘들 때도 많아. 그리고 그렇게 퍼부어지는 애정을 받으면 어느새 나도 조금은 녀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착각하게 돼. 그래, 착각이라도 좋아.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과는 달리 적어도 내가 느끼는 몸의 쾌감은 진짜니까." 도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미간을 찡그리며 애써 얼굴 표정을 가리기 위해 안경을 다시 썼지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승호처럼 껍질이 부서질 것 같은 얼굴은 아무리 포커페이스의 도훈이라도 흉내내기 힘든 것이었다. 감정을 절제하는 것과 절제할 감정이 없다는 것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었다. "좋아. 너희가 그런, 조금 묘한 관계가 되긴 했지만...그래. 너희 둘 다 좋다면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진유현은, 그 자식은 네게 제대로 사과한 거야? 지난 일을 후회하고 뉘우쳐서...그래서 너는 그 녀석을 용서한 건가?" 이것이 마지막 보루다. 도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승호의 얘기는 납득하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진유현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어느 정도 물러날 의향이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지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진유현이 반성했다는 대답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승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용서? 후회?"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턱에 손가락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살짝 찌푸린 미간이 마치 처음 듣는 단어를 곱씹는 유치원생을 연상시켰다. 어디선가 아련히 공사장의 땅 파는 소리가 스며들어 온다. 지독히도 울어대는 매미의 발악은 작열하는 태양빛과 함께 바싹 마른 공기 속에서 진동했다. "윤승호---!!!!!!!!" 멀찌감치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뛰쳐 나오는 유현이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목소리를 들었다 싶은 순간 벌써 이만치 다가와 있었다. 흙빛으로 질린 얼굴엔 땀이 줄줄 흘러 내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 다급한 표정에 도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 잘못했어!" 승호의 바로 앞, 일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춘 유현은 눈을 부릅뜨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잘못을 비는 태도치고 지나치게 거칠다. 승호의 귀엔 유현의 말이 왜 나만 두고 갔냐고 고함치는 소리로 들렸다. "다시는 안 그럴게. 장난, 장난이었어! 그러니까 제발!" 묵묵히 서 있는 승호의 침묵이 두려웠다. 옆에 있는 도훈은 이미 안중에도 없다. 그저 아까 승호가 자신을 밀치고 뛰쳐나가버린 충격이 뇌리에 남아 유현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 잡지 않으면 영원히 놓친다는 비현실적인 절박함이 유현의 사고를 뒤흔들었다. 도망갈세라 주춤주춤 다가갔다. 양팔을 크게 벌려 승호를 가두어야 안심이 될 것이다. "화내지마, 나만 두고 가지마! 잘못했어! 잘못했어! 제발, 제발 혼자만 가지마!" 유현이 승호를 부둥켜 안고 벌벌 떨고 있다. 품에 느껴지는 온기가 거짓말 같아서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안아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이 유현의 뇌와 심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승호는 가만히 유현의 하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유현의 등을 몇 번 쓸어주었다. 그것을 용서의 제스쳐로 받아 들인 유현은 "우우우--"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유현을 등 뒤에 매달고 승호가 도훈을 향해 돌아섰다. 어깨를 으쓱하는 그 동작에 창피하다거나 민망하다거나 하는 인간적인 부끄러움은 없어 보였다. "용서를 빌어? 그런 거 없어." 승호는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유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슥슥 헤집었다. "이 자식은 그저 나한테 떼 쓸 뿐이야." 어지럼증은 극에 달하고 백색으로 작열하는 햇빛은 도훈의 사고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플라멘트에서 발광하는 백열등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 마냥 지독한 눈부심에 시달렸다. 그날의 승호와 유현의 모습은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열기와 함께 마치 환각처럼 도훈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나는 왜 그런 곤란한 모습만 보게 되는 걸까..." 하얀 입김이 어두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멍하니 학원 앞에 서 있던 도훈은 승호와 유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횡단보도 건너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승호는 다 알면서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는 도훈이 못내 고마운지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민태와 진영이에겐 하지 못할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도훈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예전의 승호와 다를 바 없어보였다. 다만, 평소라면 얼굴이 새빨개질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도훈은 발걸음을 돌려 승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바람은 불지 않아 산책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조금 더 강한 바람이 불어서 복잡해진 머릿속을 날려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도훈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여어~ 이거 학생회장 아니신가!" 1차선 도로의 갓길로 부다다당-하는 소리를 내며 두 대의 오토바이가 도훈을 따라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도훈은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그곳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능글능글한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이런이런 오랜만에 보는 친구한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무시하고 걸어가는 도훈을 세준은 계속 쫓아왔다. 철제 가드레일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던 일방적인 인사는 도훈이 인도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도로에서 오토바이로 도훈을 따라가던 세준은 혀를 찼다. 옆에서는 지원이 불만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모처럼 세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기에 별다른 제지는 않고 있었다. "우왓! 얌마 오세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 뒀더니 가드레일이 끊어지는 곳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인도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서행을 한다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다. 지원은 창피해져서 더 이상 세준을 부르지 못했고 오히려 '계속 저 녀석이랑 같이 가야 하나...'라는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너무하잖아 학생회장니~임. 그래도 한때 같은 반이었는데... 나도 엄연히 동창이라구. 부반장에서 학생회장이 되더니 콧대가 높아지셨나~" 커다란 바이크를 인도에서 몰며 오세준이 말을 걸자 도훈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며 투덜댔다. 당사자인 오세준이야 욕을 먹어도 싸다지만 도훈에게까지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은 억울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실례잖아. 오토바이는 찻길에서 다녀." "동창을 외면하는 것도 실례라고. 모처럼 만났는데 찐한 대화나 한번 어때?" "너와는 할 얘기 없어." "왜 이러실까~ 윤승호와 진유현이 소재라면 조금은 얘기할 마음이 들겠어?" 침묵을 유지하던 도훈이 그제야 차가운 눈으로 흘끗 세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관심 없다는 듯이 앞을 향해 걸어갔지만 옆에서 따라오는 오토바이가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이따금 예의 없는 배달용 스쿠터가 지나가기도 하는 길이지만 역시 폭주족들이나 탈만한 오토바이가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은 꼴불견인 일이었다. "윤승호랑 같이 학원 다니나 봐? 그런 일을 보았는데도 우정을 유지하다니 역시 쿨~하시구만. 유현이랑 사이 좋게 손잡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눈에서 이글이글 불꽃이 떨어지던데 그거 증오? 아니면 질투? 그런데 쟤네들 그냥 친구사이치곤 너무 뜨겁다아~" 세준은 은근슬쩍 도훈을 떠 보았다. 이 융통성 없는 학생회장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그걸로 놀려 먹으면 얼마나 재미가 쏠쏠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악취미적인 미소를 지었다. 만에 하나 도훈이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놀라운 일. 고지식한 한도훈이 다 알면서 승호의 곁에 있다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북부지역 대표자리는 뻔뻔함으로 가리나 보군. 네 밑에 있는 녀석들이 이 꼴을 보면 참 좋아하겠어." 도훈이 겨우 한마디 열자 세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뛸 듯이 기뻐한다. "오오오~~ 알고 있었어? 북부지역...켁, 짜식들 깡패 대장자리에 너무 거창한 이름을 붙여서 발음하기 민망하지만...아무튼, 이야! 이거 감격이다 감격! 은근히 내 소식에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응? 학생회장님?" "전교생이 다 알고 있는 일이야. 호들갑 떨지마." 괜히 대꾸했다고 생각하며 도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세준의 악명이야 학생들 사이에선 유명하지만 어째서 학교를 자퇴한 세준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신의 학교 역시 세준의 지역권 안에 있으니 꼭 모르라는 법도 없다. 결국 도훈은 세준에게 신경 쓰는 에너지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가던 길을 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준은 끊임없이 떠들었다. "솔직히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친해졌다는 거 이상하지 않냐? 너는 승호의 친구로서, 나는 유현의 친구로서 이 문제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은데. 혹시 모르잖아. 네가 모르는 윤승호에 대해 내가 알고 있을지." 버스 정류장이 다가오자 인도에 사람수가 많아졌다. 정류장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주로 학생들이었고 아줌마와 아저씨, 노인도 가끔 보였는데 그들은 검은 오토바이를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혀를 차고 있었다. 도로의 갓길에서 세준을 따라오는 지원의 표정은 불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좋아좋아. 너와는 옛정을 생각해서 중요한 비밀을 한가지 알려주지. 사실 윤승호와 진유현은......" "됐어." 도훈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세준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바이크의 헤드라이트 위에 손을 살짝 얹었다. "승호에 관한 일이라면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을 거다." 그렇게 말한 도훈은 세준의 오토바이를 잽싸게 지나치더니 눈 앞의 버스 안으로 가볍게 뛰어 들었다. 버스는 마침 도훈이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문을 닫기 시작했다. "어어어? 야,야! 한도훈!!" 뒤늦게 세준이 허둥대며 핸들을 꺾었지만 정류장에서 멀뚱히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가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세준이 멍청히 보는 앞에서 버스는 검은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출발하기 시작했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도훈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준이 사람들의 상욕을 들으면서 겨우 차도로 내려 왔을 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세준아." 옆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지원이 조용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으응?"하고 멍청하게 되묻는 세준에게 지원은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지금 엄청나게 꼴사나워." "어흠. 흠!" 괜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헬멧을 만지작거리더니 "교통법규는 잘 지켜야지." 라는 둥 딴청을 피우면서 헬멧을 써 붉어진 얼굴을 가린다. 지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쯧쯧쯧" 하고 혀를 찼다. "어떡할래? 저 버스 따라갈까?" 지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제안했다. 오세준 성격에 정말 화가 났다면 끝까지 버스를 쫓아가 도훈을 흠씬 두들겨 놓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기껏 버스를 따라가 놓고 아까의 말장난을 다시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골치가 아파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준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관두자." "그래 잘 생각했다. 한도훈 같은 샌님한테는 신경 끄고 애들 있는 곳으로 가자. 가뜩이나 네가 개인행동이 잦다고 불평많은 애들인데 조금은 달래줘야 하지 않겠어?" 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세준을 바라보았다. 헬멧을 쓴 뒤통수가 까맣게 반짝거렸다. 도훈을 태운 버스가 사라진 곳을 말없이 바라보던 세준이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작게 말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름뿐인 학생회가 바빠질려면 어떤 소동을 일으켜야 할까?" 지원은 까맣고 동그랗게 반짝거리는 세준의 뒤통수를 한대 후려갈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유현은 연신 승호의 손을 조물락거리고 있었다. 버스 안은 텅텅 비었다.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행동은 눈 여겨 보지 않는 한 잘 모르겠지만 역시 공개된 장소에서 노골적인 스킨쉽을 하는 것은 승호가 싫어한다. 아까도 그렇다. 정류장까지 오면서 승호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그 허리에 손을 두르려다가 실패했다. 승호가 유현의 손을 꾸욱 짓누르며 겨울바람의 싸늘한 냉기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맞잡은 손은 차갑고 딱딱했다. 유현은 승호의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손가락을 쓰다듬고 훑고 만지작거렸다. 기회가 되면 승호의 손을 입가로 가져가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점퍼 주머니 속으로 손을 이끌자 승호가 탁-하고 뿌리쳤다. 그래도 유현은 포기하지 않는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탈 때까지 승호의 손에 집착했다. 승호가 입고 있는 황토색 더플코트의 주머니 속에 자신의 손을 쑥 집어 넣어 승호의 손을 잡아 꺼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점퍼 속으로 이끌다가 승호가 손을 빼면 손목째로 붙잡았다. 손목을 뿌리치면 다시 잡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손이 고양이 앞발로 싸움하듯 탁탁치는 와중에도 승호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겨우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고 나서야 승호는 자신의 손을 유현에게 허락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당장에라도 유현을 후려칠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유현이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승호의 손 뿐이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 마르고 딱딱한 손을 감싼다. 승호의 손등은 거칠어서 하얗게 피부가 일어나 있었고 찬바람을 쐬면 상당히 따끔거린다. 손 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그렇다. 거의 일년 반 동안 꾸준히 피부과에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의약품에 가까운 로션을 바르며 거칠어진 살갗을 진정시킨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승호는 생각했다. 이전엔 유현이 핥기만 해도 따가웠다. 핥은 자국이 마르면 피부가 당겨서 따끔거린다. 유현이 승호의 얼굴전체를 침범벅으로 만들고 자꾸 비비적대는 통에 약한 피부가 빨갛게 부어 갈라지고 심한 경우 갈라진 틈새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달려드는 유현을 저 좋을 대로 하게 내버려둔 건 역시 자신도 좋았기 때문이라고 승호는 생각했다. 차가워진 몸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이유없이 쏟아지는 스킨쉽과 애정은 부모로부터도 받지 못했다. 한참 상념에 빠져 있었을 때 승호는 문득 유현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까부터 손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손바닥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뭐라고 쓰는지 주의를 기울여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계속 반복되는 문장에 이제는 이해하지 못할래야 못할 수 없게 되었다. -섹스하자 -섹스하자 -섹스하자 승호는 무의식중에 손을 뺐다. 그제야 승호가 자신의 메세지를 읽었다고 생각한 유현은 씨익 웃었다. 나쁜장난을 준비하는 악동같이 짖궃은 미소였다. 다시 승호의 손을 뺏어 온 유현이 제 멋대로 손바닥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으로 그리는 낙서는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키스하자 -안고 싶어 -못 참겠어 도발적인 문구에 승호의 얼굴이 굳었다. 유현은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승호가 내심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기분이 좋다. 승호의 무표정한 얼굴조차도 욕정이 인다. 다리 사이가 뜨거워져 욱씬거린다. 승호의 손바닥을 입가로 가져가 길게 핥았다. 마치 이제까지 쓴 문장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싹싹 핥는다. 그렇게 서너 번 핥고 나서 손바닥 한가운데에 깊게 입술을 찍었다. 조심스럽게 받쳐든 손을 소중히 감싸며 유현은 혀끝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하자 뾰족하게 세운 물컹한 혀가 손바닥과 마찰하면서 아슬아슬한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팔 전체가 간질간질거리며 어깨까지 오싹해진다. 어깨에 이어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오싹함이 승호의 턱 근처를 닭살로 뒤덮을 때까지 유현은 같은 글을 반복해서 손바닥에 그리고 있었다. 세포가 경련하는 감각. 다이렉트로 전해지는 열기. 뒤통수가 쭈삣거리는 낯설지 않은 느낌이 과히 싫지 않다. 승호는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입가에는 기분좋은 미소가 걸려 있다.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목구멍으로 쿡쿡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유현은 승호의 손바닥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그런 승호를 뚫어버릴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유현을 바라본 승호의 눈은 탁하게 흐려 있었지만 그것이 유현에게는 더없이 색정적으로 보였다. "그래. 집에 가서 하자."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유현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짓누르듯 덮쳐왔다. 승호는 다짜고짜 키스하려던 유현의 입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막았다. "왜 집안에 불이 켜져 있지?" "급하게 나오느라 못 껐어." 행여 부모님이라도 와 계시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지만 유현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놓였다. 가끔 승호의 부모님들은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집안 청소를 하거나 반찬거리를 놓아 두고 가시기 때문이다. 승호의 부모는 아직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친구로 인식하고 있어서 사실을 말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입술...열어줘..." 유현이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승호는 그제야 자신이 이빨을 앙다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부모님을 생각하며 이런 짓을 하는 것이 달갑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곧 머릿속을 비우고 입을 열어 유현의 뜻대로 하게 두었다. 유현의 입술이 승호의 입을 삼키고 혀를 끄집어 내어 자신의 입안으로 인도한다. 승호의 혀끝에 닿은 유현의 입안은 뜨겁고 습하고 미끌거렸다. 연약한 점막이 질척거리는 액체와 함께 닿는다. 서로의 입안에서 붉은 혀가 두 마리의 뱀이 교미하듯 얽히고 설켜 날름거린다. 얼굴에 닿는 뜨거운 숨이 가빠진다. 반쯤 눈이 감겨 몽롱한 상태인 유현은 승호를 보며 욕정에 빠져 있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전화벨 소리에 승호의 신경이 분산되었다. 유현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않아 승호의 허리를 꽉 붙들고 "자동응답기니까 나중에 연락해도 되잖아."하고 속삭인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손은 이미 더플코트의 안으로 들어가 승호의 바지 지퍼를 더듬어 찾고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있던 터라 이대로라면 문 앞에서 일 치르게 생겼다. 문 앞에서 일 치르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승호에겐 자동응답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라면 더욱 그렇다. [엄만데...승호 아직 안 들어 왔니? 아직 학원에서 오는 중인가 보구나....] 승호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자 얼른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 갔다. 상대가 어머니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유현도 굳이 승호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대충 코트를 벗으며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집어든 승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유현도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어머니. 학원에서 방금 들어 왔어요."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 유현의 눈에는 웃는지 마는지도 모를 승호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모자가 나누는 보통의 대화. 그러나 유현은 흐릿할 뿐인 승호의 미소를 구분할 줄 안다. 기뻐서 웃는 얼굴, 씁쓸한 미소, 열락에 들떠 쾌락에 젖은 입가가 올라가는 모양.... 그리고 지금, 승호의 얼굴에서 행복해 하는 어린애의 모습을 읽어냈다. 승호의 어머니는 종종 자신의 아이가 갑자기 어른스러워졌다고 서운해 했지만 어머니를 대할 때의 승호가 얼마나 어린애 같아지는지 유현은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그런 모습 때문에 조금은 승호의 부모에게 질투를 느낀다. "아, 유현이도 같이 있어요....예 많이 좋아졌어요." 어머니와 대화하는 승호에게 다가가 그 등을 끌어 안고 얼굴을 부볐다. 승호는 조금 놀랐지만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 앞에서는 어떤 수상한 행동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교육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 교육의 성과는 꽤 효과가 좋았다. 유현은 승호의 등에 뺨을 대고 그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것을 즐겼다. 팔 안에 들어와 있는 딱딱한 몸이 세상의 전부였고 등을 통해 전해지는 낮은 목소리의 울림이 뇌 속을 꽉 메운다. 유현은 아랫도리가 욱씬욱씬 쑤시는 감각에 허리를 비틀었지만 아직 승호의 통화가 끝나지 않아 가만히 기다렸다. [엄마가 못 챙겨줘서 미안하구나. 식사는 잘하고 있지?] "예 걱정 마세요. 지난번에 가져다 주신 반찬도 아직 많이 남았구요." 승호의 어머니는 일에 대한 욕심도 많고 평소에 자식을 잘 챙기는 살가운 타입은 아니다. 다만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한 승호와 따로 떨어져 산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하다. 보호자 없이 유현과 둘이 사는 것도 달갑지 않다. 어차피 승호와 한집에 살아도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떨어져 있으니까 쓸데 없는 걱정만 깊어 가게 된다. [이번 주말에도 집에 올 거지? 어째 주말가족이 된 기분이다 얘. 모처럼 외식할 생각이니까 어디서 먹었으면 좋겠냐고 아빠가 묻던데?] "아, 외식이요? 그러고 보니 외식도 오랜만이네요. 음...어디가 좋을까요?" 통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유현은 투덜댔지만 승호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경기가 나빠 화랑도 그만두고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시는 어머니였다. 특강기간이라 수업이 열시까지 있을 텐데도 모처럼 짬을 내어 연락해주는 전화, 귀찮다고 끊어버리기엔 그 전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도 따뜻하고 안락했다. 어쩌면 등으로 전해지는 유현의 체온 때문에 더욱 기분이 따뜻해지는 건지도 몰랐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티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승호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고 더운 숨을 내쉬는 유현의 아랫도리는 아직도 단단해져 있다. 끙끙대면서 승호의 허리에 문대는 모양이 참기 힘들어 보였지만 승호는 가만히 통화가 끝난 수화기를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현이 승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점퍼를 벗어 던졌다. 하체를 꽉 조이는 청바지의 뻑뻑함이 조금만 움직여도 자극이 되어 터질 것 같다. 승호의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켜 버린다. "역시 기분이 안 좋아." 유현에 의해 바지 버클이 풀어지면서 승호는 작게 읊조렸다. 거친 호흡과 서두르는 손길은 유현이 지금 꽤나 흥분상태라고 말해주었지만, 유현이 흥분하거나 말거나 승호는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승호가 긴 통화를 하는 동안 참은 만큼 쌓인 유현은 성급하게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뒤에서 안은 채 승호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 넣는다. 엉덩이를 더듬어 찾는 손이 조급하다. 승호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만." 승호는 엉덩이께에 밀고 들어오려는 유현을 밀쳐내고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그 찡그린 얼굴에서 곤혹스러움과 배출되지 못한 욕구에 의한 짜증이 동시에 떠올랐다. "너, 이렇게 무작정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아랫도리를 내놓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는 유현에게 말했다. 찌푸린 미간과 흐려진 눈동자가 원망을 담고 있었다. 그 눈이 '전화 받는 동안 가만히 있었잖아!'라고 투정 부리는 것 같아 한숨이 나온다. "진정해. 준비도 없이 밀어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하아...좀 봐줘. 아까부터 터질 것 같았다고...." 흐릿하게 흔들리는 유현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천천히 뻗은 유현의 손이 우악스럽게 승호의 어깨를 쥐었고 습기를 머금은 한숨이 얼굴에 와 닿는다. 유현은 붉게 물든 눈가를 가볍게 휘며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아니면...네 손으로 해줄래?" 열기를 담은 두 눈이 코앞에서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승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 유현은 뚫어져라 승호의 눈을 바라보며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승호의 손이 붉게 충혈된 그곳에 닿았다. 욱씬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유현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하아..." 코끝에 느껴지는 한숨과 어깨를 움켜 쥔 손아귀의 힘이 유현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말해주었다. 유현의 얼굴이 쾌락으로 일그러지고 못 참겠다는 듯이 좌우로 머리를 흔들 때마다 이마에 비벼지는 진동이 승호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손 안에 쥐고 있는 단단한 물건은 별다른 요령 없이 슥슥 훑은 것만으로도 꿈틀거리며 맥박쳤다. 승호는 자신의 손놀림에 따라 희롱 당하는 유현의 표정에 희미한 희열을 느꼈다. "으윽-!" 붉은 혈관이 비치는 그곳에서 하얀 액이 뿜어져 나왔다. 승호는 어깨를 쥐어뜯는 악력에 살이 떨어져 나갈 만큼 아파서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유현이 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좋다. 약간 벌린 입에서 한숨과 신음이 새어 나오고 붉게 물든 눈가가 쾌감으로 짙게 변하면 조용하던 승호의 내부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착각이 든다. 유현에게 욕정한다. 그것은 무척이나 기묘한 느낌이었다. "소파는 괜찮은데...옷이 더러워졌네." 승호는 혀를 차며 티슈를 찾았지만 탈력감에 빠진 유현이 꽉 끌어 안았고 덕분에 승호의 옷까지 더러워졌다. 숨을 몰아쉬는 유현에게 빨래거리가 늘었다는 판단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침대로 갈래?"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유현이 물었다. 하지만 승호는 아직도 아까의 통화가 마음에 걸린다. 자신이 이렇게 사는 것을 부모님에게는 가능하면 최대한 늦게까지 알리고 싶지 않다. 부모님껜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전화통화가 끝나자마자 유현과 이런 짓을 해버렸다. 자신은 정말로 부모님께 미안한 걸까? 승호는 가만히 팔을 들어올려 유현의 정액이 묻어 있는 오른 손을 내려다 보았다. "나쁘지 않아." "응?" 승호의 중얼거림에 유현이 묻는다. 귓불을 깨무는 이빨을 느끼며 승호가 다시 중얼거렸다. "너를 만지는 거 나쁘지 않아. 꽤 좋다고 생각해." "이런, 방금 한발 뺐는데 또 반응이 오는 걸?" 귓가에 쿡쿡거리는 음성이 나즈막하게 울린다. 맨 살을 훑어 내리는 손이 따뜻해서 기분은 좋다. 부모님의 신뢰를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죄송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가슴이 아프지는 않다. 이상한 일이다. 마치 물건을 훔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알지만 훔치고 나서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유현이 승호를 방안으로 이끌었다. 침대로 가는 와중에도 옷을 벗기고 키스를 하고 유혹하듯 웃으며 승호의 환심을 사려는 모습이 아이 같았다. 얼굴 윤곽을 덧그리듯 안타깝게 터치하고 등 뒤에서 끌어 안으며 어쩔 줄 몰라한다. 겨우 침대 앞까지 왔어도 그 앞에 서서 몇 번이고 승호의 입술을 삼켰다. 이 따뜻한 육체가, 이렇게 애정을 퍼붓는 입술이, 한때 자신을 때리고 능멸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나쁘다. '아 그래, 그땐 끔찍했었어.'라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지만 아프게 타오르던 당시의 증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잔인했던 유현을 미워했지만 친구였던 유현을 좋아했다. 다정했고 미쳐버렸던 유디스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따끔거린다. 하지만 발정하는 몸을 주체 못해 어떻게든 승호에게 매달리는 유현의 모습도 그다지 싫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조금 귀엽다. "제일 이상한건 나야......" 승호는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말을 읊조리며 작게 웃었다. 진유현이 그럭저럭 현실을 인식하기까지 거의 반년이 걸렸다. 다시 사회로 복귀하기엔 아직 문제가 많았지만 어느 정도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져서 의사와의 상담에도 순순히 응했다. 진의원은 조심스럽게 아들과의 대화를 여러 번 시도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봄, 유현의 아버지는 승호와 함께 유현을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진의원의 자택은 각종 인사들이 오가는 집이었고 고용인들과 다른 가족들의 입장이란 것도 있었다. 가끔 기자도 찾아드는 판국이어서 유현을 언제까지고 집에 둘 수 없었기에 생각해낸 고육지책이었다. 물론 유현의 증세가 굉장히 호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성년자 둘이서만 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승호네 부모와 함께 유현을 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골로 보낼까 해외로 보낼까 고민하던 진의원은 결국 둘에게 따로 아파트를 내주는 결정을 했고 그 결과는 의외로 좋았다. 혼자서는 집 앞 슈퍼조차 못 가던 유현이 주말이 되면 승호와 떨어져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발작하지도 않았고 중간중간 승호가 전화를 해주면 혼자 있어도 일주일정도는 버티는 듯 하다. 가끔 가위에 눌리기도 하고 악몽을 꾸었다며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날 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된지 거의 9개월이 지났다. 일견 유현의 모습에 변화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유현에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승호가 교과서를 들이대어도 공부하면 뭐 해줄 거냐고 대가를 요구하는 식이다. 사고가 일어난지는 1년 반이 채 안 되지만 햇수로는 2년이 훌쩍 넘어가 이제 곧 3월이면 승호는 고3이 되는데 유현만 그 자리에 멈춰있다. 유현에겐 장래에 대한 불안도, 자신의 모습을 사회에서 어떻게 바라 보는가 하는 것도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엘 가고 유학을 가든 뭘 하든 사회에 나가 자신이 이루고픈 어떤 것을 하겠다는 미래지향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단순히 눈 앞의 승호에게 욕정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전부였고 승호만이 유현을 사회와 연결해 주는 유일한 고리였다. 예전에는 인생을 몇 년 단위로 나누어 계획을 세워놓았었지만 지금은 그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아찔한 승호의 냄새가 없으면 자신은 어딘가의 나락 속으로 추락할 거라는 두려움만이 엄습해서 이 냄새를 어떻게 하면 더 오래 붙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그에겐 전부였다. 마약 같았다. 그 냄새가 몽롱한 의식의 저편에서 유현을 현실로 이끌어 들이지만, 동시에 올가미처럼 승호에게 속박되도록 만든다. "하아압..." 한껏 호흡을 들이 마시는 유현의 태도가 본드를 흡입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목덜미와 겨드랑이, 심지어 사타구니까지도 코를 킁킁거린다. 승호는 학원에서 돌아온 후 자신이 씻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했지만 진유현 앞에서 사소한 것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엄청 귀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추웠다. 하지만 그 위로 뜨겁게 덮쳐 오는 몸이 있기에 별로 불만은 없었다. "배 안 고파?" 승호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승호의 몸을 집적대던 유현은 심드렁한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마 없는 뱃살을 한입 가득 깨물었다. "...테크닉의 부족함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군." "걱정 마. 너 꽤 잘하는 편이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돼." "이게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냐 이게?" 유현이 반쯤 발기하다 만 승호의 물건을 쿡쿡 찌르면서 언성을 높였다. 승호는 버석버석한 머리를 두어번 긁더니 "거기에 손도 안 대고 그 정도 일어서게 했으면 용한 거지."하고 주억거린다.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승호가 얄밉다. 유현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벌떡벌떡 서 있는 자신의 분신이 오늘따라 주책맞아 보였다. 흥분과 기대감으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자신의 몸과는 달리, 차갑기만한 승호의 체온이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린다. "하아....이 발기부전 환자 같으니라고..." 유현이 기분 상했다는 듯이 인상을 쓰면서 입을 비죽이 내밀지만 승호는 "글쎄, 발기부전은 아니래도."하고 대꾸한다. 낮게 투덜거리던 유현은 곧 입을 다물고 승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살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약하게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입술을 미끄러뜨려 평평한 가슴에 조그맣게 솟아 올라 있는 기관을 입에 머금고 혀로 굴렸다. 승호의 가슴을 주무르고 허리와 엉덩이, 배를 정신없이 쓰다듬어도 유현의 기분은 채워지지 않는다. 좀 더 뜨겁고 격렬하고 축축한 것을 원했다. 그래서 키스를 했지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 동굴 속을 헤매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답답함 뿐이었다. 승호의 목젖 안 더 깊숙이, 식도를 타고 그 내부에 혀를 미끄러뜨리고 싶었다. 귓가의 연약한 뼈를 잘근잘근 씹고 구멍 안으로 혀를 뾰족이 세워 집어 넣어도 고막엔 닿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승호의 엉덩이 사이를 더듬어 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봤자 직장 안에서 바둥댈 뿐이었다. 표피만 핥는 것은 오히려 갈증을 불러 있으켰다. 더 깊은 곳, 내장까지 샅샅이 자신의 손과 혀로 주무르고 맛보고 싶다.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르면 진심으로 승호의 배를 갈라 그 안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정말로 그런 행동을 할 리는 없지만 유현은 가끔 승호의 피부껍질 아래를 만지는 상상을 하며 희열에 빠진다. 정신없이 승호의 몸을 핥던 유현은 그 가슴에 귀를 대었다. 희미하게 울리던 맥박이 점점 또렷해졌다. 심장은 뜨겁고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면서 쿵쾅쿵쾅하고 천지를 진동시킨다. 저 건조하고 무딘 승호에게도 격렬하게 맥박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유현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 뜨거움에 닿고 싶어서 몇 번이고 혀와 입술로 흉부를 핥았다. "여기가 심장......" 걸신들린 듯 물고 빨던 입술이 서서히 미끄러져 명치 위로 이동한다. "여기가 위장..." 오르락 내리락하는 승호의 배가 마음에 드는지 옆구리를 쓸어 내리던 손이 한층 더 부드럽고 간지럽게 몸 위를 배회한다. "여기가 폐..." "여기가 대장..." 배꼽으로부터 일직선 아래로 혀를 길게 미끄러뜨리고 아랫배를 이빨로 자근댄다. 우묵한 배꼽에 혀를 넣고 돌리다가 손가락을 찔러넣어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쳤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 가면서 승호가 흠칫하고 겨우 반응을 보이자 혀를 굴리던 유현이 미소 짓는다. "여기가 방광......" "흐음...생물공부라도 하는 거야?" 아랫배 근처에서 입술을 비비는 유현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으면서 물었다. 음경의 뿌리 부분을 이빨로 깨무는 것이 과히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예민한 곳에 닿는 유현의 뜨거운 한숨이 얌전히 숨어있던 아슬아슬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전부 다 끄집어내서......하나하나 입맞추고......품에 안고 얼굴에 부비고..... ......그러고 싶은데 닿질 않아. 만질 수 없어..... 배를 가르고 뼈에 구멍을 내어서 더 깊게 들어 가고 싶은데...."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냄새에 취하고 살갗의 감촉에 취해 정신없이 몸을 부대껴 온다. 승호는 가만히 그 위험한 말들을 들으며 유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유현은 가끔 한창 섹스에 빠져 있을 때 악취미적인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쉽사리 관계를 이어 나가지 못할 말들은 등줄기가 서늘해질 정도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호는 유현의 말에 위협을 느끼지 않아서 순순히 그 몸을 내어 준다. 유현의 폭언은 섹스 중 엑스터시에 이르러 '죽여줘!'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유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가는 하루하루가 공포 영화일 게다. 그래서 승호는 유현이 뭐라고 하든 자기식으로 받아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네가 핥은 내장들이 욱신거리는 걸." 승호의 배꼽 근처에서 혀를 굴리던 유현이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스윽- 하고 몸 위로 덮쳐 오는 유현의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 왔다. "무슨 뜻이야?" 양 팔꿈치로 체중을 버티며 승호의 얼굴을 팔꿈치 안에 가두었다. 겹쳐오는 유현의 몸은 배 아래부터 승호와 맞닿아 있어서 서로가 숨 쉬는 것도 피부의 울렁임을 통해 확연히 느껴졌다. 이미 부풀어서 선단에 액을 흘리는 유현의 것이 가랑이 사이를 뜨겁게 달구며 승호의 사타구니 사이를 비비적거리며 들어온다. 승호는 열기로 흐릿한 유현의 눈을 보면서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심장을 핥으면 갑자기 고동이 빨라져." 잠시 이해를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 보던 유현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네가 폐를 핥으면 숨이 가빠지고...." 작고 거친 입술이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유현을 끌어들인다. "네가 위장을 핥으면 욱씬거리며 경련이 일어." 눈을 가늘게 뜨고 승호의 말에 애써 태연하려 노력해 보지만 달구어질 대로 달구어진 사타구니가 더욱 팽창했다. "대장을 핥으면 아랫배가 쑤시지. 연약한 점막들이 긴장을 하면서 꿈틀거리는 것은 네 녀석이 건드렸기 때문이야." 승호의 말을 이해한 유현의 몸이 가볍게 경련한다. 어떤 오싹한 한기 같은 것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유현이 하체를 비비적거리며 "끄응" 하는 신음성을 흘린다. "생각해봐. 네 혀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혈액이 꿈틀거리며 흘러가고 있다고. 네가 만지는 피부 아래로 핏줄과 힘줄이 경련하고 맥박이란 맥박은 모두 긴장해.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네 온기, 혀의 축축함, 입술의 까슬거림. 그 모든 것 때문에 뼈는 삐그덕거리고 근육들은 팽팽히 수축되지. 이래도 내장에 닿지 못한다고 투덜거릴 참이야?" "으으으...윤승호 너어어..." 국어책 읽듯이 무덤덤하게 말을 하는 승호의 태도가 오히려 더 욕정을 불러일으켰다. 듣는 것만으로도 귀의 안쪽이 오싹오싹해서 뇌까지 그 울림이 전달된다. 얄미울 정도로 태연한 그 모습에 굴욕감과 정복욕을 동시에 느낀다. 유현이 못 참겠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콘돔을 찾았다.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 탓에 승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승호의 뒤를 풀어 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손가락을 놀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아프다고 항의하는 찡그린 표정이었다. "천천히 해. 아프면 기분 나빠." 분위기라고는 씨알만큼도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이었지만 열기로 눈가가 축축히 젖어든 유현에게는 승호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극제였다. 설령 "오늘은 날씨가 맑다."라고 말해도 가버릴 지경이었다. 윤활제를 바르고 손가락으로 입구를 풀려고 해도 마음이 조급하니 서투르기만 하다. 앞부분을 슬쩍 넣어 보다가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에 눈 앞이 핑 돌았다. 저 무드 없는 윤승호의 몸 안에도 이런 뜨거움이 있다고 생각하자 하체가 욱신욱신거린다. 슬쩍 안으로 밀어넣으면 어딘가 불편한지 묘하게 얼굴을 찌푸리는 승호의 표정이 눈에 들어 온다. 유현은 달뜬 한숨을 내뱉으며 슬쩍 상대의 음경도 쥐어주고 고환도 주물러 주면서 겨우 승호의 것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씩 붉어지는 승호의 얼굴이 좋다. 뒤로 밀어넣는 불편한 감각에 인상을 쓰면서도 엉덩이를 뒤척거리는 신체가 미치도록 좋다. 정성을 들여 만지면 '네 정성이 갸륵하니 한번 흥분해 주지.'라고 거만떠는 듯, 겨우 반응을 보이는 승호의 아들놈도 얄밉지만 귀여워 죽겠다. 특히 오늘은 승호가 내장 어쩌고 하는 바람에 더 흥분했다. 시작은 자신이었지만 자칫 위험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 수도 있었던 파괴적 욕구를 승호의 몇마디가 쾌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뜨겁고 격렬하고 강하게 수축하는 내부가 유현을 감싸고 있었다. 더 깊이, 내장까지 맛보고 싶다던 욕구는 더할 나위 없이 아찔한 감각으로 빠지며 유현의 전신을 녹여버린다. 이렇게 계속 있고 싶었다. 승호의 안에서 허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며 뜨거움을 토해내고 싶었다. 유현이 하체를 밀어 붙였다.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얼굴을 핥고 허리를 흔들며 승호의 안에 자신을 부볐다. 눈을 감고 가능한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승호의 몸이 음경을 쓸어 내려 주자 약간 경련을 일으킨다. 딱딱한 등을 어루 만지고 입술을 찾아 혀를 감았다. 안달하듯 조급하게 움직이는 유현이 격렬하게 쾌락을 찾아 움직였다. 문득 승호가 느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르르 경련하는 입가에 절정의 미소가 어린다. 짤막한 탄식이 귀를 통해 스며들어 뇌가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 승호의 절정과 함께 엄청난 압박으로 조여드는 새빨간 내부가 유현의 것을 빨아들인다. "흐아아아아....." 하체만 따로 분리되어 사라지는 듯한 뻐근함 속에서 쾌감으로 치달은 머릿속이 하얗게 부서졌다. 새벽이 밝아 오는 창문을 바라보며 유현은 멍하니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제는 초저녁부터 질펀하게 일을 벌리고 나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격렬한 정사 후에 나른해진 몸을 씻고 저녁도 먹고 TV도 보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내내 승호가 했던 말이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아 유현은 줄곧 안절부절못한 상태, 결국 잠자리에 들었을 땐 또 한번 추근댔다. 밤새 열락에 빠진 것은 자신 뿐인 것 같았다.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 버릴 때까지 승호를 안았다. 승호가 피곤하다고 짜증을 부렸지만 오후의 악몽이 되살아나 더욱 거칠게 몰아 붙였다. 섹스가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승호는 꾸벅꾸벅 졸았지만 그런 모습에 가슴이 따끔거리면서도 흥분이 가라 앉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냉담하게 응시하는 눈조차도 유현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승호가 의도하고 자신을 흥분시키려고 작정하면 그야말로 골로 간다. 그 자신만만하고 프라이드 높았던 진유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성이라는 놈이 뇌에서 다리 사이로 이동한 것 같았다. 뇌수가 썩어서 그 짓 하는 생각밖에 없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다. 정신이 몽롱하고 시야가 안개에 가려 모든 것이 흐릿하던,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던 그때 보다는 스스로의 의지로 승호를 찾는 지금이 훨씬 낫다. 승호에게 정신없이 매달리던 그 당시, 성적으로는 오히려 담백해서 몸을 부비고 키스를 하는 것이 전부였지 사정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쾌락을 찾기 보다는 승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서 가족도 친구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안중에도 없었다. 이렇게 걸신들린 듯이 섹스를 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반년간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사흘이나 나흘에 한번 꼴이라 유현은 불만이지만, 승호는 페팅이라면 얼마든지 상대해주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수억의 정자들이 버려진다.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고 계속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유현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유현은 침대 위에 누워 조용히 자고 있는 승호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살그머니 등 뒤에서 끌어 안아 보지만 많이 피곤했는지 깨어나지 않는다. 악몽을 꾼다. 언제까지고 옆에 있어야 할 승호가, 어느 순간 없어진다는 공포감이 들기 시작하면 악몽은 반드시 찾아 온다. 그것은 붉고 메마른 꿈. 거친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미친듯이 헤매는 지옥의 반복이었다. 사방에 붉은 모래가 휘날리는 사막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눈앞에 승호가 달리고 있었다. 승호는 낯선 옷차림을 하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을 친다. 이따금 공포에 찬 표정으로 등 뒤를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을 뻗는 유현을 피해 광활한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몸을 감춘다. 그러면 자신은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이 절규하면서 텅 빈 대지를 헤매고 헤매고 헤매다가 말라 죽어 간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주위의 가구를 부수고 간호원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강제로 침대에 묶여 발광하고 있었다. 처음엔 환각의 형태로 나타났다. 연한 베이지톤의 벽지와 상아색 가구들로 이루어진 지극히 모던한 방과, 사막에서 도망치는 승호의 뒷모습이 마치 텔레비젼의 채널이 혼선되듯 겹쳤다. 현실과 박리 되는 감각에 치를 떨면서 메마른 환상만이 남아 눈을 뜨고 있어도 깨지 않는 끔찍한 꿈이 반복되었다. 잡힐 듯 말듯 안타까운 감정. 저 승호가 사라진다는 불안감. 종국에는 혼자만 남아 울부짖게 되는 깊은 고독함과 외로움. 지평선이 시커먼 산맥으로 둘러싸인 붉은 사막의 감옥에서 영원이 혼자라는 미칠듯한 공포가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하면 꿈과 현실의 경계가 없어지면서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게 된다. 그러한 발작은 당시 유현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사고 후 약 석 달 간의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다. 그 시간 내내 악몽과 신기루에 시달렸던 것 같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다 보던 아버지의 얼굴과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제하의 모습을 봤던 것도 같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안식을 찾았던 것은 승호의 차가운 손. 따뜻한 품. 나른하게 들리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유현은 승호가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 머리카락 안에 손을 넣어 쓸어보았다. 짧고 뻣뻣해서 촉감은 별로였지만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예전의 결 좋던 머리카락을 떠올리니 왠지 안타까워서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맞추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짓은 절대 못했을 거야.' 승호를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발정하던 때가 있었다. 두려움과 의아함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떠올리면서 밤새 자위하던 때가 있었다. 그 몸뚱어리의 피를 보며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극상의 쾌감이었다. 최악이었다는 것은 알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용서를 받아서도 안 된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승호가 자신에게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가 승호에게 버림받는 날이라고 느끼며 유현은 미간을 찡그리고 몸을 작게 떨었다. 계속 미워하고 증오해도 상관 없다. 옆에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욕구에 응해주는 승호가 거짓말 같아서 한동안 잊고 있던 악몽을 꾸는지도 몰랐다. 가만히 자고 있는 승호의 맨 어깨에 입을 맞췄다. 환상이 아닌 실체를 가지고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을 현실이 여기에 있었다. 의심하면 안 된다. 승호가 언제까지고 자신의 옆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했고 또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발작이 줄어 들면서 뜸해지던 악몽은 의심을 하는 순간 찾아와 자신의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몰고 갈 것이다. 사고 후 처음 반년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이후의 생활도 정상적인 생활은 아니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인간의 몫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후의 일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해 놓지 않았다. 승호와 이대로 계속 있기 위해 어떠한 사전 작업을 해 놓은 것이 없다. 천천히 유현의 뇌가 앞날을 위해 회전이란 것을 시작했다. 사고하고 판단하고 계산하는 과정. 다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했을, 아니 예전의 진유현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자신의 잇속을 위해 움직였을 머리를 십오 개월 만에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봐 줄까?" 기분이 좋은 듯 싱글싱글 웃으며 유현이 승호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뒷덜미에도 키스를 하고 귓가에도 마른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그래도 깨어 나지 않는 둔한 친구를 안고 유현은 중얼거렸다. "공부해서 같은 대학에 가자. 재수를 해도 상관 없어. 아버지가 나를 유학 보내려고 하면 너도 같이 가는 거야. 군대도 안 보낼 거야. 이제 다시는 네가 사라지는 악몽을 꾸지 않도록 내가 직접 나설 거다. ......그러니까......제발 아무데도 가지 말아..." 애원하듯 승호의 등을 끌어 안았다. 품 안의 온기와 냄새가 세상의 전부를 꽉 메우는 기묘한 충족감에 빠져 들었다. 그것에서 더 없는 안락함을 느끼고 유현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겨울의 아침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아마 유현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각인되어 있을 거야. 윤승호, 네가 만든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진득한 감정들이 현실로 이동하면서 유현이의 정신세계에 큰 타격을 준 것 같아. 생명수에 빠졌던 것도 주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겠지. 유현이 너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지금의 유현은 너에 대한 애정보다는 네가 도망가지 못하게 붙드는 데에 모든 것을 걸고 있어. 너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감이 유현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고 그것이 유현에게 내재된 가장 큰 공포,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공포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 그런 유현이 과연 정상으로 돌아 올 수 있을까? 어쩌면 겉으로는 정상적으로 보여도 속은 완전히 비틀어진 것이 아닐까? 아저씨는 유현이가 점점 나아지는 것 같다고 기뻐하시지만 녀석이 생각하는 거라고는 전부 승호 너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과연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이제는 나도 너희 둘에 관해선 뭐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럴 자격도 없고. 하지만 그냥 옆에서 지켜 봐도 괜찮을까? 너희들이 어떻게 앞날을 꾸려 가는지 보고 싶어. 통찰자가 아니라 친구로서, 유현의 친구가 아니라 승호 너의 친구이기도 한 김제하로서.... End. ==================================================================================